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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 개성부 상 開城府上
개성부 상
동쪽으로 장단부(長湍府) 경계까지가 11리, 남쪽으로 풍덕군(?德郡) 경계까지가 19리,
서쪽으로 벽란도(碧瀾渡),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경계까지가 36리, 같은 도의 강음현(江陰縣) 경계까지가 35리,
북쪽으로 같은 도의 우봉현(牛峯縣) 경계까지가 5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66리이다.
건치연혁 신라시대(통일기)의 송악군(松岳郡)은 원래 고구려의 부소압(扶蘇岬)이며,
개성군(開城郡)은 원래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이었다. : 고구려에서는 군현(郡縣)을 홀(忽)이라 많이 불렀다.
고려 태조 2년(919)에 철원(鐵原)에서 도읍을 송악산 남쪽에 옮기고, 두 고을 지역에 걸쳐 개주(開州)로 삼고,
궁궐을 짓고 시전(市廛)을 설치하며, 방리(坊里)를 갈라서 오부(五部)로 하였다.
광종(光宗) 11년(960)에 황도(皇都)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995)에 개성부로 고쳤다.
현종(顯宗) 원년(1009)에 거란(契丹) 군사가 와서 침노하여 궁궐과 민가가 거의 다 없어졌다.
9년에 부(府)를 파하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ㆍ덕수(德水)ㆍ강음(江陰) 세 현(縣)을 관장하며 상서도성
(尙書都省)에 직속하게 하였다. 문종(文宗) 16년(1062)에는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하고,
도성에서 관장하던 정주 등 세 현 및 장단(長湍)ㆍ송림(松林)ㆍ임진(臨津)ㆍ토산(?山)ㆍ임강(臨江)ㆍ
적성(積城)ㆍ파평(坡平)ㆍ마전(麻田) 등 11현을 모두 소속시켰으며,
또 서해도(西海道)의 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하여 예속시켰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는 부윤(府尹) 이하의 관원들을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고 또 따로 개성 현령
을 두어 도성 밖을 관장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는 경기(京畿)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었는데 개성현은 우도에 속하였다.
본조(本朝)의 태조는 즉위한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고서 송도 개성 유후사(松都開城留後司)로
고치고, 유후(留後)ㆍ부유후(副留後)ㆍ단사관(斷事官)ㆍ경력(經歷)ㆍ도사(都事)를 각각 1명씩 두고 개성현을
없앴다.
세종 20년(1438)에 개성부 유수(留守)로 고쳤으며, 세조 12년(1466)에는 경기도에 예속됨으로써 유수ㆍ단사관ㆍ
경력ㆍ도사를 파하고 단지 윤(尹)과 판관(判官)을 각각 1명씩 두었다 : 예종(睿宗) 2년(1469)에 다시 유수ㆍ
경력ㆍ도사 각각 1명씩을 두었다. 유수는 종2품, 경력은 종4품, 도사는 종5품이다.
군명 부소압ㆍ송악군ㆍ동비홀ㆍ개주ㆍ개경(開京)ㆍ황도(皇都)ㆍ촉막군(蜀莫郡) : 《송사(宋史)》에, "고려 왕은
개주 촉막군에 거처하는데 개성부라 한다.
큰 산을 의지하여 궁실을 짓고 성벽을 쌓았으며 그 산을 이름하여 신숭(神嵩)이라 한다." 하였다.
성씨 본부(本府) 고(高)ㆍ김(金)ㆍ왕(王)ㆍ강(康)ㆍ전(田). 이(李):내(來)
○ 무릇 다른 주(州)에서 와서 살되, 본적을 상고할 수 없는 자는 단지 내(來)라고만 주(註)를 달았으며,
혹은 속(續), 혹은 속(屬)이라고도 하였다. 후에도 여기에 의한다.
풍속 기자유풍(箕子遺風):《송사》에, "고려는 기자의 유풍을 익혀서 주몽(朱蒙)의 옛 풍속을 어루만진다."
하였다.
인유 오살(仁柔惡殺) : 위와 같은 책에, "천성이 인(仁)하고 유(柔)하여 죽이는 것을 싫어하며, 짐승을 도살하지
않는다." 하였다.
팔관회(八關會):팔관회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시작되었다.
고려 태조 원년(918) 11월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전의 임금이 매년 중동(仲冬)에는 크게 팔관재(八關齋)를
베풀어 복을 빌었으니, 그 제도대로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큰 업을 얻어
지키게 되었으니, 어찌 불교에 의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구정(毬庭)에 윤등(輪燈)
한 곳을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곁에 나열하니, 밤새도록 땅 위에 광명이 가득하였다.
또 채붕(彩棚)을 두 곳에 세웠는데 각각 높이가 5발[丈]이며 형상이 연대(蓮臺)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어렴
풋하다.
온갖 놀이와 노래와 춤을 앞에서 벌이는데, 그 중의 사선악부(四仙樂部)ㆍ용봉상(龍鳳象)ㆍ마거선(馬車船)은
모두 신라 때의 고사(故事)이다.
백관(百官)이 조복을 입고 홀(笏)을 들고 예식(禮式)을 거행하니, 도성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하여 밤낮으
로 즐기고 임금이 위봉루(威鳳樓)에 나와서 구경하였는데, 이름하여 공불 낙신(供佛樂神)의 모임이라 하였다.
그 후로 해마다 거행하였다.
관리 한위의(官吏閑威儀) : 송 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말하기를, "음식에는 조두(俎豆)를
사용하며,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隷書)를 합하여 사용한다. 위로 조정 관리는 위의(威儀)에 익숙하고 말과
풍채가 넉넉하며, 아래로 여염과 촌락에도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셋씩 둘씩 서로 바라보인다.
자제들 중 결혼하지 않은 자는 무리져 모여 스승을 따르고, 조금 장성하면 친구를 선택하여 강습한다." 하였다.
풍속 유중국(風俗類中國):《송사》에, "고려는 토지가 벼농사에 적당하고 풍속은 중국과 같다. 낙타ㆍ 물소ㆍ
노새가 없으며, 중은 있지만 도사(道士)는 없다." 하였다.
청애염병(靑艾染餠):위와 같은 책에, "고려에서는 상사일(上巳日)에 푸른 쑥떡으로써 쟁반에 차린 음식[盤羞]
의 으뜸으로 삼는다." 하였다.
추천희(?韆?):위와 같은 책에, "고려에서는 단오날에 그네 놀이가 있다." 하였다.
격구희(擊毬?):고려 시대에는 미리 무관(武官) 중에 젊은 자와 점잖은 집 자제들을 선발하여 격구하는 기예를
연습시켰다. 단오날마다 큰 길거리 곁에 용봉(龍鳳) 장(帳殿)을 설치하고, 전 앞 좌우로 각각 2백 보쯤 되는 곳
길 한 가운데에 구문(毬門)을 세우며, 길 양쪽에는 오색 비단으로 부녀자들의 장막을 치고 명화(名?)와 채색 요
[彩?]로 장식하였는데 임금이 장전에 거둥하여 구경하였다.
사상성률(士尙聲律) : 《송사》에, "고려에는 국자감(國子監)과 사문학(四門學)이 있는데 배우는 이가 6천 명이
다. 공사(貢士)는 3등급인데, 왕성(王城)은 사공(士貢), 군읍(郡邑)은 향공(鄕貢), 타국인은 빈공(賓貢)이라 한
다." 하였다. 선비들은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經)에 통달한 이가 적다.
슬행필궤(膝行必?) : 위와 같은 책에, "자리를 설치하고 올라갈 때는 반드시 신을 벗고 무릎으로 가서 반드시
꿇어앉는다. 대답할 때에는 반드시 예[唯]라 하고, 그가 절을 하면 답례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였다.
사녀상소복(士女尙素服) : 위와 같은 책에 나옴.
남자건적 부인타계(男子巾?夫人??) : 위와 같은 책에, "고려에서는 남자는 두건[巾?]을 쓰는 것이 당(唐) 나라
와 같으며, 부인은 땋아 묶은 머리채[??]를 오른쪽 어깨에 드리우고 남은 머리털로 아래를 덮고 비단으로 묶은
다음 비녀를 꽂는다. 돈 바지[旋裙]를 겹겹이 입는데, 많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하였다.
형승 천부명허(天府名墟) : 민지(閔漬)의 편년(編年)에 이르기를, "태조의 나이 17세에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족하(足下)가 백육(百六)의 운수 때를 당하여 천연의 요새와 이름난 터[天府名墟]에
서 태어났으니, 삼계(三季 후삼국 말엽)의 창생이 그대의 넓은 구제를 기다린다.' 하고, 이어 군사 출동하는 법
[出師]과 진 치는 법[置陣], 지리(地利)ㆍ천시(天時)의 법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 드려[望秩] 감응하고 보호하
고 돕는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 하였다.
팔선 주처(八仙住處):김관의(金寬毅)의 《통록(通錄)》에, "당 나라 숙종(肅宗)이 임금이 되기 전[潛邸]에
명산을 두루 유람하려고 바다를 건너와서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땅이 반드시 도읍
이 되겠다.' 하니, 종자(從者)가 아뢰기를, '여기는 참으로 여덟 신선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에 있을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왕을 좇아 노는 자가 있
었는데, 임금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임금의 선조가 당 나라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궁중을 떠난 적이 없으며,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
으니, 언제 동쪽을 가서 유람하여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습니까.' 하니, 임금이 매우 부끄러워하며 대답하지 못하
였다. 민지(閔漬)가 곁에 있다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잘못 쓴 것뿐이니, 숙종이 아니라 바로
선종(宣宗)이다.' 하니, 학사가 말하기를,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방에서 고생하였으니 혹 그럴 듯합니다.'
하였다." 한다.
이기봉무(?起鳳舞) : 이규보(李奎報)의 기문에, "문(門)이 천이요, 호(戶)가 만인데 비늘처럼 엇물리고 빗처럼
나란하며, 둘러 싼 형세는 용이 일어나고 봉이 춤추는 것 같다." 하였다.
연락삼경(聯絡三京):기순(祁順)의 시에, "삼경(三京)을 연락하여 훌륭한 경치가 많다." 하였다.
오부청춘(五部靑春):명 나라 중[僧] 보흡(溥洽)의 시에, "오부의 청춘이 풍악 소리에 취한다." 하였다.
의산만가 즐비인차(依山萬家櫛比鱗差):정추(鄭樞)의 시 남산(男山)에 보인다.
산천 송악(松嶽):부(府)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이고 또 곡령(鵠嶺)이라 칭하였다.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이 풍수(風水)에 능하였
는데, 부소군(扶蘇郡)에 이르러 산의 형세가 좋은데도 나무가 없음을 보고, 강충(康忠)에게 고하기를, "만일 군을
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三韓)을 통일할 사람이 날 것입니다." 하니,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에 옮겨 살면서 소나무를 온 산에 심고 인하여 송악(松岳)이라 칭하였다.
또 숭산(崧山)이라 이름하고, 또 신숭(神嵩)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왕창근(王昌瑾)의 경문(鏡文)에 이르기를, "사년(巳年) 중에 두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몸을 푸른 나무[靑木] 가운데 감춘다." 하였는데, 푸른 나무는 소나무니 송악을 말한 것이다.
○ 살펴보건대, 백제의 시조 10년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백제 북쪽 국경에 침입하니, 임금이 군사 2백 명을
보내 곤미천(昆彌川) 위에서 막아 싸웠는데, 백제 군사가 패하자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여 스스로 보전하고
있었다. 임금이 친히 정기(精騎) 1백 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에 나가서 구원하니, 적이 그제서야 물러갔다.
이른바 청목산이란 바로 이 산인 것 같다.
○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에 송악산이 밤에 우니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진무작(陳無作)이 대답하기를,
"해로울 것 없습니다. 옛 시에, '숭악(嵩岳)에서 세 번 부르니(만세를 부른다는 뜻) 궁전을 둘러 푸르다.'는 구절
이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기뻐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신령한 사당 주악군(主岳君)을 뵈려고, 때로 절정(絶頂)에 오르니 바라보기에 으젓
하네. 성중(城中)의 1만 집은 벌[蜂]들이 모인 것 같고, 길 가는 1천 사람들 개미가 달리는 것 같구나.
무성한 상서로운 구름은 임금 궁궐을 둘렀고, 푸릇푸릇한 왕기(王氣)는 하늘 문을 끼고 있네.
곡산(鵠山)의 형승(形勝)이 용이 서린 듯하니, 여기서부터 황도(皇都)의 줄기와 뿌리가 굳어졌도다." 하였다.
○ 고려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마른 목구멍에 연기가 나고 땀이 물 흐르듯하니, 열 걸음에 정말 여덟ㆍ아홉
번을 쉬네. 후에 와서 좋은 경치 보지 않고 지났다 괴이하게 여기지 말고, 천천히 가도 끝내 또한 산마루에 이른
다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백이산하(百二山河)는 곡봉(鵠峯)을 껴안았는데, 견여(肩輿) 타고 곧장 팔선궁(八仙宮)
으로 올라가네. 남쪽 강 밝기도 한데 서쪽 강은 어두워 지척간도 흐리고 갬이 스스로 같지 않구나."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일찍 밥 먹고 새벽에 올라 대환(大還)에 이르니, 층층한 얼음 쌓인 눈이 산 안면에
가득하네. 소년들의 다리 힘은 정말 세기도 하여 가파른 산마루를 한 순간에 날아오르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중국에 숭악(嵩岳) 있어 신령스런 기운 내려 보(甫)와 신(申) 내었네.
당대에 공업 세우고 만고에 꽃다운 티끌 날렸네. 신숭(神嵩)은 삼한에 있으니, 또한 웅장하고 명승(名勝)으로
알려졌네. 그 뛰어남이 인물에 부여되어, 일찍이 국가의 보배 되었네.
