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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의 공관4복음서와의 공통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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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풀이 -오강남 / 2008년 1-12월 기독교 사상에 실린 글들
서문 - 독자들께
<도마복음>의 발굴
1945년 12월 어느 농부 형제가 이집트의 북부 나일 강 서쪽 기슭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 부근에서 밭에다 뿌릴 퇴비를 채취하려고 땅을 파다가 땅 속에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귀신(jinn)이라도 들어있으면 어떻게 하나 무서웠으나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아리를 열어보았습니다. 귀신이 나오지는 않아 안심은 되었지만, 실망스럽게도 보물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오로지 가죽으로 묶은 열세 뭉치의 파피루스 종이 문서뿐이었습니다. 문서가 들어 있는 그 항아리가 금으로 가득한 항아리보다 더 귀중하다는 사실 알 턱이 없던 그 형제는 고문서도 골동품으로 값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굴 경로입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추기경이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367년 ‘이단적’이라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어 땅 밑에다 숨겨놓은 책들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다나시우스는 그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olls)’의 발견과 함께 성서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사해 두루마리가 주로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면, 나그함마디 문서는 특히 신약 성서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를 위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 뭉치 속에는 합해서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이 문서들은 모두 이집트 고대어인 콥트(Coptic)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콥트’란 ‘이집트’라는 뜻인데, 콥트어 사본이란 고대 이집트 말을 그리스어 문자로 적은 사본입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도마복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도마복음>이 전하는 메시지 자체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한대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점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앤드류 하비(Andrew Harvey) 교수 같은 이는 1945년 12월에 발견된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 할 정도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마복음> 콥트어 사본은 글씨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하여 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 <요한복음>과 비슷한 연대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지만,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마가복음>이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되는 <마태복음>, <누가복음>보다 10년 내지 20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도마복음>이 나그함마디의 콥트어 사본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말 영국 고고학자들이 나그함마디에서 약 250km 떨어진 나일 강 하류 옥시린쿠스(Oxyrhynchus)라고 알려진 고대 쓰레기 처리장에서 그리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파피루스 뭉치를 발견했는데, 그 중 일부 조각들이 나중 <도마복음>의 일부로 판명되었습니다. 콥트어로 된 나그함마디 문서와 달리 이 문서들은 그리스어(희랍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그리스 문자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 200년경에 필사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물론 나그함마디의 <도마복음>과 비교해보면 약간씩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도마복음의> 특성
<도마복음>에 나오는 말씀들 중에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아는 분들에게는 귀에 익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그리스도교 정경에 포함된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이 그 당시 이집트, 로마 그리스를 비롯하여 중동 지역 일대에 성행하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영향을 반영하는 문서라는 점입니다. 영지주의는 복잡한 사상체계이지만, 그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말세, 심판, 대속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도마복음>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으리라 생각되는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둘 다 우리 내면의 ‘빛’(요1:4)을, 그리고 미래에 있을 종말보다는 ‘태초(요1:1)나 ‘지금’(요5:25)을 강조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점은 <요한복음>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한데 반해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영지주의의 모든 것을 완전히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보는 데는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도마복음>을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라 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1979년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라는 책을 내어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를 세상에 널리 소개한 프린스턴 대학교의 일레인 페이젤스(Elaine Pagels) 교수마저도 최근에 낸 <도마복음>에 관한 그의 책에서 그 주장을 일부 인정했습니다.
제가 보기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면 영지주의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우주론, 신관, 인간론, 구원관 같은 여러 가지 가르침들 중 무엇보다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깨달음을 통해 옛 자아에서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것이라 보입니다. 물론 구태여 영지주의라고 하는 한 가지 사상체계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할 것 없이 세계 종교 전통 어디서나 발견되는 ‘신비주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서로 보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한문으로 ‘영지(靈知)’라 번역하고 영어로 보통 ‘knowledge’라 옮기는 그리스어 ‘gnōsis’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깨침’ 혹은 ‘깨달음’에 해당하는 말로서 꼭 영지주의에서 특허를 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prajñā), 곧 반야(般若), 통찰, 꿰뚫어 봄, 직관과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불교에서 반야를 통해 성불과 해탈이 가능해짐을 말하듯, <도마복음>도 이런 깨달음을 통해 참된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도마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만 적은 ‘어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출생이나 활동 등 행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마저도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렇게 어록으로만 이루어진 <도마복음>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기 위해서나, 길거리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놓고 논쟁할 때 쓰기 위해서, 혹은 신비적 명상을 위한 화두 비슷한 것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해 쓰여졌든지, 저는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천국, 내 속에 있는 하느님,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발견함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라는 기본 가르침에 충실한 복음이라 봅니다.
이 풀이에서 하려는 것
제 자신 오래 전 성서 그리스어(희랍어)를 열심히 배우기는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콥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다. 물론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가 본래부터 콥트어로 쓰여졌던 것은 아니고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코이네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여기 우리말 번역은 <도마복음>서의 콥트어에서 직접 번역하지 못하고, 영어로 번역된 여러 가지 번역판과 역주를 기초로 한국말로 옮겼습니다.
여기 이 풀이에서 저는 모두 114절로 나누어져 있는 <도마복음> 본문을 한 절 한 절이 읽고 제 나름대로 찾아낸 뜻에 대한 저의 반응을 중심으로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이 풀이가 다른 신학자들의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제 자신의 배경을 살려 다른 종교 전통의 문헌들, 특히 <도덕경>과 <장자> 등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과 비교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도마복음> 본문 자체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최선을 다해 찾아보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말씀들이 지금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그 말씀의 더욱 깊은 종교적인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 말씀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거기에 ‘촉발’되어 내 나름대로의 뜻을 찾아보려는 이런 식 읽기를 두고 ‘환기적(evocative)’ 독법 혹은 ‘독자 반응 중심의’ 독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일단 이런 작업을 거친 다음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도 살펴보고 그들의 풀이가 제게도 의미 있다고 여겨질 경우 그 생각들을 일부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들은 물론 저의 풀이에 나타난 저의 생각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독자들도 독자 나름대로 읽으시되 제가 읽은 것을 보시고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혹시 제가 읽는 방식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뛰어넘고 본문만 읽으시면서 홀로 명상해 보는 방법을 취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제가 읽은 방식이 독자 스스로 더욱 깊이 읽으시는데 약간의 자극제나 일깨움의 실마리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할 따름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는 저의 <도덕경>이나 <장자> 풀이를 쓸 때 노자님이나 장자님의 말을 모두 경어체로 옮긴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경어체로 옮겼습니다. 30세 정도의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반말로 했다고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자기와 나이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터인데, ‘너희는 들으라’하는 식으로 말했으리라 상상하기가 곤란합니다. 물론 지금의 ‘개역개정’ 성경이나 ‘표준 새번역’ 성경에 예수님의 말씨를 모두 반말로 하였기에 거기 익숙하신 독자들에게는 이런 존댓말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처음에는 좀 어색해 보일 수 있으리라 이해합니다. 그러나 좀 읽다가 보면 이런 모습에서 오히려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 예수님을 발견하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어색해서 못 읽겠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현재 한국 교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의 표현법으로 옮긴 것을 밑에다 함께 실었습니다. 두 가지를 다 읽으셔도 좋고, 마음에 드는 것 어느 쪽을 택해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또 본문에는 없지만 가독성을 위해, 그리고 색인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 절에 제가 생각한 소제목과 부제를 붙였습니다.
부디 이런 귀중한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를 받아 더욱 풍요로워지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7년 가을
캐나다 밴쿠버에서
<도마복음>
서언
살아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
-도마 전통의 성립
이것은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들입니다.
--이는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이라.
BLATZ
[Prologue.] These are the secret words which the living Jesus spoke, and which Didymus Judas Thomas wrote down.
풀이: <도마복음>에 나오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가장 깊은 차원의 진리를 찾는 몇몇 소수만이 꿰뚫어 볼 수 있는 ‘비밀의 말씀’이다. 뒤에 나오는 23절에 표현한 것처럼 ‘천 명 중에 한 명, 만 명 중에 두 명’ 꼴이라고 할 정도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관심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이다.
종교적 진술에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피(exoteric) 층이 있고, 정말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내밀(esoteric) 층이 있는데, 여기 이 말씀은 바로 내밀적 기별, 감추인 말씀, 비밀, 신비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성립된 ‘도마 전통’에서 이해한 대로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디두모(Didymos)’는 그리스어, ‘도마(Thomas)’는 아람어/시리아어, 둘 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쌍둥이’가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디두모 유다 도마’를 문자 그대로 하면 ‘쌍둥이 유다’라는 말이 된다. 물론 여기의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가룟 유다와 다른 유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 ‘도마’를 그대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예수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은 도마가 육체적으로 쌍둥이라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한 분 하느님에게서, 혹은 한 태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과 쌍둥이라 이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깨치기만 하면 모두가 다 형제자매 내지 쌍둥이들이 될 수 있다.
제1절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 해석의 중요성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이 말씀들을 올바로 풀 수 있는 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BLATZ
(1) And he said: He who shall find the interpretation of these words shall not taste of death.
풀이: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진술에 대해 어떤 ‘해석(hermenutics)’을 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사활에 관계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중차대한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예로 들어본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내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일 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 동네에 100 집도 넘는 집이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밤 열두시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것에 의하면 호주는 지금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눈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빠 엄마가 내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이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이구나. 이제 엄마 아빠에게서 선물 받을 것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하는 단계로 심화된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과 평화스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사랑과 우의를 나누고 공동체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되고, 그러다가 교회나 동네 뿐 아니라 온 나라,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까지 생각는 사회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좀 더 장성하면, 혹은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어쩌면 신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과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 신인합일의 ‘비밀’을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깊은 신비적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
사실 산타 이야기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적 이야기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으로 혹은 중층적(重層的)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영지주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네 가지 의미 층이 있다고 한다. 문자적(hylic) 의미가 있고, 나아가 심적(psychic), 영적(pneumatic), 신비적(mystic)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진술을 대할 때 우리는 올바른 풀이를 통해 점점 더 깊은 뜻을 깨달아 나가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고 문자적이고 표피적 뜻에만 매달리면 우리의 영적 삶은 결국 죽어버리고 만다. 바울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3:6)고 했다.
이처럼 올바른 풀이를 통해 여기 주어진 메시지의 가장 깊은 차원의 영적·신비적 뜻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우리 속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게 되므로 새 생명을 찾을 수 있다. 육체가 죽어도, 옛 사람이 죽어도 그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 도가(道家) 사상가 장자(莊子)에 의하면, 들음에 4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귀’로 듣는 단계, ‘마음’으로 드는 단계, ‘기(氣)’로 듣는 단계, ‘비움[虛]’을 통해 도(道)가 들어와 도와 하나 되는 단계를 말한다. 똑 같지는 않지만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물리적 차원, 심적 차원, 영적 차원, 신비적 차원과 대략 상응하는 것 같아 신기하게 여겨진다. 이렇게 세 단계를 지나 완전이 마음을 비우고 우리 속에 도(道)가 들어오도록 준비하는 과정을 두고 장자는 ‘심재(心齋, 마음 굶김)’라고 했다. (오강남 풀이 <장자> 183-188).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말은 <도마복음>에 네 번 나온다. (18, 19, 85, 111). 이런 표현이 나오는 곳의 가르침은 특별히 중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첫 절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영적 사활과 관계된 것이라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이 말을 한 ‘그’가 예수인가 도마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제2절
찾으면 혼란해 하고
- 발견의 충격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구는 자는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구할지니,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라리라. 그제야 저가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BLATZ
(2) Jesus said: He who seeks, let him not cease seeking until he finds; and 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and when he is troubled he will be amazed, and he will reign over the All.
풀이: 문자적이고 표피적인 뜻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이 더 깊은 뜻을 알게 되면 일단은 당황할 정도로 황당함을 느끼게 된다. 혼란스럽고 고민스럽다.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오던 통상적 견해들(taken-for-granted views)이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선 것 같은 기분이다. 진리는 본래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어로도 ‘inconvenient truth(불편한 진리)’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새로 발견된 진리에 심지어 저항하거나 반항하기까지 한다.
훌륭한 종교적 가르침은 ‘편안한 사람에게는 혼란을, 혼란한 사람에게는 편안을 주는’(Disturbing the comforted, comforting the disturbed) 일을 한다고 한다. 언제나 안전지역에서 편안한 삶,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삶만을 보장하는 종교는 우선은 편할지 모르나 우리의 성장과 발돋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불교에서 사용하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도 우리의 상식적인 의식에 혼란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튼 이런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말씀의 더욱 깊은 뜻을 깨닫게 되면, 놀랄 수밖에 없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하다.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이다.
우리의 종교적 삶에서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정치적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어느 것에도 지배받지 않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감언이설에서도 자유스러워지고, 사후에 천국에 갈까 지옥에 갈까 하는 걱정에서도 해방된다. 이렇게 깨달음과 놀라움으로 크게 ‘아하!’를 외칠 수 있는 경지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선언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겠는가. 이 절의 그리스어 버전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유를 얻었으면 편히 쉬게 된다고 하였다. 쉰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여기 이 절의 말은 영적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일반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고, 특별히 이 <도마복음>을 읽어갈 사람들을 두고 미리 경고하고 격려하는 말이라 할 수도 있다. <도마복음>에는 지금껏 표피적으로 이해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예수, 완전히 다른 구원관, 완전히 다른 신관, 완전히 다른 종말관 등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겠지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결국에는 놀라움과 자유를 맛보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제3절a
천국이 하늘에 있으면 새들이
- 천국의 현주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은 여러분에게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새들이 여러분들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라가 바다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물고기들이 여러분들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여러분 안에 있고, 또 여러분 밖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를 가르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고 하니, 그리 하다면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나라가 바다에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이라.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밖에 있느니라.”
BLATZ
(3) 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See,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the heaven will go before you; 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go before you. But the kingdom is within you, and it is outside of you. 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know that you are the sons of the living Father. 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are in poverty, and you are poverty.
풀이: 성경 복음서에 보면 ‘천국 복음’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메시지 중 최초이며 최종이며, 최고의 가르침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나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고, 그 후 계속하여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마4: 17, 24; 막1:14-15, 눅4:14-15 참조)고 한다. 그런데 그 천국이 어디 있는가? <도마복음>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고 하는 식으로 하늘에는 하늘나라가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천국’은 하늘에 붕 떠있거나 바다에 둥 떠있는 땅덩어리가 아니다. ‘나라’를 뜻하는 성경의 낱말들은 일차적으로 영토가 아니라 ‘주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통치원리,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임재하심 등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보통 God's sovereignty, rule, reign, presence 등으로 번역한다. ‘나라’를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우리 속에 있는 하느님의 임재하심이라 보아야 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를 강조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고 했다. 특히 <도마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밖에도 있다고 한다. 내 안의 내 마음속에도 있고, 내 밖에 있는 내 이웃의 마음속에도 있다는 뜻이라 풀 수도 있고, 절대적인 실재로서의 하느님의 주권이 안이나 밖 어느 한 쪽에만 국한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안에도, 그리고 밖에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신의 내재(內在)만을 강조하면 범신론에 빠지고, 신의 초월(超越)만 강조하면 초자연주의 신관에 빠지게 된다. 신은 내재면서 ‘동시’에 초월이라는 역설(逆說)의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 신의 이런 양면성마저 바로 ‘천국 비밀’의 일부인지 모를 일이다.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천국/하늘나라’라고 하는 말은 오해사기 쉬운 말이라는 사실이다. ‘천국/하늘나라’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만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모두 ‘신국(神國)/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을 위해 쓰인 복음서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전통에 따라 ‘신국/하나님의 나라’라는 말 대신 ‘천국/하늘나라’라는 말을 썼다. ‘천국/하늘나라’라고 해서 그것이 그 나라가 있을 장소로서의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도마복음>에는 모두 그냥 ‘나라’ 혹은 ‘아버지의 나라’라고 나와 있고 ‘하늘나라’라는 말은 세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편리를 위해 ‘천국’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물리적 하늘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히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의 힘, 원리, 현존 등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이해하고 써야 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널리 깔려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라 하는 이들도 다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다. 종교적 가르침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층들을 알지 못하고 표피적·문자적 뜻에만 매달려 계속 그것으로만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지도자라 주장해도 우리를 오도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참된 종교 지도자는 누구냐? 유치원 학생들에게는 아이들이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문자 그대로 와서 어린 아이들이 걸어놓은 양말에 선물을 주고 간다고 가르치지만, 그 이야기의 더 깊은 뜻도 함께 알고 있어서, 어린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그 수준에 맞게 더 깊은 심리적, 사회적, 영적, 우주적 의미까지 말해 줄 수 있는 지도자라야 참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이런 전체적인 안목이 없이 표피적인 뜻이 전부인줄 알고 가르치는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장님이 장님을 따르는 것과 같다.
제3절b
네 자신을 알라
- 풍요로움과 가난의 지렛목
"여러분 자신을 아십시오. 그러면 남도 여러분을 알 것이고, 여러분도 여러분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가난에 처하고, 여러분이 가난 자체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 그러면 남도 너희를 알 것이고, 너희도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가난에 처하고, 너희가 가난 자체라.”
풀이: ‘네 자신을 알라.’ 그 유명한 ‘그노시 세아우톤’이다.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의 말이라 알고 있지만 사실은 델타 신전에 쓰이어져 있던 신의 신탁(神託)이었다. 그 당시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삶에서 앎/깨침(gnosis)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사람들은 다 알던 말이다.
알아야 할 것, 깨쳐야 할 것 중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내가 바로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사실, 내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는 사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 속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 혹은 ‘얼나’에 다름 아니라는(人乃天)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달음’--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진주’ 같은 진리다. 본문에서 말할 것처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자각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를 알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나의 이기적인 자아가 그대로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미망의 삶, 이런 기본적 무지에서 시작하여, 나의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가 아니한가에만 관심을 두고 노심초사하며 사는 율법주의적인 삶, 남의 눈치나 보고 남의 인정이나 받으며 남보란 듯 살려는 허세의 삶, 아무리 가지고 가져도 계속 가지고 싶은 욕망을 품고 허기지게 사는 소비주의적인 삶 등의 삶이 ‘궁핍하고 비참한 삶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4절
늙은이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우고
- 영적 서열의 전도(顚倒)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7일 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이레 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하지 말지니, 그리하면 그는 살 수 있으리라. 먼저 된 자들 중 많은 이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이니라.”
BLATZ
(4) Jesus said: The man age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little child of seven days about the place of life, and he shall live; for there are many first who shall be last, and they will become a single one.
풀이: 나이를 많이 먹은 늙은이도 내 속에 있는 천국, 나의 참 나를 깨닫지 못해 생명의 원천을 찾지 못했으면 이제 방금 깨달음을 통해 새로 갓 태어난 사람에게 생명의 근원에 대해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참 삶을 얻을 수 있다. 연대기적인 나이만 많았다고 먼저 된 자들이 될 수 없다. 히브리 성경 욥기에도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도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욥32:8-9)고 했다. 누구나 깨달음을 받아 다 같이 새 생명으로 다시 탄생해야 되고, 모두가 이렇게 되면 먼저 된 사람이냐 나중 된 사람이냐 하는 구별이 없이 다 하나가 된다.
7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 아기는 8일째 할례를 받는데, 아직 할례도 안 받은 갓 난 아기를 뜻한다. 할례 전이기에 아직 남녀의 구별이 확인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라 볼 수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마11:25, 눅10:21)를 연상시킨다. 도덕경에도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습니다.”(55장)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경우 ‘갓난아기’란 자연적인 갓난아기라기보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서 영적으로 갓난아기가 된 사람, 그리하여 남녀, 선악, 미추, 시비 등 이분법적 의식을 넘어선 합일의 사람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22절에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기에 거기 가서 더욱 상세히 다루려 한다.
제5절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면
- 발견의 선후(先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감추어졌던 것이 여러분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묻히어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라. 그리하면 감추어졌던 것이 너희에게 드러나리라.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도다. 묻히어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라.
BLATZ
(5) Jesus said: Recognize what is before you, and what is hidden from you will be revealed to you; for there is nothing hidden that will not be made manifest.
풀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 “감추어졌던 것이 여러분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묻히어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하는 말은 <도마복음>을 비롯한 나그함마디 문서의 운명 자체에 대한 언급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박해로 천6백년이나 땅 밑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결국 1945년에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던가.
여기 본문에서 ‘감추어졌던 것’이란 물론 ‘천국 비밀’이다. 그런데 우리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면’ 이 천국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현상 세계에서 우리가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현상적인 사물들일까? 그렇게 풀어도 좋다. 개별적인 사물을 궁구하므로 그것들의 근원이 되는 궁극실재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귀납적(歸納的)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우리 존재의 근원이 되어 지금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바로 그 근원, 궁극실재, 도, 하느님을 우리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분별의 세계, 이분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지만, 천국이, 궁극실재가, 궁극 진리가 지금 여기에, 내 바로 앞에, 내 안에 있다는 이 기본적인 사실만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기만 하면 지금까지 깜깜하던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날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망 때문에,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 때문에, 그대로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일단 천국의 비밀을 아는 깨달음에 이르면 드러나지 않을 것도, 땅 속에 묻혀 있을 것도 없다. (막4:22, 마10:26, 눅12:2, 눅8:17 등 참조)
<도덕경>에도 “어머니를 알면 그 자식을 알 수 있습니다.”(52장)고 했다. 우리의 어머니로서, 존재 근원으로서 우리 바로 앞에, 옆에, 아래위에 있는 그 도(道)를 알면 모든 현상을 꿰뚫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신유학(新儒學) 주자(朱子)도 사물을 궁구하고 앎을 극대화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과정에서 모든 사물에 관통하고 있는 이(理)를 아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고, 육상산(陸象山)은 우리가 알아야 할 근본적인 것이 마음이라고 했다. 모두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영적 추구에서 근본적인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 준다는 면에서는 대동소이한 것 아닌가.
마지막 구절 ‘묻혔다가 올라온다.’는 표현은 나그함마디 사본에는 없고 그리스어 사본에만 있는데,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진리를 깨달음으로 옛 나에서 죽고 새로운 나로 부활한다거나, 묻히어져 잊어버리고 있던 나의 참 자아가 재발견되고 되살아난다거나, 칼 융이 말하는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해서 내 속에 묻혀있던 무의식의 세계가 다시 올라 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는 뜻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제6절
금식을 할까요?
- 우선 순위의 확인
예수의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할까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구제해야 합니까? 음식을 어떻게 가려 먹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하늘 앞에서는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드러나지 않을 비밀도 없고, 나타나지 않고 있을 숨김도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금식을 하리까?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이까? 구제해야 하나이까? 음식을 어떻게 가려 먹어야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거짓말을 하지 마라.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모든 것이 하늘 앞에서는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니라. 결국 드러나지 않을 비밀도 없고, 나타나지 않고 있을 숨김도 없느니라.”
BLATZ
(6) His disciples asked him (and) said to him: Do you want us to fast? And how shall we pray (and) give alms? What diet should we observe? Jesus said: Do not lie, and what you abhor, do not do; for all things are manifest in the sight of heaven; for there is nothing hidden which will not be revealed, and there is nothing covered which will remain without being uncovered.
풀이: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이 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다.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14절에 나온다. 그럼 여기 동문서답처럼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금식이나 기도나 구제나 음식 가려 먹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바로 거짓이 없이 내 자신에게 진정으로 솔직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깊은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 참 나의 소리, 내 속에 계신 하느님의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거기에 거짓이 없이 성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모든 외부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적 종교 행위를 내면 싫어하면서도 남의 눈을 의식하여, 그 외에 경제적, 사교적, 정치적, 종교적, 직업상의 이유로, 겉으로는 좋아하는 척, 따르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선(僞善)이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이런 솔직한 태도를 ‘직(直)’이라 했다. 영어로는 ‘straightforwardness’라 번역한다. 이런 솔직함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예(禮)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인(仁)의 사람, 곧 ‘사람됨(humanity)’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를 속이지 않고 자기의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알아야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 줄 수 있는 이른바 황금율(黃金律, golden rule)을 실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과 형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속이고 감추어 봐야 쓸데없고, 결국은 모든 것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내 행동의 결과는 나중 하늘이 내리는 보상이나 형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내 자신의 삶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인 것으로 그대로 드러남으로 나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제7절
사람이 사자를 먹으면
- 야수성(野獸)의 극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행복합니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복이 있도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라.”
LATZ
(7) Jesus said: Blessed is the lion which the man eats, and the lion will become man; and cursed is the man whom the lion eats, and the lion will become man.
풀이: 이런 난해한 구절은 읽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풀이될 수 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갔던 사람이 사자에게 잡혔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엎드려 있는데, 사자가 자기를 먹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살짝 눈을 떠서 올려다보니 사자가 식사 기도중이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선교사가 결국 사자에게 먹힘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 선교사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은 물문가지.
물론 이런 문자적 차원은 넘어서야 할 것이다. 이 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우선 우리 속에 내재하는 ‘사자됨’과 ‘사람됨’이라는 두 가지 힘의 상호 관계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사자’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우리 속에 있는 길들지 않은 야수성(野獸性)--정욕, 무지, 탐욕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야수성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잘 길들이고 극복하면 그 야수성도 결국 우리가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 셈이고, 어느 면에서 우리의 일부로 동화된 셈이기 때문에 그 사자는 행복한 사자일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정욕, 무지, 탐욕 같은 야수성에 잡아먹히면 물론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인성이나 신성을 발현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셈이니 불행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전체 문장 구조로 보아서는 마지막 문장에서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이유가 그 사람이 사자가 되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 같은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잡아먹은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되는데 왜 불행하다 하는가? 구태여 의미를 붙이자면 그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 행세를 한다는 뜻이 아닐까? 다 같이 사람의 모양을 가진 사람이지만 한 편에는 야수성을 이기고 참 사람이 된 사람이고, 다른 한 편에는 야수성에 정복당하고 껍데기만 사람 모양을 했을 뿐, 속으로는 사자 같은 야수성을 그대로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계속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도 사람이긴 하지만 아직도 사자 같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 속에 있는 신성을 완전히 발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8절
물고기들을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으니
- 버림의 결단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그물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잔뜩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습니다. 그 지혜로운 어부는 물고기들 중 좋고 큰 고기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다른 작은 고기들을 다 바다에 다시 던졌습니다. 그래서 큰 물고기들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 들을 귀 있는 이들은 잘 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은 자기 그물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잔뜩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으니 그 지혜로운 어부는 물고기들 중 좋고 큰 고기 한 마리를 찾은 후, 다른 작은 고기들을 다 바다에 다시 던지매 큰 물고기들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느니라. 들을 귀 있는 이들은 잘 들을지어다.”
BLATZ
(8) And he said: Man is like a wise fisherman who cast his net into the sea; he drew it up from the sea full of small fish; among them he found a large good fish, the wise fisherman; he threw all the small fish into the sea, he chose the large fish without difficulty.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풀이: 마태복음13:47-48에도 그물로 잡아 오린 물고기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다 버린다.’고 하면서, 이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놓는 최후의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다. <도마복음>서에는 심판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이것을 심판과 연관시킬 수 없다. 그러면 여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려 하는가?
우리는 모두 어부들이다. 그런데 보통의 어부는 그물에 올라오는 물고기를 다 잡아 온다. 이른바 저인망 방식으로 싹쓸이까지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이 취하는 전형적 태도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지혜로운 어부’는 큰 고기 한 마리를 위해 다른 고기들은 뒤로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땅에 숨겨 놓은 보물을 찾으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기’로 한 농부나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장사꾼과 같은 사람이다. (마13:44-46) 완전히 똑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장자>에서도 “물고기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26:13)고 했다. 이른바 ‘득어망전(得魚忘筌)’이다. 물고기가 중요하기에 다른 것은 잊어버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물고기’, ‘보물’, ‘진주’는 무엇인가? 신학자 폴 틸리히의 표현대로 우리의 ‘궁극관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마복음>에 의하면 물론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 곧 내 속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 나의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깨닫고 발견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린다. 물질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도 잡다한 상식이나 이론이나 견해나 관념이나 범주나 논리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이런 선입관에 입각한 앎을 뒤로 할 때만 참 된 앎, 진정한 깨침, 반야(般若)의 지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에도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일손(日損)’의 길이라고 했다(48장). 우리가 가진 일상적 견해를 깨끗이 비워야 도를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표현을 쓰면, ‘성전을 청결케 하심,’ 나아가 아주 ‘성전을 허는 것’(요2:13-19)이기도 하다.
한 편 <도마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입장에서도 풀이될 수 있을 것 같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고 있듯 인간은 이 물질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물고기가 인간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도를 깨친 지혜로운 어부가 사람을 건져 올리면, 그 중에서 자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큰 물고기만 고르고 나머지는 그대로 놓아준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출애굽 당시 아직도 이집트(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아직도 불타는 소돔 성을 잊지 못하고 뒤돌아서던 롯의 처와 같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광야를 헤매거나 거기 소금 기둥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천국의 비밀은 아무에게나 주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면 돼지가 진주를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돼지가 그것을 준 사람도 짓밟고 물어뜯는다고 했다(마7:6). 그러기에 천국의 비밀은 일차적으로 그것을 받아 정말로 고마워할 마음의 태세가 갖추어져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감추어진 가르침(esoteric teaching)’이다. 들을 귀가 있는 이들만이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9절
씨를 한 줌 쥐고 뿌리는데
- 신성(神性)의 씨앗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씨 뿌리는 사람이 밖으로 나가 씨를 한 줌 쥐고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었습니다. 또 어떤 것은 돌짝밭에 떨어져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 곡식을 내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가시덤불이 숨통이 막고 벌레들이 먹었습니다. 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었는데, 육십 배, 백이십 배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보라. 씨 뿌리는 사람이 밖으로 나가 씨를 한 줌 쥐고 뿌리는데, 더러는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었고,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져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 곡식을 내지 못하였고,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가시덤불이 숨통이 막고 벌레들이 먹었고, 또 더러는 옥토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었는데, 육십 배, 백이십 배가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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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Jesus said: Look, the sower went out, he filled his hand (and) cast (the seed). Some fell upon the road; the birds came, they gathered them. Others fell upon the rock, and struck no root in the ground, nor did they produce any ears. And others fell on the thorns; they choked the seed and the worm ate them. And others fell on the good earth, and it produced good fruit; it yielded sixty per measure and a hundred and twenty per measure.
풀이: 문자적으로 보면, 이런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씨가 얼마나 귀한 것인데 함부로 뿌려 길이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같은 데 떨어지게 한단 말인가? 더구나 요즘처럼 기계나 비행기로 뿌리는 것도 아니고 직접 손에 쥐고 뿌리는 것인데... 또 씨가 열매를 맺어 겨우 60배, 120배의 결실뿐이라면 그 농사는 망하는 농사가 아닌가? 좁쌀을 보면 수만 배, 수십만 배의 결실인데... 하는 등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천국 복음의 심오한 뜻, 곧 천국 비밀을 조심성 없이 함부로 아무데나 뿌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특히 제8장에서 좋고 큰 물고기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시 돌려보낸다고 한 것처럼, 천국 비밀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길이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같은 사람, 열린 마음, 받아들이는 태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 일방적으로 주어진 교리나 선입견으로 꽉 막힌 사람, 일상사에 정신이 나가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을 쏟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주어 봐도 헛일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역효과까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씨를 뿌릴 때 여기 나오는 씨 뿌리는 자처럼 실수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옥토에 던져서 소기의 열매를 얻도록 하라는 말씀일 수 있다. 옥토는 물론 씨를 받아 발아시키고 열매를 맺도록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옥토가 씨를 받아 발아시키고 열매를 맺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상구보리(上救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보살(菩薩)정신의 실현이다.
또 다른 뜻은 찾을 수 없을까? 물론 여기서 ‘씨’를 말씀이나 진리의 가르침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사적으로 볼 때 여러 종교에서 ‘씨’는 인간 속에 있는 ‘신의 씨앗’ 곧 신성(神性)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특히 중세 시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우리 속에 있는 ‘씨앗’을 강조했다. 누구에게나 이런 ‘신의 일부(that part of God)’, ‘로고스(Logos)’, ‘그리스도’ ‘신의 불꽃’이 속에 있지만 지금 나의 지적·영적 상태나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내 속에 있는 씨앗이 지닌 가능성을 발현하지 못하고 사장(死藏)되거나 시들어 없어져버리게 할 수도 있고, 열린 마음으로 잘 받아들여 발아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신성이 어떻게 없어질 수 있을까 할 수도 있지만,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면 없어진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불교에도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우리는 모두 여래, 곧 부처님, 혹은 ‘깨달은 이’가 될 수 있는 ‘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장’이란 ‘자궁’이라는 뜻과 ‘태아’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우리 속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공간과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현실에서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장애물 때문에 그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조: 비슷한 이야기는 막4:3-8, 마13:3-8, 눅8:8:5-8에 있다. 거기에는 소산이 30배, 60배, 100배로 나와 있다.
제10절
불을 지피다
- 우주 의식의 화염(火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불이 붙어 타오르기까지 잘 지킬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세상에 불을 지폈노니, 보라. 나는 불이 붙어 타오르기까지 잘 지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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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Jesus said: I have cast a fire upon the world, and see, I watch over it until it is ablaze.
풀이: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기본 특징 중 하나는 주어진 사회의 전통적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음(subversiveness)’이다. 표면적으로 평온한 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 불을 지르는 것이다. 이런 혁명적인 뒤집어엎음이 처음에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불이 붙기까지 잘 지켜보고 피워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불이 붙어 훨훨 타오르면, 요원의 불길처럼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르는 불이나 훨훨 타오르는 불을 사회적 변혁 뿐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가져오는 불이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세례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물로 받는 것, 영으로 받는 것, 불로 받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발전 단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이 그리스도교에 입문해서 천국의 ‘외적 비밀(outer mysteries)’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쳐주는 죽음, 부활, 천국 등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윤리적 지침이나, 심리적 안위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천국의 ‘내적 비밀(inner mysteries)’을 알게 된다. 죽음, 부활, 천국 등의 가르침에서 문자적 뜻을 넘어 상징적, 은유적, 영적 차원의 뜻을 꿰뚫어 보게 된다. 거기서 더욱 발전하여 불로 세례를 받으면 완전한 깨달음(gnosis)을 얻어 하나님과 하나 됨이라는 천·지, 신·인 합일의 신비 체험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불을 질러 타오르게 하겠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만물과의 합일을 체험하는 이런 궁극적 신비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과 같다.
