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이 가는가보다 했다. 지난 2월 초까지만해도.
그러다가 둘째주 주말이 지나고 14일 월요일 뉴스에서 들리는 날씨예보는 다시 추워지고 일부 지역에서 눈이 많이 내린단다.
지금이 기회다. 마지막 겨울 산행을 가자.
눈을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으로 가고 싶은데 덕유산을 갈까? 아,, 거기는 법주사까지 지리한 임도길을 걸어야하는데 생각만 해도 흥미가 떨어지고 더군다나 아래쪽이니 눈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 그럼 북쪽으로 가자. 서울 도봉산도 멋진 산이지만, 더 북으로 올라가볼까 싶어 이래 저래 검색을 하던 중 어느 블로거가 쓴 치악산 종주 산행기를 읽게 되었다. 예전 고등학교 산악부때 몇 번 가본 적 있는 치악산이다. 잊고 있던 치악산 그 곳을 가볼까?
지난 민주지산을 함께 다녀왔던 암장의 손문희 선생님과 기초반 강습회원이었던 양하원씨에게 슬쩍 치악산 종주 떡밥을 던지니 손선생님도 덥썩, 하원씨도 덥썩이다. 마침 시간이 다들 된다며 재미있을 것 같단다.
이 블로거의 등반기를 다 읽어보시고 하는 답변들일까? 다 읽었단다. 21~2km 되는 겨울산 종주 쉽지 않은데 그것도 치악산인데...? 한번 해보지 뭐 그러신다. 고뤠요? 그럼 go go~!
그렇게 해서 떠나게 된 치악산.
2월 19일 복합터미널에서 집결, 오후 6시에 출발하는 원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출발이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행동식으로 무얼 싸왔는지 점검하다가 박장대소. 다들 산행하다가 배고플까봐 과한 양의 행동식을 싸온 것이다. 셋이 다 동일하게 서로 먹을 양까지 고려하여 넉넉하게. 너무 웃겼다. 얼마나 이 산행에 대해 긴장하고 준비했을지 알 것 같았다.
저녁 8시 원주시외버스터미널 하차. 예전보다 터미널이 커진 것 같다. 지금도 공사가 진행되는 듯 어수선했지만.
터미널 밖으로 나온 원주는 매우 화려했다. 원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이 대전 복합터미널보다 훨씬 활발한 느낌이고 화려한 것 같았다.
숙소는 하원씨가 예약을 했는데 하루밤 대충 자는 곳 치고는 너무 비쌌다. 내가 요즘 물가를 모르는 건지 세 사람 하루밤 8만원을 호가하는 구닥다리 숙소에서 여장을 풀었다(보일러조절기가 방안에 없어서 춥고 전기매트는 고장나서 사장님께 얘기하여 매트 교체하고).
다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출발했건만 입이 심심하여 하원씨가 싸온 샐러드를 뜯고 육개장사발면에 물을 부었다. 양갱도 먹고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한 후 저녁 11시 좀 넘어 취침하였다.
다음날 새벽 5시.
전날 맞춰놓은 두 대의 핸드폰 알람이 칼같이 울린다. 숙소 침대의 전기매트가 뜨거워서인지 꿈까지 꾸며 잘도 잤는데 이제 일어나야 한다. 하원씨와 손선생님은 알람을 듣자마자 튕기듯 일어난다. 용수철인 줄 알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나는 움직이기가 싫은데... 숙소 외풍 때문일까.
손선생님과 하원씨의 기척을 모른척 하고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 일어나 준비해온 코펠과 버너를 이용해 눌은밥을 끓여 김치와 김과 함께 대충 먹는다. 이 시간에 밥이 들어갈리 없건만 억지로 먹고 있는 것은 오직 오늘의 긴 산행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이다.
식사후 쾌변이 나와주면 상쾌한 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지. 가뜩이나 긴장감이 흐르는 컨디션인데 그럴 리가 있나.
