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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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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무인열전(22) 배중손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37 13.08.21 02: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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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혼 불태운 불굴의 삼별초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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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삼별초(三別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 정통성을 지키려는 고려의 주체적 자주 독립 정신의 표상이었다. 삼별초는 무지막지한 몽골 오랑캐에게는 항복만이 살 길이란 법칙을 용기 있게 거부했던 고려 정신의 진수였고 귀감이었다.

?배중손(裵仲孫)은 누구인가. 그는 굴종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용사였다. 삼별초 장군 배중손은 개처럼 기면서 비굴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하루를 살더라도 떳떳이 일어서서 꿋꿋하게 싸우다가 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전남 진도 벽파진?용장산성?남도석성 등은 배중손 장군이 용감하고 날쌘 특수부대 삼별초를 이끌고 끈질기게 피 어린 항쟁을 지속하던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으리으리한 왕궁의 건물이나 성벽, 기념비만이 역사의 흔적이 아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도, 왕후장상들의 것만도 아니다. 저 폐허가 된 고성(古城)의 성돌 하나 하나가 모두 처절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숨져간 숱한 백성의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진 역사를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배중손, 그는 칼로는 졌으나 주체를 위한 항쟁의 깃발을 힘차게 높이 올린 빛나는 정신으로써 영원한 승리를 거둔 멋진 사나이였다.

?정복자 칭기즈칸이 전무후무한 대제국 몽골을 세운 것은 1206년. 온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이 칭기즈칸이 죽은 것은 1227년 7월 감숙성 국원현에 있는 육반산에서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항복하러 온 탕구트(Tangut : 티베트계의 유목민족. 11세기에 서하국을 세우고 200년 가까이 유지해 오다가 몽골족에게 망함)의 공주를 데리고 잤는데, 다음날 새벽에 공주가 곯아떨어진 이 마왕의 성기를 칼로 싹뚝 잘라서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는 물론 항복하러 왔던 그녀의 부왕과 신하들은 모조리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231년 8월, 고려의 서북변 국경 요새 함신진(咸新鎭 : 義州)에 공포의 군대 몽골군이 새까맣게 몰려와 들개떼처럼 짖어대면서 성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5분의 4를 정복한 몽골제국과 고려 간의 30년에 걸쳐 피바다를 이룬 참혹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撒禮塔)는 사로잡힌 고려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소리치도록 시켰다. “우리는 몽골 군사다! 속히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몰살시키겠다.!”

?몽골의 침공은 그들의 사신을 죽인 데 대한 응징이 그 구실이었는데 그것은 고종(高宗) 12년(1225년)에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던 사신 찰고야(著古也)가 도둑에게 피살된 사건의 책임을 고려에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살리타이는 자기네 사신 찰고야를 죽인 책임을 따지는 한편, 공물로 금은과 좋은 의복을 말 2만 필에 실어 보내고, 진품의 자색 비단 1만 필과 질 좋은 수달피 2만 장, 좋은 말 2만 필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밖에도 인질로 왕손과 대신의 자녀를 남녀 각 1,000명씩 바치라고 했으니 고려 조정으로서는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려는 급한대로 황금 70근과 백금 1천 300근, 옷 1천 벌, 말 170필 등을 바치고 화친을 청해 살리타이는 그가 점령한 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 감독관〕 72명을 두고 일단 철수했다. 이런 식으로 국교가 다시 트이자 몽골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과중한 요구를 거듭해와 고려를 괴롭혔다.

?그 해 5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고려는 차라리 망하더라도 앉아서 빼앗기기만 하다가 망하기보다는 끝까지 싸우다 죽기로 작정하고 집권자 최우(崔瑀)가 중심이 되어 강도(江都 : 江華島) 천도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기마병 위주로 육전에는 강했지만 수전은 서투른 몽골군에게 고려의 강화 천도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고종 19년(1232년)부터 원종(元宗) 11년(1271년)까지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들어가 있던 40년 동안 우리 국토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그 참상은 처절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몽골군이 짓밟고 지나간 곳은 무자비한 살인?약탈?강간?파괴?방화가 뒤따라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는 강물처럼 흘러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다.

?마별초(馬別抄)는 말 그대로 말 탄 별초, 즉 기마 특수부대를 가리킨다. <고려사>에는 전봉별초(戰鋒別抄)니 별초도령(別抄都令)이니 하는 기록이 고종시대 이전부터 곳곳에 보이는데, 별초란 요즘 말로 하자면 특수부대?특공대?결사대?별동대 또는 선봉부대로 치면 무난할 듯하다. 별초군은 무예가 뛰어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을 가려 뽑아 조직했으며, 전투시에는 최선봉에서 공격을 도맡았다.

