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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하회별신굿
조홍근 추천 0 조회 26 11.04.22 09: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각시   초랭이   이매   백정   할미   중   양반   선비   부네

기원과 전설

하회별신굿놀이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느냐 하는 것은 자료의 부재로 인하여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향언과 전설로 미루어 고려 중엽의 것이 아니냐 하는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향언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말은 마을에 가장 먼저 허씨가 입향하여 터을 잡으니 그 후 안씨가 들어와 집을 짓고 뒤이어 들어온 류씨가 판을 벌였다는 뜻이다. 허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은 고려 초기로 알려져 있으니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허씨들이 마을에 터를 잡아 살고 있을 때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재산의 손실이 막대하자 마을 사람들의 걱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사는 젊은 청년인 허 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지금 마을에 퍼지고 있는 재앙은 이 마을을 지켜주는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 일러주며 "탈을 만들어 춤을 추면 신의 노여움이 풀리고 마을이 다시 평안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탈을 만드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여야 하며 만일 누군가 엿보거나 알게 되면 너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허 도령은 꿈이 너무나 기이하고 생시같이 느껴져서 그날부터 동네 어귀 으슥한 곳에 움막을 짓고 다른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줄을 치고 매일 목욕재계를 하며 정성을 들이는 가운데 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마을에는 허 도령을 사모하는 처녀가 있었는데 도무지 허 도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연민의 정이 사무친 나머지 어느 날 금기(禁忌)를 개고 금줄을 넘어 들어가 탈막 안을 엿보고 말았다. 그러자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며 입신의 경지에서 탈을 깎고 있던 허 도령은 그 자리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허 도령이 죽게 되자 처녀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결하게 되니 마을 사람들이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화산 중턱에 성황당을 짓고 처녀를 성황신으로 받들어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허도령이 제작한 탈은 모두 14개(3개 분실)였는데, 마지막으로 제작하던 탈은 턱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미완성의 작품으로 전한다.

복원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첫째, 가장 고형이면서도 제작 기법이 우수한 나무탈들이 현존하고 있는 점, 둘째, 별신굿과 탈놀이가 미분화된 형태이어서 탈놀이의 토착적인 기원과 발생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닌 점, 셋째, 전승지인 하회가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풍산 유씨의 씨족부락인 점 등으로 말미암아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1928년을 마지막으로 별신굿이 중단되었고, 1940년 12월 14일 별신굿의 문맥을 떠나 한 차례 탈놀이가 연희된 사정 때문에 복원 과정에서 초창기 조사 및 보고의 자료적 원형성이 문제되었었다.

처음에는 연극자의 부재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고려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안동시의 뜻있는 청년들이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부활을 위한 모임을 갖고 주로 류한상씨의 전기 자료('하회별신가면무극조사'(1959) : 하회동에 거주하고 있던 류한상씨에 의하여 문산주를 위시하여 별신굿 놀이를 구경한 노인들을 상대로 70년 전, 31년 전, 18년 전 3회 행사를 조사하여 종합서술한 것)에 의거하여 하회별신굿놀이를 복원 공연(1973)하였는데, 이 때의 공연은 다분히 현대연극적인 성격에 불과했다.
그러다 마침내 김택규, 성병희 두 교수의 조사단에 의해 1928년 마지막 하회별신굿 때 17세 총각으로 각시광대의 역할을 맡아 탈놀이에 참가했던 이창희 옹(1913-1996)의 생존사실이 알려지면서(1978)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전모를 소상하게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별신굿놀이로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재현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선보이면서 비로소 중요무형문화재(제69호) 지정이 이루어진다.(1980.11)

 


민속놀이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지배계층인 양반과 선비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지배계층인 양반과 피지배계층인 상민간의 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중의 파계를 통하여 당시 불교의 타락상과 종교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상민들의 삶의 애환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별신굿탈놀이를 통하여 상민들은 세상살이를 풍자하고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거리낌없이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지배계층의 비판으로 일관되는 탈놀이가 하회라는 양반마을에서 양반들의 묵인 하에 또는 경제적인 지원 속에서 연희된 것은 상민들은 탈놀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과 불만을 해소 할 수 있으며 양반들은 상민들의 비판과 풍자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불만을 해소시켜 줌으로써 갈등과 저항을 줄여 상하간의 조화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별신굿이라는 마을공동체 신앙에 포함되어 연희되던 탈놀이의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계급간의 모순과 갈등의 문제점들이 완충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것이 새롭게 공동체의 기존체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행절차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종신적 제관인 산주가 서낭신과 산신에게 치성을 드린다. 섣달 보름날 치성을 드릴 때 산주가 별신굿 개최에 대해서 신의 뜻을 묻는다. 신의 뜻을 확인하면 산주는 이 일을 정식으로 동네의 양반과 어른들에게 알리고 동의를 얻어 별신굿을 준비한다. 만일 비용 등을 이유로 별신굿의 거행을 거부했을 때에는 동민들에게 급병이 생기는 등 동네에 우환이 발생하므로 신의 뜻이 그러하면 반드시 별신굿을 거행한다. 산주는 꿈에 계시를 받은 자가 되는데 박학이 산주(1928년 무진년 마지막 별신굿 때의 산주)의 경우 다음의 일이 있었다.
갑자년(1924년) 11월 17일 늦게 박씨가 인근 친구 지에 놀러 갔을 때, 친구가 없어 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40-50세 가량의 부인신이 나타나 "특히 너에게 명하고 싶은 의례가 있지마는 여기는 타인의 집이니 속히 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기에, 박씨가 "내가 친구 집에 있으니 명을 듣겠다"고 했다. 여신이 말하길 "너를 금후의 산주로 명하는바, 산주될자는 많지마는 특히 너에게 명한다"고 했다. 박씨가 말하길 "나는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니 다른 적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신이 말하길 "네가 산주로 가장 적당하며, 네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했다. 박씨가 그러면 명에 따르겠노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잠이 깨었다.
박씨는 급히 자기 집에 돌아와 물을 떠 놓고 신에게 빌었다. 자기는 생활고 때문에 신명을 따를 수 없으며, 또 현재 산주가 있으므로 더더욱 그렇다고 하면서 사퇴했다. 그러나 여신이 말하길 "지금의 산주는 너보다 1살 아래지마는 신병 때문에 신의를 도울 수가 없으니 네가 나의 명예 따르라"고 했다. 그 후 신당에 가서 신간을 잡으니 역시 그에게 산주가 되라는 신의 계시가 내렸다. 박씨가 신명을 받아 산주가 된 얼마 뒤에 전산주가 사망했다.

섣달 스무아흐렛날 동민 대표들이 동사에 모여 부정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배역에 맞춰 광대 12명과 산주 외에 유사 2명, 대 메는 광대와 청광대, 무동꾼 등을 선정하여 본인에게 통보한다. 광대들이 의상과 기타 준비물을 갖추어 동사에 모이면, 섣달 그믐날부터 동사 입구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며 목욕재계하여 합숙을 시작한다. 이 때 동네에선 개고기 등이 부정한 음식을 금한다.