누가복음에도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12:49)고 했다. 개역개정에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로 번역했다. 여기서 ‘받아야 할 세례’라는 것이 바로 불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모두 불로 세례를 받기까지 그가 받을 육체적 고통이나 심적 답답함이 오죽하겠느냐는 뜻이리라.
캐나다 출신의 정신과 의사로서 지금은 고전으로 여겨지는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모리스 벅(Richard Maurice Bucke, 1837-1902)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영국에 가 있을 때, 어느 날 밤 친구들과 함께 휘트먼의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채 그의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자기 마차가 화염에 휩싸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를 두고 ‘우주 의식’이 번쩍임을 경험한 것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 의식’은 동물들의 단순 의식(simple consciousness)이나 우리 인간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과 다른 특수 의식으로서, 이런 우주 의식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우주의 참된 생명과 질서’, 그리고 인간이 신과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예수님이 지른 불, 온 세상에 옮겨 붙기를 원하는 불이 리처드 벅이 체험한 이런 불이 아니겠는가. 이런 불은 우리를 밝혀주고 변화시키고 따뜻하게 한다.
사실 어느 면에서 예수님 자신이 불덩어리이다. <도마복음> 82절에도 예수님은 “나에게 가까이 있는 이는 불 가까이 있고, 나에게 멀리 있는 이는 나라에서부터 멀리 있다”고 했다.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 그 불을 받아 불의 세례를 받고, 내 속에 있는 천국, 곧 하느님, 나의 참된 나와 가까이 있게 되는 것, 하나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이런 면 때문임을 새로이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11절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 죽음을 이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그 위에 있는 하늘도 사라질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고, 산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죽은 것을 먹는 날 여러분은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합니다. 여러분이 빛 속에 있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였을 때 여러분은 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둘이 되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하늘은 사라지고, 그 위에 있는 하늘도 사라지리라. 죽은 자들은 살아 있지 않고, 산 자들은 죽지 않으리라. 너희가 죽은 것을 먹는 날 너희는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노라. 너희가 빛 속에 거할 때 너희는 무엇을 하려느냐? 너희가 하나였을 때 너희가 둘이 되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둘이 되면 너희는 무엇을 하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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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Jesus said: This heaven will pass away, and the one above it will pass away; and those who are dead are not alive, and those who are living will not die. In the days when you ate of what is dead, you made of it what is living. When you come to be light, what will you do? On the day when you were one, you became two. But when you have become two, what will you do?
풀이: 오리무중이다. 지극히 이해하기 힘든 절이다. 몇 개의 생각들이 총알처럼 빠르게 하나씩 튀어나오고 있다. 더구나 그 생각들 사이에 내적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다. 어쩌면 이런 불가사의한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 자체가 우리의 안일한 사고를 뒤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나 ‘화두(話頭)’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천천히 음미해 보자. 화두는 의미를 찾으려 하면 안 된다고 하기는 하지만....
우선 하늘과 그 위에 있는 또 하나의 하늘이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고대 문화 일반에서 보듯, 하늘에 여러 층이 있다고 보았다. 히브리어로 ‘하늘’이라는 말은 언제나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1장1절 영어번역도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라 한다. 바울도 자기가 ‘셋째 하늘’에 끌려갔다가 왔다(고후12:2)고 했다. 아무튼 유대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하늘과 땅은 없어지거나 변하지 않는 것을 대표한다. <도덕경> 표현으로 ‘천장지구(天長地久)’이다.(7장) 그렇게 변하지 않는 하늘도 사라진다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인가? 부처님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터스(Heraclitus, 486 BCE 사망)의 ‘만유유전(萬有流轉)(panta rei)’과 같은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 그 자체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변하는 현상세계의 허망함이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102:26)고 하고 <마가복음>에도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3:31)고 했다. 주님 자신이나 예수님 말씀의 항존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항구성을 강조한 셈이다. 그렇다면 <시편>이나 <마가복음>에서 하늘과 땅에 대해 언급하면서 주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처럼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하늘도 없어질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아있지 않고 산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이 사실만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셈인가?
아무튼 ‘죽은 사람은 살아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이렇게 당연한 말을 그 귀한 파피루스 종이를 허비해 가며 새삼스럽게 써놓았을 이는 없을 것이다. 약간 억지라 여겨질 위험을 안고라도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본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살아간다면, 비록 산다고 해도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육적으로 살아있다 하더라도, 살아있지 않다.’하는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다음에 나오는 ‘산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은 쉽게 풀린다. ‘지금까지 허상과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옛 내가 죽고 나의 참 나를 깨달아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새 삶을 사는 사람은 이제 육신적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다.’ 대략 이런 말이라 풀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는 말이 있지만, 이런 문맥에서도 실감나는 것 같다.
우리가 ‘죽은 것을 먹는 것은 죽은 것이 살아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앞서 제7절에서 ‘사람이 사자를 먹으면 사자가 사람이 된다’고 하는 말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깨침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을 경우 우리가 죽은 것을 먹어도 그 죽은 것이 우리의 생명에 새롭게 동참하므로 되살아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죽은 상태에 있던 옛 사람을 먹고 그것이 다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본문은 우리가 빛 속에 거하면 무엇을 하겠는가 묻는다. 이 질문은 이제 빛 속에 거하게 되었으니 빛을 비추거나 나누어 주는 등 뭔가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뜻으로도 풀 수 있고, 이제 빛 속에 거하게 되었는데 그 빛을 따를 뿐 다시 무슨 더 할 일이 있겠는가 하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양 쪽 모두 가능한 해석이다. 첫째 해석은 종교적 체험에는 반드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는 등 동료 인간들을 위한 행동이 뒤따르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고, 둘째 풀이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가지게 된 사람은 자기가 나서서 설치는 대신 자기는 그저 ‘도구’로 쓰일 뿐 나서서 설치는 일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위(爲)’를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과 맞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모두 가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어서 우리가 ‘하나였을 때 둘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둘이 되면 무엇을 하겠는가 다시 묻는다. 그 당시 사상계를 풍미하던 우주론(cosmology)에 기반을 둔 이야기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고대 사상가 상당수는 태초에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하나’가 있었는데, 이 하나가 분화되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만물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제 완전했던 하나가 둘이 되어 불완전 상태로 떨어졌으니 너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뇨 하고 물어보는 것이라 풀 수 있다. <도덕경>에도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았다”고 하는 분화과정을 이야기하고 있고(42장), 우리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면 고요와 쉼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12장). 신 플라톤 철학에서도 이 현상세계는 ‘하나(hen, 一者)’에서 유출(流出)되었고, 지금 이 상태에서 우리가 할 것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라 본다. 본문에서 ‘무엇을 하겠느냐’ 물어보는 것은 이렇게 ‘둘’이 된 비본연의 상태에서 ‘본래의 순일성(Primordial Symplicity)으로 돌아가라’,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라’, ‘원시반본(原始返本)’하라고 촉구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에도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40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12절
의인 야고보에게 가야
- 새 지도자의 출현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떠날 줄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의인 야고보에게 가야합니다. 하늘과 땅이 그를 위해 생겨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르되,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떠날 것을 아나이다. 누가 우리를 인도하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의인 야고보에게 가야하느니, 천지가 그를 위해 생겼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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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The disciples said to Jesus: We know that you will depart from us; who is it who will be great over us? Jesus said to them: Wherever you have come, you will go to James the Just, for whose sake heaven and earth came into being.
풀이: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다. 초대 교회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바울이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었다. 이 절에서는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안 계시면 그 후계자로서 야고보에게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하기 때문인가. 제13절에 보면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하늘과 땅’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행정적인 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야고보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가장 깊은 경지에 이른 것은 도마라고 하며 야고보와 도마를 대비시키고 있는 셈이다.
제13절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도마의 침묵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비교하여 내가 누구 같은지 말해 주시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의로운 사자(使者)와 같습니다.” 마태가 그에게 대답했습다. “당신은 지혜로운 철인과 같습니다.” 도마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입으로는 당신이 누구와 같다고 전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 자네는 내게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취했네.” 그리고는 예수님이 도마를 데리고 물러 가셔서 그에게 세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마가 자기 동료들에게 돌아오자 동료들은 그에게 물었다. “예수님이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셨는가?” 도마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하신 말씀 중 하나라도 자네들한테 말하면 자네들은 돌을 들어 나를 칠 것이고, 돌에서 불이 나와 자네들을 삼킬 것일세.”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비교하여 내가 누구와 같은지 말해 보아라.”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답하되, “당신은 의로운 사자(使者)와 같으시니이다.” 마태가 그에게 답하되, “당신은 지혜로운 철인과 같으시니이다.” 도마가 그에게 이르되, “선생님, 저의 입으로는 당신이 누구와 같으신지 전혀 말할 수가 없나이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나는 너의 선생이 아니라. 너는 내게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고 취했구나.”
그리고는 예수께서 도마를 데리고 물러 가셔서 그에게 세 가지 말씀을 하셨더라. 도마가 자기 친구들에게 돌아오자 저들이 저에게 물어, “예수님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하시더냐?” 도마가 저들에게 이르되, “저가 내게 하신 말씀 중 하나라도 너희에게 말하면 너희는 돌을 들어 나를 칠 것이요, 그 돌에서 불이 나와 너희를 삼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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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Jesus said to his disciples: Compare me, tell me whom I am like. Simon Peter said to him: You are like a righteous angel. Matthew said to him: You are like a wise philosopher. Thomas said to him: Master, my mouth is wholly incapable of saying whom you are like. Jesus said: I am not your master, for you have drunk, and have become drunk from the bubbling spring which I have caused to gush forth (?). And he took him, withdrew, (and) spoke to him three words. Now when Thomas came (back) to his companions, they asked him: What did Jesus say to you? Thomas said to them: If I tell you one of the words which he said to me, you will take up stones (and) throw them at me; and a fire will come out of the stones (and) burn you up.
풀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같은 이야기가 공관 복음서에도 나온다.(막8:27-30, 마16:13-20, 눅9:18-21).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여기 <도마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공관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하는 고백만 있을 뿐 ‘도마의 침묵’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 선불교 전통에 속하는 <육조단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소림사에 머물며 면벽(面壁) 참선을 한지 9년이 지난 다음 거기를 떠나려고 하면서 제자들을 불러 놓고 각각 그동안 깨달은 바를 말해 보라고 한다. 한 제자가 나와서 뭐라 하자, 달마는 “너는 내 살갗을 얻었구나.”한다. 다음 제자가 나와 또 뭐라고 하자, “너는 내 살을 얻었구나.”한다. 또 다른 제자가 나와 뭐라고 하자 “너는 뼈를 얻었구나.”한다. 드디어 그의 수제자 혜가(慧可)가 나와 스승에게 경건하게 절을 올린 다음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달마는 그를 보고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구나.”했다. 깨달음에도 정도차가 있고, 구경의 깨달음에 이르면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여기 <도마복음>에서도 도마가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침묵을 통해 웅변적으로 말한 셈이고, 이를 통해 그의 ‘생수로 인한 술 취함’ 혹은 깨침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는 너의 선생이 아니라”고 한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중국 고전 <장자>에 보면 공자의 제자 안회가 공자에게 찾아 왔다. 이런 저런 말로 자기의 수행이 깊어지는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공자는 거기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다가 안회가 자기는 좌망(坐忘), 앉아서 모든 것을 잊었다고 하니 공자가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안회가 모든 앎을 몰아내고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자 공자는 안회를 보고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하는 부탁을 한다(오강남 풀이 <장자> 313-316).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는 당신의 선생이 아니오.”하는 말도 이런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4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달력의 나이와 관계없이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바로 선생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깊은 경지에 이른 도마, 여기 표현대로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고 완전히 ‘취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일 필요가 없고, 깨달음에 있어서 이제 둘은 동격임을, 그의 이름 그대로 ‘쌍둥이’임을, 선언한 셈이라는 것이다. 제108절에도 “내 입에서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되고 나도 그와 같이 됩니다.”고 했다. 도마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기에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나가 그에게만 특별한 비법을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도마를 따로 불러 일러주었다는 그 비밀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는 언급은 없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무엇, 심지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고 혼란스러운 무엇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궁극 진리란 상식의 세계, 당연히 여겨지는 세계를 뛰어넘는 역설(逆說)의 논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덕경>에 보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다”(41장)고 했다. 진리를 듣고 돌로 쳐 죽이려는 것과 크게 웃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만 아무튼 진리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엄청 말이 안되는 무엇이라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제2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진리를 들으면 우선 ‘혼란스러워’ 지는 법이다.
참고: <요한복음>은 세 번씩 도마를 믿음이 없는 제자, 따라서 바람직하지 못한 제자로 묘사하고 있다(요11:16, 14:5, 20: 24). 요한복음이 쓰이어질 당시 도마복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이들을 반박하기 위해 도마를 격하시키고 폄훼하는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 아닌가 보는 학자도 있다. 아무튼 요한복음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2천년 가까이 도마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로 알려지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궁극진리 앞에서 침묵하는 이가 도마로 되어 있지만, 최근에 세상에 알려진 <유다복음> 2:22-31에 보면 그것이 ‘유다’로 나와 있다. 도마든 유다든 중요한 것은 궁극진리는 언설로 표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다.
제14절
금식을 하면
- 형식적 종교의 종언(終焉)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금식을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죄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 여러분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제를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을 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지방으로 가서 고을을 지날 때 사람들이 여러분을 영접해 들어가면 그들이 대접하는 대로 먹고 그들 중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십시오. 결국 여러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여러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금식하면 너희는 너희 스스로에게 죄를 가져올 것이라. 너희가 기도하면 너희는 정죄 받을 것이라. 너희가 구제하면 너희는 너희 영을 해하게 되리라. 너희가 어느 지방으로 가서 고을을 지날 때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해 들어가면 저들이 대접하는 대로 먹고 저들 중 병자들을 고쳐주어라. 결국 너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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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put a sin to your charge; 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inner spirits. And if you go into any land and walk about in the regions, if they receive you, eat what is set before you; heal the sick among them. For what goes into your mouth will not defile you; but what comes out of your mouth, that is what will defile you.
풀이: 첫 부분은 제6절에 제자들이 금식, 기도, 구제에 대해 물어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에 해당된다. 그러나 바로 앞 절에 예수님이 도마를 따로 불러 말씀하신 세 가지 말씀이라는 것이 여기 금식, 기도, 구제에 관계되는 말씀이 아닌가 짐작할 수도 있다. 아무튼 금식, 기도, 구제, 이 세 가지는 유대교의 핵심적인 종교 행위였는데,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외형적 종교 형식을 배격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기도했던 것으로 보아 금식이나 기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제도화된 종교에서 형식적으로나 가식적으로나 기계적으로 하는 그런 관행으로서의 금식, 기도, 구제를 거부하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천국의 비밀, 감추어진 나라, 하느님을 찾고 나를 찾아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무엇이 모자라 다시 형식적으로, 의례적으로 죄를 회개하는 금식,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순종의 표시로 하는 구제 등이 필요하겠는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에 매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 하느님을 잃어버린 상태, ‘죄 받고, 정죄 받고, 상한 영’의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그 상태로 되돌아가 있다는 뜻이라 보고 있다. 당당히 율법주의적·형식적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대도(大道)가 페하면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나선다.”고 했다. 그렇게 되어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된다.”고 하였다(제18장).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금식이나 기도나 구제, 그리고 유교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하는 인의(仁義) 같은 외형적 가치가 여전히 중요시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아직도 그 사회가 종교에서 이상으로 하고 있는 구경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이야기이다.
둘째 부분은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을마다 찾아가, 대접하는 대로 먹고, 병자를 고쳐주는 등 어떻게 활동했던가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대접하는 대로 먹어라’는 것이다. 바로 앞 구절에서 금식, 기도, 구제 등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 종교를 청산하라는 파격적인 말과 함께, 여기 이 말은 더욱 구체적으로 성서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음식물 규례에 따라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는 유대인들의 결벽(潔癖)주의적 ‘정결제도(purity system)’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초기 불교에서도 불가에서 채식을 기본으로 했지만 무엇이나 주는 대로 먹는다는 것을 대 원칙으로 삼았다.
왜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가? 여기서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마음에서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더욱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삶에서 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먹는 것 이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가장 중요시되던 정결제도를 무시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예수님에게 중요하던 것은 얼마큼 깨끗하냐 하는 것보다 얼마큼 자비스러운가 하는 것이었다.(이 ‘정결제도’에 대해서는 오강남 <예수는 없다>, pp. 228-234를 참조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음식 가려 먹기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 건강에 좋은 음식, 적절한 음식을 가려먹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이 음식이 내 건강에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보다도 이 음식이 내 건강에 좋은가 나쁜가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는 것이 건강에 더욱 나쁠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극단의 예를 들어 건강상 술을 마시면 안 될 사람이 술을 마시면 물론 술이 몸에 해롭겠지만, 이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과 죄책감과 좌절감 같은 것이 술이 인체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생물학적·영양학적 악영향 못지않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 중 몸무게가 나가는 것이 겁이나 음식을 기피하다가 음식을 아주 먹지 못하는 거식증(拒食症, anorexia)에 걸려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기까지 한다. 요즘 새로 생긴 조어로 orthorexia 라는 것이 있다. ‘ortho’라는 것이 orthodox(正統), orthodontics(치아교정)에 보이는 것처럼 ‘바름(正)’을 뜻하는 것이니, ‘정식(正食症)’이라고 할까? 건강에 좋은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먹은 음식이 소화도 안 되고 잘못된 음식을 한 젓가락이라도 먹었으면 그것 때문에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종교적 계율에 어긋나 하늘나라에도 못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그러느라 결국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에 적용하는 말이다.
종교적 이유로든 건강상의 이유로든 먹을 것이나 못 먹을 것을 극단으로 따지는 사람과 식사를 해 보라. 밥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웃음도 나누고 해야 할 시간에 이것 먹으면 안 된다,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 이것이 좋다 뭐다 하는 잔소리나 건강 강의를 듣느라 그야말로 밥맛이 달아나고 밥 먹는 기쁨도 없어져 버린다.
이런 것이 유대교의 형식주의 신앙에서 강요하는 음식 가려먹기의 결과라면 그런 신앙은 우리의 육체적, 영적 건강을 해치는 일을 하는 셈이 아닌가.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 이런 것 이상임을 말하고 있다. 무엇이나 감사하며 맛있게 먹을지어다.
이 14절에서 우리는 종교가 깊이를 더하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인습적이고 관행적인 것에 억매이지 않는 파격성, 뒤집어엎음, 우상타파(iconoclasm) 등의 특성을 나타낸다는 역사적 사실의 실례를 보게 된 셈이다.
눅10:8-9, 막7:15, 마15:11 참조
제15절
여자가 낳지 아니한 사람을 보거든
- 불로 난 사람의 위대함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자가 낳지 아니한 사람을 보거든 엎디어 경배하십시오. 그 분이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여자가 낳지 아니한 자를 보거든 엎디어 경배하라. 그가 바로 너희 아버지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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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Jesus said: When you see him who was not born of woman, fall down upon your faces and worship him; that one is your Father.
풀이: 모든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모두 여자로부터 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혹은 불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여자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다. 제2 혹은 제3의 탄생은 생물학적·육체적 태어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 남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와 하나 된 사람, 그러기에 그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의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11:11)고 했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 세례 요한이고 천국에 있는 이들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라고 했는데, 여기 <도마복음> 제15절에는 아예 이런 사람들은 여자가 낳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심지어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종교 지도자까지도, 결국 영으로 태어난 사람, 불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석가님도 여러 해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는 성불의 체험을 했다. ‘성불(成佛)’이란 어원적으로 ‘깨침을 이룸’ 혹은 ‘깨친 이가 됨’이란 뜻이다. ‘불’ ‘부처’ ‘붓다’는 모두 ‘깨친 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깨치는 경험을 하고도 세상일에 집착하고 있는 일반 사람들이 자기의 가르침에 주목이나 할까, 주목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의심하면서, 사람들에게 나가서 자기가 깨친 진리를 전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그 당시 최고신의 하나인 브라마(Brahmā, 梵天) 신이 내려와, 그에게 경배하며, “세존이시여,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 수가타시여,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 눈에 티끌이 덜 덮인 중생들 중 진리를 듣지 못해 떨어져 나갈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M.26)고 하며 세 번씩이나 간원한다. 불교에서 ‘깨친 이’는 천상의 신도 경배할 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교’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종교’라는 뜻임을 감안할 때 이런 일은 어느 면에서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제16절
이 땅에 분쟁을
- 운명적 단독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과 전쟁을 주러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설 것입니다. 모두가 홀로 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거니와, 저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모르고 있느니라.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니, 모두가 홀로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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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Jesus said: Perhaps men think that I am come to cast peace upon the world; and they do not know that I am come to cast dissensions upon the earth, fire, sword, war. For there will be five who are in a house; three shall b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the father against the son and the son against the father, and they shall stand as solitaries.
풀이: 문자적으로, 표피적으로 읽고, 예수님을 따르면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움을 하고 모든 식구들과 불화하고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아무튼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여기 <도마복음> 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공관복음서에서도(눅12:51-53, 마10:34-36)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오셨다고 하는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14:27)고 했다. 평화에도 예수님이 주는 바람직한 평화와 세상이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 두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바람직한 평화는 정의가 강같이 흐를 때, 모든 사람들이 서로 오순도순 사랑하고 도와주며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밝고 따뜻한 참된 평화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억눌러도 말 한마디 못하는 상태, 불의를 보고도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눈감거나 동조할 수밖에 없을 때 있을 수 있는 무겁고 싸늘한 외형적 평화다. 첫째 종류의 평화는 우리가 추구하고 유지해야 할 것이지만, 둘째 종류의 평화는 단연히 배격하고 깨뜨려야 한다.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느 살인마가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와 교정에서 놀고 있던 어린 아이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하고 있다고 하자. 이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서 있는 것이 평화일 수 있겠는가.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가 세상에 만연할 때를 상상해 보라. 예수님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하는 것은 로마의 절대 철권 아래서 모든 민족이 꼼짝 못하고 있을 때만 가능했던 이런 식 죽음의 평화다. 예수님은 스스로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 이런 식의 평화를 종식시키려 오셨다고 선언한 것이 아닐까.
둘째,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은 새로운 안목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상식의 세계에서 보는 사람들과 의견이 같을 수가 없다. 앞에서 몇 번 지적한 것처럼, 깨달은 사람들이 갖는 공통성 중 하나가 바로 고정관념이나 일상적 통념을 ‘뒤집어엎음(subversiveness)’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사로잡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마저도 그 깨달음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이른바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단독자 됨, 홀로 섬, 고독은 종교사를 통해 볼 때 선각자가 당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자기 멍에는 가볍고, 자기를 따르면 쉼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셨다’고 했다(눅19:41). 노자님도 자기 말은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쉽지만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렇게 드믄가’(<도덕경> 70)하고 탄식했다. 공자님도 ‘아,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늘밖에 없구나’ (<논어> 14:37)하고 한탄했다. 위대한 성인들의 실존적 고독을 말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구절 ‘홀로 서리라’는 여기 외에도 18, 23, 28, 50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이 ‘홀로’의 그리스어 ‘monachos’에서 서양말에서 독신 수도사를 뜻하는 ‘monk’와 수도원을 뜻하는 ‘monastery’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모여 살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단독자일 수밖에 없고, 이런 단독자들의 모임이 수도회라는 뜻인가 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영적으로 앞서 간 사람들이 홀로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떠나 홀로만 살게 된다고 하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경> 4장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나온다. 빛이 부드러워져 티끌과 하나 된다는 뜻이다. 성인들, 곧 깨친 사람들은 언제까지 고고하게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함으로 일반 사람들과 섞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빛이 티끌과 하나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임마누엘’ 혹은 ‘육화(肉化, incarnation)’의 논리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에도 소년이 소를 찾아 홀로 집을 떠나 소를 찾지만 찾은 다음에는 다시 저자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그 마지막 그림이 아니던가.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서 자주 말하는 ‘절대적 단독자를 향한 단독자의 비상(the flight of the alone to the Alone)’이 이루어짐으로 얻을 수 있는 평화, 이 평화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으로 다시 사람들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리라.
제17절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 신비의 선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했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못했던 것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너희에게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했고, 마음에 떠오르기도 못했던 것을 주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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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Jesus said: I will give you what no eye has seen and what no ear has heard and what no hand has touched and what has not entered into the heart of man.
풀이: 히브리어 성경 이사야에 “이런 일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64:4)하는 말이 있고,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서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를 두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고전2:7-9)이라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 14장에서도, 도(道)를 두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夷),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希),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微)이라고 했다. 초기 중국으로 간 서양 선교사들 중에는 이 세 글자가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흥분한 적이 있다. 아무튼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도 바울이 말하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나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처럼 인간의 일상적 감각이나 지각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궁극 진리를 뜻한다.
그런데 <요한1서>1:1에는 이와 반대로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고 했다.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여기 요한 서신에서는 이처럼 우리가 듣고 보고 지켜보고 만져보기까지 한 것이라고 하는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관건은 예수님이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성경의 용어를 빌리면 ‘성령’으로 눈이 뜨이는 것, 들을 귀가 열리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드러나 있다. 그러기에 신(神), 혹은 궁극실재는 감추인 면(deus absconditus, 감추어진 신)과 드러난 면(deus revelatus, 계시된 신),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이처럼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도록 감추어진 것을 ‘주겠다’고 한 것은 결국 우리에게 깨침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이다. 이런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8절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 시종(始終) 불이(不二)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끝이 어떻게 임할 것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시작을 찾았기에 이제 끝을 찾습니까?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시작에 서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끝을 알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끝이 어떻게 임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시작을 찾았기에 이제 끝을 찾느냐?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느니라. 시작에 서 있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는 끝을 알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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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e disciple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Jesus said: Since you have discovered the beginning, why do you seek the end? For where the beginning is, there will the end be. Blessed is he who shall stand at the beginning (in the beginning), and he shall know the end, and shall not taste death.
풀이: 제자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아버지의 나라는 언제 어떻게 올 것인가 하는 등 종말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지적한 대로 여기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들도,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세상 끝이 곧 올 것이라는 것, 초자연적인 메시아의 나라의 도래가 임박하다 것 등을 전제로 하는 이른바 ‘철저적 종말론(thorough-going eschatology)’의 입장에 서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렇게 미래에 올 종말이나 하느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한 제자들의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시작도 모르면서 끝을 알려고 하느냐?’ 하는 식의 나무람이다. 이어서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으니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다. 시작을 알면 저절로 끝도 알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죽음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거의 모든 세계 신비주의 전통에서 지적하는 것과 같이, 시작과 끝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시작이 없는 끝도 있을 수 없고 끝을 전제로 하지 않은 시작도 있을 수 없다. 시작과 끝은 상호 불가분·불가결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출발이 없는 도착도 있을 수 없지만 도착이 없는 출발도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상호 의존, 상호 침투의 관계를 두고 화엄불교에서는 상즉(相卽)·상입(相入)의 관계라고 한다. 깨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조삼모사’ 이야기의 원숭이들처럼 시작이나 끝을 따로 분리해서 어느 한 쪽만을 보려고 한다. 제자들의 태도가 바로 이랬기에 예수님은 꾸짖으신 것이다. 시작에서 끝을 보라고. 알파와 오메가를 동시에 보라고.
여기서 ‘시작에 서 있으라’는 말은 사물의 분화가 있기 이전, 창세기에 나오는 그 창조의 첫날 이전, 그 태고(太古)의 시원(始原)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다. 만물의 근원인 그 본래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목표의 완성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로 보아도 좋다. 신유학(新儒學)에서는 만물이 분화한 ‘이발(已發)’의 상태와 그 이전 아직 아무 것도 분화하지 않은 원초적 ‘미발(未發)’의 상태를 분간하는데, 이 절에서 말하는 ‘시작’이라는 것이 미발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도덕경>에서도 “세상만사에는 시작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알면, 그 자식을 알고, 그러고도 그 어머니를 받들면, 몸이 다하는 날까지 위태로울 것이 없습니다.”(52장)고 했다. 만물의 어머니이며 시작인 도(道)를 알면 현상 세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 다시 근원인 도(道)로 돌아가 도와 하나 된 삶을 살면, <도마복음>식 표현대로,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종파들 중 상당수는, 여기 나오는 제자들처럼, 세상의 ‘종말’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 왔고, 아직도 기울이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정확하게 몇 년 며칠에 세상 끝이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거나 주장하기도 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대부분 ‘카이로스(kairos)’로서 달력으로 따지는 연대기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상관이 없다. 카이로스를 구태여 옮긴다면 timing이라는 말에 가깝다. ‘호기(好期)’ ‘적기(適期)’와 비슷하다. 아무튼 이 절이 가르쳐주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원(始原)’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19절
있기 전에 있는 사람은 행복
- 불변의 비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있기 전에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이 돌들이 여러분을 섬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낙원에 준비된 다섯 그루 나무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변하지 않고, 그 잎도 떨어지기 아니 합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있기 전에 있는 자는 복이 있으니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이 돌들이 너희를 섬기리라. 너희들을 위해 낙원에 다섯 그루 나무가 예비되었으니, 이것들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변하지 않고, 그 잎도 떨어지기 아니 하느니라. 이를 깨닫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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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Jesus said: Blessed is he who was before he came into being. If you become disciples to me (and) listen to my words, these stones will minister to you. For you have five trees in Paradise which do not change, either in summer or in winter, and their leaves do not fall. He who knows them shall not taste of death.
풀이: ‘있기 전에 있음’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있음’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있음의 근원으로 존재하는 그 원초적 근원으로의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원초적 근원으로서의 있음이 분화되어 여러 가지 현실적 형태로 나타나 있는 현실 존재로서의 있음이다. 이 원초적 있음을 중세 사상가들은 ‘순수 존재(esse purus)’라 표현하기도 했고 유영모 선생님은 ‘없이 있음’이라 하기도 했다. 이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현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이 우리의 근원, 모든 ‘존재의 바탕(ground of being)’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원초의 하나와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대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이런 경험을 구체적으로, 시적으로,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귀향’ ‘화해(reconciliation)’ ‘재회(reunion)’ ‘구속(at-one-ment)’ 등이다. 아니, ‘종교(religion)’라는 말 자체가 이렇게 근원으로부터 떨어졌던 내가 거기에 ‘다시 결합’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3세기 락탄티우스(Lactantius)처럼 라틴어 ‘religio’가 어원적으로 ‘re-legare(다시 결합하다)’에서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여기 말한 것처럼 ‘있기 전의 있음’에 거하는 사람,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돌들의 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처럼, 여름이든 겨울이든 변하지 않고 잎도 떨어지지 않는 푸른 나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돌들이나 나무들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합동하여 유익함’을 제공한다. 모든 것에서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으로 우뚝 선다. 이렇게 ‘있기 전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영적 사활을 좌우한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강조한다.
제20절
그 나라는 겨자씨와 같으니
- 작은 것의 가능성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나라가 어떠할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겨자씨와 같으니, 모든 씨들 중 지극히 작은 것이나 준비된 땅에 떨어지면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르기를, “나라가 어떠할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소서.”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것은 겨자씨와 같으니, 모든 씨들 중 지극히 작은 것이나, 예비된 땅에 떨어지면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가 되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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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The disciples said to Jesus: Tell us what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He said to them: It is like a grain of mustard-seed, the smallest of all seeds; but when it falls on tilled ground, it puts forth a great branch and becomes shelter for the birds of heaven.
풀이: 우리 속에 잠재적 상태로 있는 변화의 씨앗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것이 적절한 때(kairos)를 맞으면, 혹은 인연(因緣)을 얻으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준다. 이런 변화의 엄청남을 시각적 크기로 표현한 것이 겨자씨가 큰 숲이 된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중국 도가(道家)의 고전 <장자> 첫 장 첫머리에 보면 ‘붕(鵬)’ 새 이야기가 나온다. 북쪽 깊은 바다에 작은 물고기 알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물고기가 되고 그것이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는 큰 물고기로 변하고, 또 그것이 다시 등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붕새로 바뀌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라 남쪽 ‘하늘 못’으로 가는 붕정(鵬程)에 오른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속에 있는 조그마한 가능성의 씨알이 엄청난 현실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결국에는 대붕의 비상(飛翔)이 상징하는 초월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비유이다.(오강남 풀이 <장자>(현암사, 1999) 26-27참조)
세계 여러 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이런 ‘변화(transformation)’의 체험이다. 그래서 비교종교학자 프레데릭 스트렝(Frederick J. Streng) 같은 사람은 ‘종교’를 두고 ‘궁극적 변화를 위한 수단(a means to ultimate transformation)’으로까지 정의했다.(그의 책 Understanding Religious Life, 3rd edition(1985), p. 2.) 그리스도교에서 새 사람이 된다,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는 말이나, 불교에서 성불한다, 부처님이 된다는 말이나 유교에서 소인에서 군자나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모두 이런 변화를 각각의 전통에 따라 다른 각도, 다른 표현으로 말한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궁극 실재를 봄, 깨달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세상을 보면 이전의 개구리가 아니라 다른 개구리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이치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면 (생물학적으로 겨자는 일년생 풀로서 나무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무튼 크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런 변화를 경험하게 된 당사자에게만 훌륭한 일일 뿐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를 제공해 줘서 주위에도 좋은 것이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도 보면 ‘큰 배움[大學]’은 여덟 가지 단계로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사물을 궁구하고[格物], 깨달음을 극대화하고[致知],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인격을 도야하고[修身], 가정을 살피고[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궁극적으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平天下]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배움의 단계 중 처음 다섯 단계는 자신의 변화를 위한 노력이지만 나머지 세 단계는 가족과 이웃과 세계를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이다. 앞에 나온 16절 풀이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에서도 깨달음을 찾아 집을 떠나는 첫째 그림부터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변화를 얻은 다음 마지막으로 오는 열 번째 그림은 남을 돕기 위해 저자거리로 나가는 그림이다. 신비적 경험을 통해 변화된 사람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임을 말해주는 몇 가지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깨친 사람들이 사회에 무슨 도움을 주게 된다고 하여 반드시 직접 나서서 부산을 떨고 설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들을 보고 사회에서 분리되어 고고하게 스스로의 평화만을 즐기는 도피주의자들이라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설령 깨친 사람들이 사회에 직접 뛰어들어 우리 눈에 뜨일 만큼 큰일을 이루어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공헌을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두가 쓸데없이 부산을 떨며 흙탕물을 일으키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 깨친 사람들만이라도 우선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만큼 사회가 덜 혼탁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장자>에 나오는 요 임금이 고야 산에 사는 네 명의 신인(神人)들을 찾아가 뵙고 돌아오는 길에 분(汾)강 북쪽 기슭에 이르자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깨친 사람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요 임금 같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나라를 그만큼 좋게 만드는 데 공헌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깨친 사람들은 모든 것과 하나 된 상태에서 만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려 물 흐르듯 흐르기 때문에 구태여 뭔가 한다고 나서서 설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위(無爲)의 상태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면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알프스 산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쏘다니지 않고도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동네 정자나무가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그늘에서 쉼을 얻는다.
