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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환상과 미래
이현래 목사님 청년부RT 말씀 2014. 5. 6.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 2장 17절에 있는 말씀인데, 요엘서 2장 28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그날에 이러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그날은 개인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이 될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이 바꿔지는 날이 될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말세도 될 수 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인가? 심판이 있을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표면적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말세론이 끊이지 않고 항상 있다. 왜냐하면 문자적으로 시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2천년 동안 그런 면으로 연구하고 예언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맞지 않고 지금까지도 계속 틀려왔다. 왜 그런가? 단순한 시간적인 문제를 얘기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얘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있을 수 있고, 내일도 있을 수 있고, 전에도 있을 수 있는 그런 날이다. 시간과 관계된 날이 아니니까.
바울시대는 바울이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임박한 환란으로 인해서 처녀들은 시집가지 않고 있는 것이 좋다는 말까지 심지어 했다. 그것을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말세도 오지 않았는데 처녀 딸을 가진 사람들은 딸을 시집보내지 말고 놔둬라. 얼마 있지 않으면 말세가 올 것인데 시집가면 뭐하느냐는 것으로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92년도에 그런 헤프닝이 벌어졌다. 그날 휴거를 한다고 해서 학교도 조퇴시킨 사건이 있었다.
성경 말씀을 잘못 들으면 우스운 일이 벌어진다.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 표면적으로 보면 다 역사 이야기이고 사회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 목표가 다른데 있다. 다른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것을 비유로 가지고 온 것이다.
가령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말도 하늘과 땅이 원래 없었는데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보는 것은 가장 표면적인 것이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사람들이 노력하는데 아무리 과학적으로 해봐도 안 된다.
어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과학에 끼어 맞추려고 굉장히 애를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창조과학회라고 있는데 기독교인 과학자들이 모여서 어떻게든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을 쓴 목적이 그것이 아니다. 그때 우주과학이 있었겠는가? 뭐가 있었겠는가? 다른 것을 쓸려고 쓴 것이다. 창세기는 1장에서 2장을 가는 동안에 무엇이 목표인가? 그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은 첫째 날부터 시작해서 여섯째 날까지 오는 동안에 마지막에 뭐가 나오는가? 사람이 나온다. 결국 사람 창조를 얘기하려고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을 얘기하려고 우주과학 비슷한, 그 당시의 어떤 신화이기도 한데 그것을 빌려다가 쓴 것이다. 예를 들어 시인이 자기의 외로운 마음을 달을 통해서 표현한다.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을 보고 그런 마음이 생겼으면 달로 표현하는데 그것이 시(詩)다. 성경은 거의 시적인 언어다.
속(이면)에 다른 것이 들어있다. 그것을 모르고 그냥 보면 아까 말한 대로 92년 10월 28일 숫자를 계산한다거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빅뱅 이론이라고 생각하다거나 이렇게 해석하고 만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주과학에 대해서 연구하려면 지금 연구해놓은 것이 훨씬 많다. 창세기 봐서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는 성경 말씀을 볼 때 시(詩)라고 생각하고 봐야 된다. 시인의 말이다. 시(詩)를 읽으려면 시인의 속을 알아야 한다. 그 속으로 들어가야 음미할 수 있지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내용을 음미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읽거나 문학적으로 읽어서는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는 책이 이 성경책이다. 언어 자체도 시적이고 내용도 시적이다.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어떤 경험 상태를 가질 때, 그리고 내 경험과 그 시인의 경험을 합해볼 때, 그때 아~ 이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아무 무감각한 사람은 시(詩)를 읽어도 아무 감각이 없다. 시(詩)를 읽을 때 자기와 시인을 연관해봐야 그 시(詩)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교회 시인께서도 시(詩)는 은유라고 말했다. 직접적인 언어가 아니다. 함축된 언어이기 때문에 한두마디 짧은 말 속에 아주 긴 산문이 들어있는 것이다. 또 산문 읽는 것처럼 읽어도 안 된다.
구약에서 말하던 것을 신약에서 인용해도 또 다르게 인용된다. 과학적인 서적 같으면 한치가 틀리면 안 되기 때문에 인용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은 시(詩)기 때문에 그 사람의 느낌과 감정을 가지고 얘기하니까 늘 변화된다. 사람이 옮겨갈 때마다 변한다.
보통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예방하려고 교리라는 것을 정해놓았다. 그렇게 되면 변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리를 정해놓았다. 교리를 배운 사람은 10명이나 20명이나 기계적으로 똑같은 말을 한다.
우리 교회 형제들은 교리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 다르게 얘기한다. 그래서 오해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다. 듣지 못하던 소리라고 한다. 자기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기대로 시를 읊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이 없으니까 잘 모르고 이단이라고 해버린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우리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 이면에 있는 감춰진 비밀이 들어있다. 비밀하면 일부러 감추는 것을 말한다. 성경 안에는 일부러 감추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경험이 없을 때는 모르기 때문에 비밀이다.
