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리큐 은사정원(旧芝離宮 恩賜庭園)
구 시바리큐 은사정원(旧芝離宮恩賜庭園)은 도쿄 미나토구 해안에 있는 도립공원으로 오오쿠보 타다토모(大久保忠朝, 1632-1712)의 가미야시키(上屋敷)의 정원 라쿠쥬엔(楽寿園)이 그 시초이며, 궁내청 관리의 리큐(離宮)을 거쳐 1924년 도쿄시에 하사되어 구 시바리큐 은사정원(旧芝離宮恩賜庭園)으로 일반공개되었다.
칸에이(寛永, 1624-1644) 시대 중반, 이요 마츠야마(伊予松山) 번(藩) 및 무츠 아이즈(陸奥会津) 번(藩) 초대번주였던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1563-1631)에게 하사되었다가, 오다와라(小田原) 번(藩) 오오쿠보(大久保) 가문의 히카에테(控邸)가 되었고, 이후 시미즈(清水) 가문 소유가 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전까지는 기이(紀伊) 번(藩)의 하마야시키(浜屋敷)였다가, 1871년 3월부터는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왕가의 저택이 되었고, 1875년 8월, 왕태후 임시거처로 왕실에 귀속되었다.
1632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슈토시마고오리에도노쇼우즈(武州豊嶋郡江戸庄図)에 의하면, 일대가 갈대가 무성한 매 사냥터였었고, 그즈음 토목기술이 발달하면서, 만조 때의 바닷물에도 견딜수 있는 제방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메이레키(1655-1658) 연간에 매립되었던 땅을 1678년 당시 카라츠(唐津) 번주( 藩主 )였던 오오쿠보 타다토모(大久保忠朝)가 로쥬로 부임하면서 이 땅을 하사받아 구 시바리큐 은사정원(旧芝離宮恩賜庭園)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과거 구 시바리큐 은사정원(旧芝離宮恩賜庭園) 관련하여 정원 연구의 권위자인 타츠이 마츠노츠케( 龍居松之助,1884-1961)에 의해 오오쿠보 가문의 문중서적에서 발굴된 라쿠쥬엔기(楽寿園記)에 의해, 겐로쿠(元禄, 1688-1704) 연간 이전인 죠우쿄우(貞享, 1684-1687) 연간에 이미 정원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1686년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에 따르면, 겐로쿠 연간 당시의 로쥬(老中)였던 오오쿠보 타다토모(大久保忠朝)가 번지(藩地) 오다와라(小田原)의 원사(庭師)에게 의뢰해서 정원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정원은 회유식 (回遊式) 조입임천潮入林泉) 방식으로 장대한 석조는 없지만, 구획에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에도시대의 명원으로, 당시 정원 내에는 칸게츠소(観日荘), 겟파(月波), 시오이리노이케(潮入の池) 등이 있었다고 하고, 정원의 동쪽에는 궁도장, 말 목장 등 무사의 정원의 면모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명명의 유래는, '이 정원의 곧 사시의 절경이 다 같지 않고, 팔면의 풍경을 모두 아우른다. 그 중에도 특히 안락함은 인리(人理)에 있다.저 산이 천고를 꿈쩍않았듯, 그에 다다름은 사리에 있다. 이는 바다 만리를 주유함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태수가 얻은 바는 토시히토(智仁)의 라쿠쥬(楽寿)이다. 여기에서 정원의 이름을 따왔다.'라고 전해진다. 영지가 정해지고 곧 정원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연대상 맞지 않기도 하고, 당시 1629년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조성 당시 교토로부터 정원사가 초빙되었던 것으로 보아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실제 1698년 가독을 타다마스(忠増, 1656-1713)에 물려주고 이 정원으로 은거한 점을 볼 때, 이 시기에 오다와라로부터 정원사를 불러 조성한 것일 수 있다. 이후 몇번인가 넓혀져 6대손인 타다아키(忠顕, 1760-1803) 대에는 면적이 48,600 평방미터에 달했다.
1776-1782년 간에 작성된 도면에 의하면, 연못 북서쪽에 고덴(御殿), 남서쪽에는 가신들이 머무는 나카야(長屋), 중앙에는 연못, 바다 쪽은 벌판으로 표시되어 있고, 나카지마(中島)에는 다리가 두 개 놓여 있으며, 우키시마(浮島)와는 사와타리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남쪽에는 유리창을 단 찻집, 연못 뒤쪽에는 츠키야마가 묘사되어 있다.
