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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 여러 지체. 지난주 설교 제목하고 비슷하죠. 근데 말씀의 초점은 조금 다릅니다. 지난주에는 한 몸에 초점이 있었다면 오늘은 여러 지체 여럿에 더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이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해서 우리가 하는 신앙인 신앙생활이 정말로 기쁨과 즐거운 것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가운데 정말로 자기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 각 사람이 정말로 좋은 교회, 정말로 멋진 인생, 정말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 인생을 위해 가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듣고 기억할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1장 12장 1절 2절은 많이 듣고 기억할 텐데 우리 3절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하롭게 생각하라
한 절인데 꽤 길지 요점은 우리가 해야 할 생각이 있고 또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지 말라고 하는 생각은 자유로운 생각, 창의적인 생각, 건설적인 생각, 지혜로운 생각, 탐구하는 생각, 또 이해하려는 생각, 그런 것들이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그런 것들을 허락하시고 좋아하시고 또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생각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죠. 잘못된 길로 멸망의 길로 가는 생각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어요. 그러나 죄가 마음을 다스리는 경우처럼 생각도 바르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이 있지 않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가 다스리게 된다면 아무리 생각을 해도 바르게 할 수 없다 하는 것이죠. 또한 회개하고 용서받고 이제 마음이 새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생각하여 판단할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은혜 없이 계속 밀고 간다면 그것을 계속 고집한다면 생각할수록 정답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 있다.
어느 주일에 제가 이제 작은 볼리를 불러 이상한 얘기죠. 화장실을 이제 갔어요. 저 뒤에 있는 맨 끝에 있는 작은 화장실인데 그때 그 냄새가 조금 심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나올 때 보니까 우리 학생 중 한 명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때도 아직 냄새가 심했습니다. 냄새가 날 수 있죠. 화장실이니까. 그런데 조금 심했다는 거죠. 그렇다고 제가 그 학생을 보고 내가 만든 거 아니야 뭐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냥 어색함 속에서 서로 인사하고 지나갔는데 이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의 마음에 어떤 인상이 남게 되었을지는 이제 궁금했다 하는 것이죠.
교회 일도 그렇습니다. 담임 목사나 이 당회가 다 아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또 많은 것을 모두에게 다 알려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개인이나 가정의 일은 더더욱 그런 거죠. 안다고 해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다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도 교회에 속한 각 성도들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 그 위치나 영역을 넘어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지식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거기가 거기에 우리가 안전하고 또 건강하게 진행할 수 있는 길이 있고요. 그것이 바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에 요점이 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말씀에서 주십니다. 4절과 5절인데 우리가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주체들을 가졌으나 모든 주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물이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교회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면서 동시에 여러 주체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전한 말씀과 겹쳐지는 부분이지만 오늘은 방금 읽었던 앞에서 읽었던 3절 말씀에 이어서 우리가 교회와 서로에 대해서 생각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받는 것이에요.
곧 우리가 어떤 생각은 해야 하고 또 어떤 생각은 하지 말아 해야 하는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듯이 우리가 한몸이고 여러 지체이기 때문에 여러 지체가 한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는 것이 우리는 모두 다 지금 보니까 다 한국 사람이에요. 민족적으로 외국군이 없죠. 소리예 다행이네요. 그리고 또 한국어를 사용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된 것은 그러한 민족이나 국적이나 언어 그 외에 다른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하시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와 서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 가정도 있어요.
또 우리 교회도 있어요. 또 심지어는 우리 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온 세상의 주대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가장 건강한 우리가 된다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된 사람들입니다. 서로 지체가 되었다. 이 말씀에는 상호 의존 한다 하는 귀한 뜻이 담겨 있어요. 상호 의존을 한다. 인터 디펜던트 한다는 귀한 뜻이 담겨 있고 그러한 상호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교회와 성도, 교회와 성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것이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관계라는 것하고 존재라는 것 관계하고 존재를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내가 고정된 정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이미 바뀔 수 없는 고정된 존재 정체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래서 그렇게 고정된 사람들이 만나고 부딪히는 것이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많은 경우 그렇게 생각하죠. 이거는 성경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헬라 철학의 영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생각이 이렇습니다. 내가 있고 그다음에 그다음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삼위일체를 통해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에요. 오늘 설교와 연결된 부분만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까? 머리로 아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알고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스스로를 그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 역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그의 사람들과 맺으신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보여준 모든 일과 말과 관계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칭하는 이름 등에 하나님의 아들 주 그리스도가 있죠. 이것들은 모두 다 관계 언어예요.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 하나님의 경우는 관계라는 것, 이것은 존재의 뒤따르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드러낸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고 그리고 심지어는 구성한다고까지 어렵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사람에게 적용해서 생각하면 좀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사람인 것은 그의 존재와 그의 정체 아이덴터치와 그의 밍에 대의 일부예요. 베드로가 남자라는 것 사람이라는 것 유대인이라는 것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의 일부가 됩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의 전부는 그가 한 일, 그가 한 말, 그가 맺는 모든 관계에서 드러나고 세워진다는 것이죠. 그와 같이 우리가 맞는 모든 관계 그것이 좋은 관계일 수도 있고 나쁜 관계일 수도 있어요. 기쁜 관계일 수도 있고 불행한 관계일 수도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정체 우리가 누구인지를 또 알려주고 세워주는 중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관계는 존재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고 존재 내가 누구인지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세워주는 중요한 것이라고 이해를 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이거를 우리가 교회에 적용해 보면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근데 모였다가 흩어지는 머리 달린 모래들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히려 바다나 호수처럼 들어오는 물에 따라서 모양이 바뀌고 결정되는 그렇게 귀한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이 들어오고 한 사람이 떠나는 것 이거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 교회가 과연 무엇인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가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그것들이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의인이 있죠. 악인이 있죠.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 교만한 사람이 있고 겸손한 사람이 있는데 이것들은 그냥 단순히 윤리적인 말이 아니고 그 사람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알려주는 말이죠.
