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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자리>
아내가 어이없는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지 4년, 지금도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기만 합니다.
스스로 밥 한끼 끓여 먹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남편을 두고 떠난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난 나대로 아이에게 엄마 몫까지 해주지 못하는 게 늘 가슴 아프기만 합니다.
언젠가 출장으로 인해 아이에게 아침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하고 출근준비만 부랴부랴 하다가 새벽부터 집을 나섰던 적이 있었지요. 전날 지어먹은 밥이 밥솥에 조금은 남아있기에 계란 찜을 얼른 데워 놓고 아직 잠이 덜 깬 아이에게 대강 설명하고 출장지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있나요?
그저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전화로 아이의 아침을 챙기느라 제대로 일도 못 본 것 같습니다. 출장을 다녀온 바로 그 날 저녁 8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이와 간단한 인사를 한 뒤 너무나 피곤한 몸에 아이의 저녁 걱정은 뒤로 한 채 방으로 들어와 양복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침대에 대자로 누웠습니다.
그 순간, "푹!" 소리를 내며 빨간 양념국과 손가락만한 라면 가락이 침대와 이불에 퍼질러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펄펄 끓는 컵라면이 이불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는 뒷전으로 하고 자기 방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이를 무작정 불러내어 옷걸이를 집어 들고 아이의 장딴지와 엉덩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 왜 아빠를 속상하게 해! 이불은 누가 빨라고 장난을 쳐, 장난을 ! "
다른 때 같으면 그런 말은 안 했을 텐데 긴장해 있었던 탓으로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을 때, 아들 녀석의 울음 섞인 몇 마디가 나의 매든 손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들의 얘기로는 밥솥에 있던 밥은 아침에 다 먹었고, 점심은 유치원에서 먹고, 다시 저녁때가 되어도 아빠가 오시질 않아 마침, 싱크대 서랍에 있던 컵라면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가스렌지 불을 함부로 켜선 안 된다는 아빠의 말이 생각나서 보일러 온도를 목욕으로 누른 후 데워진 물을 컵라면에 붓고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출장 다녀온 아빠에게 드리려고 라면이 식을까 봐... 내 침대 이불 속에 넣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런 얘길 진작 안 했느냐고 물었더니, 제 딴엔 출장 다녀온 아빠가 반가운 나머지 깜박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싫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저는 수돗물을 크게 틀어 놓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한참이나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와서는 우는 아이를 달래 약을 발라주고 잠을 재웠습니다.
라면에 더러워진 침대보와 이불을 치우고 아이 방을 열어 보니 얼마나 아팠으면 잠자리 속에서도 흐느끼지 뭡니까?
정말이지 아내가 떠나고 난 자리는 너무 크기만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나는 그저 오랫동안 문에 머리를 박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이제 5년...
이제는 아내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도 한데, 아직도 아내의 자리는 너무나 크기만 합니다.
일 년 전에 아이와 그 일이 있고 난 후, 난 나대로 아이에게 엄마의 몫까지 더욱더 신경을 쓰기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아이도 나의 걱정과는 달리 티없고 맑게 커가는 것 같아서 아이에게 정말로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의 나이 이제 7살, 얼마후면 유치원을 졸업하고 내년부터는 학교를 갑니다.
그 동안 아이에게 또 한 차례 매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아이가 그 날 유치원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떨리는 마음에 회사를 조퇴하고 바로 집으로 와서 아이를 찾아봤지만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애타게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놀이터에서 혼자 신나게 놀고 있더군요. 너무나도 아이에게 화가 나서 집으로 온 후 아이에게 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 한 차례의 변명도 하지 않고, 잘못을 빌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날은 유치원에서 부모님을 모셔 놓고 재롱잔치를 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몇 일 후, 아이는 유치원에서 글을 배웠다고 너무나도 기뻐하는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아이는 저녁만 되면 자기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글을 써대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지 비록, 아내가 없지만 하늘에서 아이의 모습을 보곤 미소짓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난 또 다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되고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흘러 나올 때쯤 아이가 또 한 차례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날 회사에서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찾는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 전화는 우리 동네의 우체국 출장소였는데 우리 아이가 우체통에 주소도 쓰지 않고 우표도 부치지 않은 편지 300여 통을 넣는 바람에 가장 바쁜 연말에 우체국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끼친다고 전화가 온 것입니다.