제21절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어린 아이들과 같아
- 귀향(歸鄕)
마리아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어린 아이들과 같습니다. 땅 주인들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땅을 되돌려 달라’ 하니, 그 어린 아이들은 땅 주인 있는 데서 자기들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합니다. 만약 집 주인이 도둑이 올 것을 알면 그 주인은 도둑이 오기 전에 경계하여 그 도둑이 집에 들어와 소유물을 훔쳐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 경계하십시오. 힘 있게 준비하여 도둑이 여러분 있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예상하는 어려움이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깨닫는 이가 있도록 하십시오. 곡식이 익어 거두는 자가 손에 낫을 가지고 속히 임하여 이를 거둘 것입니다. 두 좋은 귀 있는 사람들은 들으십시오.”
-- 마리아가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으니이까?”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저들은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어린 아이들과 같도다. 땅 주인들이 와서 이르되, ‘우리 땅을 되돌려 달라’ 하니, 그 어린 아이들은 땅 주인 있는 데서 저들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 만약 집 주인이 도둑이 올 것을 알면 그 주인은 도둑이 오기 전에 경계하여 그 도둑이 집에 들어와 소유물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에 대해 경계하라. 큰 힘으로 준비하여 도둑이 너희를 노략질 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기다리는 환란이 이를 것을 인함이라. 너희 중에 깨닫는 자가 있도록 하라. 곡식이 익으매 거두는 자가 손에 낫을 가지고 속히 임하여 이를 거두리라. 두 좋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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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Mariham said to Jesus: Whom are your disciples like? He said: They are like little children who have settled in a field which does not belong to them. When the owners of the field come, they will say: Leave us our field. They are naked before them, in order to leave it to them and give them (back) their field. Therefore I say: If the master of the house knows that the thief is coming, he will keep watch before he comes, and will not let him dig through into his house of his kingdom to carry off his things. You, then, be watchful over against the world; gird your loins with great strength, that the robbers may find no way to come at you. For the advantage for which you look, they will find. May there be among you a man of understanding! When the fruit ripened, he came quickly, his sickle in hand, and reaped it.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풀이: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 등 마리아가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 어느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마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참된 깨달음도 없는 사람들로 취급되고 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그런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제자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장면을 우리말에 더 익숙한 말로 고치면, 그 아이들이 남의 집 마당 같은 공터에서 놀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다가 집 주인이 와서 이제 나가라고 했다. 아이들이 주인 앞에서 옷을 벗고 그 집 마당에서 물러섰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속하지는 않았던 세상’, 영어로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로 표현되는 이 세상을 떠나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침례를 받고 새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암시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영지주의나 그리스 사상 전반에 걸쳐서 주장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몸을 입고 남의 집 마당 같은 이 세상에 잠시 놀러 와서 재미있게 놀다가 때가 되면 다시 몸을 벗고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라 할 수도 있다.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의 마지막 구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를 연상하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잠시 와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다. 재미있게 놀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 우리보고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나가라고 하면, 더욱이 어머니가 해가 지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가라고 하니 그냥 떠나갈 뿐 아니라 옷까지 다 벗어 두고 간다. 그야말로 적수공권이다. 이 세상에 놀면서, 살면서 가지고 있던 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안 얻은 모든 소유나 권력이나 명예나 지식 같은 것이 모두 거추장스러운 헌 옷이다. 미련 없이 모두를 뒤로 하고 떠나가는 것이다. 떠나서 우리의 원초적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귀향(歸鄕)이요 귀일(歸一)이다.
이 절에서 여기까지는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도둑’ 이야기가 나오고 도둑이 올 것을 알고 경계하여 소유를 잃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가. 성서 복음서에서도 ‘도둑’ 이야기가 나온다(마24:43, 눅12:39). 그러나 거기에는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시키고 있다.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재림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럼 무엇인가?
여기서 도둑에게 우리 소유물을 잃을까 경계하라는 말을 이 세상이라는 남의 땅에서 놀던 아이들이 땅도 돌려주고, 옷도 버리고 다시 돌아가 찾은 아버지의 나라, 그 고향을 세상사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 때문에 도로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으로 풀 수 있을 것 같다. 한번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안심할 수가 없다. 언제나 그것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잃는 어려움, ‘환란’에 대비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에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힘쓰라. 그러면 ‘큰 수확’이 있으리라. 대략 이런 기별이 아닐까.
제22절
젖 먹는 아이를 보시고
- 양극의 조화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하고, 속을 바깥처럼, 바깥을 속처럼 하고, 높음 것을 낮은 것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 눈을 가지고, 새 손을 가지고, 새 발을 가지고, 새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젖 먹는 아이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도다.” 제자들이 그에게 일러,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삽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둘을 하나로 하면, 속을 바깥처럼, 바깥을 속처럼 하면, 높음 것을 낮은 것처럼 하면,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면, 새 눈을 갖고, 새 손을 갖고, 새 발을 갖고, 새 모양을 갖게 되면, 그러면 너희는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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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Jesus saw some infants who were being suckled. He said to his disciples: These infants being suckled are like those who enter the kingdom. They said to him: If we then become children, shall we enter the kingdom? Jesus said to them: When you make the two one, and when you make the inside as the outside, and the outside as the inside, and the upper as the lower, and when you make the male and the female into a single one, so that the male is not male and the female not female, and when you make eyes in place of an eye, and a hand in place of a hand, and a foot in place of a foot, an image in place of an image, then shall you enter [the kingdom].
풀이: <도마복음>의 핵심과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제4절에 늙은이라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젖먹이 갓난아기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 복음서에 보면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올 때 제자들이 이를 꾸짖자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 마19:14, 눅18:16)고 하셨다. <도마복음>과 다른 점은 여기 공관복음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갓난아기라는 언급이 없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림으로나 듣는 이야기로 우리는 예수님의 무릎에 앉은 어린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정도의 어린이들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그것이 젖을 먹고 있는 갓난아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공관복음서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천국 가는 이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태복음>에 보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18:4)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자기를 낮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말이 없다. <도마복음>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서 ‘젖먹이 갓난아기 같이 됨’이라고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 젖먹이 갓난아기들이야 말로 ‘둘을 하나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생각은 4절, 22절에 나왔고, 23절, 48절, 106절에도 계속 나온다. 무슨 뜻인가?
첫째, 물리적으로 갓난아기는 남성의 아버지와 여성의 어머니 ‘둘이 하나가’ 되어 생긴 결과다. 그 아이도 나중에는 남성이나 여성이 되겠지만 아직 할례도 받기 전의 갓난아기는 남녀로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 합일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반대 같이 보이는 것을 한 몸에 합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으로 아이는 아직 나와 대상을 분간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는 상태다. 주객(主客)이 분화되지 않았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는 ‘내외(內外), 상하(上下), 고저(高低), 자웅(雌雄)’ 등 일견 반대되고 대립되는 것 같은 것을 반대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조화와 상보의 관계로 볼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특성으로서, 이런 특성을 가져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태극기 가운데 붉은 색과 파랑색으로 된 태극의 음양(陰陽)에서 음과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음이냐 양이냐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 이항대립(二項對立) 대립 식 ‘냐냐주의’(either/or)의 시각으로는 실재의 진면목을 볼 수 없고, 음이기도 하고 양이기도 하며 동시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도도주의’(both/and, neither/nor)적 태도를 가질 때 사물의 전체를 본다고 한다. 음과 양을 독립된 두 개의 개별적 실체로 보지 않고 한 가지 사물의 양면으로 파악다는 다는 뜻이다. 이것을 요즘 말로 고치면 ‘초이분법적 의식(trans-dualistic consciousness)’을 갖는 다는 것이고, 좀 더 고전적인 말로 하면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니콜라우스(Nicolas of Cusa, 1401-1464)가 말하는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발견하는 것이다.
<도덕경> 28장에 보면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십시오. 세상의 협곡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협곡이 되면,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고 했다. 이처럼 ‘갓난아기’됨의 중요성을 알기에 노자는 <도덕경> 20장에서 “나 홀로 어머니의 젖 먹음을 귀히 여긴다.”고도 했다. 또 제2장에는 선악, 미추, 고저, 장단이 모두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절대시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실 세계 여러 종교에서 ‘양극의 조화’처럼 중요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태극☯ 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위로 향한 삼각형과 아래로 향한 삼각형을 포개놓은 유대교의 ‘다윗의 별’(그림을 넣어 주세요.)이라든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교차시킨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나, 두 원을 아래위로 반반씩 겹쳐놓고 그 중 겹쳐진 부분을 잘라 만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Ιχθυs,ΙΧΘΥΣ) 상징(그림을 넣어 주세요.), 불교 사찰에서 보는 만(卍)자 등이 모두 이런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도 ‘양극의 조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심리적 성숙성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하고, 그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도 세계 모든 영웅 신화에 나오는 정신적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이 영웅들이 도달하는 최종의 경지는 이 ‘반대의 일치’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핵심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잃어버린 여성성을 되찾아 양극의 조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중세 기사(騎士)들이 찾아다니던 성배(聖杯)나 다빈치가 그의 그림 ‘최후만찬’ 중앙 예수와 그 옆 사람(댄 브라운은 그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본다) 사이에 만들어 놓은 공간이나 모두 V형으로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잃어버린 여성성을 상징하는데 기사들이나 다빈치 모두 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초인격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선두 주자 켄 윌버(Ken Wilber)는 인간 의식의 발달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주객미분(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 주객이분(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 그리고 주객초월(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가 있다고 했다. 아담 하와가 선악의 이분법적 의식을 갖기 이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할 줄 모르던’ 의식은 주객미분의 단계로서 바람직한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단계로 가려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퇴보라고 보았다. 주객이분의 의식, 인간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ness)’을 가능하게 함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이런 일상적 의식에서 해방되기 위해 술이나 약물 등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의식 상태는 주객 ‘미분’의 단계요, 종교에서 가르치고 목표로 하는 의식 상태는 주객 ‘초월’의 단계라는 것이다. 미분과 초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윌버는 ‘전초오류(pre/trans fallacy)라 했다. 갓난아기의 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육체적으로 다시 갓난아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적인 갓난아기가 됨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했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객이분의 단계를 ‘초월’해야 됨을 말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주객미분의 단계로 ‘퇴영’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니고데모는 ‘미분과 초월’을 혼동하는 ‘전초오류’를 범한 셈이다.
이 절에서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벌써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 할 수도 있다. 이미 새로운 눈, 새로운 손, 새로운 발, 새로운 모습을 가지고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제106절에 보면 둘을 하나로 보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사람의 아들’이 되고 산을 보고 ‘움직이라고 하면 산이 움직일’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참고: <도덕경> 20장에 “나 홀로 뭇 사람들과 다른 것은 결국 나 홀로 어머니 젖 먹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어린 아이처럼 이분의 세계를 벗어났다는 뜻과 함께 어린 아이가 어머니 젖을 찾는 것처럼 도를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제23절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
- 깨달음의 어려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너희를 택하리니,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이라. 저들이 모두 하나로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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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Jesus said: I shall choose you, one out of a thousand and two out of ten thousand, and they shall stand as a single one.
풀이: 물론 여기서는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택함을 받지 못 한다는 식의 예정론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천 명 중 한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 보다 더 어려운 셈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7:13, 눅13:24)”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씀과 같다.
힌두교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1) 깨달음의 길(jnana marga), 2) 헌신의 길(bhakti marga), 3) 행함의 길(karma marga)이다. 깨달음의 길이란 우주의 실재를 꿰뚫어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를 통해 해방과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고, 헌신의 길은 어느 특정한 신이나 신의 현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받드는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행함의 길이란 도덕규범이나 규율을 잘 지키거나 남을 위해 희생적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 길 모두 자기중심적 자아를 극복함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행하기에 상대적으로 어려운 길과 쉬운 길로 나누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은 가장 가파르고 어려운 길이라 상근기(上根器)에 속하는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길은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애(信愛)의 길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 성불하겠다는 선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종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물론 참선하겠다는 사람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불교의 경우 믿음을 강조하는 불자들이 비록 자기들은 깨침에 이를 수 없지만, 깨침을 강조하는 불자들을 우러러 보거나 존경할망정, 결코 이단이라 정죄하거나 박해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깨침을 얻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단이라 여길 뿐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정죄하고 박멸하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천국을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깨달음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물론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 같은 문자주의자의 정치적 목적으로 <도마복음> 같은 복음서들을 모두 배격하고 4복음서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도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므로 모두 예수님처럼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도마복음> 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얻으라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식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의 깊은 차원을 알아볼 기회가 없던 일반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인기품목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옛날에는 비록 상근기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 이런 ‘난행도’ 같은 것을 접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맹률이 97퍼센트 이상이던 고대 사회에서 누가 옆에서 말해주지 않으면 도마복음의 기별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나 필자도 한 두 세대 전에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2:28)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가물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튀 듯’하리라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가톨릭 최대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오늘처럼 정보화된 시대에 교육의 기회도 많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특별히 박해받는 일도 사라진 21세기에는 종교가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성을 띠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그리스도교도 믿음과 함께 깨침을 함께 강조하는 폭넓은 종교로 변해야 하고, 이리하여 ‘무조건 믿으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아하!’를 연발하며 갈 수 있는 깨침의 길도 열려 있음을 알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천 명에 한 명이든 천 명에 백 명이든 깨침을 얻은 사람들은 제16절에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홀로’ 서게 되게 된다. 임금에 대한 충절이나 의로움을 위해 죽은 사육신 성삼문마저 ‘독야청청’할 수밖에 없었거늘, 영적 눈뜸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참고1: “각 시대를 통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경외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그가 원했던 것을 실천하려 한 사람은 더더욱 소수였다. 그의 말씀은 뒤틀리고 휘어져 무슨 의미로든지 마음대로 해석되거나 심지어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에게 겁주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영웅적 바보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남용되었다. 예수님은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욱 큰 영광과 경배를 받으신다. 더할 수 없는 아이러니는 그가 그 당시 세상에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일들이 되살아나서 온 세상에 퍼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Albert Nolan, Jesus Before Christianity: The Gospel of Liberation (London Darton, Longman and Todd, 1977), p. 3.)
참고2: 깨달음은 일생에 단 한번 오는 일생일대의 대사건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매일, 매순간 깨달음의 연속을 맛보며 신나게 사는 삶, 매사에서 죽음과 부활의 연속을 체험하며 사는 삶이라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옛 편견을 벗고 새로운 빛으로 들어서는 것. 산을 올라가며 점점 널리 전개되는 풍광을 내려다 보며 계속적으로 외치는 ‘아하!’ 경험, 바울이 말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경험이 모두 깨침의 경험이라 보는 것이 좋다.
제24절
당신이 계신 곳을
- 빛의 편재성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계신 곳을 저희에게 보여 주십시오. 저희가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이는 들으십시오. 깨달은 사람 속에는 빛이 있어,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춥니다. 그 빛이 비추지 않기에 어두움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계신 곳을 저희에게 보여 주소서. 저희가 찾아야 하기 때문이니이다.” 그가 이르시되,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깨달은 자 안에는 빛이 있나니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추노라. 그 빛이 비추지 않으면 어둠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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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His disciples said: Teach us about the place where you are, for it is necessary for us to seek it. He said to them: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There is light within a man of light, and he lights the whole world. If he does not shine, there is darkness.
풀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하자 도마가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하고 묻고, 이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14:1-6)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리석은 도마가 예수님의 말씀에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찌 ‘길’ 같은 것을 묻는가? 그걸 알아서 뭐하겠다는 것인가? 그저 길이실 뿐 아니라 진리요 생명이시기도 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하는 식이다. 앞 제13절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 가지로 요한복음에는 믿기보다는 깨침을 강조하는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 ‘어리석은 도마’로 폄훼하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런데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이와 반대로 예수님이 계시는 어느 한 곳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 제자들이야 말로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빛 되신 그가 어느 한 곳에 한정되어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환한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일까 찾아 헤매는 대신, 귀를 열고 깨달음을 얻어,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깨달은 사람 누구에게나 그 속에 빛이 있다는 것, 따라서 빛은 어디에나 다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대답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 속이나 우리 속에 있는 빛의 편재성(遍在性)을 강조하는 셈이다.
한편, 엄격히 말하면 물론 우리 모두의 속에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불꽃(a spark of God)’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통해 이 빛을 체득하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 빛을 세상에 비추는 일이다. 내재적인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세상이 밝고 어두운 것은 해나 달, 횃불이나 크리스마스 장식등 같은 것들의 유무와 상관없이 깨달은 사람 속에 있는 이 빛이 세상을 비추는가의 여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을 ‘세상의 빛’(8:12, 9:5, 12:46)이라 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달리 <도마복음>은 예수님만 세상의 빛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깨닫기만 하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빛임을 알게 될 것이라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요한복음>이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면, <도마복음>은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빛임을 깨닫고 이를 비추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도 그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 결국은 우리도 빛을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 세상이 이처럼 어둡게 보이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처럼 진정으로 믿거나 깨닫는 이들이 적기 때문 아닐까?
제25절
목숨처럼 사랑하고 눈동자처럼 지키라
- 사랑과 자비의 공동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을 여러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그들을 여러분 자신의 눈동자처럼 지키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동무들을 네 목숨처럼 사랑하고 저들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BLATZ
(25) Jesus said: Love your brother as your soul; watch over him like the apple of your eye.
풀이: 복음서에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22:39, 막12:31, 눅10:27)고 하신 말씀에 해당되는 구절이다. 이 말씀은 본래 레위기 19:18에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씀은 <도마복음>에만 있는 말이다.
눈에 무엇이 접근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을 뿐 아니라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얼굴을 피하기도 한다. 혹시 눈에 티라도 들어가면 그것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눈물까지 흘린다. 모두 눈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우리 이웃이나 우리 동료들이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불의,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학대, 신체장애 등의 희생자라면, 내가 내 눈동자를 자동적으로 지키고 보호하는 것처럼 그들을 그렇게 지키고 보호하라.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으로 뭉쳐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하라는 분부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이런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하는 식의 윤리적·율법주의적 의식에 바탕을 둔 의식적인 사랑은 사실 진정한 사랑이 못된다. 참된 사랑은 저절로, 자발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내 눈동자처럼 지키는 자발적, 무의식적, 무조건적 사랑, 남의 아픔이나 슬픔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진정한 사랑은 사실 영적으로 깨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뭣을 깨쳐야 하는가?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모두 하나라는 것, 나와 하느님, 나와 내 이웃, 그리고 나와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쳐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일상적 용어를 빌리면, 우리는 모두 한 분 하느님의 같은 태에서 태어났다는 것, 특히 도마복음서에서 강조하듯이 우리는 모두 우리 속에 신성(神性)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화엄불교의 용어로 해서, 이 세상 일체의 사물이 이사무애(理事無礙)·사사무애(事事無礙), 상즉(相卽)·상입(相入)의 관계로 서로 막힘이 없이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런 일체성(一體性)에 대한 체험적 깨달음이 있어야 모두와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가지고 남을, 내 몸처럼, 내 눈동자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랑이 솟아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내어줌을 강조하는 성경의 ‘아가페(agape)’ 사랑이나 남이 아파하면 나도 ‘함께 아파함(com-passion)’을 말하는 불보살의 자비심은 모두 이렇게 ‘더불어 있음(interbeing)’에 대한 존재론적 눈뜸에 근거한 사랑이다. 사랑은 물론 나의 이기심, 나의 옛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이런 영적 깨침을 이룬 사람들이 보여주는 최종의 결실이기도 하다.
참고: 여기 쓴 ‘interbeing’이라는 조어(造語)는 월남 출신 팃낫한 스님이 즐겨 쓰는 말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I am a girl.”이라 할 때 내가 소녀인 것은 소년이 있기 때문이고, 그 외에 나의 부모님, 내가 먹은 밥, 내가 마신 공기 등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따지면 나 홀로 “I am a girl.”이 아니라 “I interam a girl.”이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26절
티는 보고 들보는-우선순위의 확정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여러분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까? 먼저 여러분 눈 속에서 들보를 빼면 그 후에야 밝히 보고 여러분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수 있을 것입니다.”
BLATZ
(26) Jesus said: You see the mote which is in your brother's eye; but you do not see the beam which is in your own eye. When you cast out the beam from your own eye,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cast out the mote from your brother's eye.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는 상응 절보다 훨씬 간략하다.(마 7:3-5, 눅 6:41-42 참조) 공관복음서 버전은 이 말씀의 확대본이라고 볼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제 잘못은 못보고 남의 사소한 실수만 가지고 떠드는 사람을 향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 7:5)고 하여 이 말의 윤리적·도덕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여기서는 내 속에 있는 장애를 제거하여 사물을 ‘밝히 보는’ 깨달음에 이르라는 ‘의식의 변화’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이런 눈뜸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끌까지도 볼 수 있게 됨으로, 무엇보다 우선 눈을 뜨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남을 도와줄 때 참으로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제 25절에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나와 네가 하나라는 존재론적 일체성을 깨달을 때 가능하다고 한 것처럼, 지금 이 절에서도 남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없이 여기는 것을 그만 두고 그를 진정으로 돕게 되는 것도 결국 내 눈의 들보를 없앨 때 올 수 있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 속에 사물을 밝히 보는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함을 알려주는 말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제27절
금식하지 않으면 -금식과 안식일 준수의 참 뜻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금식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나라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식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BLATZ
(27) <Jesus> said: If you do not fast to the world, you will not find the kingdom; if you do not keep the Sabbath as Sabbath, you will not see the Father.
여기서 말하는 금식이나 안식일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실행하던 것과 같은 식의 금식이나 안식일 준수가 아니다. 앞에서(6, 14절) 본 것처럼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금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참된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들에 대한 금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세상’이란 물론 하느님의 나라와 대비되는 외면적, 현상적 세계를 떠받드는 가치 체계를 의미한다.(57, 81, 85절 참조) 따라서 세상 것들에 대해 금식한다는 말은 내 속에 있는 내면적 나라를 찾으려는 관심을 모두 앗아가고 세상적인 가치를 궁극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그런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나라를 보는 것, 나의 내면적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은 이렇게 궁극적인 것이 아닌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는 마음을 비울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것이 아닌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알고 떠받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요, 이런 우상숭배를 버리는 것이 영적 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첫째 일이다. 그러기에 십계명도 우상 타파를 제 1계명으로 두고 있는 것 아닌가.
『도덕경』 12장에 보면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다섯 가지 음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집니다. 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이 광분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그르게 됩니다.”고 했다. 여기서도 우리가 감각적이요 외면적인 가치에 탐닉하거나 몰입되어 있으면 이런 아름답고 신나는 것들이라도 결국은 우리를 이런 현상 세계의 근원이 되는 도(道)에서 우리의 관심을 멀게 하는 족쇄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오강남, 『도덕경』 63-66 참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자』도 구도의 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최고의 금식은 바로 ‘심재(心齋)’-‘마음 굶김’, ‘마음 비움’이라 하지 않았던가.
‘안식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으면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식일은 이 세상 것에 대해 ‘금식하는 날’이다. 히브리어로 안식일에 해당되는 말 ‘사바트’는 쉼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에서 풀어나 육체적으로 편안히 쉬면서 궁극관심의 대상이 되는 궁극적인 것을 위해 마음을 바치는 날이다. 현재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안식일을 주일 중 가장 바쁘고 힘 드는 날로 보내는 것이 현실이다. 안식일의 본래 정신과 동떨어진 일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유대인 심리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안식일은 무엇이든 가지려고 하는 ‘소유 중심의 방식(having mode)’에서 ‘존재 중심의 방식(being mode)’으로 넘어가, 소유에 대한 관심을 뒤로 하고 그냥 그대로 있음을 즐기는 날이라고 했다. 유대인 사상가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그의 책 『안식일』(Sabbath)1)에서 안식일이란 신이 물질 너머에 계시다는 것과 인간이 물질을 초월하여 신의 영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특별한 날이라고 했다. 모두 현상 세계, 일상의 차원에서 영원의 차원으로 승화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체험 없이 어떻게 아버지를 볼 수 있겠는가?
『도마복음』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영원한 안식은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여기서 말하는 안식일 준수도 이런 궁극적인 안식에 들어감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캐나다 밴쿠버에는 ‘안식(安息)’이라는 중국 장의사가 있다.
제28절
세상의 아픔으로 아파하고-메타노이아 체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설 곳을 세상으로 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영혼은 이런 사람의 아들들로 인해 아파합니다. 이는 이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스스로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입니다.”
BLATZ
(28) Jesus said: I stood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I appeared to them in the flesh. I found them all drunk; I found none of them thirsting, and my soul was afflicted for the sons of men; for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 and they do not see that they came empty into the world, (and) empty they seek to leave the world again. But now they are drunk. When they have thrown off their wine, they will repent.
LAYTON
(28) Jesus said, "I stood at rest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unto them I was shown forth incarnate; I found them all intoxicated. And I found none of them thirsty. And my soul was pained for the children of humankind, for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s and cannot see. For, empty did they enter the world, and again empty they seek to leave the world. But now they are intoxicated. When they shake off their wine then they will have a change of heart."
DORESSE
33 [28]. Jesus says: "I stood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in the flesh I manifested myself to them. I found them all drunk; I found none athirst among them. And my soul was afflicted for the children of men. Because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 and do not see, because they have come into the world empty, <that is why> they seek still to go out from the world empty. But let someone come who will correct them! Then, when they have slept off their wine, they will repent."
『도마복음』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그저 우리 눈에 모양으로만 나타나 보이기만 했다고 주장하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배격하고 직접 몸을 입고 오셨다는 수육(受肉, incarnation)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온 목적을 천명한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니다.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한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만을 실재로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간들에게 현상계 너머에 있는, 혹은 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眞如), 여실(如實), 자신의 참 모습을 보도록 깨우쳐 주기 위한 지혜의 화신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상태는 어떠한가? 취해 있지만 취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뭔가 해결책을 찾아 목말라 할 줄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헤매며 고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통당하는 중생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그들 가운데서 그들을 이끌기 위해 이 세상에 설 곳을 정하신 것이다. 피를 흘려 그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대속적 기독론(substitutionary Christology)’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도덕경』 53장에 보면, 노자도 대도(大道)의 길이 평탄하지만 사람들이 곁길만 좋아하고, ‘비단옷, 맛있는 음식, 넘치는 재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현실을 향해 노자님은 “이것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외친다. 눈앞에 있는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현실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이런 비극적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다. 제16절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노자를 비롯하여 종교적 선각자들은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가엽게 여기고 그들을 일깨우려 노력하는 이들이다.
부처님도 사람들에게 자기가 깨친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네 가지 거룩한 진리’ 혹은 ‘사성제(四聖諦)’를 설파했는데, 그 중 첫째가 모든 것이 아픔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아픔[苦]’에 관한 ‘진리[諦]’였다. 일단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병의 원인[集]도 알고, 그것을 없애겠다는[滅]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일정한 방법[道]에 따라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아픔 자체보다 아픔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마음의 눈이 멀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지혜와 깨달음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데, 그것도 잡지 못하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만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취해 있지만 우리의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를 깨우기 위해 일부러 육신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면, 그리하여 심안(心眼)의 개안(開眼)이 있기만 하면, 완전한 ‘의식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고 했다.
마지막 구절은 종교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발언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이라고 할 때 ‘의식을 바꿀 것이다’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은 콥트어 판에서도 그리스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메타노이아(metanoia)’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을 때 그 ‘회개’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본 해설자가 그 동안 여기 저기 책이나 논문에서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메타노이아’는 어원적으로 ‘의식(noia)의 변화(meta)’를 의미한다.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는 식의 회개라는 뜻 이상이다.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켜 초이분법적(trans-dualistic)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하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관복음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란 결국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키고, 이로 인해 하느님의 주권이 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 풀이해도 무리가 없다. ‘의식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기를 바라던 최대의 소원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 주위에 있는 불교나 유교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불교에서 ‘붓다’ 혹은 ‘부처’ 혹은 ‘불(佛)’이란 ‘깨침을 얻은 이(the Awakened, the Enlightened)’라는 뜻이고, ‘불교’ 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성불하라’는 말은 ‘깨침을 얻으라’는 말이다. 유교에서도 신유학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성학(聖學)’이라고 했는데, ‘성인들의 가르침’이라는 뜻보다는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Learning for Sagehood)라는 뜻이 더 강하고, 성인이란 한문의 ’성(聖)‘이라는 글자에 나타나듯 ’특수 인식능력의 활성화‘를 이룬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의식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여도 좋다.
문제는 메타노이아다.2) 여기 이 절은 이 메타노이아의 체험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기가 막힌 복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 나오는 ‘사람의 아들’ 혹은 ‘인자(人子)’라는 말은 히브리어 표현으로 그냥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제29절
육이 영으로 인해-영육의 관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영으로 인해 육이 생겨나게 되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인해 영이 생겨나게 되었다면 그것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큰 부요함이 어떻게 이와 같은 궁핍 속에 나타났는지 놀라워할 따름입니다.”
BLATZ
(29) Jesus said: If the flesh came into existence because of the spirit, it is a marvel. But if the spirit (came into existence) because of the body, it is a marvel of marvels. But as for me, I wonder at this, how this great wealth made its home in this poverty.
LAYTON
(29) Jesus said, "It is amazing if it was for the spirit that flesh came into existence. And it is amazing indeed if spirit (came into existence) for the sake of the body. But as for me, I am amazed at how this great wealth has come to dwell in this poverty."
DORESSE
34 [29]. Jesus says: "If the flesh was produced for the sake of the spirit, it is a miracle. But if the spirit <was produced> for the sake of the body, it is a miracle of a miracle." But for myself (?), I marvel at that because the [ . . . of] this (?) great wealth has dwelt in this poverty."
고대에는 육(sarx)이 영(pneuma) 때문에 생긴 것이라 믿었다. 영이 먼저 있고 그로 인해 육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에서 이 물질세계가 흘러나오거나 창조된 것이라 본 것이다. 이 물질 세상이 ‘유출(流出)’의 결과든 ‘창조(創造)’의 결과든 이렇게 존재한다는 자체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왜 공허만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Why are there beings at all, rather than nothing?)”하는 질문을 계속했다. 이른바 ‘존재의 신비(mystery of being)’ 혹은 ‘존재의 충격(shock of being)’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 최대의 철학자 중 하나인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자기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를 경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워주는 두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 위에 별들이 총총한 하늘이 있고 내 속에 도덕률이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현상 세계’ 자체만으로도 경탄과 경외심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이 절에서는 ‘영이 몸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욱 놀라운 일’,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본문에서는 ‘육(sarx)’과 ‘몸(soma)’을 구분하고 있다. 그 당시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영육(soul/flesh)간의 관계에서 육은 영혼(soul)이 극복할 대상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영혼 육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하느님의 영(Spirit)이 우리 속에 내재하여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고, 우리 속에서 발견되는 이런 성령의 내재야말로 신비스럽고도 놀라운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이 이런 현상 세계를 통해서 그것을 초월하는 신적 존재를 감지하고 신비스럽게 여기거나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 물질세계로 인해 그 전까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초월의 세계,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 물질 세계는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를 일러주는 표지(sign, code)나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말과 같다. 좀 어려운 말을 쓰면 비존재가 존재를 가능하게 하지만, 존재는 우리에게 비존재의 실재를 체험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 이 구절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빚으시고 “생기(ruach)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는 사실에서 보이는 것처럼 몸이 먼저 있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생령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이것도 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의 존재를 더욱 기이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신의 현존에 대한 경이를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구절, “나는 이 큰 부요함이 어떻게 이와 같은 궁핍 속에 나타났는지 놀라워할 따름입니다.”한 것은 영적 세계라는 그 ‘큰 부요함’이 일반적으로 ‘궁핍’한 것으로 여겨지는 물질세계에 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내재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물질세계를 통해 영의 세계를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놀랍고 신기하다는 말로 새겨도 될 것이다.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좁혀서 생각한다면, 인간 안에 있는 신의 임재야 말로 신비중의 신비라는 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제30절
둘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 삼위의 관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신들입니다. 둘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는 나도 거기 있습니다.”
BLATZ
(30) Jesus said: Where there are three gods, they are gods; where there are two or one, I am with him.
LAYTON
(30) Jesus said, "Where there are three divine beings they are divine. Where there are two or one, I myself dwell with that person."
DORESSE
35 [30]. Jesus says: "There where there are three gods, they are gods. Where there are two, or <else> one, I am with him!"