?마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私兵)이나 다름없었으나 최우가 마별초와는 별도로 조직한 야별초(夜別抄)는 정규 관군(官軍)의 기능을 대신할 정도로 그 성격이 보다 군사적이고도 경찰적이었다. 삼별초는 이 야별초를 확대 개편한 특수 군사집단으로 <고려사> ‘병지(兵志)’ 오군(五軍) 조항에는 그 설치 연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 나라 안에 도둑이 많으므로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찰하게 하여 단속함으로써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는데, 도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므로 별초를 나누어 보내 잡게 했고, 군사 수가 늘어나 좌?우 별초로 나누고, 또 몽골에서 탈출하여 귀환한 자들로 신의군(神義軍)을 편성해 이를 삼별초라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야별초가 좌별초와 우별초로 개편된 데다가 신의군을 합쳐서 삼별초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신의군을 두고 볼 때 몽골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장정들 가운데서 신체 강건하고 정신 용맹한 자들을 골라서 뽑았으므로 몽골에 대한 적개심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몇 갑절이나 높았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그것은 수십 년 간에 걸친 꾸준한 항몽투쟁에 있어서 대부분의 활약이 삼별초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만 보더라도 잘 알 수가 있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화전양면(和戰兩面)에서 장기전 태세를 굳히자 몽골 오랑캐들도 질소냐 하고 파상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해마다 우리나라로 쳐들어와서 온 강토를 유린하며 노략질을 벌였다.

?삼별초 항쟁의 주역 배중손 장군의 출신 내력을 알려줄 만한 기록은 단 한 조각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왕조 중심의 이른바 정사(正史)에서 반역의 괴수였던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기록이 남아 전해질 리도 없는 것이다. 그저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이라는 왕조사의 법칙이 지배할 뿐이다.

?그래서 배중손 장군의 출신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기록이란 ‘배중손은 원종 때 벼슬을 쌓아 장군에 이르렀다(裵仲孫 元宗朝 積官 至將軍)’는 <고려사> ‘반역자 열전’의 첫머리 한 줄밖에 없다.

?1270년 5월 몽골에 갔다가 돌아오던 원종은 서경에서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강화도에 보내 옛 서울인 개경으로의 환도 명령을 하달하고 ‘문무 양반에서 방리(坊里 : 거리와 동네)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인과 아이들을 이끌고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라. 만일 명을 거역하면 그 자신은 물론 처자 권속까지 몽골군이 모조리 사로잡아갈 것’이라고 위협하니 강화도는 남으려는 자와 떠나려는 자들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5월 23일에 원종은 용천역에서 대신들을 모아 환도할 일을 의논하고 정한 날짜를 고시하는 방을 내붙였는데, 삼별초의 상하 장병들은 이 지시에 따르기를 거부하여 부고(府庫 : 관청의 창고)를 마음대로 열어 물건들을 꺼내는 등 항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왕은 상장군 정자여를 다시 강화로 보내 무마하도록 시켰지만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항쟁의 불길은 어쩔 수 없었다.

?5월 27일 왕은 개경에 돌아왔고 강화에 있던 비빈들도 개경으로 건너왔는데, 왕과 대신들은 의관이 없어 군복을 입어야 했고, 궁실 대신 천막을 치고 거처해야 했다.

?왕은 태자와 재상 이장용(李藏用)을 불러 의논한 끝에 삼별초를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장군 김지저(金之?)를 강화로 파견하였다. 김지저는 5월 29일 강화에 들어가 삼별초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왕명을 전하여 가로되 “이제부터 삼별초는 파(破 : 해체)하니 각자 해산하여 생업을 찾으라.”하고 명적(名籍)을 회수하여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6월 1일, 장군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指諭 : 지휘관) 노영희(盧永禧)를 불러 말하기를,

??“이제 조정에서 우리의 명부를 가져갔으니, 그것이 분명히 몽골 오랑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 군사들이 오랑캐와 맞서서 숱하게 쳐죽인 앙갚음을???? 하고자 덤벼들 것은 자명한 일.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일일이 찾아내 잡아죽이려 하지???? 않겠소?”

??"장군 말씀이 옳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앉아서 개죽음을 당할 뿐이지요."

??"그렇소! 우리가 사나이로 태어나서 어찌 구차한 삶을 위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개??? 처럼 기면서 살기를 바라리오! 한번 떨쳐 일어나 싸우다 죽음만 못하리다!"