서둘러 집으로 간 나는, 아이가 또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아이를 불러놓고 다시는 들지 않으려던 매를 또다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는 변명을 하지 않고 잘못했다는 소리뿐...... 아이가 그렇게 맞는데도 변명을 하지 않자 난 아이를 때리는 것을 그만두고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받아 왔습니다. 편지를 가지고 온후 아이를 불러놓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물어 봤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더군요... 엄마에게 편지를 보낸 거라고...
순간 울컥하며 나의 눈시울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바로 앞에 있는 터라 아이에게 티내지 않고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편지를 한 번에 보냈느냐고...
그러자 아이는 그 동안 편지를 계속 써 왔는데, 우체통의 턱이 높아서 자기의 키가 닿지 않아 써오기만 하다가 요즘 들어 다시 재보니, 우체통 입구에 손이 닿길래 여태까지 써왔던 편지를 한꺼번에 다 넣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전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잠시 후 아이에게 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엄마는 하늘에 계시니깐 다음부터는 편지를 쓰고 태워서 하늘로 올려 보내라고...... 그리고 그 편지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서 그 편지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가 엄마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태우던 편지들 중 하나를 들고 읽어 보았습니다.
"보고 싶은 엄마에게... 엄마, 지난주에 우리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했어... 근데 난 엄마가 없어서 가지 않았어...
아빠가 엄마 생각날까 봐 아빠한테 얘기 안 했어... 아빠가 나 찾으려고 막 돌아다녔는데 난 일부러 아빠 보는 앞에서
재미있게 놀았어... 그래서 아빠가 날 마구 때렸는데도 난 끝까지 얘기 안 했어...
나 매일 아빠가 엄마 생각나서 우는 거 본다...
근데 나 엄마 생각 이제 안나... 아니... 엄마 얼굴이 생각이 안나...
엄마 나 꿈에 한 번만 엄마얼굴 보여 줘.... 알았지?
보고싶은 사람 사진을 가슴에 품고자면 그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고 하던데, 엄마도 그렇게 해 줄 거지 ? "
그 편지를 읽고 또 다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도대체 이 아내의 빈자리는 언제 채워질까요?....
아니,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이 자리는 나의 눈물로만 채워야 하는 걸까요?....
정말이지, 아내가 떠난 빈 자리는 너무나 크기만 해서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마지막 미역국>
나는 뇌종양 말기 환자입니다.
날마다 고통에 시달리는 나의 모습은 거의 발악 수준입니다.
이젠 방사선 치료조차 의미가 없어지고 죽는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냄새도...미각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나를 위해 내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없는 곳에서 울고 있다가 눈이 퉁퉁부어 들어오고는 합니다.
내 아내는 내 병수발 드느라 직장까지 그만두었고,
아들 두명은 평소에 교회를 멀리했던 녀석들이 교회를 나갑니다.
어머니는 이 못난 자식때문에 10년은 더 늙어버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요즘들어 내 몸이 더욱 안좋아졌습니다.
이제 가족과 헤어질 시간이 몇일 남지 않은것 같아요..
달력을 보니... 몇일 후 면 아내의 생일입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줘야 할텐데...
인터넷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방법을 요리조리 검색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후회의 눈물이 납니다..
건강한 시간동안 아내의 생일날 미역국 한번 내 손으로 끓여주지 못했다는것이...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박살날 것처럼 아프고 발악과 괴로움이 찾아왔지만,,,
난 버텨야했어요.. 아내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미역국을 끓여주어야 하니까요...
이윽고 아내의 생일...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일어났습니다
미리 담가둔 미역을 꺼내고, 고기를 꺼냈다 참기름을 찾고...
그런데 간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장이 없으면 소금으로 간을 하라고하니..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찬장 구석에 박힌 소금을 꺼내서 미역국에 넣었습니다
이미 미각을 잃어버린 나는 맛을 볼 수 없어서 감으로 소금을 맞추어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침에 가족들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만든 미역국에 가족들이 눈물을 흘렸어요...
미역국의 첫 입맛을 보는 아내는 그만 엉엉 울고 말더라구요...
