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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 돌
정수리
불볕 같은 더위가 연일 계속됐다. 그동안 뜸하던 황사까지 불어오면서 목까지 따끔거렸다. 사무실의 구형 에어컨은 쉼 없이 냉기를 뿜었지만 염사장은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훔쳐댔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그는 걸핏하면 에어컨 바람이 약하다며 궁시렁거렸다. 손수건은 얼마 안 가 마치 물에 넣었다 건져낸 것처럼 축축해졌다. 그는 폭염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직원 앞에서 손수건을 짜기도 했다. 그의 책상 한켠에는 항상 얼음이 담긴 컵이 놓여 있는데 컵은 온몸에 수두가 난 것처럼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물방울은 제 몸을 부풀리다 말고 결국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볼살이 몇 겹이나 되고 뱃살이 허리선을 덮은 그는 비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흘러서 걷는 것조차 그에겐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비만을 극복하기 위해 헬스장에서 땀을 뺀 일이 있었는데 심장병으로 실신하면서 운동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런 그가 최근에 외출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사사건건 간섭을 받던 직원들에겐 다소 숨통이 트이는 일이어서 환영하는 눈치였다.
“살이 안 빠지는 걸 보니 헬스를 가는 것은 아닐 테고……. 혹시 여자라도 생겼나?”
“돈 독이 오른 사장이 설마…….”
“여자 욕심이 많으면 돈 욕심도 많다는 걸 몰라?”
직원들은 저마다 염사장의 사적인 일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은 확대해석 하려 들지 않았다. 그동안 염사장은 여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단 한 번도 의심 산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염사장은 여비서를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자와 술자리를 같이하는 법도 없었으므로 여자 문제는 사람들의 농으로 끝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염사장은 검소한 사람이었다. 땀에 젖어 살지만 손수건은 늘 한 장만 갖고 다녔다. 그는 자신의 성공신화도 구두쇠 같은 기질이 주효했다고 공공연히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길 강조해왔다. 그런 성품을 가진 염사장이 여자에게도 인색할 것으로 사람들은 믿었다. 하지만 중소기업 사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뚱뚱한 체구에 돈 안 쓰는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없을 터였다. 회식 자리에서도 그는 여자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남자들이 시시콜콜 입버릇처럼 내뱉는 성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상품가치가 없었다.
“돈 벌어서 뭐해? 좀 즐기고 살아야지.”
“혹시 성불구 아냐? 홀애비로 오래 살았으면 여자 하나 들여놓지. 자식도 생각해야지.”
염사장은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열세 살 차이 나는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수천이는 늦둥이치곤 잘 자라주었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부모의 의도를 잘 따라주는 눈치 빠른 아이였다. 하지만 염사장이 아내와 이혼한 이후로 아들은 폭력적으로 변했고 특히 여자를 곧잘 괴롭혔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바람에 소소한 사고를 자주 일으켰고, 염사장은 치료비며 사과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격이 갈수록 거칠어지는 아들을 처음에는 폭력으로 다스렸으나 나중에 아들이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손을 놓고 말았다. 못난 아들이긴 하지만 학업을 마칠 때까지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염사장은 생각했다. 염사장은 새 여자를 들이려고 노심초사했지만 여자들은 대개 돈을 목적으로 결혼을 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쉽게 여자를 들이지 못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수천이는 날이 갈수록 염사장과 의견 충돌이 많았고, 버릇처럼 이혼한 것에 대한 꼬투리를 잡았다.
“제가 그렇게 미우면 나가면 될 것 아녜요! 그럼 아빠가 바람피우기도 좋을 테고…….”
수천이는 중학교에 들어가자 머리가 컸다는 걸 표출하기라도 하듯 말에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 아빠가 쉬는 날에는 마치 시위하듯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집에서 놀았다. 그때마다 염사장은 주먹을 폈다 쥐었다 했다. 수천이가 데리고 오는 여자애들은 대개가 어른 티를 내는 시쳇말로 까진 애들이었다. 짙은 화장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니거나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미니 치마에 가슴이 드러나는 노출 의상도 과감히 하고 다녔다. 염사장의 눈시울을 더욱 따갑게 한 것은 어른을 마주해도 인사도 하지 않고 대화를 할 때도 절반은 욕지거리를 섞어 놓는 것이었다.