?그들은 곧 삼별초 수뇌부를 모아 회의를 열고 끝까지 항쟁할 것을 공론으로 정했다. 몽골에 항복하여 꼭두각시 노릇을 자청한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에 대항하기로 결의를 굳혔던 것이다. 배중손은 수하 장졸들을 내보내 거리거리마다 외치게 했다.

??“모여라! 모두 모여라! 몽골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백성을 모조리 살육하고자 한다! 나라??? 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구정(毬庭)으로 모이라!”

?강화의 도성 안은 삽시간에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온통 수라장을 이루었다. 삼별초 군사들의 외침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이 구정에 모여들었다. 구정이란 고려시대에 궁중이나 대신의 집 울안에서 격구(擊毬)하던 크고 넓은 마당이니 오늘날 종합운동장쯤 되는 광장이다.

?배중손?노영희?김통정(金通精)을 비롯한 항쟁의 지도자들은 정부의 무기고인 금강고(金剛庫)를 열어 군사들과 싸우고자 하는 장정들을 무장시켰다.

?“나루를 막아라! 배라는 배는 모조리 거두어 묶어 놓아라!”

?“도망치는 자는 모두 베어라! 고경(古京 : 開京)으로 가는 것들은 배반자다!”

?“지금 임금은 몽골 오랑캐들의 허수아비다! 고경의 조정은 우리의 적이다!”

?그리고 배중손은 몽골에 굴복한 원종의 정부에 대항하여 왕족인 승화후(承化候) 왕온(王溫)을 추대하여 새 임금으로 모시고, 대장군 유존혁(劉存奕)을 좌승선(左承宣)으로, 상서좌승(尙書左承) 이신손(李信孫)을 우승선(右承宣)으로 삼아 새로운 조정을 구성한 뒤에 우리야 말로 자주 정통의 고려국이라 일컬었다.

?6월 2일, 왕명에 항거하여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통고를 받은 몽골 주둔군 사령관 도렌카(頭輦哥)는 휘하 군사 2천 명에게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6월 5일, 북새통 속에서도 강화도 천도 39년 만에 개경 환도는 일단락되었다.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군의 수뇌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거점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은 강화도 인근의 배는 크든 작든 있는 대로 징발해 군사와 백성과 무기와 재물들을 싣고 바다로 나섰는데, 그 수가 무려 1천여 척이나 되는 대선단이었다.

?40년간 고려의 수도로서 항쟁의 중심지 노릇을 하던 강화도는 그 다음날 들이닥친 2천 명의 몽골군 부대가 남은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노략질하고 철저히 파괴하여 폐허가 되고 말았다.

?1천여 척의 삼별초 선단은 황해를 남하하여 74일이 지난 그 해 8월 19일에 진도 벽파진에 배를 대고 상륙하였다.

?백제 성왕(聖王) 15년(537년)에 개설된 진도는 1984년에 484m에 달하는 연륙교가 놓이기 전까지 1천 500년 동안이나 2km 떨어진 해남 옥동나루에서 벽파진까지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만 하는 곳이었다. 이 벽파진에서 진도읍 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제법 널찍한 용장들판이 펼쳐진다.

?1270년 8월 추석 무렵 벽파진에 상륙해 용장리로 넘어온 삼별초군은 지금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52번지 일대 산기슭의 대찰 용장사(龍藏寺)를 접수하여 대궐로 삼고, 주변 3면의 산상에는 석성을 쌓아 새 도성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서남 해상의 요지 진도에 웅거하여 용장성을 도읍지로 삼고 몽골과 개경 정부에 맞서서 민족 정통성을 주장하는 새 왕국을 세운 삼별초군은 숨돌릴 새도 없이 난마같이 얼키고설킨 문제들을 풀어 나가야만 했다.

?친몽주의자인 원종의 고려 조정은 몽고 오랑캐의 괴뢰정부이므로 더 이상 섬길 수 없다고 등을 돌리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이상 우선 시급한 것이 나라의 기틀을 갖추는 일이었다.승화후 왕온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전직 고관들 가운데 뜻을 함께 하는 인사들로 대신을 삼은 새 왕국은 용장사 일대를 궁궐로 개축하고 주변에 성곽을 두르는 등 내부 정비를 마친 다음, 해안 요소마다 망대와 봉수대를 쌓아 군사들로 지키게 하여 도성 방어에 임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 자신이 민족 정통의 맥을 이은 자주 독립적 주체국임을 안팎에 널리 선포했는데, 그것은 이 나라가 ‘오랑(五浪)’이라는 제왕(帝王)의 연호(年號)를 세우고 임금의 칭호를 황제로 자처한 것만 미루어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어느 정도 근거지인 진도의 정비가 끝난 다음 배중손 장군은 본토 수복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인근의 여러 섬들에 군사를 파견해 복속시켜 완도?거제도?제주도를 비롯한 3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서를 점령하였다. 그와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방을 공략한 데 이어 전주와 밀양 등 내륙 깊숙이까지 진공하기도 했다.

