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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시대의 신앙] 엉터리 과학
엄마는 시집간 막내 이모를 보러 당시 아직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철로 위에서 증기를 내뿜고 있던 기차에 올라탔는데 몇 시간 뒤 마산에 도착했다.
기차를 처음 타 본 어린 나는 막내 이모를 보자마자 기차가 어떻게 마산까지 왔는지 나름 설명해 드렸다. 지구는 둥글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고 있다는 둥, 그래서 동쪽인 부산에서 서쪽의 마산으로 기차가 미끄러운 철로 위로 저절로 굴러갈 수 있었다는 둥 아주 신이나서 떠들어 댔다.
지구가 둥글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고 있다는 것은 학교에 다니던 형들한테 흘려들은 이야기였고, 나머지는 내가 대충 지어낸 이야기였다. 기차 바퀴나 철로는 만질만질하고 미끄러워서 꺼끌꺼끌한 자동차 바퀴와 길처럼 서로 맞물려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맙게도 이모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며 틀렸다거나 맞다고 대꾸하지는 않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 주기만 하였다. 이모 집에서 며칠 머무른 우리는 다시 기차를 타고 마산을 떠나 부산으로 왔다. 그 뒤 나는 오랫동안 왜 기차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대중 매체 속 엉터리 소리들
요즘 ‘유튜브’(YouTube)라는 웹 공간에서 자신의 생각을 널리 펼쳐 보이려는 수많은 사람이 개인 방송을 한다. 그 가운데는 무척 유익한 내용도 많으나, 황당하고 심지어 해로운 것도 많아서 이를 보는 사람들의 건전한 판단력 형성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얼마 전 일이다. 학교 동창들이 소통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둥근 지구는 거짓말이다.’라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이 소개되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또 그런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내가 누구인가! 호기심 많은 나는 이를 도저히 뿌리치지 못하고 궁금하여 들여다보았다. 그나마 시간이 아까워 재생 속도를 두 배 가까이 빨리 돌려 대충 건너뛰어 가며 보았다.
조금만 생각하고 배웠다면, 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따져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임에도 억지로 무시하고, 평평한 지구를 해와 달이 그 위에서 돌고 있으며, 한국 최초로 지구 궤도에 올랐던 이소연의 우주여행도 다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이 만든 ‘평평한 지구’를 구독한 이가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이 내용에 동의하는 댓글도 많이 달린 것으로 보아 추종자들도 꽤 많은 모양이다.
그는 산소도 없는 우주 공간에서 태양이 수소 폭발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 또한 말도 안 된다며 기어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냈다. 태양의 에너지는 수소가 산소와 결합하는 화학적 반응이 아니라 수소 원자들의 핵이 융합되며 줄어드는 질량이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E=mc²’ 공식대로 에너지로 변환되는 핵융합 반응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참고로 이 ‘평평한 지구’는 주로 극단적인 창조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듯한데, 창조 과학 누리집에서조차도 이를 부정하는 논설을 실었다.
잘못된 과학의 이모저모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받아 보던 신문에서 한 신부님이 나뭇가지로 지하수를 찾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여름이면 가뭄에 시달리는 우리 농촌을 도우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노력이었으리라.
이 방법은 그 당시 유럽에 널리 퍼져있던 ‘다우징’(dowsing)이라는 것으로, 나뭇가지 같은 장치를 든 사람의 영이 주변 사물과 반응하여 이 장치를 통해 증폭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그럴듯하게 설명하였다. 글을 쓴 신부님은 아마도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님들에게서 이를 배운 듯싶다.
이 다우징을 통하여 지하수를 찾은 농민들은 그 신통함에 감탄하여 주변에 널리 퍼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땅은 어디든 파 보면 상당한 확률로 지하수가 나온다고 한다. 조금 파 내려가다가 물이 나오지 않아 포기했을 경우라도, 다우징과 같은 확신이 뒷받침된다면 물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다우징은 과학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방법이라고 밝혀졌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 듯하다. 신통력을 가진 스님이 그린 ‘달마도’로 수맥을 막는다느니, 남한 깊숙이 침투한 북한의 땅굴을 다우징으로 찾는다느니 하니 말이다.