염사장은 학습보다 아들의 인성부터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 학원 강의보다 과외를 시켜 아들의 성격까지 잡아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과외를 시키게 되면 최소한 그 시간은 나쁜 애들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고액 과외비에 속이 뒤틀렸지만 아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천이와 함께 공부할 아이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천이 주변에는 노는 애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염사장이 며칠 동안 궁리 끝에 찾아낸 것은 자신의 부하직원으로 있는 어무르의 딸이었다. 어무르는 네팔에서 이주한 외국인 노동자로 그의 아내는 한국 사람이다. 그의 아내 현숙은 염사장의 회사에서 근무를 했던 여자다. 어무르는 한국에 온 지 15년이나 되어 얼굴색만 제외하면 능통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외국인 노동자 중에서 유일하게 반장직을 맡길 정도로 염사장은 그의 성실함을 인정했다. 사실 어무르는 한국 사람보다 더 대우를 잘 받고 있었다. 현숙은 딸 유경이를 낳고 2년 만에 퇴사를 해서 주부로 있다. 감원 바람이 불면서 부부가 함께 종사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은 명예퇴직 권고를 받았고, 그 결과 현숙은 생각잖게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유경이는 피부색이 약간 가무잡잡했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뽑혔고, 다른 외국인 자녀에 비해 따돌림도 적게 받는 편이었다.
염사장은 술좌석에서 어무르를 통해 유경이를 알게 되었고, 어무르에게 자기 아들 수천이와 함께 공부할 것을 권했던 것이다.
“과외비는 전액 부담할 테니 우리 아들과 함께 공부시켰으면 하는데 어떤가?”
“아닙니다. 일부는 보태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자네 딸이 싫지만 않다면 돈 문제는 접어 둬.”
염사장의 제의를 어무르는 거부하지 못했다. 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수락한 셈이었다. 유경이가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선 실질적인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잘 됐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마음에 안 내켜도 염사장의 제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먼 미래를 감안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염사장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천이가 다소 개망나니 같은 행동으로 유경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약간 우려되긴 했으나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유경이가 바른 아이여서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난 반대예요. 우리 애가 여태껏 과외를 받지 않았어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데 굳이 과외를 시킬 이유가 없잖아요?”
현숙은 말을 꺼내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어무르는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사장이 날 배려해서 권한 일인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어딨어? 더구나 우리 유경이가 좋은 대학 가려면 지금부터 질 높은 교육을 받아야지. 현 수준에 만족하면 안 된다구. 한국사회가 어떤 땅인데.”
“알겠지만 수천이는 질이 안 좋은 애예요. 착한 우리 유경이가 수천에게서 나쁜 물이 들거나 피해를 보면 그 땐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그녀는 수천이의 그릇됨을 꺼내기 시작했다. 남편의 마음을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자식을 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싸우고 떠들고 하면서 크는 것 아냐? 당신도 어린 시절 남자애들로부터 고무줄 끊기고, 아이스께끼니 뭐니 해서 많이 당했다며? 다 지나고 보면 철부지 애들 장난이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래도 난 싫어요. 우리 유경이는 그냥 그대로 뒀으면 해요.”
아내의 완곡한 거부에 남편인 어무르의 고민이 커졌다. 그녀의 강한 거부 의사는 결혼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무르의 고민을 해결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딸 유경이었다.
“엄마, 수천이와 과외하게 해주세요. 1등 하려면 부족한 게 많아요. 수천이가 난폭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학교에서 절 괴롭힌 적은 없어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래도 안 돼. 사람이란 알 수가 없어.”
“만약 걔가 괴롭히면 그땐 그만 두면 되잖아요.”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만약 네가 그만두면 아빠는 어떻게 되겠니? 수천이 아빠는 네 아빠의 사장 아… 아냐, 됐어…….”
