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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하곡학교실 강의자료(2015년 10월 26일)
하곡 정제두 선생 하곡집 묘표
정광윤(양자)--정운--정구응--정근--정유성
정유성--정창징--정제현--정태일
--정상징--정제두--정후일
--정제태--정건일(정제현 양자), 정순일, 정준일, 정선일
* 정습명(鄭襲明, ?-1151)은 영일 정씨 형양공파(滎陽公派)의 시조이다. 1135년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실패하였지만 나중에 1140년 김부식, 임원애, 최자 등과 함께 시폐 10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였다. 1148년 간관으로서 『서경』 「대우모」를 강독하였고 의종을 보위하였다. 1151년 추밀원 지주사가 되어 의종의 잘못을 간하다가 미움을 샀다. 문학작품 석죽화(石竹花, 패랭이꽃) 등 詩 3편이 전해온다.
石竹花(鄭襲明, 東文選, 세상의 사치를 비판함.)
世愛牧丹紅,栽培滿院中。
誰知荒草野,亦有好花叢。
色透村塘月,香傳隴樹風。
地偏公子少,嬌態屬田翁。
패랭이꽃
세상사람들은 모란꽃이 좋다고 마당에 가득 심고 가꾸네.
들판 풀밭에도 좋은 꽃 무더기 있는 것을 누가 알리오?
고운 색깔은 마을 저수지에 비친 달보다 아름답고
향기는 밭뚝에 심은 나무들의 바람에 실어보내네.
시골이 외져서 젊은 사내아이들도 적으니
예쁜 모습을 시골 사는 늙은이에게 맡기는구나.
霞谷集卷六,墓表
監察公墓表 a_160_182c
惟我先七世祖,司憲府,監察,府君,迎日人,高麗侍中圃隱先生諱夢周玄孫,參議諱宗誠曾孫。祖諱脩,監察,考諱鐵拳,妣金氏,摠制閏女。生於大明景泰年中,卒葬正德初,是我中宗世也。葬在白川郡西牛岾山子坐原,有墓石,歲久剝落,故後孫厚一為海縣改樹之,是我主上二年壬寅,去正德初二百有十七年。
配淑人申氏,監司自準女,文禧公概孫,祔葬墓後五步間,別有石,無男,有繼子翰林光胤,是圃隱季子司藝諱宗本曾孫浣之出也。孫雲,贈判書,曾孫龜應,參奉,贈贊成,玄孫謹,承文博士,贈領議政。
五世孫維城,右議政,忠貞公。忠貞二子,長昌徵,郡守,贈贊成,生一男齊賢,尚公主寅平尉。次尚徵,進士,贈參判,生二男,齊斗,授參判,齊泰,卒府尹。齊賢子台一,直長,齊斗子厚一,縣令。齊泰子健一,牧使,順一,俊一,善一。概其出志式,志翼,志哲,志學并十數人,信惟我先祖積善之餘澤。
齊斗敬識其後。
감찰공 묘표
우리 선조 7세조는 사헌부 감찰이었으면 영일 정씨다. 고려 시중 포은 정몽주 선생의 현손이며, 참의 정종성(鄭宗誠)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감찰 정수(鄭修)이며 아버지는 정철권(鄭鐵拳)이며 어머니는 김씨이고 총제의 따님이다. 경태 연간(1450-1456)에 태어나셨고 정덕 연간(1508-1521) 초(1505)에 돌아가셔서 장례를 지냈다. 우리나라 중종 연간이다.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서쪽 우점산 자좌(子坐)에 묘지를 모시고 묘석이 있다. 그러나 오래 되어 묘석이 떨어져서 후손 정후일(鄭厚一)이 황해도 해현(海縣) 현감이 되어 다시 묘지석을 만들어 세웠다. 우리 임금 경종 2년(壬寅, 1722, 하곡선생 74살)이며 돌아가신 정덕 연간 초(1505)부터 217년 뒤이다.
부인은 숙인(淑人) 신씨이며 충청도 관찰사 신자준(申自準, 평산 신씨, 세조 원년 判宗簿寺事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됨)의 따님이고 문희공 신개(申槪, 1374-1466, 73살)의 손녀이다. 감찰공 묘 뒤쪽 다섯 걸음에 합장하였고 묘지석이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한림원 정광윤(鄭光胤)을 양자로 들였는데 포은 선생의 막내아들 司藝 정종본(鄭宗本)의 증손 정완(鄭浣)의 소생이다. 손자 정운(鄭雲)은 판서를 추증 받았고 증손 정구응(鄭龜應)은 참봉이며 찬성을 추증 받았고 현손 정근(鄭謹)은 승문원 박사이며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5세손 정유성(鄭維城)은 우의정이며 시호가 충정공이다. 충정공은 아들이 2명이며 장남 정창징(鄭昌徵)은 군수이며 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들 정제현(鄭齊賢)이 상공주(尙公主)의 인평위이다. 둘째 아들 정상징(鄭尙徵)은 진사이며 참판을 추증 받았고 아들 2명을 두었는데 정제두(鄭齊斗)는 참판을 지냈고 정제태(鄭齊泰)는 한성부윤을 지내다 죽었다. 정제현의 아들 정태일(鄭台一)은 직장(直長)이고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은 현령이다. 정제태는 목사(牧使)을 지낸 큰아들 정건일(鄭健一)과 정순일(鄭順一), 정준일(鄭俊一), 정선일(鄭善一)을 두었다. 아래 후손으로서 정지식(鄭志式), 정지익(鄭志翼), 정지철(鄭志哲), 정지학(鄭志學) 등 열 명이 넘는다. 정말로 우리 조상님께서 적선한 덕택이다.
