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폐허된 이 땅에서 구호와 재건을 이끈 美軍장성의 휴머니즘을 기립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은 1,023일간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됩니다.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폭탄은 피했지만 난리통까지는 벗어나진 못했었습니다.
전쟁 발발 이틀 뒤인1950년 6월 27일 저녁 장교 한 명이 부산시청을 찾아와 군인가족을 위한
거처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6.25발발이후 거의 매일같이 새벽 5시만 되면 부산역은 열차편으로 도착하는 피란민으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부산은 해방 직후 해외동포들과 피난민이 밀려들면서 인구 폭발을
경험합니다. 한껏 해야 28만 명 정도였는데 전쟁 막바지에 부산은 인구 100만 명의 도시가
됩니다.
이 어지럽던 시기 미군 수사령관으로 부산에 온 미국 장성이 있었습니다.
리처드 위트컴 (1894~1982 Richard S. Whitcomb)!.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육군보병 장교로 참전했고, 2차 대전 때엔 노르망디 상륙작전 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전투에 투입됐었는데 미국이 환갑이 다 된 그를 한국전쟁에 소환한 것은
장기전에 지친 유엔군에게 군수물자를 원활히 보급해 전투력을 보강하고,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불산이라는 부산에서 대화재로 인한 참사를 목격합니다.
1953년 11월 27일 저녁 부산 영주동 판자촌에서 발생한 불이 시속 11.8㎞의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주택 3,132채 소실. 이재민만 3만 명에 달했습니다.
현장을 둘러본 위트컴은 사령관 직권으로 군수물자를 풉니다.
추위에 갈 곳 없는 시민들을 위해 천막을 치고 침구류와 옷과 식량을 나눠주었습니다.
상부의 허가를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알았습니다.
법적으론 군수물자 무단 전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미 하원 청문회에 서게 된 위트컴, 여기서 대반전이 이뤄집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의 진정한 승리는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입니다
(War is not done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
이 말에 워싱턴 의사당에서 기립박수가 터졌습니다.
그 후 그는 더 많은 구호품을 안고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도를 시찰하던 중 보리밭에서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는 산모를 보고 병원 건립을
추진합니다. 부대원 봉급의 1%와 각종 모금활동으로 그렇게 탄생한 게 ''메리놀병원.''입니다
윤인구 초대 부산대총장이 서구 충무동 단과대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종(鐘) 모양의
캠퍼스 배치도를 들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겠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위트컴은 "당신의 꿈을 내가 사겠다."며 이승만 대통령과 경남지사를 설득해 장전동에 50만평
용지를 확보해줬습니다.
공사는 한국민사원조처(KCAC)프로그램을 통해 원조. 미국공병대를 동원해 도로 개설. 그래서
생긴 캠퍼스가 부산대학교 장전동 캠퍼스입니다.
‘밴 플리트'가 한국전쟁의 영웅이라면 '위트컴'은 전후 재건(再建)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전역 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 한구석에 돌덩이 같은 응어리가 있었습니다.
장진호에서 전사한 미 해병 1사단 병사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작업을 같이할 33세 연하의 파트너를 만나게 되는데. 그분이 '한묘숙 (1927~2017).
한묘숙씨가 천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보육시설법인 익선원(益善園)을 운영하고 있을 때
장군님을 만나 고아원등 사회사업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자주 오셨고 그러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한묘숙여사의 언니는 여류소설가 한무숙 씨이며, 동생 역시 소설가 한말숙으로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아내입니다.
여러 차례 중국과 북한을 넘나든 탓에 박철언이 '정체불명의 여인'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분이십니다. 위트컴은 사재와 연금을 모두 털어넣었고. 한남동 13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유일한 재산이었습니다.
부인이 베이징에서 북한 측 인사를 비밀리에 만나 유골송환 작업을 진행하던 1982년 7월 12일
위트컴 장군은 용산 미8군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하십니다.
그리곤 유언에 따라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금년 7월이 운명하신지 40주기 되는 날입니다.
향나무로 단장된 13만4000㎡의 유엔기념공원엔 한국전쟁의 희생자 총 2,315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습니다. 위트컴은 여기에 묻힌 유일(唯一)한 장군(將軍)이십니다.
남들과 똑같은 크기의 묘석(墓石)!
금년 40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찾은 그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묵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옆에 철 지나 시들어버린 장미꽃 일곱 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쩌다 은혜도 헌신도 잊어가는 국민이 되지는 않았을까 되돌아 볼 입니다.
-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