천지는 기운을 그치지 않고 산수는 이름이 오히려 새롭네. 인재를 내는 것 지역을 제한하지 않으니,
누가 진(秦) 나라에 사람 없다 하리." 하였다.
용수산(龍岫山) : 수(岫)는 수(首)라고도 한다. 부 남쪽 2리에 있는데, 곧 외성(外城) 터다.
진봉산(進鳳山):부 동남쪽 9리에 있는데, 산 안팎에 두견화가 많이 피므로 세상에서 진봉산 척촉(?? 철쭉)이라
고 일컫는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멀리 층봉(層峯)에 오르니 외길이 비꼈는데, 흰 구름 땅에 드리워 승가(僧家)를 덮었
네. 산 속의 옛 절들 대부분 서로 비슷해, 가는 곳마다 봄바람에 철쭉 피었네." 하였다.
남산(男山):부 동쪽 2리에 있다. 이규보의 기문에, "곡령을 등지고 용수산(龍首山)을 끼고서, 사방이 모여든 곳
을 누르고 신경(神京)의 중앙을 차지하여 푸릇푸릇 아름다운 기운 있어 손에 잡힐 듯한 것이 남산이다." 하였다.
○ 고려 정추(鄭樞)의 시에, "담장 머리에 남산이 보이는데, 수목이 어찌 그리도 많은가. 산을 의지한 일만 가옥
이 즐비하여 비늘처럼 어슷비슷. 사람의 노래는 공중 언덕에 비껴 섰고, 개는 구름에 연한 울타리에서 짖누나.
연기 끼매 교묘하게 점철되고, 바람 부니 스스로 일렁거리네. 우뚝우뚝 산 위의 돌은 예부터 변함 없네. 말 없이
서로 마주하고 앉았으니 나의 뜻 산만이 홀로 알 것이네. 장송(長松)이 시내 구렁을 덮으니,
기이한 저 천년의 모습이네. 담장 밑에 가을 풀 푸르르니, 내 슬픔 어이 없으리." 하였다.
봉명산(鳳鳴山) : 성 서쪽 24리에 있다. 천마산(天磨山):송악산 북쪽에 있는데, 여러 봉우리가 높이 하늘에 솟
아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엉겼기 때문에 천마(天磨)라 이른다.
○ 이규보의 시에, "산에 들어가다 길을 잃어 숲 가운데 떨어졌는데, 빈 골짜기 그윽한 꽃 스스로 피고 지네.
깊은 시내의 흐르는 물은 산의 절반쯤 지나가고, 절벽의 외로운 구름 하늘 가에 한줌일세.
높은 바위 쳐다보니 몇백 자나 되는지, 나무 끝을 걸어가 원숭이와 다투네. 창 바위에 말을 세우니 누구를 치려
나, 북 바위 소리 없으니 무엇을 놀라리. 바람이 속객(俗客)의 낯을 스치니 쓸어가는 것 같고,
골짜기는 사람 소리에 답하니 응낙하는 것 같구나. 돌길 따라 꾸불꾸불 가다가, 소나무 사립문 찾아 똑똑 두드
리네.
산승(山僧)이 문을 나와 웃으며 객을 맞으니, 고고한 얼굴 소나무의 천년 묵은 학이네. 그대로 솔 난간에 누우니
산 달 밝아 오는데, 차 끓이는 소리 바위 사이의 샘물인 양 들리네. 나는 즐거워 근심 잊는데 스님 크게 웃어 원
래 근심 없으니, 즐거움이 무엇이리. 내일 아침에는 그대와 함께 완부(阮孚)의 나무신을 납(蠟) 칠할 것이니,
두어라 하필 도추(桃椎)의 짚신을 살 것이랴." 하였다.
○ "중첩한 봉우리 겹겹 고개 푸르러, 공중을 스치어 길이 절을 따라 들어가며 한 가닥 통하누나.
걸어가는 대로 두니 수건이 비에 젖고, 한가로이 읊으니 갓이 바람에 기우는 줄 모르네. 산꽃이 진하게 물드니
연지(燕脂)가 무르익고, 들불[野燒]이 건너오니 한(漢) 나라 깃발인 양 붉구나. 삼척 초동(樵童)이 갈대 피리
불며 오니 태평 기상이 모두 이 소리 속에 있구나."
○ "산 사람이 산에서 나오지 않으니, 옛 길이 묵은 이끼에 묻혔네. 세상 사람들이 나의 녹라월(綠蘿月)을 더럽
힐까 염려되네."
○ "바위 속 중[僧] 함부로 나가지 않으니, 계곡의 새들 한가로이 날고 있네.
날 저무니 소나무 사이 안개가 부슬부슬 옷을 적시네."
○ "두건(巾)을 제껴 쓰고 푸른 소나무 의지하여, 거문고에 먼지 떨고 흰 돌을 쓰네.
떨어지는 폭포는 산기슭 끊었는데 차가운 봉우리 푸른 공중에 높이 솟았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두어 봉우리 높이 솟아 푸른 하늘에 가지런한데, 갠구름 내려다보니 지는 해가 나직하구
나. 자라 등에 실린 별유천지[蓬壺] 약수(弱水) 밖에 솟아 있고, 선가(仙家)의 누대는 붉은 사닥다리 끊었네.
바다를 건너는 붕(鵬)새의 날개 까마득하고, 공중에 다니는 천마(天馬)의 발굽 여기에 걸리리.
어쩌면 두 겨드랑이에 날개 나서 곧 바로 저 절정(絶頂)에 올라가 써놓아 남겨 둘꼬." 하였다.
오공산(蜈蚣山):송악산 서쪽에 있는데, 그 형상이 북 같다.
또 송악산에도 북 같은 돌이 있어 세상에서 좌고산(左鼓山)ㆍ우고산(右鼓山)이라고 한다.
취적봉(吹笛峯):천수원(天壽院) 서쪽에 있다. 자하동(紫霞洞):송악산 아래에 있는데,
동부(洞府)가 그윽하고 막혀 있으며, 시냇물이 맑고 잔잔하여 첫째로 꼽는 절승지(絶勝地)이다.
○ 이곡(李穀)의 시에, "초당(草堂)에 졸음 깨니 낙화가 한가로운데, 발 걷어 올리니 남북에 청산도 많네.
청산은 내가 문밖에 나오지 않고서 꼼짝 않고 문자 사이에서 해[年]를 지내는 것을 웃는구나.
장안(長安) 일만 집에 갈 곳 없으니, 무어라 높은 대문 향하여 나의 얼굴 숙이리.
산중의 노는 밤이 어떤 밤이냐. 나막신 굽 딱딱 시내 돌에 노니네. 시호(詩豪)가 다시 옥당(玉堂)의 현인 만나니,
팔두문장(八斗文章)이 옛사람보다 뛰어나네. 저 푸른 절벽 기어올라 오늘의 이 놀이 적어 둘 것이니,
내일 아침이면 여전히 홍진(紅塵)의 객이라네." 하였다.
○ 고려 채홍철(蔡洪哲)이 이 동(洞)에 중화당(中和堂)을 짓고서 국가의 원로들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열고 스스로 자하동곡(紫霞洞曲)을 지으니, 대개 자하선인(紫霞仙人)이 와서 헌수(獻壽)하는 사(詞)에 붙인
것이다. 그 가사에, "집이 송악산 자하동에 있는데 운연(雲煙)이 중화당에 서로 잇달아.
오늘 기영회 반겨 듣고 와서 한잔 연수주[延壽漿]를 드리나이다." 하였다. 지금도 악부(樂府)에 이 곡조가 전해
진다.
○ 고려 최집균(崔執鈞)의 시에, "여섯 골짜기가 망망(茫茫)하여 바다와 산이 막혀, 다만 돌아갈 수 없다는 남의
말만 들었더니, 지금 와서 전의 소문 잘못된 것이, 겨우 홍진(紅塵) 세상과 두어 걸음 사이에 격해 있구나."
하였다.
○ 고려 권보(權溥)의 시에, "이슬이 은하수 씻어 달빛도 둥근데, 술이 금잔에 가득 차니 추위를 물리치네.
자천(紫泉) 한 곡조에 사람은 옥 같은데, 붉은 촛불 꽃 다 되려 하나 밤은 아직 늦지 않네. "하였다.
○ 고려 조계방(曺繼芳)의 시에, "꿈속에 일찍이 학배천(鶴背天)을 보니, 우의(羽衣)와 선악(仙樂)이 술 항아리
앞에 벌였네. 그 좋은 일 가져다 후일에 자랑하자면, 인간 세상의 병자년(丙子年)을 말하리." 하였다.
대흥동(大興洞):천마산과 성거산(聖居山) 두 산 사이에 있다. 박연(朴淵)에서부터 올라가면 산은 점점 높고
물은 더욱 맑으며 암석이 매우 기이하고 높은데, 관음굴(觀音窟) 앞에 이르러서는 물이 깊어 못을 이루고
물고기들이 떠다니며 놀고 돌이 물 가운데서 나왔으니, 귀담(龜潭)이라 한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돌이 광채 있고 깨끗하며 길이가 두어 보(步)는 되는데, 흐르는 샘물이 그 위에 가늘게
펴져서 미끄러워 소리 없이 모래 둑으로 내려가고 빙빙 깊은 못이 되며 맑고 맑아 밑이 보인다. 사면이 모두
돌인데 혹은 책상이나 걸상 같기도 하고, 혹은 담장이나 집 같기도 하다. 그 위는 모두 만년이나 된 난쟁이
소나무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샘물이 동쪽 언덕에서부터 흘러내리는데 보현동(普賢洞)이라 하며,
또 몇 보를 올라가면 마담(馬潭)이라 한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대흥사(大興寺)라 하는데, 지금은 옛터만이
있다. 절 위쪽에는 원통(圓通)ㆍ시혈(詩穴)ㆍ선암(禪巖)ㆍ적조(寂照) 등의 암자가 있고,
또 해인(海印)ㆍ취운(聚雲)ㆍ법림(法林)ㆍ태안(泰安)ㆍ운곡(雲谷) 등의 옛터가 있는데,
태안은 바로 고려 태조의 태실(胎室)이다.
대개 골짜기 가운데는 수목이 울창하여 햇빛이 땅에 비치지 않는데, 여름이 되면 녹음이 길을 덮고, 목련화가
피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이 물 속에 거꾸로 비치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청석동(靑石洞):천마산 서쪽에 있다.
○ 정도전(鄭道傳)의 기문에, "6월 갑신일에 명 나라 사신 황공(黃公) 등이 경사(京師 명 나라 서울)로 돌아가니,
시중(侍中) 평양백(平壤伯)과 시중 상락백(上落伯)이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금교역(金郊驛)에 나가 전송하고
정오가 되어 돌아오는데, 때가 더운 철이라 불같은 구름이 크게 일어나니, 당리(堂吏)가 장막을 청석동 시냇가
에 치니 피서를 위한 것이었다. 제공이 걸상에 걸터앉으니, 물은 그 아래로 흐르고 바람은 사면에서 불어오는
데, 몸이 편안하고 정신이 환하여 초탈한 기분이 오래된 병이 몸에서 제거되는 것 같았다.
높은 곡조의 풍악 소리가 크게 연주되면서 흐르는 술잔[流觴]이 두어 순배 돌아가니 제공이 서로 흐뭇하게
즐거워하였다. 조금 있다가 평양백이 문득 말하기를, '즐겁기는 즐겁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 하니,
도전이 말하기를, "정승의 직책이란 수고로운 것이다. 많은 책임이 그 몸에 모이고 온갖 생각이 그 마음을 수고
롭혀서 기운이 답답하고 뜻이 막히니, 밝고 슬기로운 이라도 간혹 빠뜨리고 실수하는 일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심(婢諶)이 정(鄭) 나라의 정사를 도모하려면 반드시 들판으로 이르렀으니, 대개 한가롭고
고요한 가운데서 얻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답답한 기운을 풀고 막힌 뜻을 열어 주는 데 이러한 자리가 반드
시 도움됨이 있을 것이다.' 하자, 제공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그러나 평양백이 우연히 객을 전송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한 번 제공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서 대번에 그것이
지나침을 경계하였으니, 이 또한 알아두지 않을 수 없으므로 여기에 적는다." 하였다.
월로동(月老洞) : 부 북쪽 10리에 있다. 치암(?巖):연화원(蓮花院) 곁에 있다. 덕암(德巖) : 부 동쪽 9리에 있다.
극암(戟巖) : 부의 북쪽 31리에 있다.
○ 고려조 오세재(吳世才)의 시에, "북령(北嶺)에 돌이 높고 높은데,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극암이라 한다.
멀리 학 탄 왕자진(王子晉)을 칠 듯, 하늘에 오르는 무함씨(巫咸氏)를 찌르려네. 자루를 구부리는 데는 번개가
불이 되고, 칼날을 씻는 데는 서리가 소금 되네. 어찌하면 저것으로 병기 삼아서 초(楚) 나라도 패하고,
범(凡) 나라도 망하게 할꼬." 하였다.
대사현(大蛇峴) : 부 동쪽 15리에 있다. 호현(虎峴) : 부 남쪽 19리에 있다.
국청현(國淸峴) : 부 서쪽 13리에 있다. 용현(龍峴) : 부 서쪽 35리에 있다. 탑현(塔峴) : 청석동에 있다.
갈현(葛峴) : 부 북쪽 58리에 있다. 이현(梨峴) : 부 동쪽 6리에 있다. 토령(土嶺) : 부 북쪽 41리에 있다.
사령(沙嶺) : 부 동쪽 1리에 있다. 동교(東郊) : 숭인(崇仁)ㆍ보정(保定)ㆍ청교(靑郊)ㆍ적전(籍田) 등이 모두
동교이다.
○ 고려 곽예(郭預)의 시에, "말을 놓아 봄의 일(농사)을 찾으니 송아지는 한창 밭갈이에 애쓰누나.