아내는 말을 하다 말고 얼버무렸다. 남편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유경이의 손을 마지못해 들어주었다. 얼굴이 굳은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과외가 시작되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 유경도 말수가 조금 준 것 외엔 특별히 변화된 것은 없었고, 수천이에 대한 불만을 내뱉은 일도 거의 없었다. 현숙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집착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집착은 더욱 가중되어갔다. 공부보다 딸의 몸가짐과 옷차림에 더 관심을 집중했다. 그녀는 딸에게 치마를 입지 못하게 했다. 윗옷도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입혔다. 시간도 철저히 챙겼다. 유경이는 과외 1분 전에 도착했고, 마치면 곧바로 집에 전화하고 귀가하게 되어 있었다. 그건 엄마와 딸의 숙명 같은 약속이었다. 이를 어기게 되면 유경이는 곧바로 잔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어야 했다.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엄마 방식대로 몰고 가는 바람에 유경이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유경이의 말수가 준 것도 지나친 외모 간섭 때문이라는 걸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유경이는 원래 자기 성격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부모 간에 말다툼이 있거나 친구끼리 싸우는 일이 발생하면 그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다. 항상 중간 입장을 취했고, 어떤 다툼의 현장에 개입되는 것도 지극히 꺼려 했다. 과외를 받으며 수천이의 짓궂은 장난에 뒷머리가 아파왔지만 유경이는 특유의 참을성으로 넘겼다. 수천이는 유경이에게 가슴이 크다든지 키스 언제 해봤냐는 등의 성적 추태도 부렸지만 유경이는 늘 흘려들었다.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유경이도 알고 있었으며, 과외를 받기 전부터 수천이의 행실을 익히 알고 왔기 때문에 당분간 참기로 했던 것이다. 다만 유경이를 서운하게 만든 것은 과외 선생이었다. 수천이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끝마다 사춘기를 내세우며 은근슬쩍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과외 선생 재희는 S대 법대를 거쳐 대학원에 진학하고 있는 수재이며,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학비를 마련하며 학업에 매진하는 모범생이다. 염사장은 그녀에게 여느 과외 선생보다 많은 돈을 지불했고,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주겠다며 파격적인 대우까지 해주었다. 그 누구도 이런 제안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넝쿨째 들어온 돈 보따리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과외 선생은 자연히 염사장의 아들 수천이에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수천이가 성적만 오른다면 자기 몫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고 유경이에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돈줄은 수천이 아빠임을 그녀는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경이의 피해의식 따윈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경이에게 아주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경이가 과외를 받지 않으면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수천이도 친구 없다고 과외를 거부할 수도 있는 일이어서 유경이에게 소홀히 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경이는 수천이에게 맞대응하는 일도 거의 없는데다 참을성이 남달랐다. 수천이의 거친 말투가 전해지면 못 들은 체하거나 눈을 질끈 감아 버리거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유경이는 갸름한 얼굴에 턱 선도 예쁘고, 눈매는 맑고 온화해서 상대방에게 부드럽고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인상이다. 유경이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실수를 연발하는 수천이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과외 선생은 유경이에게 칭찬을 하지 않았다. 유경이를 칭찬해 주게 되면 수천이에게 면박줄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과외 선생은 마라톤처럼 장기적인 경주를 펼친다는 생각으로 두 아이를 이끌겠다는 계산을 했다. 성적을 대폭 올리게 되면 소비자의 기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면 과외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이 바닥권에 있는 상황에서 조금만 올라가더라도 소비자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돼 있다. 수천이의 경우는 온 정성을 다 기울인다 하더라도 성적이 대폭 오를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무리수를 던질 필요도 없었다.
