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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일이 외손주의 첫돌. 첫돌이 가까워오던 어느날 딸아이가 말했다. 돌잔치 장소로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단다. 내년도 돌이나 백일잔치를 예약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어 그날 재빨리 인터넷에 접속하여 누구보다 빨리 예약을 해야 가능하단다. 딸아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빠르기로 말할거 같으면 따라올 사람이 없을만큼 빠르다. 당연히 손주의 돌 잔치는 제가 태어난 날짜에 예약이 가능하리라 여겼다. 하루에 오전 오후로 두 팀 예약이 가능하다는데,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다. 제 날짜보다 훨씬 앞당겨진 12월 9일 오후에 간신히 예약했단다. 그곳에서 돌잔치를 하겠단다. 그날 입을 한복을 고르러 가야하니 함께 동행하잔다.
그곳은 용인이었고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들과 소나무가 잘 어우러진 바깥뜰을 지나 대문을 들어서면 운치있고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딸과 사위와 손주 한복은 서로 잘 어우러지는 흰빛과 분홍빛 계열로 골랐다. 돌사진을 찍어주는 전문 사진작가가 있어 기와집과 소나무를 배경으로 옛 정취가 물씬 묻어나게 사진을 찍어줄 뿐만 아니라 돌잡이를 진행해 주고 그리고 손님들을 위한 한식 상차림까지 일괄적으로 책임져준단다. 친정어미인 내가 할 일은 돌떡을 해서 돌잔치에 오시는 분들에게 나눠드리는 일이라고 했다. 비용이야 수월찮게 들겠지만 얼마나 쉽고 편리한 방법인가. 내가 첫아이 돌잔치를 1987년도에 했으니 37년 전이다. 강산도 네 번은 변했으니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천지차이가 나는게 당연하다.
그 당시에는 집에서 음식을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주방에 곤로가 있던 연탄불이 있던 가스레인지가 있던 마찬가지였다. 내가 남편 직장을 따라 살던 일광은 바닷가 어촌마을이었다. 주방은 허술했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없었고 오직 요리책을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촌구석에 요리책에서 요구하는 재료가 있을 리 만무했다. 40분 걸리는 해운대까지 나가서 재료를 구입해 왔다. 상차림은 요리책을 따라 했으므로 그런대로 봐줄만 했지만 음식맛은 흉내를 낸 맛인지라 겉돌았다. 남편의 직장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을 때는 다행하게도 주인집에서 마루를 빌려주셨다. 아이의 돌잔치를 위해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도자기 그릇 세트를 월부로 구입하기도 했다. 집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라 여겼다.
결혼이 늦어지는 시대다. 결혼을 하지 않고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넘긴 젊은이들이 수두룩하다. 다행스럽게도 딸아이가 결혼을 했고 더 다행스럽게도 바로 아이를 가졌다. 외손주가 태어났다. 칠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손주를 본 것이다. 이만한 기쁨과 경사가 또 있을까. 하루가 멀다하고 딸네집을 드나들었다. 손주가 자라나는 모습을 상세하게 지켜본 셈이 된다. 특히 남편은 손주가 세상에 적응하느라 예민하던 신생아때에 안아서 재우는 역할을 놀랄만큼 잘 하였다. 남편이 손주를 안으면 손주는 할아버지를 눈을 반짝이며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했다. 눈맞춤 때문인가. 사랑을 느낀건가. 외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한다. 여럿이서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면 할아버지에게 제 조그만 손과 팔을 쭉 뻗는다. 돌이 되어가는 지금은 할아버지를 보면 기쁨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팔을 내민다.
12월 9일 돌잔치날이다.
