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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강 태극기와 알렉산더
1. unmoved mover
지난 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제일 똑대기에 있는 게 뭐라고 했나? 순수형상(Pure Form)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가운데, 중세기에 제일 많이 울궈먹은 것 중에 하나가 순수 형상인데, 이것을 Unmoved Mover라고 했다.
Unmoved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질료가 없기 때문에 움직임의 세계일 수가 없다. 순수형상은 움직임이 있을 수 없다. 순수 형상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세계하고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Unmoved Mover : 부동(不動)의 사동자(使動者)
그래서 자기 스스로는 어떠한 운동을 하지 않지만, 결국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Unmoved Mover’라는 말을 썼다.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다.
신(God)은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주에 원인과 디자인과 목적을 부여하는 사동자(使動者)이다.
나는 이런 공상을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팽이가 완벽하게 돌아간다고 하면, 팽이의 관념적인 축은 움직일 수가 없다. 이상적인 팽이의 움직임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팽이의 축은 그 주변을 돌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읽으면서 그런 상상을 해 봤다.
어떤 의미에서 중세기 철학은 ‘Unmoved Mover’라는 말 하나를 가지고 교리를 조직한 것이다.
2. 효과 괘
태극기의 괘는 주역의 심볼들이다.
주역에서 -- 선이 끊어진 것, 즉 Broken Line은 음(陰)이다. 그리고 ― 이렇게 한 줄로 이어져 있으면 양(陽)이다.
음(--) : Broken Line
양(―) : Unbroken Line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이든, 양이든 각각의 심볼을 효(爻)라고 한다. 그리고 효가 6개 모이면 하나의 괘를 이룬다.
괘(卦) : 음·양의 심볼 하나를 효(爻)라고 하는데, 그 효(爻) 6개가 모여서 하나의 괘(卦)를 이룬다.
음양 2자리로만 구성하면, 음양, 음음, 양양, 양음의 4개만 만들 수 있다.
-- -- ― ―
― -- ― --
3자리면, 2×2×2=8가 되어서, 8개의 조합이 가능하다. 음양의 콤비네이션 8개가 가능하다.
2×2×2=8
그래서 6자리가 되면 2의 6승이 되어서 64개를 만들 수 있다. 주역은 64괘를 가지고 세상을 요약한다.
『주역』의 저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이 64개의 심볼로써 요약해서 말하고자 하였다. 하나의 독특한 상징주의적 우주론(symbolistic cosmology)이다.
3. 변화의 세계, 주역
주역의 ‘역’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의 세계를 말한다. 역(易)이라는 것은 ‘바뀐다’, ‘교역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역을 한다고 한다. 무역은 물건과 물건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것은 자꾸만 바뀐다. 세상은 변화의 세계이다.
역(易) : 교역(交易)하다. 무역(貿易)한다.
변역(變易)한다. 변화의 우주를 말함.
역(易)이라는 것은 변화를 말한다.
역경(易經)의 경은 경서(經書)를 말한다. 즉 역경은 ‘우주 변화의 원리에 관한 경전’이라는 말이 된다.
『역경』(易經) : Classic of Changes
주역(周易)은 주나라에서 만들어진 역이라서 주나라 주(周)자를 써서 주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역(夏易)과 있고, 은역(殷易)도 있고, 한국역도 있을 수 있다. 한국역은 정역이라고 해서 19세기 말기에 광산 김씨가 만든 게 있다.
주역은 변화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니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주역적인 세계를 인정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의 세계를 긍정했다. 구체적인 세계를 보려 했다.
주역은 이 세계 삼라만상을 음양의 결합으로 인해 생긴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삼라만상을 무한히 다 담을 수는 없으니깐, 64개의 괘를 통해 다양한 우주의 변화태를 나타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생성하지만, 『역경』의 우주는 음과 양의 결합으로 생성한다.
물론 여기에는 reductionism이 있다. 하나의 환원주의((還元主義)가 있다.
@환원주의 (還元主義, reductionism)
철학에서 복잡하고 높은 단계의 사상이나 개념을 하위 단계의 요소로 세분화하여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
4. 64괘
6효가 전부 양(陽)인게 있고, 6개가 전부 음(陰)인게 있다. 전부 양인것은 건괘(乾卦)라고 하고, 전부 음인 것을 곤괘(坤卦)라고 한다. 그러면 건괘와 곤괘의 사이에 62개의 괘가 있다. 62괘는 음양이 섞여있는 것이다.