비슷한 엉터리 원리를 이용하여 ‘양자 공명 장치’(quantum resonance system)라는 유사 의료 기기가 암암리에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 적도 있다. 퀀텀, 레저넌스와 같은 어려운 과학 용어를 덧붙이면 이해하지는 못해도 뭔가 있겠거니 하는 심리에 넘어간 것일까.
오래 전 본당 신부님이 강론 중에 “하늘의 별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햇빛을 반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태양의 빛을 반사한다는 것을 별까지 확장한 셈인데, 하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말이다. 보통 별이라고 하는 것은 ‘항성’(Star)을 가리키는 단어로, 태양처럼 수소 핵융합 등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이다.
옛날에 항성이라고 여겼던 수성과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은 별이 아니어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받아서 빛난다. 이를 ‘행성’(Planet)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이론을 배운 학생들이 이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신앙을 무시할까봐 강론을 듣는 내내 걱정되었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
이 땅은 평평하고 해와 달이 그 땅의 위아래로 돈다는 생각은 고대 문명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구세사의 하느님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테고 성경도 이를 바탕으로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당시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게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전달자 구실을 성경이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지만(루카 18,17 참조), 이 또한 신앙적인 면을 가리키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신앙과 이성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나는 영으로 기도하면서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양하면서 이성으로도 찬양하겠습니다”(1코린 14,15).
“나는 교회에서 신령한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른이 되십시오”(1코린 14,19-20).
예수님께서도 표징, 곧 기적만을 요구하는 이들을 나무라셨다. 오늘날의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이성에 반하는 기적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루카 11,29-32; 마태 12,39).
[과학 시대의 신앙] 양자 텔레포테이션
1960년대에 시작된 공상 과학 외화 시리즈 ‘스타 트렉’에 나오는 순간이동 장치인 ‘트랜스포터’(transporter)는 사람이나 물체를 분해하여 목적지로 쏘아 보낸 뒤 목적지에서 재조립하는 장치를 말한다. 주로 행성 근처에 도달한 우주선에서 사람을 행성으로 내려보내거나, 수백 내지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데에 트랜스포터를 사용한다.
카운트다운이나 로켓 발사, 착륙 등 번거로운 이동 장면을 일일이 보여 준다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드라마의대부분을 차지하여 내용 전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촬영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고안된 기법이 바로 이 ‘트랜스포터’이다.
트랜스포터의 한계
흔히 생각하듯이 순간 이동은 물체가 한곳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곳에 나타나는 것일까?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빛보다 빨리 갈 수 없기 때문에 짧은 거리라도 이동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트랜스포터의 구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몸무게가 70kg의 사람을 분해하여 빛과 같은 에너지로 만든다면, 아인슈타인의 질량 에너지 등가 공식 E=mc²에 따라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수백 개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된다. 물질을 빛으로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하려고 하더라도 또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더구나 사람이 그런 가속도를 견뎌낼 수조차 없다.
해당 목적지에서 재조립하려면 본디 사람이나 물체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필요하다. 10의 28제곱, 곧 1조의 1경배 만큼에 해당하는 원자 정보를 측정하여 이를 내보내 이 정보를 재조립에 적용해야 하는데, 이 정도의 정보량은 인류가 현재 지구에 저장하고 있는 총정보량의 만 배 정도에 해당한다. 이를 순식간에 전송하고 처리하는 것 또한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트랜스포터 과정을 설명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물질 또는 질료’(matter)에 ‘정보’나 ‘형상’(form), ‘패턴’(pattern)이 합해져서 물체가 된다. 어원적으로 ‘matter’는 ‘mother’와, ‘pattern’은 독일어로 pater, 곧 ‘father’와 연결된다.
