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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시는 하나님
34: 14-28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15.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찌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신7:3,
17.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찌니라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찌니라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찌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찌며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신16:10, 13
23.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
24.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번씩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25.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두지 말찌며
26. 너의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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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우리나라에는 칠거지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출가한 여성이 지어서는 안 되는 일곱 가지 악행을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남편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든지 말든지,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꾹 참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질투를 하면 칠거지악 중에 하나를 범한 것이 되어 이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참 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는 감정이 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상대에게 자신을 전부주고, 상대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한다면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을 질투라고 합니다.
이 질투가 일어나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등한 관계에서만 일어납니다. 사람과 짐승 사이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개를 너무 좋아한다고 해서 개를 질투하는 아내가 있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귀족과 노예 사이에는 질투의 감정이 생길 수 없습니다. 질투는 대등한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상대에게 사랑을 다 쏟아 부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상대에게 자기 전부를 쏟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를 질투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만큼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사랑의 불만이 질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충격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질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대등한 관계일 수 있습니까? 인간은 한 줌의 진흙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릇을 만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흙과 같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하기에 우리가 그분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질투의 감정을 품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개미를 질투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피조물의 하나로만 생각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신다는 증거이고, 또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 사랑하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질투의 감정을 가지신다는 이 말씀은 충격 스러울 정도로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놀 때에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싶어 합니다. 만일 아이들이 노는데 어른이 끼어서 사사건건 ‘이렇게 해라. 그것은 안 돼’ 하면 아이들은 재미없어 합니다.
그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에서 손을 떼시고 간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놓으시고 멀리서 구경만 하시다가 우리가 실패하고 도움을 청할 때만 도와주기를 바라는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대로 보고만 계시지만, 당신이 사랑한 택한 백성들에게는 절대로 방임만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놓아두시면 망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질투까지 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나를 위해서 자기를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여자는 당연히 나도 자기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그 여자를 그만큼 사랑한다면, 그가 나를 질투하는 것이 도리어 고마울 것이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나를 질투하는 것이 너무나 귀찮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의 질투가 나에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것은 내가 그를 사랑하느냐 아니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질투하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운 말씀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질투하신다는 사실이 귀찮고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멋대로 살게 놓아두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간섭하시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질투까지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서 우리를 그냥 놔두면 우리가 망하게 되어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복을 다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3-14)
인간들이 하는 대로 가만 놔두면 자동적으로 어디로 가게되는지 아십니까? 신이 아닌 것들을 신이라고 만들어서 섬기면서 우매무지한 길로 가고, 서로 미워하며 싸우고 망할 길로 갑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이방민족을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옛날에는 부족들 간에 전쟁이 많았습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전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피하고 싶은 경우에는 상대와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을 맺을 때에는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방의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협정을 맺을 때 서로의 신상을 교환하였습니다. 너희가 섬기는 신을 우리가 섬기고, 우리가 섬기는 신을 너희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를 서로 수용하지 않으면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이라 하는 것들은 사람이 만든 가짜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그날로 하나님이 주신 어마어마한 약속이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가 비록 고립되는 경우다 있더라도 다른 나라와 우상교환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하고 처음 약속했던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는데, 하나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그곳 주민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거나 그들과 어울려서 살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깨뜨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13)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14)
얼마나 분명하십니까?
왜 이렇게 과격한 명령을 내리시는 줄 아십니까? 우상숭배가 무엇일까요?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여기 저기 풀밭을 따라 이동하며 목축을 하는 사람이어서 문화라는 것이 없었지만, 그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관개수로를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문화를 가지고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훨씬 과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절기에 맞추어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최신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추수하여 풍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앞선 생활방식이 부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들에게서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과학적인 농사방법과 안정된 생활과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사람이나 짐승 형상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절하며 섬기는 무지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 우상숭배는 단지 무지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요소가 있었는데, 당시 가나안의 종교는 간음 그 자체 였습니다. 신전에 가서 풍년 들기를 빌며 우상에게 제사하고는 여자 사제와 음란을 즐기는 것을 풍년을 기원하는 종교행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왜 과학과 문화를 숭상하면서도 한편은 무지한 생활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가인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소홀히 하다가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가인의 후예들은, 성을 쌓고 악기를 만들고 철제 무기를 만들며 세상의 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 가인의 후예들은 지금도 하나님보다 과학을 신뢰하며 전쟁무기를 만들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들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이 과학을 숭상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우리의 힘과 지혜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몸짓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우매한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최단과학의 산물인 우주선을 쏘아 보내면서도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온갖 미신을 의지하고, 한국에서는 돼지대가리를 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과학자가 어떻게 저렇게 미신적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필연적인데, 하나님 없이 우리 힘으로만 살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니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없으니 자기들이 만든 우상이나 귀신에게라도 부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교만과 무지와 음란인데,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만으로 살아가려는 교만이요,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생길 때는 도리어 자기만 못한 것에게 의지하는 무지한 행위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과학을 숭상하고 인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신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감시자와 심판자를 인정하지 아니하니까 그들의 생활은 난잡하고 음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사회가 기술이 발전한 사회 같지만 여전히 미신이 득실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의 자연스런 결과였던 것입니다.