그러나 동시에 이 말들은 오직 관계 안에서만 사용될 고 이해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가 중요하고 그만큼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한데 여기에서 사람의 관계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죠.
그래서 내가 정말 누구인지 그 사람이 정말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은데 그것은 내가 그가 할 것이 아니고 모든 상황을 아시고 모든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 이것이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 이제 확실하게 알려주는 사랑이라 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 각 사람의 존재의 근거는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내가 한 일, 내가 하지 못한 일,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사시고 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은혜 안에 있다. 저의 존재의 근거가 또 여러분의 존재 근거가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믿으세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존재의 근거도 있다면 존재의 방향도 있어야 돼요. 우리가 구원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고, 또 역사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을 때와 같은 논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 아니라 실존한다는 말을 쓰기도 하죠. 사랑받고 용서받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질 마음과 생각, 말과 행실이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에도 역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있고 그래서 해야 할 생각이 있다. 그래서 3절 말씀에서 각 사람은 마땅히 생각할 바 그 이상을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것을 반복할 수 있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끝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또한 은혜로 주어진 은사를 그 주어진 뜻에 맞게 사용을 합니다. 은사라고 말했는데 은사 다 아시죠? 이 은사라는 말은 성경의 용어입니다. 아마도 성경에서만 표현된 말이 쓰이는 말이에요. 은사 그리고 가리키는 바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도 있고 특정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나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면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전도자 능력 행하는 자, 치유하는 자, 박언하는 자, 통역하는 거 이런 것들이 특별한 의사가 있어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언 이거는 이 에언은 미래에 대해서 꼭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시대를 보고 정확하게 말하는 설교와 같은 것도 포함합니다.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것, 구제하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 이런 것들은 성도라면 누구에게나가 적용될 수 있는 좋은 것들인데 이것 역시 은사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머리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자들이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함께 함께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 볼 것은 모든 은사들의 공통적으로 속하는 은사의 본질 과연 은사가 본질적으로 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은사는 사람 안에 잠재하거나 내재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재능이다. 능력이라고 부릅니다.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은사는 안에서 나온다기보다도 밖에서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사용될 때에 가장 잘 사용되는 의미가 제일 좋다. 참 의미를 갖는다 하는 것이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아는 재능이 있죠. 재물이 있죠. 지식이 있어요. 능력이 있어요. 언변이 있고 또 성품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닌 그것들 자체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무엇이든지 그것 자체 그들이 모여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것처럼 이런 은사들도 바르게 제대로 사용될 때 교회가 세워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될 때 그렇게 됩니다. 한 주석가의 말로 말하자면 은사라는 것은 개인이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공동체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일어나는 활동들이고 공동체가 번성하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은사 사용이 꼭 있어야 돼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고 공동체로부터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살아있는 몸보다 좀 더 큰 의미인 것 같아요.
이렇게 모이는 사람들 안에서 정말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활동들이다. 은사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는데 맞다고 봅니다. 은사가 정말로 중요해요.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적더라도 정말 은사가 적더라도 제대로 사용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해야 할 생각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모두에게 동일한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모두에게 똑같은 거를 주시지 않고 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다른 은사들을 주셨어요.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말로 귀한 것이고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것들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어진 은사가 있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적어도 하나씩은 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더 많이도 있을 것이에요.
은사가 있죠. 그것이 무엇이든지 발견하기를 바라고 그리고 감사하면서 잘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교회만을 위해서 사용될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 사용될 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정말로 귀하게 역사할 것이 되는 것이에요.
동시에 그렇게 하면서 다른 지체들 지체라고 말하는데 다른 지체들 형제 자매를 귀하게 여기고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신과 서로 자신과 우리 교회를 그렇게 돌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명히 기뻐하시고 성령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대로 우리를 세워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