트랜스포터에 대한 아이디어는 스타트렉 말고도 수많은 공상 과학 소설과 영화에서 다루고 있다. 이들 가운데 정보 전달이 잘못되어 두 사람이 생기는 경우도 나온다. 또 트랜스포터 내에 있던 파리의 유전 정보와 뒤섞여 파리 인간이 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대로 트랜스포터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부닥칠 리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텔레포테이션에 대한 이론들
상당히 과학적 업적을 이룩한 과학자들 가운데에도 이와 유사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이들이 있다. 예수회 신부이자 고생물학자인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이론’에 영향을 받은 프랭크 티플러는 「불멸의 물리학」(physics of immortality)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정신을 정보로 추출하여 몸 없이 정보만 저장 장치에 담아 우주여행을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 정보를 재생하는 방식으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스티븐 호킹도 비슷한 방식으로 지구 멸망을 피하고자 우주를 개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원자들의 정보를 측정하는 것에도 양자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트랜스포터처럼 ‘물체’나 ‘사람’을 ‘물질’과 ‘정보’로 분리하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1993년 IBM의 찰스 베넷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 이동 방식을 제안했다.
바로 ‘양자 텔레포테이션’(quantum teleportation)이라는 것이다. 이를 같이 연구한 애셔 페레즈는 “‘텔레’(tele)는 그리스 어원이고, ‘포트’(port)는 라틴어에서 온 것이라 잘못된 조어”라고 밝혔지만, 오늘날 ‘텔레포테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나는 이를 ‘양자 원격전송’이라고 번역하지만, ‘양자 순간 이동’ 등 다양한 표현으로 번역되고 있다.
양자 얽힘’이란
텔레포테이션을 하려면 출발지와 목적지에 ‘양자 얽힘’(entanglement)이라는 쌍둥이 양자 상태가 필요하다. 출발지의 양자 상태 측정 결과가 목적지의 양자 상태 측정 결과와 상관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쌍둥이처럼 운명적으로 얽혀 있어서 양자 얽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텔레포테이션하고자 하는 물체를 출발지에 있는 양자 얽힘의 한 쪽 부분과 새로이 얽히도록 하는 ‘얽힘 측정’을 하여 결과를 얻으면, 기존의 얽힘은 끊어진다. 곧 출발지와 목적지의 쌍둥이 관계는 끊어지고, 보내려는 물체와 출발지의 얽혔던 한 쪽 사이에 새로운 쌍둥이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제 얽힘 측정에서 얻어진 숫자들을 목적지로 보내어, 이 숫자에 따라 목적지에 있는 한쪽을 조작하면, 본디 물체의 상태로 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얽힘 측정으로 본디 물체는 출발지에서 사라진다. 얽힘 측정 결과를 나타내는 숫자들은 본디 물체의 상태를 표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목적지의 한 쪽을 본디 물체의 상태로 변환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숫자들을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보내야 하기 때문에 텔레포테이션은 빛보다 빠른 송신이 아니다. 목적지에서 본디 물체가 사라지므로 양자 상태가 복사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얽힘 측정은 본디 물체의 상태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체의 상태를 전혀 모르면서도 온전히 보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순간 이동은 가능할까
그렇다면 텔레포테이션으로는 사람을 전송할 수 있을까? 광자 또는 원자 상태를 텔레포테이션하는 실험은 여러 차례 성공했지만, 사람은 어림없는 일이다. 먼저 얽힘을 쌍둥이로 표현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양자 얽힘으로 만든다는 것은 사람이 지닌 그 어마어마한 정보의 규모 때문이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을 텔레포테이션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트랜스포터보다 다행스럽기는 하다. 사람의 마음을 포함한 상태를 ‘모르는 그대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먼 곳으로 보내고자 내 마음을 송두리째 열어 남에게 보여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마음은 트랜스포터가 다루는 고전 물리학의 정보, 곧 ‘비트’(bit)보다, 텔레포테이션에 나오는 양자 물리학의 정보, 곧 ‘양자 비트’ 또는 ‘큐비트’(qubit)로 다루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렇다면 형상에 해당하는 것을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mind)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람의 마음은 육체에서 분리하여 온전히 읽어낼 수도 없고, 복사할 수도 없는 ‘양자’ 상태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프랭크 티플러가 상상했던 것처럼 몸에서 떼어 내어 컴퓨터 칩에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고전적인 디지털 정보도 아니라고 믿는다.