백일 사진 촬영부터 한단다. 주위가 산만하면 아기가 집중을 못하게 되어 사진을 찍는 시간이 연장되니 절대로 빨리 오지 말란다. 일단은 1시쯤에 딸과 사위와 손주가 먼저 가서 사진을 찍는단다. 우리는 시간에 맞추어 4시 20분까지 오란다. 돌잔치 장소가 용인에 있어 그곳에 가려면 다들 만만치 않은 거리다. 시댁 식구들은 광명에서 우리는 위례에서 친정 식구들은 상도동과 한남동과 대치동에서 출발하니 말이다. 약간 쌀쌀한 날씨인 데다가 오후 시간인 데다가 대부분 연세가 많으니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도로나 막히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우리가 도착해보니 큰언니와 셋째언니와 조카 신발이 댓돌 위에 얌전하게 놓여있다. 먼저 와 계신다. 언제나 앞장서시는 큰언니가 이번에도 일등이시다. 큰언니의 막내딸이 운전을 해서 두 분을 모시고 왔다. 말없이 행동하는 속이 깊은 조카다. 여든여섯의 큰언니는 검은색 비로드 원피스와 그 원피스에 어울리는 연한 빛깔의 줄무늬 자켓을 걸치셨다. 그리고 원피스와 같은 빛깔의 모자를 쓰셨다. 원래 곱기로 소문이 자자하시지만 이렇게 차려입으시니 영국 여왕 못지 않은 위엄과 품위가 엿보이신다. 옆에 살고있는 큰딸, 큰조카가 늙은 어미, 큰언니의 옷장을 뒤져 어느 옷이 멋질까 이 옷 저옷 입어보게 했단다. 감동이다. 딸은 꼭 있어야 한다.
셋째언니는 또 어떠신가. 형부가 살아계실 때에는 아내 사랑이 지극하셨던 형부가 좋은 옷을 많이 사 주셨다. 형부가 안 계신 지금은 큰아들네가 옷이며 가방이며 뒤처지지 않는 것으로 사다준다. 일단은 머리숱이 가발을 착용한 것처럼 풍성하니 우아하시다. 검은 긴 치마에 미색 자켓을 입으시고 주황과 미색과 푸른빛이 섞인 스카프를 하셨다. 강남 사모님 수준이다. 내 손주 첫돌이라고 멋지게 차려입고 오신 언니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먼 길 오신 것도 감사한데 축하의 자리에 걸맞은 옷차림은 얼마나 보기 좋은가. 자랑스러운가. 작은 오빠는 늘 옷을 나이에 걸맞게 입고 다니신다. 모자를 쓰시는데 잘 어울리신다. 키가 크시고 미남이신데다가 얼굴에 주름이 별로 없으시고 환하시다.
딸과 사위와 손주는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중이다. 혹 손주가 우리를 보면 집중이 어려울까 싶어 멀리서 살짝 엿본다. 한복을 차려입은 딸은 달덩이처럼 환하고 어여쁘다. 아이를 낳은 뒤로 딸아이가 뚱뚱해져서 내가 좀 잔소리를 했는데 한복을 입으니 오히려 후덕하고 복스럽다. 사위 역시 훤하고 당당하다. 손주 도율은 똘망똘망하고 의젓한 양반집 자제님이시다. 사진작가도 말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점잖아서 사진을 잘 찍었어요. 할머니께서 한 말씀 더 자랑하셨다. 맞아요 우리가 양반집이예요 양반집 손주예요. 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난다. 행복해진다. 아가를 웃게 하려고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는 사진작가와 도우미는 어른인 우리까지 웃게 만든다.
사진 촬영이 진행중인 동안 우리 가족과 사돈 가족이 대기실에서 함께 기다렸다. 자신을 젊게 가꿀 줄 아는 안사돈은 언제 보아도 젊고 쾌활하시다. 젊으십니다 젊으십니다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자칫 서먹해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바깥사돈 역시 긴 퍼머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넘기시고 마치 연예인 같은 포스로 미소를 날리신다. 말레이시아에서 직장을 다니는 사위의 형님내외도 참석했다. 그 먼길 달려온 것 만으로도 형제의 우애가 짐작이 간다. 보기 좋다.