새가 우니 날씨가 따스하고, 고기가 헤엄치니 물결 무늬 잔잔하네.
들 나비들 모여서 희롱하고, 모래판의 갈매기들 대오를 지어 나네.
연작(燕雀)을 따르다가 해오라기처럼 깨끗한 것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 고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누런 먼지 막막하게 갠 하늘 가리는데, 서풍에 부채 드니 남을 더럽힐까 싫어
해서이네. 늦은 구름 비를 뿌리니 고맙기도 한 것이, 중도에서 옷에 가득한 티끌 씻어 주누나." 하였다.
○ 고려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삼한(三韓)의 예악 5백 년, 창창(蒼蒼)한 만고의 부소산이네.
용의 비늘을 끌어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은 여섯 대사(大師)는, 청천백일에 큰 이름 천지간에 알려졌네.
어찌하여, 북두(北斗)로 큰 바닷물 잔질하여, 이 내 몸 늦게 태어난 답답한 마음을 씻어볼꼬.
동교에서 실컷 마시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데, 눈썹만한 새 달이 돌아오는 안장을 따르네." 하였다.
서교(西郊) : 오정문(午正門) 밖의 황교(黃橋) 등지가 그것이다.
예성강(禮成江) : 부 서쪽 30리에 있다. 황해도 강음현(江陰縣) 조읍포(助邑浦)의 하류가 부의 서쪽에 이르러
이포(梨浦)가 되고, 또 전포(錢浦)가 되며, 또 벽란도(碧瀾渡)가 되고, 또 동쪽으로 예성강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고려에서 송 나라에 조회할 때에 모두 여기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禮成)이라 하였다.
○《송사(宋史)》에,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또 5일 만에 묵산
(墨山)에 이르러 그 지경으로 들어간다. 묵산에서 섬의 구불구불한 돌 사이를 자나면서 배가 매우 빨리 가서 7
일 만에 예성강에 이른다. 강은 두 산 사이에 있고 석협(石峽)으로 묶였으며 물결이 빠르게 내려가는데,
이른바 급수문(急水門)이라는 데가 제일 험악하다." 하였다.
또《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급수문은 개성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흡사 무협(巫峽) 같다." 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예성강곡이 있다. 과거에 중국 상인 하두강(賀頭綱)이 바둑을 잘 두었는
데, 일찍이 강가에서 한 아름다운 부녀자를 보고 내기를 해 빼앗으려고 그 남편과 바둑을 두어 거짓으로 지고
나서 내기를 두 배로 걸자 그 남편이 탐내어 아내로 내기를 걸었다. 두강이 단판에 빼앗아 배에 싣고 가니,
그 남편이 뉘우쳐 이 노래를 지었다. 부인이 갈 때에 옷 단속을 매우 단단하게 하니, 두강이 범하지 못하였다.
배가 바다 가운데에 이르자 빙빙 돌면서 가지 않으니, 점을 치자, '절부(節婦)에게 감동되어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두강이 부녀자를 돌려보내니, 부녀자 역시 노래를 지었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강 언덕에 사람은 드물고 백로만 나는데, 날 저무니 고기잡는 늙은이가 고기 잡아 돌아가네.
가벼운 구름 엷고 엷으니 어찌 비가 되랴. 바다 기운 하늘에 올라가 우연히 이슬비 되는 것이." 하였다.
○ 이곡의 시에, "하해(河海)가 동쪽으로 흐르게 한 우(禹) 임금의 공이 상상되니, 남쪽과 북쪽에서 오가는 배들
멀리 서로 통한다네. 어느 사람, 강에 뿌리는 비에 졸고만 있나. 손의 수심은 종일 부는 바람에 깊어만 지네.
한 조각 배는 아득한 저 바다에 키질하는데, 많은 산들 보일락말락 나고 들고 하누나.
노(魯) 나라의 뗏목 타고 오려던 늙은이(공자)야 감히 바라리. 반계(磻溪)로 가서 낚시질하는 늙은이(강태공)나
찾아볼거나." 하였다.
○ 고려 정포(鄭?)의 시에, "바람 고요한 긴 강이 기름을 뿌린 듯 푸른데, 가는 돛 하나하나 조수 머리에 모여
드네. 사공이 불을 놓고 타고(?鼓)를 울리니, 동남쪽에서 온 장사 배임을 알겠네." 하였다.
○ "백발 어옹이 낚싯대 하나 들고, 조각배 위에서 종일토록 바람치는 여울과 싸우고 있네.
그의 마음은 고기가 미끼 먹기만 기다리니, 곁에서 구경하는 간담이 역시 서늘한 줄 어이 알리."
○ "그림 같은 청산이 배의 창문에 들어 가득한데, 가는 비 실같이 돌다리에 뿌리네. 밤 벌써 깊었지만 맑은
후에 잠 못 이루는데, 뱃사람들은 다시 예성강곡 부르네." 하였다.
○ "열흘동안 가을 장마에 강물이 불었는데, 사라져 가는 구름 다시 비 되어 부슬부슬 뿌리네.
밤이 옴에 누(樓) 아래에 파도 소리 거세더니, 새벽 들자 인가들 사립문 절반이나 물에 잠겼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맑은 휘파람 긴노래가 바로 좋은 놀음인 것이, 세상 마음[機心] 다 버리고 갈매기
나 가까이 하리. 질 항아리와 막걸리가 집집마다 있으니,
이로부터 강두(江頭)에 나가 날마다 갖옷을 저당잡히네." 하였다.
○ "살구꽃 눈같이 흩날리고 버들이 실 같으니, 봄은 강성(江城)에 가득하고 낮은 모자 짧은 신 신으매,
돌아오는 말 위에서 새로 지은 시가 있다네."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강 언덕 방초(芳草)에 비 적시는데, 강두에 자리 펴고 앉아서 돌아가지 않네.
백발 어옹은 술을 낼 줄 알고, 푸른 도롱이 입고 지나는 손은 시 읊을 줄 아네." 하였다.
벽란도(碧瀾渡) : 부 서쪽 36리에 있다.
○《송사(宋史)》에, "급수문(急水門)에서 또 3일 만에 언덕에 닿으니,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이 있으며,
여기서부터 육지에 올라 험난한 40여리를 가면 바로 국도(國都)이다."라고 한 것이 이곳이다.
정자 이름을 지금 식파정(息波亭)이라 한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송도(松都)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긴 강이 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나루터를 벽란이라 한다.
국도에 가까우므로 건너다니는 사람이 많고, 산에 가깝기 때문에 흐름이 빠르고 바다에 가깝기 때문에 조수가
세게 밀려서 건너는 이들이 또한 매우 괴롭게 여긴다. 나라에서 관원을 두어 맡겼는데, 강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옛날에는 초루(草樓)가 있었으니, 나루터 일을 맡은 관원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강은 바다 하늘에 닿아 있고 산은 들판을 가로질러 구불구불하여 아득히 멀어 바라봄에 끝이 없으니, 형세의 뛰
어남이 제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곳이 다투어 건너는 장소가 되고 유람하는 곳이 아니므로 오고 가는 사
람들이 모두 분주히 잘 건널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올라가서 경치를 구경할 경황이 없었다.
임오년(1402) 가을에 철성(鐵城) 이공(李公)이 도끼[鉞]를 집고 와서 우도(右道)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 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하면서 언덕 위에 올라가 마땅한 곳을 잡아서 개암나무와 가시밭
을 베어내며 모래와 흙을 평평하게 하고서 새 정자를 짓고 '식파(息波)'라 편액하니, 대개 압승(壓勝)하여 건너는
데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순시(巡視)하는 여가에 반드시 와서 휴식하고, 오면 반드시 이틀 밤을 묵고 시를 읊으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공은 천성이 인후(仁厚)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개연히 지조와 절개를 가졌으며,
일찍이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늦게 즐거워한다.'는 말을 사모
하여 항상 외고 읊어서 스스로 기대하였다. 때문에 그 문무(文武)의 재략(才略)과 중외(中外)의 업적이 뛰어나서
보통 사람과 달라 범공을 뒤쫓아 짝할 만하며, 그 가슴속의 넓은 도량 역시 범공과 더불어 그 크기를 같이 할 만
하다.
대개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좋은 경치이지만 구경하는 사람이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자신들이
느끼기에 달린 것인데, 범공은 근심하고 즐거워한 것이 유독 천하에 관계된 것이었다.
지금 공이 이 정자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 즐거움을 함께 하고, 또 그 근심을 물결을 쉬게[息波]하는
데까지 미루었으니, 이것은 그 마음의 근심과 즐거움이 모두 남에게 미치는 데에 있고 자기 한 몸에 관계되지 않
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그것이 있는지라 이러므로 같게 한다.' 하였다. 훗날 묘당(廟堂) 위에서 정승의 반열
에 처한다면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효험이 범공으로 하여금 송(宋) 나라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않게 할 것을
또한 미리 알 수 있다." 하였다.
○ 고려 유숙(柳淑)의 시에, "오랫동안 강호(江湖)의 언약을 저버리고, 홍진(紅塵)에 20년이었네.
백구가 나를 웃는 양, 짐짓 누(樓) 앞으로 가까이 오네." 하였다.
○ 이숭인이 시에, "산수(山水)는 원래 값이 없는데 물고기와 새우는 풍년을 당했네. 조수가 들어오자 다시 순풍
이 부니, 뱃사람들 스스로 앞을 향해 오누나." 하였다.
○ 성석연(成石?)의 시에, "세상 사람 몰기를 급히 하니, 낚시대 잡을 해 기약할 수도 없는 것이,
강호에 한없는 뜻은 가는 비 한 돛대 앞일세." 하였다.
○ 유백유(柳伯濡)의 시에, "나루 사람들 보내고 맞이하는 일 맡아보며 물결 위에서 또 한 해 지내네.
보일락말락 조각배 작은데, 청산이 거울 앞에 들어오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급수문 앞에 도서(島嶼)가 푸르고, 벽란정 아래에 들 연기 비꼈네.
송 나라 사신들 드나들기 익숙한데, 명주(明州)에 내왕하기 며칠 길이나 되는지." 하였다.
전포(錢浦) : 부 서쪽 36리에 있다. 주관 육익(周官六翼)에, "당 나라 선종(宣宗)이 장삿배를 따라 바다를 건너
처음 개주(開州) 서포(西浦)에 이르렀는데, 그때 조수가 마침 물러가고 진창이 갯가에 가득하니,
따라온 관원이 배 안에 있는 돈을 꺼내다 진흙 위에 편 다음 하륙하였으므로 전포(錢浦)라 이름하였다." 하였다.
김관의(金寬毅)의 《통록(通錄)》을 살펴보면 돈을 편 일은 숙종(肅宗) 때의 일이라 하였는데,
여기에 대한 변명은 형승조(形勝條) 아래에 있다.
이포(梨浦) : 부 서쪽 41리에 있다.
신리 동방포(新里東方浦) : 부 서쪽 23리에 있는데, 그 근원이 둘이 있다. 하나는 송악 북쪽 월로동(月老洞)에서
나오고, 하나는 대정(大井)에서 나오는데, 여정리(余丁里)에 이르러서 합류하여 이 포구가 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예성강(禮成江)으로 들어간다. 이제현(李齊賢)의 팔영(八詠)에 남포연사(南浦煙?)가 이곳이다.
마담(馬潭) : 부 북쪽 62리에 있다. 바위가 끊어진 곳에 날아 떨어지는 샘물이 두 줄로 드리워서 형상이 흰 무지
개와 같다. 세속에서 말하기를, "못의 신(神)이 말 같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자세한 것은 대흥동(大興洞) 조에 보인다.
웅천(熊川) : 부 남쪽 7리에 있는데, 그 수원은 셋이 있다. 하나는 진봉산(進鳳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제릉(齊陵)
의 산 북쪽에서 나오며, 하나는 진관사(眞觀寺)의 동쪽에서 나오는데, 원명사(圓明寺) 서쪽에 이르러 합류하여
동쪽으로 청교역(靑郊驛) 앞을 지나 풍덕군(?德郡)의 사천(沙川)으로 들어간다.
이제현의 팔영 중에 웅천계음(熊川?飮)이 이곳이다.
앵계(鶯溪) : 지안방(智安坊)이 있다.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오공산(蜈蚣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용수산(龍首
山)에서 나와 대천교(大川橋)에 이르러 합류하여 동쪽으로 본부(本府) 앞을 지나 앵계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예성강에 들어간다.
○ 이규보의 시에, "앵계에 와서 집 자리를 정하니, 곡령(鵠嶺)이 바로 난간에 당한다." 하였다.
대정(大井) : 부 서쪽 22리에 있는데, 샘물이 솟아나고 깊이가 2자쯤 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의조(懿祖)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에게 장가들고 처음 개성 산기슭에 이르러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니
물이 따라 솟아나서 그대로 우물을 만들었다." 하였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제사 드리고, 무릇 기도할 일이 있을 때면 역시 제사 드렸다.
속담에는, 우물 물이 붉고 흐리면 전쟁이 있다고 한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6월에 우물 물이 누렇게 되어
끓었다. 광명사정(廣明寺井) : 부 북쪽 7리에 있다. 고려 세계(高麗世系)에 이르기를, "작제건이 용녀에게 장가들
고 송악산에 와서 살았는데, 용녀가 일찍이 새 집 침실 창 밖에 우물을 파고 우물 속으로 서해의 용궁을 왕래하
였다.