아이들도 먹자마자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도 먹자마자 우셨구요...
맛있냐고 묻자 가족들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미역국이라며
밥까지 말아서 모두 먹고 나가더군요...
내가 끓인 미역국을 맛있게 먹고가는 가족을 보니 너무 기뻤습니다.
가족이 나간 후에 정리를 하다가 내가 넣은 소금통을 보았습니다...
아... 이럴 수가...
소금통에 들은 것은 소금이 아닌 설탕이 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너무 고마웠어요..
아무말 없이 맛있다며 나의 마지막 미역국을 기쁘게 먹어준 가족들...
가족이 마지막까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난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보 사랑해 미안해>
저만치서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
“여보, 점심 먹고 나서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
“나, 점심 약속 있어.”
해외 출장가 있는 친구를 팔아 한가로운 일요일..
아내와 집으로부터 탈출하려 집을 나서는데 양푼에 비빈 밥을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 나를 본다.
무릎나온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에 올려 놓은 모양이 영락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줌마 품새다.
“언제 들어올거야?”
“나가봐야 알지.”
시무룩해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을 끌어 모아 술을 마셨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 아내에게서 몇 번의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몇 번을 버티다 마침내 베터리를 빼 버렸다.
그리고 새벽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힘없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갔다 이제 와?”
“어, 친구들이랑 술 한잔...어디 아파?”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혀 약 좀 사오라고 전화 했는데...”
“어, 배터리가 떨어졌어, 손 이리 내 봐.”
여러번 혼자 땄는지 아내의 손끝은 상처 투성이였다.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어, 너무 답답해서...”
“이 사람아 병원을 갔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느 때 같으면 마누라는 미련하냐가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엎드린 채 가뿐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응급실 진료비가 아깝다며 이제 말짱해졌다고 애써 웃으 보이며 검사 받으라는 내 권유를 물리치고 병원을 나갔다.
다음날 출근하는데 아내가 이번 추석 때 친정부터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노발대발 하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안된다고 했더니
“30년 동안 그 만큼 이기적으로 부려 먹었으면 됐잖아.
그럼 당신은 당신 집 가,
난 우리 집 갈테니까.”
큰 소리 친 대로 아내는 추석이 되자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버렸다.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는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호통을 치셨다.
결혼하고 처음,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말이다.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
“여보, 만약 내가 지금 없어져 당신도 애들도 어머님도 사는데 아무 지장없을거야.
나 명절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 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랐어.”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아내가 위암이라고 전이 될 대로 전이가 돼서 더 이상 손을 쓸수가 없다고, 3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에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문을 열었을때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 방 걸레질을 하는 아내가 없다면,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해주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 갑자기 찾아온 부모가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살가와 하지도 않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부에 관해, 건강에 관해, 수없이 해 온 말들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한데도, 아내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보, 집에 내려 가기 전에...
어디 코스모스 많이 펴 있는데 들렀다 갈까?”
“코스모스?”
“그냥, 그러고 싶네. 꽃 많이 펴 있는데 가서 꽃도 보고,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걸 해보고 싶었나 보다.
비싼 걸 먹고, 비싼 걸 입어 보는 대신, 그냥 아이들 얼굴을 보고, 꽃이 피어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
“당신 바쁘면 그냥 가고...?”
“아니야, 가자.”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 있는 곳으로 왔다.
아내에게 조금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보,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우리 적금 올 말에 타는 것 말고 또 있어.
3년 부은거야, 통장,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
그리고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
재작년에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
잘했지 뭐, 그거 꼭 확인해보고...”
“당신, 정말 왜 그래?”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께,
올해 적금타면 울 엄마 한 이백만원만 드려,
엄마 이가 안 좋으신데 틀니를 하셔야 되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 되잖아,
부탁해.”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고 말았다.
아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걸 알면서도 소리내어
엉,엉...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
이런 아내를 떠나 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요즘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걸 좋아한다.
“여보, 30년 전에 당신이 프로포즈하면서 했던말 생각나?”
“내가 뭐라 그랬는데?”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
“그랬나?”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당신이 나보고 사랑한다 그런 적 한번도 없는데, 그거 알지?
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
장모님 틀니 연말까지 미룰 것 없이 오늘 가서 해드리자.”