딸네 가까이에 살고있는 우리는 자주 딸네집을 방문하였고 또 딸아이가 시시콜콜 제 자식을 자랑하여 나는 손주가 자라나는 과정을 자세히 보아왔다. 나는 손주가 자라나는 동안 감동적이거나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을 사진과 글로 기록해 왔다. 120일이 기록되었다. 인쇄를 해서 파일에 끼우고 곁표지와 바깥표지를 사진으로 장식하였다. 오늘 돌잔치 기념 선물로 딸과 사위에게 주게 될 것이다. 그 파일 중 첫 번째로 바깥사돈의 글을 실었다. 손주를 향한 친할아버지의 염원이니 첫 번째장에 넣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었다. 무례하지만 바깥사돈께 낭독을 부탁하였다. 흔쾌이 정감이 넘치면서 낮으막한 목소리로 여유롭게 낭독하셨다. 박수가 울려퍼졌다.
似而半半사이반반
半无반무
胎名태명이 半半반반이라 했던가
아비를 닮으면 豪快호쾌할 테고
어미를 닮으면 和平화평할 지니
신년벽두, 世上세상에 나온다 하니
부지런함 또한 비길 데 없겠구나
몸 健康건강하고
맘 善良선량하면 그뿐
한마디 보탠다면
바라노니
한 平生평생 삶이 平安평안하길
할아비, 순전히 念願염원해 보네
사이반반- 딸과 사위가 아이를 임신했을 때 어미와 아비를 반반씩 닮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태명을 반반이라 지었다. 할아버지는 같을 사 능히 이를 쓰셔서 사이반반, 즉 반반씩 능히 같을 것이다. 반반씩 닮을 것이다 라는 의미로 제목을 붙이시고 손주를 위한 글을 쓰셨다.
답가로 외손주를 위한 나의 자작시 한편 낭송하라고 바깥사돈께서 넌지시 주문하셨다. 앞에 서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용기를 내어 낭송하려고 돋보기를 꺼내느라 가방에 손을 넣는 찰나에 돌잔치 방으로 이동하라는 안내말이 들려왔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웬지 모를 서운함이 들어 혼자 슬쩍 웃고 말았다.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차려진 돌상이 있는 방으로 이동하였다. 돌상 위에는 돌잡이를 위한 물건들이 담긴 소반도 있었다. 딸과 사위와 손주가 그곳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우리와 함께 사돈네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위의 인사말이 있었다. 참으로 당당하고 듬직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케익에 불을 붙이고 첫돌 축하 노래를 불렀다. 아기가 놀랄지도 모른다고 가만가만 작은 목소리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손주에게 보내는 첫돌 축하 편지를 나는 미리 써 놓았고 남편이 따스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딸아이가 정성들여 만든 동영상, 손주의 자라나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았다. 음악을 넣고 자막을 넣어 도율을 향한 어미 사랑을 가득 담았다. 배경음악이며 자막이며 편지며 동영상이며 하나하나가 사랑이다 사랑이다. 극진한 사랑이다.
첫돌을 축하해! 윤! 도! 율!
- 2024 12 9 외할머니 박 찬미
네가 태어난지 벌써 일년이 돌아오는구나
2024년 1월 2일이 네가 태어난 날이니
2025년 1월 2일이 너의 첫돌이구나
네 어미와 아비 마음에 쏙 든 돌잔치 장소는 더우미제인데
하필이면 12월 9일 딱 한 자리가 비어있다는구나
소나무와 기와집이 잘 어울려 운치가 있는 집이라서
한복을 입고 돌 기념 사진을 촬영하는데 적격이라는구나
너에게 최고의 첫돌 기념사진을 남겨주고 싶은
어미와 아비의 간절한 마음이로구나
그런 연유로 12월9일 오늘이 네 돌잔치 날이로구나
네 첫돌을 축하하려고 가족 모두 먼 길 오셨구나
네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나는 것은
네 어미와 아비의 사랑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이신 어른들 사랑 덕분이란다
또한 널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 덕분이란다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곳이로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단다
언제봐도 꽉 끌어 안아주고 싶은 손자 도율아
축하해 축하해 첫돌을 축하해
네가 태어나던 날부터
행복과 기쁨과 감사함이 한꺼번에 우리에게 왔구나
신세계로구나 천국이로구나
꿀이 샘솟아 꿀물이 흐르는 달콤한 낙원이로구나
네 손짓과 발짓과 몸짓과
입에서 나오는 온갖 소리들과 네 눈물까지도 방귀소리까지도
우리를 환호하게 하는구나
네 어미와 아비가 있는 힘을 다해 너를 잘 키운만큼
너도 참 잘 자라왔구나
네 어미와 아비와 네가 함께인 모습은 세상 어느 그림보다 아름답구나
네 인생의 첫 관문인 첫돌!