지극히 난해한 구절 중 하나다. 이 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버전이 있는데, 이 구절에 대한 견해도 학자마다 다 다르다. 마빈 메이어(Marvin W. Meyer)에 의하면 “셋이 있는 곳,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같이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이면, 내가 이르노니, 나도 그 하나와 함께 하노라.”로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애프릴 디코닉은 이 절에는 번역상의 오류가 있었으리라 보고 “셋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나나 둘이 있는 곳에는 내가 함께 하리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콥트어 번역자는 그리스어 오역을 번역하느라 말이 통하지 않는 말을 한 것 아닌가 본다. 또 그리스어 버전은 이 말에 이어서 제 77절에 해당하는 말, “돌을 들어라. 너희는 거기서 나를 찾으리라. 나무를 쪼개라. 내가 거기 있느니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추측성 발언을 싫어할 경우 이 절은 건너뛰어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추측을 해 본다면, 첫째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는 말로 풀 수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를 각각 개별적으로 독립된 신들로 생각한다면 사실 그들은 세 명의 신들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파악하여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면 그 세 명의 신들이란 참된 신들이라 할 수 없고, 그러기에 내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인과 신, 이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된 곳이라면 나도 거기에는 함께 한다.’하는 식으로 새겨듣는다는 것이다.
좀 더 영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로 받드는 것들, 우리가 우리의 신으로, 우리의 우상으로 모시는 것들이 셋이나 우리를 점하고 있을 경우, 예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하나나, 기껏해야 둘이 될 경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말한다고 푸는 것이다.
아주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 우리는 결국 모두 하느님이다. 셋이 모이면 하느님 셋이 있는 셈이다. 이런 하느님들이 있는 곳, 셋도 필요 없고 둘만 있어도, 심지어 하나만 있어도 나도 거기 함께 한다. 둘이나 셋, 그 이상 모인 곳이면 하느님의 임재하심과 그 능력이 얼마나 더 클까?’하는 뜻으로 푼다.
학자들 중에는 오역이기는 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이 그래도 이해하기가 더 쉽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리스어 원문을 토대로 해서 풀 경우, 이것을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말씀의 또 다른 버전이라 보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두세 사람’이 모이는데 예수님이 함께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오로지 ‘하나’이면, 혹은 하나라도, 함께 한다고 했다. ‘오로지 하나이면’으로 이해한다면,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홀로’ 사는 수도자의 삶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제31절
예언자가 고향에서는-선입견의 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의사가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고치지 못합니다.”
BLATZ
(31) Jesus said: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village, no doctor heals those who know him.
문맥과 사용된 낱말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눅 4:24, 막 6:4, 마 13:57, 요 4:44). 이것들과 비교해 보면 『도마복음』에 나오는 말이 가장 간결하다. 학자들 중에는 이런 이유로 도마복음의 상당 부분이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것들보다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언자/선지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고 하면 미래를 미리 알고 말해주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영어로 ‘prophet’이라 할 때 그 그리스어 원어의 어근이 ‘pre+phetes(미리+말하다)’가 아니라 ‘pro+phetes(위하여+말하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는 ‘미리 말하는 자’가 아니라 ‘위하여 말하는 자’ 곧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보면 앞날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 본업은 점쟁이처럼 미래를 알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맡겨주신 말씀, 하느님이 일러주신 원칙과 정의의 삶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요즘은 ‘미리 아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가져다주는 ‘선지자’라는 말보다 ‘예언자’라는 말을 선호하고 표준새번역에서도 ‘예언자’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예언자’를 한문으로 쓸 때도 미리 예(豫)를 써서 ‘豫言者’라 하지 않고 맡길 예(預)를 써서 ‘預言者’라 하는 것이 옳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내게 임하시매’의 경험을 전제로 한다. 의식의 전환을 통해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를 체험한 사람, 일상 쓰는 말로 ‘깨친 사람’이다.
사람의 말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보통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첫째는 ‘로고스(logos)’-말하는 내용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둘째는 ‘파토스(pathos)’-말하는 방법이 정열적이고 힘차야 한다. 셋째는 ‘에토스(ethos)’-말하는 사람의 됨됨이가 신뢰를 받을 만큼 그럴듯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라고 결하면 듣는 사람을 설득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선지자의 경우 고향에서는 이 셋째 요소를 갖추기 힘들다. 아무리 영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로운 메시지를 가지고 힘차게 외치는 선지자가 되었어도 고향에서는 옛날 그 코찔찔이, 발가벗고 개울에서 물장난이나 하고 뛰놀던 아이,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이나 돕던 소년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에 ‘에토스’적 요소가 갖추어질 수 없다. 에토스적 요소가 없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기 마련이다.
물론 선지자, 혹은 영적으로 깨친 이들은 변화된 사람들이다. 조금만 주의 깊이 보면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 확연히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선지자의 어릴 때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머리에 박힌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것이 보이지 않고, 자기들이 과거에 알고 있던 이미지를 새로 찾아온 고향 출신 선지자에게 투영하고 마는 것이다.
한편, 많은 정신적 영웅들이 영적 모험을 감행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처럼 냉대나 심지어 박해까지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신적 영웅들이 천신만고 끝에 발견한 진리를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면, 고향 사람들은 이런 고매한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엉뚱한’ 혹은 ‘뒤집어엎는’ 파격적 말을 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리차드 바크(Richard Bach)가 쓴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경우와 같다. 그는 비상(飛翔)의 비밀을 터득하고 그 황홀한 즐거움을 자기 형제들과 나누기 위해 찾아 가지만, 어선 뒤를 따라 다니며 버린 생선이나 주어먹는 것을 삶의 전부라 믿고 사는 그들은 조나단에게 갈매기 형제단의 질서와 평화를 교란한다는 죄목을 씌워 그를 추방하고 만다.
사실 부처님도 깨침을 얻고 나서 그가 깨친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칠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것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처음부터 선교에 성공적이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크게 환영을 받고, 아버지, 계모, 전 부인, 아들, 사촌들, 친구들을 많이 불가에 귀의하게 했다는 점에서 어느 면으로 세계 종교사에서 이례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의원이 자기 아는 사람을 고치지 못한다.’고 한 구절은 『도마복음』에만 나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도 의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약간 다른 맥락에서 쓰였다. 성경에 나오는 복음서에 의원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진 것은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을 이해할 때 더 이상 병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여기기보다 예수님의 선지자적 기능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볼 수도 있다.
제32절
산 위의 도성- 깨친 이의 모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 세워지고 요새처럼 된 도성이 쓰러지거나 숨겨지지 않습니다.”
BLATZ
(32) Jesus said: A city that is built on a high mountain and fortified cannot fall, nor can it be hidden.
마태복음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5:14)고 했다. 우리가 빛이 되면 산 위에 세운 마을처럼 숨겨질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 『도마복음』에 나오는 구절도 우리의 내면적 변화라고 하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바로 위 제31절에서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환영 받지 못 한다’고 한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언자처럼 영을 받은 사람, 깨친 사람, 내면의 빛을 발견한 사람, 의식의 변화를 받은 사람이, 비록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선입견 없이 보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산 위에 우뚝 세워진 도성처럼 뚜렷하게 보인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여기 『도마복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요새처럼 쓰러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 덧붙였다. 영적으로 거듭나고 성숙한 사람은 사실 어떤 어려움이나 공격을 받아도 내면에 있는 성벽으로 이런 난관이나 공격이나 핍박에 의연하고 늠름하게 대처할 뿐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부언한 것이라 여겨진다.
제33절
지붕 위에서 외치라- 깨친 이의 사명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귀로, 또 다른 귀로 듣게 될 것을 여러분의 지붕 위에서 외치십시오. 누구도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거나 숨겨진 구석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등경 위에 두어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빛을 보게 할 것입니다.”
BLATZ
(33) Jesus said: What you hear with your ear (and) with the other ear, proclaim it on your roof-tops. For no one lights a lamp to set it under a bushel, or to put it in a hidden place; but he sets it on the lamp-stand, that all who go in and come out may see its light.
여러분의 귀로, 또 다른 귀로’하는 말은 필사 과정에서의 실수일 수도 있고, ‘다른 귀’를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귀’, 보통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한문에 ‘성인(聖人)’이라고 할 때 쓰는 ‘거룩할 성(聖)’이라는 글자에 ‘귀 이(耳)’가 들어 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아무튼 이런 귀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라고 했다. 그것이 복음, 곧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 얽매여 고통을 당하던 내가 깨침을 통해 나의 참나[眞我]를 발견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됨으로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하는 소식처럼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소식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 살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대승 불교에서는 보살의 길에서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하는데, 그 제일 처음 실천 사항이 바로 사람들과의 ‘나눔’이다. 전통적인 불교 용어로 ‘보시(布施, dαna)’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재시(財施)로 물질을 나누는 것, 둘째, 무외시(無畏施)로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용기를 주는 것, 셋째, 법시(法施)로 진리를 나누는 것이다. 이 셋 중 물론 셋째 진리를 나누는 것이 가장 훌륭한 나눔이라 본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진리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과 내 교회나 내 교파의 교인 수를 늘리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종교학의 대가로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친 요아킴 와크(Joachim Wach)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 갖는 네 가지 특성 중 한 가지가 그 체험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기막힌 종교적 체험을 했으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한 이사야와 같은 심정으로 그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진리를 나누거나 전한다고 하여, 스스로 깨치지도 못한 사람이 부산하게 쏘다니며 요란을 떠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등불을 켜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기만 하면 된다. 변화된 나의 영적 상태를 구태여 숨기려고 애쓸 필요 없이, 내 속에 밝혀진 내적 빛을 가지고 가만히 자기의 그 모습 그대로만 유지하면 된다. 제 20절 풀이에도 언급된 것처럼 뭔가 한다고 요란스럽게 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이 생각난다.
무엇을 해야 할까보다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성결의 기초를 행위에다 두지 말고 됨됨이에다 두도록 하라. 행위가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성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본질적 됨됨이에 있어서 위대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행위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전도란 변화된 사람의 무위의 위(無爲之爲)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언제나 명심할 일이 있다. 외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 번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심오한 진리, 진주를 돼지에게 주면 돼지는 그것을 짓밟을 뿐 아니라 그것을 주는 사람을 물어뜯어 해친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남을 물어뜯지 말아야겠고, 또 우리에게 있는 작은 빛이라도 함부로 남에게 던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제34절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자의 자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BLATZ
(34) Jesus said: If a blind man leads a blind man, they both fall into a pit.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마 15:14, 눅 6:39 참조) 여기서 우리를 인도하는 ‘눈먼 사람’ 혹은 ‘맹인’은 누구인가? 『도마복음』의 맥락에서 보면 물론 ‘깨침을 얻지 못한 사람’이다. 비록 정규 과정을 다 밟고 어느 종교 집단에서 지도자가 될 자격증까지 받았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으면 그는 우리를 오도하는 영적 소경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것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 3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천국이 하늘에 있다, 혹은 바다 속에 있다 하며 자기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바로 눈먼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제28절에 언급된 것처럼 눈이 멀고 술 취한 것 같은 우리 보통 사람들을 인도한다고 나서서 인도해 가면 결국 그들도 우리도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이처럼 지도자, 인도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 스스로 깨어나는 것, 눈 뜨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지도자는 진정으로 눈이 뜨인 지도자, 깨달음을 얻은 지도자인가? 아무나 따라가면 우리도 결국 그들과 함께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지도자를 선택할 때 사려깊이 선별하는 조심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공화국』이라는 책에 보면, 참된 지도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실재의 세계를 본 사람들이라고 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화를 들려준다. 우리 인간은 모두 쇠사슬에 묶인 채 동굴 속에 갇혀 동굴 안쪽 벽면만을 바라보고 거기에 비친 바깥 세계의 그림자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포로들이라고 한다. 그 중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고 밖으로 나와 실재의 세계를 직접 보고, 그러고 나서야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인도하는 참된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이 절에 나오는 ‘눈먼 인도자’를 반드시 우리를 잘못 인도하는 외부의 인도자라 상정할 필요도 없다. 내 속에서 나를 이끄는 나의 욕심이나 이기심, 변화되지 않은 자아가 결국 나를 구덩이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변화된 자아, 나의 참된 자아만이 나의 삶을 자유와 평화의 삶으로 인도해 줄 수 있기에, 맹목적으로 나의 충동이나 정욕을 따르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라 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눈먼 지도자를 따라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산위에 세워진 성채처럼 우뚝 선 지도자(32절), 등경 위에서 모든 이에게 빛을 비추는 지도자(33절)--‘깨침(gnosis)'을 얻은 지도자가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참된 지도자라는 이야기이다.
제35절
먼저 힘센 사람의 손을 묶어놓고-축귀(逐鬼)의 깊은 뜻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힘 센 사람의 손을 묶어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을 털어갈 수 있겠습니까?”
BLATZ
(35) Jesus said: It is not possible for anyone to go into the strong man's house (and) take it by force, unless he binds his hands; then will he plunder his house.
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속담일 수 있다. 공관복음에도 인용되어 있는데(마 12:29, 막 3:27, 눅 11:21-22), 모두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는 일과 연결시켜 놓았다. 마태복음에 나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이 어느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었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랐지만, 바리새파 사람들만은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이에 예수님이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지면 망하고, 어느 도시나 가정도 서로 갈라지면 버티지 못한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다.”라 대답하고 이어서 여기 이 절에 나온 말을 했다. 전후 문맥으로 보면 결국 예수님이 ‘내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힘 센 귀신의 손을 결박하고서만 할 수 있는 일일 터. 내가 만약 바알세불 같은 귀신의 힘을 빌린 것이라면 귀신이 귀신을 결박하여 내분을 일으키는 셈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내가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힘입어 바알세불의 손을 결박하고 이룬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하는 식 논증의 일부로 인용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아무런 전후 맥락이 없이 달랑 이 말만 나와 있다. 내면적인 것을 강조하는 『도마복음』 전체의 기본 정신에 따라 내면적인 변화와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해 보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값진 것을 되찾아 올 수 있으려면 지금 우리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힘 센 자를 결박해야 한다.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 힘 센 자란 결국 우리를 손아귀에 넣고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와 거기에 따르는 욕심, 정욕, 무지, 자기중심주의, 충동, 악한 성향, 악습 등등이 아닌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제어하지 않고서는 우리 속에 잠재된 값진 삶을 되찾아 올 수가 없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우리의 이런 ‘이기적 자아(ego)’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나 유교에서 말하는 무사(無私)라는 것도 이런 이기적 자아를 없애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 16:25)고 했다. 작은 목숨-‘소문자 life’, ‘소문자 self’를 구하겠다고 안간힘을 하고 있는 이상 큰 목숨-‘대문자 Life’, ‘대문자 Self’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작은 목숨, 작은 자아를 내어놓을 때 비로소 큰 목숨, 큰 자아와 하나가 되어 그것을 찾게 된다. 작은 자아,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 진아(眞我)로 부활하는 죽음과 부활의 역설적 진리를 체득하라는 것이다. 나의 의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쫓아냄, 『장자』에서 말하는 ‘오상아(吾喪我, 내가 나를 여읨)’하는 체험, 이것이 전통적으로 말하는 ‘귀신 쫓아냄(exorcism, 逐鬼)’의 깊은 뜻이 아닐까?
제36절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육신의 입고 벗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BLATZ
(36) Jesus said: Be not anxious from morning to evening and from evening to morning about what you shall put on.
그리스어 사본 조각에 있는 것을 괄호 안에 덧붙여 번역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먹는 것을 두고 무엇을 먹을까, 입는 것을 두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화보다 귀합니다. 여러분에게 입을 것이 없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입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키를 더 크게 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이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옷을 줄 것입니다.]”로 되어 있다. 그리스어 사본은 공관복음(마 5:25-34, 눅 12:22-32)에 나오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콥트어 사본에는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어구는 빠지고 오로지 옷 입는 것만을 강조해서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이유일까?
『도마복음』 전통에서는 옷을 입는다는 것이 육신을 입는다는 뜻이다. 무슨 옷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어떤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또 이 육신을 입든지 벗든지 염려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문자적으로 우리가 일상으로 착용하는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육신의 옷을 입고 벗는 것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생에서의 옷을 벗고 내생에서 무슨 새 옷을 입을까 그렇게 염려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야말로 죽든지 살든지 하느님께 맡기고 그의 뜻과 섭리를 믿고 염려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많이 쓰는 ‘믿음’이란 말은 결국 이처럼 ‘턱 맡김으로 염려에서 벗어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복음서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요한복음서에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 26) 하는 등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결국 ‘믿음의 종교’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신학자 마커스 보그의 분석에 의하면 ‘믿음’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 “남의 말을 참말이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좀 더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확인할 길이 없는 것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른바 ‘assensus’로서의 믿음이다. 이 라틴어 단어는 영어 assent의 어근이다. ‘승인(承認)’이라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믿음의 반대는 물론 ‘의심’이다.
현재 교회에서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승인으로서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면 무조건 모두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근대에 와서야 이런 형태의 믿음이 ‘믿음’으로 강조되기 시작하다가 근래에는 급기야 믿음이라면 바로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 이유는 17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 사상이 발전하고, 이와 더불어 진리를 ‘사실(factuality)’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창조, 노아 홍수 등 사실이라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이런 것들을 ‘사실’이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결국 믿음이란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사실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사실로, 참말로, 정말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가장 보편적 형태의 믿음으로 내려 온 것도 아니다.
둘째, 성경에서, 그리고 17세기 계몽주의 이전에 강조된 믿음이란 ‘턱 맡김’이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하느님을 향해 “나는 하느님만 믿습니다.” 할 때의 믿음 같은 것이다. 이 때 믿는다는 것은 교리 같은 것을 참말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거의 관계가 없다. 이런 식의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 교리나 신조 같이 ‘말’로 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의와 능력을 믿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fiduncia’로서의 믿음이다. 영어로 ‘trust’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신뢰로서의 믿음’ ‘턱 맡기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믿음은,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골이 표현한대로, 천만 길도 더되는 깊은 바다 물에 나를 턱 맡기고 떠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잔뜩 긴장을 하고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더 빨리 가라앉고 말지만, 긴장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물에 턱 맡기고 있으면 결국 뜨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뜨게 하심을 믿고 거기 의탁하는 것이다.
이런 식 믿음의 반대 개념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니라 바로 불안, 걱정, 초조, 두려워함, 앙달함이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근심과 염려, 걱정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려 하신 믿음도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마 6:25-32)하며 하느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믿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늘처럼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와 긴장이 많은 사회에서 우리에게 이런 신뢰로서의 믿음, 마음 놓고 턱 맡김으로서의 믿음은 어떤 진술에 대한 승인이나 동의로서의 믿음보다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느님에 대한 이런 믿음은 그러기에 우리를 이 모든 어려움에서 풀어주는 해방과 자유를 위한 믿음이다.
『도마복음』에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할 때도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충고라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다른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셋째, ‘믿음직스럽다’거나 ‘믿을 만하다’고 할 때의 믿음이다. 내가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음직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라틴어로 ‘fidelitas’라 한다. 영어로 faithfulness라 옮길 수 있다. ‘성실성’으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느님께만 충성을 다한다는 뜻으로 이런 믿음의 반대는 우상숭배이다. 넷째, “봄으로서의 믿음”이다. 이른바 ‘visio’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seeing things as they really are)이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사물의 본성(nature)이나 실재(reality), 사물의 본모습, 실상, 총체적인 모습(the whole, totality)을 꿰뚫어 봄에서 생기는 결과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말하자면, 직관, 통찰, 예지, 깨달음, 깨침, 의식의 변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일종의 확신(conviction) 같은 것이다. 일종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역사관 같이 세계와 삶에 대한 총체적 신념 같은 것이다. 『도마복음』은 ‘믿음’을 강조하지 않지만 이런 ‘봄’으로서의 믿음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깨침’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37절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 발아래 던지고- 이분법적 의식의 초월
그의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언제 당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린 아이들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옷을 벗어 발아래 던지고, 그것을 발로 밟을 때, 여러분은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BLATZ
(37) His disciples said: On what day will you be revealed to us, and on what day shall we see you? Jesus said: When you unclothe yourselves and are not ashamed, and take your garments and lay them beneath your feet like the little children (and) trample on them, then [you will see] the Son of the Living One, and you will not be afraid.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말이다. 여기서 제자들이 ‘당신은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는 사실은, 제18절 풀이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자들이 그 당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하늘에 떠 있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외적 천국을 상정하고 이런 천국이 언제 이르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런 통속적이고 인습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언제’라고 가르쳐 주시는 대신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신다.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 발로 밟으라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엉뚱한 대답을 하셨을까?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처럼, 충격 요법의 하나로 툭 던져 보신 것인가.
부끄럼 없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제 2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옷을 벗고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는 다는 뜻일 수 있다. 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된다는 뜻일 수도 있고, 몸을 벗고 죽는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묻은 때를 다 벗고 에던 동산의 타락 이전의 원초적 인간 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옷을 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를 회복하라는 말에서 그런 암시를 강하게 받는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는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 2:25)고 하고, 그 열매를 먹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창 3:7)고 하였기 때문이다.
주객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을 때는 자신을 대상(object)으로 분리하여 볼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 없기 때문에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할 수 없다. 짐승이나 어린 아기가 벗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도 변화를 받아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서 해방될 때 진정한 초월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제22절 풀이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분법적 의식이 없던 이전 상태로 ‘퇴영(retrogression)’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옷을 벗어 던지고 그것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육체적으로 갓난아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분법적 의식을 벗어나는 것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다시 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때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제3절에 우리가 깨닫기만 하면 우리가 모두 ‘살아 계신 분의 아들들’임을 알게 된다고 한 것을 보면,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본다’는 것도 결국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고도 기절초풍하는 일이 없고, 이런 일을 통해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신과 내가 하나고, 삶과 죽음이 하나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사 43:5)
제38절
나를 찾아도 나를 볼 수 없는 날이-천재일우(千載一遇)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 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찾아도 나를 볼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BLATZ
(38) Jesus said: Many times have you desired to hear these words which I speak to you, and you have no other from whom to hear them. Days will come when you will seek me (and) you will not find me.
이 절의 내용은 예수님도 이집트 신 오시리스(Osiris)나 그리스의 신 디오니수스(Dionysus)나 페르시아 신 미트라스(Mithras)나 시리아의 신 아도니스(Adonis)처럼 하늘에서 왔다가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는 그 당시 보편적이던 신화론적 신인(神人, godman)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그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고,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7:33-34) 이렇게 잠시 동안이나마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들이 그렇게도 오래 동안 갈망하였지만 들어보지 못했던 그런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예사 말씀이 아니니, 찾아도 볼 수 없는 날이 이르기 전에 이런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말씀을 잘 들어 깨달으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을 뵈올 수 있는 것도 우리 앞의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큰 특권이라고 하면서,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마 13:16-17, 눅 10:23-24)고 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물론 직접 보고 들을 수는 없지만, 영의 눈과 영의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인간이 진리를 필요로 할 때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난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실 우리 인간들을 위해 이렇게 이 땅에 나타난 여러 부처님 중 한 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전에도 여러 부처님이 있었고, 또 앞으로 미륵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믿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난 이후 아직 아무 부처님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만 보아도 부처님이 나타나는 시간적 간격이 무척 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이 우리 인간들을 위해 나타나신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그의 진리를 귀담아 들으며 깨침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이나 기타 성현들처럼 위대한 스승을 직접 뵙고 그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무한한 특권이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처럼 그들이 남겨놓은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얻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직접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 당시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도 깨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마음 문을 열고 가르침을 배울 준비를 갖추었느냐 하는 것이다. 준비만 되었으면, 제23절 풀이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오늘 같은 정보화 시대에, 위대한 스승을, 그 스승들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책을 통해, 다른 매체를 통해, 어디나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생래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를 그리스 사람들은 타우마젠(thaumazen)이라 했다. 뭔가 경이롭게 생각하고 호기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지혜를 사랑함’이 바로 ‘philo+sophia’. 이런 열린 마음이 있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제39절
깨달음의 열쇠를 감추고- 뱀과 비둘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들을 가져다가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십시오.”
BLATZ
(39) Jesus said: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taken the keys of knowledge (and) have hidden them. They did not go in, and those who wished to go in they did not allow. But you, be wise as serpents and innocent as doves.
LAYTON
(39) Jesus said,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taken the keys to acquaintance and hidden them. They have neither entered nor let those who want to enter enter. You (plur.), then, 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DORESSE
44 [39]. Jesus says: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taken the keys of knowledge and hidden them: they have not entered, and neither have they permitted <entry> to those who wished to enter. But you, b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마태복음 23장 13절과 누가복음 11장 52절에도 나오는 말이다. 단 이 두 복음에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혹은 율법 교사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하면서 그들을 정죄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 반면, 여기 『도마복음』에는 제자들에게 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어조가 더욱 강하다.
여기서 ‘깨달음의 열쇠’라고 옮긴 말을 한글 개역이나 표준새번역에는 ‘지식의 열쇠’라 번역했다. 물론 ‘그노시스(gnosis)’를 ‘지식’이라 번역할 수 있지만, 우리가 『도마복음』 풀이를 통해 계속 강조한 것처럼, 여기 언급하는 그노시스는 보통의 지식이 아니라 통찰, 예지, 직관, 꿰뚫어 봄 등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나 ‘깨침’이 원의에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를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추었다니, 무슨 뜻인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혹은 율법 교사들은 이런 깨침의 진리에 무지하거나, 비록 무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깊은 차원의 진리를 짐짓 외면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깨침’의 진리를 이야기하거나 그리로 사람들을 인도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런 ‘깨침’의 가르침보다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좌지우지하여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조건 율법에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단순하고 기복적인 차원의 종교만 가르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 수단으로서의 종교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처럼 ‘깨침’의 열쇠를 자기들도 사용하지 않으니 자기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런 열쇠가 있는 줄도 모르는 일반인들도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뱀과 비둘기는 서로 양립 불가한 반대 개념이 아닌가? 아니다. 이 복음서가 쓰여 질 당시 뱀과 비둘기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뱀은 일반적으로 배로 땅에 기는 형태를 가졌을 경우 사람의 발꿈치나 무는 불길한 것,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머리를 하늘로 향해 올라가는 모양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것은 의식의 변화와 치유를 상징하는 좋은 동물이다. 뱀은 특히 허물을 벗기 때문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변화, 좀 더 구체적으로 신체의 최 상층부 에너지 근원(chakra)이 열리면서 이분법적 의식이 초이분법적 의식으로 바뀌는 변화를 상징한다. 이집트 왕들이 머리에 뱀의 모양을 달고 있는 것이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 뱀이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지혜로웠다’고(창 3:1) 한 것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막에서 십자가에 달린 뱀을 쳐다보고 나았다고 하는 것이나, 지금도 의사협회 문양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이 그 이유이다.(좀 더 자세한 것은 Ken Wilber, Up From Eden(Boulder: Shambhala, 1983), 143-45 참조)
비둘기는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결, 순진, 평화, 전령 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성경이 쓰일 당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을 때 ‘성령’(눅 3:22)이, 혹은 ‘하나님의 영’(마 3:17)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다. 오늘 우리가 보통 쓰는 말로 하면 비둘기는 초이분법적 의식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는 말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 둘 다 우리의 의식이 바뀌는 ‘깨침’의 체험을 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깨침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의 그런 사람들을 의존하지 말고, 제자들이 직접 초이분법적 의식, 곧 깨침의 경지로 들어가라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오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런 ‘깨침의 열쇠’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있는지도 모르는 현실이 아닌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 동안 너무 오래 감추다가 이제 아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셈이다. 오늘 우리가 『도마복음』의 가르침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도 이처럼 종교지도자들이 감추거나 잃어버린 ‘깨침의 열쇠’를 다시 찾아 활용하라는 권고 같은 것이 아닐까?
참고: 『도마복음』 전체를 통해 강조하는 ‘깨달음’이나 ‘깨침’의 진리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실천하기 힘 드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 화엄 불교 전통에 의하면 부처님도 깨침을 얻어 부처님이 된 다음 그 깨침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가르쳐보았는데, 사람들이 전혀 이해를 못해 마치 ‘귀머거리나 벙어리’ 같이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일단 그 가르침을 옆으로 하고 『아함경』에 나오는 가르침 같이 아주 단순하며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해 정도가 깊어지면서 점점 어려운 가르침들을 가르치고, 그의 깨침 직후에 가르쳤던 심오한 진리는 마지막에 가서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이 바로 『화엄경』(華嚴經)에 포함된 진리라는 것이다. 어느 종교에서나 이런 신비적 차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깊은 차원을 아예 배척하거나 말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틈새시장이 있듯, 이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데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제40절
포도 줄기가 아버지와 떨어져- 하나 됨의 회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 줄기가 아버지와 떨어져 심어져, 튼튼하지 못하기에, 뿌리째 뽑혀 죽고 말 것입니다.”
BLATZ
(40) Jesus said: A vine has been planted outside of the Father; and since it is not established, it will be plucked out with its roots (and) will perish.
여기서 뿌리째 뽑혀 죽고 말 ‘포도 줄기’가 무엇을 의미할까? 해석에 따라 그것이 우선 이 세상이라 풀 수 있다. 이 세상이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라 본다는 것이다. 또 그것이 『도마복음』의 기별과 같은 깊은 차원의 내면적 기별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 심지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나아가 그런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나 종교 제도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도 아버지와 하나 됨이라는 근본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뿌리째 뽑혀 말라 죽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형식적 종교, 외형적 종교의 한계와 숙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푼다는 뜻이다.
그러나 좀 더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여기의 포도 줄기란 결국 나의 이기적 자아(自我, ego)를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나의 나됨을 아버지와 떨어져서 설정하는 행위는 결국 자멸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헛된 자아를 떠나 나를 하느님 안에 심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본래의 나를 찾아 더욱 풍성한 삶을 살고 더욱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과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시 1:3)
제41절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부익부 빈익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받을 것이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작은 것도 빼앗길 것입니다.”
BLATZ
(41) Jesus said: He who has in his hand, to him shall be given; and he who has not, from him shall be taken even the little that he has
‘부익부(富益富)빈익빈(貧益貧)’-인간 사회에 공통적인 원칙인가? 공관복음에 있는 말이기도 한데, 마태복음 25장 29절에는 ‘달란트’ 비유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로 나와 있다. 어느 부자가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놓고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는 이야기.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돈을 잘 굴려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돈을 땅을 파고 숨겨 두었다고 했다. 주인이 그에게 화를 내면서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가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도 마저 빼앗을 것이다.”고 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 26절에 나오는 ‘므나’ 비유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 12절과 누가복음 8장 18절에도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과 관련된 말로 되어 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가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물어보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마치 가진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는 격이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도마복음』은 전후 문맥이 없이 이 말만 달랑 나와 있기에 어떻게 적용되는 말인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달란트 비유나 씨앗 비유나 천국의 비밀과 관계되는 말이라 이해할 경우,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힌다. 우리가 받은 달란트, 우리 속에 있는 씨앗,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하느님의 불꽃, 우주 의식, 신령한 빛을 깨닫고 이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라 여길 줄 아는 사람은 삶이 더욱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런 요소들마저 시들고 메말라 없어지고 마는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제42절
나그네가 되라-인생은 나그네 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가 되십시오.”
(42) Jesus said: Become passers-by!
『도마복음』에만 있고, 또 콥트어로 세 단어밖에 되지 않아 『도마복음』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 따라서 삶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라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제 21, 27, 56, 80, 110, 111절 등에도 비슷한 생각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염세적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모조리 다 거부하고 오로지 세상을 혐오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세상에서 줄 수 있는 즐거움을 고맙게 여기고 즐기면서 살아가지만, 이 삶이 우리의 궁극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유유히 길을 계속하느냐, 혹은 갈 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 삶에 달라붙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길을 떠난다, 혹은 집을 떠난다는 것은 세계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가르침 중 기본적인 것의 하나라 볼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다섯 가지 가장 중요한 의무를 ‘다섯 가지 기둥’이라 하는데, 신자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메카를 다녀오는 ‘순례(hajj)’를 그중 하나로 지정하였다. 조셉 켐벌의 좬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좭이라는 책이나 선불교에서 유명한 ‘십우도(十牛圖)’도 모두 종교적 수행의 시작이 집을 떠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지적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에 나오는 실낙원, 출애굽, 바벨론 포로 등 성경의 큰 이야기들도 모두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정신적 순례를 예표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구속의 전 과정 자체도 하나의 여정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집을 떠난다는 것은 물리적, 지리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습적이고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생활방식이나 사유방식을 뒤로 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향해 출발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외적 공간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내적 공간(inner space)에 자유롭게 노님이다. 장자의 표현을 쓰면 ‘북쪽 깊은 바다(北溟)’에서 남쪽 ‘하늘 못(天池)’로 나는 붕새의 ‘붕정(鵬程)’이요 ‘소요유(逍遙遊)’이다.
참고: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 22:21)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하는 노래 가락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제43절
당신은 누구십니까?-나무와 열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유대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사랑하지만 그 열매를 싫어하든가 열매를 사랑하지만 그 나무를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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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His disciples said to him: Who are you, that you say these things to us? <Jesus said to them:> From what I say to you, do you not know who I am? But you have become like the Jews; for they love the tree (and) hate its fruit, and they love the fruit (and) hate the tree.
공관복음에는 없는 말이다. 이 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실까 하는 질문을 했다. 제자들의 놀라움을 표현한 말인가? 혹은 그들의 무지를 드러낸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무지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는 말을 듣고도 그가 누구인 줄을 모르다니 말이 되느냐 하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자들이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과 같이 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에는 나무를 사랑하면서도 열매를 싫어하는 것, 혹은 열매를 사랑하면서도 나무를 싫어하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새길 수 있겠지만, 우선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를 사랑했으면 열매도 사랑하고, 열매를 사랑했으면 나무도 사랑하는 것이 정상이거늘 유대인들은 나무와 열매를 분리해서 따로 생각해서 나무를 싫어하면서 열매는 좋아하고 열매는 좋아하면서 나무는 버리는 것 같은 정신분열증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유대인처럼 나무와 열매를 따로 떨어져 생각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 같은 훌륭한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를 보고도 그 가르치는 분의 진정한 신원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새삼 ‘당신이 누구십니까?’하니 말이 되느냐 하는 나무람인 셈이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사랑한다면 그가 누구인지도 알고 그를 따라야 할 것 아니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고도 예수님을 배격하니 그런 유대인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약간은 반유대적 정서를 반영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뒤에 나오는 제 44절에 아버지나 아들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은 좋게 여기면서 영적 체험을 두려워한다거나, 영적 체험을 좋게 생각하면서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것,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영적 체험을 받아들이는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말로 풀 수는 없을까?