성경은 모두 그것을 쓴 사람의 고백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어떤 사람이 뭘 체험해서 그것을 고백하는구나, 그렇게 알아야 된다. 앞뒤가 맞느냐 안 맞느냐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 고백을 감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틀리고 맞는 것이 없다. 실화가 맞고 틀리고 하겠는가? 과학적인 서적이나 학술적인 서적은 틀리고 맞는 것이 있지만 시인의 시(詩)는 틀리고 맞는 것이 아니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절대로 틀리고 맞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도 생기고 문제가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또 안 된다. 시(詩)로 표현할 것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겠는가? 과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항상 과학적인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곤란하다.
요즘은 학계에서도 너무 전문적으로 분류하다 보니까 기계 공부를 한 사람은 기계밖에 모르고 전기 공부한 사람은 전기밖에 모른다. 한참을 그렇게 하다보니까 어떤 인간의 형체적인 필요를 빗나가 버렸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계를 만진 사람도 철학도 알아야 되고 문학도 알아야 되고 시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다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니까 그래야 폭이 넓어진다.
우리 교회에서 어떤 아들이 만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을 그만 두고 만화를 하겠다고 하여 만화를 하더라도 대학을 졸업하고 하라고 했다. 국문학을 하든지 하여 만화를 하는 것과 그냥 만화만 그리는 것은 결과가 천지 차이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물론 그대로 안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데 사상이 안 나온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일생동안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20세에 보는 것이 다르고, 30세 때 보는 것이 다르고, 60세가 되어 보는 것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경험이 달라지니까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보는 것이 좋다.
요엘서 2장 28절에서 ‘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는 ‘환상’이라고 번역했다. 물론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이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환상’이라고 번역했다. 이것도 인용을 잘못한 것이 아니냐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엘서 2장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다른 자기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날에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요”(행2:17)라는 말이 나온다. 환상을 본다는데 왜 나는 환상이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원에 가서 환상을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환상이 보이기도 하는가 보다. 그러면 자기는 뭘 봤다는 것이다. 교회를 가보면 환상을 봤다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 교회는 그런 것을 하지 않지만 다른 교회는 그런 것이 많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내가 하늘의 환상을 봤다는 확신이 생겨 믿음이 없던 사람은 믿음이 생긴다. 믿음도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 또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방언을 해야 된다고 방언을 강조하는 곳도 있다. 방언을 해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있구나. 이런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 열심히 된다.
이런 일 때문에 본질에서 빗나갔다. 본질은 환상을 보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목표는 다른데 있었다. 그런데 환상을 하다보면 신기하니까 방언을 하다보면 신기하니까 그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이런 것이 오늘 교회들의 현상이다. 현재 상태가 그런 상태다.
오늘 내가 이 말을 하려는 것도 나대로 다른 생각을 갖고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라는 그 말을 베드로가 한 대로 그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가지고 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들의 자유이다. 내가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
오늘 청년부, 양생회, 양문회, 모두 젊은이들인데, 젊은이들은 환상을 봐야 된다. 이것이 영어로는 ‘Vision’이라고 번역했다. 원래 뜻은 ‘알아채다’에서 나왔다. 말이라는 것은 하다보면 환상까지 가는 것이다. 근본은 ‘알아채다’이다.
우리 교회에 오는 젊은 사람들은 뭘 알아채는 것이 있다. 시대를 살더라도 그 시대를 알아채는 것이 있어야 된다. 지금 어느 시대인지, 이 시대가 어떻게 가는 것인지를 알아채야 한다. 시대를 전혀 모르고 자기혼자 1500년대 생각을 하고 살거나 또 엉뚱하게 2050년대 생각을 하고 살면 안 된다. 그 시대에 대해서 뭘 알아채야 한다.
