흘렙은 잠시간 시간을 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며칠 동안 아냐를 만나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지만, 적당한 단절은 오히려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대본은 그가 지시한 주제와 방향성에 따라 직원들이 작성한다. 그는 방송에 들어가기전 한차례 회의와 검토를 끝마친 뒤 자리에 앉고 자신의 머리속에, 그리고 프롬프트에 올라오는 문장들을 읽었다.
“국방은 국가의 기본입니다. 국방이 있어야만 국가는 생존할 수 있고 그 국방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제대로된 국방을 수행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외적을 상대로 맞서 싸우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수호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이 동원되는 것은 오직 외부의 적을 상대해야할 때거나 내부의 적성 세력이 국가를 차지하기 위한 반역을 저지를 때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흔한 일이 아니며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히 발 뻗고 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국가의 군대가, 우리 군대의 군인들이 외부의 적을 상대로 우리 국민들을 목숨바쳐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힘을 위시로 우리 국민에게 손을 뻗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밤이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화요일, 한 보육원에서 우리 민스크 수도 인근의 군 부대와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흔한 대민지원이었죠. 거기에 아이들은 한손 거들며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봉사에 따뜻함을 느꼈고 아이들은 자신의 선행에 대한 평가를 받으며 충실함을 느꼈죠. 그러나 정작 악마는 우리의 수호자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흘렙은 악마라는 표현을 쓰며 조금 뜨끔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본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했다.
“3명의 군인이 15살의 어린 소녀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그들은 소녀를 외진 곳으로 데려갔고, 그녀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녀는 소리지르려 했지만 화약과 기름 냄새가 밴 억센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그녀의 옷은 거추장스럽다는듯이 벗겨졌고 발버둥치는 팔다리는 제압당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3명의 군인에게 자신의 성을 유린당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흘렙은 골반을 조금 뒤로 당기고 몸을 앞으로 밀었다. 스스로 말하면서 흥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 눈에는 좀 더 보는 이에게 몰입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경찰에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녀에게 협박을 했을 수도 있죠. 총기를 다루고 대검을 소지했으며, 군사훈련을 받는 그들의 신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를 지키는 군인을 시민을 지키는 경찰에게 신고하는 아이러니함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결국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언론사에 제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연히, 익명으로요. 우린 그녀의 신분을 보호할 것이고 보장할 것입니다.”
개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문장에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할 군인들이 우리 국민을, 그것도 어린 소녀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의 군대일까요? 어쩌다가 이렇게 군 기강이 해이해졌고 말썽 부리게 되었습니까? 해마다 군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는 늘어만갔고 작년만 해도 군납비리로만 17명이 기소당했습니다. 식사의 질은 점차 저질이 되어갔고 부조리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합시다. 부조리는 단 한번도 줄어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군대는..”
점차 고조되어가는 분위기를 느낀 흘렙은 자신의 말솜씨와 문장력에 희열을 느꼈다. 이미 몇번 읽어본 대본은 그의 머리속에 들어 있었고, 방송 도중 즉각적으로 몇몇 문장을 추가하거나 탈락시켜 더욱 더 문학적인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그에게 주어진 자율성이었고 송출 시간이 다소 자유로운 인터넷 플랫폼 기반이기에 그러한 각 파트별 시간 계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흘렙은 그렇게 호소력 있는, 적어도 그렇게 느끼는 논리적인 문장들을 열성적으로 풀어놓으며 대중들을 가르쳤다. 무지한 이들은 배워야할 것이고, 깨어난 자들은 더 알아야 한다. 자신은 피리부는 사나이이며 무지와 구태에 도전하는 돈 키호테이다. 이길 수 없더라도 벽돌 몇개를 뽑아낼 수는 있겠지. 그 벽돌 한장이 물레방아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한 발자국이라도 좋으니,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길 바랬다. 아니, 남을 것이다.
그가 열변을 끝내자 그의 팬덤은 그의 문장력과 논리에 감탄했다며 칭송을 했고, 후원금을 날렸다. 무엇이 됐든 공적인 영역의 부정부패와 비리, 낭비와 비효율을 공격하는 것은 성숙한 시민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공무원이나 군인은 그 특수한 지위 덕에 언제나 쉬운 상대였다. 세금받아 일한다는 이유로.
누구나 비판할 수 있고 누구나 정답을 짚기 쉬운 문제를 상대로는 누구든 강력한 공격자가 될 수 있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 아니, 그러기 쉬웠다. 그걸 단지 있어 보이는 말빨로 포장했을 뿐, 흘렙의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얼치기 진보들의 아이돌이었다. 그 덕분에 군인들의 성범죄가 이슈가 되었지만, 정작 그의 방송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더 많은 관심과 칭송을 받는 것이었다.
***
예조프는 지금 분노 속을 헤엄치는 중이었다. 그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그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키릴로프, 올로프, 자핀스키. 앞으로 나와.”