건(乾) : 양효 6개로 이루어진 순양(純陽)의 괘.
곤(坤) : 음효 6개로 이루어진 순음(純陰)의 괘.
착종(錯綜) : 음효와 양효가 섞이는 현상. 62괘는 착종의 괘이다. 건·곤괘는 착종괘가 아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형상과 질료가 섞여야만 사물이다. 그렇게 본다면 건괘는 순수형상이고, 곤괘을 순수질료로 볼 수 있다.
건괘(乾卦) : 순수 형상(Pure Form)
곤괘(坤卦) : 순수 질료(Pure Matter)
순수질료에서 순수형상에 이르는 이 하이어라키(Hierarchy)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적인 체계로는 배열을 하지 않았지만, 주역의62괘는 형상과 질료가 결합한 세계로 볼 수 있다.
5. 상괘, 하괘
효를 3자리로 가면 8괘가 된다. 이 8괘를 아래위로 조합을 하면 64괘가 된다.
64괘는 윗세자리(상괘, 上卦)와 아래세자리(하괘, 下卦)로 나뉠 수 있는데, 이 상괘·하괘는 모두 8괘로 되어 있다. 8괘는 64괘의 원형이다.
64괘는 결국 상괘와 하괘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위에 있는 심볼은 결국 8개밖에 없다. 밑에 있는 심볼도 8개밖에 없다. 그래서 이 8괘가 중요하다. 즉 8개의 심볼이 중요하다.
양양양는 위에 있으니깐 하늘이다. 순양이다. 음음음은 밑에 있으니깐 땅이다. 순음이다. 그런데 사실 이 건괘와 곤괘는 사물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건괘(乾卦) : 하늘(天)의 상징. 순양으로 이루어짐
곤괘(坤卦) : 땅(地)의 상징. 순음으로 이루어짐
건괘(≡111)와 곤괘(222)는 하늘과 땅의 위치를 나타내는 순수 심볼(Pure Symbol)이다.
8개의 괘 중에서 건괘와 곤괘는 순수심볼이다. 그리고 현상 사물을 나타내는 것은 음양이 배합되어 있는 나머지 6개이다.
6. 태극기의 괘
그래서 태극기의 건괘와 곤괘는 하늘과 땅이라는 하나의 심볼이고, 나머지 2개의 괘로, 8괘 중 6괘를 다 넣을 수는 없으니깐, 요약한 것이다.
음이 양쪽으로 있고, 가운데 양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음이 더 세다. 양이 양쪽으로 있고, 가운데 음이 들어가 있으면, 양이 세다.
감괘(坎卦): 물(水)의 상징(음이 양쪽으로 있고 사이에 양이 있음) : 212
리괘(離卦): 화(火)의 상징(양이 양쪽으로 있고 사이에 음이 있음) : 121
감괘는 상징이 물이다. 리괘는 상징이 불이다. 동양사람들에게 물과 불을 이야기하면, 불이 양이고, 물이 음이다. 그런데 물 속에 반드시 불이 들어있다. 그리고 불 속에는 반드시 물이 들어있다. 그게 안들어 있으면 안 된다.
물과 불은 상극(相克)이지만, 물속에는 불이 들어있고 불속에는 물이 들어있다. 모든 상극은 상생(相生)의 측면이 있다.
장작도 좀 눅눅해야 잘 탄다. 완전히 말라있으면 그 구실을 못한다. 물 속에도 항상 불이 들어 있다. 항상 사물이 얽여있다. 그냥 관념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태극기에서 하늘과 땅을 놓고, 불을 땅의 자리에 놓고 있다. 땅과 같은 밑에 놓여 있다. 그리고 물은 위에 놓고 있다.
땅자리에 땅이 있고, 하늘자리에 하늘이 있으면, 이것을 비(否)괘라고 한다. 천하의 나쁜 괘이다. 읽어보면 나쁜 것은 다 들어가 있다.
111+222(否) : 모든 것이 막히고 뒤틀리는 최악의 괘이다.
반대로 하늘자리에 땅이 있고, 땅자리에 하늘이 있으면, 이게 만사태평하다는 태괘(泰卦)다. 태평하다는 태괘이다.