오늘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성적인 문란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인의 후예들의 생활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을 썩게 만들며 영원히 멸망할 가나안 족속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을 거부하고 무지하며 음란하게 살아가는 가나안 사람들의 삶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신자가 그들의 삶을 부럽게 여기고 따라가면, 하나님은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시겠다는 표현으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해서 스스로 고난 속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올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 의지할 때 하나님은 철저하게 책임을 져 주셔서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삶을 사랑하면, 그들의 신인 교만과 무지와 음란을 섬기게 될 것이고 하나님도 잃고 세상도 잃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머리 좋은 사람으로 뽑혀서 특별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만났습니다. 바벨론의 왕은 출중한 인재를 찾아내기 위해서 포로중에서도 똑똑한 사람들을 골라서 최고의 음식을 먹이고 최고의 학문을 배울 기회를 주었습니다. 잘만하면 바벨론에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공부하던 중에 자기들에게 주는 고급음식이 우상에게 제사하고 물려낸 음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먹는 것이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이 될까 두려워해서 앞으로는 왕이 내리는 음식을 거절하고 채식만 먹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것이 잘못되면 출세는 고사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만 올인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남보다 훨씬 나은 건강과 지혜를 주셨고, 바벨론의 총리로 등용되어 아주 오래오래 일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음식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영혼을 이 세상의 미신문화로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경계선을 긋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것은 해야 할 일이고, 저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경계선을 긋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런 경계선이 없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때는 이렇게 하고 저런 때는 저렇게 하는 선택이 아니라 언제든 오직 한 길로만 가는 올인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잠깐 동안인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을 피하고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보여주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복되신 뜻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만 올인 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질투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목축하여 얻은 짐승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리는 것과 장자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바치는 것입니다.(18-20)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옥 같은 애굽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생명과 얻은 재물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명절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세 명절 모두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명절은 유월절인데 이때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다음은 맥추절인데 이스라엘은 이 맥추절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곡식을 거둔 때도 맥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물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과거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 절기는 모두 추수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보리추수를 시작할 때이고, 오순절은 보리 추수를 끝낸 때이며, 장막절은 과일추수를 끝낸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들에게 명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셨고 풍성한 삶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질투의 대상이 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은혜요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상속자의 오늘의 생활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도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풍성한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난 것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게 했을 뿐 아니라 모든 짐승의 첫 새끼를 바치게 하셨고, 아들도 장남은 하나님의 것이라면서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소나 양이나 모든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고,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나귀나 다른 짐승은 양이나 소로 바꾸어서 바치라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엿새 동안만 일을 하고 일곱째 되는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비록 시간을 다투는 추수철이나 파종하는 계절에도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엄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첫 새끼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보면 엄청난 손해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쁜 파종철이나 추수철이라도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도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첫 새끼를 포기하고 중요한 시간을 포기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힘으로 세상을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기억하고 고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믿음과 똑같은 고백을 갖기 원하십니다.
창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살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가 달려있는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우리가 보기에도 하나님이 피도 눈물도 없는 분 같고,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 같고, 아브라함을 파탄 내려고 작정하신 분도 같습니다. 그런데 장본인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시다. 늙은 내게 아들을 주신 분이시다. 그분께서 바치라 하시면 더 좋은 것을 주실 계획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이 아이를 불로 태워 바치면 하나님은 그 재속에서도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무 망설임 없이 말씀대로 아들을 단에 올려놓고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순간 가로막으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으며, 아들도 죽이지 않게 하셨을 뿐 아니라, 바닷가의 모래 같은 후손을 약속해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경험이나 과학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과학보다 그 과학의 근거인 우주의 법칙을 제정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홍해 앞에 있든지 광야에 있든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이고 물질이고 삶의 대책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사실을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웃이 어떻게 사나, 이웃만 바라보고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질투를 느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담대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였는데,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책임지신 하나님이 이 시대의 이스라엘인 우리를 그렇게 책임져 주십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다시 언약을 세우시고 스스로 얽매이시면서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독생자까지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질투의 감정을 가지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 감격합시다.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께 올인 하고 그분만 의지하여 삽시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기도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모이는 자리요, 하나님께 올인하고 그분께만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열심히 모여 기도합시다. 하나님만 사랑하며 순종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바라보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굴복하게 하는 동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