일찍이 작제건과 더불어 언약하기를, '내가 용궁으로 돌아갈 때에는 부디 보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오지
못합니다.' 하였다. 하루는 작제건이 몰래 보니, 용녀가 소녀(小女)와 더불어 우물로 들어가자 모두 황룡이 되어
오색 구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용녀가 돌아와서 노하여 말하기를,
'부부의 도는 신(信)을 지키는 것이 귀한데, 지금 이미 언약을 배반하였으니, 나는 이곳에서 살 수 없소.' 하고,
그만 소녀와 더불어 다시 용으로 화하여 우물로 들어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용녀를 추존(追尊)하여 원창왕후(元昌王后)로 삼았다." 하였다.
양릉정(陽陵井) : 부 남쪽 8리에 있다.
명 나라 홍무(洪武) 3년(공민왕 19년)에 황제가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를 보내 고려 산천에
제사 드렸다. 사호가 또 비석을 싣고 와서 도성의 남쪽 풍천(楓川)이 어느 곳이냐고 묻자, 바로 이 우물이라고
대답하니, 사호가 제사 드리고 비를 세우고 갔다.
○ 그 축문에 이르기를, "황제는 조천궁 도사 서사호를 보내 고려의 수산(首山) 및 제산(諸山)의 신과 수수(首水)
및 제수(諸水)의 신에게 제사 드립니다. 고려란 나라는 해동(海東)에 자리잡았는데 산세의 방박(磅?)함과 수덕
(水德)의 왕양(汪洋)함이 사실 모두 신령스러운 기운이 모인 바이기 때문에 능히 국토를 안령되게 하고 국군(國
君)이 대대로 부귀를 누리며 중국을 높임으로써 생민(生民)을 보전하게 하는 데에 신(神)의 공이 큰 것입니다.
짐(朕)이 벼슬하지 않은 선비에서부터 일어나서 지금 천하를 통일하여 정통(正統)을 계승하였는데, 이즈음 고려
가 표문(表文)을 받들어 신하로 일컬으니, 짐이 그 정성을 기뻐하여 이미 왕의 작위를 봉하였습니다.
옛 법전을 상고하건대, 천자는 산천 제사에 있어서 어느 지역이나 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삼가
희생과 폐백을 받들어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령께 아뢰니, 신께서는 살피소서." 하였다.
○ 그 비문에는 이르기를, "홍무 3년(1370) 봄 정월 3일 계사에 황제께서 봉천전(奉天殿)에 납시어 군신들의 조
하(朝賀)를 받고 이어 이르기를, '짐이 천지와 조종(祖宗)의 돌보심을 힘입어 신민(臣民)의 위에 자리하였으니,
교(郊)ㆍ묘(廟)ㆍ사직(社稷)에서 악진(岳鎭)ㆍ해독(海?)의 제사에 이르기까지 감히 공손히 않을 수 없다.
요사이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신하로 일컬으므로, 짐이 이미 그 왕을 봉하여 고려 국왕을 삼은
만큼, 그 나라의 경내 산천이 이미 같은 직방(職方)에 귀속된 것이다.
옛 법전을 상고하면, 천자(天子)의 망제(望祭)는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아직도 실지 예를 행하여 그 공경을
다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 마땅히 희생과 폐백을 갖추어 조천궁 도사 서사호를 보내어 앞서 가서 신령에 보답해야 하겠다.' 하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최량(崔亮)이 삼가 황제의 말씀을 받들어서, 이에 사호에게 분부하여 그 성심과 정결함을
극진히 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임금이 7일 간 재계하고 몸소 축문을 지어서, 10일 경자에 이르러 임금이 조회에 임하여 향(香)을 사호에
게 주며 명을 받들고 가게 하였다. 사호가 4월 22일로 나라(고려)에 이르러, 단(壇)을 성 남쪽에 설치하고 5월
정유일에 고려의 수산 대화악신(大華嶽神) 및 제산의 신과 수수 대남해신(大南海神) 및 제수의 신에게 공경히
제사를 행하여 예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신 사호가 들으니, 제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한 이는 반드시 신에게 정성을 극진히 한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상(皇上)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크게 정통(正統)을 계승하니 사해(四海)의 내외가 다
모두 신하가 되었으며, 온 하늘 아래가 다 함께 태평의 다스림을 누리려 한다.
그러므로 신 사호를 보내어 신에게 제사 드리니, 신이 이미 흠향하여 반드시 그 국왕을 돌보아 주어 대대로 강
토를 보존하게 할 것이며, 풍우를 때 맞춰 내리고 곡식이 풍년 들어 백성들이 거의 안정할 수 있게 하여,
거룩한 천자의 누구나 차별없이 보아 똑같이 사랑[一視同仁]하는 뜻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에 돌에 글을 새겨
영구히 전하게 하는 것이다. 신 사호는 삼가 기록한다." 하였다.
홍도정(紅桃井) : 이인로(李仁老)의 부(賦)에, "백당(柏堂) 동쪽 산기슭에 맑은 샘이 있어 찬 물이 돌 틈에서 흘
러 나오니, 흰 구름 낀 그윽한 골짜기를 양치질하는 것 같도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데, 그 메아리가 거문고와
비파 같으며, 6, 7보(步)쯤 굽이쳐 돈 뒤에야 개천으로 들어가도다. 마침내 샘물 곁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손에 움켜쥐어 마음 상쾌하도다. 농서자(?西子) 채소만으로 배불러 손으로 배를 문지르도다.
그늘진 오사모(烏紗帽) 쓰고 소리 나는 용죽장(龍竹杖) 짚고서 한 돌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드러내니,
빙상(氷霜)을 문질러 부수고 주옥(珠玉)을 삼켰다 뱉었다 하도다.
어찌 오직 불같은 여름 더위만 피하랴. 또한 다시 세속의 먼지 묻은 갓끈 어느 사이에 다 씻었네.
천천히 휘파람 불며 돌아오니 시내 바람 솔솔 부는데, 8자 서늘한 자리 펴고 두어치 나무 옹두리[?木] 베개하도
다. 꿈에서 백구(白鷗)와 함께 희롱하니, 기장 쌀밥이 아직 익지 않은 동안이로다. 표표(飄飄)하게 8마리 용을
타고 요지(瑤池)에 가서 서왕모(西王母)의 노래 한 곡조 듣는 듯, 호호(浩浩)하게 마른 떼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
서 촉도(蜀都)의 점치는 데 놀라는 것 같도다.
두어라 반드시 비단 휘장 40리를 두르고 후추 8백 곡(斛)을 금련분(金蓮盆)에 넣은 후에야 내 발을 씻겠는가."
하였다.
달애정(?艾井) : 부 북쪽 5리에 있다. ○ 고려 신종(神宗) 초에 최충헌(崔忠獻)이 아뢰어 내시 민식(閔湜) 등 70
여 명을 내쫓았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이, 임금이 달애 우물 물을 마시면 환자(宦者)가 권력을 쥔다고 하므로
달애정을 헐고 광명사(廣明寺) 우물 물을 어수(御水)로 삼았다. 속담에 등리(藤梨)를 달애(?艾)라고 한다.
간지(柬池) : 부 북쪽 5리에 있다. 연지(蓮池) : 수창궁(壽昌宮) 서쪽에 있다.
용화지(龍化池) : 부 동쪽 7리에 있다.
○ 곽예(郭預)의 시에, "연꽃 구경하러 세 번 세 못에 가니, 푸른 산 붉은 단장이 옛날 같구나. 다만 꽃 구경하는
옥당(玉堂) 늙은이, 풍정(風情)은 전과 같지만 귀밑머리 희어졌네." 하였다.
○ 고려 최해(崔瀣)의 시에, "붉은 단장 푸른 일산이 가을 못을 덮었는데, 갈매기와 해오라기 서로 의지해 제철
만났다 기뻐하네. 지난해 숭교전(崇敎殿) 지나던 때 엷은 구름 지는 해에 비가 부슬부슬 뿌리던 것 생각나네."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의 운금루기(雲錦樓記)에, "올라가 굽어볼 산천의 승경이 반드시 모두 궁벽하고 먼 곳에만 있
는 것은 아니니, 임금이 도읍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일찍이 산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다투는 것은 조정에서 하고 이익을 다투는 것은 저자에서 하기 때문에, 비록 형산(衡山)ㆍ여산(廬山)과
동정호(洞庭湖)ㆍ소상강(瀟湘江)으로 하여금 반 걸음 안에 늘어서 있어 굽어보고 우러러 보면서 장차 만나게
하더라도 그것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어째 그런가? 사슴을 쫓아가면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켜쥐면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가을 털끝을 살피면서도 수레에 가득 실은 땔감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만 있어 눈이 다른 데에 미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일 좋아하고 힘이 있는 이들이 관문(關門)과 나루터를 지나서 시골을 골라 산수(山水)의 놀
이에 힘써서 스스로 고상한 체한다.
강락(康樂)이 길을 닦음에 백성들이 놀라고, 허범(許氾)이 전토(田土)를 구하매 호걸한 선비가 비루하게 여기니,
또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고상한 것만 못하다.
경성 남쪽에 사방 1백 묘(畝)나 되는 못이 있어 주위에 사는 자는 여염 민가(民家)가 비늘처럼 어슷비슷하고 빗
처럼 나란한데, 지거나 이고 말타거나 걸어서 그 곁을 지나 왕래하는 사람들이 이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니,
어찌 그윽하고 기이하며 한가로운 지경이 바로 그 사이에 있는 줄을 알 것이랴.
후지원(後至元) 정축년(충숙왕 6년, 1319) 여름에 연꽃이 만개하니 현복군(玄福君) 권후(權侯)가 보고 사랑하여
바로 못 동쪽에 땅을 사서 누(樓)를 지었다. 2길은 되게 높이 하고 3발은 되게 넓게 하였는데, 주춧돌을 받치지
않고도 기둥이 썩지 않게 하고 기와를 얹지 않고 띠풀로 덮었으니 비만 새지 않게 함이요, 서까래는 깎지 않았는
데 굵지는 않으나 흔들리지 않으며, 벽은 색칠하지 않았으니 화려하지 않고 보기 흉하지도 않았다.
대략 이와 같은데 10여 못의 연꽃을 온통 둘러싸서 점령하였다.
여기서 그의 아버지 길창공(吉昌公)을 모시고 형제 친척들과 함께 그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유쾌하게 놀면서
날이 저물도록 돌아갈 줄을 모르는데, 아들 중에 큰 글씨를 잘 쓰는 자가 있으므로 '운금(雲錦)' 두 글자를 쓰도
록 하여 걸어서 누의 이름으로 삼았다.
내가 시험삼아 가보니, 붉은 향기 푸른 그림자가 아득히 덮여 가이 없는데 흩어지는 바람에 이슬이 낭자하고 연
파(煙波)에 흔들거리니 이름이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라고 할 만하였다. 이것만이 아니다.
용산(龍山)의 여러 봉우리가 청색과 녹색을 발라서 처마 아래로 모여드니, 어두웠다 밝았다 아침 저녁으로 각기
모습이 다르며, 여염의 집들을 향하면 그 위치의 곡절을 앉아서 셀 수 있는데, 이고 지고 말타고 걸어서 왕래하
는 자와 내닫는 자, 쉬는 자, 돌아보는 자, 부르는 자, 친구를 만나 서서 말하는 자, 존장을 만나 절하는 자도 모
두 모습을 감추지 못하니, 바라보며 즐길 만한데, 저편에서는 이곳에 못이 있는 줄만 알뿐 누(樓)가 있는 줄은
모르니, 또 어찌 누에 사람이 있는 줄을 알 것이랴.
정말 올라가 굽어볼 만한 좋은 경치는 반드시 궁벽하고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건만 조정과 저자의 마음과 눈
으로는 만나서도 있는 줄을 모른다. 또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함부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후(侯)는 만호후(萬戶侯)의 부절(符節)을 허리에 차고 외척의 세력을 깔고 있으며 나이는 옛사람의 강사(强仕)
할 나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부귀와 영달에 깊이 잠들고 취하여 꿈꿀 것인데도, 능히 어질고 지혜로
운 자가 즐기는 것을 즐겨서 백성을 놀라게 하지도 않고 호사(豪士)에게 비루하게 여김을 받지도 않으면서,
문득 그윽하고 기특하며 한가한 지경을 저자와 조정 사람들의 마음과 눈이 미치지 못하던 곳에서 차지하여,
그 어버이를 즐겁게 하여 손님에게 미치며 그 몸을 즐겁게 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치니, 이 역시 가상한 일이다."
하였다.
증지(甑池) : 부 동쪽 24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동교(東郊) 적전(籍田)에 둥근 봉우리 있는데, 봉우리 아래 못엔 늙은 용 서려 있네.
소년들 서로 불러 나가 노니 백 병 맑은 술이 모두 황봉(黃封)이네.
노복들 벌거벗고 긴 그물 드니, 물고기 날뛰는데 비린 바람 불어오네. 소반 위의 향기로운 양념에는 온갖 맛 곁
들였는데, 난도(鸞刀)로 옥을 자르니 붉은 실이 나누나. 좋은 때 술 가득 부어라, 조금인들 사양하리.
취하여 읊는 시 기운이 하늘에 솟구칠 듯. 병중에 흐르는 세월 흔들리는 촛불 같은데, 다만 귀밑에 가을 쑥대 나
부낀다.
조정에 일이 없고 임금을 속이고 가리는 자 끊어졌으니, 때로 노닐며 태평을 노래하누나.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장강(長江) 북쪽 언덕에 수만 군사 왔는데도 바둑 두며 별장(別莊) 내기하던 사공(謝公)이 있음을.
동진(東晉)의 무공(武功)이 무궁토록 전한 것은 높은 정취로 세상 풍속을 진정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람소리 학의 울음을 뉘라서 형용하리." 하였다.
신증 보현봉(普賢峯) : 천마산(天磨山)에 있다.
○ 박은(朴誾)의 시에, "천마산에 오직 보현봉 홀로 서서 상대가 없는 것, 만고에 홍몽(鴻?)에 났으니,
천지도 한 큰 덩어리. 수일 간 산허리에 있으니 우러러보면 푸른 칠한 눈썹만 있었네.