[과학 시대의 신앙] 수 비교 정의
1998년 우리나라는 국가 부도의 위기에 처하며 국제 통화 기금에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외환 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이 ‘IMF 환란’의 원인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우리나라를 다녀간 한 외국의 경제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그에 해당하는 숫자가 하나씩 있다. 달러가 그것이다.”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에 해당하는 숫자와 달러를 비교하고 따져야 했을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한국에 엄청난 경제 위기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돈을 거둬들인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을 펴내 또다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 책에서 지난날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교육과 환경, 건강, 정치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돈으로 사고팔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무엇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 것과 남의 것을 본능적으로 비교하곤 한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은 이런 인간의 본능적 심리를 잘 보여 준다. 바로 이런 비교 본능으로 말미암아 수를 사용하게 되었고 수를 사용하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였으며, 시장에서 가격을 흥정하는 등의 경제 행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나이와 키, 몸무게, 재산, 친구의 숫자 등 어느 한 개인을 표현할 때에는 여러 숫자를 동원할 수 있다. 이런 숫자들이 그 사람을 이해하거나, 그 사람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샌델이 책에서 한 것처럼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내어 비교할 수도 없다.
이 숫자들만으로 그 사람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숫자 또는 돈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가령 같은 일을 했는데 한 사람은 돈을 많이 받고 다른 사람은 적게 받았다면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있을까? 조금 달리 말해 한 사람은 많이 일했고, 다른 사람은 조금 일했는데, 두 사람 모두 같은 보수를 받았다면 이 또한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샌델은 정의를 이야기하며 이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숫자를 이용하여 비교하였는데, 사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20,1-16)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포도밭에서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정오나 세 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나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포도밭 주인에게서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일찍 일하러 왔던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20,12). 그러자 포도밭 주인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20,13)
그렇다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요즘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이런 불의가 어디 있냐며 정의를 세우자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렇지만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계약한 대로 한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같은 물건을 어떤 사람은 더 싸게 사고, 어떤 사람은 더 비싼 값을 주고 사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있다.
그렇다면 이를 막연히 불의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비유는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바로 이 이야기가 그렇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불평하던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질문 있습니다!’ 하며 따져 보았을 듯싶다. 다음의 포도밭 주인의 말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을 텐데 여전히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시기하는 것이오?”(20,14-15) 이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신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주인은 주인대로의 판단 기준이 있고, 일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름대로 재어 보고 그 숫자를 비교하지만, 하느님의 판단은 이와 완전히 다르실 수 있다. 나로서는 그런 상황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다만 포도밭 주인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정의와 불의를 따지려고 하기보다
흔히 사람과 관련된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그 둘의 양을 비교해야 하고, 그러기에 앞서 그 양을 측정해서 숫자를 얻어야 한다. 측정하고 숫자를 얻는 것이 과학 기술 분야라면 원리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비교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차가 있더라도 통계적으로 이를 다룰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일에 관해서는 말처럼 그리 쉽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의에 관한 한 측정하여 숫자를 비교하는 것보다 합의, 또는 약속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보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도 하느님의 약속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구약의 모세 오경 가운데 가장 읽기 지겨운(?) 책이 있다면 ‘민수기’일 것이다. 영어로는 ‘Numbers’라고 하는, 아예 ‘숫자들’이라는 이름의 책인 민수기에는 다양한 율법 규정과 더불어 숫자가 많이 나온다. 민수기 31장에서 전리품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 정의로운 분배를 하고자 675,000이나 337,500과 같은 아주 큰 숫자와 함께 1/50, 1/500 같은 분수까지 나온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숫자를 엄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많이 썼을 테지만,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이 소 한 마리와 저 소 한 마리, 또 이 양 한 마리와 저 양 한 마리가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인간의 부족함을 초월하신다.