제44절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에바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모독하는 사람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아들을 모독하는 사람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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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Jesus said: He who blasphemes against the Father will be forgiven, and he who blasphemes against the Son will be forgiven; but he who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either on earth or in heaven.
공관복음에도 어구는 약간 다르지만 대략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막3:28-29, 마 12:12:31-32, 눅 12:10) 모두 ‘성령을 모독하면’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다만 『도마복음』서의 특징이라면 아버지를 모독하는 사람마저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리도 엄중하여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일까?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 혹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세밀한 소리를 거절한다는 뜻이 아닌가? 내면의 미세한 소리에 귀기우리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내적 성장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런 성령의 속삭임을 외면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성장하기만 하면 아버지를 모독한 것, 아들을 모독한 것, 그 외에 어떠한 잘못도 모두 스스로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던가를 알게 되어 고치며 계속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전제 조건인 셈이다. 그것이 제 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잘 해석하면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란 이 도마복음의 말씀을 통해 들려지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전제 조건을 거부하는 데에는 더 이상 가능성도 희망도 없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는 것이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는 ‘열어 놓음’이다. 예수님이 귀 먹은 사람을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 ‘탄식’하시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에바다(열리라)’하셨다는데(눅7:34), 영적으로 귀가 먹은 상태, 아니 마음이 강퍅한 상태에 있는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여는 것’이다. 『도마복음』에서 계속 강조하듯,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는가?
제45절
덤불과 가시는 좋은 과일을 맺을 수 없기에-자기중심주의의 극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좋은 과일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은 그의 곳간에서 좋은 것을 가져오지만 나쁜 사람은 그 마음속에 있는 그의 곳간에서 나쁜 것을 가져옵니다. 그 마음에 가득 넘치는 것에서 그는 나쁜 것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BLATZ
(45) Jesus said: Grapes are not harvested from thorn-bushes, nor are figs gathered from hawthorns, [f]or they yield no fruit. [A go]od man brings forth good from his treasure; a bad man brings forth evil things from his evil treasure, which is in his heart, and he says evil things, for out of the abundance of his heart he brings froth evil things.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속담이었다. 공관복음에도 비슷한 말이 인용되고 있다.(마7:16-20, 12:33-35, 눅6:43-45). 속담이란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일 수 있다. 여기서 마지막에 ‘그 마음에 가득 넘치는 것에서 나쁜 것을 가져온다.’는 구절을 덧붙인 것을 보면, 특히 가시나무 같고 가시 엉겅퀴 같은 우리의 변화되지 않은 마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의식으로 가득한 마음에서는 포도나 무화과 같이 아름다운 것이 나올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악한 것만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악을 경계하고 그 악의 근원을 지적하는 셈이다.
세상을 나와 너로 가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보다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시기, 증오, 질투, 경쟁, 분쟁, 투쟁, 전쟁 등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겪는 모든 악과 비극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모든 종교에서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라고 가르친다. 부처님이 제일 먼저 가르친 가르침도 바로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와 ‘무아(無我, anαtman)’의 교리였다. 유교도 물론 무사(無私)를 강조한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종교를 ‘자기중심주의의 극복’이라 정의했다. 먹어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제일 조심해서 먹어야 할 것은 ‘마음먹기’임에 틀림이 없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채운 마음에서는 선한 것이 나온다고 한다. 사랑, 평화, 협력, 공존, 상생, 조화, 동정, 공평, 부드러움 등은 모두 이렇게 이기적 자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나의 나라는 가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를 아뢸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제46절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어린 아이의 위대함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누구 앞에서도 눈을 아래로 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나 어린 아이처럼 되면 [하느님의] 나라를 알게 되고, 또 요한보다 더욱 위대하게 됩니다.”
BLATZ
(46) Jesus said: From Adam to John the Baptist there is among the children of women none higher than John the Baptist, for his eyes were not destroyed (?). But I have said: Whoever among you becomes small will know the kingdom and will be higher than John.
LAYTON
(46) Jesus said, "From Adam unto John the Baptist there has been none among the offspring of women who has been more exalted than John the Baptist, so that such a person's eyes might be broken. But I have said that whoever among you (plur.) becomes a little one will become acquainted with the kingdom, and will become more exalted than John."
DORESSE
51 [46]. Jesus says: "From Adam to John the Baptist, among those who have been born of women, there is n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But for fear that the eyes <of such a one> should be lost I have said: He who among you shall be the small<est> shall know the Kingdom and be higher than John!"
제15절에는 여자에게서 나지 않은 사람을 보거든 엎드려 경배하라고 했다. 육체적으로 난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영과 불로 다시 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난 자연인 중 가장 위대한 세례 요한보다 더욱 위대함으로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이야기였다. 여기 제 46절에서 이런 생각을 되풀이 한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하느님의 율법이나 윤리 강령을 어긴 사람들, 특히 그런 지도자들을 향해 그 길을 돌이키라고 외쳤다. 아직 ‘성령(공기)’과 ‘불’로 세례를 주는 일과는 무관하였다. 『도마복음』에 의하면 이런 율법주의적·윤리적 차원은 종교적 수행 과정에서 필요한 하나의 단계일 수는 있지만 아직 최상급의 종교적 차원이 되지 못한다. 율법주의적으로, 윤리적으로 보아 세례 요한처럼 완벽한 사람도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과 불로 거듭남으로 어린 아이처럼 된 사람, 모든 편견과 선입견에서 해방된 아이 같은 사람에 비하면 가장 작은 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또 제 22절에 언급된 것과 같이 젖 먹는 아기 같아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분법적 사고에서 해방되어 양극을 조화시키고 일치시키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런 순진무구한 초이분법적 의식 구조에서만, 성경적으로 표현하여,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새로 지음을 받아 어린아이 같이 된 새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제47절
동시에 두 마리 말을 탈 수 없고- ‘냐냐’와 ‘도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동시에 두 마리 말을 탈 수 없고 두 개의 활을 당길 수 없습니다.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한 주인을 존경하면 다른 주인을 경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오래 익은 포도주를 마시고 곧바로 새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헌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그것이 헌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익은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포도주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낡은 천 쪼가리로 새 옷을 깁지 않습니다. 그것이 새 옷을 찢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BLATZ
(47) Jesus said: It is not possible for a man to ride two horses or stretch two bows; and it is not possible for a servant to serve two masters, unless he honours the one and insults the other. No one drinks old wine and immediately desires to drink new wine. And new wine is not poured into old wineskins, lest they burst; nor is old wine poured into a new wineskin, lest it spoil. An old patch is not sewn on a new garment, for a rent would result.
그 당시 알려졌던 속담을 모아놓은 것이다. ‘두 마리 말을 한꺼번에 탈 수 없고, 두 개의 활을 한꺼번에 쏠 수 없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공관복음에도 있는데(마 6:24, 눅 16:13), 아무런 해석을 붙이지 않은 『도마복음』과는 달리,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요즘은 컴퓨터에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좋게 여긴다.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도 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법 ‘마음 다함(mindfulness)’, ‘마음 챙김’, 혹은 ‘정념(正念)’ 수련에서는 한 가지 일을 할 때 거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거기에만 몰두하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이런 능력이 부족한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컴퓨터와 사람은 다른 모양이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자기도 물위를 걷게 해 달라고 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자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풍랑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자 예수님이 곧 그의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고 건져 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하셨다.
이 때 ‘의심하다(distazο)’라는 낱말의 그리스어 본래 뜻은 ‘두 쪽을 보다’라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으면 되었을 터인데 거센 풍랑을 보면서 두 마음이 들었다. 이처럼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의심’이다. 의심을 뜻하는 영어의 ‘doubt’나 독일어의 ‘Zweifel’도 어원적으로 ‘두 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독일어에서는 Zweifel을 더욱 심하게 한다는 뜻으로 ‘Verzweifelung’이라고 하면 ‘절망’이라는 뜻이 된다.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나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나 둘 중 하나를 타고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이 둘을 한꺼번에 타려고 하면 결국 허둥지둥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계속하고 있으면 절망이다. 여기서도 이 말이든 저 말이든 하나를 타고, 이 주인이든 저 주인이든 하나를 골라 섬기면 문제가 없을 터인데, 둘을 한꺼번에 하겠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약 1:6-8)고 했다.
그런데 이 절을 보면 마치 ‘이 말도 저 말도’ 하는 ‘도도(both/and)’주의가 아니라 ‘이 말이냐 저 말이냐’ 하나를 골라잡아야 한다는 ‘냐냐(either/or)’주의를 강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마복음』에서 지금까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강조하고, 심지어 바로 앞 절에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보는 어린 아이 같은 시각을 가지면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어찌 여기서는 양자택일, 이항대립 같은 것을 강요하는 모순된 입장을 보이는가?
흔히 ‘이것도 저것도’하는 도도주의를 취하면 모든 것을 무원칙적으로 다 허용하는 것이라 잘못 알고 있다. 다원주의적인 태도는 모든 것을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입장이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도도주의나 다원주의도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도도주의나 다원주의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다원주의나 도도주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 이런 견해도, 저런 견해도 모두 일리 있는 것이라 인정하고 둘을 다 받아들임으로 사물의 진면목을 더욱 뚜렷이 알 수 있는 깨침을 얻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다원주의 혹은 도도주의다. 그러나 그런 깨침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원주의나 도도주의와 상관없는 일이다. 코끼리를 만진 장님들이 서로 가지가 경험한 바를 제시하면 그것을 모두 일리 있는 말이라 인정하는 것이 다원주의적 입장이지만, 그중 하나가 자기 말만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적으로 글렀다고 주장하면서 너희가 다원주의 입장을 취하려면 나의 이런 말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변한다고 생각해보라. 그의 말을 받아들이면 다원주의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다원주의란 그런 ‘독단’을 배격하자는 것이지 이런 독단까지도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두 말을 한꺼번에 탈 수 없다거나 두 활을 한꺼번에 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깨침을 거부하는 삶과 깨침을 추구하는 삶, 혹은 깨침을 얻기 전의 삶과 깨침을 얻은 후의 삶을 서로 대비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물론 두 가지 삶 중에서 깨침을 추구하는 삶, 그래서 깨침을 얻고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 낡은 가죽 부대와 새 포도주, 새 옷과 낡은 천 조각에 대한 것도 모두 새로움과 낡음을 대조하고 이 둘은 양립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공관복음서에는 바리새파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의 논쟁과 관련해서 이런 말들이 낡은 종교로서의 유대교와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를 대비시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마 9:16-17,막 2:21-22, 눅 5:26-39) 그러나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아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차별화한다는 의식이 만개하기 전의 서술로서 오로지 깨침을 거슬리는 일체의 낡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버릴 것을 촉구하는 말로 쓰인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쟁기를 잡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눅 9:62)
참고: 공관복음에서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넣을 수 없다고 했다. 새 포도주가 발효해서 팽창하면 낡은 가죽부대는 그 압력에 견디지 못해 터지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 『도마복음』에는 묵은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맛있는 포도주를 아직 가죽 냄새가 나는 새 가죽부대에 넣으면 포도주에 좋지 않은 맛을 더하여 포도주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또 공관복음서에서는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빨래를 하면 새 천 조각이 줄어들면서 헌옷을 잡아당기기 때문에 헌 옷이 더욱 크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서는 반대로 헌 천 조각을 새 옷에 대고 깁지 말라고 했다. 필사 과정에 혼돈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둘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제48절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하나 됨의 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그들이 산을 향해 ‘여기서부터 옮겨 가라’고 하면 그것이 옮겨 갈 것입니다.”
BLATZ
(48) Jesus said: If two make peace with one another in this one house, they will say to the mountain: Be removed, and it will be removed.
LAYTON
(48) Jesus said, "If two make peace with one another within a single house they will say to a mountain 'go elsewhere' and it will go elsewhere."
53 [48]. Jesus says: "If two people are with each other in peace in the same house, they will say to the mountain: 'Move!' and it will move."
『도마복음』에서는 집이 우리 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71, 98, 103 등) 따라서 이 절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원리의 화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내 영혼과 하늘의 영이 서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화해(reconciliation), 하나 됨(at-one-ment), 재결합(re-union)을 통해 양쪽이 어우러질 때 얼마나 큰 힘이 나올 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약간 다른 차원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내 속에 있는 ‘이기적 자아’와 ‘참 자아’ 혹은 소문자 자아(self)와 대문자 자아(Self)가 충돌하는 것을 경험한다. 바울은 이런 경험을 두고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함’(행 7:18), 혹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두 가지 자아, 두 가지 ‘나’가 충돌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바울과 마찬가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행 7:18-24)하고 절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가 우리의 일상적 실존의 상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변화를 받아 이기적 나, 비본래적인 나, ‘제나’가 신적인 존재로서의 나, 본래적인 나, ‘얼나’에 귀속하므로 둘 사이에 충돌이 없어지고 조화스럽게 움직임으로 무한한 힘과 활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산을 움직이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하는 식으로 읽는 것이다.
다시 이 절을 좀 다른 시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왜 싸우는가?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견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 틀린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두 의견은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싸울 이유가 없어진다. 커피 컵이 위에서 보면 동그랗지만 정면에서 보면 직사각형이다. 동그랗다고 보는 사람과 직사각형으로 보는 사람은 싸울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서로에게서 배움으로 자기의 안목을 넓혀 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상사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하나로 7세기 통일 신라 시대의 원효(元曉)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중국으로 가다가 밤에 해골 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유명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그의 화쟁론(和諍論)이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이 화쟁론이라는 것이 바로 두 가지 상반되는 것 같은 견해 사이에 모순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를 보라는 이야기이다. 이를 현대적 용어로 옮기면 바로 다원주의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좬열반종요(涅槃宗要)좭라는 책에서 법신(法身)이 유색(有色)이냐 무색(無色)이냐 하는 대립된 두 가지 견해를 놓고 어느 견해가 맞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일방적으로 한 면만 고집(定取一邊)”하면 두 견해가 모두 틀린다고 했다. 그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일견 상반되는 것 같은 견해들을 놓고, 원효는 언제나 어느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하거나 독단화하면 결국 오류를 범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 입장을 ‘보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이 모든 상반된 견해들이 실상(實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데 기여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는 코끼리 이야기가 다시 나오지만, 어느 장님이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다고 하는 말은 코끼리의 실상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님이 자기의 일방적이고 단편적 견해를 절대화하여 자기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장님들을 모두 이단시하고 박멸할 대상으로 본다면 심각한 오류에 빠져 들고 만다. 따라서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다, 혹은 바람벽처럼 생겼다 하는 대립적인 생각은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는데, 맞고 틀리고를 결정하는 잣대는 결국 다원주의적 태도에서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느냐, 혹은 획일주의적 입장에서 자기의 독단적 주장만을 유일한 진리로 절대화하느냐 하는 데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사는 세상이라 상상해 보라. 코끼리에 다른 면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우리 주위에 코끼리의 다른 면이 동시에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뿐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결코 서로 정죄하지 말고 같이 앉아 각자 서로가 발견한 코끼리의 일면들을 분명하고 확실한 말로 이야기하고 나누어 가짐으로 코끼리의 실상에 더욱 가까운 그림에 접근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진지성이 요구될 뿐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성숙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산을 보고 움직이라 하면 산인들 안 움직이고 버틸 수 있겠는가?
제49절
홀로이며 택함을 받은 이 -홀로 아니면서 홀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홀로이며 택함을 받은 이는 행복합니다. 나라를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서 와서 그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BLATZ
(49) Jesus said: Blessed are the solitary and the elect, for you will find the kingdom, for you came forth from it, (and) you will return to it again.
LAYTON
(49) Jesus said, "Blessed are those who are solitary and superior, for you (plur.) will find the kingdom; for since you came from it you shall return to it."
『도마복음』에는 계속 ‘홀로 됨’ 혹은 ‘홀로 섬’을 강조하고 있다.(16, 23, 48, 75절 참조) 하나 됨, 단독자, 홀로와 홀로됨(alone with the Alone) 등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 제16절 풀이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홀로’라는 뜻의 그리스어 ‘모나코스(monachos)’에서 수도사라는 ‘monk’나 수도원이라는 ‘monastery’라는 낱말이 파생되어 왔다고 한다. 모두가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어야 행복하고, 그래야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성경에는 사막에서 홀로 지낸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모세도 광야에서 40년간 홀로 있었다 하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고, 바울도 사막에서 2년간 홀로 지냈다고 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하나로 꼽히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도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자기나 다른 모든 사람이 사막의 교부들처럼 사막으로 가서 홀로 독처하는 것이 참된 종교인으로서 실행해야만 하는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그의 결론은 ‘사막’이란 결국 지리적인 장소이기보다 정신적인 자세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회를 등지고 산이나 사막으로 나가 독신으로 사는 것도 좋을 것이지만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정신적 사막’에서 수행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도 훌륭한 일이라 여긴 것이다.
간디도 어려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았지만 40대 후반에 이르러 힌두교에서 강조하는 ‘브라마챠랴’를 실천함으로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금욕적 삶을 살았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도 결혼(結婚)을 했으니 ‘해혼(解婚)’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이가 드신 다음에는 부인과 같은 집에서 ‘오누이’처럼 살면서 ‘홀로 사는 삶’을 실천했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칼릴 지브란이 지은 『예언자』 중 “결혼에 대하여”라는 장이 생각나기에 여기 인용한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사랑이 속박이 되게는 하지는 마십시오.
사랑이 두 분 영혼의 해변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십시오.
서로의 잔을 채워주십시오. 그러나 한쪽 잔에서만 마시지는 마십시오.
서로에게 자기의 빵을 나누어주십시오. 그러나 한쪽 조각만을 먹지는 마십시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십시오. 그러나 각각 혼자이게 하십시오.
거문고 줄들이 비록 같은 노래로 함께 울릴지라도 모두 각각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 마음을 붙들어 놓지는 마십시오.
저 위대한 생명의 손길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서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지는 마십시오.
성전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있고,
참나무 삼(杉)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릴 지브란 지음, 오강남 옮김, 현암사, 2003, 30-31쪽.)
본문에 의하면 이렇게 하나 됨, 홀로됨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라’를 찾는데, 이 나라는 바로 우리가 나온 근원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궁극적 목적지이기도 하다고 한다. 플라톤이나 『도덕경』에서 모든 것이 근원에서 나와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감’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제50절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새로운 정체성의 발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빛에서, 빛이 스스로 생겨나, 확고히 되고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 그 곳에서 왔다’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그것이 너희냐?’하고 묻거든 말하십시오. ‘우리는 그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선택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너희 속에 있는 너희 아버지를 입증할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그것은 움직임과 쉼’이라고.
BLATZ
(50) Jesus said: If they say to you: Whence have you come?, say to them: We have come from the light, the place where the light came into being of itself. It [established itself], and it revealed itself in their image. If they say to you: Who are you?, say: We are his sons, and we are the elect of the living Father. If they ask you: What is the sign of your Father in you?, say to them: It is movement and rest.
이것은 『도마복음』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도록 하기 위한 간단한 교리문답 형식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도마복음』 식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심지어 그런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그런 사람들이 힐난조로 물어올 때 자기들은 ‘빛에서 온 사람들, 빛의 근원에서 나온 사람들, 빛의 자녀요, 아버지의 택함 받은 사람들’임을 분명하고 당당하게 밝히라는 이야기다. 빛이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때 ‘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문법적으로 모호하다.
그러나 이 절을 역사적 맥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단순히 믿는 믿음의 단계를 지나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깨달음의 단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물’로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로지 ‘첫 단계’에 불과하므로 이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 스스로도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마 3:11, 눅 3:16) 세례를 주리라고 예언했는데, 바로 이런 세례를 받아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로 세례를 받았을 때는 하느님을 창조주나 심판자로 믿고,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살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제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되고 자기들을 ‘하느님의 자녀’이며 ‘상속자’(갈 4:7)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질투하고 진노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새로운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받는 제2의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라 불렀는데,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은 ‘놓임’이나 ‘해방’, ‘해탈’을 뜻하는 말이었다. (Elaine, Beyond Belief, pp. 137 이하 참조.)
이런 제2의 세례를 받는 방법은 일률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세례를 주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형식을 취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은 세례 받기 전 일종의 세례 문답 같은 것이 선행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마복음』 50절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디서 왔는가 묻거든 ‘빛에서 왔다’고 하라는 말을 듣고 있으니 연상되는 것이 있다. 선불교 전통에서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 638-731)이 오조 홍인(弘忍)을 찾아갔을 때 홍인은 그에게 “어디서 왔고 무엇을 구하는고?”하고 물었다. 혜능이 자기는 영남 신주에서 깨침을 구하고자 왔다고 했다. 홍인은 영남 사람이라면 오랑캐들인데 어찌 깨침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혜능이 이에 한 대답이 유명하다.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따로 있겠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따로 없습니다. 제가 오랑캐의 몸으로는 스님과 같지 않지만 불성으로는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빛, 혹은 우리의 근원인 빛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마복음』 여기저기에서(11, 24, 33, 61, 77, 83)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빛’, ‘모든 것 위에 있는 빛’, ‘빛을 비추라’는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데 비해 여기서는 ‘우리가 빛에서 왔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하는 등 우리의 ‘근원’이요 ‘바탕’으로서의 빛을 강조하고 있다. 빛에 대해서는 77절 풀이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정도로 지나간다.
마지막 부분에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증거가 ‘움직임과 쉼’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성경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1:2), 엿새 동안 창조 사업을 다 마치신 다음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2:2)고 했는데, 이런 원초적 ‘움직임과 쉼’이 바로 하느님의 내재하심의 증거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둘째, 더욱 근본적인 것은 본래 움직임이 없던 근원으로서의 궁극존재가 움직여 만물이 생기게 되고 이 만물이 다시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 움직임이 없는 쉼의 상태에 이른다고 하는 이 엄청난 우주의 순환 원칙이 신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말로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풀면, 내 속에 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깊은 평강과 쉼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하는 말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움직임과 쉼’을 세 가지로 푼 것은 각각 우주창생론적(cosmogonical), 존재론적(ontological), 심리적(psychological) 측면으로 본 셈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제51절
언제 쉼이 있겠으며 언제 새 세상이…-실현된 종말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유대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사랑하지만 그 열매를 싫어하든가 열매를 사랑하지만 그 나무를 싫어합니다.”
BLATZ
(51) His disciples said to him: On what day will the rest of the dead come into being, and on what day will the new world come? He said to them: What you await has come, but you do not know it.
LAYTON
(51) His disciples said to him, "When will the repose of the dead come to pass, and when will the new world come?" He said to them, "That (repose) which you (plur.) are waiting for has come, but for your part you do not recognize it."
DORESSE
56 [51]. His disciples said to him: "On what day shall rest come to those who are dead, and on what day shall the new world come?" He said to them: "This <rest> that you wait for has (already) come, and you have not recognised it."
여기서 ‘쉼’이란 구원과 같은 말이다. 앞 절에서 본 것과 같이 우리의 본래적인 근거인 궁극실재로 되돌아가 그것과 다시 하나가 됨으로 얻을 수 있는 평화와 조화와 안식의 상태를 가리킨다. 영적으로 깨치지 못한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아 부평초처럼 떠다니며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 첫 부분에서 한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오 주님,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저희를 지으셨으니,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쉼이 없사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이런 개인적 구원과 함께 신천지가 도래할 우주적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물어보고 있다. 학자들 중에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예수님의 선포를 놓고, 예수님이 세상의 종말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격론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의 이론은 크게 두 가지 대조적인 입장으로 나누인다. A.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님이 자기 당대에 종말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주장하고, C. H. 다드 교수는 예수님이 미래에 올 종말을 기다리지 않고, 종말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 이 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이나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종말이 이미 이르렀으니 별도의 종말을 기다리지 말라고 한다. 종말이 이미 이르렀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천지개벽 같은 우주적 대사건으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깨침을 경험함으로 가능한 내적 변화 같은 것을 통해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부활하는 개인적인 내면의 개벽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내적 개변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어느 면에서 이런 독특한 종말관 때문에 『도마복음』이 정경으로 채택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제52절
예언자들이 말했는데- 영원한 현재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24명의 예언자들이 말했는데, 그들이 모두 당신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는 산 사람은 무시하고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BLATZ
(52) His disciples said to him: Twenty-four prophets spoke in Israel, and they all spoke of you. He said to them: You have abandoned the living one before your eyes, and spoken about the dead.
앞 절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51절은 ‘미래’에 대한 생각에 정신을 팔지 말고 그 미래라는 것이 지금 여기에 와 있으니 현재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고, 52절은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현재를 중요시하라는 말이라 볼 수 있다. 둘 다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셈이다.
‘24명의 예언자들’이란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던 히브리어 성경 중 예언서의 수와 동일한 숫자이다. 공관복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각하기 위해 그가 바로 예언서에서 예언한 분, 예언서에서 예언한 대로 행하는 분임을 입증하려 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한 모든 일을 다 이루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24:44) 특히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신 대로’라는 말을 계속한다.(마 1:12, 2:15, 2:17 등) 여기 이 절에서 제자들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24명의 예언자들이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선생님은 정말 특별하신 분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쉼을 주고 새 세상을 가져다주실 분이 아니십니까?’하는 식으로 물어본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왜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산 사람을 무시하고 과거의 예언자들 같이 죽은 사람들을 들먹이는가 하고 나무란다. 이 말은 과거의 예언자들이 한 말이 아니라 지금의 그가 하고 있는 말이 더 중요하다는 것, 혹은 과거의 예언자들이 아니라 지금의 그가 더 큰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중세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고백한 것과 같이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now, nunc aeternus)’를 체험하는 것이다.
제53절
할례가 쓸 데 있습니까?-형식주의 타파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할례가 쓸 데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례가 유익했다면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머니 배에서 이미 할례 받은 아이들을 출산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받는 참된 할례가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
BLATZ
(53) His disciples said to him: Is circumcision useful or not? He said to them: If it were useful, their father would beget him from their mothers (already) circumcised. But the true circumcision in the Spirit has proved useful in every way.
DORESSE
58 [53]. His disciples said to him: "Is circumcision useful or not?" He said to them: "If it was useful, their father would beget them from their mother <already> circumcised. But <only> the true circumcision in the spirit gives all profit!"
할례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식(儀式)이었다.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는 것에 의해 결정될 정도로 중요한 의식이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침례나 세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남자라면 모두 할례를 받았다. 초대 교회에서 비유대교 이방인들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혹은 받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 절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은, 제14절에서 형식적인 금식, 기도, 구제를 배격했는데, 여기서는 특히 그런 형식적 의례로서의 육체적 할례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위트 있는 말로 분명히 하고 있다. 육신으로 받는 할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아이들이 아주 배 속에서부터 할례를 받고 나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참된 할례는 영적 할례임을 강조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육체의 일부분을 도려내는 육체적인 할례가 아니라 자기의 의식적 결단에 의해 마음속에 있는 한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는 그런 할례를 말하는 셈이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도려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직도 죽지 않고 성성히 살아 있는 자기의 이기적인 마음, 옛 사람의 찌꺼기가 아닐까?
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롬 2:28)고 하고, 또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6:15)고 힘주어 말했다.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이 바로 『도마복음』의 예수님이 말하는 영적 할례가 아닌가. 옛 사람을 뒤로 하고 새 사람으로의 탄생을 고하는 것이다.
제54절
가난한 사람은 행복- 청빈의 특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LATZ
(54) Jesus said: Blessed are th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heaven.
이른바 ‘팔복’ 중 처음 나오는 복이다.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에서는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 6:20)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의 산상 설교에서는 여기다 ‘마음이’라는 말을 덧붙여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고 하였다. 누가복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데 반해, 마태복음은 가난을 영적인 것으로 추상화시키고 있는데, 본래 예수님은 경제적 가난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으리라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목할 것은 여기 『도마복음』에도 ‘마음이’라는 말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말이 있든 없든, 가난 자체가 복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부에 무조건 집착하느냐 않느냐, 지나칠 정도로 돈에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행복의 조건으로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집착과 욕심을 도려내는 것이 앞에서 말한 ‘마음의 할례’를 뜻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중심주의의 찌꺼기가 말끔히 치워져 없어진 곳에 ‘하늘나라’가 들어올 자리가 마련된 셈이고, 이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사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유교 용어로 해서 소인배가 탐하는 이(利)가 아니라 군자가 추구하는 의(義)를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외적 빈부에 상관하지 않고, 또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다 해도, 이런 청빈(淸貧)이야 말로 참된 청복(淸福)의 근원이라 여기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도마복음』의 경우 ‘홀로’ 수행함을 행복한 삶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자발적 가난’, 곧 재산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가난일 가능성이 높다.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종교에서는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이처럼 있는 재물이라도 뒤로 하고 걸식하거나 탁발승으로 천하를 주류하며 살아가는 것을 종교적 삶의 이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이나 성 프란체스코의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 본래 재산이 있었지만 스스로 가난해지셨는지 모르지만, 재산이 많은 어느 부자 젊은이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마 19:21)고 충고한 것을 보면 자발적 가난을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즘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른바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 한창이다. 우리말로 ‘성공신학’이나 ‘잘 살아보자 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믿으면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른바 남보란 듯 잘 살려면 잘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하는 말이나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어쩌면 이런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경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은 대실수일 뿐 지금은 ‘부자는 복이 있나니’가 훨씬 더 실감나고 현실성 있는 말이라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번영신학에 기초한 신앙을 가질 때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빠져들 수 있는 몇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 우리가 가진 신앙은 나의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 위한 한갓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둘째, 가난은 잘 믿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가난하면 불편함뿐만 아니라 이제 죄책감까지 함께 감내해야만 한다. 셋째 더욱 문제되는 것은 부함이 잘 믿은 덕이므로, 일단 부하게 되면 부를 모으면서 있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부정한 수단까지 다 정당화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 아닌가.
심지어 최근에는 경제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도 있다. 경제가 인생사의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물론 배고픈 사람들에게 당장 먹을 것을 구해 주는 것 같은 ‘경제 활동’이라면 그것이 최우선의 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빈익빈 부익부,’ 철저히 천박한 자본주의적 재테크에 따라 땅 투기나 기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오로지 돈을 모으겠다는 일념으로 살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받들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제55절
자기 부모를 미워하고- 우선 순위의 확정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이들은 내 제자가 될 수 없고,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내가 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BLATZ
(55) Jesus said: He who does not hate his father and his mother cannot be a disciple to me. And (he who does not) hate his brothers and sisters and take up his cross like me, will not be worthy of me.
마태복음(10:37)에는 부모와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고, 누가복음(14:26)에는 부모와 자식뿐 아니라, 형제자매, 아내와 자기 자신까지 사랑하면 안 된다고 했다. 『도마복음』 제99절과 101절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그런데 정말로 부모나 형제자매나 처자식을 모두 미워해야 할까?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님 스스로도 어느 부자 청년에게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마 19:19)하지 않았는가?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은 부모에게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바로 앞 절에서 재물에 집착할 위험을 경계했는데, 집착이란 재물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관계에도 가능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셈이다. 무엇에 집착한다는 것은 그것에 절대 가치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그것을 ‘궁극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으로서, 이를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우상숭배’라 할 수 있다. 우상숭배는 우선순위의 혼동이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고,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하는 무지의 결과다. 이 절은 결국 가족을 절대화하여 우상처럼 떠받드는 우상숭배에서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로 둔갑시키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모든 종교적 여정의 출발점은 지금껏 내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일상적인 것을 뒤로 한다는 뜻이다. 이를 신화적 용어로 하면 ‘집을 떠남(leaving home)’이다. 십우도(十牛圖)에서 소년이 집을 떠나고, 세계의 여러 영웅 신화에서 모든 영웅들이 집을 떠난다. 부처님도 집을 떠났고, 예수님도 집을 떠났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출가(出家)를 하거나 수도의 삶을 산다.
참고: 사실 이런 거창한 종교적 의미를 그만두고라도 십대 때는 부모를 미워해야 한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 발달상 누구나 십대가 되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단계가 되면 자동적으로 부모와 형제들을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부모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고 그 주위에서 맴돌면 이른바 족내혼(族內婚)이 되어 열등한 자식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부모를 미워하여 집을 떠나야 족외혼(族外婚)이 가능하여 좋은 자식을 낳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도 모르게 부모를 미워할 때 미워하여 떠났다가 다시 사랑해도 될 때 돌아와 사랑하게 되도록 코딩이 되었다는 이론이다. 이 경우 부모를 미워하는 것은 윤리적 당위의 문제라기보다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라는 뜻이다.
제56절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시체를- 새로운 발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시체를 찾은 사람입니다. 시체를 찾은 사람은 세상보다 더 값진 사람입니다.”
BLATZ
(56) Jesus said: He who has known the world has found a corpse; and he who has found a corpse, the world is not worthy of him.
DORESSE
61 [56]. Jesus says: "He who has known the world has fallen into a corpse; and he who has fallen into a corpse, the world is not worthy of him!"
지금껏 종교적 형식이나 재물이나 가족 관계 같은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 다음, 여기 이 절에서는 그것을 종합적으로 매듭짓고 있는 셈이다.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좇아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만, 세상이 결국 ‘시체’, 죽음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세상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된다.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 자유를 얻는다. 이런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은 이 허망한 세상보다 더욱 위대한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제80절에도 ‘세상을 알면 몸을 알게 된 사람, 그 사람은 세상보다 더 값진 사람’이라고 했고 또 제110, 111절에도 세상을 버리거나 세상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지 말라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플라톤이나 힌두교나 불교에서도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실재성이 없는 현상 세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중고등학생 때 영어에서 제일 긴 단어라고 하면서 외운 단어가 기억난다. 스물아홉 글자로 된 floccinaucinihilipilification. ‘부나 세상사를 뜬 구름처럼 여김’이라는 뜻이다. 세상이나 물질세계에 대한 이런 식 태도를 두고 염세주의적, 혹은 도피주의적 세계관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세상을 무조건 버리거나 무조건 미워하라는 뜻보다는 세상을 절대적 우선 가치로 떠받드는 태도, 세상을 우상화하는 자세를 경계하라는 이야기로 보면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상 세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세상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거기 달라붙지 않는 태도, 이른바 영어로 해서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제57절
가라지 씨를 뿌리고- 옥석(玉石) 분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를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밤에 그 원수가 와서 좋은 씨 사이에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농부는 일꾼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게 하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걱정입니다. 추수 때가 되어 가라지가 드러나게 될 때 뽑아 불태울 것입니다.’”