222+111 (泰) : 하늘자리에 땅이 있고 땅자리에 하늘이 있다. 그러나 만사태평의 좋은 괘이다.
하늘이 하늘에 있고, 땅이 땅에 있으면, 이건 죽음이다.
화이트헤드가 쓴 이성의 기능을 생각해보라. upward와 downward라는 말을 썼다.
The other tendency is exemplified by the yearly renewal of nature in the spring, and by the upward course of biological evolution.
물이 모두 아래로 흘러가는데, 그것을 거꾸로 치고 올라가는 것에 생명의 힘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미꾸라지가 그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게 바로 생명이다. 폭포까지 기어 올라간다고 했다.
불은 하늘에 있으면, 불로서의 구실을 못한다. 이미 올라갔으니깐 구실을 못한다. 불은 항상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물이라는 것은 항상 내려가는 성질이 있다.
불(火)은 위로 올라간다.
물(水)은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갈 놈이 밑바닥에 있으면, 더 내려갈 수가 없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죽은 물이다.
이 물과 불의 위치가 바뀌어야 생명의 기능이 발현된다.
물은 위에 있어야 아래로 내려갈 수 있고
불은 아래 있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불은 밑에 있어야 불의 구실을 한다. 불이 위에 있으면 불 구실을 못한다. 그러니깐 태극기의 괘에서 불괘가 위에 있고, 물괘가 아래 있으면 가운데에 있는 태극은 성립하지 않는다.
태극(太極)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우주의 상징이다.
불괘가 아래로 내려와 있고, 물괘가 올라가 있기 때문에 이 태극의 음양이 항상 조화를 해서 도는 것이다.
사람 머리가 불덩어리면 죽는다. 사람의 발바닥이 항상 따뜻해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머리는 항상 물처럼 맑아야 한다. 머리에 물이 있어야 밑으로 내려가는 생명력이 있는 것이고, 불은 저 발 끝에 있어야 된다. 그런데 맨날 머리는 뜨겁고, 발이 차거운 사람은 골치가 띵하고, 힘을 못쓴다. 그러면 죽는 것이다. 태극이 안 된다. 태극이라는 우주가 형상되지 않는다.
태극기의 한가운데를 보면, 위를 양으로, 아래를 음으로 했다. 그래서 양과 음이 끊임없이 배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반죽을 했다고 하면, 이것도 반죽의 세계이다. 음과 양이 항상 반죽하면서 끝임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팔랑개비 같은 것이다.
그리고 4개의 괘는, 우선 순양과 순음을 상징하는 괘를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한다면, 순수형상과 순수질료를 각각 순양과 순음으로 상징했다. 그리고 나머지 62괘의 배열은 나머지 2개의 괘로 상징화하였다. 이게 생명력을 가지려면 불괘는 아래에, 물괘는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에는 내설악의 아름다운 선녀탕처럼 맑은 물이 있고, 발바닥에는 항상 화로처럼 뜨끈뜨끈해야 한다. 그래야 에너지가 넘치고, 선생의 강의도 잘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야 몸이 전부 뜨거워지면서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게 거꾸로 되어서 머리가 불덩어리처럼 뜨거우면, 얼굴에 종기가 많이 나는 사람이 된다. 불이 얼굴에 솟구친 것이다. 상화(上火)라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태극기가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역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하고 관련이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보다 더 대단한 것이다.
7. 중세기적 인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해되기 시작하는가? 어려울 게 없다.
순수 형상과 순수 질료의 세계를 놓고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 서열 상 형상 쪽이 높게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좋아한다. 그래서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 학파이다. 왜냐하면 가치론적으로 항상 형상을 높이 두고, 모든 것이 그 형상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도 중세기에는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떠한 하나님이 주신 형상을 구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 친구들은 자라면서 얼굴도 커지고, 키도 커지고, 두뇌도 커지고, 심장도 커지며 변화가 온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새로운 에이도스(eidos, 형상,形相)가 주어질 것이다. 그럼 그런 에이도스(eidos, 형상形相)를 구현해 나가면서 자신을 실현해 나간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형상이 뭔지 모르지만, 그 형상이 자신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에센스를 구현해야 된다.