과학과 기술이 수를 사용하는 정량적인 방법으로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한 대기업은 양보다 질을 내세워 크게 성장하기도 했다. ‘양’만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도 사실 매우 정밀한 숫자들의 조정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수의 사용은 이제 과학 기술을 넘어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에까지 널리 침투해 있다. 그렇지만 정당에서 최종 후보자를 정할 때에 여론 조사의 가중치와 투표권의 인정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지, 또 투표자의 나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지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의와 약속이다.
사람의 일은 수를 사용해 더 정확하고 더 효율적인 결과를 추구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을 정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샌델이 말한 것처럼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훨씬 많고, 더욱이 하느님 나라를 숫자로 비교하거나 따질 수는 없다.
[과학 시대의 신앙] 공명, 공진
첫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누워 있는 어린 아기의 눈앞 천정엔 미국의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주인공들인 노란색의 ‘빅 버드’, 파란색의 ‘쿠키 몬스터’, 초록색의 ‘오스카’, 이렇게 셋이 그네를 타듯이 매달려 있었다.
가만히 매달려 있기만 한 것이 심심해 보여 손으로 그 셋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빅 버드를 보면서 흔들면 빅 버드만 크게 그네를 타고 다른 둘은 멈추었다. 쿠키 몬스터를 보면서 흔들면 쿠키 몬스터만, 오스카를 보면서 흔들면 오스카만 크게 앞뒤로 흔들리고 다른 둘은 멈추는 것이었다.
‘어라, 이거 무슨 염력이라도 작용하는 걸까?’ 하고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정신을 되찾았다. ‘공명’, 또는 ‘공진’이라 불리는 물리 현상으로 만들어진 완구였다.
곧 빅 버드를 보면서 그네를 흔들면 빅 버드 고유의 진동수에 맞추어 에너지를 흡수한 빅 버드는 더 크게 진동하는 반면, 빅 버드의 고유 진동수와는 다른 고유 진동수를 가진 나머지 둘은 그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멈추는 것이다.
고유 진동수를 결정하는 요소
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날마다 밥을 줘야 시계추가 좌우로 흔들며 작동하는 괘종시계가 집집마다 있었다.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 시계추가 멈추면 도대체 시계 밥도 주지 않느냐고 어른들께 한바탕 야단도 맞던 때다. 고요한 밤이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렸다. 시계추가 좌우로 한 번 왕복하면 1초가 갔다.
피사의 기울어진 탑 꼭대기에 매달린 추가 흔들릴 때 한 차례 진동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진자의 등시성’이다. 곧 시계추의 진동이 일정한 시간을 유지하는 원리를 말한다.
시계추의 진동 주기는 길이의 제곱근에 비례하는데, 추의 길이가 25cm가 되면 시계추가 한 번 왕복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거의 정확하게 1초가 된다. 추의 길이가 더 길어져 1m가 되면 한 번 왕복하는 데에 2초가 걸린다.
그래서 25cm 추의 고유 진동 주기는 1초이고 고유 진동수는 1초에 한 번, 곧 1헤르츠(Hz)가 된다. 또 1m 추의 고유 진동수는 2초에 한 번, 0.5Hz가 된다. 앞서 말한 빅 버드, 쿠키 몬스터, 오스카의 그네 줄 길이가 조금씩 달라서 그 고유 진동수가 조금씩 달랐다.
가야금과 기타,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의 진동에는 현의 길이 말고도 현의 밀도와 장력도 진동수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같은 밀도의 현일 경우 길이를 반으로 하면 진동수가 두 배로 되어 한 옥타브 높은 소리를 낸다. 곧 현의 진동수는 길이에 반비례한다.
