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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광복절 즈음은 통상 무척 더운 시기이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기 때문에 더 덥게 느껴지고, 사람들의 마음도 그만큼 다른때보다 더 무겁다. 김제로 향했다. 내 발걸음이 지난 늦은 봄날 부안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다.
심포항 가는 길 중간 산기슭에 위치한 <해망사> 입구에 있는 2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오후 석양이 질 무렵에 다시 와보고 싶었다.
하루 걸어보니 탈진하거나 일사병에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다음 날 걷는 것은 일찌감치 생략하고 별도로 예정했던 일제 시대 이곳에서 일어난 일제 만행의 흔적을 집중해서 살펴보기로 했다. 김제와 군산은 조정래님의 장편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된 곳이다. 구체적으로 <해망사><아리랑문학관><아리랑문학마을>, 만경평야를 돌아보았다.
[사진 : <아리랑문학마을> 전시관에서...]
김제 만경평야는 정말 넒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평선'이라는 명칭이 나왔고, 김제 벽골제에서는 매년 지평선 축제가 열린다. 일본 침략기를 정당화하는 일부 사람들은 <아리랑>은 그냥 소설이라고 폄하하면서, 소설적 요소가 보이는 곳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리랑>은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은 작가가 처음부터 명확히 했고, 실제 사료를 통해 대부분이 확인 된 사항이다.
만경평야 한가운데를 걷고 있자니 문득 내 마음속에 한 울림이 일었다.
"사는 것이 무의미해지거나 왜 사는지 모르겠는가? 그럼 먄경평야를 가보라. 가서 넓은 들판을 걷고 바라보고 아리랑 노래를 듣고 <아리랑>을 읽어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 만경평야와 그들의 이야기에는 그 안에 잠겨져 있는 그들의 땀과 한 그리고 피눈물이 보이고, 나태해지는 요즈음의 나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아리랑문학관>은 <벽골제> 정문 맞은편에 있다. 따라서, <벽골제>와 <아리랑문학관>을 인근에서 만날 수 있다. 다만, <벽골제>는 야간에도 개장을 하지만, <아리랑문학관>은 하절기에는 오후 6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방문 시간을 잘 조정해야 한다.
벽골제 정문이다. 벽골제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농경을 위한 저수지였고, 현재 그 이후에 만들어진 수문이 남아 있다. 매년 벽골제에서는 김제 지평선축제(홈페이지: http://www.gimje.go.kr/festival/index.gimje)가 열린다. 올해(2020)는 코로나 때문에 어찔 될지는 모르겠다.
또한 이정표에는 심포항 방향도 표시되어 있다. 심포항은 한쪽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꼭 한번 들리기를 권한다. 특히,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배경지 중의 하나인 <해망사>가 가는 길 중간에 있다.
심포항..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군산 방향이다.
<해망사>.. 바다가 바로 옆에 있어 <해망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상당히 창건된지 오래된 절로 알려져 있다.
오층석탑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일본인들에 의한 김제 지역의 침탈의 역사에 꼭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김제 죽산면 농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수탈의 선봉에 섰던 일본인 지주 하시모토의 자택이 죽산면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보존되고 있다.
왕복 2차선의 도로에 인접하고 있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1926년 건축된 단촐해 보이는 단충건물로 서쪽에는 창고가 있다. 하시모토는 1906년 군산에 들어와 1911년 동진강 일대의 개간지를 불하받아 개간에 착수했고, 죽산으로 이사하여 본격적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하시모토 자택은 특별히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 않는 듯했고, 역사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랑문학관은 2층짜리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바로 앞에 넒다란 주차장이 있어 접근이 무척 편리하다.
소설 <아리랑>은 조정래님이 쓴 대하소설 중 하나로, 일제 감정기 당시 전라북도 김제를 배경으로 '일본의 수탈과 우민화 교육'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일제에 협력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에 대하 고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총 4부작으로 12권 단행본으로 되어 있다. 조정래는 집필 의도는 "일제 강점기에 치열하게 저항하며 수많은 고난을 끈질기게 버텨 낸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 알게 함으로써 민족 자긍심의 회복에 있다"라고 했다.
<태백산맥>의 집필을 마친 후 1년여의 취재와 자료 정리 기간을 거쳐 1990년 12월 집필에 착수해 1995년 7월 탈고했다.
아리랑 문학관은 소설 <아리랑>의 내용 전개를 따라 구성되었다. 4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으며, 제3전시실에는 작가의 삶과 소설 <아리랑> 저술 과정의 치열한 작가 정신과 <아리랑>이 단순한 소설을 넘어 한편의 근거 있는 역사서라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면이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다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 하고 있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라고 작가는 소설 <아리랑>에서 넓은 만경들판을 표현하였다.