오전 6시. 짐을 꾸려 마지막으로 숙소를 한번 둘러보곤 콜한 카카오택시를 타고 구룡사로 이동한다.
택시 안이 무척 따뜻하다. 차량 이동시간이 대략 30분이니 눈을 좀 감고 있을까 싶었는데 친절하신 기사님께서 여자들 셋이 치악산을 올라간다니까 호기심이 생기셨는지 본인이 처음 치악산에 올라갔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말씀하신다. 물도 간식도 없이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올라갔다가 탈진 직전에 이르러서야 겨우 하산을 완료했다는 말씀에 누군가가 오버랩되면서 떠올랐다.
일요일 이른 새벽시간이라 뻥뻥 뚫린 도로를 따라 30분 이동했더니 다 왔다고 하시는데 여전히 밖이 컴컴하다. 택시에서 내리니 꽤 춥다. 껌껌하지만 그냥 갈까 금방 해 뜰텐데 했다가 칠흑같은 어둠에 헤드랜턴을 꺼내기로 하는데 그 잠깐 동안 서있는데도 너무 추워서 정신이 없었다.
걸으면 좀 나아지겠지...
출발하려는 마당에 뒤늦게야 손선생님께서 '나도 헤드랜턴 꺼낼까?' 하시며 배낭을 내려놓고 꾸물꾸물 하신다. 너무 추워서 기다려드릴 여유가 없을 정도이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살고 보자 싶어 먼저 천천히 걷는다.
구룡사까지 나있는 임도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산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어둠 속 오직 우리 셋 뿐이다. 적막함 가운데 불규칙한 발걸음과 스틱 찍는 소리만이 존재한다.
걸으면서 몸 컨디션을 점검한다. 신발 바닥 밑창은 걷는 느낌이 어떤지, 레이어링시스템이 잘못 되진 않았는지, 배낭무게는 적절한지, 화장실을 가야 하는지 참아야 하는지 등등.
구룡사를 지나면서 보니 참말 화려하다. 얼마나 많은 불자들이 시주를 했을까 싶다.
구룡사를 지나 첫번째 화장실이 있어야 하는데 안보인다. 이 추운 날씨에 자연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나 했는데 좀 더 걸어가니 두번째 화장실이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 너무 따뜻해'.
정신이 돌아온다. 너무 추워서 '레이어링이 잘못 되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걸으면 나아지겠지 마음을 다지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그 사이 밖은 환해졌고 안보이던 등산객들이 대여섯분 보인다. 길은 다져진 눈으로 덮힌 돌길로 아이젠을 신지 않아도 갈만하다.
평지에 가까운 밋밋한 길을 한참 걸어 세렴폭포 갈림길에 도착, 드디어 사다리병창 시작이다.
길고 긴 나무계단. 반대쪽에서 출발하여 이 사다리병창길을 하산길로 할까 아니면 올라가는 코스로 할까.
어제 저녁 숙소에서 코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구동성으로 '올라가는 게 낫지' 했다.
쉬엄쉬엄 천천히 오르면서 보니 올라가는 코스로 정하길 잘한 것 같다. 계단의 높이가 적당한 곳도 있지만, 꽤 높은 돌계단구간도 있어서 내리막으로 내려왔다간 무릎과 허벅지가 만신창이가 되었을 성 싶다.
끝도 없는 오르막길을 숨이 턱까지 차고도 넘치도록 오르고 오른다. 대단한 오르막길이다. 쉽지 않은 오르막길.
긴 것도 긴 것이지만, 계단의 높이가 오르막길 난이도를 높이고 있다.
바람이 꽤 분다. 날씨를 미리 보고 왔고 4~5m/s 정도의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고 왔지만, 너무 오랜만에 리얼한 북쪽의 겨울산행을 경험한다. 아, 장갑을 좀더 두꺼운 것을 끼고 올걸... 발은 계속 움직이니 상관없지만 손은 스틱을 잡고 고정된 상태로 바람을 맞으니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무지무지 시리다.
