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는 말이 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면 곧바로 표출하지 말고 그 타이밍을 지혜롭게 넘기면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맞는 말이다. 분노는 객기(客氣)다. 객기는 부리고 나면 반드시 후회를 낳는다. 요즘 들어 대한민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객기를 부리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도 다양하다. 객기는 지위고하와 지역에 상관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객기의 사연도 천태만태다. 뉴스의 대부분은 객기를 다룰 정도다. 이 정도면 참을 인 자 셋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다. 참는 방법으로 해결 할 단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우리는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분노에 묻혀 살아가야 하는가? 분노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가? 분노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객기(客氣)의 대비 개념은 정기(精氣)다. 객기는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손님의 기운이라면 정기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주인의 기운이다. 분노의 시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객기에서 정기로 터닝하는 길이다. 정기는 얼이다. 얼이 살아 있으면 객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얼이 빠져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중심을 잃었을 때 객기는 난동의 역할을 수행한다.
정기는 집단의 정체성이다. 집단의 구성원들을 한곳으로 묶어 주는 기준이 살아 있으면 객기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구성원들이 혼란한 틈을 보이면 객기는 즉각 이간질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이를 채운다. 정기는 질서다. 개체와 전체는 유기체다. 개체와 전체 사이에 질서가 서 있으면 객기는 힘을 쓰지 못한다. 개체와 전체 사이에 신뢰를 잃으면 객기는 부정부패의 양분을 먹고 전사의 역할을 다한다. 주인이 주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손님이 끼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주인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주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비로소 주인으로 인정받는다. 집에 손님을 초대했을 때 손님에게 청소하라, 음식해라, 술 사와라 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주인의 몫이다. 주인은 손님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수고를 아끼려 잔머리를 많이 쓸수록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서 멀어진다. 사과농장 주인은 벌레 먹은 사과도 맛있게 먹는다. 좋은 사과는 마땅히 손님의 몫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다. 주인은 손님에게 무엇을 줄지 잘 아는 사람이다. 주인은 이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면 먼저 사과한다. 사람의 도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손님은 이런 상황에서 핑계거리를 먼저 찾는다. 핑계거리에 밝은 사람은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 주인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철칙을 잘 안다. 주인은 자신의 강점을 살려 먹고 살지만, 손님은 주인의 약점을 이용하려 파고든다. 주인의 길과 손님의 길은 이렇듯 다르다. 분노사회는 주객전도의 사회다. 분노현상은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사회구조의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다. 이 경종의 소리를 듣고 그 축을 터닝하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위험사회에서는 정상적인 말도 거꾸로 듣기 때문이다.
화폐감별사는 위조화폐를 보지 않는다. 가짜화폐를 접하다 보면 진짜화폐를 보는 감각을 잃을까 염려해서다. 탁월한 감별사일수록 진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훌륭한 의사는 증후군을 많이 알려고 하기보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몸에 더 밝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삶, 건강한 삶, 아름다운 삶, 닮아가고 싶은 삶, 행복한 삶의 기준에 밝아야 한다. 그 기준은 정기(精氣)이며 주인이다.
교육은 다름이 아니라 정기를 가르치고 배우고 깨달아서 주인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육은 그 본연의 길을 망각하고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간에 삶의 기준을 터닝하는 유일한 희망은 교육일 수밖에 없다. 변화의 성공은 외부의 물리적인 혁명보다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터닝의 성패는 교육을 통한 인식의 전환여부에 달려 있다.
정기(精氣)를 살리기 위한 우리 교육의 터닝 1호는 지식과 기술 중심에서 인성과 소통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스마트 시대에서 지식의 습득과 기술의 연마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 힘이 아니다. 미래의 경쟁력은 이미 공유된 지식과 기술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가치를 창출하는가에 달려 있다. 똑같은 책 한 줄을 가지고도 누가, 어디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는 천지차이가 난다. 동일한 기종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더라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값어치는 천태만상이다.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 인성과 소통이다.
터닝 2호는 교수법의 전환이다. 인성과 소통 중심의 교육은 피드백교수법이 적합하다. 피드백교수법이란 교사가 교육목적에 맞는 백지발문을 던져 주면 학생들은 각자 그 백지를 채우고 교사와 학생이 함께 피드백을 주고받는 쌍방향학습법이다. 인성과 소통능력은 밖에서 주입시켜서 길러지지 않는다. 내 안에 있는 긍정의 에너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사용해 봄으로써 개발되는 영역이다.
터닝 3호는 평가방식을 도구평가에서 목적평가로 전환하는 것이다. 기존의 지식과 기술 중심의 정량평가는 사람을 도구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했다. 교육은 생산의 양에 초점을 두고 설계하였기 때문에 인재평가 역시 도구평가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인성과 소통역량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목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목적평가란 사람 개개인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그 가치의 실현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는 방식이다. 도구평가는 평가를 당하는 수동적인 구조라면 목적평가는 자기 스스로 평가의 기준을 세운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평가구조라 할 수 있다.
학문이란 진실로 폭넓게 해야 하는 것이므로 지름길로 가서는 안 된다. 다만 배우는 사람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지 못하거나 마음을 견고하게 세우지 않은 채 오직 넓히는 데에만 힘을 쏟는다면, 마음이 흔들려 취사선택을 정밀하게 하지 못하거나 또는 갈피를 잡지 못해 진실을 잃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요점을 찾고 확실하게 방향을 정한 다음에 널리 배우면 종류에 따라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이율곡의 《성학집요》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교육은 방향과 기준이 중요하다. 공부의 방향은 인생의 방향을 뜻한다. 그리고 공부의 기준은 그 사람의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교육을 백년대개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난세의 상황일수록 교육은 중심을 잡아야 한다. 교육은 객기(客氣)를 잡고 정기(精氣)를 살리는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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