그 에센스를 중세기에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본질, 그 에센시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시도 배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깐 교회의 권위에 묶이게 되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 430)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 본질은 누가 감시하겠나? 신부님, 목사님이 감시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주신 본질을 구현하면서 살아야 돼!’ 이렇게 되면, 중세기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8. 실존주의
근세 사르트르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나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나의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에 앞선다. - 샤르트르 -
이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이다. 중세기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반드시 본질이 실존에 앞섰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내 존재를 구현하는 어떤 구현해야할 본질이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에이도스가 있었다. 그래서 개인의 실존이라는 것은 개인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으로서만 의미를 갖고 있었다.
중세기적 인간은 목적론적 존재이다.
그런데 20세기 사르트르가 한 유명한 말인 ‘나의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는 그런 중세의 이야기를 부정한다.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무슨 본질이 있냐는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것은, 그냥 내가 걸어가는 것이지 하나님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서 걸어가느냐는 것이다. 걸어가는 것은 내 임의대로 걷는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것의 의미는 내 본질하고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실존주의다. 위대한 20세기의 혁명이다. 실존주의를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서양중세전통에 반기를 든 인간혁명이었다.
실존주의라고 하는 것은 나의 존재, 나의 실존은 그 존재로서 유니트한 것이고,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 규정받을 수도 없고, 간섭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천지불인이라고 했다.
天地不仁 : 하늘과 땅은 결코 목적론적 체계가 아니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노자』제5장
이 위대한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고 했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지도하거나, 혜택을 주거나, 만물을 귀여워하거나, 사랑하거나, 이런 개똥같은 짓을 안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완전히 반대로 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서양 철학 2천년의 전통을 싸그리 뭉개는 말을 벌써 2,500년전에 해버렸다. 천지는 목적론적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큰일 날 이야기다. 천지는 목적론적 체계라고 했다. 단 하나의 먼지도 목적을 구현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According to Aristotle, nature makes nothing in vain, for all that God creates is done with a purpose.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은 어떤 것도 그냥 만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신이 창조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목적이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서양은 2천년의 미신에서 요즘 들어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서양의 미신은 아주 정교한 이성적 미신이다. 아주 정교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 미신에 한 번 속으면 헤어날 길이 없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은 그러한 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철학적 사유라고 할지라도 점검해야 한다. 이해한다는 것과 나의 소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구분해서 끝까지 점검해봐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했다든지, 위대한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깐 내 평생의 신조로 삼아야지 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다. 누가 위대한 말을 했어도 믿지말기 바란다. 도올이 말해도 믿지말기 바란다. 도올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설을 했고, 주역에 대한 해설을 했고, 노자에 대한 해설을 했을 뿐이다. 그 해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비교해서 선택하라. 여러분들의 판단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판단하기 바란다.
남자를 사귄다고 했을 때, 자기 맘대로 선택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 선택하라는 독재는 엉터리다. 그런 것은 절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우리 삶에 있어서 그렇다면, 우리 철학에 있어서도 똑같이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되는 것이다.
9. 정치적 선택
요즘 우리나라의 선거결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침통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관계가 없다. 나는 정치하고 관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행복하다. 누가 이기든 상관이 없다.
그런데 분명히 이번에 한나라당이 삭스리 대승을 한 거 같다. 영어로 스위핑 빅토리라고 한다. 국민들이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서 분명히 선택한 결과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대 원칙에서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국민의 심판은 항상 어떻게 바뀔 지 모른다는 것이다. 불과 1, 2년전에 여당에 투표를 했던 사람이 정반대의 투표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느 당이 잘못했으면 국민들이 그걸 응징한다. 당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가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내가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다.
국민이 현재 잘못되고 있는 것에 대한 응징의 논리로서 몰표를 주었다.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 사회가 과연 무엇을 구현해야 되고,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는 항상 그런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런 고민을 구현하는 정책이 있는지에 대한 심판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당으로 우루루 갔다가, 저 당으로 우루루 갔다가 한다. 이러면 정치가 아니다. 우민대중들의 부동하는 한심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인들이 조장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표류하는 인간들이 되지 말라고, 논술을 가르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아직 어느 당을 찍어야 하는지 고민해야할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결국 나중에 우리 사회가 어디를 향해서 가야되고, 어떠한 사회가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 그리고 그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아이디어와 정책과 철학적 사유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우리 사회에는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철학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과 역사의 비전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 비전의 철학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한다.
그저 인기에 영합해서 우루루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이러한 역사를 여러분들은 만들지 말아달라고 내가 지금 논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10. 알렉산더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가 13살 때 와서 선생을 했다. 그리고 16살때까지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를
13세부터 16세까지 가정교사로서 가르쳤다.