서로 말이 없이 오르고 또 오른다. 생각보다 추워서 힘들고 급경사 계단길을 오르니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계단을 앞서 오르던 하원씨가 잠시 서서 주변을 감상한다. 어느 정도 하원씨가 가까워지는데 잠깐 뒤돌아보란다. 아우 힘들어서 돌아볼 여유가 없는데... 하는 순간 눈에 들어온 눈꽃나무 풍광.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한라산에서 본 풍광만큼 아름다운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여유는 1도 없다. 장갑을 벗었다가는 손이 곱을 정도이니 그냥 눈으로만 감상할 수 밖에...
얼마나 남았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계단 돌계단길을 오르고 오르다가 말등바위전망대에서 잠깐 쉬었다. 전망을 보려고 멈춰선 것은 아니고 그냥 힘드니까 저절로 발이 멈춰졌는데 눈에 들어오는 비로봉 정상이 마음에 든다. '그래, 저거야. 겨울산행이라면 이 정도 풍광은 선사해주어야 올 맛이 나지'
밑에는 눈이 없는데 치악산 정상은 눈꽃이 소복이 내려앉아 마치 정상부에 안개가 뿌려진 듯 멋진 풍광이었다.
산행트랙기록을 하던 핸드폰으로 풍광을 찍으려는데 핸폰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어? 이렇게 빨리 방전이 되나.
가져온 보조배터리를 연결하는데 아우 손이 시렵다. 손이 너무 시려운 이 마당에 배터리가 연결되었는데도 전원이 안들어온다. 추운 날씨에 보조배터리도 방전이 되었나?
손이 시려우니 일단 배터리만 연결해놓고 얼른 장갑끼고 출발. GPS 기록도 하고 간간히 지도를 보면서 운행하던 습관이 배었던 터라 핸폰전원이 나가버리니 마치 눈을 감고 산행하는 듯 불안해진다.
너무 추워서 핸폰이 맛이 간걸까? 어떻하지? 남대봉까지야 길이 잘 나아있으니 큰 문제가 없겠지만 운행속도를 체크하면서 가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탈출하기로 했기 때문에 지도가 필요한데... 급경사 오르막을 헉헉대며 오르는 동안에도 머리속으로는 여러 생각으로 신경이 쓰였다.
한참 걷다가 오른쪽으로 휘어진 길목에 커다란 바위가 보이길래 바람을 피해 그리로 숨어서 장갑을 벗고 핸폰을 다시 확인해본다. 보조배터리 연결했는데도 전원이 안들어온다. 날이 너무 추워서 얘네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라는 게 감이 왔다. 그래, 알겠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 비로봉 정상에는 방향표시가 잘 되어 있을 것이다.
비로봉 정상에 도착했지마는 나는 아무 감흥이 없다. 몹시 추울 뿐이다. 정상부는 바람 피할 곳이 없기 때문에 바위 뒤에 숨어 차나 한잔 마시고 얼른 가야겠구나 싶었다.
나는 추위로 정신이 없는데 정상에 계신 몇 분 안되는 다른 등산객들은 천천히 주변을 감상하며 여유있어 보인다.
손을 덜덜 떨며 보온병 뚜껑을 돌리는데 손이 곱아서 돌아가지를 않는다. 다리 사이에 보온병을 끼고 양 손바닥을 이용해 뚜껑을 돌렸다. 꿀차로 준비해오길 잘했지. 뜨끈하고 달달하니 너무 좋다.
이 마당에 하원씨는 샌드위치를 먹겠다고 장갑을 벗고 포장을 찢고 있다. '대단하다. 안추운가보네....' .
하지만 이내 너무 차가워서 베어지지가 않는다고 가방에 넣어버린다. 잘 됐다 싶었다. 아무리 하원씨가 괜찮아도 샌드위치를 먹느라 정상부에 머무는 동안 몸이 추워질테니 말이다.