BLATZ
(57) 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man who had [good] seed. His enemy came by night and sowed weeds among the good seed. The man did not allow them to pull up the weeds. He said to them: Lest you go and pull up the weeds, (and) pull up the wheat with it. For on the day of the harvest the weeds will be manifest; they will be pulled up and burned.
여기 나오는 농부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인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인지 헷갈리게 하는 말이다. 아무튼 정상적인 농부라면 좋은 씨에서 나오는 싹과 가라지 씨에서 나오는 싹을 구분할 줄 알고, 가라지 싹이 뿌리를 내려서 좋은 싹으로 갈 영양분을 다 뺏어가기 전에 일찌감치 가라지 싹을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다 자라서 추수할 때 가라지를 골라 불태운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좋은 씨가 땅의 영양분이나 햇빛을 받고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가라지가 나오자마자 없애줘야 한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했을까? 마태복음(13:24-30)에도 나오는 이 이야기를 보통 교회에서는 교회에 좋은 교인도 있고 나쁜 교인도 있지만 나쁜 교인을 골라 쫓아낼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두면 심판의 날 그들이 모두 솎아져 불에 들어갈 것이라는 식으로 푼다. 이런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도마복음』에서는 최후 심판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적어도 여기에서는 이런 식의 해석이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앞 몇 절에 ‘세상’이나 ‘재물’이나 ‘가족’ 같은 것을 절대시하는 집착(執着)을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 절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밭에 본래 신성(神性)이라는 선한 씨앗이 들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이런 집착이나 욕심 같은 나쁜 씨가 들어와 뿌려졌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나쁜 마음을 당장 말끔히 제거하면 좋겠지만, 무리하게 서두르다가는 자칫 깨달음을 향해 가는 영적 생활 자체가 크게 손상될 수 있다. 조금 기다려 이기심, 집착, 욕심, 염려, 앙달함, 열등감 등 이런 부정적인 마음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스스로 발견하고 자연히 이를 제거하려 하는 마음을 갖는 순리의 과정을 밟으라는 말로 풀면 어떨까? 다음 절에 ‘아픔을 아는 자는 행복’하다고 하는데, 이런 식의 아픔을 알 때 집착의 사슬을 좀 더 쉽게 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제58절
아픔을 겪는 사람은 행복하다-아픔의 축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생명을 찾았습니다.”
BLATZ
(58) Jesus said: Blessed is the man who has suffered; he has found life.
LAYTON
(58) Jesus said, "Blessed is the person who has labored and found life."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의미상 가장 가까운 상응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른바 팔복 중 하나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10)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다음에 나오는 제68절 “여러분이 미움과 핍박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여러분이 박해를 받는 곳을 그들은 찾지 못할 것입니다.”고 한 말에 더 가까운 말이라 볼 수 있다. 공관복음은 아니지만 베드로전서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벧전 3:14) 둘 다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르게 살려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받게 될 박해와 핍박을 이야기하고 이로 인해 겪게 되는 아픔을 오히려 복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여기 좬도마복음좭의 말씀도 그런 외부적 조건에 의해 받게 되는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또 몇몇 학자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여기에 나오는 아픔을 ‘애씀/수고함(toil/labor)’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 깨침을 얻기 위해 열심히 힘쓰는 사람, 심지어 힘센 신 헤르쿨레스 같이 영웅적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여기서 말하는 아픔이라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 상황에서 오는 근원적 아픔이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했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고통을 겪어야 비로소 이런 초청에 실감나게 응할 수 있고, 그래야 예수님께 나아가 쉼을 얻는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부처님도 깨침을 얻은 직후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설파하며 그 처음의 진리로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꼽았다. 삶이 괴로움이라는 근본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원인이 집착이나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가르침이다.(졸저, 좬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좭, pp. 58 이하 참조.)
어느 면에서 종교적 삶은 ‘아픔’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완전한 상태로 변화하려는 것이 종교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완전에의 희구도 있을 수 없고, 물론 종교적 추구나 구도의 삶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아픔을 자각하는 것은 축복이요, 이런 자각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된다. 병이 있으면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인정해야 나음을 바라고, 그리하여 나음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서양 말에서 ‘구원(salvation)’이란 말도 어원적으로 고침, 나음, 완전히 됨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의 삶이 병들었음을 아는 것이 바로 ‘생명을 찾음’이다. 고통을 통해 현실의 불완전성이나 모자람을 알고 일단 절망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병 혹은 생명을 향해 가는 여정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삶으로의 여정에 나갈 수 있는 것은 괴로움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제59절
살아 있을 동안 살아 계신 이를 주목하라-기회의 활용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살아 계신 이를 주목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입니다. 그 때는 살아 계신 이를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BLATZ
(59) Jesus said: Look upon the Living One so long as you live, that you may not die and seek to see him, and be unable to see him.
LAYTON
(59) Jesus said, "Consider the one who is alive while you (plur.) are alive, lest you die and then seek to behold that one - and you will not be able to behold."
DORESSE
64 [59]. Jesus says: "Seek to see Him who is living, while you are living; rather than to die and to seek to see Him <only> when you can no longer see Him!"
공관복음에는 없는 말이다. 여기서 ‘살아 계신 이’란 물론 예수님이다. 서언에 ‘살아 계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란 말이 나온다. 제52절에서도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는 산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고 할 때, 그는 옛 사람에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 진정한 삶을 살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한 계속해서 이처럼 새 생명을 얻어 참된 삶을 살아가시는 분, 예수님을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제 38절에 “여러분이 나를 찾아도 나를 볼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고 했다. 그가 잠시 동안 우리와 함께 있겠지만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니 그를 열심히 찾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 이 절에서는 그가 어디로인가 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죽기 때문에 그를 볼 수 없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예수님을 주목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인데, 죽으면 다시는 살아 계신 이를 볼 수 없을 것이니 지금 살아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느니, 기회는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는 식이다.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죽은 다음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식의 생각을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불교에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는 거북이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은 망망대해에 조그만 구멍 하나가 뚫린 작은 나무 조각이 물결에 따라 떠다니는데, 눈 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물위로 머리를 내밀다가 우연히 그 나무 조각에 뚫린 구멍 속으로 머리를 내밀게 되는 확률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기회를 귀히 여기라는 뜻을 극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이다. 32절 풀이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살면서 살아 있을 동안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기회가 아니다. 이생이 허망하게 지나가면 이미 ‘때는 늦으리’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 보아, 여기 ‘살아 계신 이’를 내 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 신성, 나의 참 사람, 참 나로 풀어도 좋을 것이다. 내 속에 ‘살아 계신 이’는 사라질 염려는 없지만, 내가 이를 알지 못하고 그대로 죽으면 찾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살아 있을 동안 찾아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살아 계신 이를 ‘믿으라’하지 않고 ‘주목하라’ ‘들어라’하는 말이 좬도마복음좭의 특징이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깨닫고 발견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60절
쉴 곳을 찾아 잡아먹히지 않도록-참 삶의 조건
예수께서 한 사마리아인이 양을 끌고 유대로 가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이 왜 양을 [묶어서] 갑니까?”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잡아서 먹으려는 것입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양이 살아 있을 때는 그가 그것을 먹지 못하지만 그것을 죽이고, 그것이 시체가 된 다음에만 먹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쉴 곳을 찾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시체가 되어 먹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BLATZ
(60) <They saw> a Samaritan carrying a lamb, who was going to Judaea. He said to his disciples: (What will) this man (do) with the lamb? They said to him: Kill it and eat it. He said to them: While it is alive he will not eat it, but (only) when he kills it (and) it becomes a corpse. They said to him: Otherwise he cannot do it. He said to them: You also, seek a place for yourselves in rest, that you may not become a corpse and be eaten.
LAYTON
(60) <THEY SAW> a Samaritan carrying a lamb as he went into Judaea. He said to his disciples, "This <. . .> . . . the lamb." They said to him, "So that he might slaughter it and have it to eat. He said to them, "He will not eat it while it (or he) is alive, but rather when he has slaughtered it so it becomes a carcass." They said, "Otherwise, he cannot do it?" He said to them, "You (plur.), too, seek for yourselves a place of repose, lest you become a carcass and be devoured.
DORESSE
[60. Doresse 64 continued.] Just then a Samaritan was going into Judea carrying a lamb. He <=Jesus> said to His disciples: "What <will> this man <do> with the lamb?" They answered: "He will kill it and eat it!" But he said to them: "He will not eat it as long as it is still alive, but only if he kills it and it becomes a corpse." They said to him: "In no other way will he hurt it!" <Then> he said to them: "You yourselves, then, seek a place of rest so that you do not become corpses and are eaten!"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사본에 구멍이 몇 군데 있어서 뜻이 확실하지 않은 절이다. 유대인의 음식물 규례에 의하면 양을 잡으면 피를 완전히 빼고 나서 먹을 수 있다. 피는 생명이니 생명을 취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피를 완전히 뺀 상태의 양이 여기서 말하는 ‘시체’에 해당된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결론이다. 양이 살아 있을 때는 먹지 못하지만, 죽은 몸이 되고 생명의 피가 없어진 고깃덩어리가 되면 먹히고 마는 것처럼, 우리도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얼이 나간 산송장처럼 살지 말고, ‘쉴 곳을 찾아 언제나 살아 있음을 유지함으로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이다.
좬도마복음좭에서 ‘쉼’이란, 앞 50절, 51절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구원’을 뜻한다. 영원한 근원으로 돌아가 그것과 다시 하나가 됨으로 얻을 수 있는 평화와 안식의 삶이다. 깨달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런 상태에 머무는 한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따라서 살아있는 양을 그대로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이런 상태에서 참 생명을 누리고 살면 잡아먹힐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바로 앞 절에서 ‘살아 있는 이를 주목하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했는데, 살아 있는 이를 주목하지 못하여, 그의 말씀을 듣고 깨치지 못한 사람은 살아도 죽은 사람, 예수님을 통해 깨침을 받아야 참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제61절
당신은 누구시기에-빛과 어두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한 사람은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살 것입니다.” 살로메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특별한 이로부터 오신 것처럼 내 자리에 앉아 내 상에서 드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완전한 분으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받기까지 했습니다.” 살로메가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말합니다. 완전한 사람은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갈라진 것은 어둠으로 가득합니다.”
BLATZ
(61) Jesus said: Two will rest upon a bed; one will die, the other live. Salome said: Who are you, man, whose son? You have mounted my bed and eaten from my table. Jesus said to her: I am he who comes forth from the one who is equal; I was given of the things of my Father. <Salome said:> I am your disciple. <Jesus said to her:> Therefore I say: If he is equal, he is full of light, but if he is divided, he will be full of darkness.
LAYTON
(61) Jesus said, "Two will repose on a couch: one will die, one will live. Salome said, "Who are you, O man? Like a stranger (?) you have gotten upon my couch and you have eaten from my table." Jesus said to her, "It is I who come from that which is integrated. I was given (some) of the things of my father." <. . .> "I am your female disciple." <. . .> "Therefore I say that such a person, once integrated, will become full of light; but such a person, once divided will become full of darkness.
DORESSE
65 [61]. Jesus says: "Two will lie down there on one bed: one will die, the other will live." Salome says: "Who art thou, man; from whom hast thou <come forth,> that thou shouldst lie on my couch and eat at my table?" Jesus says to her: "I am he who has been brought into being by Him who is equal <to me:> I have been given what belongs to my Father!"—"I am thy disciple!" Because of that, I say this: When <a person> finds himself solitary, he will be full of light; but when he finds himself divided, he will be full of darkness.
첫 문장과 비슷한 말은 공관복음서에도 나온다.(마 24:40-41, 눅 10:21-22) 종말의 날에 하나는 구원을 받고 다른 하나는 멸망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 이 절에는 종말이나 심판과 관계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 절을 차라리 앞 절에 붙은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언제나 살아 있어 먹힘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에 이어, 겉으로 보면 별 다를 것이 없이 보이는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어도 한 사람은 깨달음을 얻어 참 삶을 살고 있기에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미망에 빠져 살고 있기에 살아있어도 산 사람이 아니라 결국은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풀 수 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지만 한 침상에서 완전히 다른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동상이명(同床異命)’이라 할까.
여기 나오는 ‘살로메’는 마가복음 16장 1절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제3일 새벽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료를 가지고 갔던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등장하는 세 여인 중 하나이다. 이 절에서는 살로메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 당시는 식사를 할 때 식탁 주위의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다. 라틴어로 ‘manducare’라는 동사는 본래 ‘비스듬히 눕다’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먹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 전후 문맥으로 보아 불청객으로 와서 이런 식으로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살로메는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인가, 또 누구로부터 온 사람이기에 이처럼 무례하게 내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가 따지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 신분을 캐묻는 살로메에게 예수님은 ‘나는 완전한 분으로부터 온 사람’이라 하면서 자기의 내면적이고 근원적인 정체성을 밝힌다. ‘완전한 분’라는 말은 풀이에 따라 ‘동등한 분’ 혹은 갈라짐이 없이 ‘하나인 분’ 혹은 ‘하나(一者)’라 할 수도 있다. ‘동등한 분’이라 함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요한복음(5:18, 10:30)이나 빌립보서(2:6)의 기독론과 같은 기독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갈라짐이 없이 ‘하나인 분’이라면 지금까지 계속 말해온 것처럼 분리되지 않은 궁극실재로서의 하느님으로부터 온 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하느님에게서 온 분일 뿐 아니라 그에게서 뭔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번역자에 따라서는 여기서 받은 것을 ‘제자들’이라 풀기도 한다. 제자들도 자기처럼 아버지와 하나였고, 또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엄청난 선언을 듣고 살로메는 자기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한다. 여자도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어서 예수님은 ‘완전한 이’는 빛으로 채워지고, 갈라진 이는 어둠으로 채워진다는 진리를 말한다. 원초의 ‘하나’는 빛이지만, 이 빛으로부터 분리되면 어둠이 있을 뿐이라는 좬도마복음좭의 기본 진리를 천명하는 셈이다.
제62절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알지 못하도록-비밀의 내용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비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내 비밀을 밝힙니다. 여러분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여러분의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BLATZ
(62) Jesus said: I speak my mysteries to those [who are worthy of my] mysteries. What your right hand does, let not your left hand know what it does.
LAYTON
(62) Jesus said, "it is to those [worthy] of [my] secrets that I am telling my secrets. Do not let your (sing.) left hand understand what your right hand is doing.
DORESSE
66 [62]. Jesus says: "When I tell my mysteries to [. . .] mystery: [what] your right hand does, let your left hand not know <that> it does it."
예수님의 비밀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밝혀준다고 하는 말은 좬도마복음좭 서문에도 나왔고, 또 공관복음서 여기저기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마13:11, 마 4:11, 눅 8:10) 그리스도교 초기 전통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밀의적(esoteric) 성격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받아 깨달을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셈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마태복음 6장 3절에도 나온다. 여기서는 자선을 베풀 때 위선자들처럼 남의 칭찬을 받으려고 ‘나팔을 불지 말고’ 조용히 남모르게 하고 이를 숨겨두라는 윤리적 교훈의 말로 주어졌다. 그야말로 우리의 선한 행위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순리를 따라 물 흐르듯 이루어지는 경우라면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무슨 특별한 행위라 의식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의식할 수도 없고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알아차릴 일도 없다. 대략 이런 뜻이다.
그런데, 여기 좬도마복음좭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을 ‘예수님의 비밀’과 연관시키고 있다. 자선을 할 때 남모르게, 혹은 자연스럽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비밀의 말씀을 전할 때 쥐도 새도 모를 정도로 엄격하게 비밀을 지키며 오로지 그 비밀을 받을 자격이 갖추어진 사람에게만 전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오른 쪽에 속하는 사람들만 알아야 할 비밀을 왼쪽 손에 속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선한 일을 남모르게 하라는 식의 윤리적 교훈이 아니다. 종교적 영역에서는 표층적 차원과 심층적 차원이 있고, 심층적 차원의 진리를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공개하지 말라는 지시사항에 해당되는 셈이다. 이를 뒤집으면, 마음을 열고 준비하고 있으면 기필코 예수님이 가르치는 비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제63절
부자 농부는 그날 밤 죽고-인간 계획의 허망함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나는 돈을 들여 씨를 뿌리고 거두고 심고, 내 소산물로 창고를 가득하게 하겠다. 그러면 내게는 모자랄 것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계획이 있었지만 그 농부는 그날 밤 죽고 말았습니다. 귀 있는 이들은 들으십시오.”
BLATZ
(63) Jesus said: There was a rich man who had many possessions. He said: I will use my possessions to sow and reap and plant, to fill my barns with fruit, that I may have need of nothing. Those were his thoughts in his heart; and in that night he died.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앞 절에 이어서, 예수님의 비밀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이 부자 농부를 등장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경제적 관심을 궁극 관심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비밀을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비유와 비슷한 비유가 누가복음 12장 16-21절에도 나온다. 다른 점은 누가복음의 농부는 이미 많은 수확을 거두어 그것을 쌓아둘 ‘창고’를 다시 크게 지으려 계획하고, 지은 다음에는 자기 영혼을 향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들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는 반면, 여기 좬도마복음좭의 농부는 이제 새로 씨를 사서 그것을 뿌리고 거둔 다음 창고를 가득 채우겠다는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차이는 누가복음에는 하느님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묻고,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느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고 하면서, 부해졌다고 거들먹거리면 천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까지 내려주는 데 반해, 좬도마복음좭에서는 농부가 죽게 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윤리적 교훈을 덧붙이지도 않은 채 그 농부가 그냥 죽었다는 말로 끝낸다.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죽을 때가 되었기에 죽었다. 단 이렇게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두 경우 모두 삶을 오로지 재물을 모으는 데 낭비하는 것은 올바른 삶을 사는 일이 못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재물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에는 그 평생이 너무나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이른바 요즘 최고로 인기 있다고 하는 ‘경제 제일주의’나 ‘성장 제일주의’가 하느님 보시기에는 못마땅하다는 경고의 말씀인 셈이다. 경제를 섬기고 떠받들고 있는 한 예수님의 비밀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처럼 대지에만 발을 굳게 붙이고 서있는 이들에게는 ‘천국의 비밀’ 같이 일견 구름 잡는 듯한 고매하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관심 밖의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언제나 비밀로만 남을 것이다.
제64절
손님을 초청했으나-우선순위의 전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님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잔치가 준비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손님들을 초청했습니다. 종은 처음 사람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상인 얼마가 내게 빚을 졌는데, 그들이 오늘 저녁에 오기로 되어 있어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러 가 보아야 하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집을 샀는데, 내가 하루 종일 나가 있어서 시간이 없네.’ 종은 또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어 내가 피로연을 준비해야 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나는 밭을 샀는데 세를 받으러 가야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그 종은 돌아가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께서 잔치에 초청한 사람들이 모두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네가 보는 사람은 모두 데리고 와서 내 잔치에서 먹게 하라.’ 장사하는 사람들과 상인들은 아버지의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BLATZ
(64) Jesus said: A man had guests; and when he had prepared the dinner, he sent his servants to invite the guests. He went to the first, and said to him: My master invites you. He said: I have money with some merchants; they are coming to me this evening. I will go and give them my orders. I ask to be excused from the dinner. He went to another (and) said to him: My master invites you. He said to him: I have bought a house, and I am asked for a day. I shall not have time. He went to another (and) said to him: My master invites you. He said to him: My friend is about to be married, and I am to arrange the dinner. I shall not be able to come. I ask to be excused from dinner. He went to another, he said to him: My master invites you. He said to him: I have bought a farm; I am going to collect the rent. I shall not be able to come. I ask to be excused. The servant came back (and) said to his master: Those whom you have invited to dinner have asked to be excused. The master said to his servant: Go out to the roads, bring those whom you find, that they may dine. Traders and merchants [shall] not [enter] the places of my Father.
왜 이 주인은 사람들을 일찌감치 초청하지 않고 잔칫날이 되어서야 급히 기별을 했을까? 본문에 나온 것으로 판단하면 초청받은 사람들의 불참 이유와 미안해하는 마음은 조금도 흠잡을 것이 없다.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선약(先約)이 있을 경우 무슨 특별한 이유도 말하지 않고 저녁이나 먹으러 오라는 이런 초청을 정중히 사절하는 것.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왜 문제인가? 본문을 가만히 보면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핑계가 하나 같이 경제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첫째 사람은 빚 갚으려는 사람이 온다니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둘째 사람은 새로 집을 샀기 때문에, 셋째 사람은 친구의 결혼이 있어서, 넷째 사람은 밭에서 나오는 세를 받으러 가야하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친구 결혼식은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 친구와 서로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이라면 역시 경제적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 절에서 부자 농부처럼 경제적 관심에 마음이 쏠린 사람들은 경제적 이득이 없는 곳에서 잔치 상을 차리고 오라는 초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경제적 이익에 비하면 잔치에서 얻을 수 있는 사귐, 깨침, 깨달음 같은 추상적인 가치, ‘예수의 비밀’ 같은 것은 신통치 않거나 별 볼일 없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비경제적인 시간 낭비일 뿐이다.
노자 좬도덕경좭 제35장에 보면 “음악이나 별미로는 지나는 사람 잠시 머물게 할 수 있으나 도에 대한 말은 담박(淡泊)하여 별맛이 없습니다.”고 했다. 교포 사회에서도 투자 안내, 부동산 박람회, 진학 세미나, 이 세상에서도 복 많이 받고 죽어서도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부흥회 등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심오한 진리니 통찰이니 하는 것을 이야기하자고 하면 사람이 별로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절의 결론, “장사하는 사람들과 상인들은 아버지의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고 한 것이다. 물론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상인들이 다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부적격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그것을 생업으로 삼고 열심히 일하는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문제는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다른 모든 가치, 특히 영적 가치를 거기에 종속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경제 제일주의, 심지어 믿는 것도 잘 살아보기 위해서나 믿는다는 그런 식의 삶이 문제이다. 이런 삶의 방식으로는 초대에 응할 수가 없다.
의도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이와 비슷한 비유가 마가복음 22장 1절-14, 누가복음 14장 16-24에도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임금(=하느님)이 아들(=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고 자기 신하들(=유대인들)을 초청했지만 그의 종들(=선지자들)을 죽이고 초청을 거절해서, 왕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길에서 다른 이들(=이방인들)을 초청한 것으로 되어 있고, 나중 길에서 초청되어 온 사람 중 하나가 예복을 입지 않고 와 주인의 징벌을 받는 것(=심판)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 비유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갈등이라는 역사적 정황에 적용시킨 셈이다. 누가복음 이야기도 좬도마복음좭과 달리 세 사람을 초청하고, 또 결론으로 처음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덧붙인다. 초청에 응답하지 않은 데 대한 징벌이라는 뜻을 강하게 풍기는 점이 다르다.
제65절
포도원 소작인들이 주인 아들을 죽이고-과잉 물욕의 결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이 있어 이를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주었습니다. 농부들은 거기서 일하고 그 사람은 그들로부터 소작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종을 보내 농부들이 포도원에서 나온 이득을 그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농부들은 그 종을 잡고 때려 거의 죽게 했습니다. 종은 돌아가 그의 주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주인이 말했습니다. ‘아마도 종이 그들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 종도 때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내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내 아들에게는 잘 대해 줄 것이다.” 농부들이 그가 포도원을 상속 받을 상속자임을 알고 그들은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BLATZ
(65) He said: A good man had a vineyard; he leased it to tenants, that they might work in it (and) he receive the fruits from them. He sent his servant, that the tenants might give him the fruits of the vineyard. They seized his servant, beat him, (and) all but killed him. The servant went away (and) told his master. His master said: Perhaps <they> did not know <him>. He sent another servant; the tenants beat the other also. Then the master sent his son. He said: Perhaps they will have respect for my son. Those tenants, since they knew that he was the heir of the vineyard, they seized him and killed him.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공관복음서 세 곳 모두에 나오는 비유다.(막 12:1-8, 마 21:33-39, 눅 20:9-15) 이 절은 좬도마복음좭서 일부가 공관복음서보다 먼저 쓰였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대표적인 절이기도 하다. 공관복음서들은 이 이야기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냈지만 그들을 홀대하므로 결국은 그의 아들 예수를 보냈는데, 그마저 죽였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공관복음은 특히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고 하여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임을 당한 사실과 연계되도록 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것과 같이 각색된 이야기는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유대인들에 대한 악감정이 생긴 이후 자기들의 반유대인 정서를 본문에 삽입시킨 결과라 볼 수 있다.
좬도마복음좭에서는 물론, 앞 절에 나온 잔치 초대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반유대교적 낌새가 전혀 없다. 좬도마복음좭의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역사적 긴장이나 갈등 관계를 가정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경제적 가치에 눈이 멀면,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을 등한히 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등 무슨 험악한 일이든 다 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이야기로 나와 있을 뿐이다. 이렇게 과잉된 물욕에 희생된 사람은 물론 제 62절 이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비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제66절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고-가치관의 전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을 보여주십시오.”
BLATZ
(66) Jesus said: Show me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rejected; it is the cornerstone.
공관복음서에서는 포도원 주인이 자기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의 소작료를 제 때에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마 21:40-43, 막 12:9-11, 눅 20:15-18 참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전의 악한 소작인들이 유대인들이고, 버린 돌은 죽임을 당한 예수님으로서, 결국은 그가 부활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머릿돌이 되었다는 뜻을 전하려 하는 것이다.
좬도마복음좭에는 부활하신 예수라고 하는 뜻이 없다. 더욱이 마태복음에서처럼, 유대인들에게서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마21:43)이라는 식으로 유대인들을 정죄하려는 뜻이 전혀 없다. 단순히 물욕에 눈이 어두우면 그 소작인들처럼 앞뒤 분간도 못하고 귀중한 것,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비밀’을 배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나아가 예수의 비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내다 버린 그 예수의 비밀이라는 것이 우리가 정말로 귀히 여겨야 할 모퉁이 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면 돼지는 발로 밟아버리지만 그것이 아름다운 여인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목걸이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참고: 좬도마복음좭 전체에서 구약을 인용한 것은 여기 한 군데 뿐이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ben’, ‘돌’은 ‘aben’이다. 죽인 아들 ben을 모퉁이 돌 aben과 연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제67절
자기를 모르면-나를 아는 앎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BLATZ
(67) Jesus said: He who knows the all, (but) fails (to know) himself, misses everything.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공관복음에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마16:26, 막8:36, 눅9:25)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전 13:12)고 했다. 여기서는 자기 목숨이나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아는 앎’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사실 소크라테스를 통해 많이 알려진 델포이 신전의 신탁,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앎과 자기 스스로를 아는 앎이 그것이다. 누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까 만은 아무튼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런 일반적 앎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통찰이나 직관 같은 앎이 있다. 초월적인 혜안(慧眼)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둘째 종류의 특수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첫째 종류의 일반적 앎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일반적 앎을 기초로 하여 굳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인습적 지식을 ‘알음알이’ 혹은 ‘분별지(分別智)’라고 하여 위험시한다. 불교뿐만 아니라 좬도덕경좭 47장에도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심지어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앎을 추구하라고 하고,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덜 알게’ 되니 조심하라고 했다. 곧 이어 48장에서도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지만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일손(日損)’의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일상적 지식을 쌓느라 부산하게 쏘다닐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 깊은 내면적 성찰을 통해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 나의 본래의 나를 깨닫는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미래학자 토플러(Alvin Toeffler)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가 금방 ‘한물간(obsolete)’ ‘지식(knowledge)’, 이른바 ‘obsoledge’가 되어 폐기처분해야 할 것으로 변하는 마당에 그런 것에 연연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앎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앎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잘못 아는 앎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앎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알고 있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앎을 두고 중세 신비주의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도 무지하고 아테네 사람들도 무지하지만 자기와 아테네 사람들과의 차이는 자기가 자기의 무지를 알고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무지가 바로 ‘박학한 무지’인 셈이다.
제68절
미움과 핍박을 받으면 행복-전화위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미움과 핍박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박해 받지 않을 곳을 찾을 것입니다.”
BLATZ
(68) Jesus said: Blessed are you when you are hated and persecuted, and they will find no place where you have been persecuted.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른바 ‘팔복’의 마지막 조항에 해당한다(마 5:10-11, 눅 6:22 참조). 물론 공관복음에 나오는 해당 구절보다 훨씬 간략하다. 앞의 58절의 고난 받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과 비슷한 말이기도 하다. 둘째 문장은 공관복음서에 해당 절도 없고, 오기되었을 가능성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디코닉(DeConick)의 해석을 따랐다.
이 절은 물론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으로 외부인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로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 좬도마복음좭에서는 그것이 언젠가는 박해받지 않을 곳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국이 곧 박해 받지 않을 곳이란 뜻인가? 미움이나 박해를 받아도 상관하지 않고 의연해질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 육신적인 고통에 초연할 수 있는 영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 이런 것인가? 바울은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롬 12:14)라 했다. 박해를 통해 이런 경지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일까?
제69절
자신의 마음속에서 박해 받는 사람은 행복-내면적 박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들 마음속에서 박해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아버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행복합니다. 원하는 사람마다 그 배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BLATZ
(69) Jesus said: Blessed are those who have been persecuted in their heart; these are they who have known the Father in truth. Blessed are the hungry, for the belly of him who desires will be filled.
앞 절에서 말한 외부로부터 받는 박해에 이어 여기서는 마음속에서 받는 박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내면적인 박해를 통해 아버지를 아는 진정한 깨침을 얻게 된다고 했다. 좬도마복음좭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말로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대목이다. 마음속에서 받는 박해란 무엇일까?
자기의 이기적 자아와의 싸움이 아닐까? 교만과 정욕과 욕심 등 우리 내부에서 우리를 못 살게 하는 요소들이다. 2세기 말에 살았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도 박해는 외부에서 오는 박해가 있는 반면 가장 고통스럽고 심각한 박해는 내면적 박해로서 ‘각자의 영혼이 부정한 욕망, 다양한 쾌락, 천박한 소망, 파괴적인 꿈 등으로 시달리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내면적 박해가 더욱 고통스럽고 심각한 이유는 우리가 어디 가든지 그 박해자를 우리 속에 모시고 다니는 셈이기에 도저히 도망하려고 해도 도망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1)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욕망이나 교만이나 정욕 같은 내면적 갈등으로 박해를 받으려면 이런 것을 박해의 요인으로 인지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누추한 내면을 꿰뚫어 보는 것을 전통적인 말로 하면 ‘자기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의 실상을 본 후 그것을 정화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정화를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고, 나아가 하느님과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내면의 길을 각각, 자기 발견(self-awareness)의 단계, 자기 정화(purgation)의 단계, 조명(illumination)의 단계, 합일(unity)의 단계라 했다. 이 절은 이렇게 마음속에서 생기는 내면적 박해를 시발점으로 하여 그것을 견디고 이기는 사람, 이를 물리쳐 결국 마음이 청결해진 사람만이 아버지를 아는 참된 깨침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그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제70절
여러분 속에 있는 그것을-생사의 갈림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속에 있는 그것을 열매 맺게 하면 여러분에게 있는 그것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그것을 열매 맺게 하지 못하면 여러분 속에 없는 그것이 여러분을 죽일 것입니다.”
BLATZ
(70) Jesus said: If you have gained this within you, what you have will save you. If you do not have this in [you], what you do not have in you [will] kill you.
우리 속에 있는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 속에 있는 신성의 씨앗이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신성의 씨앗을 인지하고, 그것이 발아하여 열매 맺도록 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런 신성의 씨앗이 우리 속에 있는지도 모르고 미망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결국 말라 죽어버리고 만다. 제 3절b에서는 깨달음의 유무가 풍요로움과 가난을 가르는 지렛대라 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생(生)과 사(死)를 가르는 관건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제 24절의 말씀과 함께 우리 속에 있는 빛, 하느님의 불꽃,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깨달음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것으로 좬도마복음좭에는 누가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식의 ‘대속론(代贖論)’이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제 28절에도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일깨워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살고 죽고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스스로 우리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일부’ ‘신성의 씨앗’ ‘그의 나라’ ‘참나’를 깨닫는 깨달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렸다고 하는 것이다. 좬도마복음좭이 이처럼 깨달음이나 깨침을 강조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그렇게 생소하지 않은 것은 문자 그대로 ‘깨달음의 종교’ ‘깨달음을 위한 종교’라는 뜻을 가진 ‘불교’가 우리 주위에 오랫 동안 있었기 때문일까. 사실 프린스턴 대학교 종교학 교수로 있는 일레인 페이젤스도 좬도마복음좭이 “불교 전통과 얼마나 비슷한가 하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좬도마복음좭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훨씬 쉬워졌을 것이라고 했다.2)
제71절
내가 이 집을 헐면-재건축 불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집을 헐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도 그것을 [다시]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BLATZ
(71) I will des[troy this] house, and none shall be able to build it [again].
이 절 끝에 여덟이나 아홉 글자가 잘려나가 없어졌는데 그 낱말이 ‘다시’가 아닐까 짐작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사흘 동안’ 같이 긴 말이 들어갈 길이는 못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집이 무엇일까? 성경의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님이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막 14:58, 마 26:61, 막 15:29, 마 27:40, 요 2:9) 했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 좬도마복음좭에서 말하는 이 집이 성전일까? 좬도마복음좭에는 ‘성전’에 대한 이야기가 일체 없는데, 여기에만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까?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성경 복음서들에는 ‘다시 지으리라’하고 있지만 여기 좬도마복음좭에는 그와 반대로 ‘다시 지을 수 없으리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미국 클레어먼트 대학교 라일리(G. Riley) 교수는 좬도마복음좭이 ‘성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집’이라고 한 것은 영혼의 집으로서 우리의 ‘몸’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이 집을 헐 것인데, 그럴 경우 누구도 그것을 다시 지을 수 없을 것이라 한 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중대한 발언이라 보았다.3)
좬도마복음좭은 육체를 악으로 여기던 영지주의와는 달리 앞 제 28절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금 여기 이 삶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토록 죽지 않는다는 생각은 관심 밖이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님뿐만 아니라 누구도 육체적 부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제72절
나누도록 말해주십시오-나눔과 하나
어느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의 형제들에게 저희 아버지의 유산을 저와 함께 나누도록 말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나를 나누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누는 사람입니까?”
