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인생항로(人生航路)
나는 경기도 가평(加平)에서 시작하여 인천 연수구 청량(淸凉)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停年退職)하기까지 만 40년간 교직생활(敎職生活)을 했고 교장(校長) 직위(職位)까지 이를 수 있었으니 나름으로 행운(幸運)도 따랐던 것 같다.
1947년 6.25사변 전 출생으로, 가난한 강원도 강릉 학산 3리 시골 금광평(金光坪) 가난한 마을에서 가난에 쪼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강릉 농고(農高) 안에 처음으로 개설되었던 강릉 농고 병설 관동중학교(關東中學校), 강릉고(江陵高)를 거쳐 인천교대(仁川敎大)를 졸업했다는 것도 큰 행운이었는데 인천교육대학을 졸업하고 평생을 교직에 있다가 2009년, 인천 연수구 청량(淸凉)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停年退職)했다.
인천교대에 입학하던 1967년, 교대신문에 신춘문예 작품 현상모집을 한다는 기사를 보고 ‘갈매기의 사념(思念)’이라는 제목으로 단편(短篇)을 써서 제출했더니 당선되었다.
당시 인천교대는 2년제로, 제물포에 있었는데 졸업성적이 좋으면 인천을 비롯하여 수원, 의정부, 안양, 시흥 등 가까운 도시에 발령이 났지만 나는 교육학에는 관심이 없던 때라 성적이 좋지 않아서 1969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초임발령이 당시 경기도 시골 벽지로 꼽히던 가평(加平)이었는데 6년간 근무하다가 75년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인생역마차(人生驛馬車)라고나 할까, 1981년 7월에 경기도 인천시에서 인천직할시로 승격(昇格)되었는데 성적이 좋아 인천으로 발령을 받았던 동기들은 경기도로 전근을 가서 인천으로 다시 들어올 수 없었고, 성적이 좋지 않아 산간오지(山間奧地) 경기도 가평(加平) 초임발령이던 나는 가평에서 근무 후 인천으로 들어왔는데 퇴직까지 총 40년간 다시는 인천에서 경기도로 발령받지 않고 인천에서 정년퇴직하였다.
나는 84년, 인천교대 야간대학에서 2년간 음악교육을 전공, 또 연이어 청주 교원대학에서 음악 전문과정(6개월)을 이수했으니 어떻게 보면 부전공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직 생활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나는 주로 연구부장(硏究部長)을 많이 맡았는데 인천 건지초(乾池初)에 근무할 때 인천시 교육청의 컴퓨터연구학교로 지정을 받아 연구부장을 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학교 홈페이지인 ‘건지골 소식’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1990년대 초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절인데 1992년 어느 날, 교장이 느닷없이 나를 교장실로 부르더니 인천교육청 지시라고 하며 우리 학교를 인천시 컴퓨터시범학교로 지정을 한다고 하니 나더러 연구학교 운영계획을 세우라고 한다.
당시는 컴퓨터(Computer)가 처음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라 컴퓨터에는 전혀 문외한이던 나는, ‘저는 컴퓨터를 전혀 모릅니다. 저는 연구부장을 못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꾸십시오.’
교장 선생님(김0환)은 나를 보고 애원하는 표정으로 교육청 지시를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니 제발 좀 맡아달라고 통사정조(通事情調)로 부탁을 한다.
마음이 약한 나는 곧바로 인천교육연구원을 찾아가서 당시 대학 동기로 인하대 야간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연구사(하0철)를 찾아가서 내 사정을 토로했더니 자기가 적극 도와줄터이니 맡아보라고 한다.
당시 인터넷(Internet-국제통신망)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PC 국내통신망’이라 불리던 국내통신만 가능한 통신사만 있었는데 하이텔(HiTEL), 천리안(Chollian), 나우누리(Naunuri), 유니텔(Unitel)이었다. ◈PC-(Personal Computer)
하(河) 연구사는 하이텔(HiTEL) 속에 인천지역 통신망인 인디텔(Inditel)이 별도로 개설되어 있으니 그곳 사무실에 찾아가서 학교통신망(현 학교 홈페이지)을 개설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보라고 한다.
나는 연구원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인디텔(인천지역 통신망) 인천본부로 찾아가서 허락을 받고 곧바로 컴퓨터가게에 가서 컴퓨터를 한 대 사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밤새워 책을 들여다보며 컴퓨터를 익히고 인디텔과 협력하여 개설한 것이 우리나라 ‘전국 최초의 학교 홈페이지’인 학교통신망 ‘건지골 소식’(1993년 개설)이다.
