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의 의병장 정언우(鄭彦佑)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全羅觀察府)」은 임진왜란(1592년)‚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이인좌의 난(1728년)이 일어났을 때 활약한 호남지방 의병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1799년(정조 23)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7대손 고정헌(高廷憲)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정언우 공의 기록은 권지2의 ‘일도거의제공사실(一道擧義諸公事實)’편에 게재되었다.
11세 정언우(1552~1592) 공의 선고(先考)는 생원 인량(仁良 1535~?), 조부는 사헌부지평 능파정(凌波亭) 휴(貅 1495~1558) 공이다. 증조부는 학문으로 천거 받아 예조참판, 예조판서를 지내신 퇴은재(退隱齋) 응종(應鍾1457~1506) 공이시니 이름난 명문가였다.
정언우(鄭彦佑) 공의 자는 종언(宗彦), 호는 둔암(遯菴)인데 명종 임자(壬子) 1552년에 태어나셨다. 41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임금은 의주까지 파천하였다. 이때 창의거병(倡義擧兵)하고 청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셨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청주성 전투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당시 왜군은 1592년 5월 동래성 전투를 승리한 이후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7월 17일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한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명나라 군대의 참전에 따라 장기농성전(長期籠城戰)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에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호남으로의 진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평양성 전투 이후에 왜군은 장기농성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호남 진출을 생각하였고, 그 중간 거점으로 청주를 설정하였다.
6월 23일 관군의 청주성 공략이 실패하고, 7월 29일 관군과 승병의 재차 공격도 실패하였다. 8월 1일 관군과 조헌 등의 의병, 영규대사의 승병이 서문과 남문을 통하여 일제 공격하며 하루 종일 전투를 치룬 결과, 싸울 의지가 꺽인 왜군이 물러나 청주를 탈환하였다. 청주성의 회복은 단순히 청주 지역만의 회복이 아니라, 왜군이 호남 지역과 충청우도(忠淸右道)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것이다.
둔암공이 이끈 호남 의병도 이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끌었으나, 남문 전투에서 둔암공은 부상을 입고 순절하셨다. 26세의 아들 은수(訔秀)가 군대를 대신 이끌고 경성까지 진군하여 적군 수백 급을 베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장하다! 부자의 충절이 구국의 기반이 되었으니 어찌 나라와 가문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선대의 공적으로 일궈낸 가재(家財)와 가동(家童) 등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음에도 손자 삼형제도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린 둔암공의 기록을 살펴본다. 이 기록을 보면 공의 의병 모집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에 500여 명, 두 번째 모병에는 순창(淳昌)에서 의청(義廳)까지 설치하고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았는데 가동(家僮) 60여 명도 합류하였다. 가재와 역량을 총동원한 것이다. 모병 과정에서 이 고장에서의 둔암공 집안의 학문적 경제적인 지도력과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 자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鄭彦佑字宗彦號遯庵光山人. 高麗三重大匡臣扈後 參判應鍾曾孫. 從游栗谷李先生. 天姿英偉文章夙就. 廢母朝抗章叫閽. 姜睡隱沆爲道義交. 喪廬墓壬辰聞大駕西狩. 發義檄願從者五百餘人. 欲赴行在 猝病疽 以所募義旅 梁山璹李光宙金光運等 送倡義使金公幕. 過數月病疽小差 傳檄列邑 再募義旅得數百 及家僮六十餘名 兵粮百餘石. 設義廳於淳昌 與李一道李七道諸公議捍禦之策 時金斗南等亦以兵粮數百來附. 公曰幷日行之當以赴急難. 諸公曰諾遂推公爲將 建牙登壇. 以金斗南爲前鋒 李七道爲殿 以公之子將仕郞訔秀爲從事官 李一道爲軍餉之任. 至淸州遇賊力戰 忽爲賊弩所傷且宿疽尤劇卒于軍臨終三呼. 過漢公子訔秀誓以復讐 代領父兵直到京城 斬賊數百餘級. 退走乃罷兵 葬廬墓. 以四未能扁其齋逍遙以終. 宣廟朝以孝除參奉
정언우(鄭彦佑)의 자는 종언(宗彦)이고 호는 둔암(遯庵)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고려 삼중대광 신호의 후손으로 참판 응종의 증손이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뛰어났으며, 문장력을 일찍부터 성취하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대궐 문 앞에서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고, 수은 강항(姜沆)과 도의(道義)로써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부모님의 상을 당해 여막을 지키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大駕)이 의주로 피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니 500여 명이 모였다. 임금의 피란처로 가려 했으나 갑자기 악성 종기(疽)가 발병하여 직접 가지 못하고, 모집한 의병들을 양산숙(梁山璹), 이광주(李光宙), 김광운(金光運) 등에게 맡겨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공의 진영으로 보냈다.
