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살이를 '멋즐마사' 라고 줄여서 말한다.
이 세상은 멋즐마사의 세상 인 것이다. '멋즐마사' 란 '멋지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운'을 줄여서 부르는 줄임말(abbreviation)이다.
60대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평생을 이 네 단어에 부합하는 삶을 찿아 발버둥을 치며 일희일비 하며 그렇게 유치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자책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누구라도 이 '멋즐마사'의 삶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인간의 삶에서는 치명적인 중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술, 마약. 도박 등등..... 문득 길을 잘못 든 순간에 저런 치명적인 중독에 빠져 삶을 나락으로 보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감각하게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받아드리는 두가지 중독이 있는데 하나는 '돈'이며 다른 하나가 이 '멋즐마사'주의(MZMSnism 이라고 하자) 이다.
현대 인간문명은 인간의 욕탐에 바탕를 두고 이를 부추기고 지향하는 문명이다. 고상하게 불러서 자본주의 라고 하지만, 이러한 중독적 삶의 방식을 모두가 받아 들였기에 인간의 문명은 결국 파멸 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건드린 이 자연으로부터의 파국 뿐 아니라 인간문명이 만들어 낸 기계주의와 AI기술이 결합한 통제불가의 생태계가 덮치면 호모사피엔스 인간세계는 언젠가 종말을 고한다.
거창한 세계관은 집어 치우고 개개인의 삶을 돌아보자. 무의식적인 불안과 뭔가 채워지지 않는 심적인 허기의 반복은 왜 일까? 이를 극복하고자 수천년을 통해 발전시킨 종교는 또 뭔가? 인간을 구원 할 것 같았던 그 종교들이 쉬임없이 전쟁을 야기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오히려 무지를 덮는 정신적 폭력의 지배를 강요하고 있음이다. 종교가 시스템화 되면 또 다른 폭력세력이 된다. 대표적으로 이러한 억압적 종교의 폭력에 맞서 싸우던 예수는 그 사회로 부터 제거되고 아이러니하게 또 다른 종교시스템의 키워드로 세상은 예수를 부활 시켰다.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있을까?
'멋즐마사'에 젖어든 호모사피엔스 인간은 이를 향한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부추기며 이를 성취한 삶을 세상살이의 성공으로 규정했다.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우울하고 절망한다. 멋지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것을 '갈애' 라고 부른다. 이 '갈애'의 탄생은 인간의 심의식에 내재된 탐진치에 기인 하는데 실은 치(痴)의 기여가 막강하다. 갈애가 찾아낸 즐길거리를 마음에 제공하게 되면 이를 일러서 분별작용(識)이라고 부른다. 거기서 식(識)이 세상이라고 받아드리는 모든 개념들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인생살이의 중독은 시작 된 것이다. 'Welcome to the World'.
갈애에 빠진 인간의 삶에는 희망이 없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이런 사실조차 모르며 무지 속에서 삶을 마친다. 성경에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지향하는 삶에 대한 경고의 문구가 있질 않은가?
약 3천년전에 이미 붓다는 통찰했다.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성자의 율에서는 이를 일러 가시라 한다." 라고. 기독교 성경에도 '가시'가 나온다. 사람들을 옥죄고 삶의 성장과 자유를 막는 장애로써.
붓다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5가지 종류의 욕락들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五慾樂 이란 어떠한 것인가? 멋지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운 眼識된 色들, 耳識된 聲들, 鼻識된 香들, 舌識된 味들, 身識된 触들이다."
내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는 이러한 인간의 정황을 정확히 지적하고 이 절망스런 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도에 대한 정확한 제시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모든 경험이 멋지지 않고, 즐겁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아도, 이 삶을 '있는 그대로 봄'이 시작 될 때 비로소 이 삶으로 태어난 이후 진정으로 삶에서 자유로운 그 차원을 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고백 할 것이다. "나는 不死를 성취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