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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비오는 날 길을 걸으며 알았다
구멍이 난 신발 밑창 사이로
물은 스며들고
젖은 양말 속 발가락이 말랑말랑하다
비가 고인 물덤벙을 지나
바닥을 뚫고 올라온 질퍽질퍽한 물과
딱딱한 발이 하나가 되어 촉촉하다
말랑말랑해진 발을 닦으며 촉촉하게 젖은 너의 눈을 본다
길을 걸으며, 구멍이 난 줄 모르고 산 날들의
밑창은 새고
서로가 젖어 있다는 것을
눈물은 상처를 적시고
상처는 눈물 속에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는 것을
비 오는 날 길을 걸으며 나는 알았다
할미꽃에서 젖내가 난다
밭두렁에는
물 오른 쑥이 보이고
흙담 너머
수줍은 명자꽃 피는, 봄날
숙이,
명자를 부르다가
고령장날 장터 난전
분 속에서 손녀를 없고, 허리 숙인
할미꽃을 보았다
물 오른 할미꽃 사이사이로
수줍은 젖망울이 보인다
마침표를 읽다
출근 시간이 되면 일어나 차에 시동을 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노란 점멸등이 들어와도 직진을 했던
직진 차선에서 무리하게 좌회전을 했던
‘일단 정지’의 붉은 경고등에도 우회전을 했던
‘우선 멈춤’을 잊어버린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바쁜 것도 바쁠 것도 없으면서 바쁜 척
그, 꼬리를 물고 습관적으로 끼어들기를 했던
끼어들기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풀 수도 풀리지도 않는 꽉 막힌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마침표를 찍는다
숨 가쁘게 달려온 길 위에 찍힌
붉은 마침표
일단은 정지다. 우선 멈추었다가
달려간 길 돌아오는 유턴
골목길로 돌아가는 피턴을 반복하다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돌아가다 찍을 마침표
그를
완성할 한 줄의 문장을 읽는다
침묵이라는 말을 갖고 싶다
깨진 유리조각을 본다
깨진다는 것은
누군가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
상처의 날들 뾰족하고 날카롭다
칼날처럼 뾰족한
가장자리에는 여백이 없다
칼등은 무디고
칼날은 날카롭다는 것을
등은 누워있고
날은 서 있다는 것을
날이 선 한 마디의 말도
상처가 된다는 것을
상처 받은 것들이 상처를 되돌려주는
칼날이 된다는 것을
수많은 칼날은 감추고, 등만
내보이며 무디게 살아온
유리창에 비친 반짝이는
먼지들의 침묵
묵묵하고 투명하다
동상이몽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넘치지도 모자람도 없이, 쭈룩쭈룩
또닥또닥 오거나 말거나 하는 날
- 파전 어때?
- 덤으로 수제비 한 그릇까지 사주면 좋-지
비 오는 날, 파전은 동상(同床)
소주 한 잔 생각에 수제비 한 그릇은 이몽(異夢)
일만이천 원짜리 동상이몽(同床異夢)이지만
밥 안해 좋고 소주 한 잔 해서 좋고
안해 좋은 사람 해서 좋은 사람, 같이
살며 꿈은 달라도
비처럼 퍼붓고 촉촉한 땅처럼 받아주며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면
부족함도 부러움도 없는
찰떡궁합이네
겨울밤
문 꼭, 마음 꼭
꼭꼭 걸어 잠그고
마음까지 꽉꽉 닫힌
겨울밤입니다
바람 꽁, 소리 꽁
꽁꽁 얼어붙은 창문에는
성에가 끼이고
따뜻한 방 한 켠, 텅 빈
자리 시린 밤입니다
기억 까마득한
찹쌀 떠-어-ㄱ, 떠-ㄱ, 떡
차게 들리는, 창 밖
소리 서러운 밤입니다
팟죽 먹는 동짓달
단팟죽을 더 좋아했던 아버지
창문 넘어 오시는 소리
떠-어-ㄱ, 떠-ㄱ, 떡 걸리는
가슴 저린 밤입니다
단팟죽만큼이나
찹쌀떡 좋아했던 아버지
단팟죽에 숨겨진 조각떡, 그 맛
그리운 겨울밤입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눈이 매우매우 많이 내려
길도 끊긴 추운 겨울
어느 장군의 퇴임식이 있던 그날
위병소에서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시인정신사에서 왔는데
어디에 있는 절입니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은사, 봉정사, 부석사는 들어봤는데
시인정신사는 처음 듣는 절인데요
너, 서정주는 아니
눈만 껌벅거리며 하는 말
안동소주, 청송불로주, 봉화머루주는 들어봤는데
어디에서 나는 술입니까?
