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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 문학의 갈래(쟝르, genre)
문학은 말의 예술이다. 말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린이 시절에 낱말 하나하나씩을 배워서 노래를 먼저 배우고, 다음에
낱말의 사용 실력이 나아지면서 많은 낱말을 부리어야 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성장 발전한다.
문학은 어린이가 말을 먼저 익힌 다음 글을 배워서 그 말과 생각을 글로 표현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문학의 갈래도 이에서 멀지 아니하다고 하겠다. 인류의 언어 예술의 발전 양상이 마치 한 어린이의 성장에
따른 정서 발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지 아니하였을 원시 사회에서는 낱말 사용의 실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적은 수의 낱말로 단순한 자기 정서를 표출할 수 있는 어린이 노래 같은 문학이 먼저 발생하고,
노래문학에서 낱말 사용의 실력이 향상 발달하면서 노래와 무용과 담화가 복합된 놀이문학으로 이행되고, 여기서 한
발짝 발전되면 노래와 무용을 배제한 담화뿐인 이야기문학에로 이행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한 단계 나아가면 기존의 모든 문학에 대하여 가치의 높낮이와 좋고 나쁨을 매기는 매김문학에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노래문학은 다른 말로 바꾸면 율문문학(律文文學)이라고 하며, 이야기문학은 산문문학(散文文學)이라고 한다.
필자는 문학의 갈래를 이 원리를 적용하여
1. 노래[시가(詩歌)문학, 2. 놀이[연희(演戱)]문학, 3. 참 이야기[수필(隨筆)]문학, 4. 꾸민 이야기[소설(小說)]문학,
5. 매김[비평(批評)]문학의 다섯 갈래로 나누어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1. 노래문학[시가문학(詩歌文學)]
2. 놀이문학[연희문학(演戱文學)]
3. 참 이야기문학[수필문학(隨筆文學)]
4. 꾸민 이야기문학[소설문학(小說文學)]
5. 매김문학[비평문학(批評文學)]
1. 7. 언제 어떤 문학이 있었나?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한국 문학의 시대구분이다.
우리나라 곧 “환한 나라[환국(桓國), 한국(韓國)]” 또는 “밝다나라[단국(檀國)·배달국(倍達國)·백두국(白頭國)]” 의
역사는 요즈음에는 1만년이라는 설이 우세하여지고 있다.
(앞 주 15)의 김정권외,『우리 역사 일만년』, 안호상,『배달·동이겨레의 한 옛 역사』,,『배달·동이 는 동이겨레와
동아문화의 발상지』, 『이일봉,『실증 한단고기』, 최종철,『환웅·단군 9000년 비사』 등 참조.)
따라서 1만 년 전은 원시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니, 당연히 이 시대의 문학은 “원시시대문학”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은 밝다나라시대문학이고, 다음은 안호상박사나 김정권·한애삼님들의 주장에 따라 진(秦)나라 이전시대의 중국
역사와 문화 밑 문학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는 의미에서 여기서는 선진시대문학(先秦時代文學)을 우리
문학사에 포함하여 다룬다.
이에 관하여는 중국측과 남은 사대 모화 주의자들이나 식민사관에 찌든 사람들은 어불성설로 못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라도 밝혀져야 한다.
그 다음에 부여와 삼한시대문학이고, 그 뒤에 가야·고구려·백제·신라의 사국시대문학(四國時代文學)이고, 그 뒤는
통일 신라와 발해의 남북조시대문학이고, 그 뒤는 고려문학과 조선문학으로 이어진다.
이를 차례로 정리하여 보이면 아래와 같다.
1. 원시시대문학(原始時代文學)
2. 고조선시대문학(古朝鮮時代文學)
3. 선진시대문학(先秦時代文學)
4. 부여(夫餘)와 삼한시대문학(三韓時代文學)
5. 사국시대문학(四國時代文學)
6. 남북조시대문학(南北朝時代文學)
7. 고려시대문학(高麗時代文學)
8. 조선시대문학(朝鮮時代文學)
2. 한국 첫째시대 원시문학
2. 1. 한국 원시문학은 중원(中原)벌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 조상님들이 드넓은 중국 대륙을 빼앗기고 동쪽으로 쫓기어 오기 전인 아득한 옛날 중국 대륙에서 살 때의
신·구석기시대문학 자료는 현재 모두가 중국인들의 유물로 둔갑되어 있다.
인도 유럽계 겨레인 한족(漢族)의 내침(來侵)에 의하여 쫓기고 쫓기어 원래 살던 고향을 버리고 후퇴하여 오늘에
이른 우리들은 우리 조상들의 원시시대 신·구석기시대문학의 자료는 한반도(韓半島) 이남 지역으로 국한하게 되었다.
유방(劉邦)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동화되거나, 동방으로의 이주(移住)로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혀 있는 우리 조상들의 시신(屍身)과 생활 용기(用器) 등 매장 문화재(埋藏文化財)
들이 모두 중국의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출토된 문화재들 중에 중국 대륙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비슷한 것이 나오면, 무조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면서 중국의 것을 보고 베낀 것으로 치부하여 버리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
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다는 사실의 예를 우리는 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비롯한 고구려의 옛 문화재
들이 모두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의하여 중국화하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는 하루 속히 나라의 힘을 길러서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도로 찾아야 한다. 중국 대륙의 옛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현재 일본국 왕궁 박물관의 지하 창고에 있 는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북경(北京) 근처 주구점
(周口店)에서 발굴된 원시인의 DNA 검사로 쉽게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전호태박사의 『중국화상석과 고분벽화연구』(솔, 2007)에서도 우리 조상의 뿌리를 더듬어 찾을 수가 있다.
2. 2. 한국 원시문학 고인돌에서 본다.
원시시대는 글자가 없는 시대이므로 고인돌이나 바위벽에 새겨진 그림이나 땅속에 묻혀 있다가 발굴되는 토기류
(土器類)들에서나 그 시대의 문학을 짐작할 수가 있다.
소남 천문학사연구소의 양홍진과 박창범 연구관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고인돌에서 나온
당시의 문화 유적 중에는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의 덮개돌에 묘성(卯星:플레이아데성단)과 삼성(參星:
오리온자리) 등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육성(南斗六星) 등의 별자리가 전하여져 오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오늘의 우리는 그 당시의 문학이 기록으로 전하여오는 것은 없어도 추리력에 의하여 짐작은 할 수가
있다.
기원전 1000년-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별자리들을 우리 조상님들께서 밤하늘에서 관측하였을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그 시대의 문학도 어느 수준이었을까를 짐작할 수가 있다.
(박근태,「한국천문학역사 선사시대에 시작」,『동아일보』제26584호,)
2. 3. 한국 원시문학 암각화에서 본다.
또 바위벽의 그림은 현재 경상남도 울주군 대곡리(蔚州郡大谷里)와 천전리(川前里)의 태화강(太和江)가 바위벽에 그
려져 있는 그림들이다.
이것은 이른바 반구대 바위 새김 그림[盤丘臺巖刻畵]이라는 것이다.
이 그림에는 표범과 호랑이도 있고, 고래도 있고, 산짐승들을 잡기 위한 사냥용 그물도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 그림들을 통하여 그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짐작하면서 그 그림 자체가 아주 훌륭한
문학이라고 생각이 된다.
또 경상북도 고령군 양전동에 있는 알터 유적의 그림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당시
그들의 생활상을 그림을 그려서 문학적 내용을 표현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임세권, 「우리나라 선사암각화의 연대에 관하여」,『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고려원, 1984.)
3. 한국 둘째시대 밝다나라문학 고조선문학=필자는 “환한나라문학”이라 하고 싶으나,
종전의 학술 용어를 그대로 습용한다.
3. 1. 천부경(天符經)
이 작품은 9자 1구로 하여 9줄 81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환웅 1세 거발환(서기전 3898-3805)이 천산(天山)에서
지상의 태백산 신시(太白山神市)에 내려와 도읍하고, 신지(神誌:神志)이던 혁덕을 시켜 이를 기록 보존하게 하시어
신지(神誌)가 전자(篆字)로 빗돌에 새겨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서첩(書帖)으로 꾸며 세상에 전한 것인데,
4250(1917)년에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에서 수도 중이던 스님 계연수(桂延壽)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진 오래된 경전
(經典)이다.
李錫浩,『三一神誥·東經大全』, 大洋書籍, 1973.
송원홍,『배달 겨레의 뿌리 배달전서』, 밀알, 4320.
제갈태일,『한(韓)사상의 뿌리를 찾아서』더불어책, 2003.
趙英武,『韓國原始知性과 天符美學』, 문화일보, 1995.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一始無始一 하나로 시작하되 하나에서 비롯됨이 없고,
析三極 하늘과 땅과 사람을 분석하면,
無盡本 천하의 큰 근본이 다함없다.
天一一地一二人一三 하늘은 늘 하나이고, 땅은 둘이 되며, 사람은 셋이 되네.
一積十鋸 하나가 쌓여 열이 되니 너무 크네.
無匱化三 삼극의 변화는 다함이 없으니,
天二三地二三人二三 하늘과 땅과 사람은 둘에서 셋이 되며,
大三合六生七八九 크게 셋이 합하여 육이 되어 칠 팔구를 낳는다.
運三四成環五七 삼이 끝나며 사로 시작하여 도로 오칠이 된다.
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한 가지 묘함이 만왕 만래하며 변해도 근본을 못 움직이네.
本心本 본래 사람의 마음은 만물의 근본이니,
太陽昻明 태양을 본을 삼아 사람을 밝히고 밝히네.
人中天中地一 사람은 삼재라 하늘과 땅에 맞아 하나가 되면,
一終無終一 하나로 끝내되 하나로 끝남이 없다.
이 글은 최치원 선생이 9자 9줄로 표기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그 뜻을 풀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위와 같이 끊어서
풀이한다.
하나에서 아홉까지의 숫자를 가지고 천지창조(天地創造)와 그 운행(運行)의 묘리(妙理)와 만물의 생장 성쇠의 원리를
설파한 역리적(易理的) 무한한 비밀을 안고 있는 전문 81자 중 1자가 11회나 나올 만큼 “하나[一]”를 중시한 한[一·大·
白·全·韓] 사상(思想)을 밝힌 것이다.
이 글은 분량은 짧지만, 그 심오한 글의 뜻은 우리 천손족(天孫族)의 원시시대 철학·문학·문화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따라서 그 구체적 해석도 학자들에 따라 구구각색이다.
문학적 감상을 비롯한 다방면의 연구는 이제부터 후학들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될 것이다.
3. 2. 비사(秘詞)
이 작품은 『고려사(高麗史)』권 122, 「열전(列傳)」35, “김위제(金謂磾)”에 김위제공이 숙종께 천도의 필요성을
상주한 글 속에 언급된 5언체 10구인데, 이가원(李家源)박사가 그의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에서 인용 소개한
데에서 처음으로 학계에 옛 조선문학의 시가(詩歌) 작품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如秤錘極器 저울대의 추와 극기와 흡사하니,
秤幹扶踈樑 저울대는 엉성한 들보를 부축하죠.
錘者五德地 저울추는 오덕이 서려 있는 땅이요,
極器白牙岡 극기는 백악산의 산줄기입니다.
朝降七十國 칠십 국이 항복하고 조회에 참여하며,
賴德護神精 오덕의 땅 힘입으면 신의 보호 받지요.
首尾均平位 저울대의 수미가 균형 잡혀 평위 되면,
興邦保太平 나라가 흥륭하여 태평이 보장되죠.
若廢三諭地 만약에 삼경 땅이 못 쓰게 된다면,
王業有衰傾 왕업이 쇠퇴하고 나라가 기울 테죠.
이 작품의 지은이는 단제시대(檀帝時代) 사관(史官)이었던 신지(神誌:神志)라고 김위제공은 밝히고 있다.
그 뜻은 김위제공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의 칭(秤)은 고려시대 세 곳의 서울[三京]을 가리키고, 극기(極器)는
머리[首]요, 추(錘)는 꼬리[尾]이며, 저울대[秤幹]는 끈을 잡는 곳입니다.
송악산(松嶽山)은 부소라 하여 저울대에 비유하였고, 서경(西京)은 백아강(白牙岡)이라 하여 저울 머리에 비유하였
으며, 삼각산(三角山)은 오덕구로 저울추에 비유한 것이라면서 도선(道詵)국사의 삼경(三京)론과 같다고 하였다.
3. 3. 박수무당의 죽음[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公”은 “어르신네”이지 “여보”나 “당신”이 아니다.
“無渡河”는 “無能渡河”의 준말이다. “물의 폭이 넓은 시냇물인 하천을 건널 능력이 없음”으로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을 우리 학계에서 처음 우리의 문학 작품으로 논의한 사람은 옥유당(玉甤堂) 한치윤(韓致奫:4100-4147, 1765-
1814)공이다. 그는 그의 저술 『海東繹史(해동역사)』에서 아래와 같이 배경담과 함께 노래의 전문을 소개하고 있다.
살피건대, 조선은 곧 한나라 때 낙랑군 조선현(樂浪郡朝鮮縣)이다.
여옥이 지은 공후인 은 고시(古詩)로 기록되어 있으니, 그 노랫말은 이러하다.
公無渡河! 어르신 못 건너셔요.
公竟渡河! 어르신 끝내 건너시네.
墮河而死 물에 빠져 돌아가시면,
將奈公何 어르신 어쩌시죠?”(하략)
하였다.
이 배경담은 한(漢)나라 때에 채집되어 진(晉)나라 사람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실려 전하고 있다.
공후인(箜篌引)은 조전나루 뱃사공인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 이다.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삿대질하며 씻고 있었다. 어떤 맨머리의 미치광이 남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병을
들고 물살이 거세게 흐르는 물길로 뛰어들어 건너니, 그 아내가 뒤따르며 멈추기를 소리 질렀으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여 마침내 냇물 속으로 푹 가라앉아 죽었다.
이에 공후를 가져다 두드리며 “어르신 못 건너서요”노래를 지었다. 그 소리가 너무 슬펐는데, 그 노래를 다 부른 뒤에
스스로 냇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곽리 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인 여옥에게 그 소리를 전하니, 여옥이 가슴 아파하면서 즉시 공 후를 가져다 그 소리를
흉내 내니, 듣는 사람마다 슬퍼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 는 이가 없었다.
여옥이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麗容)에게 들려주었더니, 이름을 “공후 인”이라고 하였다
“箜篌引朝鮮津卒藿里子高妻麗玉所作也子高晨起刺船而濯有一白首狂夫被髮提壺亂流而渡其妻隨呼止之 不及遂墮河水
死於是援箜篌而鼓之作公無渡河之歌聲甚悽愴曲終自投河而死藿里子高還以其聲語妻麗玉玉傷 之乃引箜篌而寫其聲聞
者莫不墮淚飮泣焉麗玉以其聲傳隣女麗容名曰箜篌引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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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 배경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첫째, 곽리자고는 조선나루 역졸인 뱃사공으로 콩마을[霍里] 자고(子高)인데, 불행한 사건의 목격자이다.
둘째, 백수광부(白首狂夫)는 앞을 못 보는 박수무당이다. 백수는 박수와 음이 비슷하다. 광부(狂夫)라고 한 것은 그가
하는 짓이 정상인의 눈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다.
손에 든 병[壺]이란 것은 술병[酒甁]이 아니라 무당이 병을 고치는 푸닥거리를 한 뒤에 병귀신(病鬼神)을 잡아넣어
밀폐시킨 항아리이다.
무당은 병귀신(病鬼神)이 들어 있는 병을 사람들과 거리가 먼 곳에 격리시키기 위하여 신(神)이 시키는 대로 그 병[壺]
을 가지고 달려간다. 여기서는 그 병을 들고 물 건너 산이나 들판으로 가기 위하여 달려간 것이다.
셋째, 백수광부의 아내는 여자 무당(巫堂)이다. 앞을 못 보는 박수가 병[壺]을 들고 달려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며
말리었고, 말리다가 실패한 뒤 공후를 두드리며 “어르신 못 건너셔요” 노래를 지어 부르고 함께 죽었다.
“공무도하(公無渡河)”에서 공(公)은 지체 높은 사람이나 점잖은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부인이 자기 남편을 부를
때에 흔히 썼으며, 지금도 점잖은 사람들은 친구 사이에도 “김공, 최공”하고 부른다.
여기서는 무당 부부 또는 무당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의 호칭으로 보고 싶다.
“무도하(無渡河)”는 “무능도하(無能渡河)”로 보아야 그럴 듯하다. “공은 물을 건널 능력이 없습니다.”의 뜻이다.
또 “타하이사(墮河而死)”의 뜻풀이도 백수광부가 스스로 자기 몸을 물에 던져 죽은 투신자살(投身自殺)의 뜻이 아니다.
물을 건너다가 발을 헛디디거나, 여울의 물살이 세어서 무릎이 꺾이면서 엎어져 죽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박수무당이 굿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실수가 많아서 물을 건너는 것도 실수를 할 것 같으니까 “어르신 못
건너셔요!”라고 만류하였건만 굳이 건너더니 물 가운데서 다리 힘이 풀리면서 물속으로 털썩 주저앉아 죽게 된 것이다.
넷째,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은 “어르신 못 건너셔요” 노래에 곡을 붙인 “공후인”의 작곡자이고, 그녀는 이웃 여자에게
그 곡을 공후로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다섯째, 여옥의 공후곡을 들은 여용은 여옥의 이웃 여자로, 여옥의 작곡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에 “공후인(箜篌引)”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를 정리하여 보면, 문학 작품의 이름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어르신 못 건너셔요.]”이고, 악곡 이름은 “공후인
(箜篌引)”이다.
문학작품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어르신 못 건너셔요.)]” 의 지은이는 백수 광부의 아내이고, 악곡작품인 “공후인
(箜篌引)”의 지은이는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麗玉)이고, 악곡작품의 이름을 지은이는 여옥의 이웃집 여자인
여용(麗容)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죽음의 길로 잘못 가고 있는 남편(?) 아니면 스승(?)을 만류하다가 실패한 뒤 따라 죽는 생명 존중의
열부가(烈婦歌)인 애도시(哀悼詩)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선사시대 무당의 굿판 뒤에 일어난 사건과 서정시가 입으로 전하여 오다가 한(漢)나라시대에 한인(漢人)에
의하여 한문으로 정착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梁在淵,「公無渡河歌小攷」,『국어국문학』5, 국어국문학회, 4286.
白鐵·李秉岐,『國文學全史』,新丘文化社, 4290.
朴晟義,『韓國歌謠文學論과 史』, 예그린출판사, 1978.
진경환,『古典의 打作』, 月印, 2000.
중국인들은 이 작품을 중국 문학으로 다루고 있다.
郭茂倩,『樂府詩集』, 里仁書局, 1984.
曹淑娟,『如夢』, 漢藝色硏, 1991.
우리는 그동안 너무 물질적 생존적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조상도 잃고 문학은 물론 문화 전반을 한인(漢人)들에게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정신을 차려 잃어버린 우리 조상과 우리 역사와 문화와 문학들을 도로 찾기에 노력하여야 하겠다.
3. 4. 보리 팬 노래[맥수가(麥秀歌)]
이 노래는 사마천(司馬遷)의 『史記(사기)』에 실려 전한다. 지은이는 고조선 시대 기자(箕子)로, 은(殷)나라의 도읍
지를 지나가며 옛 궁궐터를 보니, 나라가 망하여 왕궁 터가 보리밭이 되어 보리 이삭이 잘 팬 것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랫말은 아래와 같다.
麥,秀漸漸兮 보리 이삭 점점 패고
禾黍油油兮 벼와 기장 기름지네.
彼狡童兮 저 교활한 아이 녀석
不與我好兮 나와 사이 나빴었네.
여기서 “교활한 아이 녀석”이라고 한 것은 은나라를 망하게 한 폭군 주(紂)를 가리킨 것이다.