=사람들도 국가정책을 알아채야 한다. 국가정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경제정책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알아채야 돈도 벌고 출세도 하는 것이지 전혀 모르고 엉뚱하게 1800년대 사상을 받아들이면 인생이 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령 공산주의가 1800년대~1900년대 초에 생겨나서 한 때 세상을 휩쓸었다. 지도상으로 본다면 삼분의 일 이상을 빨간색이 점령했다. 그때 당시 청년들은 그 사상이 상당히 신선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제시대와 해방 후인데, 그 이론보다 더 좋은 이론이 없고, 그리고 한 번 들으면 혹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얘기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가 일제하였기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이 갈 곳이 없었다. 젊은이들이 갈라져서 카페에 가서 술이나 마시자고 하거나 차나 마시는 파가 생기고, 또 세상을 비관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도 생기고, 아니면 나도 먹고 살아야지 하고 출셋길로 들어가서 관료가 된 사람도 생겼다. 이렇게 어디로 갈지 모르는 시대에서 그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이 온 것이다. 공산주의 이상이 들어왔는데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는가! 무산계급이 세력을 잡아서 결국은 동등한 사회, 평등한 사회, 물질적으로도 공유하고 권력적으로도 공유하는 그런 세계가 온다. 그리고 마침내는 무정부상태까지 도래했다. 정부가 필요 없는 그런 이상사회가 오게 된다는 것이다.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백성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신선하겠는가. 일제도 없어지고 고종황제도 없어지고 옛 것이 다 없어지고 새 것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유식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관여되었다. 우리나라 남로당 숫자가 굉장히 많았다. 해방이후에 구체적인 조직력을 갖고 있는 단체는 남로당뿐이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은 억울하게 생각한다. 그때 만일 미군이 오지 않았다면 남한은 적화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로당이 가장 강력한 조직체였다. 그런데 미군이 주둔함으로 인해서 안 됐다.
이승만이 돌아옴으로 인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래서 원수처럼 생각한다.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하는 배경이 그것이다. 그 정도 독재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승만박사는 독재를 하지 않았다. 독재, 독재하지만 언론·출판·결사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된 사회였다. 아무리 떠들어도 그것 때문에 정치적으로 제재한 일이 없었다. 국회의원이 지방순시를 올 때 몇 번 참석해 보았는데, 국회의원이 한 사람이 오면 경찰서장을 대동하고 면마다 돌아다닌다. 그 자리에 앉혀놓고 얼마나 까대는지 모른다. 그래도 의원님, 의원님 하던 시절이었다. 아주 자유로운 시대였다. 동아일보에서는 매일같이 정부 비판 글을 올려도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에 장기집권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민중의원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고, 두 번째는 신익희선생과 대결했는데 신익희선생이 선거 중간에 돌아가셨다. 세 번째는 조병욱씨와 대결했는데 선거 중에 위암 수술하다가 돌아가셨다. 선거운동을 안 해도 저절로 3선까지 당선이 되었다.
그런데 왜 3·15부정선거가 되었는가? 이기붕씨가 부통령을 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승만박사는 전혀 투표를 할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 두 사람 다 선거 중에 죽었을까? 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님께서 정감록인가에 조선왕조가 10년이 더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전주 이씨가 10년을 더 한다고 했다는데 무슨 말인가 했더니 꼭 10년이었다. 이것도 운세인가 했다.
장기집권을 했다고 해도 억지로 장기집권을 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다. 우리는 다 봤다. 왜 그렇게 미워하는가? 결정적으로 이승만박사가 와서 대한민국이 건국이 되었다. 그것이 원수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혼란기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신탁통치가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사상적으로 적화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선생님도 남로당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남로당인지 구별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계속 공산당 노래를 불렀다. 정부가 없으니까 아무도 제재하는 사람도 없었다. 구체적인 조직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남로당뿐이었다. 그런데 집권은 누가 했는가? 남로당이 집권하지 못하고 민주당이 했다. 민주당은 다 지방 유지들이다. 유산자, 브루조아, 친일파가 미제국주의와 야합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의 근원은 적화통일을 못한 억울함이다. 적화통일의 기회가 6·25 때와 두 번 있었다. 처음에는 이승만 때문에 못한 것이고, 두 번째는 유엔(미군) 때문에 못한 것이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6·25때는 부산만 남았었다. 며칠만 지나서 부산만 점령했으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신선한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국제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망했다. 지금 북한만 남아있는 것이다. 중국이 그동안 북한을 비호하다가 지금 태도를 바꾸었다. 북한을 생각할 때 우방국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산주의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 세습왕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 군사력을 엄청나게 배치해놓고 있고, 수용소를 건설해놓고 있다. 왜냐하면 갑자기 몰려들 수 있는 문제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번 일본에서 오신 분에게 들은 일본 정보통이다.
시대가 바꿔지고 있다. 세상은 늘 바뀌고 있다. 한 가지가 계속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지금은 미국이 세계를 주도한다. 미국이 언제까지 하겠는가? 또 다른 나라가 세계를 주도할 수 있다. 늘 바뀌지는 것이다. 바벨론이 메데파사가 되고, 메데파사가 희랍이 되고, 희랍이 로마가 되고, 이렇게 바꿔져왔다. 시대적 사상이라는 것도 늘 바꿔져왔다.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지 그 시대와 역류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흐름에 같이 가야지 역류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사업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된다.
성경 말씀도 성경 말씀의 흐름을 따라서 봐야 된다. 베드로 시대, 초대교회 시대, 오순절 시대, 그때 나온 말을 그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계시는 어디로 갈지 모른다.