정제두 삼가 후손들을 적습니다.
檢閱公(鄭光胤, 1503-1544)墓表 a_160_183a
有明,朝鮮,藝文館,檢閱,鄭公諱光胤,字胤仲,迎日人,高麗,侍中,圃隱先生,諱夢周,五世孫。祖諱永宣,考諱仁昌,監察,妣平山申氏,監司自準女。本生親,司勇,諱浣。
公生於弘治癸卯(癸亥年?,1503?),丙子(1516)司馬,癸未(1523)登謁聖文科,為翰林。甲申(甲辰?,1544)卒,壽四十二,葬安山楸谷癸坐原。
安人鄭氏,生一男曰雲,贈判書。是生參奉龜應,贈贊成,曾孫謹,承文院博士,贈領議政。玄孫維城,右議政,忠貞公。忠貞生二男,長男昌徵,郡守,贈贊成,生子齊賢,尚公主,為寅平尉。次男尚徵,進士,贈贊成,生二子,曰齊斗,贊成,曰齊泰,玉署,擢府尹。舊乙酉有表石,今頑缺,齊斗等改立石,識其陰,時我主上十二年丙辰三月日,皇明崇禎後九十二年。
명나라시기 조선국 예문관 검열 정광윤(鄭光胤, 1503-1544)은 자(字)가 윤중(胤仲)이며 영일 정씨다. 고려 시중 포은 정몽주 선생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정영선(鄭永宣)이며 아버지는 정인창(鄭仁昌)이며 감찰을 지냈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 감사 신자준의 따님이다. 낳아주신 생부는 사용을 지내신 정완(鄭浣)이다.
정광윤께서는 홍치 계묘(계해년?, 1503?)에 태어나서 병자년(1516) 사마시에 합격하고 계미년(1523)에 알성시 을과(謁聖試 乙科)에 합격하여 한림이 되었다. 갑신년(갑진년?, 1544?)에 돌아가시고 향년 42살이며 안산 추곡(楸谷) 계좌(癸坐)에 묘지를 모셨다.
부인 안인(安人) 정씨는 아들 정운(鄭雲)을 두었고 뒤에 판서를 추증 받았다. 정운은 참봉 정구응을 낳았고 찬성을 추증 받았댜. 증손 정근은 승문원 박사이며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현손 정유성은 우의정이며 시호가 충정(忠貞)이다. 정유성은 아들 2명을 두어 큰아들 정창징이 군수이고 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들 정제현을 낳아 공주의 부마가 되어 인평위가 되었다. 둘째 아들 정상징은 진사이며 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들 2명을 낳아 정제두는 벼슬이 찬성이고 정제태는 옥당에 있다가 한성부윤에 발탁되었다.
지난 을유년에 표석을 세웠으나 지금 깨어져서 정제두 등이 다시 세우고 비석의 글을 새겼다. 우리 임금 경종 12년(丙辰, 1736, 하곡선생 88살) 3월이며,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 이후 92년이다.
贈判書公(鄭雲)墓表 a_160_183c
有明,朝鮮,贈判書,鄭公諱雲,迎日人,高麗,侍中,圃隱文忠公,諱夢周,六世孫。考翰林諱光胤,妣光州鄭氏。祖監察諱仁昌,其先系已見先記。
公生於正德中,至嘉靖辛亥卒,壽三十有□,葬安山楸谷先壟□坐。
貞夫人尹氏,生一男龜應,參奉,贈贊成。孫謹,承文院,博士,贈領議政。曾孫維城,右議政,忠貞公。忠貞生二男,長男昌徵,郡守,贈贊成,生子齊賢,尚公主為寅平尉。次男尚徵,進士,贈贊成,生二子,曰齊斗,贊成,曰齊泰,玉署,擢府尹。
舊有辛亥所立石頑缺,齊斗等改立石,識其陰,時我主上十二年丙辰三月日,皇明崇禎後九十二年。
명나라 시기 조선국 판서를 추증 받은 정운(鄭雲)은 영일 정씨이며 고려 시중 포은 정몽주 선생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정광윤(鄭光胤)이고 어머니는 광주 정씨이다. 할아버지는 감찰을 지내신 정인창(鄭仁昌)이며 윗대 계보는 앞에서 기록하였습니다.
공께서는 정덕 연간(1491-1521)에 태어나시고 가정 신해년(1551)에 돌아가시니 서른 몇 살이며 안산 추곡 선영에 모셨다.