섣달 그믐날 내림대는 든 산주, 서낭대를 멘 광대(2명), 큰 광대, 무동을 탄 각시광대, 양반광대, 선비광대, 그리고 연령 순으로 선 나머지 광대들이 행렬을 지어 풍물을 울리며 서낭당에 올라간다. 이 때 부정이 없는 노인 서너 명도 뒤따른다.
서낭당에 도착하면 서낭대는 당 앞쪽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산주는 당방울을 매단 내림대를 양손에 받쳐 들고 당 안으로 들어가 기대어 세운다. 각시광대는 무동춤을 추며 서낭대를 돌고, 악기를 든 사람들은 풍물을 치며 돈다. 산주가 내림대를 잡고 빌기 시작하면, 각시광대만 계속 서낭당을 돌고 나머지 광대들은 당 앞에 일렬 횡대로 선다.

산주가 대내림을 빌 때는 "해동은 조선 경상북도 안동 하회 무진생 서낭님, 앉아 천리 서서 만리를 보시는 서낭님이 뭐를 모릅니까... 내리소서, 내리소서, 설설이 내리소서" 하며 마을을 위해 굿을 할 테니 도와달라는 내용을 즉흥적인 말로 빌며, 산주가 내림대를 잡고 정성을 들이노라면, 이윽고 대가 흔들리고 당방울이 울린다. 산주는 재배하고 당에서 물러나와 다시 재배하는데, 이 때 광대들도 함께 재배한다.
산주가 당방울을 내림대에서 서낭대 꼭대기에 옮겨 달면 광대 둘이 서낭대를 메고 앞서고 산주가 그 뒤를 따르며, 나머지는 올라갈 때와 같은 순서로 행렬을 지어 풍물을 치며 하산한다. 각시광대는 역시 무동을 타고 춤을 추며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하당을 거치고, 삼신당에도 들러 참례를 하고서 동사로 온다. 하당에서는 '각시 잠잔다'라는 행위를 하는데, 각시광대와 자식 없는 동네 사람이 동침하는 흉내를 냈으며, 그리하면 자식을 얻는다고 믿었다.

동사에 오면 서낭대를 마당에 세우고 내림대로 괸다. 산주는 봉납된 옷가지를 서낭대에 매단 다음 서낭대 옆에 자리를 펴고 앉는다. 일설에 의하면 섣달 그믐부터 합숙을 시작하나 정월 초이튿날 동사 다락에서 탈을 꺼내 광대들이 배역에 따라 쓰고서 서낭당에 올라가 대를 내려와서 탈놀이를 하였다고 하여 또 다른 연행 방식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행렬이 동사 마당에 도착하면 각시광대는 무동춤을 계속 추면서 마당을 빙빙 돌다가 청광대가 주는 각시탈을 받아 쓰고서 춤을 추고, 이어서 무동을 탄 채로 꽹과리와 채를 들고 구경꾼 앞을 돌면서 걸립을 한다. 각시광대가 무동춤을 추고 걸립을 하는 동안 광대들은 탈놀이를 준비한다. 각시의 무동춤과 걸립이 일차로 끝나면 풍물을 흥겹게 울리면서 놀다가 주지마당으로 넘어간다. 주지마당에 이어 백정마당, 할미마당, 중마당, 양반.선비마당의 순으로 탈놀이를 벌인다.
○ 주지마당

아직까지 마을굿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마당으로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꿩의 깃을 단 두 마리의 주지가 나와서 탈판을 돌다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여기에 나오는 주지다툼을 꿩싸움이라 하기도 하고 사자싸움이라 하기도 한다. 액풀이 마당으로 벽사의 의식무라는 의미를 지닌다.
○ 백정마당

하회별신굿놀이의 본격적인 첫 마당이라 할 수 있다. 도끼와 칼을 든 백정이 등장하여 춤을 추다 소 한 마리를 잡아 우랑과 염통을 꺼내어 구경꾼들에게 파는데, 살생을 하게된 백정은 장사 도중 천둥번개 소리에 기겁하여 도망친다. 이 마당 역시 걸립마당의 일종으로 부패한 양반사회를 비판하는 백정의 대사가 날카롭다.
○ 할미마당

쪽박을 허리에 차고 흰 수건을 머리에 쓴 할미가 등장하여 베를 짠다. 베를 짜면서 고달픈 인생살이를 '베틀가'에 얹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쪽박을 들고 걸립한다. 각시와 백정에 이어 할미에까지 이어지는 이 걸립마당들은 이 탈놀이의 주제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파계승마당과 양반풍자마당을 위한 도입부 구실을 한다.
○ 파계승마당

부네(기생 혹은 소실)가 오금춤을 추며 등장하여 치마를 들고 오줌을 눈다. 이 때 중이 등장하여 이 광경을 엿보다가 흥분하여 부네를 옆구리에 차고 도망간다. 이 마당은 대사없이 진행되며 고려 말 부패한 불교상를 풍자하고 있다.
○ 양반ㆍ선비마당

양반이 하인인 초랭이를, 선비는 소첩인 부네를 데리고 나온다. 양반과 선비가 서로 문자를 써가며 지체와 학식을 자랑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초랭이는 양반과 선비사이를 오가며 양반사회를 풍자한다. 서로 화해한 양반과 선비가 춤을 추고 놀 때 이매탈을 쓴 별채가 나타나 환재를 바치라고 외치면 모두 깜짝 놀라 허겁지겁 도망간다. 관리의 가렴주구를 풍자하고 있다.

무당이 없을 땐 서낭대ㆍ산주ㆍ큰 광대ㆍ각시광대ㆍ양반광대ㆍ선비광대 순으로 행렬을 짓고 나머지는 연령 순으로 행렬을 지어 길놀이를 하는데, 무당이 오면 무당은 서낭대 뒤에 서고 산주와 광대들은 서낭대 앞에 서서 길놀이를 했다. 먼저 산주 집에 가서 놀고 삼신당을 한바퀴 돌고 난 뒤에 양진당과 충효당에 가서 놀고, 남촌댁과 북촌댁에도 간다. 겸암댁과 남촌댁은 광대들이 사랑채 앞에서 놀고 무당들만 안채에 들어가서 성줏굿을 하는데, 서애댁과 북촌댁은 안마당에서 탈놀이를 하고 무당들은 안마루 위에 올라가 성줏굿을 한다. 탈놀이는 한 마당이나 두 마당이나 놀고 싶은대로 하는데, 여섯 마당 전부를 할 수 있는 건 이들 네 집뿐이다.

대갓집을 방문하면 산주는 서낭대를 처마에 기대 세우고 그 밑에 자리를 깔고 앉으며, 그 지에서는 서낭대 앞에 쌀이나 나락을 몇 말씩 내놓는다. 대갓집에서 양반.선비마당을 놀 때, 선비광대는 대청마루에 올라가 유씨 양반과 직접 맞대면하여 수작을 걸고, 풍자적 사설로 양반을 골려 주어도 이 때만은 탓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년(1924)과 무진년(1928)에는 유씨들이 양반.선비마당을 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초청했기 때문에, 양반광대가 "이번에 예전 그대로 했으면 그놈들 낯짝에 똥칠을 세게 할 건데 그걸 못하게 하니 할 수 없다. 내가 대청에 올라갔으면 저놈들 낯을 뜨겁게 해 줄 건데 그걸 없애서 못한다"라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양반집 아닌 작은 집은 지신밟기만 하고 탈놀이는 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곡물이나 폐백주식을 대접하는데, 새각시가 있는 집은 속치마를 서낭대에 걸어 득남을 빌기도 했다. 대갓지에 가면 광대가 판을 휘어잡았지만 작은 집에선 무당이 지신밟기를 주도했다.