은나라의 옛 백성들이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고 한다. 훗날 이 노래의 “맥수”에 “탄”자를 붙이어 “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고 하면, 곧 고국의 멸망을 뜻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 작품의 지은이는 기자(箕子)이고, 그 지어진 때는 은(殷)나라가 망한 뒤 곧 주(周)나라가 건국된 초일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기자(箕子)의 동래설(東來說)과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부정하는 설과 인정하는 주장들이다.
필자는 이에 관하여 기자는 물론 주(周)나라 왕실이 모두 옛날에는 우리의 조상이었다.
『서경』에 의하면, “기자는 주나라 신하가 아니다.[箕子之不臣周也]”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따라서 기자는 밝다나라의 뒤를 이은 천손족의 한 임금일 뿐 한인(漢人)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그가 지었다는 작품
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3. 5. 냇물 노래[하수가(河水歌)]
이 작품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3764-3825, 1431-1492)선생의『靑丘風雅(청구풍아)』에 기자(箕子)가
지은 것으로, 아래와 같이 전한다.
河水潑潑兮 냇물 콸콸 흘러가니,
易維其極兮 다스림이 더는 없네.
明休光兮 밝고 곱게 빛남이여
維后之懿德兮 임의 좋은 덕이로다.
한치윤(韓致奫)의 『海東繹史(해동역사)』권 22 악지(樂志)에는 기자(箕子)가 예악(禮樂)으로 조선 국민을 잘 다스
렸기 때문에 그 덕을 기린 것이라고 하였다.
3. 6. 서경(西京)
이 작품은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에 다음과 같은 기록과 함께 없어진 노래 말의
대체적인 뜻만을 소개되어 있다.
서경(西京)은 고조선 곧 기자(箕子)가 봉하여진 곳이다.
그 백성들이 예의와 사양에 익 숙하여 임금과 어버이들과 윗사람들을 존경하는 의리를 알고 있으므로, 이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대체로 “어진 은택이 가득 펴져서 나무와 풀에까지도 널리 미쳐서 비록 꺾어진 버드나무 가지조차도
또한 살아날 기운이 철철 넘친다고 말하였다.”
“西京古朝鮮卽箕子所封之地其民習於禮讓知尊君親上之義作此歌言仁恩充暢以及草木雖敗折之柳亦有 生意也.”
여기서의 서경(西京)은 이제까지 고려와 조선시대 우리 선인들이 “기자가 봉함 받은 곳”이라는 말에 따라 지금의 북한
에 있는 평양(平壤)으로 보아왔으나, 실은 그것이 아니라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山西省大同市)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은 뒤에 요(遼)와 금(金)나라의 중요 도시가 되었다.
3. 7. 밝다나라 건국 이야기
여기서 말하는 “밝다나라 건국 이야기”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건국 이야기”라고 하는 종전 식민사관
(植民史觀)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이른바 “단군신화(檀君神話)”라고 하여 온 것을 필자는 귀신의 이야기가 아닌 실존
하였던 원시시대의 우리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다룬다.
필자가 여기서 이 건국의 이야기를 노래문학의 뒤에서 언급하는 것은 문학 발달상 노래문학에서 이야기문학으로
발전하게 되어 비록 문학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 역사적으로는 더 오래된 것이라고 하드라도 창작되거나 글자로
정착된 때는 훨씬 더 늦기 때문에 비록 아득히 먼 예전에 세워진 이야기이지만, 노래문학 뒤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단제 기원 3610(서력 1277-1287)년대에 『고기(古記)』라는 옛 책에 근거하여 “고조선 건국”을 기록한 충조국사
(沖照國師) 일연(一然:3539-3621, 1206-1289)스님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본기(本紀)』라는 옛 책의 기록에
바탕하여 “고조선 건국”을 소개한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3557-3633, 1224-1300)선생의 『제왕운기(帝王
韻紀)』에 비슷한 내용의 밝다나라 건국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그 대체의 줄거리를 『삼국유사』에서 인용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옛날 환국(桓國) (환국(桓國)=“제석(帝釋)을 이른다.”는 원주가 있음.) 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자주 하늘 밑 인간
세상을 탐구하는데 뜻 을 두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굽어 살펴 삼위 태백산(三危太伯山)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함을 알았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 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000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태백산 꼭대기=“곧 태백이니,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라는
원주가 있음.) 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 일컬으니, 이 분이 곧 환웅천왕(桓雄天王)이시다.
그는 풍백 (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 가지나 되는
일들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신(神) 환웅께 늘 사람이 되기 를 빌었다. 신께서는 신령한 쑥
한 묶음과 마늘 20 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하였다.
이것을 받아먹은 곰은 가르침을 따라 3·7일을 조심하여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여
사람이 되 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곰은 결혼할 상대가 없으므로 매양 신단수 밑에서 아이 갖기를 원하여 빌고 있었다.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왕검 (檀君王儉)” (왕검(王儉)은 북애노인
(北崖老人)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임검(壬儉)”으로 되어 있다.) 이라 하였다.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경인년(庚寅年)=“요(堯)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니, 50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는 원주가 있음.) 에 평양성(平 壤城)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
이라는 원주가 있음.) 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전략)
昔有桓國(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 三箇遣往理之雄率徒
三千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檀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 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
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常祈于神雄願化爲 人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爾輩食之不見日
光百日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虎不能忌而 不得人身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檀樹下呪願有孕雄乃假化
而婚之孕生子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 寅(唐堯卽位元年戊辰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疑末實)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하략)”
이 글은 285자의 짧은 글이지만, 수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논의하되, 이제까지는 신화(神話)로 다루어 왔다.
이제부터는 비록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일이지만, 실재하였던 역사의 실화(實話)로 다루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의 민족 이름이다.
이제까지 우리 선인들은 배달민족(倍達民族)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말 “밝다겨레”의 한자 음역이다.
이것은 이념적 호칭이고, 우리 조상의 소종래(所從來)를 밝힌 말이 아니므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말과 함께
겨레부치의 이름으로 일컫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우리 겨레의 민족명은 “천손족(天孫族)”이라고 하여야 옳다.
앞에 인용한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들은 분명 하느님의 후손 민족[天孫族]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가 앞으로 가슴에 새겨 바르게 읽어야 할 이름으로 단군(檀君:King Dhan)이 아닌 단제(檀帝:Emperor
Dhan)로 불러야 할 것이다.
천손(天孫)이 통치자가 되면 자연히 천자(天子)일진대 어찌하여 왕(王)도 아닌 군(君)이라 부르는가?
이는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 때문에 요(堯)를 의식하고 스스로 깎아내린 자폄어(自貶語)인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몰지각한 일을 그만 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4. 한국 셋째시대 선진문학(先秦文學) 이제까지는 중국문학으로 다루어져 왔으나, 선진시대 중국 대륙에 살던 사람
들이 우리 조상이라고 보아 여기에 포함하여 다룬다.
4. 1. 율문(律文)
4. 1. 1. 시경(詩經)
이제까지『시경(詩經)』은 중국의 고대 민요집(民謠集)이라고 치부하여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강수원, 안천, 안호상,
윤내현(尹乃鉉), 이성수, 이일봉, 임원직(任源稷), 전우성, 정용석, 최종철, 한순근(韓舜根), 중국인 역사학자인 손진기
(孫進己), 송신조(宋新潮), 양제안(楊濟安), 임혜상(林惠祥), 부낙성(傅樂成)님들의 주장과 언급을 근거로 하여 한국
고전문학에 싸잡아 다루기로 한다. 앞 주 15) 참조.
이 『시경(詩經)』의 원 이름은 『시(詩)』이었는데, 유림(儒林)들이 경전(經典)으로 받들면서 『시경(詩經)』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 책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하여 특정한 어느 한 시대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주(周)나라 초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작품들이 생성된 곳은
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 하남성(河南省), 호북성(湖北省) 등지이다.
이 『시경(詩經)』에는 “풍(風)·아(雅)·송(頌)”의 3대유형(大類形)으로 분류하여 시 305수가 실려 있다.
“풍(風)”은 다시 15개 국풍(國風)으로 구성되었고, “아(雅)”는 대아(大雅)·소아(小雅)로 나뉘어 있으며, “송(頌)”은
주송(周頌)·노송(魯頌)·상송(商頌)으로 짜이어 있는데, 이는 악조별 분류이다.
이 시들의 지은이는 당시의 서민에서 사대부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시들의 형식은 주로 4언체(言體)로 되어 있으며, 그 운용은 “흥(興)·비(比)·부(賦)”의 세 가지 수법으로 한다.
특히 국풍(國風)은 15국풍 160편이 있는데, 이 중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은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
유역의 민가(民歌)인데, 비겨 「패(邶)」와 「용(鄘)」과「위(衛)」들은 산동(山東) 서부와 하남(河南) 동부에서 채집
한 것이며, 「왕(王)」과 「정(鄭)」과 「진(陳)과 「회(檜)」들은 하남성 일대에서 채집한 것이고, 「제(齊)」와
「조(曹)」산동성(山東省) 민가이며, 「위(魏)」와 「당(唐)」은 산서성(山西省) 민가이고, 「진(秦)」은 원래 감숙성
(甘肅省)에 있다가 뒤에 섬서성(陝西省)으로 옮겼고, 「빈(豳)」은 섬서성에서 채집한 것이므로 당시 채집된 민가
(民歌)의 영역은 매우 넓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풍(風)”은 “교(敎)”와 “속(俗)”과 “풍(諷)”의 뜻이 있다고 풀이한다.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는 “제사류(祭祀類)·송축류·연음류(宴飮類)·서사류·서정류·풍자류”의 6종류의 내용
으로 되어 있으며, 「주송(周頌)」31편과 「상송(商頌)」5편, 「노송(魯頌)」4편의 40편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어 노래한 가공 송덕(歌功頌德)과 하늘과 조상에 제사 드리며 부른 제천 사조
(祭天祀祖)와 잡된 노래인 잡시(雜詩)의 세 가지 유형이다.
이제까지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각 작품의 내용을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인 면으로 풀이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현전 『시경』의 맨 앞 「주남」에 나오는 “관저장(關雎章)”의 첫 수만을 예로 들어 보이면,
關關雎鳩 짝 지어 즐기는 저 징경이
在河之洲 강물 속 모래톱서 놀고 있네.
窈宨淑女 착하고도 아리따운 저 아가씨는
君子好逑 . 교양인의 좋은 배필이네.
에서 제1구는 태어나면서부터 암수가 짝이 지어져 절대로 나뉘지 아니한다는 징경이라는 새를 등장시키어 제2구에서
그 암수 새들이 다정하게 물속의 모래톱에서 노니는 모양을 그리어 배경적 무대로 하고, 제3구에서는 가정교육을 잘
받은 미모의 숙녀를 등장시키고는 제4구에서 교양 있는 남자 지성인의 좋은 배필이라고 단정한다.
여기 등장하는 숙녀는 문왕(文王)의 비인 태사(太姒)로 보고, 군자는 주(周)나라 시조인 문왕에 비유하여 가장 이상
적인 남녀상(男女像)인 동시에 부부상(夫婦像)으로 비유하여 평가하여 왔다.
金赫濟,『原本集註詩傳』, 明文堂, 1978.
그러나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남녀의 애정 갈구를 노래한 민가(民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부이(罘苢)”의 첫째 장만을 보이면,
采采罘苢 뜯자! 뜯자! 질경이를
薄言采之 말없이 질경일 뜯자!
采采罘苢 뜯자! 뜯자! 질경이를
薄言有之 말없이 뜯어 두자!
라고 한 것에서는 우리의 전라도 화순(和順) 지방 고사리 민요의 일절을 연상하게 한다.
수양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아버님 반찬하자!
끊자! 끊자! 고사리 끊자!/ 삼각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어머님 반찬하자!/ 끊자! 끊자! 고사리 끊자!
백두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언니 반찬하자!
끊자! 끊자! 고사리 끊자!/ 태백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형님 반찬하자!/ 끊자! 끊자! 고사리 끊자!
任東權,『韓國民謠集』,(東國文化社, 4294) 쪽 361.
이러한 민요에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의 진솔한 모습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또 「정풍(鄭風)」의 “교동(狡童)”을 보면,
彼狡童兮 교활한 저 아이 녀석
不與我言兮 나와는 말도 않네.
維子之故 아무래도 저 때문에
使我不能餐兮 나를 굶게 하였다네.(제1장)
이 노래는 자기를 버리고 가버린 남자를 원망하는 여인의 원가(怨歌)이다.
또 「소아(小雅)」의 “육아(蓼莪)”장은 효자(孝子)가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 것을 탄식한 작품으로 매우 유명하다.
그 첫 장은 아래와 같다.
蓼蓼者莪 욱어진 건 쑥이려니
匪莪伊蒿 쑥이 아닌 다복쑥이네.
哀哀父母 슬프구나! 우리 부모
生我劬勞 날 낳으시며 고생하셨네.
이 작품의 제1·2구는 쑥이라는 식물 이름의 나열인데 비하여 제3·4구에서는 갑자기 부모님의 은혜에 관한 감정이
표출된다. 이것은 『시경』에 나타난 표현 기법의 대체적 특징이다. 같은 글자의 되풀이로 그 글자가 지닌 뜻을 강조
하는 것도 또한 이 『시경』의 수사(修辭)의 한 특징이다.
4. 1. 2. 초사(楚辭)
『초사(楚辭)』는 단제 기원 1993-2055(서력 전 340-278)년 사이에 살았다고 추정되는 굴원(屈原)이라는 시인이
나타나서 지었다는 개인의 창작가이다.
기존의 『시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창작 기법을 발휘한 뛰어난 작품이다.
『시경』이 황하를 중심한 북방문학이라고 한다면, 『초사』는 양자강 중부를 중심으로 한 남방문학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이본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는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에 따라 그
요목을 소개하면, 굴원의 「이소경(離騷經)」, 「구가(九歌)」, 「천문(天問)」, 「구장(九章)」, 「원유(遠遊)」,
「복거(卜居)」, 「어부(漁父)」등 7편과 송옥(宋玉:2043-2110, 서력 전 290-223)의 「구변(九辯)」, 「초혼(招魂)」
등 2편과 경차(景差:서력 전, 290-223)의 「대초(大招)」와 가의(賈誼:2132-2164, 서력 전 201-169)의 「석서(惜誓)」,
「초은사(招隱士)」등 2편과 동방삭(東方朔:2172-2246, 서력 전 161-87)의 「칠간(七諫)」, 엄기(嚴忌)의 「애시명
(哀時命)」, 왕포(王褒:?-2272, 서력 전 ?-61)의 「구회(九懷)」, 유향(劉向:2256-2327, 서력 전 77-6)의 「구탄(九嘆)」,
왕일(王逸)의 「구사(九思)」등 17편이 전한다.
여기서는 굴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소경」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으로 알려진 몇 구를 소개한다.
跪敷衽以陳辭兮 옷자락 펴놓고 무릎 꿇어 고하리다.
耿吾旣得此中正 환하게 나는 벌써 중정을 얻었네.
駟玉虯以乘鷺兮 네 필의 말이 백로 수레 높이 타고,
溘埃風余上征 갑자기 바람처럼 먼지 몰아 달려가네.
朝發軔於蒼梧兮 아침에 창오에서 수레 몰아 길 떠나니,
夕余至乎縣圃 나는 저녁이면 현포에 이르겠지.
欲少留此靈瑣兮 영한 예서 잠시 머물러 있곺으나,
日忽忽其將暮 해는 벌써 어둑어둑 저물어 가니,
吾令羲和弭節兮 나야말로 제발 햇님아! 멎기 비네.
望崦자而勿迫 지는 해 바라보며 달려가지 말지어다.
路漫漫其脩遠兮 가는 길 멀고멀어 까마아득하구나.
吾將上下而求索 나는 이제 오르내릴 밧줄이나 찾으리라.(하략)
이 「이소경」은 중국인 호운익(胡雲翼)의 평에 의하면, 굴원(屈原)이 독창적인 자서전(自敍傳)의 수법으로 쓴 것
이라고 한다.
胡雲翼,장기근역,『중국문학사』,문교부, 4294.
「구가(九歌)」는 민간에서 귀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 불려지던 악곡을 바탕으로 지은 것으로, “구가”는 옛 악곡의
이름일 뿐이라 이 작품은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문(天問)」편은 370구의 장편인데, 그 내용은 19개항에 걸친 172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여 천지 창조(天地創造)에
관한 신화(神話)를 중심으로 지리(地理)·인사(人事)를 골고루 읊고 있다.
「구장(九章)」은 굴원이 유배되며 경험한 사실을 9편의 작품으로 지은 노래이다.
「원유(遠遊)」는 선가(仙家)의 신선사상(神仙思想)과 수련의 방법까지 제시하며 세속을 초월하여 하늘나라에서
청고(淸高)한 삶을 희원한 작품이다.
「복거(卜居)」는 작자 굴원이 간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자기는 충직하게 살다가 오히려 유배되어 고생하기에
태복(太卜)에게 점친 내용으로 당시의 부패상을 간접 풍자한 작품이다.
「어부(漁父)」는 일명 「어부사(漁父辭)」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어부와의 대화를 통하여 굴원의 처세가 둔함을
풍자하고 있다.
「구변(九辯)」은 송옥(宋玉)의 작으로, “구변”은 고대 악장(樂章)의 이름이다.
송옥이 굴원의 「이소」를 모방하여 지은 자서전적 서정시이다.
「초혼(招魂)」은 송옥의 작으로, 굴원의 혼을 불러내어 위로하는 무속적 제의(巫俗的祭儀)를 지내는 내용의 작품
이다.
「대초(大招)」는 경차(景差)의 작으로, 굴원의 혼을 불러내는 무속적 제의(巫俗的祭儀)의 성격이 짙은 작품이다.
「석서(惜誓)」는 「초은사(招隱士)」는 유안(劉安)의 작으로, 「칠간(七諫)」, 「애시명(哀時命)」 「구회(九懷)」
「구탄(九嘆)」 「구사(九思)」
이 작품을 남긴 굴원(屈原)공은 그의 작품 「이소」에서 “내 이름은 정칙(正則)이요, 자는 영균(靈均)이라.”고 밝히
었으나,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사기(史記』「굴원전(屈原傳)」에서 굴원의 이름은 “평(平)”이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 학계에서는 사마천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굴원은 초(楚) 무왕(武王)의 아들 하(瑕)의 후손으로 22세에 초 회왕(懷王)에게 벼슬을 시작하여 25세에 사도(司徒)가
되어 간언(諫言)을 맡아 왕의 총애를 받아 29세에 삼려대인(三閭大人)이 되었으나,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의
참소로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되매 어리석은 왕과 사곡(邪曲)이 판을 치는 사회 풍조에 서글픔을 품고 이 작품을
지으며, 유배지를 전전하며 살다가 54세에 영서하였다고 한다.
4. 2. 산문(散文)
앞에서 언급한 『시경』과 『초사』는 율문문학인데 비하여 여기서는 선진시대의 산문들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인 진옥강(陳玉剛)은 그의 『간명중국문학사(簡明中國文學史)』에서 선진시대 산문을
① 역사산문(歷史散文), ② 제자산문(諸子散文)의 두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김학주(金學主)박사는 ① “기사(紀事)의 글”, ② “입언(立言)의 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후자의 주장을 따라 소개하기로 한다. 金學主,『中國古代文學史』, 明文堂, 2003.
4. 2. 1. 기사문(紀事文)
여기서 “기사문(紀事文)”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진실된 역사적 사실들
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빙자한 거짓된 이야기나 신이(神異)한 괴기(怪奇)들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
이다.
여기서는『서경(書經)』,『좌전(左傳)』,『국어(國語)』,『전국책(戰國策)』,『산해경(山海經)』등의 일부를 인용
소개한다.
4. 2. 1. 1. 서경(書經)
『서경(書經)』은 유학(儒學) 경전 중 삼경(三經)의 하나로 이제까지는 중국 산문문학의 할아버지로 일컬어져 왔다.
이 『서경』은 『시경』과 마찬가지로, 원 이름은 “서(書)”이던 것이 경전으로 대접받으면서 “서경”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시경』은 일명 “상서(尙書)”라고도 불리운다.
