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이 소리를 한다. 귀가 열리고 발이 움직인다. 연주자의 눈이 손으로, 울림이 된다. 만인의 눈이 집중된다. 잠시 더, 희미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그리고 현을 튀는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유명 록밴드 공연.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도보다리 산책을 기획한 분입니다.’ 검정 슈트 차림의 깡마른 그가 남악 도청 왕인실 단상에 오른다. TV에서 보다 잘 생겼다는 말이 들린다. ‘오월의 작약 꽃 선물, 환영 박수, 이렇게 현란한 소개를 받기는 처음입니다.’ 대한민국 행사기획 일인자, 탁현민 자문관의 인사다.
‘너무 어둡게 하지 마십시오. 국민의례 곡이 민요조네요. 보훈처에서 알면 난리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도 좋네요. 강의는 오랜 만입니다. 혼자 얘기하고 객석에선 들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압니다.’로 시작한다. 2017년 6월 어쩌다 공무원이 된 첫 출근 일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께 줄 선물을 선정하는 회의였다. 순방 때 전달하는 비공개 선물인데도 쓸 때 없는 회의를 하는구나 생각했다. 한국공예진흥원에서 개최된 ㅁ자 테이블에 앉자마자, 이런 회의는 이 정부가 존재하는 한 이번으로 끝날 것입니다 라고 했다. 한 30분 정도면 되겠지 했던 게, 두 시간이 걸렸다. 마무리는 죄송합니다, 한번 더 만나야겠습니다가 되었다. 상대의 취미, 성격, 관습 등 외교적 결례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각종 검토가 많기도 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그냥 있는 분들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공무원은 상상력이 없다 한다. 사실이다. 그렇지만 시킨 일은 잘한다. 학교로 치면 모범생이기 때문이다. 직장을 얻기 전까지 공부만 하다 보니 여유가 없었고, 지금도 바쁘게만 살고 있다. 상상력의 원천이 생길 수 있는 노는 시간이 없다. 내가 청와대를 나온 이유도 같다. 갖고 있던 카드를 다 쓰고 나니 상상의 한계가 왔다. 나는 쇼 피디부터 출발했다. 보여주는 행위, 전시성 행사 자체를 기획했었다. 직접 만나진 못해도 대면 효과가 나게, 인연이 관계가 되고 호감을 갖게 하는 일을 했다. 만약 저녁 시간에 이층에서 애가 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참아야겠지만,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화를 내지 말고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라. 설사 또 뛴다 해도 덜 밉게 된다. 내가 아는 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순간에 감동을 주고받게 된다. 일도 마찬가지다. 기억하게 하고, 감동하는 욕구를 만들어야 한다.
행사의 성패는 장소가 절반을 좌우한다. 과거 정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많이 했다. 보안상의 이유다. ‘앞으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곳에서 합시다.’라는 말씀이 고민을 하게 했다. 새로운 것이 만들어 지더라. 현충일 기념식을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했다. 정부 수립이후 딱 한번 있었다며 반대가 심했다. 그럼 두 번째가 되겠네요라 답하고 무작정 현장으로 갔다. 처음엔 막막했다. 그때 한 비문이 보였다. 김기억 중사, 1931년 생, 1951년 강원도 양구에서 졸, 조화가 놓인걸 보니 무연고였다. 돌보던 가족이 끊긴 것이다. 무엇이 스무 살 그를 죽게 했을까?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컨셉으로 치른 2018년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이다. 2017년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은 오희옥 애국지사의 애국가 선창으로 시작했다. 올드랭사인 곡에 가사를 붙인 당시 그대로 불렀다. 순서를 바꿀 순 없어도 다르게 감동을 표현했던 방법이다.
컨셉은 반 이상이 현장에서 나온다. 나머지 반은 글이다. 비주얼 보다는 타이틀을 고민한다. 텍스트를 먼저 뽑은 후에 상상을 더한다. 영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감동은 거기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정된 모든 일은 연출자의 책임이다. 리스크가 있어도 할 것은 한다. 직업 공무원과의 차이다. 진정성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표현하느냐는 것도 중요하다.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산책에서 알게 된 진정성은 통역이 필요 없다는 거였다. 가장 쉬운 거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갈대와 새소리가 함께 한 파랑 색깔은 내가 창출한 것이 아니라 유엔 깃발과 같은 색이었는데도, 그 조화에 대해 천재 아니면 바보가 꾸민 거라는 말이 오갔다. 기획을 하다보면 이렇게 의도하지 않게 해석되어지는 것도 있다. 늘 신경을 써야 한다. 하나의 행사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본질, 장소, 선택이 만든 프로그램에는 이유, 목적, 의도와 결과가 들어간다. 상징은 아이콘, 심벌, 로고, 인물, 사건, 음악, 연설이 될 수 있겠지만 주제, 키 메시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담겨야한다. 한마디로 연출은 시대가 그리워 하는 것을 정직하게 표현해 내는 일이다.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처음보다 나은 두 번째는 없다. 쓸모와 쓰임의 차이다.
생각이 깊은 감동을 어떻게 만들어 전달할 것인가를 90여분 동안 마치 모노드라마처럼 차분하게 펼쳐냈다. 우리 대통령은 문자 중독증이 있다며, 행사의 시나리오를 다 읽어 보신다고도 했다. 소방의 날 현충탑 앞에서 초등생 유가족의 손을 잡고서 ‘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아느냐?’ 위로했다는 말을 하다가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에이 미쳤나봐.’라며 뒤로 돌아 눈시울을 훔쳐낸다. 정이 많은 남자다. 좀 유별난 우리의 내빈 소개 행태도 꼬집었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한꺼번에 해 보고 영상으로도 해 보았지만 그렇게 행사장을 지치게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아직까진 답이 없다 한다.
그의 진정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무한한 믿음을 보낸다. 의심과 질책은 하지 않겠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건강한 생각을 만들고 아름답게 펼쳐 내길 바란다. 그리고 세계적인 BTS 공연이 F1 경주장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기획을 해보면 좋겠다. 밤하늘의 별빛을 이고서 밴드와 노래, F1 머신이 숨 가쁘게 달리며 때리는 심장의 고동을 10만, 20만 관객과 함께 느끼는 상상력을 펼쳐보라는 거다. 허황된 꿈인가? 그의 열정이 옷을 만들고 날개를 달아 날게 하는 그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