정부인(貞夫人) 윤씨는 아들 정구응을 낳았고 참봉을 지내고 찬성을 추증 받았다. 손자 정근은 승문원 박사이며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증손 정유성은 우의정을 지내고 시호가 충정(忠貞)이다. 충정공은 아들 2명을 두어 큰아들 정창징은 군수를 지내고 찬성을 추증 받았으며 아들 정제현을 두고 정제현은 공주의 부마로서 인평위가 되었다. 둘째 아들 정상징은 진사이며 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들 2명을 두어 정제두는 찬성을 지내고 정제태는 옥당에 있다가 한성부윤에 발탁되었다.
지난 신해년에 세운 비석이 깨져서 정제두 등이 다시 비석을 세우고 비석의 글을 새겼다. 우리 임금 경종 12년(1736) 3월이며,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 이후 92년이다.
博士公(鄭謹)墓表 a_160_184a
惟我曾祖考,承文院博士,贈議政府領議政,府君,諱謹,字汝頊,我鄭氏,慶州迎日人。胄于高麗,樞密院,知奏事襲明,以文章直道名世,卒盡節危朝,如漢之楊伯起是也,事在列傳。十世至文忠公圃隱先生,諱夢周,道學節義,為我東儒宗,從祀夫子廟。
圃隱五世至諱光胤,有文行見推,己卯士流,官翰林,早卒,為府君曾祖。
祖諱雲,贈吏曹判書。考諱龜應,社稷署,參奉,贈左贊成。妣安東權氏,戶曹佐郎諱愷女,領議政康定公諱轍孫。
以隆慶二年戊辰二月十二日生府君,先未生三月,而贊成公棄背,生在遺腹。實稟令姿,一家稱慶。既長慈祥端粹,奉母夫人誠孝篤至。力學攻文,登萬曆甲午文科,選隸承文院,自正字至博士。前輩諸公,嘗以精粹玉潤稱之,期其趾美顯世。時倭寇搶攘,移家江都,從外氏寓焉。以戊戌四月十日卒,時年三十一,葬鎮江山西大峴之南坐坎原。外王父權佐郎墓南,佐郎無嗣,實寄後外孫也。
前夫人江華崔氏,江都伯益輝後,齊貞公龍蘇七世孫,贈持平,諱繼善女,早卒,葬于竹山。
後夫人昌原黃氏,監司諱致敬女,同知諱大任孫,名將莊武公衡,其高祖。
黃夫人時育一男,方三歲,是我王父右議政忠貞公維城,實為孝顯兩朝名輔。以其貴乃累贈至今封。黃夫人,後府君三十七年卒,葬安山先壟,別有記。
忠貞公有二男一女,男長昌徵,郡守,贈左贊成。次尚徵,進士,贈吏曹參判。女適權尚矩承旨。贊成有一男齊賢,尚孝廟公主,為寅平尉。參判有二男,齊斗,授參議。齊泰卒,府尹。內外諸玄,若支庶多不記。
公有長兄諱說,先公卒,無子,以公承祀。
嗚呼!府君以大賢家世,積善遺後,身為綴旒之孤嗣。弱而能壯,立而能脩,而有孝友純行。錫類于家,進陞于朝。宜其壽錄,享有其祉,以稱其世美,而不幸早世,乃閼而未通。秪以積世餘慶休緒,留遺後嗣,俾而昌大,則天道之所可必者,至此乃其徵耶!
歲癸卯忠貞公,嘗焚黃于此,樹墓石。孫齊斗等,懼其或久而無徵也,敢為之記,刻諸其陰。時我主上肅宗四十年甲午月日,崇禎後七十年,距府君季年甲午,其甲再周也。
우리 증조부는 승문원 박사이며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 받은 정근(鄭謹, (1568~1598)은 자(字)가 여욱(汝頊)이다. 우리집안 정씨는 경주 영일이 본관이다. 고려시기 추밀원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 ?-1151)께서 문장으로 간쟁하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한나라 양진(楊震, ?-124, 字伯起, 東漢의 名臣)과 같으며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다. 10세 뒤에 문충공 포은 정몽주 선생은 도학을 일으키고 절의를 지켜서 우리나라 유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공자묘에 종사되었다.
증조부는 포은 선생 5세손 정광윤이며 문장과 행실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고 기묘사류(己卯士類)로서 한림원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조부 정운(鄭雲)은 이조 판서를 추증 받았다. 아버지 정구응은 사직서 참봉을 지내고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며 호조 좌랑 권개(權愷, ?1468)의 따님이며 영의정 권철(權轍)의 손녀다.
정근(鄭謹)은 융경 2년(1568) 2월 12일에 태어났으며,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아버지 정구응께서 돌아가셔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좋은 자태를 타고나서 집안의 경사로 여겼다. 자라서는 자상하고 단정하였으며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열심히 공부하여 만력 갑오년(1594)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에서 정자(正字)에서 박사까지 이르렀다. 선배와 어른들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다고 칭찬하고 조상의 미덕을 계승하여 세상에서 뛰어나길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때 왜구가 침입하여 강화도로 이사하여 외가집에서 살았다. 무술년(1598) 4월 10일 세상을 떠나니 31살이었다. 진강산 서쪽 큰재(大峴) 남쪽 감좌(坎坐)에 묘지를 모셨다. 외할아버지 권개 묘지 남쪽이다. 외할아버지 권개는 후손이 없어서 외손에게 기탁하셨다.