오늘 아침 발 밑에 드니, 빙설이 오장에서 생기누나. 서남쪽 모두 넓은 바다 안개 아지랑이 스스로 천태(千態)로
세. 그 변화하는 물건 곤어(鯤魚)ㆍ붕새 있어서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은 덩어리 울렁거리네.
대지도 원래 조각조각 쌓인 것, 조물주인들 어찌 용서 있으리. 지금엔 완전한 곳 없어서 곳곳마다 깨지고 부서졌
네. 작고 큰 것이 다만 희극일 뿐, 아이들 장난과 무엇이 다르리. 이 산이 아득히 말없는데 예와 이제가 부질없이
변천일세. 기이한 유람 하늘이 주신 다행이라, 우연히 한 번이지 두 번 다시 못하리.
평생에 멀리 다니고 싶은 이 내 마음, 한 번 쏟아 막힌 것 없구나. 술을 실컷 마시고, 문자로 다시 무늬 놓네."
하였다.
역암(?巖) : 연경궁(延慶宮) 북쪽, 송악산 기슭에 있다.
○ 박은(朴誾)의 시에, "만월대(滿月臺) 앞에는 흥이 깨어지고 광명사(廣明寺) 뒤에서 다시 그윽한 경치 찾네.
땅은 고국에 감추인 지 천년에 우리들 만나서 우연히 시(詩) 한 번 읊어 주네.
성난 폭포는 제 스스로 공중에 메아리 이루는데, 시름 어린 구름 저 해에 그늘지려 하누나.
모름지기 술잔 들어 이 내 마음 씻어내어 무궁한 흥망 금고(今古)의 마음이네." 하였다.
성곽 나성(羅城):바로 외성(外城)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강감찬(姜邯贊)이 경도(京都)에 성 쌓기를 청하니,
왕이 이가도(李可道)를 명하여 흙을 쌓아 성을 만들게 하였는데, 모두 21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
성의 주위가 2만 9천 7백 보요, 나각(羅閣)이 1만 3천 칸이며, 숭인(崇仁)ㆍ선기(宣旗)ㆍ보정(保定)ㆍ광덕(光德)ㆍ
덕산(德山)ㆍ회빈(會賓)ㆍ선계(仙溪)ㆍ태안(泰安)ㆍ홍인(弘仁)ㆍ건덕(乾德)ㆍ보태(保泰)ㆍ선의(宣義)ㆍ산예
(?猊)ㆍ영평(永平)ㆍ선암(仙巖)ㆍ자안(慈安)ㆍ창신(彰信)ㆍ영양(迎陽)ㆍ안화(安和)ㆍ성도(成道)ㆍ회창(會昌)ㆍ
안정(安定) 등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내성(內城) : 우리 태조(太祖)가 개국한 지 2년 계유(1393)에 벽돌로 내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0리 40보이다.
동대문(東大門)ㆍ남대문ㆍ동소문(東小門)ㆍ서소문ㆍ북소문 등의 문이 있다.
봉수 송악산 국사당(國師堂) 봉수 : 부 북쪽 11리에 있다. 북쪽으로 황해도 강음현 성산(江陰縣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장단부 천수산(長湍府天壽山)에 응한다.
송악산 성황당(城隍堂) 봉수 : 부 북쪽 11리에 있다. 남쪽으로 풍덕군 덕적산(?德郡德積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수압산(首鴨山)에 응한다. 수압산 봉수 : 부 서쪽 34리에 있다. 동쪽으로 성황당에 응하고,
남쪽으로 신당(神堂)에 응한다. 신당 봉수 : 부 남쪽 36리에 있다. 북쪽으로 수압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황해도 배천군 부모리(白川郡夫毛里)에 응한다.
궁실 경덕궁(敬德宮) : 추동(楸秋洞)에 있다. 우리 태조의 잠저(潛邸) 때의 옛 집인데,
즉위하자 증수(增修)해서 궁으로 삼았다. 지금은 제조 2명을 두어 지킨다.
○ 기묘년(1399) 9월에 태종이 임금 되기 전 이 집에 거처하는데,
하루는 하늘이 밝으려고 별이 드문데 시녀 김씨가 처마 밑에 앉아 있다가 보니 백룡(白龍)이 침실 위에 나타났는
데, 크기가 서까래 같으며 비늘이 있어 광채가 찬란하고 꼬리가 꿈틀꿈틀하며 바로 태종이 있는 곳을 향하여 가
는 것이었다. 달려가서 선부(膳夫) 김소근(金小斤) 등에게 알리니, 소근 등도 나와서 보는데 조금 있다가 운무가
덮어 가려서 간 곳을 몰랐다.
목청전(穆淸殿) : 숭인문(崇仁門) 안에 있는데 역시 태조의 옛 집이다.
태종이 명하여 이 전을 짓고 태조의 화상[御容]을 봉안하였는데, 참봉 2사람이 있다.
태평관(太平館) : 본사(本司) 서편에 있다. 고려 때에는 정동성(征東省)이 되었고 지금은 사신(使臣)들이 유숙하
는 곳이 되었다.
○ 김식(金湜)의 시에, "말 앞에 우뚝하게 높은 성(城) 보이리, 천고의 동쪽 나라 옛 서울이라네.
안개 스친 좋은 산 보는 곳 따라 푸르고, 하늘에 솟은 사신관사 앉아 보니 깨끗하네.
백년의 민물(民物) 풍화(風化)에 관계되고, 일대(一代)의 의관은 노성(老成)임을 알겠네.
아침 떠나면 왕명으로 흐뭇한 은택 베풀 것이, 사교(四郊)의 장마비 밤 동안 퍼붓는 듯 내리네."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눈을 찌르는 여러 봉우리 푸르고 뾰족한 것 드러내니, 들 구름 때로 비 지어 부슬부슬 내
리네. 개성(開城)의 옛 나라 전부터 험하다 일컬으니, 숭악(崇嶽)은 다른 나라에서 제법 우러러 보네.
땅은 삼한(三韓)을 제어하고 밭갈고 누에 치기며 생리(生利)는 동해에 고기잡이 소금 구이로세.
좋은 경치 따라 글을 쓰자면 시가 천 수는 되겠는데,
또 해낭(奚囊 시를 지어 넣어 두는 주머니)이 청렴하지 않다고 조롱 받을까 두렵네." 하였다.
○ "가시와 개암나무 눈에 가득, 황량한 대(臺)에 앉으니, 산이 푸른 연(蓮)을 끼고 차례로 펼쳐지누나.
합도(閤道)의 국화 나를 맞아 웃는데, 여장(女墻)의 밝은 달은 누구를 위해 비치나. 언덕 머리의 보리 물결은 바
람에 놀라 펄렁이는데, 나무 끝 샘물 소리 밤들어 처량하구나. 사슴들은 산곡이 변한 줄 모르고 솔 그늘 따라 때
로 성 구비에 내려오누나."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성곽에 둘린 것 모두 인가인데, 맑은 시냇물은 흰 모래를 띠었네.
소나무 뿌리에 말 매고 잠시 쉬는데, 나무 끝에서 어느덧 저녁 까마귀 소리 들리누나.
가는 버들 푸른 실 흔들리고, 새 부들은 흰 움이 자랐네. 산에 가득 붉기가 불같은 두견화가 두루 피었네." 하였
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평양ㆍ개성이 바다와 하늘을 같이 했는데, 성루에 올라 멀리 보니 거친 연기 일어
나네. 옛 궁터는 기자(箕子)의 나라가 가장 오래니 은(殷) 나라에서 염유(炎劉 한 고조 유방(劉邦))에 이르기까
지 9백 년이네." 하였다.
○ "산을 의지한 누대와 전각이 하늘에 솟아 높은데, 풀에 묻히고 연기에 잠겨 기와와 조각돌이 많구나.
5백 년 이래로 전란 겪은 땅에 칼날을 씻노라고 은하수의 물을 당겨 왔네."
○ "송악산 앞 땅 한 구역 봄철 들어 연우(煙雨)에 천궁이[?蕪] 자라네.
날씨 차고 해저문 남쪽 길에 말 탄 행인이 또 도읍지 지나누나."
○ "벽문 규화(壁文奎?)가 옥함(玉函)에 새로운데, 사신 행차 아침 일찍 찬 서리 밟누나.
번국(藩國)에서 조사(詔使) 맞이하는데, 맑고 수양한 이들 모두 글읽은 사람이네."
○ "밤 눈이 펄펄 밤 이미 새었는데, 새벽 처마에 언 까치들 짖지도 못하누나.
저 산 위 솔 가지에 검은 구름 젖었으니, 아마도 고황제(高皇帝)의 먹 흔적 그것이리."
○ "중첩한 봉만이 울울하고 높기도 한 것이, 옥 물결 어느 곳에 사신 수레 멈추나.
부탁하는 말, 정자 앞의 대나무를 베지 마소. 남겨두었다가 선인(仙人)에게 주어 퉁소 만들게 하세나."
○ "바다 위 삼산(三山)이 점점이 푸른데, 바다 어귀멀리 보니 푸른 연기 가로질렀네.
도경(圖經)을 지은 일 전조(前朝)의 사실인데, 전당(錢塘)과 더불어 수정(水程)을 써야 할 것이."
○ "솔 바람 움직이지 않고 노화(露華)도 맑은데, 새벽녘 옷을 헤치고 앉아서 밝기 기다리네.
계산(溪山)에게 고금사 물어보려 하지만, 계산이야 어찌 고금 뜻을 알리."
○ "유명한 고장 70곳에 경치 모두 아름다운데, 큰 선비 가는 곳마다 돌 언덕을 덮었네.
여기서부터 소리 찾아 괴로움 구할 것이, 자손들 끝내 관재(關齋)를 폐지하오리."
○ "기선(祁仙)이 오랫동안 박라춘(博羅春)에 거주하였으니, 바닷물 어느 해에 풍진이 있었던고.
내 이제 나중 와서 옛 문서 뒤적이지만, 다른 날엔 다시 후에 오는 사람도 있으리라."
영빈관(迎賓館):오정문(午正門) 밖에 있는데, 지금은 조서를 맞이하고 사신을 영송(迎送)하는 곳이 되었다.
예전에는 영은관(迎恩館)ㆍ순천관(順天館)이 있었는데 아마 이 관을 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뿐인 듯하다.
학교 성균관(成均館):탄현문(炭峴門) 안에 있다.
○ 대성전(大聖殿)에는 오성 십철(五聖十哲)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동무(東?)와 서무(西?)에는 70제자 및 역대 여러 현인의 위판(位版)이 있다.
전 앞에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본조(本朝)에서 교관(敎官) 한 사람을 두었는데,
성종조에 본부 관원으로 두어 품계(品階)와 녹봉(祿俸)을 주었다.
○ 충렬왕(忠烈王) 조에 안유(安裕)가 국학(國學)이 쇠퇴함을 염려하여 양부(兩府)에 의논해서 6품관 이상은
각기 은 1근을 내고 7품관 이하는 포목을 차등 있게 내게 하여 양현고(養賢庫)로 보내어,
본전은 남겨두고 이식만 취하여 국학의 비용을 넉넉케 하니, 왕이 듣고 또한 내고(內庫)의 돈과 곡식을 내어
보조하였다.
안유가 또 남는 돈을 김문정(金文鼎)에게 주어 중국에 보내 선성(先聖)ㆍ선사(先師)와 70제자의 화상을 그려
오게 하고, 제기(祭器)ㆍ악기(樂器)ㆍ경사(經史)를 함께 구하여 오게 하고,
또 이산(李?)ㆍ이진(李)을 천거하여 교관을 삼았다. 이에 금내(禁內)ㆍ학관(學館)ㆍ내시(內侍)ㆍ삼도감(三都監)ㆍ
오고(五庫)의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와 7영(營) 12도(徒)들이 경서를 끼고 와서 수업하는 사람이 백으로 헤아리게
되었다.
○ 이예(李芮)의 의재기(義財記)에, "부(府)의 학당(學堂)은 곧 고려조 5백 년 간 인재를 배양하던 곳이다.
《고려사》를 상고하면 성종 초기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충렬왕 때 국학이라 고쳤는데,
이때 선성(宣聖)과 10철(哲)의 화상이 원(元) 나라에서 왔다.
충선왕(忠宣王)이 성균관으로 고쳤고 공민왕(恭愍王)이 다시 국자감이라 이름하였으며,
얼마 안 되어 다시 성균관으로 불렀다. 역대에서 각기 높이고 중히 여겼으므로 당대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들
이 모두 여기서 배출되었다.
우리 태조가 하늘에 응하여 혁명(革命)하자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고 이 부(府) 유후관(留後官)을 삼으니,
이른바 성균관이라고 하던 것을 부의 사람들이 학당(學堂)이라고 일컬었다.
문묘(文廟)의 모습이 예전과 같고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화상이 엄연(儼然)하게 그대로 보존되어 다른 향
학(鄕學)에 비할 것이 아니다.
성화(成化) 10년(성종 5년, 1474) 가을 9월에 상(임금)이 원릉(園陵)에 배알하려고 드디어 부(府)에 거둥하였으
며, 이튿날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조의 옛 궁궐 목청전(穆淸殿)에 나가서 수용(?容 임금의 화상)
을 우러러 절하고 몸소 제사를 드리고 예를 마친 다음, 곧 학당으로 거둥하여 선성 선사께 절하고 이어 명륜당에
가시니, 교수 백훈(白勛)이 유생을 거느리고 뜰에 들어가서 사배(四拜)하고 나오거늘, 임금이 의정부의 좌찬성
노사신(盧思愼), 우참찬 서거정(徐居正)을 명하여 유생들에게 술을 하사하고 쌀 30석과 면포(綿布) 50필도 함께
하사함으로써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주니, 실로 사문(斯文)의 큰 경사였다.