과외 선생의 의도는 첫 중간고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약 성분을 얼마만큼 투여하면 그 효과가 몇 시간에 나타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성적이 일정하게 상승하자 염사장과 어무르는 기뻤다. 아내는 성적에 대한 만족보다 불미스러운 일없이 석 달을 잘 보낸 것에 오히려 안도하는 쪽이었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난 어느 날, 발코니 한쪽 큰 수건에 덮인 채 걸려 있는 유경이의 속옷이 현숙의 관심을 끌었다. 단 한 번도 딸 유경이는 제 손으로 속옷을 세탁한 적이 없었다. 모두 엄마의 손에 의해 세탁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신을 덮을 만큼 큰 수건의 안쪽에 있던 유경이의 속옷을 걷었다. 아직 손에 물기가 촉촉하게 전해왔다. 큰 수건에 의해 햇볕을 받지 못해 건조가 더뎠던 탓이다. 속옷 한 장이어서 세탁기에 돌리지 않고 손으로 빨았을 테고 과연 제대로 세탁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관심은 그것보다 다른 데 있었다. 그녀는 속옷을 확인하면서 옅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캔버스에 빨강색을 잘못 칠하여 물에 적신 붓으로 지운다 하더라도 그 흔적은 남게 돼 있었다. 그처럼 유경의 속옷 가장자리에 핏기가 옅게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유경이가 초경을 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시기적으로 봐도 중 1학년이니 적정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도 중 1학년 때 초경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유경이처럼 자신도 그 당시 초경을 부끄러워했고, 남한테 숨기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유경이가 제 손으로 속옷을 세탁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유경이는 말문을 닫았다. 현숙이 물어봐도 대답하길 꺼려했고, 얼굴도 굳어져 갔다. 평소 같으면 따져 물었던 그녀도 딸의 초경을 의식해서 당분간 부딪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유경이는 식사를 거르는 일이 잦았고, 공부에 대한 의욕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리고 방문도 잠그고 혼자 있으려 했다. 어무르는 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외식이나 영화 관람, 그리고 여행을 가자는 제안도 했지만 늘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그냥 놔둬요. 초경을 하게 되면 불안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 심한 것 같아서 그래.”
“세월이 해결해 줄 거예요.”
현숙은 고민스러웠다. 계속되는 침묵과 과민함, 그리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유경이를 안심시킬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했다. 초경에 대한 상식을 설명해주는 것이 유경이에게 심적 안정을 주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유경이는 엄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유경이는 등을 돌리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속상한 마음에 유경이의 등짝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길처럼 솟구쳤지만 애써 참아냈다. 답답한 가슴을 틔우려는 듯 베란다 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청소기를 마구 돌려댔다. 웅웅거리는 청소기 소리가 거실과 방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조금 전의 정적과 긴장은 폭풍우에 흔들리는 갈잎처럼 마구 흐트러졌다. 어둠이 창가를 짙게 물들이면서 대로변을 지나는 차량들의 불빛이 강렬하게 창을 꿰뚫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귀에 와 닿았다. 멍하니 뜬 눈으로 누워 있던 현숙은 여전히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이 초인종을 눌렀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르는 아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했다. 늦게 귀가하면서 아내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안은 술 냄새가 널찍하게 퍼졌고, 옷 벗는 소리만 났다. 그녀는 갑자기 벽쪽으로 등을 돌렸다. 그제서야 그녀가 잠자는 게 아님을 어무르는 알아차렸다.
“사장님이 개인적으로 술 한 잔 하자고 해서 좀 늦었어. 미안해.”
“…….”
“전화 한 통도 안 했으니 많이 속상했지?”
“…….”
아무 반응이 없자 그는 아내 곁으로 다가갔다. 사과할 마음으로 어깨를 잡으려하자 그녀는 갑자기 뿌리쳤다.
“유경이한테 한번 가 봐요. 나한테 관심 사려 하지 말고…….”
“유경이가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지 가서 물어봐요. 나와는 상대를 안 하니까.”
현숙의 말투는 건조하고 퉁명스러웠다. 아무르는 아내와 딸이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걸로 보아 갈등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방이 있는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귀를 세우고 방안의 인기척을 감지하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 같은 정적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 정적을 깨뜨리기라도 하듯 방문을 노크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두어 번의 노크에도 반응이 없자 그는 목소리를 세워 딸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고, 그는 한참을 서성거리다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갈증을 가라앉히려는 듯 냉수 한 컵을 들이켰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마른 건 그대로였다. 아내가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리며 나왔다.
“무슨 애가 저렇게 예민한지…….”
“도대체 무슨 일로 그러는지 말 좀 해줘. 뭘 알아야 대응을 할 것 아냐?”