탈놀이와 지신밟기는 14일까지 계속하는데 서낭각시의 친정인 월애(다릿골)에 가서 놀기고 하고, 고모 집이 있다는 광덕동에도 간다. 동사 앞에서 무당들이 놀이판을 벌일 때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았으며 술 취한 사람은 무당과 같이 춤추기도 했다. 한편 동사 앞에서 산주가 월애에 사는 두 남녀를 벌준다고 깔고 뭉개었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정월 보름날 아침 식사를 마치면 청광대가 탈을 담은 섬을 지고 서낭당으로 올라간다. 당의 처마에 서낭대를 기대 세우고 당 안에서 산주가 당제를 지낸다. 헌작과 재배에 이어 축문 없이 비손으로만 축원을 올리고 종일토록 소지를 올린다. 순서는 먼저 서낭님 소지, 산주 소지, 광대 소지(15명 몫), 다음에 동네 문장 소지를 비롯하여 각 호주 소지, 우마의 소지를 올린다.
그 동안 광대들은 탈을 쓰고 탈놀이를 하는데, 음복하고 쉬다가 다시 놀기를 종일토록 한다. 무당들도 한쪽에서 논다. 일몸쯤에 탈놀이를 마친다. 서넝대의 당방울은 풀어 탈과 함께 섬에 달아 청광대가 짊어지고, 서낭대는 옷이나 예단은 풀고서 서낭당의 뒤처마에 얹어 놓은 다음 모두 하산한다. 양반광대, 각시광대, 청광대만 남고 산주와 다른 광대들은 귀가한다.

마을 입구 진밭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멍석을 깐 뒤 초례상 턱으로 무당에게서 빌린 장고를 하나 세운 다음, 그 위에 꽃갓을 하나 올려놓는다. 각시광대가 각시탈을 쓰고 신부가 되고, 청광대가 선비탈을 쓰고 신랑이 되어 탈을 안 쓴 양반의 주재하에 혼례를 치른다.
예가 끝나고 양반이 "신방 들어가라" 하면 멍석 위에 장고를 치우고 신랑이 신부를 눕히고 올라탄다. 각시광대는 양반광대가 시키는 대로 "아야" 소리를 세 번 한다. 이 모든 일이 진지하고 엄숙하게 진행되는데, 이는 서낭각시와 허도령을 결혼시키는 턱이며, 이 때 청광대는 동네 사람 중에서 아들이 없어 아들 낳기를 원하는 사람이 된다.

이윽고 모든 과정이 끝나고 각시광대가 청광대에게 탈을 주고 귀가하면 청광대는 탈이 든 섬을 동사에 갖다 보관한다. 이어서 동네 어귀에서 암무당 1명, 수무당 2명이 잡귀잡신을 퇴송시키는 허천거리굿을 하는데 유사와 사령(뱃사공)이 뒤치다꺼리를 한다.
그 이튿날 서낭님께 바친 옷을 다시 사다 입으면 복을 받고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그렇게 한다. 옷을 판 돈과 별신굿 동안 거둬진 곡식이나 돈은 정리하여 별신굿 경비로 충당한다.

하회별신굿의 구성

오늘날과 달리 탈놀이 광대들이 풍물패를 겸하였고, 마당과 마당 사이에 한 차례씩 풍물(주로 세마치 장단)을 울려 놀이마당을 구분하였다. 춤이나 동작은 놀이할 때 서낭님이 시켜서 저절로 하게 된다고 일러오며, 다른 탈춤의 경우처럼 분명하지 않고 즉흥적이며 일상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예전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 신성한 별신굿을 하는데 여자들이 참가할 수 없어 모든 탈꾼들은 남자들로 이루어졌었다.
                     
양반의 지체와 선비의 학식에 대한 조롱

하회탈춤에는 양반에 대한 비판과 조롱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양반과 선비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양반은 지체가 높다는 것을 자랑하고 선비는 학식이 많다는 것을 내세운다. 자신이 사대부의 자손이고 할아버지가 문하시중이었다고 떠벌리는 양반 앞에서 선비는 자신이 팔대부의 자손이고 문상시대의 아들이라고 받아친다. 그리고는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고 문상시대는 문하시중보다 높고 크다고 강변하다. 반면에 양반은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으스대는 선비에게 팔서육경을 읽었노라고 응수한다. 서로 한 번씩 장군멍군을 주고받는 가운데 그들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체 높은 가문과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은 피지배집단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문과 학식은 선비를 포함한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의 구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결정적 기준이다. 그 두 기준에 의해서 양반과 비양반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과 선비의 설전을 통해서 그들의 가문과 학식의 허구성이 파헤쳐지고 만다. 특히 육경을 팔만대장경, 중의 바라경, 봉사의 안경, 약국의 길경, 처녀의 월경, 머슴의 새경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초랭이와 그것에 맞장구치는 이매 앞에서 양반과 선비의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양반과 선비를 두고 벌어지는 이와 같은 조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회탈춤에서의 양반에 대한 조롱은 바로 금기의 위반인 것이다.

특권층의 허구적 윤리성에 대한 폭로

또 다른 금기의 위반은 성(性)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중이 각시 또는 부네가 소변을 보는 모습을 훔쳐보다가 소변 본 자리의 흙을 움켜쥐고 냄새를 맡는 장면은 성 본능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주자학에서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을 도덕적 본성과 육체적 욕망으로 이분하고 도덕적 본성의 확충과 아울러 육체적 욕망의 억제를 요구한다. 성의 욕망 또한 절제되어야 할 욕망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유교문화 속에서의 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감추어졌을 뿐이지 결코 소멸된 것이 아니며,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소멸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표면적 금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성은 어떤 형태로든 실현되게 마련이며, 그것은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은밀하게 실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은밀한 성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금기의 위반이라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더욱이 그 주체가 인간의 모든 욕망을 버릴 것을 가르치는 불교의 승려라는 데서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흔히 파계승마당이라고 불리는 이 장면은 불교 및 승려의 타락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성에 대한 억압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극적인 해석일 것이다.

성의 드러냄은 소불알을 놓고 벌어지는 양반과 선비의 싸움에서도 잘 나타난다. 양반과 선비는 기생인 부네와 흥겹게 춤을 추다가 서로 부네를 독점하려고 한다. 이 때 등장한 백정이 양반과 선비에게 소불알을 사라고 하자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양기에 좋다는 말 한마디에 그 둘은 서로 자기 불알이라고 주장하면서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그것을 보고 백정은 "내 불알 터진다"고 비꼬는데, 겉으로는 도덕군자인 양하는 양반과 선비지만, 그 이면에는 바로 성의 욕망이 흐르고 있음을, 아니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남녀질서의 전도

금기의 위반은 할미마당에서 남녀간 위치의 전도로 나타난다. 할미마당 역시 채록본에 따라 구체적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청어를 둘러싼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마당은 할미가 베를 짜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노래에서는 한평생 고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여성의 통한이 흠씬 묻어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단지 신세 한탄이나 혼자만의 넋두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유한상의 채록본에 의하면 영감이 어제 사 온 청어를 벌써 다 먹었느냐고 묻자 할미는 "어제 저녁에 내가 아홉 마리 당신 한 마리, 오늘 아침에 내가 아홉 마리 당신 한 마리씩 다 먹었다"고 대답한다. 귀한 음식을 여자가 남자보다 많이 먹었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순종과 희생을 미덕으로 가르쳤던 주자학적 질서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 아니다. 남자의 덕을 하늘에, 여자의 덕을 땅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유교의 남녀관을 일방적 상하 수직질서라고 매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조 사회가 남성 우위의 사회였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할미마당이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남녀 지위의 전도이자 주자학적 여성관의 파괴이다.