제생(諸生)들은 서로 더불어 재사(齋舍)에서 송축하고 부로(父老)들은 서로 더불어 시가에서 노래하였다.
내가 외람되이 유수(留守)가 되어 몸소 이 성대한 일을 당하여 큰 예식을 우러러 보고 삼가 머리 조아려 축하하
기를, '학교는 국가의 원기(元氣)로, 옛날부터 세상 도(道)의 높고 낮음을 그 학교의 흥폐(興廢)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고려조의 운수가 쇠해지면서 학교에 관한 정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아조(我朝)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성신
(聖神)한 군왕이 대를 이어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받들어 영재를 교육하니, 이것은 몸소 행하고 마음에서 얻은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요, 겉치레만 하고 이름만 내는 것만이 아니다.
성상께서는 전대의 공업을 넓히고 크게 하며, 문교(文敎)를 더욱 천명하여 교화를 두터이 하고 풍속을 면려하는
것으로先務)를 삼았다.
그래서 학교를 찾고 선성께 뵙는 일이 기록에 끊이지 않는데, 그중에도 옛 도성의 향학에 거둥하여 선성을 예알
(禮謁)하고 선비들을 권장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조종조(祖宗朝)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일이며,
또한 옛날에도 드물게 듣던 일이니 감히 우리 도를 위하여 경하하지 않겠는가.
이에 기둥과 서까래의 기울고 무너진 것, 창문과 기와 벽돌의 깨지고 없어진 것, 단청의 흐려져 선명하지 못한
것들을 고치고, 동무와 서무에 배향하는 위패의 더러워진 것을 바꾸며, 변두 보궤(?豆?? 제기)의 누추하고 파손
된 것을 새로 만들고, 솥[釜鼎]과 온갖 그릇의 미비한 것을 보충하였다.
또 위에서 주신 쌀과 포목을 삼가 기록하여 간직한고 때에 따라 출납하면서 그 나머지로 학용[學?]을 보조한다.
마침내 조정에 청하여, 경학(京學)의 규례를 따라 늦여름에는 유생들을 모아 글짓기를 시험보아 그 성적의 고하
를 매기되, 우등인 자를 취하여 곧 바로 회위(會?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과거)에 응시하도록 한다.
또 겨울 석 달에는 유생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재실(齋室)에 거처하면서 학업을 익히게 하는데,
공급하는 비용은 모두 위에서 하사한 것에 의지하고 관에서도 보조한다.
내가 불민하여 우러러 문명의 교화의 만분의 일도 돕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또한 일찍이 옛 사람들이 깨친 말[緖言]을 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심력을 다해서 일하는 것이
다. 성인(成人)과 소년[小子]이 모두 진취하는 바가 있어서 군자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면 훗날 조정에 이름이
알려지고 정치에 도움이 되는 자가 몇 사람이 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
제생들은 오직 마땅히 위의 뜻을 받들어 학업에 부지런하여 그것으로 행할 밑천으로 삼을 것이요,
제가 제일인 척하고 내 말로써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 하여 저 한자(韓子)의 제생들을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거의 위에서 제생들에게 기대하는 바도 아니요, 또한 내가 제생들에게 바라는 바도 아니다.
이 학당에는 옛날 공익을 위하여 쓰는 재산[義財]이 있었는데, 출납을 태만히 하여 지금 남은 것이 얼마 안 된다.
선비는 항상 현실에 어두워 실수하니, 만일 관에서 검속하고 살피지 않는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출납을 삼가하여 그 본전을 잃지 않아서 위에서 문학을 권장하고 교화를 진작하는 아름다운 의사를
천만세에 길이 전할 것이니, 이것을 뒤에 오는 유수에게 바란다.' 하였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석전시(釋奠詩)에, "북을 쳐서 반열(班列)을 가지런히 하는 시간은 바로 오경이니,
백관들 관복 입고 봄 정일(丁日)에 제사 드리네. 면류관 번쩍번쩍 깊은 전각에 빛나는데,
종소리 경쇠 소리 은은히 넓은 뜨락에 울리누나.
성인의 도는 저 하늘에 일월처럼 달렸는데, 황제의 큰 정치 만고에 단청처럼 빛나도다.
이 내 몸의 흐르는 땀 옛날 스승 자리에 참석하였던 것이, 백발[晧首]이 된들 경전 연구야 어찌 잊으리." 하였다.
역원 청교역(靑郊驛):보정문(保定門) 밖 5리에 있다. 산예역(?猊驛):성 서쪽 20리에 있다.
천수원(天壽院):성 동쪽에 있으니 곧 천수사(天壽寺) 옛터이다. 성화(成化) 병신년(성종 7년, 1476)에 유수
이예(李芮)가 정자를 원 곁에 있는 취적봉(吹笛峯) 아래에 짓고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고려 사인(舍人) 최사립(崔斯立)이 시를 짓기를, '천수문(天壽門) 앞에 버들개지 나는데,
술 한 병 가지고 와서 친구 돌아오기를 기다리네.
눈이 뚫어지게 저 멀리 석양녘 한길 가 바라볼 제, 많고 적은 행인들 가까이 오면 그가 아니네.' 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천수문은 고려조 5백년 간에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던 곳이었다.
성화 갑오년(1474)에 내가 유수로 여기 와서 보니, 이른바 천수문이란 것은 옛터만 남아 있어 잡초가 우거진
풀숲에 기와와 자갈이 모여 있는데, 부(府)의 사람들이 아직도 옛일을 따라서 서쪽 봉우리에 터를 잡아 대(臺)
를 짓고 큰 빈객(賓客)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서 보내고 맞이한다.
내가 하루는 여기에서 손님을 전송하다가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서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취적봉이라
고 하였다. 이에 고려조 전성기에 사대부들이 서로 이곳에서 보내고 맞이하며 노닐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 시대의 인물이 모이던 곳이며 사대부들의 거마(車馬)가 달리던 곳인데 어째서 누대나
정각의 구경거리가 없는가. 또 최사립의 이른바 천수문이라는 것도 어디인지 모르겠다.
대개 성조(聖朝)가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긴 지 거의 90년이 되었으니, 인물이 남쪽으로 옮겨가고 해가 오래
된 만큼 비록 지대(池臺)와 누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허물어지고 잡초가 우거져 덮이게 되었으니,
내가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의당 괴이할 것 없다. 이에 수레를 멈추고 옛터를 찾아 배회하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니, 원주(院主) 강귀수(康龜壽)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저희 부자가 서로 이어 원주(院主)가 되었으므로
이곳의 흥폐(興廢) 연유를 모두 자세히 압니다.
천수사는 곧 전조(前朝)의 대찰(大刹)로서 세상에서 전하기를 천만 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빈 터로 쓸어버린 듯하고 모두 밭두둑이 되었으며, 남은 것은 단지 여행객들이 숙박하는 작은 원(院)뿐
입니다. 예전에는 높은 누각 두어 채가 남쪽에 있었는데, 역시 다 무너지고 남은 것이 없습니다.
삼가 옛날 재목을 간직하여 중건하려고 하는데 다만 힘은 적고 일은 커서 뜻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원주의 말에 대하여 더욱 감회가 있었는데, 부하 관원들이 함께 말하기를, '국가에서 이 원에 원주를 두고
밭은 준 것은 대개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을 잊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옛 도읍지의 큰 부(府)에 빈객이 많으며 맞이하고 전송할 때는 반드시 여기에서 하는데, 풀이 난 들에 자리잡고
장막을 치는 데에는 그것을 옮기는 노고가 적지 않으며, 혹 비나 눈을 만나게 되면 손님이나 주인이 겨를이 없
어 예절을 차릴 수 없습니다. 더구나 부의 서쪽에는 영빈원(迎賓院)과 보통원(普通院)이 있는데, 동쪽에만 유독
없으니 어찌 한 가지 흠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서로 더불어 모의하여 강귀수가 보관하고 있는 재목을 이용하고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며 일없는 사람
들을 동원하여 작은 정자를 취적봉 아래 소나무 사이에 지었다. 공사를 마친 다음 부하 관원들과 함께 올라가
구경하니, 사방이 툭 트여 한눈에 멀리 내다보였다.
먼 산은 앞에 모이고 긴 냇물은 아래에 둘렸는데, 도로의 구불구불함과 인마(人馬)가 오가는 석양의 늦경치가
과연 최사립의 시와 같았다. 무릇 천수사는 사립의 시로 인하여 후세에 드러나고, 이 정자 역시 천수사와 함께
무궁토록 전해질 것인 만큼, 사립의 시도 또 없어져서는 안 된다. 이 시를 화답한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
만, 지금 전송 (傳誦)되는 것으로는 유독 시중(侍中) 홍언박(洪彦博)의 두 시가 현판 끝에 쓰여 있다.
후에 올라와 굽어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정자가 지어진 연유를 알아서 즐겨 화답하게 하고, 맡아 지키는 사람
으로 하여금 이 정자가 없어져서는 안 됨을 알게 하여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여 전의 공을 버림이 없게 한다면,
정자도 시도 장차 영구히 전해지고 없어지지 않아 서도(西都)의 승적(勝跡)이 될 것이다."
○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도성 문에서 1백보 되는 곳에 잇따른 봉우리가 뒤에서 일어나고 평
평한 시내가 앞에서 솟는데, 들 계수나무 수백 그루가 길을 끼고 그늘을 이루니, 길 가는 이들이 반드시 그 아래
서 쉰다. 수레와 말이 붐비고 어부의 노래와 초부(樵夫)의 피리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붉은 누대 푸른 전각이 소나무ㆍ전나무ㆍ연기ㆍ아지랑이 사이에 반쯤 나오며, 공자와 왕손은 패물을 차고 풍악
을 울리며 맞이하고 전송하는 것을 반드시 여기에서 한다.
예종조(睿宗?)의 화가 이녕(李寧)이 그림으로 그려 송(宋) 나라 상인에게 주었는데, 후에 왕이 송 나라에서 명화
를 구하다가 한 좋은 그림을 얻어 오니, 이녕이 아뢰기를, '이것은 신이 그린 천수사 남문도(天壽寺南門圖)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 고려조의 강일용(康日用)이 백로[鷺?]의 부(賦)를 지으려고, 매번 비를 무릅쓰고 천수사 남쪽 시내에 이르러
구경하는데, 하루는 문득 한 구절을 얻으니, "날아서 푸른 산 허리를 벤다." 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기뻐서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렀다." 하였다.
○ 이인로의 시에, "손을 전송하려는데 손은 아직 안 오고, 중을 찾는데 중 역시 없구나.
오직 숲 밖의 새만 남아서 종일토록 술병 차고 오라 권하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하늘까지 이어진 풀빛엔 푸른 연기 어둡고, 땅에 가득한 배꽃은 흰눈을 날리네.
이곳은 해마다 이별하는 곳, 손을 보내는 일 아니라도 혼이 사라지네." 하였다.
○ 고려 홍언박(洪彦博)이 최사립(崔斯立)에게 화답한 시에, "시내 깊고 버들 푸른데 어린 까마귀 날고,
길 가득히 맑은 그늘에 말에 맡긴 채 돌아오네. 필경 공명이란 어디다 쓸 것인가.
돌이켜 생각하니 52년 일이 모두 아니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번화한 일 어디 가고 들 구름만 나는 것이, 흐르는 물 무정하여 간 채 오지 않누나.
시구는 아직도 보내고 맞이하던 땅에 남아 있는데, 세상의 인물들은 이미 모두가 아니네."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무너진 담장, 깨진 주춧돌에 희미한 개똥벌레 나는데,
도성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킴을 얻고 돌아왔네.
문득 천년 만에 요동(遼東)학의 울음 같으니, 산천은 전과 같지만 옛사람은 아니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정자 아래 맑은 강에 흰 새가 나는데, 술 가지고 정자에 올라 가는 님 보내려네.
인생 백년에 절반은 수심 속인 것이, 오직 취한 마을[醉鄕]에 시비 없구나." 하였다.
약왕원(藥王院) : 진봉산(進鳳山) 아래 있다. 대비원(大悲院):서보국사(西補國寺) 곁에 있다.
마전원(磨前院):청석동(靑石洞) 남쪽에 있다. 주파원(注波院):성 서남쪽에 있다.
서보통원(西普通院):영평문(永平門) 밖에 있다
교량 탁타교(?駝橋) :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다.
옛날에는 만부교(萬夫橋)라 하였고, 지금은 야교(夜橋)라고 칭한다. 고려 태조조에 거란(契丹)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보냈는데, 왕이,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좋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으니 너무도 무
도하다. 멀리 교린(交隣)을 맺을 수 없다." 하면서 그들과의 교제를 끊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 보내며 낙
타를 다리 아래 매두어 모두 굶겨 죽였으므로 인하여 탁타교라 이름하였다.
○ 명종(明宗) 때에 이의민(李義旼)이 탁타교에서 저교(猪橋)에 이르기까지 제방을 쌓고 버들을 심으니 사람들이
새 길[新道]이라 하였다.
황교(黃橋) : 오정문(午正門) 밖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아침에 자신문(紫宸門)에서 사직하고 저녁에 황교원(黃橋院)을 지난다.
촉(蜀) 나라 사신은 만리를 가는데, 노인이 백 병 술을 가지고 와서 전송하네. 노래하는 눈썹은 푸른 구름이
아름답고, 춤추는 허리는 붉은 옥이 보드랍네.
이별하는 술잔 자주 돌고, 떠나는 마음 벌써 도는구나. 밤 들어서야 길에 오르니, 말 탄 군사들 호위해 달리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일찍이 송도 팔영시(松都八詠詩) 읽었는데, 황교 만조(黃橋晩照)가 제일 마음에 있었네.
이번 와서 바로 황교의 늦은 날 만나니, 한 번 전의 시 읽고 한 번 껄껄 웃는다." 하였다.