지금 우리에게 전하여 오는 『서경』은 모두 58편으로 짜이어 있는데, 이 중에 한(漢)나라 초기 복생(伏生)이라는
이에 의하여 『금문상서(今文尙書)』의 29편을 근거로 하여 33편을 늘리어 엮은 것에 거짓 글 25편이 더하여진 것
이다.
그리고 『상서』에는 금문 『상서』와 고문『상서』가 있는데, 금문『상서』는 한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예서체
(隸書體)로 기록된 『상서』를 가리키고, 고문『상서』는 선진시대에 고문으로 기록된 것으로 29편만을 참 『상서』
로 보고 있다.
이 『서경』은 말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고, 『춘추(春秋)』는 우사(右史)에 의하여 일을 기록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들도 많이 들어 있는데, 내용은 크게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尙書)」,「주서(周書)」
등 네 부로 구성되어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서경』을 우리나라 최고의 문학 이론과 비평서라고 할 만하다고 평가된다.
여기서는 『서경』의 첫머리「우서(虞書)」“요전(堯典)”의 일부를 소개하여 보기로 한다.
(요에 관하여) 말하건대, 옛날 제요를 살펴볼 것 같으면, 요는 “큰 공을 베푸신 분[放 勳]”이라 일컬어졌으니,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며, 이치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생각 이 편안하였다. 진실로 공경스럽고 총명하시어 빛이 온 사방에
퍼져서 하늘에서 땅에까지 뻗치었다.
큰 덕을 밝힐 수 있어서 구족(九族)을 친화하게 하고, 구족이 이미 화목하여지매 백성 을 공평히 다스려 빛나게 하고,
백성들은 밝게 다스려지매 만방을 평화롭게 하였으며, 백 성들이 이에 교회되어 평화를 누리었다.
이에 역상(曆象)을 주관하는 희화(羲和)에게 명하시어 넓은 하늘을 공경하여 순종하게 하고, 해와 달과 여러 별들의
변화를 살피어 기록하여 사람과 때의 이로움을 주도록 하 라!“하시었다.
“○曰若稽古帝堯曰放勳欽明文思安安允恭克讓光被四表格于上下.○克明俊德以親九族九族旣睦平章百姓 百姓昭明協和
萬邦黎民於變時壅.○乃命羲和欽若昊天曆象日月星辰敬授人時.(하략)”[『正本集註書傳』,唯 一書館, 4251.]
이는 요임금의 선정(善政)을 기린 것이다. 유학(儒學)의 전형적 이상인 통치자는 제일 먼저 자신의 몸을 바르게 닦고,
다음은 집안을 잘 다스리어 화목하게 하여야 하며, 그 뒤에 나라를 밝게 다스려야 한다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행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 『서경』의 「주서(周書)」에는 “홍범(洪範)”장이 있는데, 이는 무왕(武王) 13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찾아보고,
천도(天道)를 물으매, 기자께서 홍범의 도를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전략) 내가 들으니, 옛날 곤(鯀)이 홍수를 막을 때에 그 오행(五行)을 난잡하게 어지럽 혀 천제께서 곧 크게 노하시어
홍범구주를 주지 아니하시니, 이륜(彛倫)이 빨리 무너졌다. 곤이 죄를 입어 죽거늘 우(禹)가 뒤를 이어 일어났는데,
천제께서 우에게 홍범구주를 주시 니, 이륜이 빨리 퍼졌다.
처음 하나는 이르되, 오행이요,
다음 둘은 이르되, 공경하기를 오사로써 하는 것이요,
다음 셋은 이르되, 농사를 팔정으로써 짓는 것이요,
다음 넷은 이르되, 협력하기를 오기로써 함이요,
다음 다섯은 이르되, 왕권 세우기를 황극으로써 한다는 것이요,
다음 여섯은 이르되, 다스리기를 삼덕으로써 한다는 것이요,
다음 일곱은 이르되, 밝힘을 의심나면 점쳐서 함이요,
다음 여덟은 이르되, 천후(天候)를 생각으로써 함이요,
다음 아홉은 이르되, 오복으로써 누림을 하고, 위엄은 육극으로써 함이다.
(하략) (전략)我聞在昔鯀堙洪水汨陳其五行帝乃震怒不畀洪範九疇彛倫攸斁鯀則殛死禹乃嗣興天乃錫禹洪範九疇
彛倫攸敍初一曰五行次二曰敬用五事次三曰農用八政次四曰協用五紀次五曰建用皇極次六曰乂用三德次七
曰明用稽疑次八曰念用庶徵次九曰嚮用五福威用六極(하략).
이는 “구주(九疇)”라고도 일컫는데,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큰 법을 이르는 말이다.
본시 우왕(禹王)이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대대로 전수되어 기자(箕子)에 이르러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전하여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작품의 지은이를 기자로 보고 있다.
필자도 그렇게 보아 여기서 다룬다.
4. 2. 1. 2. 좌전(左傳)
「좌전」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줄인 말이다.
다른 말로는 『좌씨춘추(左氏春秋)』라고도 일컫는다. 단제 기원 1800년대에 공자(孔子)가 직접 지은 유일한 저작
이라고 알려진 오경(五經) 중의 하나인 『춘추(春秋)』를 노(魯)나라 사람 좌구명(左丘明)이 주석하여 저술한 것이
라고 하나, 근래에 와서는 후인의 위서(僞書)라는 설이 일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30권에 노은공(魯隱公) 원년(1611, 서기전 722)부터
노애공(魯哀公) 27(1865, 468)년까지 254년간의 춘추시대 여러 나라들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진실되게 기술한
것이다. 이 저술은 비록 역사서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 표현 문장이 우미(優美)하여 문학 작품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陳玉剛,『簡明中國文學史』,陝西人民出版社, 1985.
여기서는 『좌전』앞머리에 나오는 은공(隱公) 원년(1612, 서기전 721)의 한 대목을 인용 소개한다.
(전략) 처음에 정(鄭)나라 무공(武公)은 신(申)나라에 장가들어 “무강(武姜)”이라 불렀 다.
부인이 장공(莊公)과 공숙단(共叔段)을 낳았는데, 무강이 장공을 자다가 낳아 스스로 놀라 “오생(寤生)”이라 하며
그를 미워하고 공숙단을 사랑하여 공숙단을 태자로 세우고자 무공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장공이 즉위하자 공숙단을 위하여 제(制)땅을 달라고 하였다.
장공이 말하기를, “제는 바위로 된 고을이고, 또 괵숙(虢叔)께서 돌아가신 곳입니다. 다른 고을이라면 명대로 하겠
습니다.”하니, “경(京)”을 요구하여 그곳에 살게 하고, 공숙단을 “경성대숙(京城大叔)”이라고 불렀다.
제중(祭仲)이 장공에게 말하기를, “도성 (都城)이 백치(百雉)를 넘으면, 나라에 해가 됩니다. 선왕(先王)의 제도를 보면,
대도(大都) 도 나라의 3분의 1을 넘지 아니하고, 중도(中都)는 5분의 1, 소도(小都)는 9분의 1을 넘지 아니합니다.
지금 경(京)은 법도에 맞지 아니하는 잘못된 조치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앞으 로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장공이 답하기를, “어머니께서 바라시는데 어찌 해를
피하겠습니까?”하니, 제중이 다시 말하기를, “강씨야 어찌 만족하실 수가 있겠습 니까? 일찍이 조치를 취하여 덩굴이
자라나지 아니하게 하소서. 덩굴 풀이 자라난 뒤에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덩굴 풀도 오히려 제거하기 힘들거늘 하물며 임금님이 사랑하는 아우를 어찌하시겠습니까?”하매, 장공이 또 말하
기를,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스스로 죽게 되오. 그대는 잠시 기다려 보구려.”하였다.
(하략) “(전략) 初鄭武公娶于申曰武姜生莊公及共叔段莊公寤生驚姜氏故名曰寤生遂惡之愛共叔段欲立之亟請於 武公
公弗許及莊公卽位爲之請制公曰制巖邑也虢叔死焉佗邑唯命請京使居之謂之京城大叔祭仲曰都城過百 雉國之害也先
王之制大都不過參國之一中五之一小九之一今京不都非制也君將不堪公曰姜氏欲之焉辟害對 曰姜氏何厭之有不如早
爲之所無使滋蔓蔓難圖也蔓草猶不可除況君之寵弟乎公曰多行不義必自斃子姑待之 (하략)”.
(『左傳』, 成均館大學校漢文敎育科硏究室, 大提閣, 1975.)
여기서 우리는 마치 소설 같은 구성미를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면, 치밀성이 떨어져서 무강이 자다가 아이를 낳았다고 “오생(寤生)”이라고 이름한 것이나,
또 그렇다고 무강이 아들 장공을 미워하고 둘째 아들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도 객관적 이치로는 잘 이해가 되지를
아니한다. 또 암석뿐인 고을 “제(制)”를 원하는데도 오히려 번화한 곳인 “경(京)”을 주는 것이나, 제중의 간언에 “불의
를 많이 지으면, 스스로 죽는다.”고 하는 장공의 저의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작품을 문학적으로도 희극성(戱劇性)과 완전한 서사성과 풍부한 고사로 사람의 정서를 움직
이게 하며, 전쟁 이야기를 잘 묘사하였고, 인사 문제를 잘 그려낸 것과 비교 형상을 치밀하게 묘사한 것들을 들어
우수한 문학 작품으로 다루기도 한다.
4. 2. 1. 3. 국어(國語)
이 작품은 『좌전』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역사적 산문이다. 이 작품은 편년체로 편찬되지 아니하고,「주어(周語)」
(상중하),「노어(魯語)」(상하),「제어(齊語)」,「진어(晉語)」(1-9),「정어(鄭語)」,「초어(楚語)」(상하),「오어
(吳語)」,「월어(越語)」(상하)등 나라별로 인물 중심의 전체 240여 사건의 기록을 엮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진어(晉語)」(1-9)가 가장 분량이 많다.
이 작품은 『좌전』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곳이 너무 많아서 예전에는 이 작품도 좌구명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라고
하였으나, 근래에 와서 좌구명의 작이 아니라고 부정되는 추세에 있다.
예전에는 그래서 「국어」를 “외전(外傳)”이라 하고, 『좌전』을 “내전(內傳)”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좌전』과 비슷한 내용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음을 밝혀 『좌전』이 역사 중심인데 비하여
「국어」는 권선(勸善)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과 『좌전』처럼 편년체 서술이 아니라 사건과 인물 중심의 기술이고,
또 두 작품의 문법과 용어에서 차이가 많아 동일인의 작품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중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주어(周語)」상책의 앞부분에서 일부를 인용 소개한다.
(전략) (주나라) 여왕(厲王)이 포학하매 나라 사람들이 왕을 비방하였다.
소공(邵公)이 여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백성들이 왕명을 견디지 못합니다.”하니, 왕이 노하여 위(衛) 나라 무당을
데려다가 왕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게 하여 보고를 하면, 그를 죽이었다.
나라 사람들은 감히 말도 못하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눈인사만 하였다.
왕은 기뻐 하면서 소공에게 말하기를, “나는 비난을 막아내었으니, 이제는 감히 누가 말을 하겠소.”하 였다.
이에 소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말을 막은 것입니다. 백성들의 입을 막는 것은 강물 을 막는 것보다 더한 일입니다.
강물이 막혔다가 터지는 날이면, 다치는 사람들도 많을 것 입니다.
백성들도 그러합니다. 이 때문에 강물을 다스리는 사람은 물길을 터서 잘 통하게 하여 주고, 백성을 다스리는 이는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천자는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 공경(公卿)으로부터 여러 벼슬아치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시(詩)를 바치게
하고, 악사(樂師)인 소경들에게는 악곡(樂曲)을 바치게 하며, 사관(史 官)들에게는 기록을 바치게 하고, 스승들은
교훈하게 하며, 눈동자가 없는 소경들도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눈동자는 있으나 앞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교훈을
외게 하였으며, 악 공(樂工)들에게는 기술적인 일들을 아뢰게 하였고, 미천한 백성들에게는 관리들의 잘잘못 을 아뢰게
하였으며,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에게는 여러 가지 규범들을 아뢰게 하 였고, 친척들에게는 정치를 살피어 잘못
을 고치도록 하게 하였으며, 악태사(樂太師)와 태 사(太史)에게는 가르치고 깨우쳐 주게 하였고, 나이 먹은 스승 같은
이들에게는 행실을 닦아 주게 한 뒤에 왕이 그 결과를 가지고 정치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제대로 행하여져서 일이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입이 있는 것은 땅에 산천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재물과 쓸 문건들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들판과 늪에 넓은 기름진 땅이 있 는 것과 같아서 먹고 입을 것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입은 말을 펴는 것이므로 잘잘못이 예서 일어납니다. 잘하는 것은 실패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물과 쓰는 것 과 입고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합니다.
대체로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근심되면, 입으로 펴내 어 이루어지면 그대로 실천하니,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입을 막는다면, 얼마 나 막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나라에는 감히 말을 하는 사 람이 없었다. 삼년 만에 왕은 체(彘)땅으로 유배되었다. “
(전략)
厲王虐國人謗王邵公告曰民不堪命矣王怒得衛巫使監謗者以告則殺之國人莫敢言道路以目王喜告 邵公曰吾能弭謗矣乃
不敢言邵公曰是障之也防民之口甚於防川川壅而潰傷人必多民亦如之是故爲川者決之 使導爲民者宣之使言故天子聽政
使公卿至於列士獻詩瞽獻曲史獻書師箴瞍賦矇誦百工諫庶人傳語近臣盡規 親戚補察瞽史敎誨耆艾修之而後王斟酌焉是
以事行而不悖民之有口猶土之有山川也財用於是乎出猶其原隰 之有衍沃也衣食於是生乎口之宣言也善敗於是乎興行善
而備敗其所以阜財用衣食者也夫民慮之於心而宣之 於口成而行之胡可壅也若壅其口其與能幾何王不聽於是國莫敢出言
三年乃流王於彘(하략)”.[『國語』권1, 「주어(周語)」上, 上海書店, 1987.]
이 글에서는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언로(言路)의 중요성을 강조한 일종의 언론자유를 위한 논설이라고 하겠다.
결국 언론 통제의 독재자는 그 권력을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교훈을 사실적인 예를 들면서 후세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4. 2. 1. 4. 전국책(戰國策)
이 작품은 주(周)나라 정정왕(貞定王) 57(1879, 서기전 454)년부터 진시황 37(2123, 서기전 210)년까지 약 244년
동안의 정치 동태와 사회 면모와 책사 언행들의 역사서이다.
그 지은이는 알 수 없으나, 내용은 “서주(西周), 동주(東周), 진(秦), 초(楚), 제(齊), 조(趙), 위(魏), 연(燕), 한(韓),
송(宋), 위(衛), 중산(中山)등 12국별로 나뉘어 편찬되어 있다.
모두 33권의 분량에 진(秦), 초(楚), 제(齊), 조(趙), 위(魏), 연(燕), 한(韓)”등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원래 “국책(國策), 국사(國事), 단장(短長), 사어(事語), 장서(長書), 수서(修書)”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일컬어지던 것을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이를 정리하여 “전국책”으로 이름을 확정하였다.
이 작품의 내용은 전국시대의 정치가나 유사(遊士)나 책사(策士)들이 상대를 넘어뜨리고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한
책략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어 역사성이나, 윤리 도덕의 설교성(說敎性) 같은 것이 『좌전』이나 『국어』보다
훨씬 부족하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합종책(合縱策)과 연횡책(連橫策)이 바로 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 듯이 권모(權謀)와 술수
(術數)가 주조를 이룬다. 여기서는「진책(秦策)」2의 일부를 간략히 소개한다.
(전략) 만약 태후의 신령께서 죽은 사람에게는 지각이 없음을 분명히 아신다면, 무엇 때문에 공연히 살았을 때에
사랑하던 사람을 지각이 없는 죽은 사람 곁에 묻으려 하십 니까?
만약 죽은 사람에게도 지각이 있다면, 선왕께서 노여워하신 지 오래 되었을 것입 니다.
태후께서는 잘못을 변명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위추부(魏醜夫)와 사 사로이 통하시겠습니까?(하략). “
(전략)
若太后之神靈明知死者之無知矣何以空以生所愛葬於無知之死人哉若死者有知先王積怒之日久矣 太后救過不瞻何暇乃
私魏醜夫乎(하략)”
이 부분의 내용은 진(秦)나라 선태후(宣太后)가 평소에 위추부(魏醜夫)와 사통하였는데, 선태후가 병이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매 “위추부를 순장(殉葬)하도록 하여 달라!”고 당부하자, 비명횡사하게 된 위추부가 근심에 빠지자, 그의
친구가 그를 구원하여 주려고 나서서 선태후에게 “죽은 사람에게도 지각이 있겠습니까?”하고 물어 “지각이 없을 것”
이라는 태후의 말을 듣고, 진언(進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2천 수 백년 전에 이미 우리 조상들은 인권 존중 의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또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로는 첫째, 과장된 문장에 설득력이 뛰어난 표현이며, 둘째, 인물 형상화에 있어서 생동감을
구체적으로 표출하였다는 것이고, 셋째, 역사적 전고와 우언(寓言)으로 비유를 많이 한 것도 문학의 우수성으로 보인
다는 것이다.
4. 2. 1. 5. 산해경(山海經)
이 작품은 이제까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서(奇書)라느니, 신화집(神話集)이라느니, 지리서(地理書)라고 하였다.
기서라고 한 것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사람 등 기이한 동식물에
관한 기록이 많기 때문이며, 신화집이라는 것은 위작 여부에 관하여 논의가 분분하다.
우선 선진시대 책으로 보는 주장은 하(夏)나라 우(禹)가 백익(伯益)을 시켜 국토와 산물을 정리하느라 지은 것이라는
서한(西漢) 유흠(劉歆)이 대표적이고, 후세의 책이라는 설도 대부분 「오장산경(五臧山經)」이 전국시대 초에 이루어
지고, 「해내경(海內經)」·「해외경(海外經)」이 전한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육간여(陸侃如)등과 같은 유로 가장 늦게
잡아도 위·진(魏晉)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전자의 설에 따르며, 이 작품도 옛날 우리 조상님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여기에 포함하여 다룬다.
이 작품의 내용은 원가(袁珂)의 『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에 의하면, 「산해경서록(山海經序錄)」,“남산경(南山經)·
서산경(西山經)·북산경(北山經)·동산경(東山經)·중산경(中山經)”등의「산경(山經)」과 “해외남경(海外南經)·해외서경
(海外西經)·해외북경(海外北經)·해외동경(海外東經)·해내남경(海內南經)·해내서경(海內西經)·해내북경(海內北經)·
해내동경(海內東經)·대황동경(大荒東經)·대황남경(大荒南經)·대황서경(大荒西經)·대황북경(大荒北經)·해내경(海內經)”
등의 「해경(海經)」으로 구성되어 있다. (袁珂, 『山海經校注』, 里仁書局, 1982.)
각 편의 서술 형식은 “남산경”의 경우 “남산경의 첫머리는 작산(鵲山)이라는 곳이다.[南山經之首曰鵲山]”로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면서 작산의 첫머리 소요산(招搖山)에서 기미산(箕尾山)까지 10산 2,950리 사이의 지명과 특산물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남차이경(南次二經)·남차삼경(南次三經)”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여 남산경에서 크고
작은 40산과 16,380리의 지명과 주민과 동식물을 포함한 각종 산물(産物)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 구성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산경(山經)」의 대(對)「해경(海經)」으로 되어있는가 하면, 나머지
소제목들도 거의 대(對)를 이루고 있는데, 오직「해경(海經)」에는 「산경(山經)」에 없는 「해경(海經)」의 종결격
(終結格)인 “해내경(海內經)” 이 있다. 이 “해내경(海內經)”의 중요한 부분을 인용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 동해(東海)의 안쪽이며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조선(朝鮮)과 천독(天毒)이라는 나라가 있 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물에서 살며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사랑하였다.
[東海之內北海之隅有 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之].