서정주는 처음 듣는 술인데요
어느 장군의 출판기념회가 있던 그날
하늘에선 별이 떨어지고
땅에서는 시인의 한숨소리
칼바람으로 다가와 귓전을 때리며
묻고, 또 묻는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어디까지 가십니까?
산길따라 터벅걸음으로
봉정암 가던 그날
뒤 따라 오던 젊은 청년들
돌아보며 묻는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대구에서 왔는데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
느릿걸음이 한심하다는듯
화두처럼 말 한 마디 부려놓는다
봉정암까지는 먼 길인데요
..........
먼 길 걷고 걸어
산 오르며 묻고, 또 묻는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고마, 형이라 캐라
―문인수 형(兄)
시의 씨앗은 민들레 씨앗
입김에도 훅, 날아오르는 말의 씨앗은
아무 어깨에도 쉽게 내려앉아
스마트폰도 아닌 구형 폴더폰으로
접었다 펴는 말의 씨앗
“선생님은 무슨. 가볍게 하자, 가볍게”
“예, 그라면 형님 카까예”
“고마, 형이라 캐라”
시인은 형님이 아니라 형(兄)이다
대구의 문인 수는 천 명이 넘지만
문인수는 한 명이다
선생님도 형님도 아닌, 민들레 같은
형은 대구에 사는 성주 촌사람이다
만촌동의 ‘촌’자에 정을 주고는 삼십 년째
골목길 구석구석 촌티를 박는 중인*
‘형’ 보다는 ‘성’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시인은 민들레 씨앗
개똥쑥, 이질풀, 며느리밑씻개에도 내려앉는
가볍고도 가벼운 한 줌 구름의
민들레 씨앗이다
* 문인수 시인의 ⌜민들레 골목⌟에서 인용
봄날은 아직, 이라고
누군가는 봄날은 간다
라고 하고
누군가는 봄날은 갔다
라고 했고
그 누군가는 봄날은 아직
이라고 우기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봄날은 오지도 가지도 않은 것이라며
봄날은 아직, 이라고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꽃이 사람처럼 시샘을 한 적은 정말
정말로 없다고 우기는
꽃을 피워본 적이 없는
꽃이 언제 피는지
언제 피었다가 지는지, 정말로
모르는, 그는
누군가는 봄날은 간다
라고 하고
누군가는 봄날은 갔다
라고 했지만
봄날은 아직, 이라고 하는
생선 가시만큼의 햇살조차 들지 않는 한 평 남짓 고시텔촌의
그 누군가처럼, 나는 그 누군가의
봄날은 아직, 이라며 우기는 그 말을 믿으며
봄날은 아직, 이라고
사방치기*
아이가 죽었다
깨금발로 뛰다가 죽었다
금 밟고 죽었다
죽은 아이가 울고 있다
- 넌 왜 울고 있니?
- 죽었으니까요
죽은 아이가 울고 있고
죽은 아이를 보며 산 아이들이 웃고 있다
- 넌 왜 웃고 있니?
- 살아 있으니까요
‘괜찮다’고 한다 울면서 ‘괜찮다’고 한다
죽어도 ‘괜찮다’고 한다
죽은 아이를 보고 웃어도 ‘괜찮다’고 한다
죽어서 다시 죽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괜찮다’라는 말, 참
슬프다
* 사방치기 : 마당에 놀이판을 그려놓고 돌을 던진 후, 그림의 첫 칸부터 마지막 칸까지 다녀오는 놀이.