보수주의라는 것은 한 번 나온 것을 그냥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나온 곳이 2천년 전인데 그 사도행전을 고수하자는 것이 보수주의다. 500년 전 칼빈이 했던 교리적인 주장을 계속 고수하자는 것이 보수적인 장로교다.
더군다나 세상도 그렇게 흐르는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떻게 어디로 흐를지 모른다. 하나님의 영이 어디로 흐른다는 것은 정해져있지 않다.
출애굽기 공부할 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이 뜨느냐, 불기둥이 뜨느냐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날짜도 없고 지도도 없고 계획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일주일 동안 간다고 하면 일주일 동안의 계획을 세워놓고 살 수가 있는데, 일주일이 될지 한달이 될지 3일이 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된다.
여기서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인생은 어찌될지 모르니까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가야 된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현실은 엉망이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현실은 현실을 사는데,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헷갈릴 것 같다.
나는 항상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생활을 한다.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도 생각한다. 젊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한다. 죽으면 눈부터 기증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갖고 가면 뭐하겠는가? 한 사람이라도 쓰면 얼마나 유용하겠는가.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보고 저런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고 에라 모르겠다, 내일 죽을지 모르니 아무렇게나 살자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을 분명히 살면서 그 생각을 하고 산다.
“우리에게 주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라는 말이 있다. 우리 날을 계수함을 가르치사 내 날이 얼마일지를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있게 해달라는 말이다. 세상말로 하면 천년만면 살 줄 아느냐? 이런 말이다. 천년만면 살 줄 알고 어리석게 생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현재적인 말씀이다. 옛날 말이 아니다. 2천년 전 말씀도 아니고 3천년 전 말씀도 아니다. 오늘 현재의 말이다. 출애굽도 오늘 출애굽이다. 오늘 우리가 출애굽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초막을 짓는 날이다. 왜 초막절을 했는가? 흙으로 집을 지으면 단단하고 더위도 피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천막을 쳐야 한다. 이것을 장막절이라고 한다. 초막을 짓고 살다가 빨리 옮겨가야 한다. 심지어 성막도 고정건물이 아니고 조립식이었다. 구름기둥이 뜨면 바로 가야한다.
성경에 보면 운반하는 계획이 세워져있다. 물통은 어느 자손이 매고 갈 것인지 쫙 계획이 있다. 신호만 오면 둘러매고 가야된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대대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뜻을 생각하고 기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막연하게 표면적으로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는 것을 기념하자고 하여 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기념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아~ 인생이라는 것은 초막을 짓는 것이구나. 이렇게 하고 살면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적절한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했다. 지금도 중동에서 가장 문제꺼리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복을 주어야 할 나라인데 복을 주는 것이 화를 주고 있다. 이스라엘 때문에. 1945년에 2차 대전이 종결되면서 이스라엘이 중동에 주둔하면서부터 중동의 평화가 깨졌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없어져야 될 나라이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인데 없어져야 될 나라가 돼버렸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동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로 이동하는 줄을 모르고 자기들 생각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을 깨고 하나님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감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라고 했는데, 젊은이들은 알아채야 한다. 뭔가 시대가 흘러가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세상에 살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알아채야 하고, 하나님(주님)을 따라가는 교회생활도 알아채야 한다. 지금 성령은 어디로 움직이는가? 이것을 알아채야 한다. 내 생각만 가지고 있어도 안 되고, 내 생각에 빠져 있어도 안 된다. 흐름을 잘 타야 된다.
요즘 세월호 사건 때문에 문제가 많다. 이것도 흐름을 잘못타서다. 물길을 잘못타서다. 바다는 일정하지 않다. 물이 빙빙 도는 데도 있다. 바다는 평평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일지라도 바다는 계속 움직이고 있다. 왜 그렇게 물살이 센 곳이 생기고 도는 곳이 생기는가? 바다 밑이 평평하지 않고 산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물이 가다가 부딪치면 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면 작은 배가 가라앉는다. 돛단배는 잘못하면 바람과 물이 반대로 쳐버리면 무너져버린다.
이번 선장도 서툴러서 물길이 돌아가는 것을 잘못 맞추어서 배가 뒤집어 진 것이다. 빙판길에서 운전하다가 차가 갑자기 핑 돌 때 유능한 사람은 같이 돈다고 한다. 같이 돌아야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반대로 돌린다. 반대로 돌리면 차는 뒤집어진다. 이번 사건도 그런 사건이다. 물길이 도니까 반대로 돌려 배가 넘어진 것이다.