이와 같이 하회탈춤 속에는 금기의 위반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 금기의 위반이라는 것은 곧 주자학적 지배질서의 파괴이다. 양반의 지체와 선비의 학식에 대한 조롱, 특권층의 허구적 윤리성에 대한 폭로, 그리고 남녀 질서의 전도가 그것이다. 탈춤패들이 서낭대를 앞세우고 집돌이를 할 때는 양진당이나 충효당과 같은 대갓집을 빼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춤의 내용은 양반을 조롱하거나 양반들의 정신세계를 거스르는 것이 주조를 이룬다. 더군다나 양반과 선비광대는 대갓집 사랑에 올라앉아 주인과 맞담배를 피우고 막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적어도 별신굿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에서만큼은 양반과 천민의 구분이 사라진다. 그 구분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양반에게는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질서 위반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하회탈춤 속에 그 시대의 지배질서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비판의식이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비판이라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판이 양반사회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회탈춤 속에 반영되어 있는 민중의식은 사회변혁 의지로까지 승화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그 비판의식은 특정한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변혁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회탈은 12세기경인 고려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탈로 우리나라의 탈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가면의 사실적인 표정과 뛰어난 제작기법은 고려인들의 탁월한 예술적 능력이 충분히 발휘된 세계적 수준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 동물형상의 주지(2개)와 각시, 양반, 선비, 중, 백정, 초랭이, 할미, 이매, 부네, 총각, 별채, 떡다리 등 13종 14개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언제부터인지 별채, 총각, 떡다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회리에서는 이들 탈을 신성시하여 평소에는 동사 등에 따로 보관했다가 별신굿이 벌어질 때만 꺼내어 놀았다. 특히 각시탈은 서낭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때 외에는 볼 수가 없었으며,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산주가 고사를 지내야 했다. 신성가면의 특징이라 하겠다.

오리나무로 정교하게 조각한 다음 두 겹, 세 겹 옻칠을 한 하회탈은 조형미와 구성이 다른 탈에 비해 뛰어나다. 특히 양반, 선비, 중, 백정 등은 턱을 따로 만들어 끈으로 연결함으로써 대사전달이 분명하고 표정의 변화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할미, 초랭이, 부네, 각시의 경우 턱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높낮이와 얼굴선의 조화로 인해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탈은 신령스러워 탈을 쓴 광대가 웃으면 탈도 따라 웃고, 탈을 쓴 광대가 화를 내면 탈도 따라 화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양반탈의 인자함과 호방한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지배계급의 허세를 느낄 수 있고, 선비탈의 대쪽같은 표정 이면에는 권력을 갖지 못한 억눌린 한이 서려있다. 중탈의 엉큼한 표정과 초랭이탈의 장난끼어린 모습이나 이매탈의 바보스러운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각시탈에서는 성황신의 위엄을, 부네탈에서는 애교어린 끼를 느낄 수 있으며, 할미탈에서는 한 평생 어렵게 살아온 우리네 서민들이 한이 서려 있다.
이와 같이 하회탈의 표정에는 이 땅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의 숨결이 배어 있고 탈놀이에는 풍요다산을 기원하며 액을 막고 복을 맞이하는 조상의 지혜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회탈은 하회마을에 보관되어 오다가 1964년 국보 제121호(병산탈 2개 포함 12종 13개)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지 주지

주지는 사자(獅子)를 단순화시킨 것으로 목판 아래쪽에 딱딱이 모양의 입을 달고, 위쪽에는 꿩털을 꽂아 갈기를 나타낸다. 주지놀음은 잡귀를 물리쳐 놀이판을 안정시키고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각시 각시

놀이에서는 성황신의 현신(現紳)으로 등장한다. 대체로 조용하고 차분한 표정이나 입은 힘을 주어 꾹 다물었고 눈은 살포시 아래로 깔고 있다. 이는 새색시가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속으로 삭이는 표정으로 볼 수 있다. 머리타래는 오른쪽은 뒤로, 왼쪽은 앞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새색시의 조용한 발걸음으로 인해 얼굴의 움직임은 없고 머리타래만 움직이는 얌전한 형상으로 볼 수 있다.

초랭이 초랭이

놀이에서는 양반의 종 신분으로써 대체로 경망스러운 표정이며 또한 비뚤어지고 옥 다문 입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다. 이마가 불거진(앞짱구) 것은 윗사람과의 의견이 맞지 않는 고집불통의 상이며, 코가 짧은 것은 성질이 조급하다는 상이다. 이는 놀이에서 자기의 상전인 양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역할로 나타난다.

이매 이매

전설의 내용처럼 턱이 없는 채로 전하며 놀이에서는 선비의 바보스러운 하인으로 등장한다. 얼굴의 형상은 코가 비틀어져 있으며,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다. 이것은 관상에서 사지 중 어느 한 부분이 틀어진 것으로 보며, 아래로 처진 눈꼬리는 순박한 상으로 본다. 또 입의 웃는 모양은 바보스럽기도 한 반면 순박해 보이기도 한다.

백정 백정

대체로 심술?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 살생을 할 수 있는 듯한 험악한 표정으로 나타나고, 뒤로 젖히면 살생으로 인한 죄의식 때문에 미쳐버린다는 실성한 웃음으로 나타난다. 관상학적으로는 각형(角型)의 얼굴은 몸이 건장한 상으로 보며, 비뚤어진 이마는 성질이 불량하고 잔인성이 있다는 상이다.

할미 할미

얼굴의 형상은 정수리는 위로 뾰족하게 솟아 있고, 아래턱은 앞으로 뾰족하게 나와있다. 이는 천복도 없고 말년이 박복할 상이다. 또 코에 살이 없는 것도 일평생 가난할 상이다. 동그랗게 돌출된 눈은 산전수전 겪은 할미의 강인한 표정으로 볼 수 있다. 동그랗게 뜬 눈이 힘이 없어 보이고, 이가 빠진 입모습이 허기져 보이는데, 한평생을 어렵게 살아온 노파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중

얼굴 표정에 있어서 능청스러운 웃음이 있다. 눈은 초생달처럼 둥글게 생겼고, 아래 눈두덩이에 주름이 있다. 관상에서 전자는 호색가상이라 하고, 후자는 자식 인연이 없는 수가 많다고 한다. 이런 상은 놀이에서의 중의 역할과 일치한다.

양반 양반

하회탈 중에서도 대표적인 탈로 가면미술의 극치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부드러운 표정이다. 조형적인 면에서 볼 때 얼굴형에서부터 눈썹, 코, 볼, 입 등이 대단히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양반은 냉수 마시고도 이빨 쑤신다."라는 말처럼 허풍스러움과 여유스러운 표정이 복합되어 있다. 턱은 분리되어 끈으로 매달아 놓음으로써 고개를 젖히면 박장대소하는 표정이 되고 숙이면 입을 다문 화난 표정이 된다.

선비 선비

통속적인 사회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에 찬 표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선비의 위엄과 선비답지 못한 거만스러움도 함께 묘사되어 있다. 얼굴형은 역삼각형으로 이는 관상학적으로 볼 때 치밀한 두뇌와 복잡한 심사를 지닌 상으로서 선비의 상으로 합당하다. 관골이 발달함도, 콧날 끝이 넓은 것도 선비상으로 본다. 또한 눈썹이 곤두선 것은 뭔가에 대한 노기 찬 표정으로 볼 수 있다.