어디가 향로봉으로 향하는 길인지 찾아 보았다. 내 기억에 지도상으로 비로봉 정상에서 오른쪽이었다. 어, 그런데 오른쪽에는 상원사라는 표지판과 계곡 이라고 씌어진 표지판만 보였다. 향로봉이라고 씌여진 표지판이 안보이네?
오른쪽이 아니었나? 하고 왼쪽을 보니 길은 있는데 거긴 아무런 표지판도 없었다.
방향에 확신이 안서 바위 뒤쪽에 수그리고는 장갑을 벗고 핸폰을 켜려고 시도 해보았다. 켜지지 않을 것을 예상했는데도 여전한 행동을 하는 건 판단력이 문제있다는 징조이다.
멘붕이 왔다. 손이 곱아오면서 몸이 몹시 추워지자 당황했고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원사가 남대봉 지나 하산로상에 있는 절이니 그 방향이 주능선길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우왕좌왕 한 것이다.
내가 멘붕인 동안 해맑게 기념사진을 찍으며 정상 기분을 즐기던 하원씨와 손선생님이 어디로 가면 되느냐 물으신다. 나만 믿고 있는 두 분인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
눈에 보이는 어떤 등산객에게 '향로봉'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물으니 자기도 그리로 간다며 '상원사'쪽 계단을 가리킨다. 으휴...
나의 이런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손샘과 하원씨와 향로봉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손이 곱아서 스틱을 잡을 수가 없어 하산길인데도 불구하고 스틱 두 개를 옆구리에 잘 끼고 양손을 쟈켓주머니에 집어넣고 내려간다. 등산 중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산행하는 건 안전하지 않은 행동인데 손이 시려 어쩔 수가 없었다.
고민이 된다. 손이 이러면 더 갈 수가 있을까? 기온이 계속 이런 상태라면 ... 두 분은 나만 믿고 가는건데... 등등
결국 내려가다가 두 분께 내 상태를 말씀드렸다. 제가 예전에 토왕빙폭등반하다가 죽을 뻔한 일이 있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손에 동상기가 있는데 어쩌구 저쩌구 하산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랬더니 하원씨도 지금 등산화 속에 발이 너무 시렵다며 끝까지 종주는 무리일 것 같다고 해 나의 미안함을 줄여준다.
손샘도 무리하지 않는게 좋다며 그러자고 하시고...
하여 내려가기로 했다.
구룡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계곡길이고 태양볕을 쬘 기회가 없었고 기온도 엄청 낮았다. 그와 달리 비로봉에서 향로봉으로 향하는 길은 능선길이라 해가 잘 비춰주었다. 바람은 더 심했지만...
조금 내려오다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둔덕 아래에서 뭘 좀 먹기로 했다. 아직 11시가 안되었으나 6시 30분부터 시작한 격렬한 산행에서 먹은 거라곤 물종류 뿐이니 뭘 먹어야 할 듯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으면 살 것 같고 위험구간에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빼고 스틱을 잡으면 금새 몸이 춥다. 손샘에게 군인들이 사용하는 기능좋은 핫팩이 있다고 하시길래 하나 얻어서 주머니에서 손으로 주물주물하니 금새 열기가 전달이 된다. 완전 굿이다.
평소 핫팩을 잘 쓰지 않던 나인데 앞으로 비상용으로 하나 정도는 갖고 다녀야겠다.
이제 살았다. 양지에 있으니 시름시름하던 핸드폰도 원기가 왕성해졌다. 배터리 88%란다.
손선생님이 싸온 굳지 않는 떡은 히트다 히트. 이 날씨에 말랑말랑한 떡의 질감과 속에 들어간 달달한 호박고구마앙금은 기운을 차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준비한 각종 행동식들은 배낭 속에서 전혀 꺼내지지 않았고 배낭 깊은 곳에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굳지 않는 떡을 검색하니 대번 손샘이 싸온 떡을 찾을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말랑말랑함이 입 속에 바로 전달된다. 아웅, 또 먹고 싶다.