“…….”
적극성을 보이던 어무르도 말을 접었다. 남자가 관여하기엔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딸과 맞부딪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타는 쪽은 현숙이었다. 유경이의 지나친 언행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내의 눈치만 살피던 어무르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몰고 갔다.
“유경이가 과외는 잘 받으러 다녀?”
“잘 다니겠죠 뭐. 대꾸는 안 하지만 제 시간에 왔다 갔다 하니까…….”
“사춘기에다 초경까지 했으니 정신적으로 많은 생각을 할 때지.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당신이야 회사 나가면 그만이지만 난 많이 힘들어요.”
아무르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왜소한 현숙의 어깨가 남편의 억센 손에 더욱 수축되는 듯했다. 그녀는 어깨가 활처럼 안쪽으로 구부러졌다. 알코올 냄새가 그녀의 이마를 타고 얼굴로 퍼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웬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근래 들어 술자리가 많아졌는데 왜 그래요?”
“글쎄. 다른 사람 같으면 적당히 거짓말을 해서 빠져나오면 되는데 사장이 불러대니 난들 어쩔 수 있남.”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거예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워낙에 속엣말을 안 하니……. 나이가 들어가는데 부인 없이 홀애비로 살려니 옆구리가 허전한 건지도 모르지.”
“설마 룸싸롱에 간 건 아니죠?”
“룸싸롱은 무슨… 사장은 여자 있는 곳은 안 가. 얼마나 철저하고 돈을 아끼는데…….”
“모르는 소리 말아요. 남자들이 다른 곳엔 돈을 아끼면서 여자들한테 팍팍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보기에 우리 사장은 안 그런 것 같던데? 단 한 번도 여자와 관련된 얘기는 들어본 적 없으니…….”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염사장의 과거를 들추어내고 나왔다.
“염사장이 이혼한 결정적 이유가 원조교제 때문이란 걸 잘 알잖아요? 그런 사람이 과연 제 버릇 개줄 것 같아요?”
아무르가 서둘러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말조심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옛날 얘길 왜 끄집어내고 그래? 이젠 그런 사람이 아냐”.
“난 아직도 불안해요. 우리 애가 마치 호랑이 우리에서 과외를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당신은 너무 과민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어.”
아무르는 염사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사장이 여자 문제에 관해선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숙은 지난 기억들을 쉬 지우지 못했다. 그녀가 회사에 입사했던 10년 전만 해도 염사장은 주변에 많은 여자를 두고 있었다. 여직원의 경우 미모가 출중하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을 만큼 그는 여자 편력이 많았다. 여직원들은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깐깐한 사장의 업무지시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퇴사한 것으로 여겼다. 그녀는 구조조정에 의해 퇴사하긴 했지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장이 그녀에게 묘한 눈빛을 보낼 즈음 그녀는 어무르와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결국 사장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돼버린 것이었다. 그녀가 결혼을 늦추기라도 해서 사장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면 여느 여직원들과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쫓겨났거나 불명예를 안고 살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애초부터 남자들과의 접촉은 좋아하지 않았고, 결혼할 마음도 갖지 않았다. 그녀는 산부인과도 여의사만 골라서 이용했고, 택배가 오더라도 직접 물건을 건네받지 않고 무조건 경비실에 맡겨 두게 했다. 그녀가 수영장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트레이너가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자를 경계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35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추운 겨울날 수십 미터 상공에서 용접하다 발을 헛디뎌 추락한 사고였다. 그 일이 있은 후 가세는 극도로 기울어졌다. 주부로 생활해왔던 엄마는 식당일을 나가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빠의 절친한 동료였던 박씨가 지하방을 무료로 임대해주면서 가계는 다소 숨통이 틔었다. 박씨는 퇴직금과 부모의 재산을 합쳐 대형식당을 차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고용해서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어머니는 두 딸을 볼 때마다 박씨에게 늘 깍듯이 인사하게 했고, 박씨는 아빠처럼 편하게 지내자며 호의를 베풀었다. 간혹 선물도 사주고 영화구경, 놀이구경, 용돈까지 주는 고마운 아저씨로 현숙과 동생은 생각하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을 한 가족으로 여길 만큼 의좋고 따뜻한 이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식당일을 나가고 나면 하루 종일 현숙 자매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동생은 4학년이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문을 걸어 잠가 놓고 언니가 오길 기다렸다. 현숙이가 집에 오면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는 것은 늘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현숙은 학교가 끝나면 옆길로 빠지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날은 감기 몸살이 있어서 점심을 거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은 잠겨 있었고, 현숙은 익숙하게 열쇠를 깊이 넣었다. 그녀가 동생을 부르기 전에 비명 같기도 하고 울음 섞인 소리가 들려와 뒷머리가 쭈뼛 섰다. 동생을 부르며 방문을 여는 순간 바지의 지퍼를 올리며 황급히 빠져나오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현숙을 발견하자마자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밝게 보이려 했다.