전 부인은 강화 최씨이며 강화도 최익휘(崔益輝) 후손이며, 제정공(齊貞公) 최용소(崔龍蘇)의 7세손으로서 지평을 추증 받은 최계선(崔繼善)의 따님이다. 일찍 돌아가셔서 안산 죽산(竹山)에 묘지를 모셨다.
둘째 부인은 창원 황씨이며 감사 황치경(黃致敬)의 따님이며, 동지 황대임의 손녀이며 고조는 명장 장무공 황형(黃衡)이다.
황씨 부인은 아들 1명을 두었다. 정근 31살에 세상을 떠날 때 겨우 3살이며 바로 우리 할아버지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다. 정유성은 효종과 현종 연간에 유명한 재상이며 귀하게 되어 조상을 추증하였다. 황씨 부인은 남편보다 37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며 안산 선영에 모셨고 묘지문이 있다.
충정공 정유성은 2남1녀를 두었다. 큰아들 정창징이 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둘째 아들 정상징은 진사이고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따님은 승지 권상규(權尙矩)에 시집갔다. 정창징은 아들 정제현을 두었고 정제현은 효종의 공주 부마로서 인평위가 되었다. 정상징은 아들 2명을 두었고 정제두는 참의를 지내고 정제태는 세상을 떠났는데 한성부윤을 지냈다. 친 현손과 외 현손이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정근(鄭謹)에게는 형님 정열(鄭說)이 있었는데 아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손이 없어서 아우 정근이 조상 제사를 모셨다.
아! 정근(鄭謹)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며 적선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윈 고아로서 20대에 장성하고 삼십대에 수양하여, 효도와 우애를 순수한 마음에서 실행하였다. 집안을 잘 다스리고 조정에 나갔으니 마땅히 오래 장수하여 복을 누리시고 세상의 칭찬을 받아야하는데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막히고 이루지 못하셨다. 다만 대대로 적선하여 후사를 남기셔서 후손이 창대하게 되면 하늘도 바라는 것이며 오늘에 이르러 징험하였다.
계묘년(1663) 정유성은 아버지 정근의 관직을 추증하는 사령장의 누런색 부본을 묘지 앞에서 태워 아뢰고 묘석을 세웠다. 손자 정제두 등은 오래 되면 징험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록을 남기고 비석의 글을 새긴다. 우리 임금 숙종 40년(1714, 甲午年, 하곡선생 66살)이며 숭정 이후 70년이다. 정근께서 갑오년에 돌아가신지 거의 두 갑자(120년)이 된다.
贈貞敬夫人昌原黃氏墓表 a_160_185a
惟我曾祖妣,贈貞敬夫人黃氏,葬安山郡磨河山西楸谷坐癸之原,即鄭氏先壟也。以府君別葬于江華,不克祔。
蓋我曾祖考,務功郎,承文院,博士,贈領議政府君,諱謹,字汝頊,迎日縣人。圃隱文忠公之八世孫,參奉,贈贊成,諱龜應之子。
夫人,其繼配也。黃氏,本昌原大姓,高麗,平章事石奇之後。高祖,諱衡,著武功,為工曹判書,莊武公。曾祖,諱琛,漢城判尹。祖,諱大任,同知中樞府事。考,諱致敬,全羅道觀察使。妣,昌寧成氏,司藝諱子濟之女。
以萬曆丙子十二月生夫人,端莊有女行,歸于議政府君。戊戌,府君捐館,夫人育一男,方三歲。上奉姑夫人孝慎,下訓孤幼,甚得母道。其辛勤成立,卒顯為名輔,則是惟我王父右議政諱維城。夫人嘗從養于南原府,崇禎乙亥八月十三日卒于府,壽六十。後累贈至今封。
孫男昌徵,郡守,尚徵,進士。郡守男,齊賢,寅平尉。進士男,齊斗,齊泰方仕,餘不能悉記。
齊斗等敬識此于墓石,時崇禎後甲子八月日。
증조할머니 정경부인을 추증 받은 황씨 묘지를 안산군 마하산 서쪽 추곡 계좌(癸坐)에 모셨는데 정씨의 선영이다. 증조할아버지 묘지는 따로 강화도에 모셔서 합장하지 못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무공랑이며 승문원 박사이고 영의정을 추증 받은 정근(鄭謹)이며 자(字)가 여욱(汝頊)이며 영일 정씨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8세손으로서 참봉을 지내고 찬성을 추증 받은 정구응의 아들이다.
증주할머니 황씨는 둘째 부인이다. 황씨는 창원이 본관이며 고려시기 평장사 황석기(黃石奇)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황형(黃衡)이며 무공이 뛰어나고 공조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장무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황침(黃琛)이며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황대임(黃大任)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황치경(黃致敬)이며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어머니는 창원 성씨이며 사예를 지낸 성자제(成子濟)의 따님이다.