2. 서해(西海)의 안쪽이며 유사(流沙)의 중간에 학시(壑市)라는 나라가 있다.
[西海之內流沙之 中有國名曰壑市].
3. 서해(西海)의 안쪽이며 유사(流沙)의 서쪽에 범엽(氾葉)이라는 나라가 있다.
[西海之內流沙 之西有國名曰氾葉].
4. 유사(流沙)의 서쪽에 조산(鳥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세 강물이 여기서 흘러나온다.
여기서는 황금과 선괴(璿瑰)와 단화(丹貨)와 은(銀)과 쇠[鐵]가 나는데, 모두가 이 강물 속에서 떠다닌다.
또 회산(淮山)이 있어 호수(好水)가 흘러나온다.
[流沙之西有鳥山者三水出焉爰有 黃金璿瑰丹貨銀鐵皆流于此中又有淮山好水出焉].
5. 유사(流沙)의 동쪽에 있는 흑수(黑水)의 서쪽에 조운국(朝雲國)과 사체국(司彘國)이 있다.
황제(黃帝)의 아내 뇌조(雷祖)가 창의(昌意)를 낳았는데, 창의는 약수(若水)에 내려와 살며, 한류(韓流)를 낳았다.
한류는 길쭉한 머리통에 형체뿐인 귀에 사람의 얼굴에 돼지 입과 비 늘로 된 몸통과 통뼈로 된 허벅지에 돼지발을
하고 있는데, 아녀(阿女)라는 작자(氵卓子) 를 아내로 맞이하여 전욱(顓頊) 임금을 낳았다.
[流沙之東黑水之西有朝雲之國司彘之國黃帝 妻雷祖生昌意昌意降處若水生韓流擢首謹耳人面豕喙鱗身渠股豚止取氵
卓子曰阿女生帝顓頊].
6. 유사(流沙)의 동쪽으로 흑수(黑水)의 사이에 불사산(不死山)이라는 산이 있다.[流沙之東黑 水之間有山名不死之山].
(중략)
30. 염제(炎帝)의 손자 백릉(伯陵)이 오권(吳權)의 아내인 아녀연부(阿女緣婦)를 사통하였는 데, 연부가 임신하여 3년
만에 고(鼓)와 연(延)과 수(殳)를 낳았다. 처음으로 과녁[侯]을 만들었고, 고와 연이 처음으로 종을 만들고 악곡(樂曲)
을 지었다.
[炎帝之孫伯陵同吳權之妻阿 女緣婦緣婦孕三年是生鼓延殳是爲侯鼓延是爲鐘爲樂曲].
31. 황제(黃帝)가 낙명(駱明)을 낳고, 낙명이 백마(白馬)를 낳았는데, 백마가 곧 곤(鯤)이다.
[黃帝生駱明駱明生白馬白馬是爲鯤].
32. 제준(帝俊)이 우호(禺號)를 낳고, 우호가 음량(淫梁)을 낳고, 음량이 번우(番禺)를 낳고, 번우가 처음으로 배를
만들었다. 번우가 해중(奚仲)을 낳고, 해중이 길광(吉光)을 낳았는 데, 길광이 처음으로 나무로 수레를 만들었다.
[帝俊生禺號禺號生淫梁淫梁生番禺是爲舟番禺 生奚仲奚仲生吉光吉光是以木爲車].
33. 소호(少皞)가 반(般)을 낳았고, 반은 처음으로 활과 살을 만들었다.
[少皞生般般是爲弓 矢].
34. 제준(帝俊)이 예(羿)에게 붉은 활과 흰 깃이 달린 화살을 주어서 그것으로 지상의 나라 를 도와주게 하니,
예가 처음으로 지상의 온갖 어려움을 없이하고, 구제하여 주었다.
[帝俊 賜羿彤弓素矰以扶下國羿是始去恤下地之百艱].
35. 제준(帝俊)이 안룡(晏龍)을 낳았고, 안룡은 거문고와 큰 거문고를 만들었다.
[帝俊生晏龍 晏龍是爲琴瑟].
36. 제준(帝俊)은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처음으로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帝俊有子八人是始(爲歌舞].
37. 제준(帝俊)이 삼신(三身)을 낳고, 삼신이 의균(義均)을 낳으니, 의균은 처음으로 교수(巧 倕)가 되어 이가 처음
으로 지상의 백성들에게 온갖 농기구들을 만들어 주었다.
후직(后稷) 이 온갖 곡식을 파종하였으며, 후직의 손자 숙균(叔均)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소로 밭을 갈아 농사를
지었다. 대비적음(大比赤陰)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우(禹)와 곤(鯤)이 처 음으로 땅을 갈라 구주(九州)로 고르게
정하였다.
[帝俊生三身三身生義均義均是始爲巧倕是 始作下民百巧后稷是播百穀稷之孫曰叔均始作牛耕大比赤陰是始爲國禹
鯤是始布土均定九州].
38. 염제(炎帝)의 아내요, 적수(赤水)의 자녀인 청요(聽訞)가 염거(炎居)를 낳았고, 염거는 절 병(節竝)을 낳고, 절병은
희기(戱器)를 낳았으며, 희기는 축융(祝融)을 낳았고, 축융은 강수 (江水)에 내리어 살며 공공(共工)을 낳았고, 공공이
술기(術器)를 낳았다.
술기는 머리가 모나고 꼭대기가 평평한데, 이 사람은 잃었던 땅을 되찾아 강수(江水)에서 살았다. 공공은 후토(后土)를
낳았고, 후토는 일명(噎鳴)을 낳았으며, 일명은 일 년 12월을 낳았다.
[炎帝之 妻赤水之子聽訞生炎居炎居生節竝節竝生戱器戱器生祝融祝融降處于江水生共工共工生術器術 器首方顚是復
土穰以處江水共工生后土后土生噎鳴噎鳴生歲十有二].(하략)
또 「대황동경(大荒東經)」에도 첫머리에서,
1. 동해(東海)밖에 큰 구렁이 소호국(少昊國)이다. 소호는 임금 전욱(顓頊)을 이곳에서 키 우고, 그 때에 거문고와 큰
거문고를 버려두었다.
감산(甘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 서 감수가 흘러 감연(甘淵)을 이룬다.
[東海之外大壑少昊之國少昊孺帝顓頊于此棄其琴瑟 有甘山者甘水出焉生甘淵].(중략)
22. 동해(東海)의 모래섬 안에 신(神)이 있는데,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이고, 누런 뱀 두 마리를 귀에 걸고, 누런 뱀 두
마리를 밟고 서 있으니, 우호(禺豸+虎)라고 한다.
황제 (黃帝)가 우호를 낳고, 우호가 우경(禺京)을 낳았으며, 우경이 북해(北海)에 살고, 우경은 동해에 사니, 이들은
바다의 신들이다.
[東海之渚中有神人面獸身珥兩黃蛇踐兩黃蛇名曰禺 豸+虎黃帝生禺豸+虎禺豸+虎生禺京禺京處北海禺豸+虎處東海是
爲海神].(하략)
이 『山海經』에 관하여 김종윤(金鍾潤)은 “일반 學者들에게 經書로 읽혀지는 『山海經』은 실로 東夷族의 秘話가
담겨 있는 우리 民族의 중요한 史書이며 文獻이다.
이 책의 主題가 <朝鮮>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金鍾潤,『古代朝鮮史와 近朝疆域硏究』, (동신, 1997) 쪽 80.)
필자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지금의 중국 땅에 살았던 선진(先秦) 시대 어른들은 모두가 우리의 직계 조상님들
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山海經』이야말로 당시의 문학 작품 중에서는 걸작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 이유는 현대인으로도 생각하기 어려운 상상의 질과 폭이 매우 고상하다는 점과 당시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여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기행문학적 성격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철학과 역사성도 매우 깊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4. 2. 2. 입언문(立言文)
여기서 입언문(立言文)이라고 하는 것은 교훈이 될 만한 말을 기록으로 남긴 것을 이른다.
일반적으로 사상적 기록인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들이라는 글들이 모두 이에 든다고 하겠다. 도
가(道家)는 춘추시대 초(楚)나라 이이(李耳)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묵가(墨家)는 춘추시대 송(宋)나라 묵적(墨翟)에게서
비롯되었고, 법가(法家)는 역시 춘추시대 정(鄭)나라 공손교(公孫僑)에 의하여 비롯되었으며, 병가(兵家)는 제(齊)나라
손무(孫武)에게서 비롯되었고, 유가(儒家)는 노(魯)나라의 공구(孔丘)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들 제자백가는 모두 정치적 혼란기이던 춘추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논리를 중시하면서 제 각기 서로 다른 주장과 사상을 펴서 문장이 유려하고, 수사(修辭)가 뛰어났다.
대부분의 이들은 통치 계급의 편에서 통치자의 사상가 또는 정신적 후원자로 정치, 군사, 경제, 법률,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혼란 속의 분열된 사회를 통일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단과 방법의 일환으로 저술된 것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4. 2. 2. 1. 도덕경(道德經)
이『도덕경(道德經)』은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 이이(李耳)가 지은 도가류(道家類)의 경전으로 일반적으로는
『노자(老子)』라고 일컫는다.
이 작품의 지은이에 관하여는 그 설이 분분하나,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사기』열전에서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라고 하였다.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를 지냈는데, 그 때에 공자가 찾아와서 예(禮)를 배웠다고 한다.
이 작품은 5,000언으로 노자의 사상이 잘 들어나 있다.
내용은 상편에 “체도(體道)”를 비롯한 “위정(爲政)”까지 37장(章)과 하편에 “논덕(論德)”부터 “현질(顯質)”까지 44장
으로 되어 있어서 모두 81장이나 된다.
노자는 이 작품의 첫줄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고, 이름 붙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재의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초이고, 유(有)는 만물의 근원이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萬物之母(하략)”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제2장의 “양신(養身)” 전문을 소개한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미(美)를 아름답다고 알기 때문에 추악(醜惡)한 일은 하지 아니한다.
또 모든 사람들은 선(善)을 착하다고 알기 때문에 불선(不善)을 하지 아니한다.
그러므 로 유와 무는 상대적으로 나타나고, 어려움과 쉬움도 상대적으로 이루어지고, 길고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형성되고, 높고 낮음도 상대적으로 대비되고, 말과 소리도 상대적으로 어 울리고, 앞과 뒤도 상대적으로 따르는 것
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무위(無爲)의 태도로 써 세상사를 처리하고 말 없는 교화를 실행한다.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자라게 버려두고 인위적인 간섭을 더하지 아니하며, 만물이 자라도 자기의 소유로 삼지 아니
하고, 만물이 잘 자라도 자기의 자랑으로 삼지 아니하고, 모든 공업(功業)을 이루고도 높은 자리에 처하 지 아니한다.
오직 공이 있으되, 높은 자리에 처하지 아니하므로 그의 공적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게 된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故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形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生而不有爲而不恃功成而弗居夫惟弗居是以不去(하략).”
여기서 우리는 노자의 “무위이자연(無爲而自然)”의 철학을 엿볼 수가 있다.
4. 2. 2. 2. 관자(管子)
이 작품은 공자보다도 약 150년을 먼저 태어나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있었던 제(齊)의 환공(桓公)을 도와 춘추시대
패왕(覇王)이 되게 한 명재상 관중(管仲)이 지은 것으로 전하여 오나, 그의 추종자들인 후세인들의 첨기(添記)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은 「경언(經言)」, 「외편(外篇)」, 「내언(內言)」, 「단어(短語)」, 「구언(區言)」, 「잡(雜)」, 「관자해(管子解)」, 「경중(輕重)」등 8부에 7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564편이나 되는 분량을 줄이어 지금에 우리들이 읽을 수 있는 76편으로 엮은 것이다.
관중(管仲)은 정치가이면서 경제가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이며 시호(諡號)는 경(敬)이다. 여기서는 「목민(牧民)」편의 “국송(國頌)”에서
일부를 인용하여 소개한다.
무릇 국토가 있어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일 년 내내 힘써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 게 하여야 한다.
나라가 재물이 많으면, 먼 데 있는 사람들도 모여들며, 벽지에 있는 백 성도 거용하여 머물러 살게 하고, 곳간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게 되며, 입을 것과 먹거리 가 넉넉하면, 영광과 오욕을 알게 되고, 위에 있는 사람이 법도를 지키면,
육친(六親)이 편안 할 것이며, 예(禮)와 의(義)와 염(廉)과 치(恥)의 네 가지 도덕을 실천하면, 임금의 명령이 잘 지켜질
것이다. 그러므로 형벌이 없는 나라가 될 수 있는 요체는 사치와 허식 을 금하는 데에 있다.
나라를 지키는 법도는 예, 의, 염, 치의 네 가지 도덕을 잘 실천하 는 데에 있다.
백성들을 길들이는 바른 길은 인귀(人鬼)와 천신(天神)을 밝히어 산천에 경건히 제사를 올리며, 종묘(宗廟)를 받들어
모시고, 조상과 옛 어른을 공경하여야 한다.
하늘이 주는 사시(四時)를 따라 열심히 노력하지 아니하면, 생산도 없으며, 땅의 이로움 을 활용하지 아니하면,
곳간이 텅 비게 될 것이다. 들판이 황무지로 버려지게 되면, 백성 들은 살 길이 없게 된다.
임금이 방종하면, 백성들도 망령될 것이고, 임금이 허영과 사치 를 금하지 아니하면, 백성들도 음란하여질 것이며,
군주의 방종과 백성들의 허화를 막지 못하면, 범죄가 많아질 것이고, 인귀와 천신을 밝게 하지 못하면, 추한 백성들이
깨닫지 못할 것이며, 산천에 제를 제대로 올리지 못하면, 임금의 위엄이 널리 지켜지지 아니할 것이고, 종묘를 공경
하지 아니하면, 백성들도 군주의 행동을 닮을 것이며, 조상과 옛 어 른을 공경하지 아니하면, 효제(孝悌)가 갖추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예, 의, 염, 치의 네 가 지 도덕이 지켜지지 아니하면, 나라는 곧 망하여 없어질 것이다.(하략)
“凡有地牧民者務在四時守在倉廩國多財則遠者來地辟擧則民留處倉廩實則知禮節衣食足則知榮辱上服度 則六親固四
維張則君令行故省刑之要在禁文巧守國之度在飾四維順民之經在明鬼神祇山川敬宗廟恭祖舊不 務天時則財不生不務
地利則倉廩不盈野蕪曠則民乃管上無量則民乃妄文巧不禁則民乃淫不璋兩原則刑乃繁 不明鬼神則陋民不悟不祇山川
則威令不聞不敬宗廟則民乃上校不恭祖舊則孝悌不備四維不張國乃滅亡(하 략)”
이 글에서 우리는 관중의 논리 전개와 문장 수사가 정연하면서도 순박함을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통치자의
몸가짐에 관한 언급이 임금과 백성의 관계를 어버이와 자식의 눈으로 보고 윤리와 경제의 활동에 솔선수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4. 2. 2. 3. 논어(論語)
『논어(論語)』는 유가(儒家)의 경전 중에서 사서(四書)의 하나로, 공자(孔子)의 말과 그 제자들과 동시대의 사람들과
주고받은 대화(對話)와 행동에 관한 기록을 모은 것이다.
내용은 “학이(學而)”편을 비롯하여 “요왈(堯曰)”편까지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명은 그 편의 첫 어절(語節)
두 글자를 떼어서 이름한 것이다.
유가들은 이 『논어』「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시경의 300여편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특한 생각이 없다.’하시었다.[子曰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라 하신 이야기를 근거로 공자의 문학관으로 보아
시평론(詩評論)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술이(述而)」편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옛 것을 풀이하고, 없던
일을 지어내지는 아니 하였으며, 옛것을 믿어서 좋아한 것은 조심스럽지만 나를 노팽(老彭)에 견줄 만하다.’하시었다.
[子曰述而不作信而好古竊比於我老彭]”는 글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근거로 하여 허구적 내용의 소설(小說)을
배척하는 소설 비평의 기준을 삼기도 하였다.
또 「양화(陽貨)」편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아! 어찌하여 저 시경을 배우지 아니하느냐? 시는 느낌을
일게 하고, 읽을 만하며, 무리와 어울릴 수 있게 하고, 원망할 수도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님을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님을 섬길 수도 있으며, 날짐승과 길짐승이며 풀과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알 수가 있다.’하시었다.
[子曰小子何莫學夫詩詩可以興可以觀可以群可以怨邇之事父遠之事君多識於鳥獸草木之名]”라는 글을 통하여 공자의
문학적 효용성(文學的效用性)에 관한 비평 기준을 삼았다.
「팔일(八佾)」편에는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이(夷)와 적(狄)의 나라에 임금이 있어도 여러 하(夏)땅에 임금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子曰夷狄之有君不如諸夏之亡也]”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음미하여 보면, “이적(夷狄)”을 “오랑캐”라고 하여 야만시한 것은 한족(漢族)이 중원 대륙을 통합한 뒤부터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으쓱대면서 뽐낸 데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기록에서는 이적(夷狄)을
야만시하여서는 아니되며, 공자님의 말씀은 곧 중원의 여러 땅에는 아직 임금이 없었던 오히려 군소 집단 부락 단위의
사회였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가 있다.
또 「자한(子罕)」편에는 “공자께서 구이(九夷) 땅에 가서 살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더러운 나라에서 어찌
살려하십니까?’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君子)가 사는 곳이라면, 어떤 더러움이 있겠는가?’하셨다.
[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고 한다.
여기서의 구이(九夷)는 동방에 있는 9군자국을 가리키니, 현토(玄菟)·고구려·낙랑·만식(滿飾)·부유(鳧臾)·색가(索家)·
동도(東屠)·왜인(倭人)·천비(天鄙)를 가리킨다.
이는 공자께서 군자의 나라의 풍습이 사람답게 사는 고장임을 강조하고 선망하여 마지아니하였음을 밝힌 것이라고
하겠다.
4. 2. 2. 4. 묵자(墨子)
『묵자(墨子)』는 춘추 전국시대 송(宋)나라의 수레 만드는 천한 사람이라고 하는 묵적(墨翟:1853-1913, 서력전
480-420)의 저술로 알려져 온다.
이 작품은 전 15권 53편이 전하는데, 당시의 지주 계급의 유가(儒家)들을 비난하면서 묵자는 당시 사회의 혼란과
인간의 불행이 모두 서로 미워하며 싸우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겸애(兼愛)와 반전(反戰)을 주창
하였다. 여기서는 이 작품의 맨 앞부분인 「친사(親士)」편의 일부를 소개한다.
새로 왕위에 올라 선비를 찾지 아니한다면, 나라를 잃을 것이다.
어진 사람을 보고도 급히 등용하지 아니하면 현인은 그 임금을 용군(庸君)으로 생각할 것이다.
현인을 찾지도 아니하고, 또 찾고도 급한 것이 없으면, 선비가 아니면, 더불어 나라의 일을 근심할 수 없으니, 현인
구하기를 빨리 하지 아니하고 선비를 홀시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한 예가 일찍이 없었다.
옛날에 진 문군(晉文君)은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가 천하를 바로잡 았으며, 제 환공(齊桓公)은 나라에서 쫓겨 달아
났다가 제후(諸侯)의 패자(覇者)가 되었고,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오왕(吳王)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였다가
오히려 조용한 가 운데 나라의 어진 임금이 되었다.
이 세 사람들은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게 성공하였 거니와 이들은 모두 자기 나라에서 억눌리거나 큰 수모를 겪
었다. 최고의 성군은 실패가 없고, 그 다음 현군은 실패는 있으나 대사를 이루었으니, 이는 백성을 잘 다루었기 때문
이라고 할 것이다.(하략)
“入國而不存其士則亡國矣見賢而不急則緩其君矣非賢無急非士無與慮國緩賢忘士而能以其國存者未曾有也 昔者文公
出走而正天下桓公去國而覇諸侯越王句踐遇吳王之醜而尙攝中國之賢君三子之能達名成功於天下也 皆於其國抑而大
醜也太上無敗其次敗而有以成此之謂用民(하략).”