BLATZ
(72) [A man said] to him: Speak to me brothers, that they may divide my father's possessions with me. He said to him: O man, who made me a divider? He turned to his disciples. He said to them, I am not a divider, am I?
누가복음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12:13-15)는 말이 나온다. 윤리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좬도마복음좭의 결론은 “내가 나누는 자가 아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누어짐’이 아니라 ‘하나 됨’을 중요시하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앞에 ‘하나’와 ‘둘’ 혹은 ‘나눔’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 22절이나 61절과 같은 맥락의 생각을 다시 강조하는 셈이다.
좬도덕경좭 28장 마지막에 보면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는 나누는 일을 하지 않는다(大制不割)”고 했다. 분석적이고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해방되어 근원으로서의 하나에 돌아감으로 양면을 동시에 보는 통전적, 초이분법적 의식 구조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하나’ 혹은 ‘하나 됨’을 말할 때마다 노장(老莊) 사상이 생각난다. 좬도덕경좭 39장 처음 부분이다.
예부터 ‘하나’를 얻은 것이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 영묘하고,
골짜기를 하나를 얻어 가득하고,
온갖 것 하나를 얻어 자라나고,
왕과 제후는 하나를 얻어 세상의 어른이 되고,
이 모두가 하나의 덕입니다.
또 좬장자좭 제6편에 보면 진인(眞人)은 모든 것을 ‘하나로 하는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과도 하나요, 좋아하지 않는 것과도 하나입니다. 하나인 것과도 하나요, 하나 아닌 것과도 하나입니다. 하나인 것은 하늘의 무리요, 하나가 아닌 것은 사람의 무리입니다. 하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서로 이기려 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바로 진인(眞人)의 경지입니다.
이 본문에 붙인 풀이도 함께 옮겨온다. “진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대립, 상극, 이원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이것도 저것도’하는 ‘하나 됨’의 경지, 막히고 걸리는 것 없는 통전적(統全的)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한마디로 유연하고 탄력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다.”(오강남 풀이 좬장자좭, p. 271)
제73절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사명과 초청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부탁하여 일꾼들을 밭으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BLATZ
(73) Jesus said: The harvest is indeed great, but the labourers are few. But pray the Lord, that he send forth labourers into the harvest.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말씀이다.(마 9:37-38, 눅 10:2) 이 말씀을 보통 교회에서는 세상에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많은데 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그들에게 전도할 전도자나 선교사가 턱없이 모자라니,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전도자나 선교사로 자원하여 세계 여러 곳으로 나가 열심히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하라는 말로 풀이한다.
그런데 여기 73절에서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라는 말이 없다. 이 절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추수를 많이 해서 무조건 교회가 커지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씨앗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지만, 이를 깨닫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참된 깨달음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또 이들의 도움으로 그들처럼 깨달음에 이르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 74절에서도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먼저 진리를 체득한 사람들로서 자기 한 몸을 던져 남을 위해 일할 사람이 더욱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제74절
우물에는 아무도
그가 말했습니다. “주님, 우물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물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BLATZ
(74) He said: Lord, there are many about the well, but no one in the well.
공관복음에 없는 말씀이다. 물이 먹고 싶어 우물가에 모인 사람들은 많은데, 막상 위험을 무릅쓰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 물을 길어 올리려는 사람은 없다고 한탄하는 말이다. 종교적 관심으로 이리 저리 기웃거리는 사람은 많아도 진리의 샘에 자기를 던지는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우물 안에 귀한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우물가에 모여 웅성이며 구경만 하고 있을 뿐 누구 하나 발 벗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 맑은 샘물을 마시거나 퍼오려 하지 않는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주위에 이른바 믿는다고 하며 서성이는 사람들은 많은데, 종교적 삶의 더욱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 참 깨달음을 얻으려고 모험을 감행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제75절
홀로인 사람만이 신방에-구원의 조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에 섰으나 홀로인 사람만이 신방에 들 것입니다.”
BLATZ
(75) Jesus said: There are many standing at the door, but it is the solitary who will enter the bridal chamber.
‘홀로인 사람(monachos)’은 제16절에 언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는 수도승처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배우자를 뒤로 하고 수도사의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신혼을 차릴 자격이 있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홀로인 사람’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나를 붙들고 있는 세상적인 것들, 나의 이기심, 나의 욕심, 분노, 어리석음 등을 모두 버리고 홀가분하게 된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또 인간으로서의 근원적 ‘외로움’을 체득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은유적으로 푼다면,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실존적 고독을 맛보는 ‘단독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신방에 들어 하느님과 정말로 하나 되는 신비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방이라는 말은 104절에 다시 나온다.
참고: 좬마태복음좭(25:1-13)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열 처녀 비유에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만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기름이 떨어져 기름을 사러 갔던 나머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고, 결론적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면서 임박한 종말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제76절
다 팔아 그 진주 하나를-다(多)와 일(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상품을 많이 가진 상인이 진주를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그 상인은 현명하여 자기의 상품을 다 팔아 자기를 위해 그 진주 하나를 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없어지지 않고 오래 갈 보물을 구하십시오. 그것은 좀도 쏠지 않고 동록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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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merchant who had a load (of goods) and found a pearl. That merchant was wise. He sold the load and bought for himself the pearl alone. You also, seek after his treasure which does not fail (but) endures, where moth does not come near to devour nor worm to destroy.
제73-75절에 이어 전적인 종교적 헌신의 필요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절이다. 값진 진주를 발견했으면 자기가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여기던 잡다한 상품들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일에 ‘올인’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45-46절에도 나오는 이 말씀은 물론 과감한 투자 같은 상업적 노하우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교회에서 자주 듣는 것처럼 지금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함으로 하늘에 보화를 저축하라는 말도 아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참된 깨달음의 진리, 천국 비밀을 발견하였을 때 지금까지 금과옥조처럼 가지고 있던 잡다한 이론, 사상, 교리, 주장, 주의(主義)등을 다 팔아버리고 오로지 깨침을 이루는 일, 천국의 비밀을 아는 일, 그 하나에 올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앞의 제 8절에 나온 슬기로운 어부의 비유에서 그물로 잡아 올린 고기들 중 큰 고기 하나를 위해 작은 고기들을 다 버리는 결단을 내린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다.(8절 풀이 참조)
여기서 두 가지만 더 지적하고 넘어 가자. 첫째, 엄격하게 말하면, 올인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가진 것을 파는 것은 본문에 나온 것처럼 ‘자기를 위해’하는 행동일 뿐 결코 희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사실 종교적 삶은 이런 것이다. 의무로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동하는 삶이다. 율법을 지키느냐에 따라 상벌이 주어진다고 믿으며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살아야 하는 율법주의적 삶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둘째, ‘많은’ 상품들을 팔아 진주 ‘하나’를 샀다고 하는 것이 많음(多, multiplicity)에서 하나(一, unity)로 옮겨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홀로되어야 신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처럼, 많음의 세계에서 하나의 세계로 들어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라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튼 이렇게 모든 것을 팔아 사는 진주는 ‘좀도 쏠지 않고 동록도 해하지 못하는 보물’, 죽음마저도 어쩌지 못할 영원한 진리라고 한다. 삶을 이런 보물을 얻는데 걸어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제77절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우주적 자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
BLATZ
(77) Jesus said: I am the light that is above them all. I am the all; the all came forth from me, and the all attained to me. Cleave a (piece of) wood; I am there. Raise up a stone, and you will find me there.
앞에서 진정 종교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라고 한 몇 절의 결론인 셈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는 빛이고, 또 그 ‘나’가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나’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절에서 검토할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나는 빛”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좬도마복음좭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나’는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님 한 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요 8:58) 있었던 그 ‘우주적 나(Cosmic I)’, 곧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신성, 하느님, 참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앞 4절에서 본 것처럼 천도교 2대교주 최시형이 제사를 지낼 때 그것이 곧 자기를 향한 제사임을 강조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한울님을 모신 내가 곧 한울님이니 제사를 지내도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제사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이 어머니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하늘 위와 땅 아래에 나밖에 존귀한 것이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했다고 한다. 이때 ‘나(我)’도 한 개인으로서의 아기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속에 있는 ‘초개인적 자아(transpersonal self)’, ‘참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불교에서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이런 신적 요소를 ‘불성(佛性)’이라 한다. 이것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하기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뜻이다.
사실 요한복음 서두에서도 예수님을 빛이라 선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만 빛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버리고 요한복음 전체를 차근히 읽어보면 그것이 반드시 예수님만 빛이라 단언한 것으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아무튼 이 문제에서 좀 모호할 수 있는 요한복음과는 달리, 좬도마복음좭은 우리 모두가 빛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가 빛임을 분명히 밝힌다.
둘째 살펴 볼 것은 ‘빛’이라는 것이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종교 전통들은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다.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신성, 참나, 참 생명은 바로 ‘빛’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인습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변화(變化)되고 고양(高揚)된 순수 의식(意識)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그 ‘빛’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 경전 좬우파니샤드좭에 보면 우리 속에 있는 브라만[梵], 혹은 참나[我]를 두고, “그대 홀로-그대만이 영원하고 찬연한 빛이시나이다.”고 하였다. 퀘이커 교도들도 침묵의 예배를 통해 ‘내적 빛’을 체험하려고 한다. 불교인들이 염불을 통해 체현하려고 염원하는 ‘아미타’불도 ‘무한한 빛’, ‘무량광(無量光)’의 부처님이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13세기 문헌 좬조하르(Zohar)좭도 문자적으로 빛을 의미하고, 그 문헌에서 언급되는 절대자 엔소프(En-Sof)도 ‘무한한 빛’으로 그 빛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열 가지 빛이 흘러나온다고 보았다. 이처럼 많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빛’은 때 묻지 않은 순수 의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세계의 찬연함을 말해주는 가장 보편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주목할 것은 이 절이 말하고 있는 ‘범재신론적 신관’이다. 본문에 ‘나’ 혹은 ‘신성(神性)’이 ‘통나무’에서도 ‘돌’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다. 문헌 좬장자좭에 보면 누가 장자에게 “이른바 도(道)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장자가 ‘없는 데가 없다’고 하자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결국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기장이나 피에도, 기와나 벽돌에도, 심지어 대변이나 소변에도 있다고 하며 이른바 도의 ‘주편함(周偏咸)’적 특성, 도의 편재성(偏在性)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강조해야 할 것은 도가 만물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만물이 도 안에 있다는 변증법적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나 신의 내재와 초월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을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도의 내재만을 강조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구별한다. 많은 세계 신비주의 전통은 만물이 그대로 신이라는 범신론적 주장보다는 만물과 신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역설의 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다.4)
여기 이 절도 ‘내가 모든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나와 만물을 하나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만물이 ‘나로부터 나오고 또 나에게로 돌아온다’고 할 때 이것은 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78절
무엇을 보러 광야에-진리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러 광야로 나왔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여러분의 왕이나 권력자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었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BLATZ
(78) Jesus said: Why did you come out into the field? To see a reed shaken by the wind? And to see a man clothed in soft raiment? [Look, your] kings and your great men, these are the ones who wear soft clothing, and they [will] not be able to know the truth.
공관복음(마 11:7-8, 눅 7:24-25)에는 침례 요한을 두고 예수님이 한 말씀으로 나와 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온 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화려한 옷을 입은 권력자를 보기 위한 것이라면 헛수고에 불과하지만 침례 요한 같은 예언자를 보러 나온 것이라면, 그렇다. 침례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 여자가 낳은 사람들 중 최고의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좬도마복음좭에는 침례 요한과 관계된 이런 전후 문맥없이 이 말만 덩그라니 나와 있다. 물론 공관복음의 촛점과는 달리 여기 이 절의 메시지는 광야로 나온 것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는 것이라면 궁궐로 가야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차라리 거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옷은 거칠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 수 있으니 그들에게 주목하라는 이야기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거친 옷을 입은 사람이라도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면 이들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주목할 능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바로 앞 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이들 중 으뜸이 ‘모든 것 위의 빛’ 되신 예수님이라는 것이 함의되어 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이슬람교에 수피(Sufi)파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이름은 ‘털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염색하지 않은 조야(粗野)한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참회의 표시로 입다가 나중에는 정식 의복이 되었다. 이들은 율법주의적, 형식주의적 이슬람에 반대하고 신비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들(mystics)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수적으로는 미약하지만 그들의 특별한 가르침 때문에 영향력이 크고, 특히 외부 세계에 아주 많이 알려져 있다. 거친 옷이지만 진리를 깨친 사람들의 일례라 하겠다.
제79절
당신을 낳은 자궁이-무자식 상팔자
군중 속에 있던 한 여자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낳은 자궁과 당신을 먹인 유방은 행복합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참으로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여러분이 임신하지 않은 자궁과 젖 먹이지 않은 유방이 행복하다고 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BLATZ
(79) A woman in the crowd said to him: Blessed is the womb which bore you, and the breasts which nourished you. He said to [her]: Blessed are those who have heard the word of the Father (and) have kept it in truth. For there will be days when you will say: Blessed is the womb which has not conceived, and the breasts which have not given suck.
누가복음(11:27-28)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무리 가운데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 누가복음에는 임신하지 않은 자궁과 젖 먹이지 않은 유방이 복이 있을 것이라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아이가 없음이 복이라는 이 말은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러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그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 보아라, ‘아이를 배지 못한 여자와,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이 복되다’하고 사람들이 말할 날이 올 것이다.”(눅 23:28-29) 또 공관복음 모두에 “그 날에는 아이 밴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마 24:19, 막 13:17, 눅 21:23)는 말이 나온다. 예루살렘의 함락이나 세상의 종말이 가까움에 따라 이르게 될 재앙의 날 아이 가진 것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편집상의 차이점은 복음서 저자들이 그 당시 떠돌아다니던 말들을 어떻게 자기들이 전하려는 기별에 맞추어 편집하였는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좬도마복음좭에 나온 이 절의 특징은 정치적 어려움이나 종말론적 기대 때문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참으로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속세의 삶에서 떠나 아이 없이 사는 독신생활이 더 좋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예수님 당시 에세네파들은 이미 독신생활을 강조하면서 세상을 떠나 살고 있었다. 물론 앞에서도 몇 번 지적한 것처럼, 속세를 떠난다고 하는 것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지리적으로 우리가 속한 사회를 떠나 산이나 숲이나 사막으로 간다는 것 뿐 아니라 세속의 가치관, 인습적이고 왜곡된 인생관을 뒤로 하고 새로운 깨달음과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도 세상을 떠나는 또 하나의 형태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부처님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부처님이 왕자 시절 공원에 나갔다가 출가하기로 마음을 굳힌 다음, 궁으로 돌아오는데, 기사 고타미라는 여인이 멀리서 그를 보고, “그 어머니는 정말로 복이 있구나. 그 아버지는 정말로 복이 있구나. 이런 남편을 둔 그 아내는 정말로 복이 있구나.”고 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속으로 “마음이 정말로 복될 때가 언제인가? 정욕의 불이 꺼질 때, 망상의 불, 아만과 망념과 모든 욕정과 괴로움이 소멸될 때가 아닌가. 저 여자는 오늘 나에게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었구나. 내가 소멸됨(니르바나, 열반)을 찾고 있으니. 오늘이라도 당장 세속의 삶을 뒤로 하고 니르바나를 찾아 나서야 하리.”라 했다.
물론 예수님의 이야기와 몇 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여기서도 참된 행복은 세상적 가치를 넘어서서 영원한 것을 추구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제80절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참 가치의 발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몸을 찾았습니다. 누구든지 몸을 찾은 사람은 세상이 그에게 값진 것이 아닙니다.”
BLATZ
(80) Jesus said: He who has known the world has found the body; and he who has found the body, the world is not worthy of him.
LAYTON
(80) Jesus said, "Whoever has become acquainted with the world has found the body, and the world is not worthy of the one who has found the body."
DORESSE
84 [80]. Jesus says: "He who has known the world has fallen into the body, and he who has fallen into the body, the world is not worthy of him."
제56절에도 나오는 말이다. 단 거기서는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이 ‘시체(ptoma)’를 찾은 사람이라고 하고, 여기 80절에서는 ‘몸(soma)’을 찾은 사람이라고 하여 낱말 하나를 바꾼 것이 다르다. 56절 풀이에서도 지적했지만, 세상을 알게 되면 시체를 찾게 된다는 말은 결국 세상이란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몸을 찾았다’고 한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몸’을 물질세계를 대표하는 말로, 그리고 ‘찾았다’를 그 물질세계의 실상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는 말로 새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물질세계란 궁극적 실상의 세계일 수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일시적이요 무상하다는 것, 모두가 불완전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 용어로 해서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 현상으로서의 물질세계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결국은 깨달음이 관건이라는 좬도마복음좭의 기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셈이다.
제81절
힘을 가진 사람은-힘의 바른 쓰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부해진 사람이라면 다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버리도록 하십시오.”
BLATZ
(81) Jesus said: He who has become rich, let him become king, and he who has power, let him renounce (it).
LAYTON
(81) Jesus said, "The one who has become rich should reign. And the one who has power should renounce."
DORESSE
85 [81]. Jesus says: "Let him who has become rich reign, and let him who has strength refrain <from using it>!"
이 절은 세상이 그렇게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무엇이 아니라고 한 바로 앞 절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이 절에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액면 그대로 읽는 것이다. 세상사에 관심을 두고 살다가 부해지는 경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다스리려 하겠지만, 이렇게 부함에서 나오는 권력은 버리는 것이 좋다는 말로 새긴다. 특히 신앙 공동체 안에서 돈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힘을 구사하려 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막10:43)는 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다른 면에서 볼 수도 있다. 제 3절 후반에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가난에 처하고, 여러분이 가난 자체입니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알면 여러분은 부요함에 처하고, 여러분이 부요함 자체입니다.’라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깨침이 없는 것이 가난 자체요, 자신에 대한 깨침이 있으면 부요함이다. 이처럼 영적으로 부요해 진 사람은, 제 2절에서 말한 것처럼, 내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수반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면 이를 버리라는 말로 푼다.
이런 식으로 이해 할 경우,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세상의 권력 같은 것이라기보다 종교적 카리스마나 초자연적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종교에서는 종교적 체험의 깊이가 더해 감에 따라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이 생긴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나 불교에서는 이를 시디(sidhi)라 부른다. 이런 종교에서는 이처럼 초자연적 능력이 생기면 이를 종교적 수행에 따르는 부수적 결과로써, 자기의 수행과정이 어디 쯤 와 있나를 알려주는 일종의 이정표(里程標) 정도로 여기고 수행을 계속할 것이지, 이를 종교적 수행이 이르는 목적이나 종착지쯤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 때는 희망이 없다고 경고한다. 이 절에서도 이런 힘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을 때, 악마가 이르러 세 가지로 그를 시험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하는 것이었다. 이 때 악마는 예수님에게 이런 초자연적 힘을 한번 발휘해 보라고 유혹했던 셈이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런 초자연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길에 있어야 할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아니라는 것,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더 이상 종교적 길을 갈 수 없게 하는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제82절
나에게 가까이 함은 불 가까이-불 세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 가까이 있는 것이고,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그 나라에서 멀리 있는 것입니다.”
BLATZ
(82) Jesus said: He who is near to me is near the fire, and he who is far from me is far from the kingdom.
제10절에 예수님이 ‘세상에 불을 지피고 그 불이 붙어 타오르기까지 잘 지킬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 혹은 그의 가르침이 사회나 개인 안에 혁명의 불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절에서는 예수님이 ‘나에게’ 가까이 있으면 불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를 불이라고 하며 자신을 불과 동일시하고 있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77절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이 말하는 이 ‘나’가 ‘참나’, 곧 우리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신의 속성, 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참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내 내면의 ‘참나’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불 가까이 있는 사람, 그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 풀 수 있다.
앞의 제10절 풀이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침례 혹은 세례는 물로 받는 것, 바람(영)으로 받는 것, 불로 받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불로 받는 세례가 최고의 세례다. 불은 우리에게 붙은 더러운 것들을 물처럼 씻어 내거나 바람처럼 불어내 버리는 정도를 지나 금을 연단할 때처럼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완전히 태워버린다. 이런 불 가까이에서 불로 세례를 받으면 나와 절대자가 오로지 하나, 그 사이에 아무런 이질적 요소가 끼어 있을 틈이 없게 될 것이다.
제83절
그들 안에 있는 빛은-감추어진 빛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상들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형상들 안에 있는 빛은 아버지의 빛의 형상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의 빛이 드러날 것이지만, 그의 형상은 그의 빛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BLATZ
(83) Jesus said: The images are revealed to man, and the light which is in them is hidden in the image of the light of the Father. He will reveal himself, and his image is hidden by his light.
히브리어 성경 좬창세기좭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창1:26)가 나오는데, 이 절은 이 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외적 형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외적 형상 속에 있는 인간 내면의 빛은 하느님의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문장은 첫 문장과 대조를 이룬다. 처음 문장에서는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만 사람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 데 비해, 다음 문장에서는 하느님의 빛은 드러나지만, 하느님의 형상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 속에 빛이 있다는 것이다.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는 침묵 속에서 우리 속에 있는 내적 빛(Inner Light)이 비추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신앙의 단계를 말할 때 ‘정화(purification)의 단계’를 지나면 ‘조명(illumination)의 단계’에 이르고 결국에 ‘합일(unity)의 단계’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였는데, 조명의 단계라는 것이 내 속에 있는 빛, 나의 ‘참나’를 보는 단계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제84절
여러분이 나기 전에-본래 면목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면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기 전에 생겼고,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은 여러분의 형상을 보면 얼마나 견딜 수 있겠습니까?
BLATZ
(84) Jesus said: When you see your likeness, you rejoice. But when you see your images which came into existence before you, which neither die nor are made manifest, how much will you bear?
이 절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외적 모습은 볼 수 있지만 내면의 빛은 가리어져 있다고 한 바로 앞 절의 부연(敷衍)이라 할 수 있다.
거울 앞에 나타난 나의 모습을 보면 기쁘다. 살아있음이 즐거운 것이다. 이런 생각이 좬도마복음좭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은 좬도마복음좭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영지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삶은 그 나름대로 즐거움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염세주의적으로 되라는 것은 좬도마복음좭의 진의와 거리가 멀다.
육체적인 모습으로서의 우리의 삶이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라고 한다. 이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존의 모습이 있게 한 그 근원, 말하자면 ‘모습 없는 모습’, 지금까지 의식하지도 못했던 그 본래의 모습,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우리의 참 모습, 본래면목(本來面目), 우리의 ‘참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발견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 기쁨이 육체적 모습을 보고 얻은 기쁨에 비길 수 있겠는가?
제 2절에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이라고 했다. 이 절 마지막에서는 이제 이런 엄청난 것을 찾았을 때 그 혼란과 놀라움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물어보고 있다.
제85절
아담도 합당하지 않아-죽음의 극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은 큰 능력과 큰 부에서 생겨났지만, 그는 여러분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상대가 되었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BLATZ
(85) Adam came into being out of a great power and a great wealth, and he was not worthy of you; for if he had been worthy, [he would] not [have tasted] of death.
앞의 두 절의 연속이다.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84절에 언급된 대로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우리의 참 나를 발견했지만, 아담은 오히려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아담의 이런 비극적 잘못으로 그는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다.(롬5:12)
좬도마복음좭 제 1절을 비롯하여 18, 19, 111절 등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진정으로 깨닫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했다. 아담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깨달음을 통해 죽음을 맛보지 않을 예수 따르미들에 비하면 그만큼 자격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86절
여우도 굴이 있고-인간의 조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간들은 누워서 쉴 곳이 없습니다.”
BLATZ
(86) Jesus said: [The foxes have] the[ir holes] and the birds have [their] nest,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and rest.
공관복음에도 있는 말이다.(마 8:20, 눅 9:58) 개역에는 ‘인자(人子)’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인간이라 옮겼다. 문자적으로 ‘인자,’ ‘사람의 아들’ 혹은 ‘아담의 아들’이라 옮길 수 있는데, 이것은 셈족 언어의 관용구로서 자기를 가리킬 때도 쓰고 또 인간 전체를 말할 때도 쓰인다. 예수님도 인자이시지만, 106절에 보면 제자들도 인자들이다. 우리 모두 인자일 수 있다.
물론 이 구절을 두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던 것처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언제나 정처 없이 운수행각(雲水行脚)과 같은 삶을 사신 예수님의 가난과 어려움, 고생과 핍박 등을 가리키는 말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좬도마복음좭의 성격 상 이렇게 문자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영적으로 생각하면, 여우와 새 같은 금수(禽獸)들은 이 세상의 것 이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기에 이 세상에서라도 쉴 자리를 얻을 수 있겠지만,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살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고, 따라서 이 세상을 최종적 목적지로 삼고 있지 않기에 이 세상에서 최종적인 쉼을 얻을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로 풀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쉴 자리를 찾고 그것을 호화롭게 꾸미느라 일생을 바치고 있는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쉼을 찾을 수 없나이다.”고 한 성 어거스틴의 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이렇게 쉼이 없는 상태가 어느 면에서 축복일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쉼 없는 상태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살피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초월적인 쉼, 참된 쉼에 대해 동경(憧憬)의 염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도 있지만 죽음을 극복하도록 하는 동인(動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제87절
몸에 의지하는 몸은-의존성의 비극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의존하는 몸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 둘에 의존하는 영혼은 또 얼마나 비참합니까?
BLATZ
(87) Jesus said: Wretched is the body which depends on a body, and wretched is the soul which depends on these two.
우선 문자적으로 보면, ‘몸에 의지하는 몸’이란 죽은 몸을 먹는 것이니 얼마나 비참한가, 또 이처럼 육식하는 사람의 비참함 뿐 아니라 육식하는 사람의 몸속에 있는 영혼도 마찬가지로 비참한 것 아닌가 하는 말로 읽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채식하는 사람이야 말로 싱싱한 육체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질 수 있으니 채식주의를 권장하는 말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좬도마복음좭이 이런 육체적인 차원의 뜻만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적 관점에서, 초기 성만찬과 관계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 곧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경우, 이는 죽은 것에 의존하는 몸인 셈이니, 이런 것에 의존하는 사람의 영혼이 온전할 수 없다. 그러니 이런 문자주의적이고 형식적 의미의 성만찬은 안 된다.
그러나 제11절에서 말한 것처럼, 깨달은 사람은 죽은 것을 먹고도 그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적 성만찬이 죽은 몸을 먹는 것이지만 더 깊은 뜻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받드는 일이 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비참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의 영혼이야 말로 비참함에서 해방된 사람임을 말해주는 구절이라 풀어 본다.
제88절
사자(使者)들과 예언자들이 와서-신성의 재발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자들과 선지자들이 여러분에게 와서 여러분의 것을 돌려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것을 그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스스로 말합니다. ‘그들이 언제 와서 그들의 것을 가지고 갈 것인가’하고.”
BLATZ
(88) Jesus said: The angels and the prophets will come to you, and they will give you what is yours. You also, give them what is in your hands, and say to yourselves: On what day will they come to take what is theirs?
LAYTON
(88) Jesus said, "The messengers and the prophets are coming to you (plur.), and they will give you the things that you possess. And you, too - give them the things that you have, and say among yourselves, 'When are they coming to take their own?'"
DORESSE
92 [88]. Jesus says: "The angels and prophets are coming to you; they will give you the things that belong to you. You, give them what you possess, and say: 'When will they come and take what is theirs?'"
여기 ‘사자’로 번역된 말은 원어로 ‘앙겔로스’ ‘천사’이다. 성서에서는 천사, 사자, 예언자라는 말이 서로 혼용되었다. 이 본문의 ‘사자’ 혹은 ‘천사’ 그리고 ‘예언자’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깨침을 얻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깨달아야 마땅한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면, 우리는 우리들이 가진 것으로 그들이 받아야 마땅한 육신적 필요를 공급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도리라는 뜻이다. 불교 용어로 하면 스님들이 법보시(法布施)를 하면 재가 불자들이 재보시(財布施)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제도는 그리스도교 초기에서부터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11)이라는 원칙을 표명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예외는 있는 법. 바울은 스스로 천막 만드는 일을 통해 자급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전9:1-18)
이것을 내면적 변화와 관계시켜 이해할 수 있다. 사자들이나 예언자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본래부터 우리 것으로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고 있던 우리 속의 신성(神性), 우리의 참모습을 일깨워 준다. 그러면 우리는 본래 우리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던 세상적인 것, 그런 것들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 잘못된 생각이나 신념 등을 놓아 버린다. 홀가분함,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는 그들이 언제 다시 와서 그들의 것을 가져 갈 것인가 묻게 된다. 그들이 가져 갈 것이 무엇인가? 그들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감사의 마음이다. 이 감사의 마음이 서로를 이어주는 공동체의 끈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물론 물질적인 보답의 모양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제89절
왜 잔의 밖을 씻는가-안과 밖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잔의 겉을 씻습니까? 안을 만드신 이가 겉도 만드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BLATZ
(89) Jesus said: Why do you wash the outside of the cup? Do you not understand that he who made the inside is also he who made the outside?
공관복음에도 잔의 안과 겉을 깨끗하게 하는 비유가 나온다.(마 23:25-26, 눅 11:39-41) 잔의 안과 밖이 깨끗하냐 부정하냐 하는 것 것은 1세기 전후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 정결제도(purity system)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논쟁의 주제였다. 이들 중에서는 잔의 겉은 언제나 더러운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고 겉을 열심히 닦았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런 정결제도에 의한 우선순위 같은 것은 무시하시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 등 불결한 것을 없애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면서, ‘먼저 안을 깨끗이 하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라’하였다.
좬도마복음좭에서는 잔의 안팎 문제를 놓고 이런 식의 윤리적, 예전적 적용보다는 안팎의 관계, 그 동등성을 강조하는 존재론적 의미에 중점을 둔 것 같다. 안을 만드신 것도 하느님이시고, 겉을 만든 것도 하느님. 왜 양쪽 모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한 쪽에만 치우치고 있는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의 세계관을 가지라 하는 뜻이 강한 것 같다. 앞의 22, 61, 72절에 나온 것처럼 둘을 하나로 보라는 가르침이다. 좬도덕경좭 2장에 선악, 미추, 고저, 장단, 빈부, 난이, 전후 등 일견 반대되는 것 같이 보이는 것들도 결국은 서로 불가분, 불가결의 관계를 가진 하나의 양면으로 보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제90절
내게로 오라-쉼의 발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쉼을 찾을 것입니다.”
BLATZ
(90) Jesus said: Come to me, for my yoke is easy and my lordship is gentle,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멍에를 멘다’는 생각은 기원전 2세기에 쓰인 외경 좬시락의 지혜서좭 혹은 좬집회서좭 51:26-27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리라 본다. 마태복음과 좬도마복음좭은 각각 이를 나름대로 인용하고 있다. 참고로 마태복음의 것을 인용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28-30)
마태복음 버전이 좬도마복음좭 것보다 더 자세하게 되었다. 따라서 좬도마복음좭의 것이 더 오래된 전승이라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에는 ‘쉬게 하겠다’고 한데 반하여, 좬도마복음좭에는 ‘쉼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는 차이점이다. 좬도마복음좭 여러 곳에서 언급된 것처럼 쉼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찾을 무엇이다. 물론 쉼을 찾도록 우리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에 의하면, 여기서 예수님이 “내게로 오너라”고 했을 때, 그의 초청은 그가 새로운 종교를 다시 만들고 그 종교로 사람들을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종교의 굴레로부터 나오라는 초청이었다고 한다. 물론 실존의 삶 자체도 ‘무거운 짐’일 수 있지만, 89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릇에서 더러운 것이 겉이냐 안이냐 하는 것이나 따지는 데 모든 정력을 소모하는 형식주의적이고 생명력 없는 종교는 그보다 더욱 무거운 짐으로 우리를 짓누를 수 있다.
예수님이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에게 주시리라 약속하신 것이, 좬도마복음좭에 의하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멍에’가 특별한 수련법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리라 짐작하는 학자도 있다. 멍에는 소를 규제하는 기구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내면을 다스려 사물을 이분법으로 갈라서 보기를 그만두고 ‘양극의 조화’를 발견하도록 하는 수련법일 수 있다. 본래 영어로 멍에를 뜻하는 ‘yoke’와 산스크리트어 ‘yoga’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둘 다 ‘다스리다(regulate)’는 뜻이다. 특히 다스려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한다는 뜻이 강하다.
이런 식으로 영적 성장과 눈뜸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삶은 율법주의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생활과 비교할 때 실로 신이 나는 삶이다. 종교는 결코 우리를 묶어놓는 굴레일 수 없다. 우리를 서로 합치도록 인도하고 이끄는 기구여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주위에 종교의 굴레에서 묶여 신음하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가.
제91절
당신이 누구신지-인식의 부재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말해주십시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도 여러분 중에 있는 이를 알아보지 못하니, 지금 이 순간도 분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BLATZ
(91) They said to him: Tell us who you are, that we may believe in you. He said to them: You test the face of the sky and of the earth, and him who is before you you have not known, and you do not know (how) to test this moment.
