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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
마태복음5:38~42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요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가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방한하자 온 매스컴에서 연일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녀의 뛰어난 외모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훤칠한 키와 날씬한 몸매를 지닌 모델 출신의 그녀는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우월한 외모를 자랑했습니다. 타고나면서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이제는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 딸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그녀는 좋은 유전자와 좋은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후천적으로 그런 모든 여건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하여도 쉽사리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살펴보아도 태어나길 잘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지능도 모태로부터 형성되고, 성품도 외모도 모두 어머니의 태중에서 결정됩니다. 탁월한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는 아버지의 씨를 통하여 어머니 모태에서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면서 일평생을 좌우할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사는 것은 잠깐입니다. 한 점의 시간을 살다가 내 인생을 마칩니다. 우리는 흔히들 생각하기를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아 천국에 이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천국에 가면 된다고요? 맞습니다만 이것을 반쪽짜리 정답입니다. 구원을 받되 하나님나라에서 누림은 천차만별입니다. 해와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들의 영광이 모두가 다른 것처럼 하나님나라에 이르게 되면 받을 상급과 누림의 차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차이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잠깐의 누림 보다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입게 될 나의 모습이 어떨 것이냐에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을 살게 되는데 그 생명체의 근간(根幹)은 이 땅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된 영혼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참 간단하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DNA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온 우주만물에서 가장 뛰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DNA가 녹아져 있는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내 안에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그 분을 믿는 자를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유전인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내 영혼이 잘 되는 비결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내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되는지를 아주 유머러스((humorous)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8절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나타난 동해(同害) 복수법을 말합니다. 누가 내 눈을 쳐서 내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몇날 며칠을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똑같이 상대방에게 상해를 가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 내 팔뚝을 물어뜯어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면 그와 똑같이 상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섹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 나오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서 빌린 돈 3천 다켓을 갚지 못하여서 차용증서대로 1파운드의 살점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럴 때 명판결이 등장합니다. ‘이 증서엔 원고에게 피를 준다는 말은 없다. 분명 살 1파운드만 취한다고 쓰여 있다. 증서대로 1파운드의 살을 취하되 잘라낼 때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원고의 땅과 재산은 베니스 법에 따라 국가에 귀속될 것이다. 머리털 한 올 차에 저울이 흔들려도 원고는 사형이며 전 재산은 몰수당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합니까?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도려낼 수 있으며 한번 칼을 대고 정확하게 1파운드의 살을 도려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율법을 왜 인간에게 주어서 지키라고 하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사람으로 지킬 수 없는 것이 율법이라면 그 율법을 통하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은 정죄의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닌 은혜도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 완성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도록 율법을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율법은 알고 있는데 십자가를 놓치면 그 사람은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내 임의 대로 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십자가가 내 앞에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것이 십자가로구나하고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내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벧전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하였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할 때 주님의 십자가로 극복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십자가 적용입니다.
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뺨을 때리는 것은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게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오른뺨을 때리려면 어떤 손을 써야 할까요? 당연히 외손을 사용하였겠지요. 그러면 때리는 사람이 왜 왼손으로 때릴까요? 불편한데. ‘오른뺨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상대방이 ‘오른손 등’으로 때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한 뺨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율법으로 적용하여 봅시다. 나의 오른 뺨을 상대방이 오른 손등으로 나를 치면서 모욕을 하였습니다. 순간 내 마음에 수치심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씩씩대며 숨을 고르면서도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왼편도 돌려 대라고 했다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상대에게 왼뺨을 들이대며 “여기도 때리세요!”그랬다면 상대는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아마 더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뭐 이런 개 같은 놈이 다 있어!”하면서 몸을 밀쳐 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상대방의 약을 잔뜩 올려놓고 나 역시 분은 풀리지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봐! 난 말씀을 순종했잖아”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면 이런 사람을 우리는 세상말로 “뭐 이런 또라이 같은 놈이 다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런 모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안에는 죄로 얼룩진 오염된 마음을 지니면서 나름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위로하고 스스로 의인인체 하는 위선자들 말입니다.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하면 율법의 무게에 나는 물론 상대방도 넘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적용해야 합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피조물인 인간에 의하여 수염이 뜯겨지고 채찍에 맞으시며 수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오직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당하는 이 모욕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삶에 드리우고 적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때 어떤 현상이 생기겠습니까? 당연히 초연해지지 않겠습니까? 나는 나의 죄로 인하여 이 수치와 모욕을 달게 받겠다고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이 내 왼뺨마저 때리겠다고 덤벼 든다 하더라도 나는 잠잠히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 서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이처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십자가를 적용하면 내 안에 평강이 오고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생명 안에 들어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당할 때 십자가의 적용입니다.