증조할머니 황씨는 만력 병자년(1576) 12월 태어났고 단정하고 여성의 덕행을 실행하다가 증조할아버지에게 시집왔다. 무술년(1598)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이 겨우 3살이었다. 위로는 시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아래로는 어린 아들을 가르쳐서 어머니 도리를 다하였다. 고생하면서 아들을 길러 사람을 만들고 끝내 유명한 재상을 되도록 하였으니 바로 우리 할아버지 정유성이다. 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전라도 남원부(南原府)에서 모실 때 숭정 을해년(1635) 8월 13일 돌아가셨다. 향년 60살이며 점차 추증 받아 오늘 봉작에 이르렀다.
손자 정창징은 군수를 지내고 정상징은 진사이다. 정창징은 아들 정제현을 두어 인평위가 되었다. 정상징은 아들 정제두를 두고 정제태는 현재 관직을 시작하였다. 다른 손자들은 모두 기록할 수 없이 많다.
정제두 등은 삼가 기록하여 묘석을 세우며 숭정 이후 갑자년(1644+60=1704) 8월이다.
忠貞公(鄭維城)墓表 a_160_185c
此惟我先祖父,忠貞公墓,先輩諸公為狀若銘,嘗備矣。惟墓石,闕陰記,孫齊斗等竊就記其陰。又孫齊泰為內翰,從國史得公經筵遺事加詳,因撰次以為後錄。
公在孝廟朝,實被知遇,壬辰以知申請對,諫閔應亨罪黜,曰“狂直之言,惟明君容之,容一老臣,以補聖朝,不亦善乎?”又曰“成名於言者,自取其罪,諫此聖朝之失,臣為聖朝故也。既以為經筵進言,趙錫胤之鯁直忠言,朝臣莫有,殿下惡其盡言,投竄北塞,可不勉改哉?”累言言事者事甚切直,上不悅。
公進曰“臣請以今日事極言,殿下威怒所發,直言盡坐,偏私所累,公法不伸,此乃實病處也,從而流害可知。”因歷陳數事,“天怒民怨若此,尚不念乎?若此者惟趙錫胤、閔應亨能言之,今皆逐去矣。誰復為殿下言者?”因泣下不能成聲,曰“國事,無可為者矣。”上大感惕曰“至誠開陳,不勝感歎。前日不能聽納,至今悔之,愧謝不已。”
後又諫曰“天災時異,往而愈甚。天人之際,大可畏也。不出數年,國其亡矣,念之心膽墜矣。奈何不大警動振作,悅民心回天怒,庶為祈永之圖也?如內司貽害者類,其可以此等為累也哉。臣之言此者亦多矣,請一嚴斷,以彰宮府之政。”
又為擯使西出,陛辭又進曰“方天災求言之日,臣可無一言而去乎?趙錫胤,以直言久竄荒裔,將死嶺海,國事可惜。”
乙未(1655)被譴謫,丙申(1656)復入經筵。遇有闕失,隨事規切。以備員不能補益為效,嘗自劾求罷。請逐日開筵,延訪求助。屢言災異不息,國事無救,上喟然曰“卿每入,則衷情懇懇,不盡不已。予竊感卿此意。”
時上方銳意大志,公首陳內修自強,先固邦本,不可徒慕兵事,以取覆亡。又必以祛私納忠,敬天勤民,主為圖恢之大謨,眷眷不已。上亦深知公忠,優容而納之。屢發於感歎,其從而勉勵者常多。末年聖化,群下誦之,斯可以為觀君臣者也。
未幾,孝廟上陟,顯宗初服,首膺大拜,進戒“新化之日,必盡救民之政,以先邦本。”又進言“上候常在靜攝,引接無日,國事玩愒,將不可振,誠欲痛哭。”其在謝事,不替匡救,有事必陳。上諭以屢行之札,謂不任感歎卿至意。
甲辰冬十月大雷異,其十一月十九日公告終。時災異延訪,公入對“人事失於下,天告之,天怒民怨甚可畏。”陳大同後,煙戶出役之害,下令申禁。又論解郭齊華事,彼實希附時意,而猶以坐言己事必解之,是其臨歿之前月日也。可見至死,而不忘進忠矣。
左相洪公當朝,進曰“賢相不遺,國事不幸。”上嗟悼言“無復見斯人。”同春宋文正公有書,曰“清慎愛士,憂國之誠,世無斯人。”前輩嘗有論當世士流,輒以公與趙樂靜為首。李公世白亦稱其外先清陰金文正公訓,曰“惟大舅之事是則是效。”斯當世之尚論可以見也。
公諱維城,我鄭氏,世迎日人。鼻于高麗忠賢樞密奏事襲明,以文章直道,盡節危朝,事在麗史。十世而至圃隱文忠公,以道學儒宗,從祀文廟。五世至諱光胤翰林,是為高祖。曾祖諱雲,贈吏曹判書。祖諱龜應,社稷署,參奉。考諱謹,承文院,博士,俱早世不大遂。追贈祖左贊成,贈考至領議政。
妣昌原黃氏,貞敬夫人,監司諱致敬女,同知諱大任孫。以萬曆二十四年丙申閏八月四日生公,三歲而孤,鞠於慈氏。
丁卯登文科,歷注書、翰林、知製教、春坊、兩司玉堂,薦銓郎陞應教。出任順天、南原、原州諸府。壬午,由亞憲拜東萊,陞通政,入為承旨、刑戶禮曹參議、大司成、大司諫、知備邊司。出為全羅、黃海二道監司,陞為平安、京圻二方伯都承旨、諸曹參判,是後連兼經筵。癸巳進為刑判、大司憲、吏曹禮曹戶曹判書、判義禁府。己亥夏,拜右議政。庚子辭,移領樞。壬寅夏,復入相。癸卯辭還西樞。
至甲辰終,壽六十有九。以明年正月,禮葬江華鎮江山西大峴南負子原,先議政公兆次,身後之慕,從遺命也。
後今上己卯,有司議公節惠,贈謚忠貞。