“현숙이 왔어?”
현숙은 대답 대신 동생 현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현미는 두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끼운 채 울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아직 덜 채운 블라우스 단추 옆으로 목덜미가 드러나 있었고, 겨드랑이 안쪽으로는 맨살이 보일 만큼 찢겨 있었다. 그리고 짧은 치마 아래로 핏방울이 얼핏 보였다. 그녀는 동생의 어깨를 흔들며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동생은 갑자기 현숙을 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충혈된 눈은 공포감에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끝을 타고 올랐지만 애써 누르려고 했다. 그녀는 현관문 쪽에 서 있는 박씨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동생의 몸을 요목조목 살펴나갔다. 동생의 손톱 사이로 핏기가 어려 있었고,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동생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밤새 “아저씨 거짓말쟁이야.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만 할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동생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현숙은 어머니에게 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오히려 어머니는 이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시켰다. 어머니는 성폭행이 외부로 알려지면 학교생활을 비롯한 장래 성장에 큰 결함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를 공론화시켜 법정으로 갔을 때 소송비를 비롯한 많은 시간과 금전적 손실을 감당해야 했고, 식당일도 접고 방도 빼는 일까지 벌어지는 이중삼중 고통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외부출입을 기피하던 동생은 어느새 심한 우울증에다 대인기피증이 중증으로 나타나면서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결국 현숙의 가족은 집을 옮겼다. 오랜 병원 치료를 했지만 동생은 이전처럼 활발한 성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이 성인이 될 나이쯤 찾아간 곳은 사찰이었다. 동생은 머리를 깎고 아주 비구니 생활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엄마, 나 오늘부터 과외 안 가요.”
유경의 폭탄선언에 현숙은 뒷머리가 뻐근해졌다.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유경이가 불쑥 내뱉은 말에 현숙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왜 안 간다는 거니? 무슨 일 있었어?”
“과외 선생님이 관뒀어요. 더 이상 묻지 마세요. 그 외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유경이는 미리부터 엄마의 말문을 차단하고 나왔다. 후한 과외비로 고수익을 올리는 그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은지 그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유경이와 어떤 갈등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경이가 초경 때문에 수척해지고 우울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그 생각에 온몸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과외 선생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이 꼬리를 물면서 그녀는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경이는 말문을 닫고 제 방에서 꼼짝달싹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머릿속엔 유년시절 동생 현미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며칠을 두고 전화를 해댔지만 과외 선생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수천이의 집을 직접 찾아 나섰다. 수천이의 집은 널찍한 정원에 연꽃이며 금붕어를 키우고 있었고, 쉼터로 이용하려는 듯 자그마한 정자도 마당 한켠에 서 있었다. 그녀가 염사장의 집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천이는 애완견과 잔디밭에서 장난을 치고 놀다가 그녀와 만나게 된 것이다. 느그적 느그적 걷는 수천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을 흔들거렸다. 침착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수천이는 유경이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왜 왔는지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과외 선생님이 왜 그만두셨어?”
“전 잘 몰라요. 아빠하고 자주 싸우더니 그만…….”
그녀는 귀를 의심하며 목을 쭉 빼고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아빠하고 싸울 일이 뭐 있어? 과외 공부 할 시간에 아빠는 회사에 계셨을 텐데…….”