알렉산더는 20살 때 왕이 된다. 그리고 22살에 원정을 나간다. 인더스강까지 내려간다. 어마어마하다.
알렉산더대왕은 22세부터 33세까지 11년동안(334 ~ 323 BC) 아테네, 이집트, 소아시아, 페르시아, 페니키아, 팔레스티나, 박트리아, 인도 인더스강유역까지 모두 정복하였다.
20대에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싸웠는데, 상처를 많이 입었다. 그때 알렉산더가 가장 격렬하게 싸운 상대는 페르시아 군대였다.
특히 The Battle of Issus라고 하는 ‘이수스 전투’는 유명하다. 이 전투의 상대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였다. 다리우스는 아주 대단한 군주였는데, 이 사람에게 도전장을 내고, 이수스의 좁은 계곡으로 페르시아군을 유인했다. 다리우스의 대군은 대평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좁은 계곡에서 힘을 쓸 수가 없다. 알렉산더는 그런 유리한 지형을 골라서 적을 격파시킨다. 다리우스는 거기서 불명예스럽게 도망을 간다.
The Battle of Issus(BC 333) :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3세(Darius Ⅲ)를 참패시킨 역사적 대결. 페니키아, 시리아로의 문을 열다.
서양에서 전투라는 것은 아주 당당하게 싸우고, 승부가 나야 하는데 비굴하게 도망을 가면 아주 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결국 박트리아에서 부하한테 죽는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를 격파시키고, 페르시아 문명과 싸우다가 바빌론으로 돌아왔을 때 말라리아에 걸린다. 33살 때였다. 말라리아에 걸려서 2주동안 열이 났다. 요새 같으면 아스피린만 있어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약이 없는데다가, 워낙 몸에 상처를 많이 입고 종기가 있어서 이겨내질 못했다. 결국 그 상처로 인해 폐혈증 같은 것이 같이 생겨서 2주만에 아주 격렬하게 열병을 앓다가 장렬하게 죽는다.
기원전 323년 6월 10일 알렉산더대제는
바빌론(Babylon)에서 영면하다.
알렉산더는 방대한 제국을 최초로 건설한 것이다. 죽고나서 그 사람을 묻어놓은 석관이 시돈에 안치를 했는데, 그 석관이 지금도 있다. 그러니깐 알렉산더는 아주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의 석관은 시돈(Sidon, 현재 레바논)의 왕,
아브달로니모스(Abdalonymus)에 의하여, BC 325 ~ 311 사이에,
제작된 희대의 걸작품이다.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석관은 아주 아름답다. 20대의 청년 알렉산더가 조각되어 있다. 페르시아인은 긴소매를 입고 있다. 보면 아주 대단하고 생생하다. 다리우스와 싸우는 전투 장면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이기면서 결국 온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이다.
이 석관의 한면의 조각은 이수스전투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때 알렉산더대왕은 23세의 청년이었다.
나는 이것을 실제로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생각도 하고, 알렉산더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알렉산더를 보면, 무섭게 보이기 위해서 사자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귀에 장식을 했다.
머리의 사자마스크는 불멸의 투사 헤라클레스의 상징이고, 귀 장식 양뿔은 에집트신 암몬(Ammon)의 상징이다.
이 사람으로 인해서 그리스의 폴리스가 완전히 무너진다. 폴리스라는 것은 조그만 도시국가다. 우리말로 하면 조그만 읍내 국가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촌놈이었기 때문에 원래 아테네 사람이 아니다.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촌놈들이라서 문화에 대한 향수가 굉장히 강하다. 그리고 프라이드가 있어서, 가는 곳마다 아테네 문명을 전파한 것이다. 전쟁을 할 때도 반드시 예술가나 학자들, 건축가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아테네의 문명을 거기다 심었다. 그러면서 아테네 문명이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인도까지 아테네 문명을 전파한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도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 간다라 미술
서북인도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지방에서 번영한 조각예술. 그리스조각의 영향을 받아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
우리 동양의 불상도 알렉산더가 퍼트린 조각예술이 불교예술로 전파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불상에까지 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있는 석굴암도 결국 알렉산더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 석굴암 예술도
알렉산더가 전파한 희랍문명의 종착지적 개화이다.
