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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단이 포항지구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들을 투입할 수 밖에 없던 것은 이미 8월에 들어서서 사단 전력 자체가 완벽하게 궤멸 수준까지 떨어졌기 때문임.
8월 11일, 대구에서 긴급히 제26보병연대를 2일 만에 창설하고, 일주일 만에 전선에 투입했던 것 역시 한 몫을 했는데 KMAG에서는 3사단의 전력이 사실상 고갈되었다고 언급하였음.
'...For example, the ROK 3d and 8th Divisions consisted of two regiments apiece, and the Capital Division had been largely a “paper” division...'
즉 명부상 있는 사단이고, 실제 전력은 완전히 고갈된 상태. 2개 연대만 남은 3사단은 동해안 축선의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었는데, 원래 이들은 7월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군 내에서 제대로 편제를 유지하고 있던 몇 안되는 부대였음.
그러나 26연대를 창설할 즈음 3사단에게 남은 병력은 2,000명 미만이었고, 그나마 병력이 많이 남아있다던 23연대도1개 대대 900여 명 만이 잔존했을 정도였음.
이미 이들은 북한군의 대공세를 맞이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한 상태였다는 것임. 그래서 대구에서 급히 2,000명의 신병을 소집해서 3사단을 보조하도록 하였는데, 2일 만에 창설해서 1주일 동안 딱 9발의 소총탄을 쏘아보는 훈련만 했던 연대가 어떤 전투력을 발휘해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음. 다만, 예비대가 없었던 3사단에게는 아쉬운대로 써야하는 상황에 직면한 셈.
이미 8월 9일부터 북한군 제5사단이 포항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고, 2천 미만의 3사단 병력으로는 이들을 저지할 수 없었던 상태임. 그나마 미 해군의 함포지원사격과 항공지원으로 어느정도 진격을 둔화시킬 수 있었으나, 8월 11일 북한군의 신규부대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3사단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것.
그래서 부랴부랴 신편연대를 창설하고 1주일 만에 포항 지구 전투에 투입했는데 이미 유명한 71명의 학도병들은 26연대가 창설되던 날 궤멸당했고, 김석원 준장은 급히 참모장 공국진 중령을 불러 예비대를 호출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절망적이었음.
아예 사단에 남은 예비대가 없었다는 것임. 남은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의 병력과 75mm 팩 하위쳐 2개 포대 뿐이었고 처절한 전투 끝에 겨우 철수해서 8월 17일에 전열을 어느정도 보강할 수 있었음.
26연대가 창설되어 이성가 장군이 지휘하는 포항지구 전투사령부에 참가하였고, 피해를 크게 입은 22연대와 23연대는 각각 독립 2대대와 부산에서 때마침 도착한 500명의 신병 및 영등포 학원 소속 장병 400여 명을 각각 흡수하여 2,000여 명의 병력을 다시 갖출 수 있었음.
26연대까지 3사단에 들어오면서 3사단은 일시적으로 6,0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는데 이는 3사단이 7월부터 보유했던 병력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할 정도로 인력 확보를 꽤 해둔 상태였음.
그러나 8월 말부터 이어진 포항 일대에서의 북한군과의 처절한 소모전은, 김석원 장군 후임으로 3사단장이 된 이종찬 대령의 한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음.
이종찬 대령이 부임한 9월 1일, 3사단이 보유한 병력은 1,000여 명까지 떨어졌고 잠시 수도사단으로 파견되어있던 26연대도 궤멸적인 타격을 받으며 거의 모든 3사단 예하 연대의 병력이 고갈되어버린 것임. 8월 17~18일 사이에 보충된 병력 대부분이 소멸된 것.
게다가 사단장 김석원과 참모장 공국진 중령이 모두 심한 와병을 하던 중이라 이종찬 대령과 정내현 중령이 대리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미 이 즈음에는 3사단의 전력이 심각하게 깎여버린 상황이었음.
물론 이종찬 대령도 만만찮은 사람인지라 부산에서 신병 자원들을 있는대로 긁어왔지만, 증언을 보면 '매일 200~300명의 신병을 부산에서 받아 야간에 배치했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거의 다 죽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피해가 심대했음.
급하게 8사단 예하 10연대까지 긁어와서 버티기는 했는데, 1군단에서 이들을 원대 복귀시키라고 하는 통에 급히 재편 중이던 22연대를 교대시키다가 피해를 보는 등 3사단 방면은 7월부터 9월 반격기 직전까지 처참하기 그지없었던 셈임.
물론 북한군도 3사단의 저항이 심각하니 당황하긴 함. 안강 전투에서 궤멸당한 26연대가 9월 15일, 3개 대대 완편 전력을 갖추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오는 등 반격을 가하자 심각하게 동요하기도 했음.
분명 거의 죽기 직전까지 때렸는데 어디서 병력들이 나오냐며 경악했다는 것인데, 이정도로 싸우다보니 3사단 장병들은 형산강이 피아의 시체가 가득 쌓였다며 울분을 토하기도 함.
8월 말 6천의 병력이 9월 초 1천명까지 떨어진 것을 보면 3사단의 피해는 1사단 이상으로 심하게 본 셈임. 1사단 역시 다부동에서 사단 병력의 90%가 교체되어가며 싸웠는데 3사단은 그 이상으로 피해를 입었던 셈임.
26연대에 소속되었던 학도병들도 거의 전사했고, 22연대와 23연대는 말로 이루다할 수 없는 끔찍한 손실에 직면하며 그야말로 피와 시체로 적을 막아냈던 것. 매일 같이 연대당 2~300명의 신병이 충원되었음에도 1천 명까지 사단 병력이 떨어진거면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죽어나갔는지 감도 안잡힘.
미8군도 당시에는 예비대가 없어서 곤욕이었는데 한국군이면 오죽하겠냐만은...
출처
韓國戰爭史, 육군본부
민족의 증언
KMAG IN PEACE AND WAR, Robert K. Saw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