이후 1818년에는 가미야시키가 에도 성 인근으로 옮겨지면서, 오오쿠보 가문 소유에서 시모우사노쿠니(下総国) 사쿠라번(佐倉藩) 가문 소유로 잠깐 넘어간 것으로 보이고, 4년 후인 1823년에는 고산쿄(御三卿)의 하나였던 시미즈(清水) 가문의 시모야시키가 되었다고 한다. 이 즈음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 家斉)의 49자가 시미즈 가문의 양자가 되어 나리카츠(斉彊)로 이름을 바꿨다가 1846년에는 다시 기슈도쿠가와(紀州徳川) 가문의 양자가 되면서 이 즈음 기슈도쿠가와 가문의 영지가 더해져, 시바고야시키(芝御屋敷)라 명명되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끈 함대가 나타났을 때 즈음 기슈번에서는 정원 남동쪽에 포대를 쌓았고, 이 즈음의 지도를 보면 남서쪽 나카야 대신 츠키야마를 쌓은 것이 눈에 띈다. 또한, 오오야마(大山), 카레타키(枯滝), 히이라기야마(ヒイラギ山), 네브카하야마(ネブカハ山), 카라즈야마(唐津山), 스리바치야마(スリバチ山) 등이 보인다.
이후 1871년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왕가의 소유가 되었고, 1875년 메이지 일왕이 행차하여 동쪽 바닷가의 큐샤쿠다이(九尺台)에서 조망한 후 석주 뒤쪽의 바켄죠(馬見所)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왕실에서 매입하여 히데아키(英昭) 왕태후의 오다치노키쇼(御立退所)로 사용했다가, 1876년 시바리큐(芝離宮)로 명명되었고, 1891년에 서양관이 지어져, 하마리큐를 대신하는 영빈관으로서,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 이탈리아 및 독일의 왕족, 러시아의 육군대신 크로파토킨, 조선의 황태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친옹 등 많은 국빈을 맞이하는 장소가 되었다. 영빈관은 아타치 쓰루요시(足立鶴吉)가 맡았는데, 엘리자베스식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한 스틱 양식으로 지어졌다.
1907년 발행된『도쿄안내(東京案内)』에 의하면, 「1876년 2월10일, 하마자키쵸(濱崎町)에 있으며, 「시바리큐(芝離宮)」라는 명칭으로 지정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05년경의 시바리큐(芝離宮)는, 남쪽으로 시나가와 만(品川湾)에 면해있고, 북쪽으로 신바시(新橋) 철도에 접해 있으며, 전체 1,492평 면적에, 단층의 일본관(日本館) 건물인 고자쇼(御座所), 코세키노마(後席の間), 식당이 있고, 2층 목조건물의 서양관에는 2,700 여평 넓이의 가운데에 심물이 있고, 바닷물을 끌어들였으며, 그 안에는 세 개의 섬을 설치하고 다리를 놓았고, 연못 주위에는 츠키야마(築山)가 있어, 괴석과 매화나무가 배치되어 있고, 산 위 아즈마야(四阿屋)에서는 시나가와 방면의 바다가 조망할 수 있었다.
1923년 대화재 당시, 큰 피해를 입었고, 또한 피난소로 쓰이면서 다소 훼손되었지만, 곧 복구되었고, 1924년 당시 왕세자였던 히로히토 일왕의 성혼 기념으로 우에노 은사공원 사루에 은사공원과 함께 도쿄시에 하사되면서, 추가 조경 공사가 있었으며, 이 때 근처의 공장폐수 유입을 막기 위해 해수 입수를 막았다. 1931년 9월26일, 적치장을 개조하여 배구장, 정구장을 만들고, 1933년 2월 11일, 말 목장터에 궁도장을 만들어 공개했다. 1933년에 사적 지정되었다.
고이시카와 고라쿠엔과 더불어 에도시대 초기에 조영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귀중한 다이묘 정원으로 철도가 부설되면서 영지가 분단되어 바닷쪽만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연못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西湖堤는 중국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한 것이고, 가라츠야마()는 원림의 주인의 고향을 기려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네부카와야마( 根府川山) 또한 오다와라에서 가져온 네부카와이시(根府川石)로 쌓은 것이라고 한다. 나카시마는 봉래산을 형상화했다고 하고, 정원 내의 석주는 오오쿠보 타다토모(大久保忠朝, 1632-1712)가 오다와라 번주였을 당시, 호죠우지야스( 北条氏康)를 모셨던 전국시대 무장 마츠다노리히데(松田憲秀) 구택의 문주를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를 초대했을 때 다실을 짓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