부네 부네

전통사회에서 갸름한 얼굴, 반달같은 눈썹, 오똑한 코, 조그마한 입은 미인의 상으로 여긴 얼굴이다. 눈과 작은 입에는 가벼운 웃음기가 있는데, 이것은 관상에서는 바람기 있는 상이며, 반달같은 눈썹은 예능을 타고난 상이다. 볼은 굴곡 없이 대체로 평평하며, 검게 채색된 머리는 양쪽 귀밑가지 차름하게 내려져 있다. 놀이에서는 양반, 선비의 소첩 혹은 기녀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 관상학적 측면에서 본 하회탈
* 하회탈 제작자이자 하회동 탈박물관장이신 김동표 님의 글입이다.(진주탈춤한마당 자료집 1996-1997, 김동표)

하회탈은 우리 나라의 많은 탈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제 121호, 병산탈 2개 포함)로 지정된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가면 미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회탈은 원래 12개였으나 전해져 오던 3개는 분실되었으며 현재는 나머지 9개와 동물형상의 주지탈 2점을 포함하여 11개가 탈놀이에 사용되고 있다. 하회탈이 지니는 훌륭함에 비해 하회탈을 이해하기엔 아직 많은 어려움이 있다. 몇몇 관심 있는 사람들의 연구가 구체적 성과는 미비한 상태이다. 그래서 좀더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 사회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회탈의 조형적인 면을 관상학적으로 풀어 본 결과, 상당한 접근을 기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전통 사회의 교육서인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인 주역을 바탕으로 한 관상학적 연구는 합리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하회탈은 주지2개 외에는 모두가 사람의 얼굴로 이는 관상학을 기초로 신분적 차이, 직업적 차이 , 경제적 차이르 감안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보인다. 물론 하회탈 전체를 관상학적으로 이해하기엔 부족한 점도 없지 않으리라 본다. 그래서 3가지 방법으로 구분하여 그 특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는 관상학적인 이해, 둘째는 동적(動的)인 묘사의 이해, 셋째 신분적 특성의 이해이다. 하회탈은 증명사진처럼 고정된 표정이 아니라 찡그리거나 웃는, 아니면 조용한 표정을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관상학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봉건 사회가 지닌 신분적 특징을 제각기 잘 나타내고 있다. 동적인 요소는 움직일 때, 특히 사람이 쓰고 행동할 때에 더욱 강하게 나타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므로 하회탈은 수백 년을 내려오며서 마을 사람들의 눈에 기묘한 것을 비쳤을 것이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하회탈을 신령스러운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당시에는 탈을 더욱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만약 함부로 다루게 되면 축을 맞는다하여 궤속에 들어 있는 탈을 꺼낼때나 혹은 보관하기 위하여 다시 넣어 둘때는 항상 궤 앞에 재물을 차려 놓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탈놀이에서 "탈은 신령스러워 탈쓴 광대가 웃으면 탈도 따라 웃고, 탈 쓴 광대가 화를 내면 탈도 화를 낸다." 는 말이 지금도 마을에 전해온다. 이는 하회탈을 쓴 광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면 윗입술과 아래턱이 따로 떨어져 끈으로 매단 턱이 벌어지게 되어 파안대소하는 표정이 나타나고, 고개를 숙이면 입이 다물리어 화난 표정이 되게끔 제작된데서 나온 말이다.

이제 하회탈을 각각의 표정을 관상학적인 면과 신분적 특성으로 나누어 이해해보기로 한다.

양반탈

양반 조형적인 면에서 볼 때 얼굴형에는 눈썹, 눈, 코, 입 등이 대단히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되고 있고 전체적으로 여유 있는 표정을하고 있다. 즉 "양반은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나도 경망스럽게 뛰어 다니지 않는다.", "대추 세알 먹고도 배부르다.", "양반은 냉수 마시고도 이빨 쑤신다." 라는 말 등과 매우 일치되는 표정이라 하겠다. 또한 시각을 달리하여 돌출된 선과 음각된 면을 동시에 보면 허풍스러운 면도 엿볼 수 있다. 허풍과 여유는 서로 다른 느낌이나, 보는 관점에 따라 미묘하게 작용하여 허풍스럽게도 여유 있게도 보이게 된다. 대추 세알 먹고도 배부르다고 하는 말은 여유일수도 있고 허풍일수도 있는 말이며 또한 양반은 냉수를 마시고도 이빨을 쑤신다고 하듯이 양반탈이 허풍스럽게도 보일 때가 있다.
연희 때에 탈 쓴 광대의 동작에서 나타나는 표정을 보자. 양반(양반탈을 쓴 광대)이 기분이 좋거나하여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는 동작을 취하면 이 때 탈은 윗얼굴과 아래턱이 크게 벌어지며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양 언저리 쪽이 부드럽게 위로 올라가 박장대소하는 듯한 표정을 띠게 되며 고개를 숙이면 반대로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탁 붙으면서 노한 표정을 띠게 된다.

선비탈

선비 선비란 충부한 학식을 바탕으로 대쪽같은 지조와 통속에 타협하지 않는 고고한 성품을 지니는 학자라 할 수 있다. 선비탈의 전체적인 표정은 위엄있게도 보이며 지조있게도 보이고, 엄하게도 보이며 노한 것 같이도 보인다. 얼굴형은 역삼각형으로 이는 관상학적으로 볼 때 치밀한 두뇌와 복잡한 심사를 지닌 상이며, 세속적인 면에서 볼 때 매사에 사서 고생하는 형이며, 대체로 내성적인 상이다. 광대뼈가 돌출되고 눈두덩과 볼의 살이 푹 꺼진 것은 학문에만 열중한 나머지 살림살이는 돌보지 않은 것을 나타내고, 눈이 툭 튀어나온 것은 열심히 글을 읽은 탓으로 볼 수 있다. 눈꼬리가 위로 치켜졌고, 오른쪽 눈썹은 아래쪽으로 당겨졌으며 입의 오른쪽 언저리는 위로 향하였다. 즉, 뭔가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얼굴에 상념을 담고 찡그리는 표정을 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눈썹의 카락이 곤두선 것은 불만에 의한 노여움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정탈

