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우디의 상상력 - 구엘공원(Parc Guell)
몬세라트에서 돌아와 곧바로 간 곳이 구엘공원(Parc Guell)이었다. 천재 건축가였는지,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었는지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가우디(Antoni Gaudi) 같은 사람에게 구엘백작은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집짓기를 맡기는 모험을 했다니 신기하다.
가우디의 상상력 / 기기묘묘한 건축 / 동화 속 같은 예쁜 집(경비실)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이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기 위해 가우디에게 의뢰하였다고 한다.
구엘백작은 이곳에 고급 주택 60호 이상을 지어 부유층에게 분양하려고 하였지만 그러던 중, 가우디가 죽는 바람에 3채만 분양되고 나머지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가우디가 죽은 후 바르셀로나시가 사들여 다음 해 시영(市營)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하는데 구엘공원을 돌아보노라면 마치 동화 속 세상을 거니는 듯하다.
공원 입구에 있는 동화 속의 집처럼 예쁜 건물은 관리실과 경비들의 숙소 건물이었다고 한다.
카탈루냐 광장 / 아기자기한 광장 입구 / 광장의 조각 작품
카탈루냐 광장은 바르셀로나의 중심부로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광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가족성당을 가느라 입구에서 대충 사진만 몇 장 찍고 서둘러 돌아섰는데 좀 꼼꼼히 볼 걸 하고 나중 후회를 많이 했다. 전철을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역에서 나오면 바로 눈앞에 어마어마한 성가족성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4> 성 가족성당(Sagrada Família)
이미 구엘공원에서 가우디의 상상력을 엿보기는 했지만, 성 가족성당의 건물 모습을 보면 정말 인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기기묘묘한, 어쩌면 괴기하기까지 한 모습에 감탄과 함께 소름이 끼치기조차 한다.
성당 앞 광장은 넋을 잃고 쳐다보는 관광객들과 그들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 소리로 가득하다.
성 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 외부 모습
이 성당이 들어서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바르셀로나의 한 출판업자는 가톨릭의 총 본산인 로마 바티칸(Vatican)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ilca di San Pietro)을 가보고 큰 감명을 받아 바르셀로나에도 대성당을 짓자는 운동을 벌여 시민 모금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우디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성가족성당 내부 모습
1882년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비야르(F. de P. Villar)는 감명을 받아 무보수로 성당 건설을 시작했지만, 바르셀로나 교구는 싸게만 지으려고 공사비를 제대로 주지 않자 1년 만에 포기하고 제자였던 가우디를 후임자로 추천한다.
가우디는 31세 때 공사를 맡았는데 그는 스승 비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을 모두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면서 43년간 이 공사에 모든 정열을 쏟아붓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26년, 교통사고로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 성당은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데 가우디의 사망 100주년이 되는 2026년을 완공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가우디의 유해는 이 성당의 지하 납골당에 안장되었는데 원래 이 납골당에는 성인이나 왕족의 유해만 안치될 수 있지만, 로마교황청에서는 그의 신앙심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허락했다고 한다.
우리가 예매한 입장권은 오후 2시부터 입장이라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성당 앞 작은 연못이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우리처럼 기다리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2시가 되어 문 앞에 갔는데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이 없다. 입장하면 입구에 성당을 설명하는 오디오가 있는데 한국어 기능이 없어 영어 오디오를 귀에 걸고 설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한국어로 설명하는 오디오도 있겠지?
조금 실망한 것은 내부가 너무 휑뎅그레 비어있는 느낌이다.
스페인을 여행하며 여러 곳에서 성당들을 보았는데 내부모습이 하나같이 화려하고 벽면마다 빼곡히 성화(聖畫)를 비롯하여 성인 성녀, 예수님과 성모님의 조상(彫像)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곳은 건축물은 아기자기하고 신기하지만, 건물 내부는 거의 텅 빈 정도이니 조금 썰렁하다.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정과 흡사 해골, 혹은 갈비뼈 모양의 기괴한 기둥들이 어지럽게 얽혀있고, 아기자기한 문양들로 가득 채워진 건축기법은 가우디의 상상력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영역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앙 홀에 신도들의 좌석은 있는데 앞쪽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祭臺)도 없고 단지 천장에 매달린 캐노피(노란 우산 모양)에 십자가를 지고 있는 예수님이 달랑 매달려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런데 중앙 홀 뒤편에 기도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하 1층에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대도 준비된, 중앙 홀보다 훨씬 작은 예배실이 보인다.
<5> 가우디의 슬픈 최후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다가 지나가던 전차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옷차림을 보고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옆에 팽개치고 가버렸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택시를 잡았는데 노숙인으로 생각한 기사들이 그냥 지나가 버려 3번의 승차 거부 끝에 4번째로 잡은 택시기사가 겨우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도 2곳이나 진료를 거부하자 택시기사는 빈민구제 무상병원에 내려놓고 가버렸다고 한다.
병원 입구에 방치된 채 누워있던 가우디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병원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깜짝 놀라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에게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것이 낫다.”며 그대로 빈민병원에 남았고 결국 사흘 후인 1926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를 친 전차 운전수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고, 승차를 거부한 택시기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택시기사 3명과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은 1926년 6월 13일,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유해는 대성당 지하 납골당에 안장(安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