현의 밀도가 네 배가 되면 진동수는 반으로 되어 한 옥타브 낮은 소리, 현에 걸리는 장력이 네 배가 되면 진동수는 두 배로 되어 한 옥타브 높은 소리가 난다.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은 이유도 어른들보다 성대가 짧고 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공진과 관련한 현상들
우리가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은 공기 분자들의 진동이 우리 귀의 고막을 흔들고, 그 진동이 귓속에 있는 달팽이관의 액체를 타고 전달되면서 달팽이관에 배열된 유모의 청각 세포를 자극하는 과정을 거쳐서라고 한다.
각각의 유모는 어떤 특정 주파수, 곧 고유 진동수에만 공명하게 되어 진동수가 높거나 낮은 소리를 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람은 보통 1초에 20에서 2만 번까지 진동하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20대 후반에 이르면 1만 2,000Hz보다 높은 소리는 못 듣는다고 한다.
언젠가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에 발명가 아버지와 딸이 초대되어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청소년들을 상점 주변에서 쫓아내는 음파 발생기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물건을 사지도 않으면서 상점 주변에 모여들어 영업을방해하는 청소년들에게 12,000Hz보다 높은 소리를 틀어 주면 그 ‘삐익’거리는 소리가 싫어서 청소년들이 떠나게 되어 상점 주인들에게 인기가 높단다.
반면에 그 소리는 물건을 사러 오는 어른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아서 영업에 지장이 없다고 한다. 함께 출연한 발명가의 딸은 이를 역이용하여,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고 학생들끼리만 소통하는 기구를 발명했다고 한다.
우리말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는데, 1831년 영국 군인들이 행진하면서 생긴 진동에 공진을 일으킨 돌다리가 무너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들이 여럿 보고되고 있어서, 다리나 건축물을 지을 때 반드시 공진 현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MRI, 곧 자기 공명 영상은 우리 몸 안의 물 분자에 있는 수소 원자핵 스핀의 공명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핵자기 공명은 원자핵이 가진 스핀의 공명 현상을 이용하여 어떤 물질인지 알아내는 분석법이다.
1940년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만든 지 넉 달밖에 안 된 다리가 무너졌는데, 지진과 같은 큰 충격이 아니라 잔잔하게 부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진동이 다리 구조의 고유 진동수와 같아 그로 말미암아 발생된 공진 현상이 그 원인이었다고 물리학 교과서에 소개되었다.
하느님의 진동수는
여호수아기 6장을 보면 예리코를 점령한 사건이 나온다.
“‘보아라, 내가 예리코와 그 임금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너희 군사들은 모두 저 성읍 둘레를 하루에 한 번 돌아라. 그렇게 엿새 동안 하는데, 사제 일곱 명이 저마다 숫양 뿔 나팔을 하나씩 들고 궤 앞에 서라. 이렛날에는 사제들이 뿔 나팔을 부는 가운데 저 성읍을 일곱 번 돌아라. 숫양 뿔 소리가 길게 울려 그 나팔 소리를 듣게 되거든, 온 백성은 큰 함성을 질러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때에 백성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올라가거라.’ … 사제들이 뿔 나팔을 부니 백성이 함성을 질렀다. 백성은 뿔 나팔 소리를 듣자마자 큰 함성을 질렀다. 그때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은 저마다 성읍을 향하여 곧장 앞으로 올라가서 그 성읍을 함락하였다”(2-20).이 사건을 보고 예리코 성벽이 나팔 소리와 함성에 공진을 일으켜 무너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코마 다리와 같은 경우인지 지금에 와서 확인할 길은 없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공명 현상은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진동수를 맞추는 것이 아닐까.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기도와 신앙생활을 통해 계속 하느님을 바라보며 생활한다면, 하느님과 진동수를 맞추게 되고 공명 현상을 일으켜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의 에너지를 계속 받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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