수로가 있기 때문에 항로가 있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가야 된다. 등대도 만들어놓았고 밑에 암초가 있는 것도 다 표시해 놓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가다가 침몰한 것이다. 흐름을 무시하고 가다가 저런 참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좀 질러가서 시간도 아끼고 기름도 아끼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꼼수 부리다가는 망한다. 흐름을 타야 된다. 흐름을 잘 보고 피해갈 때는 피해가고, 질러갈 때는 질러가야 된다. 무조건 직선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가면 안 된다.
제주도를 가려면 큰 해협을 건너가야 된다. 아무리 잔잔한 날도 가운데 가면 파도가 있다.
나는 노화도에 살았는데 목포를 가려면 해남으로 연결된 해협을 지나야 한다. 거기를 지날 때면 나는 항상 멀리를 했다. 통과하는 10~15분 동안 항상 멀리를 했다. 배는 항상 해안선을 따라서 간다. 해안선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인생을 길을 보고 가야 된다.
젊은이들은 알아채야 될 것이다. 시대를 알아채야 될 것이고, 주님의 움직이심을 알아채야 한다. 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는가? 이것이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정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아까 말한 대로 시대적이고 예언적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문제가 아니고 멀리서보는 높은 데서 보는 하늘에서 보는 이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땅은 늘 움직이는 것 같아도 하늘은 여전히 똑같다. 그래서 불변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늘의 마음을 가지면 우리도 역시 항상 똑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다.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똑같다는 말이 고정된 생각이라는 말이 아니고 항상 한 점을 향해 가지만 요동하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
미가서 3장 6절을 보면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어두워지면 사람이 못 본다. 그러면 언제 이런 이상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우리가 이상을 볼 수 있다. 태양빛이 비칠 때 우리가 뭘 볼 수 있는 것처럼. 태양빛이 없으면 내 눈을 아무리 떠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한 곳에 가서 눈을 떠보면 눈 밝은 사람, 어두운 사람이 따로 없고, 눈을 크게 뜨나 작게 뜨나 똑같다. 빛이 있으니까 차이가 있지 빛이 없으면 아무 차이가 없다. 깜깜한 데서 눈을 떠보았자 헛일이니까 차라리 감고 가는 것이 낫다. 어차피 보이지 않으니까. 빛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깨우쳐야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지금 때가 12시가 아니냐?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했다. 아버지의 일을 한다. 무슨 아버지 일을 하는가? 지금 낮 정오가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때,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젊었을 때가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이때 어느 노선을 파느냐에 따라서 일생이 좌우된다.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뭘 모르는 것 같지만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다. 입력이 되어있어서 다른 데를 안 가는 것이다. 불교 계통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크면 불교 쪽으로 갈 것 같다. 늘 그런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우리도 교회 유치원이나 주일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중간에 문제가 있어 나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올 기회가 있다. 한 번 입력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입력된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도 어려서 교회를 만났다. 멋모르고 만났다. 이웃집에서 오라고 하니까 간 것인데 그것이 교회를 처음 만난 것이다. 뭘 아는 것은 아니고 교회가 좋아서 갔는데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나침판이 되었다.
암자(절)에 10개월 정도 있었는데 스님이 나보고 중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때 어려서부터 교회를 안 갔으면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절에 간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서 불공드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은연중에 박혀있었던 것 같다.
정월달이 돌아오면 시골에서는 아낙네들이 모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그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파른데 암자에 올라와서 밥을 해놓고 빈다. 그 사람들은 빌고 옆에서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해준다. 불공을 드리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자랐으면 당연하게 생각할 것인데 나는 기독교 세계에 살았기 때문에 뭔가 이상했다. 그 사람들은 소원을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하고 있고, 스님께서는 염불을 하시면 염불은 산스크리트어(범어)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한문으로 하기 때문에 무슨 말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못 알아듣는 소리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 소원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른다. 스님 답이 이것이 일년 농사라고 했다. 이번 달에 벌어서 일년 먹는다. 옛날에는 쌀을 가지고 왔다. 그런 줄 알면서 스님은 해주는 것이다. 그 스님은 참선하는 스님이니까 일년 농사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매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모르니까. 당신 속에 부처가 있다고 해도 모른다. 바깥에 세워놓고 이것이 부처라고 불공을 드리라는 것이다. 적선을 하면 좋은 데 간다고 하면 알아듣는다. 적선지가는 흥하고 적악지가는 망한다. 유가에서 나온 말이다. 선을 쌓은 집은 흥하고 악을 쌓은 집은 망한다. 한국 사람들은 밑바탕에 선악에 관한 개념이 깊이 들어있다.
그렇게 하니까 불공드리려고 온 사람은 사람대로 만족하고, 또 불공드려주는 사람도 좋은 일하고 서로 좋은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볼 때 이상해보였다. 좋은 일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고, 빛이 있느냐 없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빛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알아챌 수 있다.