“.........”
“여보, 장모님이 나 가면 좋아하실텐데...여보,
안 일어나면 안간다. 여보? 여보?”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었다.
이제 아내는 웃지도, 기뻐하지도,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난 아내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어젯밤...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엄마의 얼굴>
경기도 양평 서종이란 마을에 호철이란 아이와 엄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어릴때는 몰랐는데 커가면서 점점 엄마를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얼굴에 큰 화상흉터가 있어 보기에 흉칙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엄마를 보고 무섭다, 괴물같다고 놀려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는 엄마가 챙피했고, 그래서 엄마가 오면 도망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친구가 " 야! 너희 엄마다" 하자
"아니야 우리 엄마 아니야" 하며 달아났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문방구집 아저씨가 아이를 따라가 잡고는 이야기했습니다.
" 철이야, 너희 엄마가 아니라고 했느냐?
아이는 울면서 " 아니예요, 우리 엄마는 저렇게 흉칙하지 안아요" 하며 소리질렀습니다.
문방구집 아저씨가 나를 달래며 엄마의 화상에 대해 얘기해주었습니다.
"언젠가 너희 집에 큰 불이 났었지,,그때 너무 불이 크게나서 아무도 너희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단다.
소방관들도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었지~그때 집안에서 니가 혼자 울고 있었어.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니 엄마가 너를 구하겠다고 다들 말리는데 불 속으로 뛰어들었단다..
그 때 너의 엄마는 온 몸에 불이 붙은 상태였는데도 너를 품에 꼭 껴안고 나왔어~
호철아! 저 화상은 너를 사랑했던 엄마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야~
그래도 너의 엄마가 창피하니?
그러자, 호철이는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의 화상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엄마! 엄마! 미안해요, 제겐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14개의 계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는 집은 언덕 높은 곳에 있었어요.
집앞에 14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 사람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근육이 점점 힘을 잃어 결국은 죽게 되고마는 희귀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의사의 판정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습니다.
마음의 상심이 컸던지라 뛰어서도 갈 수 있었던 집 앞의 계단이 높게만 보였습니다.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계단을 오르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자신은 결국 죽게될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더 계단을 오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10분이 걸리던 시간이 난간을 잡지 않고는 오를 수 없게 되었고,
중간에 쉬지 않으면 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운전을 해서 병원 진료를 받고 돌아오던 날이었습니다.
비가 세차게 오고,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 신에게 빌었습니다.
'제발 브레이크를 밟는 발에 마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제발~'
그러나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타이어가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불길한 예감대로 패달을 밟는 자신의 발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겨우 차는 벽에 부딪치며 멈추었고,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발 때문에 타이어를 교체할 수가 없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건너편 어느 집에서 나온 꼬마애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이야~ 혹시 남자 어른 없니? 아저씨가 발에 마비가 와서 꼼짝을 할 수가 없구나
남자 어른이 계시다면 도움을 좀 청해주겠니?"
말없이 꼬마애는 집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자신은 비옷을 입고, 우산을 든 할아버지와 함께 나왔습니다.
사정얘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우산도 쓰지 않고,
세찬 비에 옷을 흠뻑 젖으며 펑크난 타이어를 고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 되었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차 안에 계속 앉아 있기가 정말 가시방석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습니다.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할아버지는 다 되었다며 일어섰습니다.
"이거 정말 뭐라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아무리 생각해도 염치가 없는 것 같아 무엇이든 사례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갑에 달랑 한 장 있는 5달러 짜리 지폐를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수고에 비해 넘 적게 사례를 해서 서운하신걸까?' 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꼬마애가 말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앞을 못보세요~"
그 때야 왜 이렇게 더디 걸렸는지 지폐를 내민 손을 보고 왜 아무 반응이 없었는지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지폐를 내민 자신의 손이 오히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자네를 도울 수 있어서 정말 기쁘네.
만약 내가 자네같은 상황이었다면 자네도 틀림없이 나처럼 성심껏 도와주었을꺼라고 생각한다네. 늘 운전 조심하게나~"
라며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무사히 집에 돌아온 그는 마음이 180도 변했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돕고 사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래! 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계단을 내 힘으로 오르자!
언젠가 내 얘기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도 있으니까!" 라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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