?개경 조정은 환도에 따른 뒷수습도 끝내지 못한 판에 남쪽에서 잇따라 올라오는 급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원종은 김방경(金方慶)을 전라도추토사로 임명해 진도를 치게 했고, 9월 중순에 김방경은 몽골 장수 아하이(阿海)와 함께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개경을 떠났는데, 김방경의 휘하 군사 60명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는 몽골군사였다. 이 괴상한 연합군은 전주를 거쳐 나주를 지나 삼별초의 거점인 진도 벽파진 맞은편 삼견원(三堅院)에 다다라 진을 쳤다.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에 따르면 삼견원은 지금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삼기원. 몽고 원수 아하이는 다른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물이라면 질색이었고, 건너편 바다 가득히 떠 있는 삼별초군의 대소선단을 바라보자 겁이 나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하이가 겁에 질려 군사를 나주로 물리려 하므로 김방경이 말리기를, “원수가 물러나면 약점을 보이는 것이니 적이 승세를 타고 몰려오면 그 예봉을 어찌 당할 것이며, 황제께서 듣고 문책하시면 무어라 답하겠소?”하니 아하이가 후퇴하지도 전진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할 뿐이었다. 김방경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선봉이 되어 돌격했는데 삼별초군이 전함으로 맞받아 쳐오므로 관군이 삽시간에 지리멸렬 앞다투어 도망쳤다. 이 싸움에서 연합군은 대패하고 김방경도 포위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므로, 그 뒤 한동안은 큰 접전 없이 소강상태만 유지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원종 12년(1271년) 정월, 아하이는 겁먹고 싸우지 않은 책임으로 파면당해 몽골로 소환되고 그 후임으로 힌도(?都)가 3월에 부임하여 전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삼별초는 그 해 4월에는 함대를 보내 합포(合浦 : 마산)?동래(東來)?김주(金州 : 김해) 등 경상도 남해안 여러 지방을 치고 개경 조정으로 상납하는 공물선까지 나포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힌도가 본국에서 진도의 임금 왕온의 아우 영녕공 준의 두 아들 왕희(王熙)와 왕옹(王擁)이 데리고 온 군사 400명과 고려 각지에서 강제로 징집한 군사 6천 명을 증강하니 토벌군은 1만여 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거기에 반역자 홍복원(洪福源)의 아들로 아비의 뒤를 이어 몽골에 붙어 장군이 된 홍다구(洪茶丘)가 500여 명의 불한당을 이끌고 몽골로부터 고려로 들어와 삼별초 토벌군에 합세하였다.

?1271년 5월 여몽 연합군은 전함 400여 척으로 삼별초의 본거지 진도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고려의 상장군 김방경은 몽골 원수 힌도와 함께 중군으로 옥동나루에서 벽파진으로 상륙하고, 홍다구와 왕희?왕옹 형제의 좌군은 고군면 원포리 노루목으로, 대장군 김석(金錫)과 만호 고을마(高乙磨)의 우군은 벽파진 북녘 군직구미로 상륙하였다.

?그때 삼별초군은 수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데다가 적을 얕잡아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몽골 오랑캐는 절대로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는 생각에 젖게 된 데다, 개경 정부의 군사력이라 해야 도성의 왕궁을 지키는 100여 명의 정규군이 전부요 나머지 지방의 수비병들은 보잘 것 없는 허수아비 군사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강화도 시절까지만 해도 고려군의 주력은 삼별초군이었으니 그런 인식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몽군은 삼별초군의 이런 자만심과 방심의 허를 찔러 불시에 급습을 가했던 것이다.

?적의 주력인 중군이 벽파진으로 상륙하려들자 삼별초군도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정면의 적을 막기에만 급급하여 좌우군의 공격에 미처 대비할 여력이 없었다.

?홍다구의 좌군이 먼저 노루목에 상륙하여 몽고에서 가져온 화포(火砲)와 화창(火槍) 따위 신무기로 맹렬한 화공을 퍼부으니 삼별초군의 전열은 삽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적은 해안의 삼별초군 전함들을 불태우며 속속 상륙하여 용장성을 3면에서 포위하여 들어갔다.