<벽골제>와 <아리랑문학관>이 위치해 있는 넓은 들판을 이곳 방언으로 '징게맹갱 외에밋돌'이라 부른다. 징게맹갱은 '김제와 만경'을, '외에밋들'은 '너른 벌판'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김제와 만경 일원에 펼쳐져 있는 드넓은 평야지대를 의미한다. 김제 만경지대는 일제침탈기 제일 수탈이 심했던 지역으로, 이주 일본인들은 갑부로 살고, 조선인들은 전답을 다 빼앗긴 후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지역민들은 가장 빈곤하게 살아야만 했던 곳이다. '풍요로워서 서러웠던 땅'이라고 <아리랑문학마을>에서는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정래는 <아리랑>을 쓰는 동안 수시로 찾아온 위궤양으로, 집필 막바지에는 우측 어깨와 손가락 통증으로 고행하였다. 특히, 집필 내내 협박전화로 인하여 신경을 많이 쓰고, 극우 반공 단체에 의하여 국가보안법 협의로 고소되기도 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수한 난관을 헤치고 집필 5년여 만에 원고지 2만장 분량의 대하소설 <아리랑>은 탄생되었다.
제4전시실에 보존되어 있은 소설 <아리랑>의 필사 원고지이다. 그것들은 필사(必死)의 각오로 쓴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한 그의 흔적이다. 그 흔적들을 남기고 그는 '글감옥'에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출입구 쪽에는 그의 흔적들을 표현한 조형물이 있다.
작가는 <아리랑>을 단순한 소설로써 생각하고 시도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사를 단순히 수난과 굴욕의 세월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저항과 투쟁의 시기로 그렸고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감없이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소설의 전개 과정을 요약하여 흐름순으로 정리를 해놓아 조금만 시간을 내어서 들여다 본다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아리랑>은 12권의 대하소설이다. 한일합방이 일어나기 전인 1904년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가 시대적 배경이고, 김재 만경평야와 군산항 그리고 만주, 하와이, 중앙아시아 및 소련과 만주 국경 등 우리나라를 떠나 유랑민이 되어버린 유민들과 독립세력들의 발길이 닿았던 지역들이 지리적 공간에 속한다.
조선인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그 틈새를 노린 친일 매국노들의 행태가 기술되어 있고, 조국을 떠나 해외로 떠도는 상황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저항과 침탈이 그려지고 있다.
만주와 하와이 등으로 이주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중점적으로 그려진다. 당시, 김제평야에서는 하시모토가 죽산면의 농토를 반 이상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무고한 조선인들이 무참하게 살해된다. 국내외에서는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지주 하시모토의 권력과 횡포는 날로 커진다.
만주에서는 일본군의 만주토벌대에 의하여 독립군들이 고난을 겪는다. 이 시기에 조선여자들은 정신대로 끌려나나고, 마지막 저항을 하던 일본은 패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만주에서 일본의 힘이 빠져나가고 공백이 생기자 이번에는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이 애써 일군 토지를 뺏기위하여 달려든다. 조선인들은 다시 유랑의 길로 나선다.
"이것이 8.15 해방이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 큰 것이다. "해방은 되었으되 진정한 해방은 아직도 되지 못했다!!!"는 말과 상통하는 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념적 갈등과 사회적 혼란은 그 당시 제대로 처리못한 얼룩에 기생한 것들의 흔적이다.
작가 조정래는 다른 나라로 떠나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한민족의 터를 찾기 위하여 중국 2번, 미국 3번, 일본 3번, 러시아 2번의 답사를 했다. 지구를 세바퀴 이상 돈 발길이었다.
만삭의 정신대... 너무도 널리 알려져 있는 눈물겹고 치가 떨리는 사진이다.
김제 지역의 소설 <아리랑>에 등장한 주요 장소를 표시해 놓았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개별 장소에 대하여 알아간다면 휠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제2전시실에는 작가의 현지 답사와 글쓰는 현장을 전시하고 있다.
<아리랑>은 1990년 12월 11일자 한국일보 연재를 시작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신문에 연재된 소설을 스크랩하여 보관하고 있다.
소설 <아리랑>을 집필하는 작가의 변이 적혀있다. "민족이 똑같은 불행에 처했을 때 작가인 나 자신의 진로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당시 수많은 작가들이 변절을 하고 일본을 찬양했다. 물론 작가뿐만 아니다. 그들은 해방이 되자 잽싸게 가면을 바꿔써서 구국의 영웅으로 나타났다. 작가의 말은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을때 과연 나는 어덯게 처신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은 해외 번역이 쉽지 않다고 한다. 수없이 등장하는 전라도 사투리를 표현할 방법이 너무도 어렵다는 것이 큰 이유중의 하나이다. 조정래님의 투철한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메모이다.
"36년동안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 2백자 원고지 18,000매를 쓴다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고작 300여만자!"
그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
<아리랑>과 관련된 이 지역을 재조명하고 시대적 상황을 파헤치는 과정과 결실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4전시실에는 작가의 생애와 그의 집필 활동의 과정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은근히 스케치 솜씨가 좋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랑문학관>으로는 전체적인 소설 <아리랑>과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일제침탈과 민족 저항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김제평야를 걷거나 달리면서 100여년전의 이땅의 상황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리랑문학관>과는 별도로 소설 <아리랑>의 주요 무대였던 죽산면에 <아리랑 문학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아리랑문학관>이 소설 아리랑에 촛점을 맞춘 곳이라면 <아리랑문학마을>은 소설의 배경 및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리해 놓아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아리랑문학마을> 방문기는 추후(언젠가)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