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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0-34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요즘 우리 사회는 여러 곳에서 갈등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여야 국회의원들 간의 갈등, 의약분업과 함께 시작된 의료계와 정부간의 갈등, 요즘은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남북간의 미묘한 긴장과 갈등이 상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존재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이 끝난 후, 르우벤 자손, 갓 자손,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힘써 도운 공로를 인정받고 그들의 기업이 있는 길르앗 땅으로 건너가는 도중에 요단 언덕 가에 큰 단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리면서 이 세 지파에 대해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실로에 있는 유일한 참 제단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예배를 위해 다른 장소에 예배의 단을 세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이 둘로 나뉘어 지면 이스라엘의 공동체도 둘로 나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위기감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행동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를 반역하는 행위로 규정하여 곧 군대를 소집하여 세 지파를 심판하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갈등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 원인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가치관과 사상이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가 단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시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연합의 표시로 세운 상징적인 기념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본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반역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분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의 생각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 때 갈등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갈등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악화시킴으로 분규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등에 휘말려 싸움에 이르지 않고 지혜롭게 그 갈등을 해결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더욱 확고한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몇 가지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1.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야 합니다.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가 제단을 쌓았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군대를 소집하고 전쟁 준비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전쟁에 임한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
무슨 말씀입니까?
반역을 응징하는 전쟁에 앞서서 세 지파에게 사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왜 그런 일을 하였는지 자초지종을 듣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가 요단 가에 단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과는 달리 아주 순수한 목적이었음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서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비일비재합니다. 갈등의 핵심 원인은 서로의 생각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이 세상은 곧 망하게 될 것입니다. 내 생각은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르다고 하는 오만과 아집이 갈등의 고리를 더욱 두텁게 만들고 이로 인하여 씻을 수 없는 오욕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서로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말하기에 앞서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일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오해가 풀릴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오해가 생기는 배경에는 선입견이 개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선입견이 생기는 데에는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만 듣고 사람을 평가하고, 진실을 오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리는 소문에 의해서 생긴 선입견에 의해서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오지 않도록 우리는 언제나 진실에 근거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진실에 근거한 판단을 내리려면 반드시 혼자의 독단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들리는 소문이 아니라 본인의 생각과 입장을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부부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배우자의 모습을 비난하면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은 남의 말을 옮기기도 말며, 남의 말을 본인의 말보다 더 신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누가 그러는데......" 이 말은 참으로 웃기면서도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전해준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질 때, 평화로운 세상을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under/∼아래', 라는 말과 'stand/서다' 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 뜻은 '아래 내려선다'는 것입니다. 상대방보다 좀더 아래 내려 설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란서 파리에서 가난한 노동자들과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실제로 거리에서 목회 했던 미쉘 파스트 신부의 '전화'라는 제목의 기도문이 있는데, 막상 전화를 놓고 보니 그 사람이 왜 전화했는지, 또 무엇을 말하려고 했었는지도 모른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를 주님 앞에서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혼자서만 말하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지 못한 채 통화가 끝나 버리고 말았다는 그의 고백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명령하는 사람' '충고하는 사람' '호소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가며 우리부부간에도 서로를 들어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의 입장을 말하고 그것이 관철되기를 원하지만 상대방의 아픔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을 듣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너무나 인색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귀는 두 개, 입은 하나 주신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을 두 배로 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갈등이 있습니까? 부부간, 부모와 자식간, 또는 성도와 성도간에..............이 모든 해결을 이루는 방법은 상대방의 입장을 잘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2.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잣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 간 사절단은 아주 간절하게 그들의 행위를 돌이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사랑(16절/어찌 여호와를 거역하려 하느냐), 나라 사랑(18절/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형제 사랑(19절/너희 소유지가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곳으로 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에 이들 세 지파의 행위를 괘씸하게 여기고 군대를 몰아 전쟁을 일으켰다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엄청난 희생이 일어났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에 앞서서 형제를 얻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과격하기 때문입니다. 왜 과격하게 되는가 하면 문제만 보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보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 문제만 해결하면 다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할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하여 더 큰 상처와 갈등이 후유증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랑보다 더 큰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갈등과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안에는 파벌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그들은 나뉘었습니다. 바울에게서 세례 받은 사람들끼리 모이고, 아볼로에게 세례 받은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들고, 게바, 즉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끼리 분파를 조직해서 누가 더 신령한가? 누가 더 권위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는 영적인 체험을 두고도 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열심이 있었던지라 그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방언을 어떤 이는 영 분별을 어떤 이는 예언을 어떤 이는 병 고치는 은사를, 그 외에도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게 성도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 내에 세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분열되었고, 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구의 은사가 더 큰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권면한 내용이 바로 고린도서입니다. 고린도서를 통해서 하는 바울의 권고는 이것입니다. 즉,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그 권위와 신령함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권위가 있고 신령한 성도가 된 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되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의 세력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외에 어떤 다른 것을 따라 나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이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접근 방법입니다.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가 있으나 그 무엇보다도 큰 은사를 구하라고 가르쳤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부분, 31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이어서 13장 1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보다 더 중요한 방법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어떻게 해든지 구원하려 하고 살리려는 마음으로 갈등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사랑으로 우리들의 삶에 생겨난 여러 가지 갈등들을 극복하고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요단 동편으로 건너 간 세 지파의 변론을 끝까지 듣고 보니 과연 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배신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요단 서편에 있는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연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으로 건너 간 세 지파에 대해서 분노하였던 이유는 이스라엘이 한 공동체로서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상숭배를 통해 변질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 세 지파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전쟁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다면 그들은 이방의 여러 민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것이고,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세 지파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것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싸우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할 만한 방법을 찾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아주 많이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더욱 나쁘게 되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쉬운 예가 중세시대의 십자군 전쟁입니다. 총 일곱 차례에 걸쳐서 진행된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정복 전쟁은 터키에 점령당한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발발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를 보호하고 신의 영광과 이교도 터키족으로부터 성지(聖地)를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일어난 이 전쟁에서 정복된 회교도는 무차별하게도 처단 당했으며 유대인 거주민들은 학살되었습니다. 그 결과 팔레스틴,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은 정복되었지만 동방과 서방교회, 기독교인과 유대인과 회교도인 간의 분열은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무장한 회교도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복음이 막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작된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그 역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모든 오해가 풀린 다음, 이들 세 지파가 세운 단의 이름을 '엣'이라 칭하였는데, 그것은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단을 보면서 후손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민족의 참 신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간의 오해로 인하여 전쟁까지 치를 뻔한 사건이 그들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서로간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확고히 다짐으로서 더 깊은 형제애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행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나아가서는 그 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인가?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막혀진 담들이 열리고, 갈라진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오해된 부분들도 풀어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