이 글은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군주가 인사 등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세가 달라지는 그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작품의 문학성은 다른 제자백가서들보다 지나치게 질박하고 강론적인 점에서 조금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
되고 있으나, 소설적 정취가 높은 면에서는 오히려 문학적 가치가 자못 높다고도 인정받고 있다.
4. 2. 2. 5. 맹자(孟子)
『맹자(孟子)』는 춘추 전국시대에 지금의 산동성 추음현(山東省鄒陰縣)에 있었던 추(鄒)나라 사람으로 유가(儒家)
의 아성(亞聖)으로 존경받는 맹가(孟軻:1961-2044, 서력전 372-289)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은 맹자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가 맹자가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작품은 「양혜왕(梁惠王)」,「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등 7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상하(上下)로 나누어져 있다.
편명은 모두 『논어(論語)』처럼 각 편의 첫 어절 2-3자로 지은 것이다.
맹자는 혼란한 시대에 천하를 두루 돌며 자기를 등용할 제후를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
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치었다.
이 작품에는 그의 정치사상과 인생철학 및 교육관이 잘 들어나 있다.
대화체 문장 속의 언어는 생동감이 넘치고, 문채(文彩)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서는 이 작품의 중간 부분인「이루」장의 하편 첫 부분을 인용 소개하겠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순(舜) 임금은 저풍(諸馮)에서 나서 부하(負夏)로 옮겼다가 명조(鳴條)에서 돌아가셨으니,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문왕(文王)은 기주(岐周)에서 나서 필 영(畢郢)에서 돌아가셨으니, 서이(西夷) 사람이라 하겠다.
이 순임금과 문왕의 두 성인이 태어난 곳은 떨어진 거리가 천 여리가 넘고, 시대는 천 여년의 차이가 있지만, 뜻을
얻어 서 천하에 도를 행한 것에 있어서는 마치 부절(符節)처럼 꼭 들어맞으니 선성이나 후성 이 행한 도는 한가지
이었다.
“孟子曰舜生於諸馮遷於負夏卒於鳴條東夷之人也文王生於岐周卒於畢郢西夷之人也地之相去也千有餘里世 之相後也
千有餘歲得志行乎中國若合符節先聖後聖其揆一也.”
여기서는 맹자가 인정(仁政)의 도를 실행한 성군(聖君)인 순(舜)과 문왕(文王) 두 사람을 대비하여 그 출신이 순임금은
동이인(東夷人)이고, 문왕은 서이인(西夷人)이며, 두 사람이 살았던 시차가 일천 년이 넘지만, 인의(仁義)의 도(道)를
행한 정치는 동일하였다고 갈파하면서 자신의 정치관도 같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맹자가 순과 문왕을 동서의 갈림은 있으나, 같은 이족인(夷族人)임을 강조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족(夷族)은 큰 활을 사용하며 사는 문화 수준이 높은 군자족(君子族) 곧 천손족(天孫族)인 환족(桓·韓族)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은 이 이(夷)를 천대하여 이른 말로 풀이하여 왔으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보편화되기 훨씬 이전 사람으로 성현(聖賢)을 숭앙하였던 맹자가 성군으로
높이 존경 받는 순과 문왕을 오랑캐로 깎아내려 욕을 보이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글은 필자가 이 문학사에서 이제까지 중국문학으로 다루어져 왔던 선진시대(先秦時代) 비한인(非漢人)의
문학 작품을 모두 우리나라 문학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4. 2. 2. 5. 장자(莊子)
이 『장자(莊子)』는 춘추 전국시대 철학자로 이담(李聃) 이후 도가(道家)의 아조(亞祖)로 추앙되는 송(宋)나라 몽(蒙)
사람인 장주(莊周:1964-2047, 서력전 369-286)의 저술이다.
일명 “남화경(南華經)”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도 장주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내용은 「내편(內篇)」7편,「외편(外篇)」15편, 「잡편(雜篇)」11편 등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내편(內篇)」은 장주의 작품이고, 나머지는 그의 제자들의 작이라고 평하고 있다.
장주는 일찍이 고향 몽(蒙)지방에서 칠원리(漆園吏)이었다가 이웃 제(齊)나라와 위(魏)나라를 두루 돌아보고, 초(楚)
나라 위왕(威王)의 예빙(禮聘)을 거절하고, 집신을 만들며 가난하게 살며 이 작품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 편명(篇名)이 「내편」은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인간세(人間世)”,
“덕충부(德充符)”, “대종사(大宗師)”, “응제왕(應帝王)”과 같이 3자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외편」과 「잡편」은 “병무
(騈拇)”, “경상초(庚桑楚)”와 같이 2자로 된 편명이 21편이고, 3자로 된 편명이 5편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평자들은 오직 「내편(內篇)」만이 장주의 저술이고, 나머지는 제자들의 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편(內篇)」은 문장도 수려하고, 내용도 순수하고 일관된 장주의 철학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고,
또 이 작품의 내용은 다른 여러 학자들의 저술들이 통치자 중심으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글들인데 비하여 일반
서민들의 삶의 질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을 평자들은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장자를 첫째, 극단적 비관주의자이다. 둘째, 대사회 현실에 극단적 불만자이다. 셋째, 도피 구전
성명(逃避苟全性命)의 선동자이다. 넷째, 마음속의 고민을 주관적 환상으로 해소하려 한 사람이다.
등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朱其鎧,『中國文學史二百四十題』,山東文藝出版社,1985.
여기서는「제물론(齊物論)」에서 장자의 도관(道觀)을 엿볼 수 있는 짧은 글을 일부 소개한다.
(전략) 도(道)는 어디에 숨어 있기에 참[眞]과 거짓[僞]이 있고, 말[言]은 어디에 숨어 있기에 옳고[是] 그름[非]이
있는가? 도는 모든 곳에 있고, 말은 모두가 옳지 아니한가? 도는 편견에 가려지고, 말은 꾸밈에 가려져 있다.
그러므로 유묵(儒墨)의 옳고 그름이 있 어서 옳은 것으로써 그르다 하여 그른 것이 옳아지게 되니, 그 그른 것이 옳아
지게 하고 자 하면, 그른 것이 옳아져야 하니, 본연을 밝힘만 같지 못할 것이다.(하략) “(전략)
道惡乎隱而有眞僞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性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 儒墨之是非以是其
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하략).”
이 글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단은 도와 말은 본래 하나뿐이건만, 사람들에 의하여 진위와 시비로 나뉘어
혼란을 초래한 현실을 제기한 것이고, 제2단은 사람들의 편견과 꾸밈에 의하여 본래의 도와 말이 가려지게 된 원인을
언급한 것이고, 제3단은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사이에 서로가 자기네 도가 옳고 상대방의 도가 그르다고 분쟁이
일게 된 결과를 밝힌 것이며, 제4단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으로는 본래의 도를 밝힐 수 없으니, 사람에 의하여
숨겨진 본래의 도와 말을 구명함만 같지 못하다는 해법을 밝힌 부분이다.
4. 2. 2. 6. 순자(荀子)
『순자(荀子)』는 춘추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이며 교육가인 순자(荀子)의 저술이다.
순자의 이름은 황(况:2020-2095, 서력전 313-238)인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순경(荀卿)이라고 불렀다.
조(趙)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이웃나라 제(齊)국의 좨주(祭酒) 벼슬을 지내고, 초(楚)나라에 가서 난릉령(蘭陵令)을
지낸 뒤에는 이 저술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으니, 한비(韓非)와 이사(李斯)는 그의 제자들이다.
한(漢)나라 때에는 선제(宣帝)의 이름을 피하여 손경(孫卿)이라고 불려졌다.
이 작품은 모두 3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의가 순자 자신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이 작품의 맨 앞에 있는 「권학(勸學)」편에서 일부를 소개하겠다.
군자는 말한다. 배움은 중지하면 안된다. 남색은 쪽 풀에서 짜내지만, 쪽빛보다 더 푸 르다.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차기는 물보다 더하다. 나무는 곧지만 먹줄을 받 으면, 구부려져 둥근 수레바퀴가 되는데, 그 굽음은 규범
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비록 햇 볕에 바싹 말려도 다시 펴지지 아니하고 둥근 대로 있는 것은 그렇게 되게 하였기 때문 이다.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아야만 날카로워진다.
군자도 널리 배우되 매일 세 가지로 살펴보면, 슬기는 더욱 밝아져서 행실에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을 올라보지 아니하면, 하늘이 높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깊은 산골짜기 를 가까이 가 보지 아니
하면, 땅이 얼마나 두꺼운지를 알지 못한다.
선왕께서 “묻고 배우 는 것이 크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고 하신 유언을 듣지 못하였는가? 한(干)과 월(越) 과
이(夷)와 맥(貊)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에는 그 울음소리가 모두 같지만, 자라나면서 풍속이 달라지는 것은 교육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하략)
“君子曰學不可以已靑取之於藍而靑於藍氷水爲之而寒於水木直中繩輮以爲輪其曲中規雖有槁暴不復挺輮 使之然也故
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已則智明而行無過矣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 深谿不知地之厚也不
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干越夷貊之子生而同聲長而異俗敎使之然也(하략).”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천고(千古)의 진리라고 하겠다.
이 글을 통하여 순자가 교육을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착하냐 악하냐를 떠나서 그 어느 쪽의 사람에게도 교육은 꼭 필요한 것임을 잘 알려 주고 있다.
4. 2. 2. 7. 한비자(韓非子)
『한비자(韓非子)』는 춘추 전국시대 말기의 법가(法家)로 유명한 한비(韓非:2053-2100, 서력전 280-233)가 지은
55편의 글이다.
한비는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일찍이 이사(李斯)와 같이 순자(荀子)에게 찾아가 공부하고, 한왕(韓王)에게
법치를 건의하였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뒤에 진시황(秦始皇)의 초빙을 받아 진에 갔다가 이사의 모함에 빠져 옥사
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주도(主道)」편에서 일부를 인용 소개 하겠다.
도(道)라는 것은 만물의 시초이며 시비(是非)의 실 머리가 된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은 시초를 지켜서 만물의 근원을
알고, 실 머리를 다스려서 잘하고 잘못한 것의 단초(端初) 를 안다.
그러므로 텅 비고 고요한 마음으로 명령을 기다리면, 이름에 관한 명령은 스 스로 내려지게 되고, 일에 관한 명령은
스스로 정(定)하여지게 된다. 마음을 비우면 실 지의 정을 알게 되고, 고요하면 행동의 올바른 것을 알게 된다.
말이 있는 자는 스스로 명칭을 지으며, 일이 있는 자는 스스로 형식을 만들게 된다. 명칭과 형식이 함께 어울리 면,
임금은 곧 하는 일이 없이도 실정(實情)으로 돌아가게 된다.(하략).
“道者萬物之始是非之紀也是以明君守始以知萬物之源治紀以知善敗之端故虛靜以待令令名自命也令事自 定也虛則知實
之情靜則知動者正有言者自爲名有事者自爲形形名參同君乃無事焉歸之其情故曰君無見其所 欲君見其所欲臣自將彫琢
君無見其意君見其意臣將自表裏曰去好去惡臣乃見素去舊去智臣乃自備(하략).”
여기서 우리는 한비(韓非)가 말하는 도(道)가 노자(老子)가 말한 도와 같은 면이 있음을 알 게 된다.
텅 비고 고요한 마음으로 아무런 작위(作爲)도 없이 우주(宇宙)가 만물을 화육 생성(化育生成)하는 자연 법칙의 원리
를 터득하는 것이 밝은 임금의 길임을 설파하고 있다.
또 이 글은 문예면에 있어서도 대구(對句)와 압운(押韻)의 수사법(修辭法)을 활용하고 있는 명문이기도 하다.
예를 보이면, “만물지시 시비지기야(萬物之始是非之紀也)”에서 “만물지”와 “시비지”는 대구이고, “시”와 “기”는 같은
운(韻)이다. “수시이지만물지원(守始以知萬物之源)”과 “치기이지선패지단(治紀以知善敗之端)”도 “수시이지만물지”와
“치기이지선패지”가 대(對)이고, “원”과 “단”이 같은 운이다.
이처럼 『한비자』는 수사면(修辭面)에서 문예성(文藝性)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4. 3. 신화(神話)
중국인들에 의하여 저술된 중국 문학사에서는 신화(神話)를 거의가 다루지 아니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는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여기서는 순(舜)임금님이 동이인(東夷人)이라는 맹자(孟子)의 언급에 따라 우리 천손족(天孫族)의 한 선조(先祖)로
보고, 그의 선계(先系)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제1과 『중국역사간편(中國
歷史簡編)』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순임금은 보통 “제순유우씨(帝舜有虞氏)”라고 일컬어지는데, 성(姓)은 요(姚)이고,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전욱(顓頊)의 5세손이라고 한다. 그러면 순임금의 5대조인 전욱은 어떤 사람인가?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손자(孫子)
라고 한다.
그러면, 황제 헌원은 어떤 사람인가?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姓)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아버지인 소전은 다만 유웅국(有熊國)의 임금[君]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를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 살피면, 제1세 단제(檀帝) 때의 중신(重臣)인 고시(高矢)는 바로
순임금의 작은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여 역시 중국의 선진시대(先秦時代) 신화를 우리 역사와 문학 속에 포용하여 뒤틀려온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잡아야 하겠다.
司馬遷,『史記』,
劉修橋,『中國歷史簡編』,新文豊出版公司, 1979.
大野勃,『檀奇古史』,陰陽脈診出版社, 2004.
4. 3. 1. 천지창조(天地創造)
4. 3. 1. 1. 반고(盤古)
현재 중국 신화로 알려진 천지 창조의 이야기는 모두 인물 신화와 겹쳐진다.
채정인(蔡正人)의 『고신화선석(古神話選釋)』에서 예를 들어 보이면, 아래와 같다.
반고(盤古)는 아직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지 아니하여 한 덩이로 뒤엉켜 있을 때에 달 걀과 비슷한 가운데서 출생하여
1만 8천년을 사는 동안에 하늘과 땅이 쪼개지면서 맑은 양은 하늘이 되고, 흐린 음은 땅이 되었다.
반고는 그 속에서 하루에 아홉 번 변하여 하 늘에서는 신(神), 땅에서는 성(聖)이 되었다.
하늘은 매일 약 3m씩 높아지고, 땅은 매일 약 3m씩 두터워졌으며, 반고는 매일 약 3m씩 자랐다.
이와 같이 1만 8천 년이 되니, 하 늘은 더할 수 없이 높고, 땅은 더할 수 없이 깊어졌으며, 반고는 더할 수 없이 키가 커
져서 뒤에 이들이 천황(天皇)과 지황(地皇)과 인황(人皇)의 삼황(三皇)이 되었다.(하략)
“天地混沌如雞子盤古生其中萬八千歲天地開闢陽淸爲天陰濁爲地盤古在其中一日九變神於天聖於地天日 高一丈地日厚
一丈如此萬八千歲天數極高地數極深盤古極長後乃有三皇(하략).”
고 하여 천지 창조에 앞서 반고라는 사람이 먼저 태어난 1만 8천 년 뒤에 비로소 양기는 하늘이 되고, 음기가 땅이 되어
반고는 하늘에서는 신(神), 땅에서 성(聖)으로 다시 1만 8천 년을 살아 마침내 천지인(天地人)의 삼황(三皇)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천손족의 삼신사상(三神思想)에 뿌리하여 이루어진 신화임을 짐작할 수 있다.
4. 3. 1. 2. 여왜(女媧)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고신화선석(古神話選釋)』에 의하면, 여왜(女媧)는 옛날의 신성녀(神聖女)로 만물을 화육
(化育)한 사람이라고 한다. 여왜에 관한 이야기 일부를 소개한다.
(전략) 지나간 옛날 사극(四極)이 무너지고, 구주(九州)가 갈라지며, 하늘도 꺼지고, 땅 도 두루 솟구치었으며, 시뻘건
불꽃이 활활 타며 꺼지지 아니하고, 물도 넓은 바다처럼 흘러 멈추지 아니하며, 사나운 짐승들이 선량한 백성들을
잡아먹고, 독수리들은 노인과 어린이들을 낚아채어갔다.
이에 여왜가 오색의 돌을 다듬어서 그 돌로 뚫어진 푸른 하늘 을 깁고, 자라의 네 발을 잘라서 사극을 세우고, 흑룡을
죽이어 구주의 중앙인 기주(冀 州)를 건지어내고, 갈대풀을 태워 만든 재를 쌓아가지고 홍수를 멈추게 하였다.(하략)
“(전략)
往古之時四極廢九州裂天不兼覆地不周載火爁炎而不滅水浩洋而不息猛獸食顓民鷲鳥攫老弱於是 女媧鍊五色石以補蒼
天斷鼈足以立四極殺黑龍以濟冀州積蘆灰以止淫水.(하략)
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여왜의 보천(補天) 신화”라고 하여 유명하다. 이 여왜는 생황(笙簧)을 처음 만들기도 하고, 복희
(伏羲)의 누이라고도 하고, 복희의 부인이라고도 하며, 복희는 물고기의 비늘로 몸이 되어 있고, 여왜는 뱀의 몸통
으로 되어 있다고도 한다. (『古神話選釋』, 長安出版社, 1983. )
이러한 천지개벽(天地開闢)에 관한 신화는『회남자(淮南子)』에 아래와 같이 실려 있기도 하다.
하늘과 땅이 아직 형태조차 없었던 때에 무형의 모양[풍익(馮翼)]으로 떠돌고, 그것은 정적과 엄숙한 무형의 모양
[동촉(洞灟)]으로 막연할 뿐이었다.
이것을 태시(太始)라고 불렀 다. 태시는 허확(虛霩)을 낳고, 허확은 우주(宇宙)를 낳고, 우주는 기(氣)를 낳았다.
그 기 는 구별이 있어서 맑고 밝은 기는 희미하게 뻗치어 하늘이 되고, 탁하고 걸쭉한 기는 엉 키어 덩어리가 되어
대지(大地)가 되었다.
맑은 기가 모이기는 아주 쉽고, 탁한 기가 응고 되기는 어려워서 하늘이 먼저 이루어지고, 땅은 나중에 정하여졌다.
하늘과 땅의 정기가 겹쳐져서 음양이 되고, 음양의 정기만 모이면 사시(四時)가 되며, 사시의 정기가 흩어져서
만물이 되고, 양의 뜨거운 기운이 싸이어 불을 낳고, 화기의 정(精)이라는 것이 해가 되었 으며, 음의 차가운 기운이
쌓이어 물이 되고, 물 기운의 정이라는 것이 달이 되었다. 해와 달의 음기(淫氣)의 정(精)이라는 것이 별들이 되었
으며,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을 받아들 이고, 땅은 큰물과 먼지와 티끌들을 받아들였다.(하략).
“天墜未形馮馮翼翼洞洞灟灟故曰太始太始生虛霩虛霩生宇宙宇宙生氣氣有涯垠淸陽者薄靡而爲天重濁者 凝滯而爲地
淸妙之合專易重濁之凝竭難故天先成而地後定天地之襲精爲陰陽陰陽之專精爲四時四時之散精 爲萬物積陽之熱氣生火
火氣之精者爲日積陰之寒氣爲水水氣之精者爲月日月之淫氣精者爲星辰天受日月星 辰地受水潦塵埃(하략).”
하늘과 땅이 한 덩이로 붙어 있었던 혼돈 상태에서 천지가 쪼개지고, 사시(四時)와 만물(萬物)이 생기고, 별들과 티끌
먼지들이 천지에 가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出石誠彦,『支那神話傳說의 硏究』, 中央公論社, 1960.
4. 3. 2. 인물(人物)
4. 3. 2. 1. 복희(伏羲)
복희(伏羲·宓犧·虙戱)는 일명 포희(包犧·包羲·庖犧·炮犧)라고도 하는데, 그에 관한 기록은 『태평어람(太平御覽)』권
78에는 『시함신무(詩含神霧)』에서 인용한 것으로 “큰 발자국이 뇌택(雷澤)에 들어났는데, 화서(華胥)가 그것을
밟고 복희(宓犧)를 낳았다.[大跡出雷澤華胥履之生宓犧]”고 하였으며,
사마정(司馬貞)의 『보사기삼황본기(補史記三皇本紀)』에는 복희는 “뱀의 몸통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성덕이 있었다.[蛇身人首有聖德]”고 하였다.