백정 원래는 희광이라 불렀다 한다. 희광이는 고려 때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였다. 놀이에서는 살생을 하고는 늘 죄의식 속에서 살다가 천둥벼락이 치는날 결국은 미쳐 버리는 역할이다. 지금의 놀이에서는 소를 잡으며 우랑과 염통을 꺼내 사람들에게 사라고 권유하다가 곧이어 낙뢰의 효과음악(풍물)이 나올 때 비틀거리며 헤매다가 퇴장하는 역할이다.
얼굴형은 이마가 다른 탈에 비해 크게 비뚤어져 있으며 작은 혹이 달렸고 눈꼬리는 뒤로 치켜 올라갔다. 콧날은 다른 탈에 비해 좁으며 입은 아랫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이마와 양 볼에 주름이 많이 나 있다. 험악해 보이는 표정이며 얼굴을 뒤로 젖히면 실성한 웃음으로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전체적인 얼굴 형이 부드럽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마나 아래턱 또는 볼의 돌출된 선 , 코의 모양은 대체로 관상학에서 각형(角形)으로 분류될 수 있다. 관상에 각형의 상은 우물쭈물하지 않고 남보다 먼저 해치워 버린다고 한다. 이는 살생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백정(또는 희광이)에게 합당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마가 비뚤어진 상은 성질이 불량하고 잔인한 상이라 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면 통상 살기가 있다 하며 아랫입술이 윗입술보다 튀어나오면성격이 포악하다고 하는데, 이 또한 백정의 신분에 맞는 상이다. 하회탈 가운데 백정탈은 신분적 특성에 지극히 합당한 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중탈에서 언급하듯 이마의 혹은 음성적 성격의 소유자임을 나타내며 험악하고 살기가있는 상이다. 그러나 놀이에서 살생을 저지르고는 인간으로서 떳떳치 못함을 자책하여 천둥치는 날 미쳐 버리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늘 죄의식 속에 싸여 있는 상으로 표현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동작은 ' 심술궂다 백정걸음' 이라고 전한다. 소르 잡고 그 소의 염통과 우랑을 꺼내 관중들에게 사라고 하는 심술궂은 백정의 역할에 합당하다. 춤사위는 몽두리춤 , 즉 뻗뻗한 동작의 춤사위다 . 건장한 몸이 부드러울 수는 없으리라.

초랭이탈

초랭이 놀이에서 양반의 종의 신분으로 대체로 경망스럽다. 상전인 양반을 대하는 행동이 불손하며 양반과 선비가 서로 인사를 나눌 때 초랭이는엎드린 양반의 머리 위에 올라타 선비와 대신 인사를 한다. 또한 정좌한 양반의 좌편에서 "양반요"하고 부르다가 양반이 돌아보면 다 시 우편에서 "양반요"하고 부르고 또 돌아보면 다시 좌편에서, 또 우편에서 양반을 부른다. 이때 양반은 초랭이가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좌우로 몇번 돌리다가 번거러워하며 손에 쥔 부채로 초랭이를 친다. 또한 중이 여자(부네)와 놀아나다 초랭이에게 들키자 중이 여자를 ㄱ꿰어차고 도망가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매를 불러내 끝내 그 상황을 이야기해주며 나중엔 상전에게 일러바친다. 이처럼 초랭이는 양반의 종으로 양반을 곯리는 듯한 행동을 하며 영악하고 행동거지는 가볍다.
형상을 보면, 이마는 툭 튀어나오고 코는 대체로 짧은 편이며, 코끝은 납작하고, 콧등과 콧방울에 주름이 있고 ,힝믈 주고 있는 듯 가볍게 벌린 입에 이빨을 드러낸 모양이 앙심을 풍은 듯한 형이며, 입술은 아주 얇고 아래턱은 뾰족하다. 눈은 정면을 향해 동그랗게 뚫려 있으며, 볼의 근육과 주름은 좌측은 아래를 또 우측은 위를 향해 있다. 이마가 불거진 상은 관상학적으로 윗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아 파기하고 고생이 많으며 고집불통이라 한다. 이는 자기의 상전인 양반을 조롱하는 놀이에서의 역할에서 드러난다.
또, 관상학적으로 콧등에 주름이 있는 사람은 재산이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종의 신분으로는 부자이기가 어려우며 , 이 주름은 놀이에서 가난한 선비의 콧등 주름이나 떠돌이 중의 콧등 주름과 다름 없으리라 본다. "코가 짧은 사람은 성품이 조급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기 어렵다."는 것도 초랭이의 신분이나 놀이에서의 역할로 보아 합당하다고 여겨지며, 눈썹 뼈가 튀어나온 사람은 성질이 조급하다고 하는데 이 역시 일러바치기 좋아하는 초랭이의 성품상 합당한 상이라 할 것이다. 뺨에 살이 쏙빠진 사람 역시 신경질적이며 가난하여 고생한다고 되어 있다. 가난한 선비탈의 볼에 살이 없는 것이나 초랭이의 빰에 살이 없는 것은 가난함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동작은 "방정맞다 초랭이 걸음"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이는 놀이에서 점잖지 못하게 까불거리며 촐랑거리는 초랭이 역할에 합당한 동작이다.

중탈

중 놀이에서 파계승으로 등장한다. 절간에 공부하는 수도승이 아니라 떠돌아 다니는 떠돌이 중 또는 파계승이다. 놀이에서 파계승 마당이 있으며 이 마당에서 중이 길을 가다가 여자(부네 또는 각시)가 오줌누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순간적으로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자가 오줌눈 자리의 흙을 움켜쥐고 코에 대어 냄새를 맡고서 여자를 탐한다. 그러다 각시의 정부로서, 총각과 결혼하여 신방에 든 각시의 방안의 궤속에 숨어있다가 총각이 잠든틈을 타 총각을 살해하고 각시를 채어가는 역할을 한다.
형상을 보면, 코와 콧방울이 크며 눈은 초생달처럼 가늘게 휘어졌고 정면을 보고 있으며 눈썹과의 사이가 멀다. 이마에 굵은 혹이 있으며 윗입술은 아래로 길쭉하고 뾰족하게 나있고, 따로 달린 턱에 붙은 아랫입술이 돌출되었고, 턱 끝은 모나게 앞으로 나와있다. 눈꼬리 위로 주름이 두 개씩 있고, 코와 볼, 눈두덩, 윗입술에 주름이 나 있다. 눈에서는 능청스러움이 느껴지고, 보는 이에 따라 웃음이 교활하게도 보인다. 얼굴을 뒤로 젖히면 전체적으로 큰 웃음을 띤 표정이 되고, 이 웃음은 어쩌면 해탈한 웃음으로도 보인다.
관상학적으로는 눈이 둥글게 생기면 호색가라 하였고, 아래 눈두덩에 주름이 있으면 자손 연이 희박하고 친척과도 인연이 없다 하였다. 이는 중의 신분상 걸맞는 상이라 할 것이다. 콧등에 주름이 있으면 재산이 쌓이지 않으며, 아울러 콧등에 세로금이 있으면 자식이 없는 수가 많다고 하였다. 이 또한 떠돌이 중으로서 재산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며, 자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 것 또한 중의 신분에 합당한 상이다. 이마에 혹이 있으면 음성적 성격의 소유자라는 말이 있다. 이 혹에 대하여 혹자는 부처의 이마에 있는 백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부처의 혹을 파계승의 혹에 비유하는 것은 어딘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아무리 파계승일지라도 중의 신분으로 여자를 탐한다면 이는 그 스스로도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놀이에서도 행여 누가 볼까 하여 주변을 살피다가 남(초랭이)의 눈에 띄게 되자 여자를 업고 달아난다. 이러한 행동은, 중의 신분으로 해서는 안될 일을 행함이 떳떳치 않음을 스스로 느끼며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행동으로 볼수 있으므로 중의 큰 혹은 놀이에서의 역할에 합당하다 생각한다. (참고로 명쾌한 규명은 아니나, 코가 짧은 사람은 마음이 조급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기 어렵다고 상법(相法)에서 말하고 있다. 이는 하회탈 가운데 중탈과 초랭이탈과 선비탈과 백정탈의 코가 대체로 얼굴에 비해 짧은 편으로, 위의 언급에 합치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중은 떠돌이 중으로서 부자일 수가 없겠고 초랭이 역시 양반의 종의 신분이며 선비 역시 글공부나 하는 살이 푹 꺼진 상으로서 부자로 보기 어려우며, 다음에 할미 부분에서 언급하겠으나 할미 역시 지극히 가난한 할미다.) 능청맞은 중의 걸음은 놀이에서 당당함도 아닌 여유스러움도 아닌, 여자 오줌눈 자리의 흙을 긁어모아 움켜쥐고 냄새를 맡고 여자를 탐하는 파계승의 동작에 합당한 걸음이다.