당시 가정에는 컴퓨터가 거의 없던 시절로, 하이텔에서 단말기(端末機)라고 조그만, 오로지 통신만 되는 하이텔 단말기(端末機)를 무상(無償)으로 빌려주었는데 내가 직접 트럭을 빌려 전화국에 가서 한 차 실어와 운동장에서 학부형들을 불러 나누어주고 가입하는 방법, 운영하는 방법 등을 유인물로 만들어 나누어 주고.... 하이텔 단말기는 크기도 작을뿐더러, 마우스(Mouse)도 없고 조그만 자판만 있어 오직 통신만 가능했다.
1994년 컴퓨터시범학교 보고회를 했는데 교육부, 한국교육개발원(KEDI), 서울, 부산, 대구, 심지어 포항 포철초(浦鐵初)에서까지 몰려와서 질문을 해대고, 보고서는 물론이려니와 개설방법, 운영방법까지 유인물을 만들어 들려 보내느라 고역(苦役)을 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 최초의 학교 홈피 ‘건지골’ / 전국 최초의 학급 홈피 ‘별똥마을’ / 가현초 교가 / 황해문고(黃海文庫) 기사
♧두 번째 사진은 신문기자가 우리 집에 와서 내 서재에서 찍은 사진
이듬해(1995년), 인천 부평남초(富平南初)로 전근하여서는 5학년 7반 담임을 맡고 전국 최초의 학급 홈페이지인 ‘별똥마을’(1995)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그 이후 우리나라의 초중고(初中高) 학교마다 학교 홈페이지와 학급 홈페이지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으니 내가 선두주자(先頭走者)였던 셈이다.
당시 부평남초(富平南初)는 교생실습학교였는데 나는 가던 해 체육부장, 다음 해부터 계속 실습부장(교무부장)을 맡아서 바빴지만, 학급 홈페이지를 개설했었다.
내가 만들어 준 우리 반(5-7) 아이들의 아이디(ID)는 출석번호에 따라 내가 붙여주었다.
별똥마을이니 별 이름으로, 남자들은 북극성1, 북극성2, 북극성3... 여자들은 아기별1, 아기별2, 아기별3....
컴퓨터를, 정보통신을 전혀 모르던 시절, 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모아 열심히 교육했다.
학급통신망의 메뉴는 ‘1. 별똥 게시판’, ‘2. 학습안내’, ‘3. 우리 반 이야기’, ‘4. 글짓기 교실’, ‘5. 질문이요!’, ‘6. 가정통신’, ‘7. 별똥우체국’, ‘8. 별들의 대화’의 8개 방으로 꾸며 운영하였다.
요즘의 화려한 학교, 학급 인터넷 홈페이지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겠지만 당시로는 한껏 멋을 낸, 알차게 꾸며진 홈페이지였다고 생각된다. 이 학급통신망도 굉장히 활성화되어 일반인들도 들어와 놀라곤 했는데....
또, 당시 내 나이 40대라 40대의 사람들을 모아 ‘40사모(40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모임방도 인디텔(INDITEL/인천지역통신망) 속에 개설했는데 회원이 40여 명으로 굉장히 활성화되었던 기억도 난다. 수없이 많은 번개팅도 하고 기금을 모아 인천 농맹아(聾盲啞) 학교를 방문하여 선물(점자 용지 5.000 매)도 기증하고...
당연히 내가 운영자였는데 당시는 운영자를 시삽(Sysop:System Operator)이라고 불렀었다.
이러한 우리나라 정보통신교육에 앞장섰던 공로를 인정받았던 때문이었는지 나는 1998년에 국무총리가 주는 공무원의 자랑인 ‘모범공무원’으로까지 선정되었으니 영광이며 인생의 보람이라 하겠다. 나는 교장, 교감 승진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었는데 내가 모시던 부평남초 교장 선생님의 꾸중으로 곧바로 승진했다.
그러나 지금도 서운한 것은 인터넷에 ‘우리나라 최초로 학교, 학급 홈페이지를 개설한 사람은?’ 하고 올려보아도 내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웃기는 나라이다.
또 이따금 교가(校歌)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새로 개교하던 인천 건지초(乾地初), 가현초(佳峴初), 경명초(景命初)의 세 학교 교가를 내가 작곡하여 현재도 아이들 입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도 뿌듯하다.
현재(2024년), 인천 청라지구에 있는 경명초(景命初)에는 손자(초4, 초6) 둘이 다니고 있는데 놀라는 표정.... 인생항로(人生航路)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