교회! 여기서 우리가 뭔가를 알아챈다. 교회라는 이 환경이 특수한 환경이다. 이 환경 속에서 내게 비쳐오는 것이 있고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을 모르고 다니면 헛일이다. 다니다보면 저절로 되는 것도 있지만 이 환경 안에서만 특별하게 비쳐올 수 있는 빛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하는. 교회 와서는 전적으로 교회에서 비치는 빛 가운데서, 거기서 우리가 알아채야 하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교회에서 세상일 생각하면 헛일이다. 세상에 가서는 세상일을 생각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해야 된다.
항해하는 사람도 육지에 있으면 별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 항해를 할 때는 항해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 있어야 된다. 그런데 항해사 입장을 떠나서 엉뚱한 생각을 했으니까 이런 참사를 일으킨 것이다.
직장에 가서도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직장에서는 그 직장에 충실해야 된다. 잘못하면 엉뚱하게 돼버리기 때문에 안 된다.
교회에 와서는 교회 안에 있는 빛(빛 비춤), 그리고 흐름을 잘 타야 된다. 그래서 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알아채게 된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
여기서 어떤 세계관, 인생관이 다 나온다. 여기서 뭔가를 알아채어서 내 인생의 항로를 잡아야 된다. 젊었을 때! 그때 잡아놓지 않으면 어렵다. 특별히 양문회 학생들은 아주 중요한 때다. 왜냐하면 지금 아직 뭔가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자리를 딱 잡기가 좋은 때다.
그런데 결혼하고 직장을 가면 그만큼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결혼하면 나 혼자가 아니다. 내 옆 사람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데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때는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결혼하기 전에 같은 생각을 할 사람과 결혼을 해야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못한다. 얼굴만 보고 결혼하거나 하면 인생 망친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말이 안 통하고 길이 다른데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좋고 상대방은 찬송가가 좋다고 하면 안 된다. 주일마다 싸울 것인데 어떻게 되겠는가? 안 된다.
그래서 학생 때가 아주 중요하다. 이때가 아주 자유로운 시기이다. 자유로운 시기인 동시에 책임이 나에게 뒤따른다.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 안에는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자유는 주어졌는데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이번 세월호 사건도 그렇다. 북한 같으면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났어도 당장 모가지가 잘렸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있으니까. 그러나 자유는 책임이 뒤따라야 된다. 지금 가장 자유로운 때이지만 가장 책임을 져야할 때다. 다른 사람이 절대로 책임 져주지 않는다. 내가 선택하면 내가 책임져야 된다. 뒤에 가서 누구를 원망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 몫은 내 몫이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
젊었을 때 알아채야 하고 이상을 봐야 한다. 어떤 세계가 영원한 세계인가? 내 인생을 영원히 던질 수 있는 세계가 어디인가? 젊어서 결정해야 된다. 30세 입지라고 하는데, 30세 입지를 하면 정상적으로 입지하는 것이다. 아직 양문회 학생들은 30이 되지 않았으니까 30이전에 입지가 돼야 된다. 그래야 40이 될 때 불혹이 되는 것이다. 40될 때까지 입지가 안 되면 인생이 그만큼 헛되게 흘러간 것이다. 시대를 알고 흐름을 알고 내가 뭔가를 알아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위에서 보는 시각이 있다. 밑에서 보는 시각과 위에서 보는 시각이 다르다. 위에서 보는 시각을 알게 되면 우리는 다른 세계를 알게 된다. 땅바닥에서 개미가 기어 다녀 보았자 냄새나는 곳밖에 모른다. 위에서 보면 개미가 어디로 가는지 다 보인다. 위에서 보는 시각, 그것이 성경이다.
성경 말씀을 잘 깨달으면 위에서 보는 시각이 생긴다. 이 시각은 영원한 데서 보는 시각이기 때문에 땅에서 변화되는 시각을 다 알 수가 있다.
요즘 날씨정보가 옛날에 비해 정확해졌다. 옛날에는 기상예보하면 흐렸다 맑았다 했다. 흐린다고 했는데 맑고, 맑다고 했는데 흐린 것이 기상예보였다. 왜 그런가? 땅에서만 보니까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은 왜 정확해졌는가? 인공위성에서 보기 때문에 정확해졌다. 한달 예측도 한다. 옛날 기상예보는 정말 웃기는 거였다. 땅에서 기상을 보면 안 되고 위성에서 봐야 된다.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로 위성에서 봐야 한다. 이것을 보고 진리라고 하고 영원하다고 한다. 분명히 사람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시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고 영원하다고 한다.