할미탈

할미 놀이에서 가난하고 찌든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오래 산 노파로 등장한다. 할미 마당에서 할미는 베틀에 올라앉아 베를 짜면서 일평생 고달프게만 살아온 자신의 생애에 대한 신세타령을 베틀가로 풀어낸다. 일평생 베를 짰으면서도 서낭대에 새 옷 한 번 못 걸어보고(당시에 서낭대에 새 옷을 걸면 자신에게 복이 온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서낭대에 새 옷을 걸었다고 함) 스스로 팔자가 안된다고 하며 허리에 찬 쪽박으로 풀어 동냥하는 시늉을 한다. 또한 양반 곁에 다가가 양반과 춤을 추려다 양반에게 떠밀려 나고 선비 곁에 가서는 선비에게 서도 떠밀리는 퇴색된 할미의 처량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백정이 들고 나온 우랑을 양반과 선비가 서로 자기가 사겠다고 당기다가 결국 땅에 떨어뜨렸을 때 - 이 상황에서, 백정은 자기가 팔려고 들고 나왔기 때문에 자기 것이고 양반은 자기에게 먼저 사라고 했기 때문에 자기 것이고 선비는 자기가 먼저 사려고 했기 때문에 자기것이라며 서로 뺏으려다가 땅에 떨어뜨리고 만다. - 할미는 우랑을 주워 들고 소 불알 하나 가지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한다고 힐책을 한다. 이는 세상 오래 산 할미의 강인한 정신에서 나오는 행동이라 할 것이다.
형상을 보면, 머리는 위로 뾰족하게 솟아 있고, 눈은 둥그렇게 돌출된 것이 강인하게 보이며 코는 살없이 뾰족하며 입은 이빨 없는 할미의 합죽한 모양으로서 또 다른 면에서 보면 허기진 표정이기도 하다. 아래턱은 얼굴과 함께 붙어 있으며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다. 아래 눈두덩과 볼과 윗입술에 주름이 있다. 그리고 얼굴에 흑반(검버섯)이 피어 있다.
관상학적으로 정수리가 위로 솟은 사람은 한평생 쓰라린 노고가 많다고 하고, 눈아래(와잠)에 수직의 주름이 있으면 일생 동안 남의 빚을 갚기 어렵다고 한다. 또 코끝이 뾰족하면 빈곤을 면치 못할 상이며 입술 끝이 아래로 향하면 가난할 상이며 턱이 살이 없고 뾰족하면 말년에 박복할 상이라고 되어 있다. 아울러 노인이 흑반(검버섯)이 생기면 장수할 상이라 한다. 놀이에서 베틀에 앉아 신세타령을 하는 내용이나 서낭대에 한평생 새 옷 하 번 못 거는 내용, 쪽박을 들고 동냥하는 내용과 너무나 일치하는 상이라 하겠다. 또한 흑반은 오래 산 할미의 상에 합당하다. 삐뚝삐뚝한 할미 걸음은 늙어 허리는 굽고 엉덩이는 뒤로 쑥빠진 꼬부라진 할미의 동작이다. 할미 춤은 엉덩이를 삐뚝거리는 엉덩이 춤이다.

이매탈

이매 놀이에서 바보스러운 선비의 하인 역으로 등장한다. 초랭이와 이매는 같은 하급 계층으로 초랭이는 종(양반의 종)이라 하고 이매는 하인이라 칭한다. 종은 피할 수 없는 세습적 신분이고 하인은 필요에 따라 면할 수도 있는 신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매는 자기만 똑똑하고 수단만 있으면 하인을 면할 수도 있다. 놀이에서 선비가 바보스러운 병신을 하인으로 삼은 것은 선비의 격정적인 면과도 관계가 있으리라 본다. 이매는 양반 선비 마당에 등장하여 다리 한쪽이 틀어져 절름거리며 비틀거리는 바보스러운 행위로 인해 초랭이로부터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형상을 보면, 눈과 눈썹은 아래로 출 쳐져 있으며 입의 웃는 모양은 바보스럽기도 한 반면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전체적인 표정 또한 바보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아래턱이 없는 것에 관하여는 하회탈을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허도령이 턱을 미처 만들지 못한 채 죽어버려 지금까지 턱이 없는 채로 전해져 온다는 전설이 있다.
관상에서 우선 드러나는 것은 코가 비뚤어져 있으면 몸의 어는 한 부분이 비뚤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놀이에서 다리 한쪽이 틀어져 비틀거리는 내용과 쉽게 일치한다. 또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으면 심성이 순하고 착하다고 하는데, 놀이에서 남을 비방하거나 해롭게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오히려 당하는 것을 보면 일면 바보스러운 성격이나 다른 일면 속마음이 착한 순한 성격이라 할 것이다. 동작을 보면, 전해져 오는 말 가운데 '비틀비틀 이매걸음'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병신 역의 이매의 행동에 합당한 말이다.

부네탈

부네 전해져 오면서 일면 과부 탈이라는 또 하나의 명칭이 붙어 있다. 신분은 과부, 기생 또는 양반, 선비의 소첩 등으로 전해져 온다. 양반·선비 마당에 양반과 선비가 부네를 불러 놓고 부네를 유혹하기 위하여 또는 부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서로 자신의 지체 자랑과 학식 자랑을 한다. 이때 부네는 다리를 꼬는 듯한 무릎을 살폿살폿하는 오금 춤을 추며 손가락을 턱 부분에 대고 머리를 좌우로 까딱까딱 거리며 유혹하는 행동을 하다가 선비의 어깨를 주무르며 선비 앞에서 애교를 떨다가 다시 양반 곁으로 가서 양반의 머리에서 이도 잡아주며 애교를 부린다. 이에 앞서 양반은 부네를 유혹하기 위하여 문자를 써 가며 부네에게 정중한 인사를 한다. 이렇듯 양반과 선비는 서로 부네를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럴 때 부네는 이쪽저쪽 다니며 교태를 부린다.
형상을 보면 갸름한 얼굴, 반달 같은 눈썹, 오똑한 코, 작은 입으로 우리 전통사회에서의 미인의 조건에 합당한 얼굴형이다. 그러면서 눈과 작은 입에 가벼운 웃음기가 있으며 코는 날씬하게 잘 생겼다. 볼은 굴곡 없이 대체로 평평하며 검게 채색된 머리는 양쪽 귀밑까지 차롬하게 내려져 있다. 이는 당시 과부의 신분임을 나타내는 머리형이었다. 얼굴형은 동그스름한 타원형, 즉 계란형이며 이마 부분은 두꺼우나 아래턱 부분은 얇게 만들어져 있다. 하회탈 가운데 얼굴이 약간 비뚤어져 있다. 움직일 때, 코를 바르게 세우면 머리가 왼쪽으로 머리를 세우면 코가 왼쪽으로 치우쳐진다.
관상학에서, 여자의 눈꼬리와 입 언저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으면 바람기가 있는 상으로 분류된다. 또한 중국 상학(상학)에서 여자의 이마가 비뚤어지면 여러 남자를 만날 상이라 한다. 동작도 여자가 머리를 좌우로 까딱까딱 거리면서 이 또한 정숙하지 못하여 뭇 남자를 유혹하는 바람기가 많은 상이라 한다. 놀이에서 양반과 선비 사이를 오가며 교태를 부리는 부네의 역할과 일치하는 얼굴형으로써 증명된다.