夫人全州李氏,監役諱久涵女,監司諱□孫,戊午節士評事穆玄孫也。婉順之德,為婦儀首,封貞敬夫人。先公七年卒,壽六十一,祔葬從左。
有二男一女,男郡守昌徵,贈左贊成。次進士尚徵,贈吏曹參判。女適承旨權尚矩。
側室男二,處徵、弘徵。
贊成,一男四女,男承孝廟淑徽公主,授寅平尉。女李世白左議政,任鎮元郡守,李文佐,李秀實郡守。
參判,二男一女。男齊斗,授參議。次齊泰,自館職,卒府尹。女閔鎮周吏曹判書。
權承旨三男,秀萬牧使,和萬、重萬。
寅平有一男台一,直長,早亡,又以從侄健一為繼。
齊斗一子厚一,齊泰四子健一、順一、俊一、善一,餘不復記。
時我主上四十年甲午月日,崇禎後七十年。
여기는 우리 할아버지 충정공 정유성(鄭維城)의 묘지이며 어른들께서 행장(行狀)과 명문(銘文)을 지어주셔서 모두 갖추었다. 다만 묘석에 새기는 글(陰記)이 빠졌기 때문에 손자 정제두 등은 개인적으로 음기를 지었는데, 손자 정제태가 내한(內翰)이므로 국사(國史)에서 할아버지의 경연 자료를 얻어 더욱 상세하게 알았고 따라서 순서대로 묘지문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효종(孝宗)의 신임을 받으셨는데 임진년(1652) 지신사(知申事)로서 임금께 대면을 요청하여 민응형(閔應亨, 1578-1662)에게 죄를 씌어 내보낸 일을 간하여 아뢰길, “미친소리지만 올바른 말은 밝은 임금은 들어주십니다. 늙은 신하의 말을 들어서 조정에 도움이 되신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말로써 유명해진 사람은 스스로 죄를 받아야합니다만, 조정의 잘못을 간하는 것은 신하로서 조정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경연에서 말씀올렸듯이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의 강직한 충언을 조정 신하들이 하지 못하는 것인데 임금께서는 그가 숨김없이 말한 것을 미워하시고 북녘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셨으면서도 잘못을 힘써 고치시지 않으십니까?” 하였고, 간관들의 간언이 아주 절실하다고 자주 아뢰었더니 임금이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아뢰길, “오늘날 일을 끝까지 말씀드리니까 임금께서 화를 내시고 올바르게 말하는 간관들을 모두 연좌시키신 것은 임금의 사적인 것을 두둔한 것이며 국가의 공법을 시행하지 않으신 것이야말로 큰 잘못입니다. 큰 잘못에서 파생되는 해악이 어떤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에, 몇가지 일을 아뢰면서 “하늘이 화를 내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아직도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십니까? 이런 일은 오직 조석윤과 민응형만이 말할 수 있는데 모두 쫓아버렸습니다. 임금을 위하여 말씀드릴 사람이 누가 더 있습니까?”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막혀 아뢰길, “국사를 처리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크게 감동하고 걱정하여 말씀하시길, “지성으로 말씀해주시니 감복합니다. 지난날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지금에야 후회하고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뒤에 다시 간언하길, “하늘의 재앙과 계절에 맞지 않는 이상 현상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크게 두렵습니다. 몇 해 안 가서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어찌하여 크게 정신차리고 실천하여 백성들이 기뻐하게 하시고 하늘의 노여움을 되돌려서 국가의 명운이 영원토록 바라지 않으십니까? 내수사(內需司)의 잘못들이 이런 이상 현상에 초래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잘못을 말씀드린 것이 많습니다. 당장 엄단하셔서 궁권 내조(內朝)와 조정 외조(外朝)의 정사를 밝게 하십시오!”라고 하셨다.
