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들을 향한 욥의 탄식(1-6)
종종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상황과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경우를 들을 때,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위로하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이의 고통을 품고 근심을 나누어야 합니다(히 4:15).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1-6)
엘리바스가 마치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늘어놓은 지혜는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며, 욥기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지극히 평범한 규범적 지혜였습니다. 욥의 첫 반응은 그래서 ‘그와 같은 것들은 나도 아주 많이 들어봤다’라는 것입니다(2). 욥은 엘리바스뿐 아니라 세 친구 모두를 ‘고통의 위로자들’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표현은 일종의 형용모순으로, 그들의 위로가 고난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 가중시키고 있다는 역설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엘리바스의 이전 발언에서 고통은 악인이 (뇌물을 받는 등) 악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주장(15:34)을 되받아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욥이 도전하고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친구들의 말이고 신학입니다. 욥의 말을 ‘거센 바람’ 혹은 ‘뜨거운 동풍’과 같다고 비난한 친구들의 평가에 대해(8:2; 15:2) 욥은 그들의 말이야말로 ‘바람의 말’이라며 동일한 평가를 되돌려줍니다(3).
대체 욥이 그 친구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욥은 그들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에게 되묻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대답할 정도로 내가 한 말 중에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 자극했냐고 묻습니다(3). 욥의 말은 단순히 (1)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 (2) 이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3) 그러나 나는 이런 ‘징벌’을 받을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어느 말도 친구들을 겨냥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에게 고난이 임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친구들의 신앙(규범적 지혜)의 근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도 친구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들이 한 것과 같은 “그럴 듯한 말”로 조롱하며 고통 받는 자에게 2차 가해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4). 4b절의 ‘머리를 흔들다’라는 표현은 조롱과 경멸과 꾸짖음의 의미를 갖는 숙어적 표현입니다(참조, 왕하 19:21; 시 22:7; 109:25). 이 말을 뒤집으면, 친구들이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위는 만약 욥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친구들은 고통 받는 자와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위치에 그대로 서서 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을 겪고 있는 욥이라면 두려워하는 자를 굳건히 잡아주고 고통 받는 자의 마음을 위로해줄 말을 했을 것입니다(5). 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무리 말로 표현해도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그 고통이 저절로 사라질까?’(6) 말을 해도 말을 하지 않아도 괴로움은 여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에 대한 탄식(7-17)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는 현실은 죽음같이 가혹합니다. 더욱 잘못된 조언으로 더 깊은 좌절감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는 신앙에 회의를 느낄 것입니다. 바닥이 꺼져버리는 듯한 어려운 현실에서도 올바른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께 게속 믿음의 닻을 내려아 합니다. 믿음의 항해에서 고난의 폭풍을 만나 휩쓸려 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7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9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10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1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4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5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7-17)
7-16절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탄식’입니다. 욥은 7b절과 8절에서만 하나님을 2인칭으로 호칭할 뿐, 그 외에는 모두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릅니다. 이 호칭 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욥기뿐 아니라 다른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도 호칭의 변화는 상당히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개역개정 등의 번역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인칭을 수정하여 번역하기 때문에 번역 성경만으로는 이러한 히브리어의 특징을 파악할 수 없다).
욥의 항변은 친구들을 향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또한 욥기를 읽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욥은 친구들 혹은 독자들에게 자신에게 고통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신 일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친구들이 주장하듯 욥의 악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어휘로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을 평행법(parallelism) 혹은 대구법이라 합니다. 평행법은 히브리어의 산문(prose)과 운문(poetry)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평행법으로 되어 있으면 운문이고 그렇지 않으면 산문입니다. 이 평행법이 주는 효과는 다양한 어휘들을 통해 형식의 아름다움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거나 혹은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복과 변형을 통해 욥은 자신이 현재 처한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리고자 합니다. 욥을 가르치려고 하고 바꾸려고 하는 친구들의 논의에서 빠진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얼마만큼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너덜너덜하게’(“피로하게”) 만드셨고 욥의 모든 집안 식구들(자녀들과 종들)을 끝장내셨습니다(7). 그분께서 욥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으셨다는 것은(“시들게”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입니다(8). 개역개정의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8)에서 “증거”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욥을 보고 하나님의 징벌이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내렸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증거, 혹은 단순히, (2)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증거. 욥은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후자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8b절에서도 욥은 ‘그분이 나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내 몰골이 증언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후자의 의미와 평행합니다. 하나님의 분노(직역하면 ‘그의 코’)가 욥을 찢어발기고 욥을 향해 이빨을 갈면서 으르렁거립니다(9a). 욥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은 날카롭게 뾰족합니다(9b). 욥의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수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친구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도 결코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람들은 욥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욥을 모욕하고 뺨을 후려갈깁니다. 한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욥을 공격합니다(10).
욥은 이 사람들을 ‘애송이들’(“악인들”)이라고 지칭합니다. ‘아빌’은 나이 어린 소년이나 청년을 지칭하는 규범적 지혜의 단어로, 지혜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참고로 19:18에서 “어린 아이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어린 것들’이 곧 “행악자들”(나쁜 사람들)입니다. 지혜가 없는 악인은 욥이 아니라 욥을 공격하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우매한 자와 나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벌이 내리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작동한다면 천벌을 받아야 할 이들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욥 자신은 아무 문제없이 살아왔으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신을 향해 전쟁을 벌이는 용사처럼 행하셨습니다: “꺾으시며”, “부숴뜨리시며”, “과녁을 삼으시고”(12),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14). 그분이 쏘신 화살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욥의 심장(히브리어로는 “콩팥”)을 쪼개고 온 내장을 땅에 쏟게 하셨습니다(13). ‘베옷’은 주로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옷으로 깊은 슬픔을 표현합니다(창 37:34; 삼하 3:31; 사 3:32;15:3;22:12; 렘 4:8;6:26; 겔 7:18;27:31; 욜 1:8; 암 8:10; 시 30:11;35:13;69:12; 애 2:10; 느 9:1). 욥은 슬픔의 상복을 너무 입어서 아예 그 옷이 자신의 피부가 되어버렸다고 고통을 호소합니다: ‘나는 베옷을 내 피부에 꿰매 놓았다’(15).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라는 표현은(15) 가시적으로는 머리를 땅에 처박은 상태를 가리키며, 심리적으로는 패배와 슬픔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뿔”을 높이 드는 것은 힘과 승리를 상징합니다(2:1,10; 75:4-5, 10; 89:24; 92:10; 112:9;148:14). “더럽혔구나”로 번역된 ‘올랄티’는 ‘집어넣다’라는 의미로, 욥의 고통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슬픔이 너무 깊은 나머지 욥은 너무 울어서 얼굴이 붉어졌고 눈꺼풀 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정도입니다(16). 그러나 욥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결코 자신의 죄와 악행 때문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이런 ‘폭력’을 당해도 마땅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은 결코 무엇인가 악하고 잘못된 것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무죄와 정결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시편의 탄원시(시 7:3-5;17:1-5; 26:1)과 궤를 같이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위로해 주지 않는 현실에 낙담했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무능한 질택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선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자신을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변론하고자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