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4일(목) 맑음
승용차로 신어산 공용 주차장까지 갔다.
은하사로 향했다. 입구에 연등이 달려 있다. 경내로 향하는 길고 넓은 돌계단은 언제 봐도 좋다.
대웅전 마당은 등 달기에 분주하다.
경내 여기저기를 구경하였다. 이번엔 법당 안에도 들어가 봤다.
새론 건물이 있다. 수련원으로 사용할 건물이라고 한다.
대웅전 마당에서 대웅전과 신어산 암릉을 보는 즐거움을 오늘은 못 즐겼다. 그러나 서래각에서 충분히 즐겼다.
대웅전에 7~8명 여고생이 선생과 함께 들어왔다. 어느 한 곳에 눈길을 주며 울고 있다.
친구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 사연이 어떠한 지는 모르겠다. 슬픈 일이다.
동림사로 걸음을 옮겼다. 사적기도 읽고 어느 선사의 탑비의 내용도 읽었다.
큰 절의 주지까지 지낸 분이 영구암 주지로 계셨다니, 이분의 성품을 알 것 같다.
동림사도 이쁜 절이다. 특히 무문각과 신어산은 한 폭의 동양화이다. 나는 이곳 무문각을 좋아한다.
신어산 정상에서 영구암으로 내려 갈까 생각도 하였지만 빠른 길을 택했다.
은하사 뒤편으로 영구암 가는 길은 늘 같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영구암에 왔을 때는 공사 중이었다. 공사가 깔끔히 끝났다. 문화재 안내판도 모두 바뀌었다.
영구암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는 아주 좋다. 탑 앞에서 마을 내려다 보고 앉아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영구암은 신어산 좋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화려한 해넘이는 아니지만 영구암의 해넘이를 즐겼다.
은하사-동림사-영구암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을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 오후 한나절을 기분좋게 보냈다. 13,000보 걸음.
신어산 은하사(神魚山銀河寺) / 전통사찰
- 경남 김해시 삼방동
'신령스런 물고기'란 뜻을 가진 신어산(神魚山) 서쪽 자락에 자리한 사찰.
전설에 따르면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왕후인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며,
창건 시 이름은 서림사(西林寺)였다고 한다.
전설 속의 창건 연대가 불교 전래 이전인 서기 1세기이지만 확실한 고증은 할 수 없다.
단,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1900년이 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사찰이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 있던 건물은 동림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따랐다.
(김해시-관광포탈/은하사 소개, 발췌)
은하사의 길고 넓은 이 돌계단을 나는 좋아 한다.
창건 때부터 있던 연못인지 아니면 만든지 얼마 안 된 곳인지 나는 모른다.
이 건물이 화운루? 미처 편액을 확인하지 못했다.
범종루
설선당, 범종루 앞에 있다.
전통문화 전수관, 근래 완공한 모양이다. 2년 걸린 것으로 나온다. 오늘 처음 본다.
대웅전 마당은 등 달기 위해 분주하다.
명부전
대원본전
지장보살
凡所有相(범소유상) 皆是虛妄(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 卽見如來(즉견여래)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이 실체가 없음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 / 금강경 첫 번째 사구게.
첫 글자는 凡자의 속자이다. 이렇게 나는 공부한다.
조월당, 출입금지. 조월당 앞에 서 있는 돌에 새겨진 글은 다음과 같다.
제법종연생 역종인연멸(諸法從緣生 亦從因緣滅) / 법화경
모든 것은 연기법에 따라 생겨나고 또 연기에 따라 멸하여 진다.
대웅전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공포(栱包)는 내외3출목(內外三出目),
외부 쇠서[牛舌(우설)]의 윗몸에는 연꽃이 조각,
내외 살미[山彌(산미), 沙乙尾(사을미) 등 이두문자] 위로는 용두(龍頭)와 봉두(鳳頭)가 새겨져 화려하게 장식.
내부는 불상 위에 보개(寶蓋)가 있고, 중앙부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단청과 벽화가 잘 보존되고 있다.
현재 건물은 이들 조각과 구조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내부 좌·우측 흙벽면 전체에 안료로 채색하여 그린 벽화(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삼불회도(三佛會圖)」와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보살도」, 「신장도(神將圖)」, 「모란문」 등 총 32점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 몸통은 물고기 형상이다. 특이한 그림이다.