예까지 씩씩하게 참 잘 왔구나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내마
앞으로 나아갈 길도 한 걸음 한 걸음 씩씩하게 내딛거라
하늘땅땅만큼 첫돌을 축하한다 윤도율!
아프지 말고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씩씩하게 자라거라
돌잡이 시간을 빼 놓을 수 없다. 아이가 무엇을 집든 소리는 지르지 말란다. 놀라서 잡았던 물건을 바로 놓아버린다는 것이다. 무엇을 집어들까 조마조마해 하면서 모두 궁금해하는데, 손주 도율이 판사봉에 손을 댄다. 그 순간 그만 손주 옆에 있던 사위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는 놀라서 판사봉을 놓아버렸다. 저런저런! 그리고는 어느것에도 관심이 두지 않는다. 우리 쪽만 바라본다. 사회자가 먼저 친할머니께 물어왔다. 손주가 뭘 집으면 좋으시겠어요? 붓이요 외할머니인 내게도 물어왔다 붓이요 친할아버지께서 도율 이름에 길 도에 붓 율로 했으니 그 염원에 동의한 것이다. 손주의 손에 붓을 들려주었다. 실이건 엽전이건 청진기건 사실 무엇을 잡아도 열광했을 것이다.
단체사진을 찍었다. 앞쪽에는 양가 조부모가 앉고 가운데에 오늘의 돌잔치 주인공과 어미와 아비가 서고 뒤쪽으로 가족들이 섰다. 기와집과 소나무가 배경인 사진을 찍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작은 오빠는 다리가 불편하시다. 신발을 신고 벗는 일이 번거로우시다. 또한 시간을 지체시키는 것 같으니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한쪽으로 비켜나셨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찍는 방법은? 실내는 어두워서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는단다. 섭섭하고 서운했다. 사위가 도율을 번쩍 들어올리는 순간에 가족 모두가 그쪽을 향해 서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사진 촬영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이번에는 옆쪽에 위치한 식당칸으로 이동했다. 한옥 특유의 기둥과 서까래로 연결되어 천장이 높은 한옥방은 널찍하고 편안하고 고풍스럽다. 방바닥은 따스했다. 옛 정취를 물씬 풍겼다. 식탁은 정갈하고 고급스럽게 차려졌다. 음식은 맛깔스러웠다. 각 좌석에는 이름표를 놓아 손님들이 귀하게 초대받았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딸아이와 사위의 손님에 대한 지극한 예의이며 배려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뷔페에 한쪽 공간을 빌려 돌잔치를 하였다. 친구며 아는 사람들 전부를 초대하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돌을 맞은 아이는 어리기도 하지만 그 시끄러운 환경에 적응하기는 어렵다. 그런 가운데 사진을 찍어야하니 아가가 울고 짜증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모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힘이 들었다. 손님들도 정신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돌잔치는 번잡하지 않고 품위있고 질서정연했다. 대기실에서 돌잡이실로 그리고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음식이 차려진 방으로 이동하였다. 분위기가 안정되어 있으니 손주는 울지 않았다. 사진을 멋지게 찍었다. 손주가 울지 않으니 모두들 편안하였다. 이 먼 곳에 돌잔치 장소를 정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돌잔치를 끝내고 나니 이제야 수긍이 간다. 딸아이와 사위의 현명한 판단에 박수를 보낸다. 손님들에게 선물을 준비했는데, 꽤 품질이 좋은 은수저였다. 은수저에는 윤도율 손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잘했다 잘했어! 역시! 내 딸! 내 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