지다
수변공원 산책길에 수국을 샀다
흰 수국 앞에 당신은 거품처럼 환했다
큰 꽃은 큰아들을
작은 꽃은 작은아들 닮았다지만
내겐 한 송이 당신 닮았다
환하던 날짜 이윽고 지고
꽃 사라진 빈 화분엔
수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워지고
아이들 객지로 떠난 빈 화분에
다시 피어난 수국
당신의 손전화기에서 뿌리를 내렸다
화면에서 솟아나는 물방울 문자들
수국, 자잘한 꽃잎이
당신의 웃음을 더 활짝 피워 올렸다.
어느 해 팔월 그 어느 날
거품처럼 수국은 져 나리고
수국보다 더 환하던, 당신의 웃음도
지고
모나미*
모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손에서 떠난 적 없는
나의 손때 묻은
있을 땐 불평했던
멀리 떨어지면 불편했던
오랜 친구처럼 살다, 사라진
모나미는 볼펜이 아닙니다
순간, 끓는 물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안개처럼 한줌 잿빛으로 아득해
만질 수 없는
친구보다 더
친구처럼 살다가, 이젠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아른거리는
* 모나미: 모나미는 프랑스어로 ‘mon ami’이며 ‘나의 친구’를 뜻한다
종소리
새벽종이 운다
이른 새벽 잠에서 깨어나
산천초목의 깊은 잠 깨우고
삼라만상을 울린다
자신의 울음으로 남 울리는
울음소리 깊다
딱 자신만큼의 무덤을 깊게 파 놓고
하루를 울음으로 채운다
깊은 울음 울어본 사람은 안다
울음을 울림으로 바꾸는 힘은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깊은 곳을 돌아 나가는 소리의
울림은 은은하다는 것을
무심
부처라 한다
약사여래불이라 하기도 미륵불이라 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이면 어떻고 관세음보살이면 어떠하랴
좌불이라 하기도 한다
팔공산 갓바위라 하기도 관봉석조여래좌상이라 하기도 한다
선본사 좌불이면 어떻고 와촌면 석불이면 어떠하랴
비바람에 눈과 귀 떨어져 나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저 바위를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는 영험한 부처라 한다
돌이면 어떻고 부처면 어떠하랴
무심한 새들 쉬었다 가면 돌이 되고
사람들 두 손 모아 복 달라고 빌면 부처가 되는
보는 것은 많아도 말 없는 저, 바위
육근*을 버리고 무심을 얻었다
*육근: 지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
돌인가, 부처인가?
한 조각의 바람조차 움켜쥠이 없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손
물소리 바람소리 들어도 못들은 척
있는 듯 없는 듯 떨어져나간 귀
자는 듯 깨어있는 듯
산그늘이 내리면 지긋이 감은 두 눈
이끼 낀 얼굴에 햇살이 내리면
미간에 따스한 미소가 가득한, 저 석불
돌인가?
부처인가?
본 척 못 본 척
들은 척 못들은 척
묵묵부답의 석불 앞에서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저 노보살
눈은 흐릿하고
귀는 어둡지만
미동도 없는 바위 같은 얼굴엔
맑고 밝고 향기로운 미소가 가득한, 저 보살
돌인가?
부처인가?
친구에게
산타루치아*에서
밤하늘 올려다 보며
별을 세는데
밤을 샐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다고 잊고 산
날들만큼의 별들이
밤하늘 여기저기 소란하다
보이지 않던 별들
가득가득하고
나를 내려다 보는 눈은
말똥말똥하다
서로의 간격은 멀기만 한데
멀어진 만큼 다가서서
가깝게 느껴지는 오늘, 여기서
너에게 문자를 보낸다
다가서지 못하고
멀게만 느꼈던 날들 만큼이나
많은 자음, 모음들
서로 이어져 글자를 만든다
소식 가득한 밤하늘
초롱초롱하다
*산타루치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 바닷가에 있는 펜션
마, 술이나 묵자
소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사십년만에 만난 동무들
남
녀
노소 차별이 없다
보기에는 분명 차이가 확연한데
서로서로 야, 자한다
한 잔 들어가니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초등학교 시절로
야 임마, 너 나하고 땅따먹기할 때
내 땅 다 따먹었잖나. 짜식
나는 자갈논이 천 평이 넘는기라. 돈 된다 아이가
니는?