벽화를 자세히 보지를 못 했다. 다음에 가면 자세히 봐야겠다. 초파일이 지나고 나서,
도깨비 형상의 그림, 벽사의 뜻으로 그렸을까?
장유화상, 실물을 보고 그렸거나 어떠한 문헌의 기록을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상상이다. 인도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
외벽 그림,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대충 짐작을 할 뿐이다.
삼성각
삼성각 안에 있는 독성이다.
삼성각 외벽 그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선정당, 요사채인 것 같다.
서래각과 신어산 암릉. 정상은 아니다.
서래각 담장 밖에 있는 삼층석탑, 문화재는 아닌 모양이다.
응진전
오층석탑, 문화재는 아닌 모양이다. 안정감이나 균형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동은당 사리탑과 은하사 중수비.
은하사 주변을 둘러봐도 오래된 승탑은 없다.
신어산 동림사(神魚山東林寺) / 전통사찰 아님
동림사는 가락국 초기,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염원하는 뜻에서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된 것을 화엄선사와 월주스님이 크게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김해시-관광포탈/동림사 소개, 발췌)
절을 복원한 지 30여 년 되었을까?
주차할 공간이면서 절 마당이다.
이 천왕문을 통하여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것 같다. 천왕문을 지나면 108계단이 있다.
동현당 월주종사 승탑, 한산당 화엄대종사행적비.
한산당 화엄대종사는 1925년 고성군 개천면에서 출생, 중학교를 오사까에서 졸업, 동경제대 내과 연구과 수료,
1946년 부산의료원 내과 주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위원, 1946년 출가, 1948년 범어사 동산스님을 스승으로 모심.
규모가 큰 절 여러 곳의 주지를 역임, 1975년 영구암 주지로 옴. 이분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 범어사 큰절 주지를 하신 분이
은하사도 아니고 오르내리기 힘든 영구암 주지를 맡으셨다는 게 그렇다. 2001년 입적 하심.
천왕문
108계단을 힘들게 오르고 나면 이런 모습이 보인다.
염화당
종각
요사채
대원보전
한산당, 종무소.
무문각
천불선원
무문각 뒤로 '영구암'이 보인다.
산신각
'천진암'이 보인다.
석자재, 동림사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일까?
신어산, 이 부분이 멋지다. 영구암, 멋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천왕문으로 오르지 않고 천불선원(무문각) 앞까지 차로 갈 수 있다. 내려 오는 길에 본 천왕문.
산길을 돌아 영구암으로 향했다. 오후 4시쯤이다.
올해 처음으로 진달래를 만났다. 참 예쁜 꽃이며 수수하다.
영구암(靈龜庵) / 전통사찰
은하사에서 약 1km, 조금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갈 수 있다. 영구암까지 가면 신어산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쉬엄쉬엄 오르면 된다.
영구암, 장유화상이 불법을 전하기 위해 지은 7암자 중 한 곳이라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영구암에 닿기 전에 미륵존불이란 작은 비가 있다. 암벽에 마애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저기 보이는 바위, 저걸 미륵불로 본 것일까? 이 암벽에 마애불을 왜 안 새겼을까?
해가 넘어가고 있다. 바위,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영구암도 장유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지만, 전하는 건 전설일 뿐이다.
사진 우측 석벽이 완공되었다. 예전에 왔을 때 공사 중이었다.
영구암 칠성탱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일제강점기 때 그려진 탱화이다. 경남(부산 포함)에서 활동한 '화승 낙현'의 초기 작품으로 보고 있다.
위 가운데 치성광여래(북극성을 상징), 우측과 좌측(사진 보는 방향)엔 월광보살과 일광보살,
우측 4명, 좌측 3명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 좌측 마지막은 도교의 븍극성 상징인 자미대제,
아래 7명은 칠원성군(도교에서 북두칠성을 상징)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와 많은 변화를 걸쳐서 오늘에 이른다.