또 접빈사가 되어 서쪽으로 떠나면서 임금께 인사올리며 아뢰길, “지금 천재 때문에 방안을 구하는 때에 제가 어찌 한 말씀드리지 않고 떠나겠습니까? 조석윤은 올바른 간언을 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영남지방 바닷가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국사를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을미년(1655, 효종 6년)에 귀양 갔다가 병신년(1656, 효종 7년)에 다시 경연관으로 들어오셨다. 조정에 잘못이 있으면 일에 따라 간절하게 간언하셨다. 또한 숫자나 채우는 무능한 관원으로서는 보필하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일찍이 스스로를 탄핵하고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또한 매일 경연을 열어 훌륭한 선비를 찾아서 도움을 구하시라고 요청하였다. 천지의 재이가 끝이지 않고 국사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자주 간언하였더니, 임금께서 한숨을 내쉬시면서 말씀하시길, “경께서는 조정에 들어올 때마다 충정이 간절하게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 그만 두지 않습니다. 저는 경의 뜻에 정말로 감탄합니다.”라고 하셨다.
때마침 임금께서는 북벌(北伐)의 큰 뜻을 서두르시므로 할아버지는 내정을 닦아 군사력을 기르고 백성들을 안정시켜야하며, 헛되게 전쟁을 일으켜서 나라의 멸망을 초래하지 말 것을 아뢰었다. 또한 임금의 개인적인 생각을 버리고 신하들의 올바른 충언을 받아들이시고 하늘을 받들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는 것을 전란 이후의 회복정책으로 삼으시라고 아뢰었다. 임금께서도 할아버지의 충성심을 깊이 알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시고 자주 감탄하셨고 간언에 따르시고 자주 격려하셨다.
효종 말년의 치적을 신하들이 자주 칭송하였는데 이것에서 효종과 할아버지의 신뢰하는 군신관계를 볼 수 있다.
얼마 뒤에 효종이 승하하시고 현종(顯宗)이 초상중에 할아버지를 맨 먼저 좌의정에 제수하시자,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여 반드시 백성의 구제정책에 힘쏟아 국가의 근본을 안정시켜야한다.”고 경계하는 말씀을 올리셨다. 또 아뢰기를, “임금께서 상중에 조문객을 맞느라고 바쁘시기 때문에 국사(國事)가 태만해져서 진작시킬 수 없으니 정말로 통곡할 노릇입니다.”라고 하셨다. 벼슬을 그만 둔 뒤에도 국가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놔두지 않고 일이 생기면 반드시 간언하였다. 임금께서도 몇 줄의 어찰을 내려서 할아버지의 지극한 뜻에 감복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갑진년(1664, 현종 5년) 겨울 10월에 큰 번개가 치는 이변이 일어났고 11월 19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때 임금께서 재이(災異) 때문에 좋은 대안을 찾으려고 하시자 할아버지가 조정에 들어가 면대하여 건의하시길, “하늘 아래 땅에서 사람들이 잘못하면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므로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들의 원망이 가장 두렵습니다.”라고 아뢴 뒤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뒤부터 민가의 잡역(煙戶 雜役) 폐해를 아뢰어 금지하도록 하셨다.
또한 곽제화(郭齊華, 1625-1675)가 파직되어 충군(充軍)된 일을 풀어줄 것을 논의하였는데 그는 사실 당시 집권자에게 아부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지난 일을 간언하다가 연좌되었으니 반드시 풀어주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종하시기 한 달이다. 죽음을 앞두고도 충언을 아뢰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의정 홍중보(洪重普,1612-1671)가 집권하였을 때 아뢰기를, “어진 재상이 세상을 떠났으니 국가의 불행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슬퍼하시면서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1606-1672)는 서신에서 “청렴하고 조심하며 선비를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세상에 이런 분이 다시 없다.”라고 하였다. 선배들이 당시 선비들을 논평하면 할아버지와 조석윤(趙錫胤)을 으뜸으로 꼽았다. 이세백(李世白, 1635-1703)은 외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 1570-1652)께서 “대구(大舅: 숙휘공주의 시할아버지) 정유성께서는 옳은 일을 옳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본받으라.”라고 하였다는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할아버지에 관한 당시의 평론이니 잘 알 수 있다.
할아버지 이름은 유성(維城)이며 우리 정씨는 영일(迎日)이 본관이며, 고려시기 충현공 추밀주사 정습명(鄭襲明)이 시조이며 문장과 올바른 도리로써 위태로운 조정에 충절을 다하셨는데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10세손 포은 정몽주 선생은 도학(道學)으로써 유종(儒宗)이 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다시 5세손 정광윤(鄭光胤)은 한림을 지냈는데 고조할아버지이며 증조할아버지 정운(鄭雲)은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할아버지 정구응(鄭龜應)은 사직서 참봉을 지내셨다. 아버지 정근(鄭謹)은 승문원 박사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뜻을 펼지지 못하셨다. 할아버지 정구응은 좌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버지 정근은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어머니 창원 황씨는 정경부인이 되셨고 감사 황치경의 따님이며 동지중추부사 황대임의 손녀다. 만력24년(1612, 丙申年) 윤8월 4일 정유성을 낳았다. 3살 되었을 때 아버지 정근이 세상을 떠니 어머니께서 기르셨다.