4. 3. 2. 2. 염제(炎帝)
앞에서 인용한 『고신화선석(古神話選釋)』에 의하면,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는 사람의 몸통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 신농이 이미 세상에 태어나매 아홉 개의 우물이
저절로 뚫어졌다.
한 우물을 길어 올리니 여러 물들이 모두 움 직이었다. 신농씨가 다스릴 때에 하늘이 곡식으로 비를 내리 듯하니,
신농씨가 마침내 밭을 갈아 그 곡식을 씨로 심고, 흙으로 그릇을 빚고, 쇠를 불리어 생활 연모를 만들고, 농기구들을
만들어 풀밭을 개간한 뒤에 오곡이 잘 자라게 하고, 온갖 실과들을 거두었다.
신농은 붉은 채찍을 가지고 온갖 풀들을 다루어 그 맛이 보통인지, 독이 있는지, 차가온 지, 따뜻한지의 성질과 냄새와
맛이 주관하는 것들을 다 알아내어 백곡과 함께 널리 퍼뜨 렸으므로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농(神農)이라고 불렀다.
(하략)
“炎帝神農氏人身牛首. 神農旣誕九井自穿汲一井則衆水. 神農之時天雨粟神農遂耕而種之作陶冶斤斧爲 耒耟鉏耨以墾
草莽然後五穀興助百果藏實. 神農以赭鞭鞭百草盡知其平毒寒溫之性臭味所主以播百穀故天 下號神農也(하략).”
고 하여 농업의 신이며 동양 의약(醫藥)의 신으로 알려진 염제(炎帝)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통을 한 상상의 인물
임을 알려주고 있다.
4. 3. 2. 3. 황제(黃帝)
황제(黃帝)에 관한 이야기도『산해경(山海經)』의 「서차삼경(西次三經)」에 의하면,
(전략) 또 서북으로 420 리를 가면, 밀산(密山)이다. 그 산위에는 단목(丹木)이 많은데, 등근 잎에 줄기가 붉고,
노란 꽃이 피며, 붉은 열매를 맺는다.
그 맛은 엿과 흡사하여 먹 으면 배가 고프지 아니하다. 단수(丹水)가 여기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직택(稷澤)
으로 들어간다.
그 못 안에는 백옥(白玉)이 많고, 옥고(玉膏)가 있어서 마치 끓는 물처럼 솟 아나오는데, 황제(黃帝)가 이것을 먹고
마시었다. 이 옥고는 검은 옥도 생산하니, 이 검은 옥으로 논물을 대듯 단목에 물을 주면, 단목은 5년이면, 오색이
맑고, 오미가 향기로워진 다. 황제는 밀산의 옥꽃을 따서 종산(鐘山)의 남쪽에 뿌리었다.(하략) “(전략)
又西北四百二十里曰밀山其上多丹木員葉而赤莖黃華而赤實其味如飴丹水出焉西流注于稷澤其中 多白玉是有玉膏其原
沸沸湯湯黃帝是食是饗是生玄玉玉膏所出以灌丹木丹木五歲五色乃淸五味乃馨黃帝乃 取밀山之玉榮而投之鐘山之陽
(하략).”
고 하여 황제의 건강과 장수한 비법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여 주고 있다.
4. 3. 2. 4. 치우(蚩尤)
치우(蚩尤)에 관하여 한인(漢人)들은 악(惡)의 표본으로 다루고 있다.
『고신화선석(古神話選釋)』에서는 치우와 황제(黃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전략) 치우는 구리 머리에 돌을 씹어 먹으며, 허공을 날고 험한 곳을 달리었다.
(황제) 는 구우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아홉 번을 두드려서 치우의 행위를 못하게 하니, 치우 가 날거나 달릴 수가
없으매 마침내 그를 죽이었다.
대황(大荒)의 안에 송산(宋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육사(育蛇)라고 하는 붉은 뱀이 있다.
산 위에서 어떤 나무가 자라는데, 이름을 풍목(楓木)이라고 한다.
풍목은 치우가 버린 차꼬와 수갑 같은 것들이 풍목이 되었 다고 한다. 황제(黃帝)는 여산(黎山)의 언덕에서 치우를
죽이고, 치우가 쓰던 기계를 대황의 한 가운데다 던져버렸다.
송산의 위는 뒤에 풍목의 숲이 되었다.(중략) 판천씨(阪泉氏) 치우(蚩尤)는 성이 강(姜)이며, 염제(炎帝)의 후손이다.
군사놀이를 좋아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을 좋아하였다.
임금을 쫓아내고 탁록(濁鹿)에서 살며 왕위에 올라 염제(炎帝) 라고 하였다.
황제(黃帝)는 염제와 판천의 들판에서 싸우는데, 곰[熊], 큰곰[羆], 이리[狼], 표범[豹], 맹수[貙], 호랑이[虎]를
거느리어 앞에서 달리게 하고, 수리[鵰], 산박쥐[鶡], 매, [鷹], 솔개[鳶]등은 깃발로 삼았다.
치우는 도깨비들[魑魅]을 거느리고 탁록(涿鹿)에서 싸 움을 하였는데, 황제는 뿔피리를 불리우고 용의 울음을
울리어 그를 방어하였다.
황제는 치우와 탁록의 들판에서 싸웠는데, 치우는 안개를 지어 3일 동안 가득하게 하여 군사들 이 모두 당황하여 하니,
황제는 풍후(風后)를 시켜 북두칠성을 모방하여 지남차(指南車) 를 만들어 사방의 위치를 알게 되어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았다.(하략)
“(전략)蚩尤銅頭啖石飛空走險(黃帝)以馗牛皮爲鼓九擊而止之尤不能飛走遂殺之.大荒之中有宋山者有赤 蛇名曰育蛇
有木生山上名曰楓木楓木蚩尤所棄其桎梏是謂楓木.黃帝殺蚩尤於黎山之丘擲械於大荒之中宋山 之上後化爲楓木之林
(중략)阪泉氏蚩尤姜姓炎帝之裔也好兵而喜亂逐帝而居於濁鹿興封禪號炎帝.黃帝與炎 帝戰於阪泉之也帥熊羆狼豹貙
虎爲前驅鵰鶡鷹鳶爲旗幟.蚩尤率魑魅與黃帝戰於涿鹿帝令吹角作龍吟以禦之. 黃帝與蚩尤戰於涿鹿之野蚩尤作大霧彌
三日軍人皆惑黃帝乃令風后法斗機作指南車以別四方遂擒蚩尤(하 략)”.
고 하여 나쁜 인물로 표현하고 있으나, 우리나라 임승국(林承國)은 그의 『한단고기』에서 이 치우(蚩尤)에 관하여,
(전략) 치우천왕은 <삼성기 전> 하편의 신시 역대기에 의하면 14세 자오지한웅(慈烏支 桓雄)을 가리킨다.
사실 치우천황은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방의 군신(軍神)이다.
그의 무 덤에서 연기 같은 것이 휘날리면 난리가 난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고, 그 연기를 치우 의 깃발이라 한다고
하며,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 치우사당이 모셔 있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고대 제왕의 이름이다.
(하략)
라고 하였다. (임승국,『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7.)
4. 3. 2. 4. 후직(后稷)
후직(后稷)은 주실(周室)의 선조로 인류의 먹거리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보급한 농경(農耕)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의 출생담이 유명하다. 역시 『고신화선석(古神話選釋)』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주(周)나라 후직(后稷)은 이름이 기(棄)이다. 그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의 딸인 강원 (姜原)이라고 하는 이이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첫째 부인이었다. 강원이 들에 나갔다가 큰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마음속으로 너무 기뻐서 그
발자국을 밟아보았더니, 몸이 움직 이어 마치 임신이 되는 것 같았다.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으나,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길거리에 아이를 버렸더니, 말과 소 같은 짐승들이
지나가다가 모두 밟지 아니 하고, 피하여 갔다. 그 아이를 숲속에 옮겨다 버렸더니, 마친 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어
있었다. 그 아이를 옮겨서 개천의 얼음판에 버렸더니, 날아가던 새들이 그 날개로 그 아이 를 덮어주었다.
강원은 신기하게 생각하고 마침내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처음에 그 아 이를 버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버릴
기(棄)라고 하였다. 기가 어렸을 때에 용감하고 도 신체가 커서 거인의 뜻을 품었다.
그는 놀이도 나누와 삼과 콩들을 심기를 좋아하였는 데, 삼고 콩이 아주 잘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마침내 농사짓
기를 좋아하였다. 토
질이 좋은 곳을 찾아 땅에 맞는 곡식을 심어 농사를 지었다. 백성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요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거용하여 농사(農師)를 삼아 천하에 이로움을 주는데 공이 있었다. 순임금이 말하기를, “기! 백성들에게 처음
으로 굶주림을 알게 하였으니, 후직은 때 에 맞추어 백곡을 파종하라!”하고,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后稷)이라고
불렀다. 다른 성으로 희(姬)씨라고도 한다.(하략)
“周后稷名棄其母有邰氏女曰姜原姜原爲帝嚳元妃姜原出野見巨人跡心忻然說欲踐之踐之而身動如孕者居 期而生子以爲
不祥棄之隘巷馬牛過者皆辟不踐徙置之林中適會山林多人遷之而棄渠中氷上飛鳥以其翼覆薦 之姜原以爲神遂收養長之
初欲棄之因名曰棄棄爲兒時仡如巨人之志其遊戱好種樹麻菽麻菽美及爲成人遂好 耕農相地之宜宜穀者稼穡焉民皆法則
之帝堯聞之擧棄爲農師天下得其利有功帝舜曰棄黎民始飢爾后稷播時 百穀封棄於邰號曰后稷別姓姬氏(하략)”
이 밖에도 소호(少昊)·전욱(顓頊)·요(堯)·순(舜)·과보(夸父)·형천(刑天)·우공(寓公)·팽조(彭祖)·서왕모(西王母)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여기서는 줄인다.
5. 한국 넷째시대 부여(夫餘)와 삼한문학(三韓文學)
이 시기는 북부여(北夫餘)의 건국시인 단제 기원 2096(서력 전 237)년부터 가야국(伽倻國)이 건국한 2379(42)년
까지인 약 280년간을 가리킨다.
5. 1. 부여(夫餘)의 맞두드리[迎鼓]
이 이름은 작품 이름이 아니고 종합 예술적 행사의 이름이나, 이러한 행사가 있었다면, 분명히 문학 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다룬다.
부여의 풍속에 관한 이야기는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의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략) 은(殷)나라 월력으로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전국 대회를 열어 여 러 날 계속하여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 행사를 이름하여 “맞두드리[迎 鼓] 맞두드리[迎鼓]=이 말은 뒤에 일본으로 전하여져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마쓰리[祭, 祝祭, 祝典]” 로 변하였다. 또 “영고”는 한문어가 아니고, 우리의 옛말을 한자의 뜻을
빌어서 쓴 것이다. ”라 하였다.
이 기간에는 형옥(刑獄)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밤낮 으로 길에 사람들이 다니며 노인이나 어린이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두 노래 불러 여러 날 끊이지 아니하였다.
“(전략) 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飮食歌舞名曰迎鼓於是斷刑獄解囚徒(하략)”
고 하였다. 이러한 행사를 행하는 생활 자체가 표기할 수 있는 글자가 없던 당시로서는 노랫말이 곧 문학이라고
하겠다.
5. 2. 삼한(三韓)의 풍속
여기서 삼한이라 함은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예(濊)를 덧붙인다. 현재로서는 이들
나라 사람들의 문학적 기록물들이 없기 때문에 중국계 역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극히 소략한 그때 사람들의 생활
풍속에서 어느 정도 문화 감각을 느낄 수가 있다.
5. 2. 1. 예(濊)의 하늘춤[舞天]
하늘춤[舞天]=이 말도 한문어가 아니고, 우리의 옛말 “하늘에 바치는 춤”을 한자의 뜻을 빌어서 쓴 것이다.
“天舞(천무)”라고 하면, “하늘이 추는 춤”이 되므로 본래의 뜻이 달라진다.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와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 ‘예(濊)’조에 따르면,
(전략) 언제나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 을 추었는데,
그 행사를 “하늘춤[舞天]”이라 하였다.
“(전략) 常用十月祭天晝夜飮酒歌舞名之爲舞天(하략)”.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노래를 불렀다는 그 노랫말이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그 때 사람들의
문학이라고 하겠다.
5. 2. 2. 마한(馬韓)의 목탁춤[鐸舞]
『삼국지』「위서」“동이전(東夷傳)”의 ‘마한(馬韓)’조에 따르면,
(전략) 언제나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친 뒤에 귀신에 제사를 지내고, 떼를 지어 노래 부 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고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니, 그 춤은 수십 인이 같이 일어서서 서로 뒤따르며, 땅을 발로 구르기도 하고, 몸을 낮추었다가
치켜 서기도 하며, 손과 발이 서로 따라서 같이 움직이니, 곡조의 꺾이는 마디가 있어서 마치 목탁춤을 추는 것 같았다.
10월에도 농사일이 끝나면 역시 그와 같은 행사를 하였다.
“(전략) 常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隨踏地低昻手足相應節奏有似鐸 舞十月農功畢
亦復如之(하략).”
고 하였다. 이 마한의 “노래 부르고” “수십 인이 같이 일어서서 서로 뒤따르며, 땅을 발로 구르기도 하고, 몸을 낮추었
다가 치켜 서기도 하며, 손과 발이 서로 따라서 움직이니,”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오늘날까지 전하여 오는 이른바
“강강수월래춤”을 연상할 수가 있다.
지금의 “강강수월래춤”과 함께 노래되는 노랫말은 비록 단조롭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의 좋은 문학 자료를 유추할 수가 있다.
5. 2. 3. 변한(弁韓)의 소리가락[音曲]
『삼국지』「위서」의 “동이전(東夷傳)” ‘변한(弁韓)’조에는,
풍속이 노래 부르기와 춤추기와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큰 거문고라는 악기가 있는데, 그 모양이 축(筑)과 비슷한데,
그것을 연주하면, 또한 소리가락이 있었다.
“(전략) 俗喜歌舞飮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하략)”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은 술 마시기와 노래 부르기와 춤을 추기를 매우
좋아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노래에는 노랫말이 있었을 것이니,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고 하여 당시에 문학도 없었
다고 할 수는 없다.
6. 한국 다섯째시대 사국문학(四國文學)
여기서 말하는 사국(四國)은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가야국(伽倻國) 등 네 나라를 이른다. 따라서
이 시기는 신라 건국시인 2276(기원전 57)년부터 신라 멸망시인 3268(기원 후 935)년까지의 992년간의 문학을 가리
킨다.
6. 1. 신라 문학(新羅文學)·
6. 1. 1. 이름만 전하는 노래들
6. 1. 1. 1. 두레노래[兜率歌]
이 노래에 관하여는 『삼국사기』권 1, 신라 본기 제1의 3. 유리잇금[儒理尼王師今] 유리잇금[儒理尼師今]=우리의
옛말을 한자를 빌어서 쓴 것이므로 한자를 “유리이사금”으로 읽으면 아니된다.
5(2361, 28)년조에서, “이 해에 백성들의 삶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두레노래를 지어 불렀으니, 이것이 신라
가악의 시초이었다.” “是年民俗歡康始制兜率歌此歌樂之始也” 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한편『삼국유사』권1, 제3 노례왕(弩禮王)조에는 “처음으로 두레노래를 지었으니, 감탄의 글귀에 시골풍이 있다[始
作兜率歌有嗟辭詞腦格]”라고 하여 같은 두레노래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것은 지금도 농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협력하여 집집이 돌아가며 하는 노동요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 노래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집단적 노동요이면서 특정인에 의하여 창작된 창작가로서 신라 최초의 노래라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는 모내기노래 같은 집단 노동요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 제3공화국
시절 경제부흥을 위하여 국민 모두가 불렀던 “새마을노래” 같은 특수 목적가로 창작되어 불리어진 노래라는 뜻일
것이다.
6. 1. 1. 2. 뫼소노래[會蘇曲]
『삼국사기』유리잇금[儒理尼師今] 9(2365, 32)년조에는,
왕은 이미 6부(部)를 정한 뒤에 이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 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이해를 같이 하는 패거리를 만들어 7월 16일부터 날마다 큰 부(部)의 뜰에 모이어 길삼을 하는데, 밤 11시에 일을
끝내되,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진 편에서는 음식을 만들어 이긴 편에게 대접하고, 모두 노래
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이때에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서 춤 을 추며 탄식하기
를 “뫼소! 뫼소![會蘇會蘇]”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면서도 우아하여 후 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인연으로 노래를
지으니, 이름이 “뫼소노래[會蘇曲]”이다.
“王旣定六部中分爲二使王女二人各率部內女子分朋造黨自秋七月旣望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乙夜而罷至 八月十五日考
其功之多少負者置酒食以謝勝者於是歌舞百戱皆作謂之嘉俳是時負家一女子起舞嘆曰會蘇會 蘇其音哀雅後人因其聲而
作歌名會蘇曲.”
라고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양대(兩大) 명절의 하나인 추석(秋夕)의 기원을 밝힌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會蘇會蘇(회소회소)”를 “마소! 마소!”로 풀이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만약에 당시에 진 편의 한 여자가 원망스럽고 서러워서 “마소! 마소!”하고 노래하였다면, 그 행사는 오늘날의 큰 명절로
이어져오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추석 명절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그 진 편의
여자는 자기편의 여자들이 이긴 편의 사람들보다 열심히 일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졌으므로 우리 편 여자들이여 제발
일찍일찍 “모이소! 모이소!”의 뜻으로 외쳤을 것이다.
“모이소”를 줄이어 소리 내면, “뫼소! 뫼소!”가 된다. “금년에는 우리가 졌지만, 내년에는 우리가 꼭 이깁시다.”라는 뜻
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 풍속이 끊이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한가위라는 민족 최대의 명절로 이어져 올 수 있었다고
본다.
6. 1. 1. 3. 물계자가(勿稽子歌)
이 노래는 신라 내해왕(奈解王) 때의 군인 물계자가 지은 작품인데, 그 배경담만 전하고, 노랫말은 전하지 아니한다.
『삼국유사』권5, 피은(避隱) 제8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10대 내해왕 즉위 17(2345, 212)년 임진에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固城)”이라는 원주가 있음.
, 사물국 (史勿國) “지금의 사주(泗州)”라는 원주가 있음.) 등 여덟 나라가 힘을 모아 신라의 변경을 쳐들어왔다.
왕이 태자 내음(㮈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을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8국 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에 물계자(勿稽子)의 공이 으뜸이었다. 그러나 태자에게 미움을 사 그 공을 상 받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물었다.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그대뿐인데, 그대에게 상이 내려지지 아니하였으니, 태자가
그대를 미워함을 원망하시오?”하였다. 물계자가 대답 하기를, “나라의 임금님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인신(人臣)이
태자를 원망하겠소?”하였다.
그 사람이 “그러면 왕께 아룀이 좋겠소.”하니, 물계자가 “공을 취하려고 목숨을 다투고, 나 를 날리려고 남을 막는
것은 지사가 할 일이 아니므로 오직 힘서 때를 기다릴 뿐이오.”하 였다. 내해왕 20(2348, 215)년 을미에 골포국(骨浦國)
(“지금의 합포(合浦)”라는 원주가 있음.) 고려 때 합포는 지금의 마산시(馬山市)임.
등 삼국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갈화(竭火) (“굴불(屈弗)인 듯하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라는 원주가 있음.) 를
쳐들어왔다.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막아 삼국이 모두 패하였다. 물계 자가 거둔 적의 머리가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이 물계
자의 공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물 계자가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함을
보고는 목 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당하여는 몸을 잊고 절의를 지키어 죽살이를 돌보지 아니하는 것 을 충이라고 하였
으니, 보라(保羅) (“발라(發羅인듯하니, 지금의 나주(羅州)”라는 원주가 있음.) 와 갈화(竭火)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가
어려웠고, 임금 의 위태함이었으나, 내가 아직 몸을 잊고 목숨을 다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이 심한 것이오.