40절에서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통으로 짠 속옷과 길이가 약 2미터 폭이 약 1미터 쯤 되는 모포형의 ‘히마티온’ 이라는 겉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속옷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지고 있던 옷이고, 겉옷은 낮에는 옷으로 걸치고, 밤에는 모포처럼 깔고 자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속옷은 빚값으로 빼앗아도 되지만, 겉옷은 빼앗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6~27절에 보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즉 겉옷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권리, 마치 집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듯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전제는 ‘너를 고발하여’ 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당한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법정에 고발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속옷이라도 취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법정에 서게 되면 상대방의 아픔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내게 왜 이런 고통이 임할까를 생각하며 나를 고소함 사람에게 미움마저 듭니다. 이런 미움이 자기의 잘못은 전혀 보지 못하는 가름막 구실을 합니다.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회개함도 없습니다. 마귀의 책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의 죄에 대하여 전혀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지옥이라는 곳에서 외치는 말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내게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라는 외침이랍니다. 세상에서 수없이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어졌건만 그를 이행하지 않고 지옥에 떨어져서 그렇게 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고발하는 자가 내 속옷을 달라고 하면 예수님께서는 겉옷까지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이 꽤 야멸차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오죽 하면 속옷을 빼앗기는데 거기에 최소한 겉옷은 지켜야 되지 않겠냐는 하소연마저 거부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은 나의 가난하고 연약한 것 때문에 자신을 변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출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것이 죄가 아닙니다. 이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적용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겉옷 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다 빼앗기셨습니다. 그런 주님이 내 겉옷까지 빼앗기는 처지에 놓여있는 내게 은혜를 베풀지 않겠습니까?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빼앗겼을 때 얼마나 자신이 한심하고 가련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십자가를 내 삶에 드리워 보십시오! 나는 나의 허물로 말미암아 속옷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만왕의 왕께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빼앗기셨습니다. 부요하신 주님도 그런 아픔을 겪으셨음을 바라보게 되면 소망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내 것이 다 잃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신 주님은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리라는 소망이 생기고 담대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담대한 소망을 안겨 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싫은 일을 억지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십자가의 적용입니다.
41절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역시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지쳐서 십자가를 질 힘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로마병정 중의 하나가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지라고 합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재수 없는 일인가요?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창을 들이대고 가자고 하면 가야 합니다. 짐을 운반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일들을 역사의 흐름에서 수도 없이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부도덕하여 행실이 나쁜 여자들을 향하여 ‘환향년’ 이라는 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의미를 알고 나면 참 슬픈 사연이 숨겨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을 환향녀라 불렀는데 대부분 정조를 잃고 돌아온 여인입니다. 나라의 힘이 약하여 억지로 끌려가서 강제로 정절을 짓밟혔습니다. 그런 고통을 안고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반기는 사람 없이 가족과 친지들까지도 받아들이기를 기피하고 천시하였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몸을 더럽히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까요? 부들부들 떨며 자기에게 괴롬을 주었던 사람을 원망하고 미움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치욕스럽게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누군가 힘을 가지고 우리를 누르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할 때, 십 리를 가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힘으로 도저히 이기지 못하는 폭력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도 십자가를 드리울 것을 말씀합니다. 오리를 갔는데 십리인들 못 가겠냐는 의미는 예수님도 당하셨는데 나인들 감당치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강압적으로 끌려가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을 맞으시고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 분께 나가 나의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 십자가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마라의 쓴물에 나뭇가지를 던졌더니 물이 변하여 달게 변한 것처럼 말입니다.
42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 내 것도 없습니다. 내게 달라는 자에게 주는 것이 십자가를 적용하는 삶입니다. 내 것을 주고 빼앗겨 남은 것은 없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현재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잃었는데 정작 돌아보니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했습니다.
이제까지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쉽지 않나요? 내게 주어진 환경에 십자가를 드리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내 것을 버리고 순종하는 자세만 있으면 됩니다.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사랑한다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내 것이 부서지고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 올 때 우리는 주의 계명이 내 안에서 이뤄져 하늘의 아름다운 생명체로 변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