몇 달 후 병이 조금 나아지자, 다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군사 수백 명과 가동(家僮) 60여 명, 군량 100여 석을 모았다. 순창(淳昌)에 의청(義廳)을 설치하고 이일도(李一道), 이칠도(李七道) 등과 방어 대책을 논의했으며, 김두남(金斗南) 등이 군량 백여 석을 가지고 합류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하고 어려운 상황을 구하기 위해 행군할 때 사람들이 그를 장수로 추대하자 이를 수락하고 대장에 올랐다. 김두남을 선봉, 이칠도를 후위, 아들 장사랑(將仕郞) 정은수(鄭訔秀)를 종사관, 이일도를 군향(군량 담당)으로 삼아 출전했다. 청주(淸州)에 이르러 왜적과 격렬하게 싸우던 중 왜적의 탄환(弩)에 부상을 입었고, 옛 종기까지 도져 결국 군중에서 사망하였다. 임종 때 크게 세 번 소리를 질렀다.
아들 정은수(訔秀)는 한강을 건너며 복수를 맹세하고, 아버지의 군대를 대신 이끌고 경성까지 전진하여 왜적 수백 급의 목을 베었다. 왜적이 퇴각하자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여막(廬幕)을 지켰다. 이후 네 가지 미흡함이 있다는 뜻의 ‘사미능(四未能)’을 당호로 지어 서재에 걸고 소요하며 여생을 마쳤다. 선조 조에 그의 효행과 충절을 기려 참봉(參奉) 직책이 제수되었다.
* 대가서수(大駕西狩) : 대가파천(大駕播遷). 임진왜란 시 선조 임금의 의주 피란.
| 신립(申砬)이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조정이 크게 놀라 왕자들을 각 도(道)로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하고, 이양원(李陽元)과 김명원(金命元)으로 하여금 도성에 머물며 지키게 하였으며, 선조(宣祖)는 호종(扈從)하는 신하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윤두수(尹斗壽)⋅이항복(李恒福) 등 100여 명을 거느리고 대궐을 나가 서쪽으로 향하셨다. 적병이 또 대동강(大同江)에 접근하자 왕이 윤두수⋅김명원⋅이원익(李元翼)으로 하여금 평양을 지키게 하고, 대가를 움직여 북도 지방으로 향하다가 가토 기요마사가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길을 바꾸어 의주(義州)로 향했다 |
*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
* 의려(義旅)) :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을 물리치기 위(爲)하여 백성(百姓)들이 자발적(自發的)으로 조직(組織)한 군대(軍隊). 또는 그 군대(軍隊)의 병사(兵士). 의병
* 梁山璹 양산숙 :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의병장(義兵將)(1561~1593). 자(字)는 회원(會元). 천문(天文)·지리(地理)·병학(兵學)에 능(能)하여 선조(宣祖) 24년(1591)에 천상(天象)을 보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예언(豫言)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주(晉州)에서 전사(戰死)하였다.
* 창의사김공(倡義使金公) : 김천일(金千鎰). 창의사(倡義使)는 ‘나라에 큰 난리가 났을 때 의병을 일으킨 사람에게 임시로 주는 벼슬’이다. 김천일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지지를 받아 군사로 추대되었고, 이후 ‘창의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 김천일(金千鎰 1537~1593) : 선조(宣祖) 때의 의병장(義兵將). 자(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건재(健齋).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나주(羅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경기(京畿), 경상(慶尙), 전라(全羅), 충청(忠淸) 4도(道)에서 활약하였으며, 진주성(晉州城)이 함락(陷落)되자 자결(自決)하였다. 저서(著書)에 ≪건재집≫이 있다. |
* 김두남(金斗南)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계복(金啓福)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장으로서 자원하여 싸움터에 나아가 많은 적을 죽였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군량 수백 석을 모았으며, 접반사 정기원과 전라병사 이복남을 도와 성을 지키는 데 힘을 다하고 방책을 세워 많은 공을 세웠다. 남원성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 병일(幷日) : 밤낮을 가리지 않고
* 부급난(赴急難) : 타인의 급하고 어려운 처지를 돕기 위해 달려가다.
* 장사랑(將仕郞) : 조선시대에 둔 종구품(從九品) 문관(文官)의 품계.
* 적노소상(賊弩所傷) : 그 당시 왜군의 무기로 조총, 장창, 왜검이 주종이고 활의 사용은 알려지지 않았음을 미루어 적의 조총 탄환의 피격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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