손샘의 핫팩으로 컨디션이 살아난다. 겨울산행이 즐거워진다. 지난번 민주지산 산행때 하원씨에게 겨울산 3종세트를 해야 한다며 민주지산으로 눈을 경험했으니 다음번에는 바람을 경험해야 한다고 허세를 부렸는데 오늘 혼쭐이 났다.
향로봉으로 향하는 능선에서 간간히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등산객과 마주칠 수 있었다. 요즘 젊은 등산인의 핫한 패션인 레깅스를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청바지를 입고 산행하는 분도 보았다. 각자 몸의 순환능력이 다르니까 뭐...;;
저기만 오르면 향로봉 정상이겠지 했다가 한 고개가 더 있고 도착할 듯 도착할 듯 약만 올리던 향로봉에 드디어 도착했다.
12시 35분! 9시 45분 비로봉 정상에서 약 6.5km를 3시간 조금 못 걸려 걸어온 것이다.
몸도 풀리고 손도 풀린 나는 슬슬 악셀레이터가 발동하였으나 하원씨와 손샘으로부터 무리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말씀에 행구동 방면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행구동방면은 향로봉을 오르는 가장 짧은 구간으로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 같다. 하산로가 그만큼 짧아지니 마음이 편해진다.
스틱을 길게 빼고 아이젠을 착용한 후 계곡 하산길을 시작한다~!
신나게 오르던 길을 거꾸로 내려가려니 아이젠이 꼭 필요하다. 아까 향로봉 거의 다 와서 아이젠과 스틱도 없이 어린 자녀와 하산하는 엄마, 아빠를 보았는데 잘 내려갔는지 궁금했다. 숨을 헉헉 내쉬며 땅만 보고 오르다가 아이젠도 없이 조심조심 내려가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보았지만, 힘든 오르막 산행에 이런 저런 판단을 해볼 틈이 없었다.
한참 가다보니 눈이 없는 마른땅이 나온다. 혹시나 싶어 아이젠을 벗지 못하고 계속 내려가보는데 능선 내리막길에서 계곡 하산로로 지형이 바뀌는 곳에서 아이젠을 더이상 착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흙길이 계곡을 따라 한동안 주욱 이어진 것이 눈에 보이자 아이젠을 벗기로 한다. 체인젠이 참 편하지만 눈길이 아니라면 발의 피로도가 높을 수 밖에 없다.
홀가분하게 아이젠을 벗으니 발이 가볍고 좋다. 마른 흙길을 촐랑촐랑 내려가는데 아까 보았던 가족이 보인다. 안전하게 내려왔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아마 손샘과 하원씨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같이 걱정을 했으니...
계곡물이 어쩜 저렇게 꽝꽝 얼었을까 싶을 정도로 청빙이다. 이 계곡의 기온이 어느 정도나 내려가는지 가늠이 안되지만, 얼음의 결빙상태로 보아 엄청 추울 것 같다.
드디어 보문사가 나타났다. 하산로가 짧으니 참 좋구나.
보문사 가파른 임도 내리막길을 내려가려니 다리가 후들거려 뒤로 돌아 거꾸로 걷는다.
국형사를 지나 버스정류장에 도착 의자에 앉아 버스가 언제오는가 기다리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간식을 먹으며 멀리 치악산을 한번 바라봤다. 멀리 눈 덮힌 멋진 풍광의 정상부를 보고 있자니 좀전까지 추워서 덜덜 떨고 멘붕오고 정신이 없었던 게 거짓경험 같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계속되는 오르막 산행이 오랜만이었고 힘들었다. 스틱에 의지해서 끝없는 계단을 오를 때는 중심이동과 호흡, 보행법 아무튼 내 행위에만 집중했다. 스틱에 체중싣고 계단 세 개쯤 오를 때까지 끝까지 스틱에 의지해서 밀어주는 행위의 끝없는 반복.
일상을 잊은 채 오늘 산행에만 굉장히 집중했다.