선인교(仙人橋) : 자하동(紫霞洞)에 있다. 수창교(壽昌橋) : 바로 수창궁 앞 다리인데,
10개의 냇물이 흘러서 그 아래를 지나간다.
백금석교(白金石橋) : 시가에 있다.
풍우교(楓友橋) : 남대문 밖에 있는데, 물은 백천(白川)이라 한다.
학교(鶴橋) : 사동(蛇洞)에 있다.
선죽교(善竹橋) : 좌견리(坐犬里) 북쪽에 있다.
저우교(猪友橋) : 남대문 밖에 있는데, 물은 흑천(黑川)이라 한다.
산석교(傘石橋) : 시가에 있다. 영의서교(永義署橋) : 천동(泉洞)에 있다.
옥장교(玉粧橋) : 판방동(板房洞)에 있다. 대교(大橋) : 성 서쪽 10리에 있는데 조수가 왕래한다.
십수천교(十水川橋) : 판방동(板房洞)에 있다. 병부교(兵部橋) : 연경궁(延慶宮) 남쪽에 있다.
부방 동부(東部) : 방(坊) 이름은 인흥(仁興)이라 한다. 남부(南部) : 방 이름은 예안(禮安)이라 한다.
서부(西部) : 방 이름은 의흥(義興)이라 한다. 북부(北部) : 방 이름은 지안(智安)이라 한다.
○ 고려 태조 2년(919)에 시전(市廛)을 설치하고 방리(坊里)를 나누었는데, 성종(成宗)ㆍ현종(顯宗) 때에 다시
5부 35방으로 고쳐 정하였다.
동부 7방은 안정(安定)ㆍ봉향(奉香)ㆍ영창(令昌)ㆍ철령(哲令)ㆍ양제(楊堤)ㆍ홍인(弘人)ㆍ창령(倉令)이라 하고,
남부 5방은 덕수(德水)ㆍ덕풍(德?)ㆍ안흥(安興)ㆍ덕산(德山)ㆍ안신(安申)이라 하며, 서부 5방은 삼송(森松)ㆍ
오정(五正)ㆍ건복(乾福)ㆍ진안(鎭安)ㆍ향천(香川)이라 하고, 북부 10방은 정원(正元)ㆍ법왕(法王)ㆍ흥국(興國)ㆍ
오관(五冠)ㆍ자운(慈雲)ㆍ왕륜(王輪)ㆍ제상(堤上)ㆍ사내(舍乃)ㆍ사자암(獅子巖)ㆍ내천왕(內天王)이라 하며,
중부 8방은 남계(南溪)ㆍ흥원(興元)ㆍ홍도(弘道)ㆍ앵계(?溪)ㆍ유암(由岩)ㆍ변양(變羊)ㆍ광덕(廣德)ㆍ성화
(星化)라고 한다. 우리 세조 12년(1466)에 개성(開城)이 외관(外官)이 되니,
옛 제도를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드디어 줄여서 4부 4방으로 하였다.
공해 개성부 본사(本司) : 서부 암곶리(巖串里)에 있다.
혜민국(惠民局) : 남대문 밖 네거리에 있는데 층각(層閣)이 있다.
군기감(軍器監) : 두현(荳峴) 남쪽에 있다. 사포서(司圃署) : 보정문(保定門) 밖에 있는데 곧 개국사(開國寺) 옛
터이다.
봉상시(奉常寺) : 부 안의 북부 보은리(報恩里)에 있다. 서적전(西籍田) : 부의 동쪽 24리에 있다.
불우 왕륜사(王輪寺) : 송악산 기슭에 있는데, 고려조에는 큰 절이었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큰 전각 황량하고 중은 보이지 않는데, 황금 큰 부처가 혼자서 높이 앉았네.
티끌이 선탑(禪榻)에 쌓였으니 바람이 비질하고, 밤이 창살에 어두운데 달이 등불되는 것이.
늙은 농부 밭을 갈다가 옛 섬돌 일으키고, 지나는 사람 길을 물어 높은 언덕 지나가누나.
높이 선 한 조각 시냇가의 돌은, 만고에 말없이 흥하고 망하는 일 다 보았다네." 하였다.
구산사(龜山寺) : 송악산 소격전(昭格殿) 동쪽 옆에 있다. 선월사(仙月寺)도 있다
○ 고려 문종이 이 절에 거둥하여 구대(龜臺)에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태자(太子)와 재추(宰樞)가 모시고 잔
치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충렬왕(忠烈王)이 이 절에 거둥하여 구재(九齋) 생도들의 여름 공부를 시
찰하니, 여러 생도들이 가요(歌謠)를 드리거늘, 왕이 과일과 술을 하사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병중에 어름어름 세월도 잘 가니, 산에 가득한 단풍잎에 또 가을이 깊었구나.
10년 형설[螢雪]로 창 앞에서 공부하던 뜻으로, 오늘 와서 나 혼자 구산사 누대에 기대섰네." 하였다.
금종사(金鐘寺) : 송악산 기슭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멀리 종경 소리 따라, 늦게 조용한 절간에 들어 갔네.
향불 피워 진인(眞人)에게 예배하니, 금 부처가 빛나기도 하네. 약한 바람 불등(佛燈)을 흔들어, 꺼지려다 도로
환해지는 것이. 승방(僧房)에 이부자리 없으니 앉은 채로 지내는 찬 밤이 길기도 하구나.
화롯불 헤치니 아직도 붉으스레한데, 주인은 그대로 고요히 앉았네. 날 밝자 바위 곁으로 올라가는데, 두레박
소리 돌 우물에서 나네. 다시 앉아 좀 머무는 사이, 눈 뿌리고 바람 다시 세차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높은 다락 하늘 밑에 솟았는데, 의지해 서니두건이 기울어지네.
자리 밑엔 거울 속에 용이 서려 있는데, 인가는 저 멀리 만 리나 격해 있는 것이. 고승은 연꽃 마주 보는데, 그윽
한 새 소리 낮의 고요함을 깨뜨리네. 내가 시서(詩書)만 탐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중니(仲尼)의 자취 아득하
기만 하구나. 시론(詩論)은 맹랑한 것을 한탄하고, 배반(杯盤)은 낭자함을 사과하네.
서쪽 언덕에 문득 그늘지니, 지는 해가 반쯤 높은 벽에 걸렸네. 시를 써서 이 놀이 적어 둘까. 다시 시냇가 돌을
쓸고 있네." 하였다.
○ "금종루(金鐘樓) 사랑하고, 또 금종수(金鐘樹) 사랑하는 것이, 난간 사이 빈 집이 달렸는데, 아침 저녁으로
연무(煙霧) 일어나네. 우러러보니 쬐는 해 숨는 것은, 아마도 나는 구름 지나는 것이리. 더구나 그윽한 시냇물
소리 들리니, 유연한 이 내 마음 기이한 운치 느끼겠네. 정말 깊은 생각을 따를 만하여, 곧 현포(玄圃)에 이르고
자 하네. 우습고나, 저 산 아래 사람들, 속세에서 흰 깃[白羽] 밝히는 것이 . 머리 위 비녀 만져보며,
또한 다시 내 마음 돌아보네." 하였다.
석방사(石房寺) : 송악산에 있다.
○ 이색의 시에, "돌로 지은 절 집이 깊은 구렁에 임했는데, 날아 떨어지는 샘물은 끊어진 언덕을 둘렀네.
나무통을 이어 먼 곳에서 오는데, 벽을 격해 들으면 그 소리 더욱 아름답네. 바람이 베개에서 나는가 했는데,
도리어 비가 섬돌에 떨어지는 소리인 듯하구나.
자연 오장이 맑아지니, 절승한 이곳이 득심재(得心齋)이네." 하였다.
건성사(乾聖寺) : 송악산에 있다.
○ 이규보의 시에, "한 조각 참선의 마음 이미 차가운 재라. 말을 잊었거늘 무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운운
하랴. 나도 이제 운암(雲巖) 장로 같음을 면했나봐,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일찍이 백장(百丈)을 따라 돌아왔다오."
하였다.
광명사(廣明寺) : 연경궁(延慶宮) 북쪽 송악산 기슭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옛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한다. 목종(穆宗)의 진영(眞影)이 있다.
○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시에, "홀로 선방(禪房)을 찾으니 지경이 점점 깊어지는데, 상춘대(賞春臺)에서 옛
친구의 마음 알겠네. 맑은 바람 북쪽 탑(榻)에는 청산이 그림자 지고, 향기로운 안개 동쪽 못에는 푸른 나무
그늘졌네. 소라 모양은 먼 하늘에 점친 것, 천리나 뻗은 것은 뫼뿌리인데, 꾀꼬리는 실버들가지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황금이네. 그 사이에 신기한 상서 어찌 묻기를 기다리리.
난새ㆍ 봉새 와서 금수림(錦繡林)에 깃들었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병 많은 이 내 몸 등잔 그림자 속이요, 파하려 하는 외로움 꿈 빗소리 중이로구나.
내 지금 눈썹은 찡그려 무엇하리, 인끈일랑 던지고 노원공(老遠公) 따라 가려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놀란 바람 숲 속에 들어 풍악 소리 아뢰는데, 손님 부르는 그윽한 새는 이름을 알 수
없네. 섬돌 아래 꽃빛은 안개가 난만하고, 문 앞의 물빛은 거울이 맑기도 하구나. 몇 해나 망령되이 나타나서
근심 성[愁壘]을 공격했나. 오늘에야 참을 찾아 화성(化城)에 들어왔네. 갈 즈음 술 취하여 얼굴 가득 붉으니,
빈 배에 우레 소리는 나지 않게 되었네." 하였다.
지장사(地藏寺) : 부 남쪽 3리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양류(楊柳)에 연기 섞여 실처럼 드리운 것이, 땅에 가득 봄비 젖는데 제비들 날고
나누나. 도롱이 입고 지나는 손은 그 얼마나 되는지, 새 시나 한 수 얻어서 돌아가리라." 하였다.
송림사(松林寺) : 용수산(龍首山) 성안에 있다. 연복사(演福寺) : 도성 중앙에 있는데, 옛 이름은 보제사(普濟寺)
이다. 큰 전각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며 그 앞 문을 신통문(神通門)이라 한다. 5층 누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지금 성중의 부자 상인이 재물을 내어 고쳐 지어서 채색[金碧]이 휘황하고,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린다.
○ 권근(權近)의 탑중창기(塔重創記)에, "부처의 도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로 덕을 삼고 응보가 틀리지 않는
것으로 징험을 삼는다.
그 말이 지극히 넓고 커서 번역되어 중국에 전하고 사해에 널리 퍼져 천년을 두고 이어지는데, 오랠수록 더욱
공경한다. 위로 왕공 대신(王公大臣)에서 아래로 어리석은 남녀에 이르기까지 복리(福利)를 바라서 높여 믿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원(寺院)과 탑(塔)ㆍ묘(廟)의 시설이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며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기부터 받들어 섬기기를 더욱 성심으로 하여 성중에 절이 민가보다도 많았으며,
그 전각의 웅장하고 높이 솟은 것이 지금까지 아직 남아 있으니, 그 당시에 지극히 높이 받들었던 것을 상상하
여 알 수 있다. 고려 왕씨가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에도 대개 신라를 따라 폐하지 않아 그것으로 복 받는 터전을
삼아서 중외(中外)에 사찰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이른바 비보(裨補)라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사실 도성 안 시가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호칭은 당사(唐寺)이다. 방언(方言)에 당(唐)은 대
(大)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채에 이르며, 안에 3개의 못과 9개의
우물을 파고 그 남쪽에 또 5층 탑을 세워서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었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옛 책에 갖추 적
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덧붙여 말하지 않겠다.
왕씨가 나라를 누린 지 5백 년 간에 자주 전란을 겪어 이 절의 흥했다 폐했다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이 탑이 무너진 것도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세우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후에 미친 중 장원심(長遠心)이란 자가 있어 권귀(權貴)에 인연하여 백성을 소란시켜 재목을 베었지만 끝내 또
한 이루지 못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장수와 정승들의 힘을 입어 조종(祖宗)의 통서(統緖)를 회복하고 즉위한 후에는 부처를 섬기
는 데 더욱 힘을 썼다.
이에 중 천규(天珪) 등을 명하여 공인들을 모집하고 역사를 일으켜 신미년(1391) 2 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옛터
를 파고 나무와 돌을 메워서 그 기초를 튼튼히 하였고, 지금 와서야 집을 세우니 가로세로 6채인데 웅장하고도
넓으며, 탑은 5층에 이르고 편평한 돌로 덮었는데 거의 준공하게 되었을 때 헌신(憲臣) 중에 말하는 이가 있어
중지되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무(神武)한 자질로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얻어 문득 왕위에 나아가 백성과 사직을 주재하
여 지극히 어진 마음으로 살리기를 좋아하고 큰 덕으로 만물을 기르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도와서 정치의
도가 밝고 높아져 온갖 폐단이 모두 고쳐지고 온갖 교화가 모두 새로워졌으니, 무릇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
을 은혜롭게 하는 정사가 거행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부처의 도가 자비로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하여 높이고 선양하는 방법을 그대
로 지켜서 폐하지 않았으니, 창시(創始)하여 큰 법을 세우고 계획을 남겨 후손에 전한 바가 넓고도 갖추어졌다
고 하겠다. 이에 공장들을 감독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낙성하니 실로 임신년 겨울 12월의 일이었다.
계유년 봄에 단청을 장식하니 꿩이 구름 밖을 나는 듯, 새가 하늘 가에서 날개 짓하는 것 같으며 채색이 휘황하
여 공중에 번쩍인다. 위에는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을 간직하며 아래는 비로(毗盧)의 초
상을 모시니 국가에 복이 되어 길이 만세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름 4월에 문수회(文殊會)를 열어서 낙성식을 거행하고, 상이 신 권근을 명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게 하였다.