정묘년(1627, 15살) 문과에 합격하여 주서ㆍ한림ㆍ지제교ㆍ춘방ㆍ양사ㆍ옥당을 거쳐서 전랑에 천거되었고 다시 응교로 승진하였다.
지방관으로는 순천(順天)ㆍ남원(南原)ㆍ원주(原州) 등 여러 부사를 지냈고, 임오년(1642)에는 아헌(亞憲)으로서 동래부(東萊府) 부사에 임명되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중앙정부에서 승지ㆍ형조ㆍ호조ㆍ예조의 참의와 대사성ㆍ대사간ㆍ지비변사가 되었다. 다시 나가서 전라도와 황해도의 감사가 되었다가 승진되어 평안도와 경기도의 관찰사 및 여러 조(曹)의 참판이 되었다. 이후에는 잇달아 경연관을 겸직하였다. 계사년(1653)에는 승진하여 형조판서ㆍ대사헌ㆍ이조ㆍ예조ㆍ호조판서와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기해년(1569) 여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경자년(1660)에 사임하여 영중추부사로 옮겼고, 임인년(1662) 여름에는 다시 정승에 올랐으며 계묘년(1663)에는 사임하고 판중추로 돌아왔다.
갑진년(1664)에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69세였다. 이듬해 정월 강화도 진강산 서쪽 큰재의 남쪽 자좌(子坐)에 묘지를 모셨는데 아버지 정구응 묘지 아랫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사모하셨고 유언에 따라 여기에 묘지를 모셨다.
뒤에 우리 임금 숙종(肅宗) 기묘년(1699)에 담당 관원들이 할아버지의 절의(節義)와 은혜를 논의하여 충정(忠貞) 시호를 추증하였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감역을 지낸 이구함(李久涵)의 따님이고, 감사를 지낸 이철(李鐵)의 손녀이며, 무오사화의 절사(節士) 평사 이목(李穆)의 현손이다. 완순(婉順)한 덕성이 부덕(婦德)의 으뜸이므로 정경부인에 봉하였으며, 할아버지보다 7년 앞서서 돌아가셨고 향년 61세이며 할아버지 묘지 좌측에 부장하였다.
2남1녀를 두셨는데 큰아들은 군수를 지낸 정창징이며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둘째 아들은 정상징은 진사이며 이조참판을 추증 받았다. 따님은 승지 권상구(權尚矩)에게 시집 보냈다.
측실이 2남을 두어 정처징(鄭處徵)과 정홍징(鄭弘徵)이다.
좌찬성 정창징은 1남4녀를 두어 아들 정제현(鄭齊賢)이 효종의 숙휘공주(淑徽公主)에게 장가들어 인평위(寅平尉)가 되었다. 사위 이세백(李世白)은 좌의정이며, 임진원(任鎭元)은 군수이고, 이문좌(李文佐)ㆍ이수실(李秀實)은 군수이다.
참판 정상징은 2남1녀를 두어 큰아들 정제두(鄭齊斗)는 참의이고, 둘째 아들 정제태(鄭齊泰)는 벼슬이 관각(館閣)에서 시작하여 한성부윤이 되어 세상을 떠났고, 사위 민진주(閔鎭周)는 이조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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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온 가으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빗속에
힘찬 강의 그림같았을텐데 빗속의 어둠만 바라볼 뿐 가지 못했다.
옛 사람 이야기 오늘에 다시 새겨들으면 내가 변화할까?
모진마음은 어질어지고 세상을 읽는 시선 맑아질까??
숨쉬기하나조차 제대로 못해
날마다 햇님이 불수레 끌며 시범을 보이건만
여섯도적에게 이리저리 끌려 댕기느라 금쪽보다 귀한시간
이날저날 이해저해 헛되이 보내는중에 ㅡ 호밋자루 쥐고 마른땅 캐다
을미년 겨울을 축복하러 돌아오는
백여마리 흑두루미 여산위를 빙빙 춤추며 나는 모습
하늘에서 들리던 꾸루르르 꾸르 ~ ~~~ 장엄한 天空의 자유를 맞닥뜨렸던 날 !
야생의 춤 올림 ^*
무지개
윌리엄 워즈워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느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밤새 늦가을 단비 오신 뒤
이른아침
혹 비 개이고 무지개 뜨려나? 기다려 보았지만
촉촉이 젖은 하늘 무지개는 안 보이고
실눈 뜬 눈썹위 내려앉은 무지개빛 햇살 한 줌!
정제두선생님의 가족의 이어짐을 이렇게 자세히 알수있는것만으로도
큰 재산이네요....
하곡 정제두 선생님의 증조할머니 창원 황씨....
정유성 선생님 3살부터 혼자되어 기르셨답니다.
아들을 잘 길러서 정씨 집안을 일으켜세운 분이랍니다.
고생 참 많이 하셨겠지요.
안산시 마하산에 묻히셨다는데요.
언제 좋은 날 찾아가 뵈야지요^ ^
이경룡 올림
좋은 날 언제일지 몰라도 꼭 가 뵙고프네요. 원장님!
야생의 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