안 산 땅 쪼께 있다
몇 평이나 되는데?. 안산이 서울 근처 아이가?
그래, 그래, 그래.
목소리는 기어 들어 가는데
마따, 마따, 마따.
점마는 소싯쩍부터 땅따묵기에는 선수라카이
...........
마, 땅 따묵지 말고 술이나 묵자
천상 병이다
마트에는 한 번도 가지 않고
오일장 난전만 찾아다니던, 촌놈
면도날 한 개 사서
비싸다는 말도 못하고
일만 구천 원
맨날 술 얻어 마시고
어제도, 오늘도 생일이라 우기는
천상병 시인 흉내 내며
신지 뭔지 헛소리 지껄이다가, 술값만
일십만 구천 원
이만 원 내고 거스럼 돈은
팁이라고 우기는
나머지 술값 낸 우시인 붙잡고
내가 술 샀다고 우기는, 촌놈
천상 병이다
끽다래(喫茶來)
친구야
차 한 잔 하고 가게
그런 말 하지 말게나
차 한 잔에
며칠 날밤을 샐 수도 있는데
가는 날 미리 정하고 오라 말게나
오는 날 정해서 왔지만
가는 날 기약 없지 않은가
물론 순서도 없고
죽고 사는 것
끽다거(喫茶去)와 끽다래(喫茶來)처럼
글자 한 자 차이네, 이 사람아
친구야
차 한 잔 하러 오게나
*끽다거: 선종의 화두로 조주 종명이 납자에게 물었다. 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있는가? 와 본 일이 없습니다. 차 마시고 가게. 또 다른 납자는 와 본 적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조주는 역시 차 마시고 가게. 했다. 그것을 본 원주가 화상께서는 매양 똑같은 물음을 하시고 무엇이라 대답하던, 차마시고 가라고만 하시니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합니까? 하고 물었다. 조주는 원주하고 부르니 원주는 예하고 대답하자 또 차마시고 가게. 했다.
홍어 거시기 같은
비 오는 날
비 맞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오래된 친구한테서
홍어에 막걸리 한 잔 하자며
막걸리와 궁합이 맞다는 홍어를 시켜놓고는
자꾸 홍어의 거시기를 달랜다
자기는 홍어 거시기 같은 존재라며
막걸리에 절은 친구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말
마누라가 동창횐가 뭔가에 갔다 와서 퉁퉁 부은 입으로
‘남편 살아있는 년은 나밖에 없더라’ 하는 말에
‘있어도 없는 듯이, 살아도 죽은 듯이 살아야겠다’ 는
곰삭은 홍어 맛의 그 말 한 마디에
입안이 얼얼하고 눈물이 핑 돈다
객기 부러운
- 퇴근하고 머 할건데?
- 한잔 어때
주거니 받거니 받거니 주거니
딱 한 잔이 한 병이 되고
한 병이 각 일 병이 되고
셈이 없다
주고 받으며 셈이 없는
비우면 채우고 채우면 비워주는
잔이 차면 마음은 비고
빈 자리 정으로 가득 채우는
부어라 마셔라
넘침도 모자람도 흠이 되지 않는
술값은 내가 낸다. 싸워도 보기좋은
오늘은 꼭 내가 사야 된다는
억지여유, 객기 부러운
첫댓글 '침묵이라는 말을 갖고 싶다'
하겠습니다.
수고 하십니다
(부부) 해보겠습니다
“지다”낭송 해보겠습니다~^^
김순희 선생님께서
“종소리”낭송하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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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