?화포와 화창의 위력은 대단하여 용장성은 이내 불바다가 되고 남녀노소의 비참하게 울부짖는 소리는 하늘 끝까지 울려퍼졌다. 주력이 무너지니 배중손?노영희?김통정 등 삼별초 수뇌는 남은 군사를 모아 포위망을 뚫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가까스로 혈로를 찾아 용장성을 벗어난 삼별초군은 적의 추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두 갈래로 나누어 섬의 서쪽과 남쪽으로 각각 바다를 향해 도주하였다.

?임금을 모시고 서쪽으로 가던 배중손군은 추격해 온 홍다구의 몽골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해 오늘날 임회면 남동리 219번지 일대 남도포(南桃浦)의 진성(鎭城)으로 탈출했다. 임금 왕온과 왕자 왕환(王桓) 부자는 홍다구에게 생포됐는데 종군한 왕온의 아우 영녕공 준의 아들, 그러니까 친조카들이 큰아버지의 목숨만 구해 줄 것을 애걸복걸했으나 홍다구는 들은 척도 않고 무참히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그곳이 지금 논수골이라 불리는 곳. 삼별초의 왕, 진도 정부의 임금 왕온이 참살당해 묻힌 곳이 왕무덤- 진도읍에서 의신면 사천리로 가다가 구부러진 고갯길 옆 솔숲 속인데, 그 아래 말무덤이라는 고분이 하나가 자리잡고 있으니 그것은 왕온을 따르던 신하와 군졸들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왕무덤재 산마루를 넘으려면 길옆 돌무지에 돌을 던지고 명복을 빌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액운을 당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편 김통정이 이끄는 군사들도 의신면 돈지리 앞들에서 혈전을 벌인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떼무덤’을 남기며 금갑진(金甲鎭)으로 퇴각하였는데, 그 뒤를 따르던 부녀자들과 시종들이 도망칠 기력을 잃은 데다 살아남아 오랑캐에게 짓밟히기보다는 죽음을 택해 우항천 깊은 수렁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으니 그곳이 오늘날 ‘여기급창(女妓及唱)두멍’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지금도 비 오는 밤만 되면 원한 서린 여귀(女鬼)들의 귀곡성(鬼哭聲)이 듣는 이의 애간장을 갈가리 찢어놓는다고 한다.

?남도포구 외로운 석성으로 쫓겨 들어간 삼별초 항쟁의 주역 배중손 장군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창칼에 찔리고 찢긴 몸으로 이제 여기서 어디로 더 갈 수 있으랴! 그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는 상처를 대충 싸매고 차가운 돌성의 벽을 등진 채 적을 기다렸다. 원수의 몽골 오랑캐를 한 놈이라도 더 베어 죽이고 최후를 맞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개떼처럼 사납게 짖어대면서 몰려와 겹겹으로 둘러싼 몽골군과 맞서 칼날의 이가 죄다 빠져 톱날이 될 때까지 분전하다가 용장 배중손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진도의 결전에서 다행히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김통정이 거느린 일부 군사들과 남해에 웅거하고 있던 유존혁의 부대뿐이었다. 김통정은 금갑포에서 잔병을 수습하여 제주도로 건너갔고, 유존혁이 그 뒤를 따라 8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그 뒤로도 만 2년간에 걸쳐 끈질기고 피어린 항몽투쟁을 계속했다.

?삼별초의 항쟁이 진도 정부 붕괴에 이어 제주도의 항전을 마지막으로 종막을 고하게 되자 고려는 완전히 몽골 오랑캐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아 그 뒤 고려 말까지 100여 년 동안 이 나라 이 겨레는 압박과 설움을 당해야 하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진도에 들어가 쓸쓸한 폐허로 변한 용장성터며 왕무덤과 말무덤의 왕무덤재를 찾아 거닐어 보고, 떼무덤과 다 메워져 흔적도 없어진 여기급창두멍을 거쳐 고려의 대장부 배중손이 최후를 마친 남도포구에서 이리저리 돌성의 안팎을 둘러본 후 멀리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남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바다는 알고 있을까. 이 고난의 섬이 내지르는 역사의 신음과 비명-그 구슬픈 소리들을 듣고 있을까. 그 옛날 외세의 압제에 울분했던 숱한 고려 사나이들이 역적이란 이름 아래 피눈물을 뿌리며 까마귀밥 고기밥으로 죽어가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을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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