이미 불충으로 임금님을 섬기고, 누를 선조(先祖)께 끼치었으니, 어찌 효라고 하겠소? 이미 충효의 도를 잃었으니,
무슨 낯으로 조정과 저자거리에서 놀 수가 있겠소?” 하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師彘山) (“알 수
없음”이라는 원주가 있음.) 에 들어가서 대나무의 성벽을 슬퍼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따라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지으며 은거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保羅國古自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等八國倂力來侵邊境王命太子㮈音將 軍一伐等率兵
拒之八國皆降時勿稽子軍功第一然爲太子所嫌不賞其功或謂勿稽曰此戰之功唯子而已而賞不 及子太子之嫌君其怨乎稽
曰國君在上何怨人臣或曰然則奏聞于王幸矣稽曰伐功爭命揚己掩人志士之所不爲 也勵之待時而已(二)十年乙未骨浦國
(今合浦也)等三國王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今蔚州)王親率禦之三 國皆敗稽所獲數十級而人不言稽之功稽謂其妻曰
吾聞仕君之道見危致命臨難忘身仗於節義不顧死生之謂忠 也夫保羅(疑發羅今羅州)竭火之役誠是國之難君之危而未曾
有忘身致命之勇此乃不忠甚也旣以不忠而仕君 累及於先人可謂孝乎旣失忠孝何顔復遊朝市之中乎乃被髮荷琴入師彘山
(未詳)悲竹樹之性病寄託歌擬溪澗 之咽響扣琴制曲隱居不復現世.”
여기서 이 작품의 지은이는 물계자임을 알겠고, 주제는 대쪽 같이 곧은 자기 자신의 깨끗한 지조와 절의가 당시 사회
에서 인정되지 아니하는 것을 탄식한 자기반성의 노래라고 하겠다. 지어진 연대는 내해왕 20(2348, 215)년 이후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6. 1. 1. 4. 우식곡(憂息曲)
이 작품은『삼국사기』권 45, 「열전」제5, “박제상(朴堤上)”조에 실려 있다. 실성왕(實聖王) 원년(2735, 402)에
왜국(倭國)과 화친을 맺으며 내물왕(奈勿王)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데려 갔다. 실성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이 박제상을 보내어 미사흔을 데려오게 하여 박제상의 노력으로 미사흔은
눌지마립간 2(2751, 418)년 가을에 무사히 귀국하였으나, 박제상은 왜왕에게 잡히어 처형되었다.
눌지왕은, 미사흔이 귀국할 때에 6부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멀리 나가 미사흔을 맞이하게 하고, 궁 성(宮城)에 들어와
왕을 뵈올 때에는 왕이 친히 손을 잡고 형제의 정의를 나눔이 극진하 였다.
이때에 왕은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며 그 뜻을 널리 선양하였는데 지금의 신라악의 “우식곡(憂息曲)”이
곧 이것이다.
“未斯欣之來也命六部遠迎之及見握手相泣會兄弟置酒極娛王自作歌舞以宣其意今鄕樂憂息曲是也.”
6. 1. 1. 5. 실혜가(實兮歌)
『삼국사기』 권 48, 「열전」제8 “실혜(實兮)”조에 따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실혜는 대사(大舍) 순덕(純德)의 아들이다. 그 성격이 강직하여 옳지 아니한 일에는 굽 히지 아니하였다.
진평왕(眞平王) 때에 상사인(上舍人)이 되었는데, 그 때에 하사인(下舍 人) 진제(珍堤)는 그 사람됨이 편녕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제는 실혜와 비록 동료이 었으나, 일을 당하면, 서로 옳고 그름을 따졌다.
실혜는 바른 것을 지켜 구차하지 아니하므로 진제는 이를 질투하며 원한을 품고, 여러번 왕에게 참언하기를 “실혜는
지혜는 없으면서 담기만 많아서 희노(喜怒)에 급하며, 비록 대왕의 말씀이라도 그의 뜻에 맞지 아니하면 분개하니,
만약 이를 징계하지 아니하면 그는 장차 나라를 문란하게 할 것이니, 이를 곧 내쫓았다가 그의 굴복을 기다렸다가 뒤에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실혜의 벼슬을 뺐고 깊은 산골로 내보내었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실혜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할아버지부터 충성으로 나라를 위하였고, 어르신도 재량(材量)이
세상에 잘 알려진 때에 영신(侫臣)의 참소를 입어 멀리 죽령(竹嶺) 밖의 깊은 산골로 가게 되었으니, 또한 원통하지
아니한가? 어찌 이 사실을 바른대로 변명하지 아니하는가?”하니, 실혜가 답 하기를, “옛날 굴원(屈原)은 홀로 곧아서
초빈(楚擯)으로 쫓겨났고, 이사(李斯)는 충성을 다하였으나 진(秦)의 극형을 받았으니, 영신 혹주(侫臣惑主)와 충사
피척(忠士被斥)을 알게 되었다. 옛날도 역시 그렇거늘 이를 어찌 슬퍼하리오?”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가서 장가(長歌)를 지어 그 뜻을 표하였다.
“實兮大舍純德之子也性剛直不可屈以非義眞平王時爲上舍人時下舍人珍堤其爲人便佞爲王所嬖雖與實兮 同僚臨事互是
非實兮守正不苟且珍堤嫉恨屢讒於王曰實兮無智慧多膽氣急於喜怒雖大王之言非其意則憤不 能已若不懲艾其將爲亂盍
黜退之待其屈服而後用之非晩也王然之謫官泠林或謂實兮曰君自祖考以忠誠公材 聞於時今爲佞臣之讒毁遠宦於竹嶺之
外荒僻之地不亦痛乎何不直言自辯實兮答曰昔屈原孤直爲楚擯黜李斯 盡忠爲秦極刑故知佞臣惑主忠士被斥古亦然也何
是悲乎遂不言而往作長歌見意.”
여기서 이 실혜가의 지은이는 실혜 자신임을 알 수 있고, 주제는 실혜의 곧은 성격과 영신(佞臣)이 왕을 미혹시켜 나라
를 위태하게 하고, 정직한 충신이 배척되는 야속한 세상사를 탄식함일 것으로 유추된다.
여기서 특히 “장가(長歌)”를 지었다고 한 것은 곧 조선시대 꽃을 피운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원형이 이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이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지어진 연대는 진평왕(眞平王) 재위 기간인 2912-2964 ,579-631)
사이임을 이해할 수가 있다.
6. 1. 1. 6. 해론가(奚論歌)
이 작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 47, 「열전」제7의 “해론(奚論)”조에 있다.
해론은 모량(牟梁) 사람이다.(중략) 해론은 나이 20여세에 아버지 찬덕(讚德)의 공으로 대내마(大奈麻)가 되었고,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35(2951, 618)년에 왕은 해론에게 명 하여 금산당주(金山幢主)를 삼았는데,
그는 한산주군도독(漢山州郡都督) 변품(邊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돌아간 아버지가 백제에 빼앗긴 가잠성(椵岑城)
을 습격하여 되찾았다.
이때 에 백제는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니, 해론 등이 저항하여 이미 싸움이 시 작되매 해론이 장병들
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버님께서 운명하신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도 또한 여기에서 백제 사람과 싸우게 되었으니,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하고, 마침내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진평왕은 그 소식을 듣고, 슬피 눈물을 흘리고, 그 유족들에게 상을 매우 후하게 내려 구휼하였다.
이때에 모 든 사람들이 그를 애도한 나머지 장가(長歌)를 지어 그를 조위(弔慰)하였다.
“奚論牟梁人也(중략)奚論年二十餘歲以父功爲大奈麻至建福三十五年戊寅王命奚論爲金山幢主與漢山州 郡都督邊品興
師襲椵岑城取之百濟聞之擧兵來奚論等逆之兵旣相交奚論謂諸將曰昔吾父殞身於此我今亦與 百濟人戰於此是我死日也
遂短兵赴敵殺數人而死王聞之爲流涕贈恤其家甚厚時人無不哀悼爲作長歌弔之.”
여기서 이 작품의 이름은 뒷사람이 붙인 것임을 알 수 있고, 지은이도 현재로서는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작품의 주제는 애도가(哀悼歌)임을 알 만하고, 장가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실전되었다고 풀이된다.
6. 1. 1. 7. 양산가(陽山歌)
이 작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 47, 「열전」제7 “김흠운(金歆運)”조에 있다.
김흠운(金歆運)은 내밀왕(奈密王=내물왕)의 8세손이다.(중략)태종대왕(太宗大王=무열왕) 2(2988, 655)년에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변경을 침략하므로 이를 토벌할 계획으로 군사를 내는데, 김흠운(金歆運)을 낭당대감(郎幢大監)을
삼으니, 그는 집 안에서 자지도 아니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군사들과 고락(苦樂)을 같이 하며 백제의 지경에 이르러서
양산(陽山) 밑 에 둔영하고, 조천성(助川城=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진공하려 하였는데, 백제군은 밤을 타고
달려와서 동이틀 무렵까지 숨어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아군은 놀라 갈 팡질팡하며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동안
에 백제군이 급히 공격하여 화살이 비가 아지 듯 날아들었다.
김흠운(金歆運)은 말 위에 앉아 창을 검어 쥐고 적을 기다리는데, 이때에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마하기를, “지금
적들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가릴 수 없으므로 비록 공이 싸워서 죽는다 하드라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골이니, 대왕의 반자(半子)이므로 만약 적병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는 이를 자랑 할 것이니,
우리는 이를 깊이 부끄러워할 일입니다.”하니, 김흠운(金歆運)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거늘
사람들이 이를 알던 모르던 한가지인데, 어찌 감히 명예만 구하리오?”하며 꿋꿋이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
므로, 종자들은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김흠운(金歆運)은 칼을 빼어 휘두르며
적과 어울려 싸워 몇 명을 쳐 죽이고 전사하였다.(중략)
태종왕이 그 소식을 듣고 슬피 통 곡하며 김흠운(金歆運)과 예파(穢破)에게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추증(追贈)
하였다.(중략) 이때에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그를 슬퍼하였다.
“金歆運奈密王八世孫也(중략)太宗大王憤百濟與高句麗梗邊謀伐之及出師以歆運爲郎幢大監於是不宿於 家風梳雨沐與
士卒同甘苦抵百濟之地營陽山下欲進攻助川城百濟人乘夜疾驅黎明緣壘而入我軍驚駭顚沛不 能定賊因亂急擊飛矢雨集
歆運橫馬握槊待敵大舍詮知說曰今賊起暗中咫尺不相辨公雖死人無識者况公新羅 之貴骨大王之半子若死賊人手則百濟
所誇託而吾人之所深羞者矣歆運曰大丈夫旣以身許國人知之與不知一 也豈敢求名乎强立不動從者握轡勸還歆運拔劍揮
之與賊鬪殺數人而死(중략)大王聞之傷慟贈歆運穢破位一 吉飡(중략)時人聞之作陽山歌以傷之.”
여기서 이 작품도 또한 애도가(哀悼歌)임을 알 수가 있고, 지어진 연대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중이
므로 2987-2993(654-660)년 사이임을 헤아릴 수 있다.
6. 1. 1. 8. 무애가(無㝵歌)
이 작품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권 4, 「의해(義解)」제5,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다음과 같이 있다.
(전략)원효(元曉)가 이미 계를 일고 설총(薛聰)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
(小姓居士)”라고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춤추며 희 롱하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이하고도 이상하였다.
원효가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모든 무애인들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一切
無㝵人一道出生死]”라는 문구를 따서 “무애(無㝵)”라고 이름을 붙이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지게 하였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어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다니었다.(하략).
“(전략) 曉旣失戒生聰已後易俗服自號小姓居士偶得優人舞弄大瓠其狀玉+鬼奇因其形製爲道具以華嚴經 一切無㝵人一
道出生死命名曰無㝵仍作歌流于世嘗持此千村萬落且歌且舞化咏而歸(하략).
여기서 우리는 이 작품의 지은이는 원효(元曉)이고, 그 주제는 불법 전파의 포교가(布敎歌)임을 알 수가 있다.
지어진 연대는 대체로 신라 문무왕(文武王)때인 2994-3013(661-680)년경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노래는 지금은 그 노랫말을 잃어서 그 본 모양을 알 수 없지만, 뒷날 영재(永才)스님의 「도둑만난 노래[우적가
(遇賊歌)]」와 균여대사(均如大師)의 「보현십종원가(普賢十種願歌)」로 이어지며 불교 그것도 대승불교를 널리
전하려는 불교 홍포(弘布)의 한 방법인 화청(和請)문학의 효시(嚆矢)라고 하겠다.
6. 1. 1. 9. 산화가(散花歌)
이 작품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권 5, 「감통(感通)」 제7 “월명사 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에 보인다.
(전략) 지금 세상에서 이것을 “산화가(散花歌)”라고 하나 잘못이고, 마땅히 “도솔가(兜率 歌)”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으나 글이 길어서 싣지 아니한 다.(하략)
“(전략) 今俗所謂此爲散花歌誤矣宜云兜率歌別有散花歌文多不載(하략).
여기서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도솔가(兜率歌)”와 전혀 다른 “산화가(散花歌)”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산화가(散花歌)”는 그 분량이 길어서 일연스님이 그의 『삼국유사』에 싣지 아니한 것도 알 수가 있다.
특히 홍재휴(洪在烋) 박사는 이 “산화가(散花歌)”를 조선시대 꽃피었던 가사문학(歌辭文學)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洪在烋, 「가사(歌辭)」,『國文學新講(국문학신강)』,(새문社, 1985), 쪽 175.
증거가 부족함이 흠이지만, 탁견이라고 하겠다.
6. 1. 1. 10.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이 작품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권 2, 「기이(紀異)」1,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 있다.
(전략) 대왕은 진실로 인생의 곤궁과 영달의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 歌) (“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歌亡未詳]”는 원주가 있음.) 를 지었다.
“(전략) 大王誠知窮達之變故有身空詞腦歌(하략).
고 한 데에서 이작품의 지은이는 원성대왕(元聖大王)이고, 그 주제는 그 제목에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일 것을 유추
할 수가 있다. 또 지어진 연대는 원성대왕의 즉위년(2418, 785)으로 추정된다.
6. 1. 1. 11. 앵무가(鸚鵡歌)
이 작품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권 2, 「기이(紀異)」제2, “흥덕왕 앵무(興德王鸚鵡)”조에 보인다.
제42대 흥덕대왕은 보력(寶曆) 2(3159, 826)년 병오에 즉위하였다. 얼마 아니되어 당(唐) 나라에 사신을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아니하여 암놈이 죽으니, 외로워진 수놈이 슬피 우는지라 왕이 사람을 시켜 거울
을 수놈의 앞에 걸어 놓았더니, 거 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짝을 얻은 줄 알고 거울을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자 슬피
울다가 지쳐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노랫말은 알 수가 없다.
“第四十二興德大王寶曆二年丙午卽位未幾有人奉使於唐將鸚鵡一雙而至不久雌死而孤雄哀鳴不已王使人 掛鏡於前鳥見
鏡中影擬其得偶乃啄其鏡而知其影乃哀鳴而死王作歌云未詳.”
여기서 신라인들의 인정미를 엿볼 수 있는가 하면, 이 작품의 내용은 앵무새 부부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뜻과 그
앵무새 암수간의 애정이 지극함을 찬미한 것이라고 유추할 수가 있다. 또 지어진 연대는 흥덕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라고 하니, 3159(826)년일 것임도 짐작할 수가 있다.
6. 1. 2. 온빈글노래[완전차자가(完全借字歌)]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향가(鄕歌)”라고 일컫는 노래들을 필자는 온빈글노래[완전차자가(完全借字歌)]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향가(鄕歌)”라는 말은 우리 문학작품을 우리 스스로가 “시골노래[鄕歌·詞腦歌]”라는 뜻으로 깎아내리는 말
이기 때문에 쓰지 아니하려 한다.
鄭寅普,『薝園鄭寅普全集』1,(延世大出版部, 1983) 쪽 284-288에 근거하여 필자는 “시골노래[鄕歌 =詞腦歌]”로
본다.
현재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향가”라는 말은 고려 문종 29(3408, 1075)년에 간행된『대화엄 수좌 원통
양중대사 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에 나오는 최행귀(崔行歸)가 “당시(唐詩)”의 대칭어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폄어(自貶語)가 분명하다.
둘째, “향(鄕)”자에는 중요한 것만 다루어도 15종의 뜻이 있다. 1. 행정구획 이름, 2. 읍리(邑里), 3. 나라[國], 4. 처소
(處所), 5. 고향, 6. 변두리, 7. 본경(本經)의 기 위(氣位), 8. 방향, 9. 또래, 10. 향대부의 준말, 11. 향음주례의 준말,
12. 성(姓), 13. 구함[救也], 14. 울림[響], 15. 식사 대접[饗] 등임.
그 15개의 뜻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뜻은 “시골향(鄕)”이다. 따라서 “향가(鄕歌)”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시골노래”라고 풀이되며, “시골노래[鄕歌]”는 곧 “신라노래” 또는 “우리말노래”로 이해되고 있다.
셋째,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향(鄕)”자를 살펴보면, 모두 35회의 잦기를 보이는데, 그 중에
“경주(慶州)”를 일컬은 것이 18회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시골”로 7회의 잦기를 보였고, 그 다음은 “고향”과 “마을”
이 각각 5회씩의 잦기를 나타내었다.
이로 보더라도 “향가(鄕歌)”를 “신라노래”의 대명사로 쓰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넷째, 조지훈(趙芝薰:4253-4301, 1920-1968)선생은 “향가(鄕歌)”라는 말을 피하여 “신라가요(新羅歌謠)”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다. 趙芝薰, 「新羅歌謠考」,『國文學』6, 高麗大學校, 4295(1962).
다섯째, 그러나 이른바 “향가”를 “신라가요”라고 하면, 고려시대 균여대사의 「보현십종원가(普賢十種願歌)」나 고려
예종(睿宗:재위 3439-3455, 1106-1122)의 「도이장가(悼二將歌)」까지도 “신라가요” 속에 포함시켜야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여섯째,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은 “향가(鄕歌)”를 “‘신라시대 이래 창작되어 향찰로 표기된 정형가요의 총칭’으로 이해
하여 왔다.”고 하는데 (김학성,『한국 고시가의 거시적 탐구』,(집문당,1997.)45쪽.)
, 이는 말이 안 된다.
그 이유는 “향찰(鄕札)”이 글자인가? “향찰”이라는 말도 현재로서는 가장 일찍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이 역시 고려 문종
때의 최행귀(崔行歸)이다.
그는 “당문(唐文:漢文)은 그물처럼 얽어져서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데, 향찰은 인디아의 글자와 비슷하게
이어서 늘어놓은 것 같아서 저 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唐文如帝網交羅我邦易讀鄕札似梵書連布彼土難諳]”
라고 한 데에서 볼 수 있듯이 한문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우리말을 적는 표기 방법을 마치 향찰이라는 별개의
글자가 있는 것처럼 잘못 말한 것을 우리들이 계속 무분별하게 계속 일컬어서 심지어는 “향찰문자”라는 말도 쓰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향찰”이라는 말은 우리말을 한문의 훈과 음을 빌어서 표기하는 방법을 일컬은 것이다.
글자는 외형(外形)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행귀가 말하는 “향찰”은 외형이 없다. 굳이 외형을 말한다면, 그것은 한문자(漢文字)이다.
최행귀의 주장을 오늘의 실정에 대입하여 설명한다면, 우리말로 “나는 한 사람의 남자이다.”라는 말을 잉글랜드어로는
“I am a man."이라고 쓰는데, 이것을 우리 글자가 없다고 가정하여 잉글랜드 문자를 빌어서 쓴다면, ”Nanun han
saram ui namjaida."라고 쓰게 된다. 이렇게 우리말을 쓴 글자를 “향찰”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때에 “Nanun"을 어떻게 향찰문자라고 할 수 있는가? 이때에 잉글리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쪽 어느 편도
이해하지 못함은 동일하다.