앞으로 국제적인 헤게모니를 잡는 것도 우주를 누가 정복하느냐이다. 왜? 엄청난 돈을 들여서 달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는가? 결국은 높은 데를 정복해야 된다. 땅에서만 기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강대국의 군비경쟁이라는 것이 전부 우주과학으로 올라갔다. 옛날 레이건 시절에 고르바초프와 단독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러시아가 무력을 과시하던 때다. 러시아가 인공위성도 앞서 있었고 로켓도 앞서 있었고 앞서 있었던 것이 많았다. 둘이 회담을 했고, 기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고르바초프는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없었다. 왜 그랬는가? 그때 레이건이 스타워즈 전쟁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가 혼비백산하여 뒷길로 도망쳐버린 것이다. 자기들은 아직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중에서 전쟁을 해버리니까 땅에서 전쟁하는 것을 당하겠는가? 공중에서 다 보고 하는데... 그때 고르바초프가 기가 확 꺾여서 소련이 개방하기 시작했다. 미국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하여 개방을 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바꿔진 것이다.
높은 데서 봐야 된다. 우리말에도 높이 나는 새가 뭘 본다는 말이 있다. 높은 데서 보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된다.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되고, 세상 흐름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되고, 높은 데서 볼 줄 알아야 된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
밤을 만나게 되면 이상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내게 하나님 말씀이 들려올 때, 그때 내가 알아채야 된다. 세상에 나가면 이 빛이 없다. 높은 데서 보는 빛이 없다. 다 땅바닥에 기는 빛이다. 그러니까 안 보인다.
아프카니스탄에 갔다 온 사람이 보여 준 동영상을 보니까 앞으로 전쟁이 나면 참 조용하게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깜깜한 밤에 비행기를 타고 가면 적외선 통해서 지상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훤히 보인다. 밑에서는 숨으려고 다른 곳으로 소대가 이동하고 있지만 깜깜한 밤인데도 위에서는 다 보인다. 거기에 폭탄 하나를 던지니까 조용하게 모래 뿌리듯이 쫙 뿌려서 몰살해버린다. 한 사람도 살아나지 못한다. 그런 무기가 있다. 게릴라전이니 어쩌니 해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어쩌겠는가?
위에서 봐야 이긴다. 멀리 날아야 땅의 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인생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인생을 봐야 멀리 보고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대 시대마다 유행이 다 다르다, 그것을 따라 가다 보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 시대는 늘 변하니까. 아주 재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못하고 꾸물거리다가 지나가고 또 지나가게 돼버린다. 그 사람들은 별 볼일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미래는 지금이다. 젊은이들의 미래는 지금이다. 지금 결정하는데 따라서 가게 된다.
우리 동네 같이 자란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이상하게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 별 볼일 없이 죽었다. 지금 몇 사람 남지 않았는데 별 볼일 없다.
지난번에 소천한 친구 정목사는 동네에 있을 때는 교회를 나오지 않았는데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교회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가 나를 구원한 모세 같은 친구가 되었다. 나를 위해서 태어났던 사람이고, 나를 위해서 준비했던 사람이다.
출애굽기 할 때 구원자는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다는 말씀을 했다. 그 친구를 생각하고 했던 말이다. 그 친구는 나를 위해 미리 예비되어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졸업할 때 갑자기 편지 한 장이 왔다. 한 쪽 귀퉁이에 증명사진을 붙여놓고 편지를 썼다. 편지 내용은 자기는 신학교를 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반대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이니까 신학교를 반대하고 고려대학교를 가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려대학교를 가는 것이 훨씬 낫다. 그때 당시 상고를 나왔으니까. 목포상고는 유명했다. 인생의 살 의미가 없어 죽겠다는 것이다. 자살통지서였다. 나는 그때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하는가하고 말았다. 결국은 그 친구가 신학교를 가게 되어 나를 불렀다. 그런데 그 친구가 고려대학교를 갔으면 나를 부를 일이 없다. 관계될 일도 없다. 목숨을 걸고 신학교를 갔다. 누구 때문에? 나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목회를 해서 크게 성공한 것도 아니고 시골교회로 근근이 사는 교회를 하다가 생을 마쳤다. 신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많았었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그 생각을 깊이 한다.
구원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도 이렇게 준비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했구나. 나를 위해서 준비되었던 사람이구나. 그의 일생에 나 하나만 구원했어도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친구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 남은 가족이라도 내가 꾸준히 도와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친구가 못한 일은 가정을 끝까지 돌보지 못하고 갔으니까 그 일이라도 내가 대신 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를 구원한 사람이니까. 그 친구도 고등학교를 가서 뭔가를 봤던 것이다. 뭔가를 봤으니까 고려대학교를 가는 것을 포기하고 큰 신학교도 아니고 작은 신학교를 갔을 것이다. 그런데 작은 신학교를 가지 않았으면 나를 부르지 못했다. 거기를 갔으니까 나를 부른 것이다. 정말 신기하다.
