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롬 !!
경항공기 지역 신우회 7월5일(수) 예배순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이스마엘의 관계성을 오해할 때도 있지요. 그곳에 사라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것을 봅니다. 여러민족의 어머니 사라의 역할에 많은 시선을 빼앗기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단순한 언약이 아니라, 우정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 하나님과 이삭과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 속에 들어있는 우정의 이야기를 신학자들이 글로 표현을 했습니다. ‘영적 우정’은 리보의 엘레드가 썼습니다. 고전적 우정 정통은 키게로의 우정론을, 기독교 우정 이해는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켐피스, CS루이스 의 책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선언적인 말씀이 아니라 우정을 가질 수 있는 우리 신우회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긴 장마철에 안전과 건강을 항상 챙기시길 바랍니다.
성경말씀 : 창세기 17장 15-22절 (새번역성경)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하고 하여라,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녀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했습니다. “나이 백 살 된 남성이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히 언약이 될 것이다. 내가 너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반드시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어서, 그가 자식을 많이 낳게 하고 그 자손이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에게서 12명의 영도자가 나오게 하고 그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내년 이맘떄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그를 떠나서 올라가셨습니다.
말씀선포 : 우정 : 마음의 할례 (Friendship : Circumcision on Heart)
성경의 첫 시작인 창세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맺게 되는 참된 인격적 우정의 관계에 대한 표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맺었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백성과 맺고자 하시는 선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성도에게 보여주시며, 모든 주님의 백성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을 통해 이를 배웁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맺는 참된 우정의 표본을 보여주지만, 그들이 완벽무결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성도에게 소개되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 살면서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족장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 맺어야 하는 전형적인 우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우정 설명서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은 독창적이며 하나님은 각각 다른 그들과 깊은 인격적 만남을 가지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도 각자만의 고유성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그들과 참된 우정을 나누셨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세 명의 족장들이 삼위 하나님과 참된 우정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이 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성도에게 연약함과 교만의 차이를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항상 누리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야웨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셨던 약속을 따라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십 년이 지나도록 고대 근동의 다른 사람들처럼 첩을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한 명의 아내 사라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식이 태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권유에 마침내 다른 아내를 두게 되었고, 가문을 이끌어 갈 자녀를 얻었습니다. 오랫동안 주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게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은 이제 첩을 두고 자녀를 가지게 됨으로 더 이상 주님의 약속에 신실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가진 연약함은 자녀가 없이 가문을 이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주님도 그의 연약함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대신 그에게 주셨던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겠다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다시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아무런 힘도 없는 분이라거나 허황된 약속만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참된 우정을 나누던 이들은 그처럼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우정을 나눌만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가지는 연약함을 이해하시지만 그것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자신을 약속을 신실히 지키는 분으로 인식하기를 바라시며,사람에게 자신의 신실함과 관련한 흔적을 남기십니다.
창세기는 그 흔적을 ‘할례’로 표현했습니다. 할례는 남성의 생식기 겉표면을 잘라내는 의식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할례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며 자신만이 오직 생명의 탄생을 주관하는 존재임을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의미를 변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 말씀대로 자신과 온 가족 남성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는 온 가족으로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그 인생을 돌보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이 스스로가 가진 연약함에서 떠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인 자신을 신뢰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할례라는 말과 그 의식을 통하여 자기 백성이 자신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흔적을 가지고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도록 일하십니다.
할례가 오랜 기간 동안 주님의 백성으로 참된 믿음의 흔적을 가지고 스스로 가진 연약함을 이기고 삼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할례는 그저 몸에 행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때부터 주님의 백성은 ‘마음의 할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이 스스로가 가진 연약함을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교만함으로 이해했으며, 그 교만함이 하나님 백성으로 주님을 멀리하거나 또는 주님과 다른 우상을 동급으로 여기는 잘못된 인생을 살아가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의 할례, 즉 전존재가 변화되는 일을 위해 오신 것이라고 선언하며, 마음의 할례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퇴색하게 만드는 고대 유대인의 몸에 행하는 할례를 통한 선민의식이 잘못되었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할례는 몸에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마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의 중심에 행하는 것이라고 주님의 백성은 오랜시간 동안 말해왔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은 이해하시나 그것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살아가도록 삼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믿음의 흔적을 가지게 하십니다. 주님은 21세기 교회에도 그 믿음의 흔적을 주십니다. 마음의 할례. 주님과 우정을 나누는 모든 이가 가져야 하는 바른 믿음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