최행귀의 말도 깊은 속뜻은 이와 같건만, 그가 한 표현은 한문이나 한시는 중국의 선비들이 잘 이해하는데, 한자를
빌어서 표기한 우리말은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중국인들이 쓰는 한문과 한시는 뛰어나고, 우리말과 우리식
쓰기는 천박하다는 뜻을 함축시켜 깎아내려서 쓴 말이 ”향가(鄕歌)“ ”향찰(鄕札)“이니, 우리가 어찌하여 이 말을 계속
하여 써야 하는가?
일곱째, 이러한 자폄 의식(自貶意識)을 불식하고, 글자 아닌 것을 글자라고 하는 모순까지 해결하면서도 합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 이름의 창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표기 방식을 근거로 하여 “향찰”은 “우리말 쓰기”, “향가”는 “온빈글노래[완전차자가(完全借字歌)]”
“이두가(吏讀歌)”는 “반빈글노래[부분차자가(部分借字歌)]”라고 일컬을 것을 제안하면서 이 책에서는 그렇게 표기
한다.
이제 신라시대의 온빈글노래부터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6. 1. 2. 1. 임 보내는 노래[송랑가(送郞歌)]
이 작품은 4322(1989)년 2월에 부산에서 발굴되어 2월 19일-3월 8일에 『서울신문』에 8회에 걸쳐 공개된
두 종류의 『화랑세기(花郞世紀)』중 모본(母本)에 속하는 책에 실려 있는 것이다.
2세 풍월주(風月主)인 미실(美室)은 부진부공과 묘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미모가 뛰어나고 교태를 잘 부려
진흥왕(眞興王) 이래 진평왕(眞平王) 대까지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진흥왕이 어릴 때 섭정한 지소태후의 아들 세종
(世宗)과 결혼하였다.
이보다 먼 저 미실은 5세 풍월주가 된 사다함(斯多含)과 서로 사랑하는 애인 관계이었는데, 사다함 이 가야국(伽倻國)
정벌을 위하여 출정할 때에 이 노래를 지어 보내었다.
[其出征時以歌 送之]고 하며, 다음과 같은 작품을 6세 풍월주 세종(世宗)조에 수록하여 놓았다.
(김학성,『한국 고시가의 거시적 탐구』, 집문당, 1997.)
風只吹留如久爲都 바람이 분다구 하되,
郞前希吹莫遣 임 앞에 불지 말고,
浪只打如久爲都 물결이 친다구 하되,
郞前打莫遣 임 앞에 치지 말고,
早早歸良來良 빨리빨리 돌아오라!
更逢叱那抱遣見遣 다시 만나 안고 보고
此好! 여호! 정연찬은 “아호”로 풀이하였으나,
필자는 “여호!”로 읽었다.“此”는 “아”보다는 “여”나 “이”가 훈으로 근사하기 때문이다.
郞耶執音乎手乙 임이여! 잡은 손을
忍麻等尸理良奴 차마 물리려노. (정연찬 해독)
(의역)
바람이 불더라도
임 앞에는 불지 말고,
물결이 치더라도
임 앞에서는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안고 보고,
여호!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려노?
(이종욱,『화랑세기』, 소나무, 2005.)
라고 하였다.
지금 학계에서는 이 『화랑세기』를 후인이 꾸민 거짓된 책이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팽팽하다.
설혹 위서(僞書)라 하드라도 이 작품을 하나 건져서 신라시대 온빈글노래 한 편을 얻게 되는 우리 국문학계에는 큰
복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의 지은이는 미실(美室)이라는 신라 왕실의 귀족 여인이고, 지어진 연대는 정확하지는 아니하나, 진흥왕 때에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현재로서는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온빈글노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라고
하겠다.
또 이 작품의 주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이별가라고 하겠다. 그리고 형식에 관하여는 소창진평(小倉進平)이
말한 4구체, 8구체, 10구체가의 형식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원전에 나타나 있는 띄어쓰기를 따르거나, 의미망에 따라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 작품의 이름에 관하여 신재홍박사는 “송사다함가”라고 하였다.
(신재홍,「화랑세기의 신빙성에 대한 어문학적 접근」,『고전문학연구』29, 한국고전문학회, 2006.)
6. 1. 2. 2. 살별노래[혜성가(彗星歌)]
이 작품은 『삼국유사』권5, 「감통(感通)」제7,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融天師彗星歌眞平王代)”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와 함께 실려 전한다.
제5 거열랑(居烈郞), 제6 실처랑(實處郞) (“혹은 돌처랑(突處郞)이라고 씀”이라는 원주가 있음.)
, 제7 보동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 악(楓嶽)에 놀려고 하였을 때에 살별[彗星]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
였다.
낭도들이 의아하 여 여행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융천스님이 시골노래를 지어 부르매 이상한 별이 없어지고,
일본병이 물러가서 도리어 복과 경사스러운 일이 되었다. 대왕이 기뻐하여 낭도 들을 풍악에 놀러 보냈다.
“第五居烈郞第六實處郞(一作突處郞)第七寶同郞等三花之徒欲遊楓嶽有慧星犯心大星郎徒疑之欲罷其行 時天師作歌歌
之星怪卽滅日本兵還國反成福慶大王歡喜遣郞遊嶽焉歌曰(하략)”.
그 시골노래는
舊理東尸汀叱乾達婆矣 옛 샛물가 건달바에
游烏隱城叱盻良望良古 놀은 잣을랑 바라고,
倭理叱軍置來叱多 왜릿 군두 왔다.
烽燒邪隱邊也藪耶 홰 사른 갓 숩아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삼화의 오름 보올 듣고,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矣 달두 발그이 헤어 가올 결에
道尸掃尸星利望良古 길 쓸 별이 바라아고,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살별여 살반여 사람이 있다.
後句 뒷글,
達阿羅浮去伊叱等邪 달 아라 떠가 있드라.
此也友物北 “北”자는 양주동박사의 주장을 따라 “叱”의 잘못으로 봄.
所音叱慧叱只有叱故 이여우! 뭇 솜 살기 있고.
(의역)
옛날 동해 물가 건달바에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도 왔다!
횃불 피운 갓 숲에.
삼화랑의 산오름 보고 받고,
달도 붉으레 희어올 결에
길 쓸 별이 바라뵈고,
살별이여! 아뢴 사람 있다.
뒷글,
달 아래로 떠가고 있더라.
이봐! 무슨 살기 있는고?
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단락으로 엮어져 있다.
첫째, 세 화랑의 무리들이 금강산에 놀러가려 할 때에 살별이 나타났다.
둘째, 변방에서 횃불을 사르며 왜병이 왔음을 알려왔다.
셋째, 뒷글에서 왜병은 물러가고, 살별은 없다.
이 노래로 인하여 성괴(星怪)와 침입하였던 왜병까지 물러가서 대왕이 기뻐하였다는 기록에서 이 노래의 주력(呪力)
이 강함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작품의 지은이는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화랑도이면서 스님이었던 융천(融天)임을 알 수 있고, 또 당시의 화랑
들은 금강산처럼 이름 있는 명산을 찾아다니며 무술과 심신 수련을 하였음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지적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진평왕(眞平王) 재위 중인 2912-2964(579-631)
년 중에서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른 진평왕 16(2917, 594)년설과 왜군이 신라에 쳐들어
왔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에 따른 진평왕 45(2956, 623)년설이 있다.
조동일,「彗星歌의 創作年代」,『백영정병욱선생환갑기념논총』, 新丘文化社, 1982.
金思燁,『鄕歌의 文學的硏究』, 啓明大 出版部, 1979.
필자는 이 중에서 일본의 기록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른 진평왕 16년설을 현재로서는 믿기로 한다.
또 이 작품의 이름에 관하여도 김선기박사는 “길쓸별 노래”라 하였고, 그 나머지 많은 학자들은 대체로 “혜성가”라고
하였으나, “혜성”은 한문어이기 때문에 진평왕 당시를 생각한다면, “혜성”이라는 말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살별”로
늘 불렀을 것으로 판단하여 필자는 “살별노래”라고 부른다.
6. 1. 2. 3. 바람노래[풍요(風謠)]
이 작품은 『삼국유사』권 4, 「의해(義解)」제5,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과 함께 싣고 있다.
양지(良志)스님은 그 조상과 고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덕왕 때에 자취를 나타내었을 뿐이다.
석장(錫杖)의 머리에 베자루 하나를 걸어두면, 그 지팡이는 저절로 시 주(施主)의 집에 날아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는 이를 알고서 재(齋)에 쓸 비용을 넣었고, 자루가 가득차면, 그 석장은 다시 날아서 돌아왔다.
그런 때문에 양지스님이 머무는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양지스님의 신기하고 특이함은 모두가 이와 같았다.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두루 통 달하여 그 신묘함은 비길 데가 없었다. 또 글씨쓰기와 그림그리기나 조각도 잘하여
영묘 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16자 곧 약 5.3m 높이의 세 부처님의 상(像). 과
천왕상(天王像)과 그 절의 대웅전(大雄殿)과 탑 (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의 탑 아래 부분의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림사(法林寺)의 주불(主佛) 삼존(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흙을 빚어서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도 그가 썼고, 또 일찍이 조각하여 만든 벽돌로 하나의 작은 탑을 만들었으며, 아울러 삼천불
(三千佛)도 만들어서 그 탑과 함께 절 안에 모시고 정성을 다하여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육상을 만들 때에는 선정(禪定)에 들어 삼매지경에 빠진 자세로 흙을 빚어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대었다. 그 때에 부 른 바라노래[풍요(風謠)]는 이러하다.
來如來如來如來如 오다 오다 오다 오다.
哀反多羅哀反多 설븐다라. 설븐다.
矣徒良 애내여!
功德修叱如良來如 공덕 닦다여 오다.
(의역)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지금까지도 시골에서는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모두 이 노래를 부르고 있 는데, 대개 이때에 시작된
것이다.(하략).
“釋良志未詳祖考鄕邑唯現迹於善德王朝錫杖頭掛一布袋錫自飛至檀越家振拂而鳴戶知之納齋費帒滿則飛 還故名其所住
曰錫杖寺其神異莫測皆類此旁通雜譽神妙絶比又善筆札靈廟丈六三尊天王像幷殿塔之瓦天王 寺塔下八部神將法林寺主
佛三尊左右金剛神等皆所塑也書靈廟法林二寺額又嘗彫塼造一小塔竝造三千佛安 其塔置於寺中致敬焉其塑靈廟之丈六
也自入定以正受所對爲揉式故傾城士女爭運泥土風謠云(중략)至今土 人舂相役作皆用之蓋始于此(하략).”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것은 이 작품의 이름과 지은이와 지어진 때와 주제에 관한 정확한 지식
이다.
첫째, “풍요(風謠)”라는 이름을 통하여 풍속적「방아찧기노래」라는 노동요(勞動謠) 또는 민간요(民間謠)로 풀이하는
학자들이 많으나
姜吉云,『鄕歌新解讀硏究』,學文社, 1995.
金尙憶,『鄕歌』,한국자유교육협회, 1974.
최철,『향가의 문학적 연구』, 새문社, 1983.
, 이는 한문 말 “소망(所望)·염원(念願)·원망(願望)·희망(希望)”을 뜻하는 우리말 “바람”을 “바람풍(風)”자의 뜻을 빌
어서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공덕(功德) 닦으러 오다.”의 속뜻과도 일치하게 된다.
약 5m 30cm 높이의 거대한 삼존불상(三尊佛像)을 흙으로만 빚어서 만들 경우, 거기에 드는 진흙의 양은 대단히 많다.
그 많이 드는 진흙을 원산지에서 파 옮기는 데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신라시대 당시로서는 특수 운반도구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당시 경주(慶州)시내의 남녀들이 공덕(功德)을
닦는다는 바람[所願]과 정성으로 흙을 날랐을 것이니, 그 수고로움이 심하였을 것은 헤아리기 어렵지 아니하다.
그 힘 드는 노동을 “공덕 닦는다”는 “바람[願望]”을 가지고 기도하듯 노래하며 무거운 찰흙을 기쁜 마음으로 운반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양지(良志)스님이 영묘사(靈廟寺) 16척(尺) 삼존상(三尊像)을 완성한 뒤에도 계속 노래되어져서 여러 사람
들이 같이 일할 때에는 600여년을 이어오면서 「방아노래」라는 노동요로 변모되었다고 풀이된다.
둘째, 이 작품의 지은이에 관하여 이제까지는 성명을 모르는 사람의 작품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필자는 양지(良志)
스님이라고 본다.
이 “바람노래”를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한 일연(一然)스님이 양지스님을 글짓기·그림그리기·글씨쓰기·조각·조소(彫塑)
등 갖가지 기예(技藝)에 뛰어난 사람임을 소개하고, 양지스님의 업적을 자세히 소개한 뒤 영묘사(靈廟寺) 장육(丈六)
삼존상(三尊像)을 흙으로 빚어서 만들 때에 성내의 사녀들이 흙을 다투어 운반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 것으로
볼 때에 이 노래는 양지스님이 지어서 자기의 일을 도와주며 힘들어 괴로워하는 사녀들에게 “바람(소망·염원·원망·희망)”
을 이루기 위한 공덕(功德)을 닦는 성스러운 일임을 노래하며 운반할 것을 교시(敎示)하여 준 것으로 풀이하면,
그 지은이는 곧 양지스님인 것이 분명하여진다.
셋째, 이 작품의 이름에 관하여 일본인 소창진평(小倉進平)은 “양지사석(良志使錫)”이라고 『삼국유사』의 표제를
그대로 썼으며, 김선기 박사는 “바람결노래”라 하고, 최철(崔喆)박사는 “공덕가(功德歌)”라고 하였으며, 홍기문
(洪起文)은 “오라가” 이가원(李家源) 박사는 “운니요(運泥謠)” 李家源, 『韓國漢文學史』,(普成文化社,1989) 쪽 33.
라고 하였으나, 필자는 “바람노래[희망가·소망가·희원가]”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일연스님이 쓴 “풍요(風謠)”는 “풍속요(風俗謠)”의 준말이 아니라, 우리말 “바람노래”를 훈역(訓譯)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넷째, 이 작품이 지어진 연대는 영묘사(靈廟寺) 창건이 선덕여왕 4(2968, 635)년이므로 이 작품도 거의 같은 시기
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연스님이 밝힌 영묘사의 대웅전의 기와와 탑과 영묘사라는 현판까지를 모두 양지
스님이 만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 작품의 주제는 단순 노동요가 아니고, 공덕을 닦기 위한 노동중의 노래이므로 찬불(讚佛)의 성격이 짙은
소망가(所望歌) 또는 소원가(所願歌)인 “바람노래”로 보아야 한다.
6. 1. 2. 4. 극락 가 살고픈 노래[원왕생가(願往生歌)]
이 작품에 관하여는 『삼국유사』권 5, 「감통(感通)」제7, “광덕 엄장(廣德嚴莊)”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과 함께 실려
있다
문무왕(文武王) 때에 스님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인데, 두 사 람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기를, (“먼저 극락으로 돌아가는 이는 반드시 서로 알리 자.”고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芬皇寺) 서쪽 마을 “혹은
황룡사에 서거방이 있다고 하므로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는 원주가 있음.) 에 숨어 살며 신 삼기를 업으로
하면서 처자와 함께 살았으며,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크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루는 해 그림자가 붉게 노을 지고 솔 그늘이 조용히 저무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들 렸다.
“아무개는 이미 극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지내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라고 알렸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서 살펴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밝은 빛 이 땅에까지 드리워 있었다.
이튿날 엄장이 광덕이 살던 집을 찾아가니, 광덕이 과연 죽어 있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광덕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장례가 끝난 뒤 광덕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돌아갔으니,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하니, 광덕의 아내가 “좋습니다.”하여 마침내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밤에 자면서 관계하려 하니, 그 부인은 그를 밀치면서 말 하기를, “스님께서 정토(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하였다.
엄장이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하고 묻기를, “광덕은 이미 갔고, 당신과 나뿐인데 무엇을 꺼리시오?”하니, 광덕의
아내가 말하기를, “남편은 나와 10여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한 침상에서 자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고, 때로는 16관
(觀)을 지어 이미 관(觀)이 익숙하여졌을 때에 밝은 달빛이 창문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 을 타고 올라 가부좌(跏趺坐)
를 하고, 정성을 쏟음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에 가 지 아니하려 한들 어찌 가지 아니하겠습니까?
대체로 천리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지금 스님이 하는 짓은 동으로 가는 것
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다.(중략)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여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觀音菩薩) 19응신(應身) 가운데 하나이었 다. 광덕은 일찍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文武王代有沙門名廣德嚴莊二人友善日夕約曰先歸安養者須告之德隱居芬皇西里蒲鞋爲業挾妻子而居莊 庵栖南岳火
種力耕一日日影拖紅松陰靜暮窓外有聲報云某已西往矣惟君好住速從我來莊排闥而出顧之雲外 有天樂聲光明屬地明日
歸訪其居德果亡矣於是乃與其婦收骸同營蒿里旣事乃謂婦曰夫子逝矣偕處何如婦曰 可遂留夜將宿欲通焉婦蘄之曰師求
淨土可謂求魚緣木莊驚怪問曰德旣乃爾予又何妨婦曰夫子與我同居十餘 載未嘗一夕同床而枕況觸汚乎但每夜端身正坐
一聲念阿彌陀佛號或作十六觀觀旣熟明月入戶時昇其光跏趺 於上竭誠若此雖欲勿西奚往夫適千里者一步可規今師之觀
可去東矣西則未可知也莊愧赧而退(중략)其婦乃 芬皇寺之婢盖十九應身之一德嘗有歌云(하략).”
月下伊底亦 西方念丁 去賜里遣 달하! 이저여 서방 스져 가시리고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 “경주 말로 알린다는 말이다[鄕言云報言也]”라는 원주가 있음.
多可支 白遣賜立 무량수불 앞에 뇓곰다가리 삷고사리.
誓音深史隱 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 다짐 깊사온 존의게 우러리 두 손 모도골오 삷아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극락 가 살고파. 극락 가 살고파. 그릴 사람 있다 삷고사리.
阿邪 아라!
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이 몸 남겨 두고, 사십 팔 바람 일고사가.
(의역)
달님이시여! 이제야 서방 가까이 가십니까?
무량수불 앞에 알려드리러 여쭈오리.
다짐 깊사온 존의께 우러러 두 손 모으고서 사뢰어
극락 가 살고파. 극락 가 살고파. 그리는 이 있다 여쭈오리.
어라!
이 몸 남겨두고 48 큰 소망 이루실까?
먼저, 이 작품의 제목을 이제까지 한문 말 그대로 인정하여 “원왕생가(願往生歌)”라고 하거나, “가고파노래”(김선기)
라고 하였으나, 앞으로는 한자의 뜻과 음을 빌어서 표기한 온빈글말[完全借字語]로 보고, “극락 가 살고픈 노래
[願往生歌]”라고 풀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작품의 지은이는 이 작품이 광덕(廣德)스님의 아미타불을 염호(念號)하며 정성을 다하여 수행하면서 부른
염원가(念願歌)로 볼 때에 광덕(廣德)스님이 분명하다.
셋째, 이 작품이 지어진 연대는 엄장(嚴莊)스님이 광덕(廣德)스님의 부인으로 표현된 분황사(芬皇寺)의 여자 종에게
창피 당한 뒤 원효(元曉: 2950-3019, 617-686)스님을 찾아가 극락으로 가는 묘리(妙理)를 배워 극락왕생(極樂往生)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문무왕(文武王:재위 2994-3014, 661-681) 말년 이전으로 생각된다.
넷째, 이 작품의 주제는 신라인들의 불교 신앙심과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의 하나로,
극락에 가서 새 삶을 염원한 기원가(祈願歌)라고 하겠다.
길밭 최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