중국인의 사상인 도교(이건 종교가 아니다, 도가하고는 다른 차원이지만)와 현실 타협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무속과 결합하였다. 습합하였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현실 타협이다. 존재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대리석 석축은 언제 쌓았을까? 여기까지 지고 올라 오는 게 엄청 힘들었겠다. 이 건물을 지었을 때 암자였을까?
삼성각
영구암 삼층석탑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작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초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탑이 아니다.
연무, 산 아래가 뿌옇다. 사진 좌측엔 동림사, 우측엔 은하사(옛 이름 서림사)가 보인다. 규모가 비슷해 보인다.
은하사
동림사
얼굴은 없다. 사람이 가좌부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미륵불이라고 여겼겠다.
삼성각에서 본 영구암 경내
꽃 이름이 뭘까? 향이 진하다.
삼층석탑 앞 의자에 앉았다. 잠시 나를 잊어 본다. 예전 금오산(삼랑진)에서 어느 승려가 가르쳐 준 기체조도 하였다.
미륵불, 저세상에서 제도하지 말고 현세에 내려와 제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민중,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신어산 주위에 암벽과 암괴가 많다. 이곳 불자들은 마애불이나 석조 불상을 왜 만들지 않았을까?
재료는 산 주위에 널려져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와 약수를 받았다. 오늘 13,000보 걸었다.
김해인들은 이렇게 믿고 싶다.
은하사는 수로왕의 처남인 장유화상이 지은 절로. 서기 48년 이후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절이다.
장유화상은 조선시대 18세기 경 문헌에 등장한다.
고려중기에 지은 일연의 삼국유사, 그 외 어떠한 문헌에도 장유화상은 없다.
(동림사도 마찬가지. 동림사와 서림사, 고려후기나 조선시대 때 건립한 게 아닐까?)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에 처음으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남매로 나오며 장유화상이 오빠이다.
수로왕의 명으로 장유화상이 은하사와 명월사, 암자(부암, 모암, 자암) 등을 지었다.
이 중수기는 1797년 만들어졌다.
(책 '새 천년의 가락국사'(이영식/인제대 교수), BBS 인터뷰 기사(여여정사 주지 도명/가야불교연구소장) 등 참조)
'명월사사적비문'은 명월사 주지인 증원이 1708년 찬술하였다고 나온다.
수로왕의 명으로 흥국사(왕사), 진국사(왕후사), 신국사(세자사) 등 장유화상이 창건.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문'은 1915년 장유사 주지 선포담이 건립하였다. 장유화상 사리탑이다
여기에 장유화상은 허왕후의 남동생으로 나온다.
상상이 상상을 부른다.
문헌도 아직까지 발견한 것이 없다.
가야시대에나 신라시대 또는 고려시대, 이 시대에 절이 있었다는 증거를 아직 발견하지 못 하고 있다.
기와나 그릇 등은 대개 조선시대 유물이다.
나는 학자가 아니지만 근래 여러 책을 읽었다. 가야와 관련한 책이다.
내 궁금증은 이렇다.
김수로왕과 그 형제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인도에 아유타국이 실제 존재했을까?
왜 가야나 신라 때 유물이 발견 안 되는 것일까? 유물만 발견되어도 문헌에 기록이 없어도 상상이 비정될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나라 역사 관련 책들을 불 태웠다고 한다. 이때 가야 관련 역사서도 없어졌을까?
상상이나 추정을 확정하는 것은 그리 옳은 행위는 아니다.
약 3년 동안 약 300여 곳의 전통사찰을 다녔다.
대다수 신라시대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전설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까지 절은 국가가 건립하고 주지를 임명하였다. 그 많은 절을 그때 지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조선시대 승려는 마을 주위에 살 수 없어 산으로 밀려 그곳에 한두 칸 정도의 암자를 짓고 지냈을 것이다.
조선중기 지역에 양반의 도움으로 절을 짓지 않았을까 싶다.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절도 마찬가지이다.
신라 때 원효가 움막을 짓고 잠시 수행하였는지 모른다. 그걸 창건이라고 한다면 창건이 맞다.
가야시대 불교, 문헌이나 유물로 증명할 길이 없다. 앞으로 가야시대 유물 발굴에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장유화상은 뜬금없는 인물로 본다.
첫댓글 즐독했수
에고,,,보고 싶다만,,,언제 소주 한잔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