좬도마복음좭에서 ‘믿다’는 동사가 사용된 것은 여기 한 군데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믿는다는 것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부활, 하느님의 아들 되심 같이 ‘예수님에 관한 잡다한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과 상관이 없다.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제발 그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과 같다고 할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처럼 자기들과 고락을 같이 하고 있는 자기의 참된 정체성을 알아볼 수 없다니 안타까울 뿐이라는 듯 말씀하신 것이다. 제13절, 43절, 61절과 함께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기독론(Christology)의 문제가 제자들의 주요 관심사였음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공관복음에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4-56)하거나,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 16:2-3)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공관복음서는 ‘이 때’나 ‘시대’를 알아보라는 뜻이지만, 좬도마복음좭에서는 ‘너희 중에 있는 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라는 것이다. 좬도마복음좭은 진정으로 깨친 이, 그 깨침을 가르치는 이를 알아보는 것이 하루의 기상을 예견하고 세상의 끝을 점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참된 스승을 알아보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간단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이 남을 위해 가르치는가 자신을 위해 가르치는가, 남을 섬기기 위해 가르치는가 섬김을 받기 위해 가르치는가, 남을 해방시키기 위해 가르치는가 남을 자기에게 묶어놓기 위해 가르치는가, 한마디로 타인 중심적인 가르침인가 자기중심적인 가르침인가를 알아보면 된다. 물론 우리 범속한 인간들 중 몇이나 이런 식의 참된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예수님이나 역사적 성현 같은 참된 스승이 더욱 귀한 것이리라.
제92절
구하라 그리하면-구함의 대상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찾을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전에 나는 여러분이 물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대답하려 하는데, 여러분이 물어보지 않습니다.”
BLATZ
(92) Jesus said: Seek, and you will find; but the things you asked me in those days and I did not tell you then, now I desire to tell them, but you do not ask about them.
DORESSE
96 [92]. Jesus says: "Seek and you will find! But the things you have asked me about during these days and which I have not told you up till now, I now want to tell you, so that you will not have to seek them any longer."
새로운 주제를 전하는 새 단원의 시작이다. 여기서부터는 끊임없는 영적 추구와 성장을 당부하는 말이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자라나야 한다. 한 때 우리의 질문은 너무나 유치했다. 예수님 같은 분이 구태여 대답할 가치도 없는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면서 더욱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하는데, 옛날 유치한 수준에서 얻은 고정관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른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계(taken-for-granted-world)’에 안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진리 추구를 중단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일러주신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물어보지 않으면 예수님도 대답하실 수가 없다.
영적 삶은 어느 의미에서 ‘어어(uh-oh!)’와 ‘아하(aha!)’의 연속이라 볼 수 있다. 당연한 것으로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납득하기 힘들게 되면 ‘어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더욱 새로운 면, 더욱 깊은 면을 발견하고 ‘아하!’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런 끊임없는 추구가 영적 성장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어릴 때 한 번 들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의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은 지적·영적 나태함이나 심지어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다.
이렇게 영적 성장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주위에서 계속 ‘덮어놓고 믿으라’고 강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된 신앙은 독자적인 사고를 함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묻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이 되지 말라는 말고 같다. 가톨릭 신학자 애드리언 스미스(Adrian B. Smith)는 좬내일의 그리스도인좭(Tomorrow’s Christian, 2005)이란 책에서 내일의 그리스도인이 갖출 여러 가지 특징을 열거하면서, 그 첫째가 바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a questioning person)’이라고 했다. 바울처럼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고전12:11)고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좬도덕경좭 48장에서도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日損)”이라 했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이나 어렸을 때의 생각을 매일 매일 없애 가는 끊임없는 ‘해체(deconstruction)’나 ‘배운 것을 버림(unlearning)’의 과정을 걷는다는 뜻이다. 계속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궁극 실재와 하나 되는 경험을 얻기 위해, 언제나 자신을 더욱 큰 빛, 더욱 새로운 빛에 열어놓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93절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귀중성의 인식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개들이 이를 똥무더기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마십시오. 돼지들이 이를 [부셔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BLATZ
(93) <Jesus said:> Do not give what is holy to the dogs, lest they cast it on the dung-heap. Do not cast the pearls to the swine, lest they make it [ . . . ].
돼지들이 어떻게 하겠다는 마지막 구절은 사본 상태가 좋지 않아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부셔버릴 수도 있다’는 말일 것이라 한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비슷한 말이 마태복음 7장 6절에도 나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바로 앞 절에 예수님이 ‘전에는 우리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 진주를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영적 상태로 보아 우리가 아직 개나 돼지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는데도 예수님이 그 귀한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면 우리는 이런 먹지도 못할 것을 주느냐고 오히려 덤벼들 수도 있고,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되돌아서서 예수님을 물어뜯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대학 교수가 초등학생들에게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면 초등학생은 그 교수에게 휴지로도 못쓸 이런 책을 주느냐 욕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앞에서도 누누이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좬도마복음좭에 나타난 것과 같은 가르침은 이른바 비의적(esoteric) 가르침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다. 오로지 준비된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다. 물론 요즘 같이 교육수준이 높고 정보화가 된 시대에는 사정이 다를 수 있지만, 아무튼 영적인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마치 어린 아이들에게 쥐어진 칼이나 성냥통 같이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그야말로 주지 말거나 받았으면 내다 버리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도 마음을 열고 우리에게 주어진 진주의 진가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을 갖는 것이 삶을 살아가면서 터득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을 깨달아야 하겠다.
제94절
구하는 자는-구함과 두드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 사람은 찾을 것입니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입니다.”
BLATZ
(94) Jesus [said:] He who seeks will find, [and he who knocks], to him will be opened.
공관복음(마 7:7-8, 눅 11:9)에도 나오는 말씀이다. 여기서는 92절 이후 일련의 말씀과 연결되는 절이다. 개나 돼지처럼 그저 당장 먹고 배부를 것이나 찾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것이나 진주를 주지 않으신다고 하였지만, 이제 진정으로 거룩한 것, 영적 진주를 사모하고 추구하는 마음으로 준비가 된 사람은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진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도 그 문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을 주신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제 2절에서 강조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추구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제95절
돈이 있으면-이자와 기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있으면 이자로 빌려주지 마십시오. 오히려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BLATZ
(95) [Jesus said:] If you have money, (p. 49) do not lend at interest, but give [ . . . ] to him from whom you will not receive it back.
LAYTON
(95) [Jesus said], "If you (plur.) have money, do not lend it out at interest. Rather, give [it] to one from whom you will not get it back."
공관복음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 5:42)고 한 것이나 “또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눅 6:35)는 말씀이다. 좬도마복음좭 제 25절에 “여러분의 동료들을 여러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그들을 여러분 자신의 눈동자처럼 지키십시오.”하는 말도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다.
이 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남아도는 돈이 있을 경우 그것을 가지고 이자놀이를 하지 말라고 했다. 이자를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원금까지 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요즘 사람치고 이런 일을 문자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물론 예수님 당시와 요즘의 사회 구조나 사람들의 태도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돈을 섬기기 시작하면 하느님 섬기기를 등한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원칙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돈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고 거기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치고 있는데, 어느 결에 물질 이상의 가치에 정신을 쏟을 수 있겠는가? 돈이란 살아갈 만큼만 있으면 된다.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목적일 수 없는데도 일생을 돈을 모으겠다는 목적 하나에 낭비하는 어리석음은 버리라는 경고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한편, 앞의 몇 절에서 지금껏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예수님이 이제 준비된 사람들에게 진리를 밝히신다는 것, 진리를 찾으면 찾을 수 있다는 등의 말씀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돈’이 진리를 두고 하는 말이라 풀 수도 있다. 이런 풀이가 가능하다면, 이제 진리를 찾은 사람은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뜻일 수도 있다.
제96절
아버지의 나라는 작은 양의 누룩을-작음과 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작은 양의 누룩을 가져다가 반죽에 넣어 큰 빵 덩어리를 만든 여인과 같습니다. 두 귀를 가진 이들은 들으십시오.”
BLATZ
(96) 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woman. She took a little leaven, [hid] it in dough, (and) made large loaves of it.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LAYTON
(96) Jesus [said], "What the kingdom of the father resembles is [a] woman who took a small amount of leaven, [hid] it in some dough, and produced huge loaves of bread. Whoever has ears should listen!"
DORESSE
100 [96]. Jesus says: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woman who put a little yeast [into three] measures of flour and made some big loaves with it.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누룩 이야기는 공관복음(마 13:33, 눅 13:20-21)에도 나온다. 차이점이라면 공관복음에서는 아버지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했고, 여기 좬도마복음좭에서는 그것을 ‘여인’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다음 두 절에서도 아버지의 나라를 물건이 아니라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누룩의 비유는 앞에 좬도마복음좭 제 20절에 나온 겨자씨의 비유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모두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잠재적 상태로 있는 변화의 가능성이 일단 실현되면 엄청난 위력이나 위용을 발휘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세한 풀이는 20절 풀이를 참조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그 당시 ‘누룩’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부패나 위선이나 악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런 상식을 뒤집어엎고 이것을 긍정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종교적 선각자들의 사고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파격성(subversiveness)’이다.
제97절
곡식이 가득한 항아리-비움의 미학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곡식이 가득한 항아리를 이고 가는 여인과 같습니다. 먼 길을 가는 동안 항아리 손잡이가 깨어져 곡식이 흘러내렸지만, 그 여인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이 집에 이르러 항아리를 내려놓자 그것이 비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BLATZ
(97) 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woman carrying a jar full of meal. While she was walking [on a] distant road, the handle of the jar broke (and) the meal poured out behind her on the road. She was unaware, she had not noticed the misfortune. When she came to her house, she put the jar down (and) found it empty.
LAYTON
(97) Jesus said, "[What] the kingdom of the [father] resembles [is] a woman who was conveying a [jar] full of meal. When she had traveled far [along] the road, the handle of the jar broke and the meal spilled out after her [along] the road. She was not aware of the fact; she had not understood how to toil. When she reached home she put down the jar and found it empty."
DORESSE
101 [97]. Jesus says: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woman who takes a vessel of flour and sets out on a long road. The handle of the vessel broke: the flour spilled out on the road behind her without her knowing it and stopping it. When she arrived at the house she put the vessel down and found it was empty."
좬도마복음좭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기 힘들다. 하버드 신학교 하비 콕스는 예수님의 비유들이 기본적으로 선(禪)의 공안(公案) 혹은 화두(話頭)와 같은 성격을 띤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다면 이 비유야말로 여러 비유들 중 가장 그와 같은 성격을 띤 것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좬마가복음좭에 보면 예수님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혼자 계실 때 제자들이 그 비유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 예수님은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4:11-12)라고 대답하셨다. 비유는 결국 외부 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한 암호와 같다는 말이다. 위의 비유가 바로 그런 암호인가?
그래도 나름대로 한 가지 의미를 찾아낼 수는 있다. 하느님의 나라, 곧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이기적 자아를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비우는 일이다. 그러다가 항아리가 다 비워질 때 집에 이르게 되고, 집에서 그 항아리를 완전히 내려놓을 때 우리는 그 항아리의 비워진 상태를 보고 놀라게 된다. 바울이 좬빌립보서좭에서 예수님을 두고 ‘자기를 비워’(2:7)라고 한 것처럼, 이 비유도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제98절
그 힘센 자를 죽였더라- 옛 사람의 죽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힘센 자를 죽이기 원하는 어느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손수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시험 삼아 자기 집에서 그의 칼을 뽑아 벽을 찔러보고, 그러고 나서 그 힘센 자를 죽였습니다.”
BLATZ
(98) 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man who wanted to kill a powerful man. He drew the sword in his house and drove it into the wall, that he might know his hand would be strong (enough). Then he slew the powerful man.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런 폭력적인 비유를 사용하셨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은 이렇게 폭력적인 비유이기에 감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사용하지도 않은 비유를 사용한 것으로는 해 놓을 수는 없었을 터이고, 그러기에 이 비유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사용하신 비유일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어느 사람이 죽이고 싶어 한 ‘힘센 자’가 누구일까? 우리 속에 들어있는 이기적 자아(ego)가 아닐까? 이 힘센 자를 죽이는 것은 보통으로 힘든 일이 아니다. 영웅적인 용기와 불굴의 힘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와 함께 예리한 검이 필요하다. 꾸준한 수련을 통해 갈고 닦은 검이 준비되었으면 용단을 내려 내 속의 이기적 자아, 혹은 육적 요소를 굴복시키게 된다. 이럴 때 하느님의 나라, 그의 다스리심, 참된 자유가 이르게 된다.
제99절
내 형제와 어머니-새로운 가족관계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형제들과 어머님이 밖에 서 계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들이요 내 어머니입니다. 그들이 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BLATZ
(99) The disciples said to him: Your brothers and your mother are standing outside. He said to them: Those here who do the will of my Father, these are my brothers and my mother; they are the ones who will enter into the kingdom of my Father.
공관복음 모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막 3:31-35, 마 12:46-50, 눅 8:19-21). 단 “그들이 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하는 부분은 좬도마복음좭에만 있는 말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혈연적 유대관계로 얽힌 부모나 형제자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같은 뜻으로 묶여진 사람들, 보이지 않는 영적 끈으로 묶여진 새로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어느 종교에서나 영적 구도자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출가(出家, leaving home)’란 이렇게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영적 길을 함께 가는 길벗들과 길을 같이 가는 것이다.
제100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세상 것과 하느님의 것
그들이 예수께 금전 한 닢을 보이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황제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금을 요구합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 주십시오.”
BLATZ
(100) They showed Jesus a gold piece and said to him: Caesar's men demand tribute from us. He said to them: What belongs to Caesar, give to Caesar; what belongs to God, give to God; and what is mine, give it to me.
마지막에 ‘나의 것은 나에게 주십시오’라는 말을 제외하고 공관복음 모두에 나오는 말이다.(막 12:13-17, 마 22:15-22, 눅 20:19-26).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넣을 핑계를 찾기 위해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물어보았다. 예수님은 금전 한 닢을 들고, 거기 그러진 형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물론 그것이 황제의 형상이라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라”고 했다.
예수님 당시 열성당의 창시자 갈릴리의 유다는 유대인들을 식민지 백성으로 삼고 수탈하는 이방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예수님도 열성당들처럼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잡아가도록 할 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돈이면 당연히 황제에게 돌아갈 돈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말하여 세금을 내라, 혹은 내지 말라 하는 직답을 대신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한 것이다. 좬창세기좭 1장 26절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다. 황제의 초상이 들어 있는 금화가 황제에게 가야하듯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도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에 나오는 ‘나의 것은 나에게 주십시오’하는 말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본다.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라 볼 수 있다.
제101절
미워하지 않으면-애증의 역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그러는 것처럼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그러는 것처럼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는 나에게 [죽음을 주었고], 나의 참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BLATZ
(101) <Jesus said:> He who does not hate his father and his mother like me cannot be a [disciple] to me. And he who does [not] love [his father] and his mother like me cannot be a [disciple] to me. For my mother [ . . . ], but [my] true [mother] gave me life.
LAYTON
(101) <Jesus said>, "Those who do not hate their [father] and their mother as I do cannot be [disciples] of me. And those who [do not] love their [father and] their mother as I do cannot be [disciples of] me. For my mother [. . .] But my true [mother] gave me life."
DORESSE
105 [101]. "He who has not, like me, detested his father and his mother cannot be my disciple; and he who has loved h[is father a]nd his mother as much as he loves me cannot be my disciple. My mother, indeed, has [. . .] because in truth she gave me life."
역설의 논리다. 부모를 미워하며 동시에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제55절 풀이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부모를 절대적 가치로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집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절대적 가치로 집착하지 않는 범위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부모는 영적 부모, 곧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 “나를 낳아준 어머니는 나에게 죽음을 주었고, 나의 참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나의 육신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주셨지만, ‘나의 참 어머니’ 곧 하느님 어머니는 나에게 영원히 죽지 않을 참 생명을 주셨다고 했다. 좬도마복음좭에서 절대자를 ‘어머니’로 보았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초대교회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할 때 성령을 여성으로 보았다. 성령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루악’이나 그리스어 ‘프누마’가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서방교회에서 라틴어가 공식용어로 등장하면서 성령을 나타내는 라틴어 ‘Spiritus Sanctus’가 남성 명사이기에 성령이 남성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제102절
자기도 먹지 않고 남도 먹지 못하게 하고-이중의 문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기 바랍니다. 그들은 소 여물통에 누워있는 개와 같습니다. 자기도 먹지 않고 소도 먹지 못하게 합니다.”
BLATZ
(102) Jesus said: Woe to the Pharisees, for they are like a dog lying in the manger of the cattle; for he neither eats nor does he let the cattle eat.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하는 말은 마가복음 23장 13절, 누가복음 11장 52절 등에도 나온다. 앞에 나온 좬도마복음좭 제 39절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들을 가져다가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왜 바리새인들이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하는 이유는 약간 다르다. 공관복음이나 39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이 소 여물통에 누워서 여물을 자기도 먹지 않고 소도 먹지 못하게 하는 개와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39절 풀이를 참고할 수 있다.
소 여물통 이야기는 그 당시 많이 알려져 있던 속담이었다. 이솝 우화에도 이 말이 두 번 나온다. (228화와 702화). 우리 속담에 “내 먹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와 비슷하다고 할까. 복음서에는 예수님도 그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런 세간의 속담이나 비유를 많이 인용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103절
도둑이 어디로 들어올지 아는 사람은-준비와 각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어디로 들어올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다행입니다. 그리하면 그는 일어나 힘을 모으고 무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BLATZ
(103) Jesus said: Blessed is the man who knows [in which] part (of the night) the robbers are coming, that he may rise and gather his [ . . . ] and gird up his loins before they come in.
공관복음에도 도둑을 조심하라는 말이 나온다.(마 24:43-44, 눅 12:39-40) 좬누가복음좭의 것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집주인이 언제 도둑이 들지 알았더라면, 그는 도둑이 그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이처럼 도둑이 ‘언제’ 올 것인지를 알고 그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반해, 여기 103절의 특징은 도둑이 ‘어디로’ 들어올 것을 알라고 하고 있다. 이 절이 임박한 재림을 위해 준비하라는 종말론적 경고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좬도마복음좭에는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셈이다. 앞 제21절에도 “만약 집 주인이 도둑이 올 것을 알면 그 주인은 도둑이 오기 전에 경계하여 그 도둑이 집에 들어와 소유물을 훔쳐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 경계하십시오. 힘 있게 준비하여 도둑이 여러분 있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시오.”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인자가 올 ‘때’를 알고 준비하라는 말보다, 도둑이 우리 있는 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데 역점이 들어 있다.
그러면 여기서 도둑은 누구고 집은 무엇인가? 제71절에 언급된 것처럼, 우리 몸은 우리의 영혼이 거하는 집이다. 도둑은 우리의 육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감정이다. 이런 비본래적인 마음이 욕심이나 질투나 무지 같은 우리의 취약점을 통로로 삼아 도둑처럼 우리 심층 깊이로 들어와 우리의 영혼을 훔쳐 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말일 수 있다. 인자가 올 것이기에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 가장 깊이에 있는 신성을, 나의 참 나를 지키기 위해 용사다운 기개(氣槪)를 발휘하라는 이야기이다.
제104절
신랑이 신방을 떠날 때-금식과 기도가 필요할 때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오십시오. 오늘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금식합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범했습니까?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신랑이 신방을 떠날 때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BLATZ
(104) They said [to him]: Come, let us pray today and fast. Jesus said: What then is the sin that I have done, or in what have I been overcome? But when the bridegroom comes out from the bridal chamber, then let them fast and pray.
제 6절과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금식이나 기도 같은 형식적 종교행위를 거부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분명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비로소 그 이유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세계 여러 신비주의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좬도마복음좭식으로 믿던 초대 교회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체험을 하느님과 ‘결혼관계에 들어간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신방에 든다’는 상징으로 표현했다. 남자들의 경우 하느님은 물론 신부가 되고, 여자들의 경우 하느님은 신랑이 된다.
한편 금식이나 기도는 일반적으로 죄를 참회하거나 애통해 할 때 하는 행위였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영적으로 완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죄를 참회하거나 애통해 할 일이 왜 있겠는가? 이런 사람에게 금식이나 기도 같은 것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하나 된 상태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가 와서 우리 함께 기도하고 금식하자고 할 때, 당연히 “내가 무슨 죄를 범했습니까?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신랑이나 신부가 신방을 떠남으로 하나 되었던 상태가 다시 둘로 분리되는 경우, 그 때에만 그런 상태를 슬퍼하며 둘이 다시 하나 됨을 회복되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관복음에도 신랑이 떠나면 남과 금식이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 거론되어 있다.(마 9:15, 막 2:20, 눅 5:35) 그러나 좬도마복음좭에서와 같은 신비주의적 의미가 전혀 없고, 신랑이신 예수님이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이 필요 없었지만, 예수님이 가신 다음에 다시 금식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설명 내지 합리화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유대교의 금식제도를 받아들여 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일로 하다가 유대교와 차별화하기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을 금식하는 날로 삼았다.
제105절
창녀의 아들이라 불릴 것-박해의 필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사람, 그가 창녀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BLATZ
(105) Jesus said: He who knows father and mother will be called the son of a harlot.
LAYTON
(105) Jesus said, "Whoever is acquainted with the father and the mother will be called the offspring of a prostitute.
DORESSE
109 [105]. Jesus says: "He who knows father and mother shall he be called: Son of a harlot!"?
후대 어느 유대인이 쓴 문헌에 예수님은 마리아가 로마 군인 판테루스(Pantherus)에게 강간당해 태어난 사생아라 주장하는 기록이 있다. 또 좬마태복음좭에 나온 족보에 보면 예수님의 조상 중에는 정숙하지 못한 여인 다말이나 기생 라합이 포함되어 있다. 또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결혼 자체가 매매춘 제도로 모든 아이들은 결국 창녀의 아이들이 되는 셈이라고 본 이들도 있다. 이 105절이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수님 뿐 아니라 누구나 육신적인 부모나 조상의 뒤를 캐보면 그 중에 정상적인 혼인 관계가 아닌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된 이들이 왜 없겠는가, 더군다나 결혼 자체가 모든 여인을 창녀로 만드는 일이라고 본다면, 육신적으로는 우리 모두 창녀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리라.
제106절
둘을 하나로 만들면-사람의 아들이 가진 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만들면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들이 됩니다. 여러분이 ‘산아, 움직여라’고 하면 산이 움직일 것입니다.”
BLATZ
(106) Jesus said: When you make the two one, you will become sons of man, and when you say: Mountain, move away, it will move away.
좬도마복음좭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둘을 하나로 만듬’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는 곳으로 제 22, 61, 72, 89절을 보면 된다. 여기서는 둘을 하나로 만들 수 있으면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되고, 산을 보고 움직이라 하면 산이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은 48절에 나와 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위에 ‘창녀의 아들’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둘을 하나로 한 사람, 따라서 모든 대립과 모순을 초월한 완전한 사람,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한 자유인, 깨친 사람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사람이다. 이제 산을 보고 움직이라고 호령하는 등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형식적 종교나 권위, 산인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수 있으랴?
제107절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더-가장 큰 한 마리의 중요성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목자와 같습니다. 그 중 제일 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놓아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가 그것을 찾았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다음 그는 그 양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더 귀히 여긴다.’고”
BLATZ
(107) Jesus said: The kingdom is like a shepherd who had a hundred sheep; one of them, the biggest, went astray; he left (the) ninety-nine (and) sought after the one until he found it. After he had laboured, he said to the sheep: I love you more than the ninety-nine.
이른바 ‘잃은 양’의 비유이다. 마태복음 18장 12-14절에 나오는 비유에는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는 이유가 그 불쌍한 양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임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4-7절에서는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 못 박았다. 이른바 윤리적 차원의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 이 좬도마복음좭의 비유에서는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불쌍한 양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아흔아홉 마리보다 ‘더 크고 더 귀한’ 양이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한다. 제8절에 어느 지혜로운 어부가 그물을 바다에 던져 물고기들을 잔뜩 잡아 올렸지만 그 물고기들 중 좋고 큰 고기 한 마리만을 남기고 다른 작은 고기들을 다 바다에 다시 던져 버렸다는 비유나, 제76절에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다른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샀다는 비유와 궤를 같이 한다.
삶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찾아야 할 ‘귀한 양’, ‘큰 생선,’ ‘진주’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궁극 관심’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둘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조셉 켐벌(Joseph Campbell)도 세계 모든 신화에 나오는 정신적 영웅들이 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것은 ‘양극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orum)’이라는 진리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풀이는 앞 8절과 76절 풀이를 참조할 수 있다.
제108절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비밀이 드러남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도 그와 같이 되어,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BLATZ
(108) Jesus said: He who drinks from my mouth will become like me, and I will become like him, and the hidden things will be revealed to him.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이란, 제13절에 나온 도마처럼, 예수님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취한 사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새로운 의식 상태에 들어간 사람이다. 이런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되고 예수님도 그와 같이 된다. 이런 식으로 진리에 입문한 사람에게는 지금껏 감추어졌던 더욱 깊은 차원의 진리가 계속 드러난다.
깨달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제13절에 깨달음에 이른 도마를 보고 더 이상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도 제자가 깨침을 받으면 사제의 관계보다는 영적으로 서로 동격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 같이 ‘길벗’이나 ‘도반(道伴)’이 된 셈이라고 할까.
제109절
밭에 감추어진 보물-보물의 활용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자기 밭에 보물이 묻힌 것을 모르고 그 밭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그 밭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보물이 묻힌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유산으로 받은 밭을 팔았습니다. 그 밭을 산 사람이 밭을 갈다가 그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는 그 돈을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BLATZ
(109) Jesus said: The kingdom is like a man who had in his field a [hidden] treasure, of which he knew nothing. And [after] he died he left it to his [son. The] son also did not know; he took the field and sold it. The man who bought it came (and) as he was ploughing [found] the treasure. He began to lend money at interest to whomever he wished.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나오는 비유는 어떤 사람이 남의 밭을 갈아 주다가 보물을 발견하자, 그것을 제 자리에 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샀다고 되었다.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따진다면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보물을 찾았으면 밭주인에게 말하고 찾아 준 것에 대한 사례비 정도만 받아야 할 터인데 그것을 숨기고 밭을 몽땅 사는 얌체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여기 109절에 나오는 비유는 자기 밭에 보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아버지가 그 밭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밭에 보물이 있는 줄도 모르던 아들이 그 밭을 다른 사람에게 팔고, 그것을 산 사람이 우연히 그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여 횡재하고, 그 돈으로 이자 놀이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도 윤리적 차원으로만 말하면 셋째 사람은 밭을 사서 횡재한 것까지는 상관없으나 그 돈으로 이자 놀이를 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나 이런 비유에서 윤리적인 뜻만 찾으려 하면 곤란하다. 마태복음의 비유에서는, 앞에서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했으면 거기에 ‘올인’해야 하듯, 우리의 삶에서 내 속에 신성(神性), ‘참나’가 있음을 알았으면 그것을 위해 세상사의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길 각오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 좬도마복음좭의 비유도 우리가 우리 속 깊이에 신성, ‘참나’가 있는지도 모르고 잠자는 상태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음 밭을 깊이 갈아 그 속에 있는 신성, 참나를 발견하고 이를 일깨워 궁극적으로 변화와 자유를 얻은 사람은 심지어 남에게 이자로 돈을 꿔줄 수 있을 정도로까지 영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말로 풀 수 있을 것이다.
보물이 숨겨진 밭을 몰래 산다는 비유가 ‘얌체 짓’을 권장한 것이 아닌 것처럼, 밭에서 보물을 찾아 이자로 준다는 비유도 이자 놀이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유란 모든 점에서 다 들어맞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점을 강조할 때 비록 다른 점이 꼭 들어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비유를 쓸 수 있다. 그러기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며 비유의 핵심을 분별하라, 새겨들으라 했던 것 아닐까.
제110절
세상으로 부자된 사람은-세상을 부정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찾아 부자 된 사람은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BLATZ
(110) Jesus said: He who has found the world (and) become rich, let him renounce the world
앞에서 제 21, 27, 56, 80, 81절에서 계속 논의되던 이야기이다. 현상 세계의 실상을 보고 거기 달라붙지 말라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실상을 찾아 알게 되면 그것이 결국 궁극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어느 면에서 영적으로 부요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결국은 궁극 실재로 나아가기 위해 이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버린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 도피적인 은둔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적 가치를 떠받들거나 세상에 집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을 뒤로 하거나 내려놓을 때 바로 자유가 온다.
제111절
하늘과 땅이 말려 올라가도-자기 발견의 중요성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여러분 보는 데서 말려 올라갈 것입니다. 살아 계신 분으로 인해 사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발견한 사람에게 세상은 대수가 아닙니다.” 하고.
BLATZ
(111) Jesus said: The heavens will be rolled up and likewise the earth in your presence, and the living one, (come forth) from the Living One, will not see death or <fear>, because Jesus says: He who finds himself, of him the world is not worthy.
LAYTON
(111) Jesus said, "The heavens and the earth will roll up in your (plur.) presence. And the living from the living will not see death." - Doesn't Jesus mean that the world is not worthy of a person who has found the self?
DORESSE
115 [111]. Jesus says: "The heavens and the earth will open (?) before you, and he who lives by Him who is living will not see death", because (?) Jesus says this: "He who keeps to himself alone, the world is not worthy of him."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이 우리 앞에서 말려 올라가고, 우리가 그런 종말론적 사건을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 풀면 곤란하다. 설령 하늘과 땅이 우리 눈앞에서 말려 올라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코앞에서 말려 올라가든 말든, 살아 계신 이로 인해 생명을 얻은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기에 염려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 구절,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하는 것은 이상스러운 구문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본다. 그러나 그 내용은 좬도마복음좭의 기본 가르침과 일치한다. ‘참나’를 찾은 사람은 세상을 그렇게 대수롭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이나 물질세계에 초연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제112절
영혼에 의존하는 몸이나 몸에 의존하는 영혼이나-영육 이원론의 극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에 의존하는 몸은 화있을 것입니다. 몸에 의존하는 영혼은 화있을 것입니다.”
BLATZ
(112) Jesus said: Woe to the flesh that depends on the soul; woe to the soul that depends on the flesh.
앞 87절에 ‘몸에 의존하는 몸도, 그리고 몸에 의존하는 그 몸에 의존하는 영혼도 비참’하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영혼에 의지하는 몸, 그리고 몸에 의지하는 영혼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몸(body)과 영혼(soul)과 정신 혹은 성령(Spirit)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성령이 빠지고 영혼에만 의존하는 몸, 몸에만 의존하는 영혼은 안 된다는 뜻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몸과 영혼이 모두 하느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영, 나의 참 나를 찾는 일이 축복이라는 이야기다.
제113절
아버지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어-그 나라의 편재성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그 나라가 언제 이를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어, 사람들이 볼 수 없습니다.
BLATZ
(113) His disciples said to him: On what day will the kingdom come? <Jesus said:> It will not come while people watch for it; they will not say: Look, here it is, or: Look, there it is; but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spread out over the earth, and men do not see it.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다시 드러낸 구절이다. 제자들은 아직도 그 나라가 ‘언제’ 이를 것인가 하는 우주적 종말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예수님은 다시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 미래 어느 한 지점에 나타날 그런 무엇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24절에 ‘빛’의 편재성에 대해 말했는데, 여기서는 그 ‘나라’의 편재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빛, 나라, 하느님, 절대자, 나의 참 나, 이 모두가 동일한 실재의 여러 가지 측면이기에, 이 절에서도 24절과 같이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은 하느님 속에 있다는 기본 진리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단 24절이 그 절대적 실재가 공간적으로 편재하다는 것을 강조한 데 비해 여기서는 특히 시간적으로 어느 한 시점에 국한 될 것이 아님을 함께 부각하고 있다. 나라는 미래 어느 시점에 도래하는 무엇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관통하는 것, ‘영원한 이제(eternal now)’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 51절에 언급된 것처럼, 그 나라는 이미 여기 있지만 우리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제114절
그녀를 남자로 만들어-여자와 남자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를 떠나야 합니다. 여자들은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그녀를 인도하여 그녀를 남자로 만들어 그녀도 여러분 남자들처럼 살아계신 영이 되게 하겠습니다. 스스로 남자가 되도록 하는 여자가 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BLATZ
(114) Simon Peter said to them: Let Mariham go out from among us, for women are not worthy of the life. Jesus said: Look, I will lead her that I may make her male, in order that she too may become a living spirit resembling you males. For every woman who makes herself male will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여성에 대해 친절하지 못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마리아복음등에서도 베드로는 여성 차별적인 인물로 나온다. 여기 좬도마복음좭 마지막 절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놓고 여자들은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기에 마리아를 내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이런 발언에 대해, 예수님이 그러면 “내가 그녀를 남자로 만들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양극의 일치’를 그렇게 강조하는 좬도마복음좭에 어찌 이렇게 남존여비 사상을 조장하는 듯한 이런 이야기가 여기 거의 문맥과 상관이 없이 불쑥 들어가 있을까? 이런 여성 비하적인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한 절 때문에 좬도마복음좭의 신뢰도가 심히 의심스럽다거나 그 아름다움이 심히 훼손되었다는 이들이 많다. 물론 이 절의 말이 독립적으로 떠돌다가 나중에 좬도마복음좭끝에 덧붙여졌음에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구태여 의미 있게 읽으려면, 여기서 베드로는 여성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데 반하여 예수님은 여자들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면 된다. 물론 예수님도 여자들이 남자들이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점으로 역시 남녀 차별 사상을 가지고 있던 분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서 성전환 수술이나 환생을 이야기하신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마리아를 인도해 ‘남자’로 만들겠다는 말을 마리아를 인도해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말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남녀 차별을 조장내지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 뿐 아니라 누구라도, 심지어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남성 제자들마저도, 지금의 성별과 관계없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통전적 인간이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2절에도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해야’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에 충실하려면 여기서도 구원받을 남자란 그냥 남자가 아니라 남자 같기도 한 여자, 여자 같기도 한 남자, 말하자면 남성성과 여성성의 변증법적 융합을 이룬 온전한 사람을 함의하는 말이라 보면 된다.
오강남 l 박사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학사 석사)와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다.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캐나다 밴쿠버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도덕경』, 『장자』,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 『예수의 기도』가 있다.
http://saegilchristian.org/zbxe/thomas/48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