각시탈

각시 얼굴 표정은 대체로 무겁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눈은 아래로 살포시 내려깔고 있으며 입은 힘을 주어 꾹 다물고 있다. 윗머리 타래는 가채(얹은 머리)이며, 왼쪽머리 타래는 앞으로 나와 있고 오른쪽 머리 타래는 뒤로 빠져 있다. 이 때문에 좌우 머리 타래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각시탈의 돌출된 광대뼈는 관상학에서 과부상으로 해석된다.
옛날의 각시는 '봉사 행세 3년, 벙어리 행세 3년, 귀머거리 행세 3년' 이라는 말처럼 시집살이의 많은 어려움을 참고 살아야 하는데, 하회탈 가운데 다른 탈들은 모두 입이 열려 있는데 반해 각시탈만은 입이 다물어져 있다. 더구나 입 옆에 근육이 선 것으로 보아 힘을 주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속으로 삭히며 살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눈이 아래로 향한 것은 함부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는 각시의 신분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머리 타래가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걸을 때에 얼굴을 움직이지 않고 걸음걸이가 조용조용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령 각시가 한 걸음을 걸으면 그때엔 오른쪽 머리 타래가 앞으로, 왼족 머리 타래는 뒤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각시의 춤사위는 '사뿐사뿐 각시걸음' 이라는 말처럼 눈을 아래로 깔고 움직임 없이 조용히 가볍게 걷는 것으로 이는 부네의 성격과 대조를 이룬다.
원래 하회 마을의 서낭신은 무진생 의성 김씨 각시신으로 정해져 오고 있다. 이는 무진생 의성 김씨 각시가 17살에 하회 마을로 시집을 왔다가 시집오던 그해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다가 나중에 죽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죽은 그 각시의 혼이 마을을 지켜 줄것이라 믿으며 서낭신으로 모셨다 한데서 유래한다.
연극에서 등장인물의 복식과 분장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관객에게 드러내 주며, 극적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해 주는 더할 나위 없는 중요한 수단이다. 줄거리와 역할에 맞게 탈과 복장을 갖춘 광대들의 모습과 움직임으로 극적인 상황을 도출하는 탈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전통탈춤은 우리 조상들의 문화를 이해하게 하는 교육적 자료로 활용되기 위해서도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전통탈춤의 복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하회탈놀이의 복식과 분장에 관한 첫 기록은 최상수의 <하회가면극의 연구>(1959)일 것이다. 그 밖에 유한상의 논문 <하회별신 가면무극 대사>(1959), 이두현의 <한국가면극>(1969)이 있다. 이들 자료는 등장인물의 복식과 분장에 대해 명칭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한편 1980년에 성병희도 <하회별신탈놀이>라는 논문에서 복식과 분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1928년 당시 17세의 나이로 별신굿에 직접 참여했던 이창희 옹의 제보를 토대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그 어느 자료보다도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그리고 1986년에 발표된 권광희의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복식>이라는 논문은 특별히 복식과 분장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한 최초의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상의 보고서에 제시된 하회탈춤의 복식을 정리해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또한 전경욱이 <한국의 탈>에서 제시한 1941년의 하회탈춤 사진자료는 명칭만 나열한 기록들과는 달리 실제의 모습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성병희(1980)
1928년 별신굿 복장
권광희(1986)
1985년 보존회 복장
각시 저고리, 치마, 짚신 초록삼회장저고리, 다홍치마, 흰명주수건, 빨간고무신
주지 blank 바지, 저고리, 삼베자루
초랭이 벙거지, 바지, 저고리, 조끼, 행전, 미투리 벙거지, 바지, 저고리, 조끼, 쾌자, 행전, 미투리
백정 평량자, 바지, 저고리, 미투리, 나무도끼, 칼, 망태 평량자, 바지, 저고리, 짚신
할미 머리 흰수건, 흰저고리, 회색치마, 짚신, 쪽바가지 흰민저고리, 회색치마, 흰머리수건, 짚신
부네 저고리, 푸른치마, 짚신 노란반회장저고리, 남색치마, 빨간고무신
종이고깔, 두루마기, 염주, 누런색도포, 미투리 송낙, 바지, 저고리, 행전, 재색장삼, 붉은가사, 짚신, 염주
이매 벙거지, 바지, 저고리, 행전, 미투리 자주벙거지, 바지, 저고리, 녹색조끼, 행전, 미투리
양반 정자관, 도포, 두루마기, 바지, 저고리, 미투리, 부채 정자관, 바지, 저고리, 주의, 소색도포, 세조대, 부채, 미투리
선비 유건, 도포, 두루마기, 바지, 저고리, 미투리, 담뱃대,낭선 유건, 바지, 저고리, 주의, 청색도포, 세조대, 낭선(신랑역), 담뱃대


진정한 의미로서의 마지막 하회별신굿은 1928년에 치러졌다고 할 수 있다. 하회탈춤의 복식은 다른 탈춤의 경우와는 달리 미리 마련되어 있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별신굿의 치러질 때마다 당시 장만할 수 있는 평소의 복장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28년 당시에도 중광대는 승복을 구할 수 없어서 평상복을 입고 중의 흉내만 내었다고 한다. 1928년의 별신굿에서 착용된 복식이란 소위 개화기에 착용되었던 일상적 복장이다. 물론 그 이후에 행해진 별신굿 탈놀이에서도 복식과 분장 등에 다소 차이가 확인되지만, 탈의 역할에 따른 복장의 기본구조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표에서 제시되는 복식과 분장에 대한 제안은 하회별신굿 복식과 분장의 시점을 조선 후기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해서 그대로 실현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한계점도 아울러 지적한다.

인물 관모 의복 신발 버선 소품
각시 blank 녹색삼회장저고리, 단속곳, 홍색치마 (오른쪽 꼬리) 당혜/꽃신 버선 명주 수건
무동 흰수건 흰바지, 행전, 저고리 짚신 버선 귀주머니
주지 blank 흰바지, 행전, 저고리, 소색 삼베자루 짚신 버선 blank
초랭이 벙거지 흰바지, 행전, 저고리, 흑색쾌자 짚신 버선 방망이
백정 패랭이 흰바지, 저고리 짚신 blank 칼, 도끼, 망태기
blank 소털 소재의 소 형상 덮개와 바지 짚신 버선 우랑
할미 흰수건 흰색 민저고리, 짚신, 고쟁이, 회색치마 (오른쪽 꼬리) 짚신 버선 쪽박
부네 blank 노랑(반)회장 저고리, 고쟁이, 남색치마 (오른쪽 꼬리) 당혜/꽃신 버선 blank
송낙 흰바지, 행전, 저고리, 회색장삼, 가사 짚신 버선 염주, 목탁
이매 blank 흰바지, 저고리 짚신 blank 귀주머니
양반 정자관 바지, 행전, 저고리, 청색 도포 태사혜/흑혜 버선 세조대(홍), 부채
선비 유건 바지, 행전, 저고리, 백색도포 흑혜/미투리 버선 세조대(청), 담뱃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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