그러니깐 알렉산더 이야기도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분들이 신라시대를 제대로 알려면 알렉산더를 알아야 한다. 알렉산더를 모르면 안된다. 희랍예술을 모르면 안된다.
모든 문명은 교류의 복잡한 양태이다.
11. 헬라스, 헬레니즘
이렇게 문명이라는 것은 전파가 되는 것인데, 알렉산더 이전의 문명을 헬레닉 문명, 헬라스 문명, 희랍문명이라고 한다.
알렉산더 이후로 폴리스가 붕괴되고, 코스모폴리스가 된다. 그리고 코스모폴리탄의 시대가 온다. 그때는 완전히 동방과 서양이 하나가 된다. 아테네 문명, 페르시아 문명, 인도 문명, 이집트 문명, 바빌로니아 문명까지 하나로 뭉쳐지는 세기를 우리는 헬레니스틱 문명이라고 부른다.
Hellenic Culture : 헬라스 문화(알렉산더 이전)
Hellenistic Culture : 헬레니즘 문화(알렉산더 이후)
그러니깐 영어로 헬레닉과 헬레니스틱으로 구분이 된다. 헬레니스틱은 알렉산더 사후로부터 클레오파트라가 죽기까지다. 줄리어스 시저 뒤로는 로마의 전성기로 로마시대로 분류된다.
Hellenic : polis
Hellenistic : cosmopolis
즉 알렉산더의 죽음으로부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까지를 헬레니스틱 문명이라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더 죽음(BC 323) ~ 클레오파트라 죽음(BC 30)
이것이 서양문명에서 아주 독특한 세계문명을 이룩하고, 이때 모든 혼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그 배경 아래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나와서, 기독교가 탄생한다. 그래서 그 헬레니스틱한 문명을 배경으로 해서 기독교는 세계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로마세계로 편입되어 서양문명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 알렉산더라는 20대 청년은 헬라의 문명을 전세계로 전파시켰다. 그래서 보편주의적인 가치관이 다시 생겨나고, 철학도 동방적인 요소가 들어오면서 다시 인생론적인 철학으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인도철학이나 불교철학은 전부 인간의 문제를 다루었다. 우주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이냐를 고민했다. 우리 동방인들의 고민은 항상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 생각하는 인간론의 문제이다.
동방세계의 철학적 사유가 헬레니즘세계로 들어오면서, 인생론이 다시 대두한다.
그래서 스토익 철학, 에픽큐리안이즘, 시닉스와 같은 여러 가지 독특한 학파들이 다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동방철학의 영향아래서 스토아학파(Stoics), 에피큐로스학파(Epicurean), 견유학파(Cynics), 회의학파(Sceptics) 등이 생겨났다.
결국 알렉산더로 인해 서양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가지게 되었고, 철학도 좁은 폴리스의 철학에서 보편주의적인 세계시민적인 철학으로 나가게 되었다.
12.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를 보면 재미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을 보면, 전혀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없다. 전부 폴리스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러니깐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자기 제자한테 전혀 영향을 못끼친 사상가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알렉산더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제자 알렉산더의 코스모폴리스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테네라는 좁은 폴리스에서 안주한 이론가였을 뿐이다.
결국 알렉산더가 죽고 나서, 아테네에서 반 마케도니아 감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알렉산더와 친했다는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체포한다. 그래서 재판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억울하게 죽기 싫다.’면서 도망을 간다. 자신은 그런 거지같은 재판을 받고 희생당하기 싫다는 것이다. 개죽음을 당하기 싫다면서 도망을 간다. 그만큼 그때는 윤리가 달라진 것이다.
도망갔다가 결국 곧 죽는다. 1년도 못되어서 죽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는 알렉산더의 죽음과 더불어서 같이 끝이 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상적인 관련성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다.
세계를 정복한 정치가들의 영향은 한 시대를 바꾸지만,
사상을 구현한 철학자들의 영향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서양의 중세기를 만들었고, 그래서 그 뒤로 중세기에 대한 반발로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세계 사조를 한 눈에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여러분 나이에는 전체적으로 쉽게 그러나 정확하게 이해를 하는 게 좋다. 전체를 알고, 디테일로 들어가서 책을 보면, 독서가 굉장히 빠르고 정확하게 된다. 그러니깐 여러분 나이에선 전체적인 것을 대세를 잘 파악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