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시대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민족의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20만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를 불태우고 감추어버렸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 본명 김견명)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불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 ▲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구 유물들.(왼쪽) 금제 사리 항아리와 사리 봉안 기록이 새겨진 금판이 보인다. 오른쪽은 인동초, 연꽃 무늬가 가득 새겨진 사리 항아리 ©문화재청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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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권의 역사서는 신라사관에 입각 허구의 설화형식으로 기록한 흔적과, 사대모화사상에 입각하여 쓰여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삼국유사> 내용에 나오는 삼국시대의 향가 ‘서동요(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로맨틱 사랑)’에 얽힌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2009년 1월 19일 풀리게 되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은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선화(善花)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됐다’고 기록해 놓았는데,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백제 무왕(재위 600∼641)의 왕후가 좌평(佐平.백제의 최고 관직) 사택적덕(沙宅積德.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됐다. 사리봉안기록에는 또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미륵사를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구절이 나왔다. 이로써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요’는 후대에 일연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서동 왕자와 선화공주와의 결혼 설화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 백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 조사 과정에서 석탑 1층 하단 사리공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호(아래)와 사리봉안기.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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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발견된 백제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결혼이 사실상 후대에 꾸며진 허구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가 나옴에 따라 향후 어떻게 나올지 역사학계의 귀추가 주목된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명문의 왕후가 백제 관리의 딸이라는 내용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라며 “서동 왕자와 선화공주의 결혼 설화는 후대의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일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을 해체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이 담긴 금판으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지난 14일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 유물을 확인했다. 이번 사리 봉안 기록과 더불어 발견된 사리 항아리도 전문가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는 이 사리 항아리는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 수준을 보여준다. 이번에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 밑에서 사찰 창건 연도와 주체, 목적을 밝히는 국보급 유물은 500여점이나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1842§ion=section78§ion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