뭔가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자연의 힘을 느꼈고 산행준비가 부족할 때 어떻게 되는지 느꼈다. 오랜만에 굉장한 경험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추운 날씨 속에 겨울산행을 할 때는 핸드폰에게도 핫팩을 대줘야지. 그리고 장갑을 여벌로 갖고 다녀야겠다.
엄청 추울 때는 오히려 먹거리를 많이 싸와도 먹을 상황이 안될 때가 많다는 걸 새삼 경험했다.
꿀차는 아주 칭찬해. 손샘의 노브랜드 팥양갱 괜찮은 것 같고 굳지 않는 떡은 강추다.
가열차게 치악산 종주를 계획했지만 남은 봉우리 남대봉을 가지 못했고 향로봉에서 하산, 총 15.45km를 걸었다.
오전 6시 33분부터 산행을 시작, 오후 2시 25분에 마쳤으니 대략 8시간 걸었구나.
개인적으로는 기억에 남는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
지리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후 13번 버스를 타고 원주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버스를 탔는데도 추위가 가시질 않는다. 뒷목이 으슬으슬하여 핫팩을 댔다. 군인들이 사용할 정도로 기능이 훌륭하다고 손샘이 말씀하셨는데 정말 아직도 뜨끈뜨끈하다.
졸음이 올랑말랑 할 때 터미널 도착, 커피를 사랑하는 하원씨를 위해 잠시 커피숍에 들러 아껴둔 민호씨의 협찬쿠폰을 사용했다. 굿 타이밍에 사용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카페인 섭취를 마치고 뒷풀이로 무얼 먹을까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골목을 걸으며 적당한 식당을 찾는다. 국밥종류가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설렁탕집이 보인다. 맛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내게 손샘께서 주차장 크기 등을 미루어보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신다.
맛이 없으면 샘이 책임지세요 하고 식당으로 향하는데 입구에 가마솥 세 개 안에 뽀얀 설렁탕 국물이 펄펄 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맛에 대해 무한신뢰감이 생기고 기대가 된다.
어머, 산에 다녀오시나봐요. 어디로 다녀오셨어요?
테이블에 앉는 우리에게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분께서 살갑게 관심을 주신다. 화장실을 갔는데 화장실에서 마주친 직원분이 내 옷차림을 보고 또 관심을 주신다. 아이고 산에 다녀오시나봐 하시며...
기분이 좋아진다. 별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한마디에 맛집이라는 확신이 든다.
곧 나온 설렁탕 세 그릇.
일단 파를 아낌없이 주신다. 파만 가득 들은 그릇을 두 개나 주셨다. 국물에 파를 잔뜩 넣고 먼저 면부터 건져먹는다.
후루룩 면을 먹고 반찬으로 나온 뻐얼건 김치를 한입 한다. 밑반찬으로 나온 아삭이고추도 색깔이 심상치 않은 된장인지 막된장인지에 푹 찍어 한입 깨문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너~~~어무 맛있다'를 연발하며 행복한 식사를 이어갔다.
국물은 또 얼마나 깔끔한지... 잡내도 안나고 억지스런 우유빛도 아닌 오랜 시간 뼈를 고운 바로 그 빛깔이다.
국물도 남김없이 한 그릇 기분좋게 먹었다.
단돈 만원.
집으로 향하는 시외버스 안에서 포장을 해오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던지...
사실 봉화산설렁탕 생각이 산행 후 며칠 간 떠올랐다. 얼마나 떠올랐으면 카카오맵에서 식당을 찾아 안하던 후기까지 남겨주었을까. 다시 먹을 수 있을런지...
무언가에 대한 몰입은 일상의 탈출이자 활력이다.
다음에도 재미나고 행복한 산행은 to be continued.
첫댓글 누나 작가해도 되겠어요.^^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그나저나 봉화산 설렁탕 추억돋네 ㅋㅋ
수필 한권 느낌~
글 잘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