그는 중대를 사열 중이었다. 그 이유는 군사 훈련이 아니라 책임추궁, 아니. 린치를 위해서였다.
“개새끼들. 어린애를 건드려?”
세 군인은 수치스럽다는 얼굴과 억울하다는 얼굴이 함께 드러났다. 굳이 따지자면, 억울함. 아니, 분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모두 들어라. 저 세놈은 지난 대민지원 당시 봉사활동 왔던 보육원의 어린 소녀를 건드렸다. 무참하게 강간했다지. 자, 봐라! 누구 저런 놈들을 전우로 둘 수 있겠나?”
그 답지 않은 감정적인 대응이었지만, 그만큼 혐오스러웠다. 요 며칠 동안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부담 때문에 그는 더욱 잔혹했고, 혐오스러운 쓰레기가 자기 휘하 장병이라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런 대접을 받을만했다. 단순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말이다. 이놈들 때문에 내외부의 관심이 집중되어버렸다는 점까지 문제였고.
“앞으로 이 빌어먹을 놈들은 모든 작업과 일과에서 제외한다. 식사와 화장실을 제외하면 어디에도 움직이지 말고 쳐박혀 있도록. 누구도 저놈들에게 말걸지 말고 시키지도 마라.”
“억울합니다!!”
그 중 하나가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의 해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예조프는 앞으로 튕겨나가 그의 배를 군홧발로 찼다. 거의 찍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걷어찼고 뒤로 튕겨난 군인은 배를 감싸고 꺽꺽 거리며 침을 흘렸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마치 내장이 터진 듯한 격통에 몸을 떨어댔다. 그 모습과 분위기 때문에 해명하고자 했던 병사들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그저 분노와 억울함, 이런 수치스러운 조리돌림에 얼굴만 붉어질 뿐이었다.
“너희들에게 명예라는 게 있다면 목숨으로 갚아라. 나였다면 그랬을테니.”
그들은 대업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거사 당일 영내에 있을 것이다.
“이봐! 예조프 중대장!”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부른 남자의 뒤에는 본 적 없는 얼굴의 남자들이 위압적인 분위기로 서있었다.
“그놈들 데려와!”
상부에서 보낸 인물이며, 군 검사로 임명된 군 법무관과 감찰관이었다.
예조프는 급격히 스트레스가 심해지는 걸 느꼈다.
***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라 보는가?”
식사 중인 바실리의 질문을 서서 받은 명설은 가볍게 답했다.
“안달나게 만들어야죠.”
“안달이라.”
명설은 필요하다면 바실리에게 국방부장관 등 금제에 걸린 이들을 동원하여 상황을 만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흘렙은 신나서 군을 물어뜯을 것이고, 군은 이 사건을 최대한 축소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런 논란을 일으킨 병사들에 대한 처벌은 하겠지요. 법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조사와 감사는 안드레이 예조프를 피곤하게 만들 것이고 쿠데타 계획의 실행을 위한 판단을 어렵게 할 겁니다. 군사행동은 해야하지만 계속해서 미뤄지면 흐지부지된다는 걸 알 것이고 결국 타이밍만 재고 있겠죠. 그에게 적절히 기회를 준다면, 가령 이번 사건은 물론 상급부대의 감시와 통제력이 약해진다면 그는 행동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데 때마침 며칠 뒤 상급부대 장군이 생일을 맞이했더군요.”
바실리는 습관적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계획에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럼 흘렙은?”
“쿠데타 직전 관련 정보를 제보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생각보다 더 멍청한 게 아니라면 보낸 메시지를 이해할 겁니다. 계획대로 움직여준다면 가장 먼저 쿠데타 사실을 알린 언론인이 될 것이고, 쿠데타 진압의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겠죠.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진보 성향답게 일리야 정부를 옹호하겠죠. 대중선동을 위한 말로 쓸 수 있습니다. 그에게 메이저 방송사의 앵커 자리를 줄 수 있을 겁니다. 마련한 증거는 그를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재료가 될 거고요.”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계획이 아니라 실행이지. 흘렙이라는 위선자놈은 그렇다치고, 애송이들의 쿠데타 계획은 너무 현실성이 없어. 잘 신경써야할 걸세.”
“그러지요.”
문옆에서 죽은 듯이 서있던 레프가 문을 열었고, 이미 움직이고 있던 명설은 무당에서 온다는 은퇴한 진인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장소를 이동했다. 그의 무공이 암공이라 기척을 숨기는데 유리하다해도 일상적인 수준에서 별 다른 암공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당연히 기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런 귀찮음보다는 차라리 대통령궁 밖에서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첫댓글 초조함은 실패의 큰 원인이지요. 조만간 이쪽에서 큰 일이 벌어지겠네요. 그와중에 무당 노인네는 어찌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