“아녜요. 아빠는 공부할 때도 자주 왔어요.”
그녀는 염사장의 성격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액을 주고 과외를 시키면서 과외 선생이 돈값을 하는가 확인하고도 싶었을 터다. 염사장은 허투로 돈을 낭비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넌 공부에 관심 많은 아빠를 뒀으니 좋겠다.”
그 말에 수천이는 비아냥거리듯 한마디 던졌다.
“아빤 공부에 관심 없어요. 과외 선생님을 엄마처럼 잘 모시라고 하면서 맨날 선생님과 놀다 가는데요 뭘.”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고 다시 말꼬릴 붙들었다.
“근데 과외 선생님이 왜 그만뒀을까?”
“아빠 맘에 안 들었겠죠 뭐.”
“아빠와 선생님이 다툴 때 우리 유경이도 그 자리에 있었니?”
“당연하죠. 아빠와 선생님이 고함치며 싸울 때 유경이 이름이 가끔씩 들렸어요.”
현숙은 허리를 낮추며 수천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머릿속이 마구 뒤엉켰지만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칫 수천이가 말문을 닫으면 공수고로 끝날 것이란 우려가 앞섰다. 그녀는 수천이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수천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끄집어낼 생각을 했다.
“그때가 대충 언제쯤이니?”
“한 일주일 됐을 걸요.”
그녀는 유경이가 초경 때문에 속옷이 베란다에 걸려 있는 날을 머릿속으로 헤아려봤다. 그녀는 날짜를 계산하다 말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유경이가 우울증에 빠진 것도 그 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경이가 너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냐? 아니면 선생님한테 대들기라도 한 거야?”
“걔는 순둥이라서 대들 줄도 모르는 바보예요.”
수천이는 바보라고 말하면서도 별로 미안한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할 말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빠는 선생님한테 입을 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것 같아요.”
“…그, 그래?”
그녀의 눈자위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염사장이 과외 선생이나 자기 딸에게 수치감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미모의 여성을 선호하는 염사장답게 과외 선생도 미인이었다. 과외 선생과의 말다툼에 유경이가 끼어 있다면 비밀의 열쇠를 유경이가 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천이 말대로 과외 선생을 부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 사이에 왜 유경이를 끌어들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경이의 침울한 상태를 보면 모종의 사건이 있을 법했다. 하지만 증거 없이 염사장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염사장의 회사에 재직중이어서 그 불똥이 잘못 튀게 되어 불이익을 받게 되면 한순간에 가정이 무너질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날 밤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다면서 잠자리에 먼저 들긴 했지만 잠은 이미 멀리 있었다. 염사장에 대한 불신감이 들불처럼 번져 갔다. 유경이에게 과외를 시킨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염사장의 속성을 알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게 자꾸만 후회로 남았다.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유경이를 힘들게 만든 장본인을 염사장으로 확정짓고 있었다. 과외 선생이 남자가 아닌 상황에서 의심이 가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염사장뿐이었다. 하지만 극단으로 몰고 갈 생각은 없었다. 과외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그런 행위가 행해질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언어폭력 정도쯤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철저한 시간관념을 요구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휴대폰에 문자 하나가 찍혔다. 창가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녀는 스팸 문자일 거라는 생각에 잠시 무시했다가 폴더를 열었다.
―수천인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녀는 통화 버튼을 황급히 눌렀다. 찍힌 전화번호는 과외 선생의 휴대폰이 분명했다. 그녀는 수차례 버튼을 거듭해서 눌러 보았지만 되돌아오는 건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라는 기계음 소리뿐이었다. 문자를 보냈지만 며칠이 되도록 답장은 없었다.
정수리
경남 진주 출생.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우리 갈 길 멀고 험해도』(상, 하), 소설집 『늪』 등.
―『시에』(2010, 여름호)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염사장에 대한 인물묘사나 설명이 앞 부분과 뒷부분에서 조금 달라 (제가 잘 이해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중간에 약간 헤맸지만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조금씩 건드신 사회문제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 ―수천인 어린애가 아니에요!" 반전의 묘미로 읽었습니다. 한편 이 문장으로 소설이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