그 친구는 자기 앞에 뭔가 빛이 와서 인생의 길을 잡았던 것이다. 한 사람을 구원하고 갔어도 할 일을 하고 갔다. 만일 고려대학교를 가서 회사에 다니다가 죽었으면 한 사람도 구원 못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노선을 가느냐가 중요한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뭔가를 보고 알아채야 하는데, 밤을 만나면 알아채지 못하다. 왜? 밤은 어두우니까. 교회가 있을 때, 교회가 부를 때, 내가 거기서 이상을 보고 내가 거기서 위에서 들려오는 말씀을 들어야 된다. 땅에 흘러 다니는 말은 어쩌면 쓰레기 같은 말이다. 바지를 보면 언제 나팔바지였다가 언제 쫄대바지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모른다. 그것이 세상이고 유행이다.
그런 세상의 말을 듣고 내가 인생을 왔다 갔다 할 일이 아니고, 변치 않는 흔들리지 않는 곳에서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부르는 그 음성을 들어야 내가 요동치 않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품으로 갈 수 있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행2:17).
젊었을 때 환상을 보자. 젊은이들은 알아차릴 것이다.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상이 있을 때 이상을 보라는 말이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지도 봐야 되고, 어떤 사람들이 소신을 갖고 사는가도 봐야 되고, 어떤 사람들이 성공하는지도 봐야 된다.
세상에 살더라도 내가 성공하고 싶으면 어떤 사람들이 성공하는지를 잘 봐야 된다. 나 혼자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봐야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내가 그것을 보고 자라야 된다. 그래서 내 길이 잡혀지고 가야만 가도 가도 늘 만족하고 늘 완전하고 오늘로 결산이 되어도 만족하고 내일로 결산이 되어도 만족하는 그런 인생을 살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세계를 우리가 가졌을 때 누구에겐가 줄 것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남에게 줄 돈이 없어진다. 돈이라는 것이 이상하다. 우리 생각에는 돈을 많이 벌면 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많이 벌수록 지갑이 더 커져버린다. 만원밖에 넣을 수밖에 없는 지갑을 가졌을 때는 만 원 이상 가지면 나눠줄 수 있다. 그런데 돈을 벌기 전에 지갑이 더 커진다. 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이 절대로 남에게 돈을 못 준다. 아무리 벌어봤자 남 줄 것은 없다.
내가 누구에겐가 줄 것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이 환상을 봐야 된다. 그러면 늘 줄 것이 있다. 실제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다. 사람도 좋고 의사니까 돈도 꽤 모았고 풍족한데 막상 누구에게 줄 것이 없다. 많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니라 줄 것이 없다. 나이 드니까 병이 들었다.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인데 이것저것 병이 오기 시작하여 백내장 수술, 위암 수술, 이번에는 다발성골수종이라고 한다. 그러니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줄 것도 없고, 자기가 가지고 갈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돈을 벌려면 쓸 수 있는 돈을 벌어야 되겠더라. 쓸 수 없는 돈은 벌어놓으면 헛일이다. 어떤 형제가 사업 확장을 하려고 하는데 말렸다. 확장하면 할수록 주머니가 커져버려서 돈이 늘 모자란다. 있는 것 가지고 하면 그래도 돈이 남아서 교회도 쓸 수 있다. 그런데 주머니를 키워버리면 쓸 데가 없다. 남 앞에서 돈 자랑만 하고 쓸데는 없다. 그런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 이상하게 돈 자랑한다. 나는 속으로 줄 것도 없는 돈 뭣 하러 돈 자랑하느냐는 생각이 든다. 가난하면서...
줄 것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만약 줄 것 있는 사람이 부자이다. 아무것도 줄 것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남의 속도 모르고 나에게 돈 자랑을 한다. 그래서 미친놈 소리 듣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알아채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가 지금 자리가 딱 잡혀지면 요동함이 없이 한 길로 갈 수 있다. 지금 잡히지 않으면 일생을 방황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일생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좀 해보다 저것도 좀 해보다 마는 사람이 있다. 참 안타깝다. 귀중한 인생을 허비하고 마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런 공상을 해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뒤로 돌아간다면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산다면 한시도 허비하지 않고 좋은 인생을 살겠다. 왜? 이미 계획이 짜져 있으니까, 길이 딱 정해져있으니까, 얼마나 알뜰하게 살겠는가! 그런데 한 번밖에 기회(길)가 없다. 되돌아갈 수가 없다. 길을 잘 잡아야 된다. 되돌아갈 수 없으니까.
젊었을 때 환상을 보고 되돌아갈 수 없는 인생을 온전하게 살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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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빨리 말씀을 워드로 해서 올리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번 연휴에 바빴나? 중심부R.T왔으면 좋았을텐데..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속도가 광속!!!
오늘 점심 말씀을 이리 빨리 올리다니 ㅎㅎ
고맙습니데이~
정민아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