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육십 줄 후반에 접어들면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책상머리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무리하면 치질이 재발해서 예민한 부분을 도려내는 아픔을 재현해야만 한다. 그리고 책을 오래 보면 눈앞이 침침하고, 나중에는 꼭 눈알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외운 것은 열흘만 지나면 머릿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펼쳐보면 날것을 보는 것처럼, 신선함을 준다는 게 웃고픈 현실이다. 그래도 끈기 있게 책장을 세 번씩 넘기다 보면, 그나마 비슷하게 마킹은 할 수 있을 정도다.
객관식은 형편이 나은 편에 속한다. 모르면 찍으면 되니까. 그런데 출석 수업에 뒤따르는 주관식은 뭔가로 백지장을 채워나가야 하니까 정말 난감하다. 유행가 가사를 적거나, 하얗게 변한 머릿속처럼 빈 답안지를 낼 수도 없고.
그래도 형편이 제일 나은 게, 이제 요령이 붙어서 그런지 책과 자료를 마음껏 펼쳐놓고 하는 과제물이다. 이와같이 편한 마음으로 작성하는 방송대 ≪구비문학의 세계≫의 과제물은 “외국어 신화 2편을 선택하여 소개하고, 신화의 의미 등에 관하여 서술하라.”는 내용이다.
머리말
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잠잘 시간이 되면 이야기보따리를 잘 풀어놓았다. 그 보따리에는 천일야화보다 더 많은, 야기들로 가득했는데, 한번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끝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이야기는 설화의 전통적 분류법인 신화, 전설, 민담의 3분법 중, 치악산 지명의 유래와 같이 현실에 실마리가 남아 있는 전설적인 것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민담에 가까웠던 것들이다.
옥황상제와 선녀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는 그 보따리에 들어 있지 않았다. 단지, 봄에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영동 할머니를 들먹이던 기억은 난다.
자라면서는, 라디오에서 구수한 목소리의 성우들이 전하는 〈전설 따라 삼천리〉하는 프로그램으로, 나중에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전설의 고향〉을 통해 어머니의 등골 오싹한 이야기를 재생하는 재미를 느꼈었다. 이런 프로그램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실재하는 지명이나 자연물의 기원과 같은 전설을 근거로 하여 꼭 사실처럼 꾸몄기 때문이다.
사실 신화라고 하면 단군이나 주몽과 같은 건국신화와 ‘김알지’, ‘석탈해’와 같은 시조 신화는 익숙하지만, 그리스 신화와 같이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외국의 신화는 잘 알려진 것 외에는 그렇게 친숙하지가 않다.
나) 선택한 외국의 신화 2편은 신화를 규정하는 세 가지 측면, 즉
① 신에 관한 이야기,
②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설명하는 이야기, ③ 신성시되는 이야기 중에서,
② 자연현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선정하였다. 한 편은 이미 공부한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서, 다른 한 편은 중국의 신화에서 자료를 찾아 구성하였다.
2. 나르키소스와 에코
가) 그리스 로마의 신화는 제우스와 헤라로 상징되는 올림포스의 신들과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같은 영웅들이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이 신화의 시대는 트로이 목마로 잘 알려진 영웅 오디세우스가 죽으면서 막을 내린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신들과 영웅들의 큰 이야기가 아닌 자연현상의 기원과 같은 작은 이야기이다.
나) 오비디우스는 기원전 1세기 말에서 서기 1세기에 걸쳐 로마에서 활동했던 시인이다. 그가 창작한 ≪변신이야기≫는 ‘변신’이라는 주제로 여러 이야기들을 연결해 놓은 것이다.
나르키소스(Harcissos. 보통 프랑스어 이름 ‘나르시스’로 잘 알려져 있다)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결국, 시들어 죽었다는 인물이다. 한데, 오비디우스는 그의 이야기를 에코(Echo)라는 요정과 연결해 놓았다. 이와같이 변신 이야기는 서로 연관이 없는 이야기들을 ‘변신’이라는 주제를 이용해서 함께 모으고 서로 이어붙인 것이다.(강대진, ‘그리스 로마 서사시’, 북길드 2007.)
신화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루는 제우스가 요정들과 즐기고 있는 현장에 헤라가 나타났다. 에코(메아리)는 그녀를 붙잡고 수다를 떨면서 요정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 주었다가, 헤라에게 자기 스스로는 말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 상대의 말 마지막 부분만 반복할 수 있는 벌을 받게 된다.
이런 장애를 지닌 에코가 모두가 사모하는 미남 청년 나르키소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여성과의 사랑에 관심이 없었는데, 에코가 그의 소리를 되울리는 것을 듣고는 친구인 줄 알고 부른다. 에코는 자기 사랑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착각하여 나섰다가 바로 배척된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그녀는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사그라지다가 결국 거기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한편,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모습과 사랑에 빠져 물가를 떠나지 못한 채 시들어 가다가 결국 수선화로 변한다. 오비디우스는 전적으로 자신에 몰두하는 인물과 전적으로 타인에게 몰두하는 요정이 비슷한 종말을 맞는 것으로, 그려놓았다.(강대호, 이정호, ‘신화의 세계’, 방송대 출판문화원, 2011)
다) 우리는 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모아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가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것의 과학적 원리는 간단하다. 산이나 골짜기에 부딪혀서 시간을 두고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적 원리보다도, 헤라의 저주를 받아 남의 말의 마지막 부분을 반복하는 장애를 갖게 된 것과 자기애에 빠진 나르키소스에게까지 배척되어 동굴 속에 틀어박혀 사는 요정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자연현상을 비극 화한 슬픈 이야기에 해당한다.
또한, 수선화는 추운 겨울의 한기를 이기고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으로, 꽃말은 ‘자기 사랑, 자존심, 고결, 신비’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는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고, 혼자 사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신화의 인물인 나르키소스가 환생하여 자기에게 빠져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렇더라도 부디 에코와 같은 비극의 희생물은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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