신 권근이 듣건대, 불가의 말에, '탑을 세우는 것은 덕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층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덕의 높
고 낮음을 밝힌다. 5층 이상이 바로 불탑(佛塔)인데, 그 공덕과 보응(報應)에 대한 설을 말함이 극히 크고 넓기
때문에 아육왕(阿育王) 이후로 역대 임금들이 높여서 믿고 탑을 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梁) 나라 때에 달마(達磨)가 무제(武帝)의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공덕에 대한 물음에 한 조각의 공
덕도 없다고 대답하였으니, 대개 무제가 마음을 닦지 않고 재력만 허비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지금은 재물이 백성에게서 나오지 않고 노력이 농민을 괴롭히지 않으니, 그 공덕을 어찌 쉽게 헤아리겠는가.
공덕이 많으니 보응이 더욱 드러날 것이요, 하늘과 사람이 교대로 경축하며 죽어서나 살아서 함께 힘입어서 이
로운 은택을 무궁토록 전하고 큰 행복을 영원히 계속하여, 나라와 함께 아름다움이 만대토록 더욱 굳건함을 정
말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신 권근이 손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가사를 드리기를, '부처의 말씀이 서역(西域)에서 일어나, 사해(四海)
로 흘러 전하였으며 이어 중국 말로 번역되었네. 보응을 설명한 것이 매우 넓으니, 상하가 부지런히 복을 빌지
않는 이가 없네.
탑(塔)과 묘(廟)의 건설이 어찌 그리 높고 큰가. 하늘 아래 가득하고 우주간에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네.
신라에서 받들어 섬기기를 제일 정성스럽게 하였는데, 고려조에서도 준수하여 변함 없었네.
연복사 저자 곁에 있는데, 안에 3지(池)와 9정(井)이 파 있네. 그 남쪽에 탑이 있는데 5층 누각, 어느 때부터인지
벌써 무너져 넘어진 것을, 여러 대를 두고 중건하려다가 마침내 못하였는데, 천운이 쇠하였으니 될 수 있겠는가.
우리 성군(聖君) 큰 덕 있어 천명(天命)과 인심이 함께 돌아가니 운수를 타고났네. 일만 교화 모두 새롭고 온갖
폐단 고쳐지는데, 또한 불교에 의지하여 국가를 이롭게 하는구나.
5층을 다시 세워 공사를 마쳤는데, 지으면서 농민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네. 높다랗고 우뚝하여 저 송악산
과 맞섰는데, 빛나는 구름과 노을, 단청이 눈부시네. 위에는 불사리 모시니 그 신령함이 빛나고,
중간에는 대장경 간직하니 모두 일만 축이네, 아래는 비로자나불 모시니 엄한 꾸밈 있구나.
공덕이 제일 승하니 너무도 풍요롭고 유익한데, 거룩한 임금 일만 년에 종사를 받드네. 큰 복록 천년 억년 이어
가니, 뭇 생민들 고루고루 복리 은택 입으리. 신을 명해 가사 지어 돌에 새기라 하니 신의 가사 거칠고 졸렬하여
읽을 수 없다. 다만 원하건대, 이 탑 넘어지지 않고 나라와 함께 굳건하여 무궁토록 전하옵소서.' 하였다." 했다.
○ 이곡(李穀)의 새 종[新鐘] 명문에, "지정(至正) 6년(충목왕 2년) 봄에 자정 원사(資政院使) 강금강(姜金剛)과
좌장고 부사(左藏庫副使) 신예(辛裔)가 천자의 명으로 금폐(金幣)를 가지고 와서 종을 금강산에서 주조하였다.
이때 산 밑에 여러 고을에 흉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다투어 공에게 달려가 밥을 얻어 먹고서 살아났다.
종이 완성되고 공이 돌아가려 하는데, 국왕과 공주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금강산이 우리나라 안에 있는데,
이번 성천자(聖天子)께서 근신(近臣)을 보내, 크게 불사(佛事)를 하여 무궁토록 전하게 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내가 털끝만큼도 보조한 것이 없었으니 어찌 위에 보답할 것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
를, '그렇습니다. 운운. 큰 종을 오래도록 폐한 채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 솜씨 있는 대장장이가 옴으로 인하
여 다시 주조하면 또한 위의 뜻을 받들고 없어지지 않는 공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에게 말하니, 공이 기꺼이, '그렇다.' 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완성하였는데, 왕이 신 이곡을 명하
여 명문을 짓게 하였다.
명문에, '뭇 사람의 귀를 가지런히 하는 것은 금 소리에 당하는데,
삼군(三軍)을 정제하는 것은 팔음(八音)이 조화되는 것. 구담(瞿曇) 늙은이 말 뜻도 깊은데, 지하에 옥(獄)이 침
침도 하다네. 일만 번 나고 일만 번 죽는 인생 괴로움도 많으니, 취한 듯 꿈결인 듯, 귀머거리도 되고 벙어리도
된다네.
한 번 종소리 들으면 모두 마음 깨치는 것 도성의 연복사 큰 절간이네. 새 종소리가 남쪽 마을 진동하니,
위로는 저 하늘에, 아래로는 지하에 사무치네. 모두 맑은 복 입는데, 묘하고도 장엄하니 동쪽 나라의 임금과 신
하 화봉(華封)의 축하 세 가지네. 천자 만세 살아 장수하고 아들도 많으니, 가 없는 경사 나라와 함께 하리.
신을 명하여 명문 지어서 새겨 두게 하네.' 하였다." 했다.
○ 정포(鄭?)의 시에, "금은으로 장식한 사찰이 성곽을 이웃했는데, 밤마다 종을 울려 시간을 어기지 않네.
저 소리에 깊은 반성 일으킨다 누가 말하였는가. 다만 명리(名利)에 분주한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네." 하였다.
안화사(安和寺) : 송악산 자하동(紫霞洞)에 있는데, 연의정(漣?亭)과 자하문이 있다.
○《파한집(破閑集)》에, "안화사는 예종(睿宗)이 창건한 것인데, 송 나라 황제(휘종(徽宗))가 이 절을 창건한다
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사신을 보내서 법전에 쓸 재물과 화상을 만들어 보내고 어필로 친히 편액을 써서 채경(蔡
京 휘종의 대실)을 명하여 문에 걸게 하였는데, 그 단청과 구조의 아름다움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다.
절 문을 나서서 어화원(御花園)에 이르기까지 거의 6, 7리는 되는데, 붉은 언덕과 푸른 뫼뿌리가 가로 펴지고 옆
으로 펼쳤으며, 시내가 있어 돌길을 따라 흐르는데 물소리가 패물이 울리는 것 같으며, 사면으로는 소나무와 잣
나무만이 하늘에 닿았으며, 한여름이라도 언제나 초가을 같고, 왕래하는 사람들은 병풍 속에 있는 것 같다.
정승 윤언이(尹彦?)가 이곳에서 묵다가 꿈에 호종조(胡宗朝 중국의 술사)가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둥실둥
실 떠 와서 자취문에서 만난 것을 보고 한 절구(絶句)를 짓기를, '오색 구름 깊은 곳이 바로 우리 마을인데,
연기가 누대를 잠가 세월이 길기도 하였네. 옛날 함께 놀던 친구들 생각하니 지금 분주히 꿈길을 지나가는 듯하
네.' 하였다." 했다.
○《역옹패설(?翁稗說)》에, "정국(靖國) 안화사에 돌이 있는데, 예종이 당률(唐律)로 사운시(四韻詩) 한 편을
새겼다. 거기에서 태자 아무개가 썼다고 한 것은 인종(仁宗)의 휘(諱) 자이다. 이때 왕과 태자가 모두 정신을 가
다듬어 공부하며 높은 선비들을 맞이하고 방문하여 고상한 모습이 중국의 풍이 있으니 후세에서 미칠 수 없다."
하였다.
○ 고려조 김부식(金富軾)의 시에, "깊은 가을에도 뜰 앞 나무 그림자 총총하고, 고요한 밤 되면 돌 위의 샘물
소리 커지네. 잠 깨자 서늘하니 비 온 줄 알겠는데, 지난 날 갈대 속 어선(漁船)에서 자던 일 생각나누나."
하였다.
○ 고려조 유공권(柳公權)의 시에, "소나무 길 험한데, 돌이 절로 층계 되었네. 속인들은 신선 지경에 오지 않게
함이리. 어가 문득 황금 절에 거둥하더니 임금님 조금 있다가 백옥 누에 오르시네. 안개와 달은 사람을 머물게
하여 3일 간 구경하게 하고, 시내와 산은 함께 온갖 근심 풀게 하네. 바람 따라 들리던 매미 소리 그치니 지원
(祗園) 고요하고, 골짜기의 새들 울고 나니 소실(小室)이 그윽하구나. 뜰앞의 잣나무는 전과 같은 온실 나무인데,
난간 너머 시냇물은 바로 예천(醴泉)이 흐르누나.
선승(禪僧)의 시구는 푸른 구름이 저무는데, 법부(法部)의 음악소리 단풍잎 가을일세, 북쪽 국경에 이즈음 전란
이 걷혔다는데, 남쪽 고을엔 벌써 추수철이 되었다네. 태평 성대 여가도 많아 어필을 휘두르고, 큰 문장 한 편을
이루어 명승놀이 적었네. 패(沛) 땅 지나다 잔치하여 취하던 일 무엇이 아름다우리, 분수(汾水) 건너며 진토록
즐기던 것도 부끄러운 일이네.
하찮은 신이 외람되게 노래하는 반열에 참여하니, 스스로 무염(無鹽) 땅에 의지해서 근심 없음이 부끄럽네."
하였다.
○ 고려 최당(崔?)의 시에, "단풍 든 가을 산에 비단이 층계를 지었는데, 선경(仙境)을 방불한 봉린주(鳳麟洲)이
네. 감색 자리는 처음 보광전(?光殿)에서 파하고 화려한 잔치는 돌아와서 화악루(花?樓)에 열었네.
국화는 서리에 물들어 누르니 늙는 것 물리치고, 풀은 가을 빛 머금어 푸르니 근심 잊기를 권하네.
산 아지랑이 푸른 일산에 젖으니 바람에 번득여 무겁고, 동구에 푸른 하늘 트였는데 햇빛 쪼여 그윽한 것이.
언덕을 덮은 단풍은 새로 이루어진 부귀인데, 처마에 흥청이는 푸른 노송 예전 풍류 그대로이네.
달이 석벽(石壁)에 밝으니 원숭이가 밤새워 울고, 이슬이 구슬 계석에 차니 학이 가을을 알리네. 소의 간식
(宵衣?食)으로 근로하던 일 읊는 중에 잊는데, 수운(水雲)의 아름다운 경치 눈앞에 모여드누나. 영원(?原)의
친척은 세 번 접견을 받았고, 노서(鷺序)의 이름난 신하들은 한 번 노는 것을 좇았네. 번개치듯 돌아가는 금 술잔
에 천일온(千日?) 드는데, 별처럼 벌린 옥 도마엔 팔진미(八珍味)가 가득하네.
불초한 이 몸 외람되이 충신 잔치에 참여하니, 눈에 가득 공연히 갈매기 수심 가지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궁성[鳳城] 북쪽 제일 높은 봉우리, 신령한 솔개 날개를 펴고 공중을 나는 것이.
한 줄기 급한 시내 구름 밖에 나가는데, 얼음 언덕에 구르는 돌에 옥 무지개가 번뜩이네. 물가를 따라 3, 4리를
걸어가다가 문득 보니, 황금 문패에 자취(紫翠)로 써 있네. 아, 저 누대 높이 하늘을 받쳤는데, 붉게 흐르고 푸
르게 솟은 것은 구름 연기를 불태울 것 같구나.
어찌 월전(月殿)이 공중에서 떨어지다가 땅에 닿자 그만 부처님 전각 될 것을 알았으리.
산이 오체(五體)가 무너지듯 처음 부처께 예배하고, 곧 구름 낀 방[雲房] 향하여 스님에게 뵈이네. 스님 깊이 거
처하며 세속 인연 잊었으니, 눈[雪] 가운데 푸른 대요 물 위의 연꽃이네. 창밖에 가득 용상(龍象)을 그렸으니,
속객이야 정결한 자리에 모시기 합당치 않네. 어찌 알았으랴, 한 번 웃고 빛난 모습 서로 대하여, 종일토록 흐뭇
한 마음 즐겁게 의자에 마주 앉았네. 입계(立溪)의 푸른 차를 혜산천(惠山泉 송 나라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차
끓이던 샘물)으로 끓이니, 주발 위에 쏴쏴 솔바람 소리 불어오누나.
다시 도령(陶令) 산에 나가기를 바쁘게 함을 혐의하여 아이 불러 술잔 가져다가 도장(道漿) 붓게 하네.
서쪽 봉우리에 해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는데, 탕휴(湯休)의 벽운구(碧雲句)를 앉아서 듣는 것이 육사(六師)가
어찌 유독 놀라 붓을 놓을 뿐이랴.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로 하여금 행랑에 앉게 하다네. 인생은 소란하여
한바탕 꿈인 것, 곡(穀)의 장기와 장(藏)의 독서가 모두 양을 잃었네.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는 수운(水雲)에
매여 살고, 관중(管仲)과 안영(晏?)은 명리(名利)에만 끌렸네.
공무 여가에 중을 찾아 안팎으로 어느 벗을 따르며 묻지 않은 것과 어떠한가.
다만 부끄러운 것은 노쇠하여 붓도 늙었는데, 만물이 나를 향해 웅장한 모습 다투려 하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옥난간은 누가 다시 수리했나. 지초 일산은 두 번 오지 않네. 푸른 산 둘러 구름만이 잠겨 있
고, 꽃다움 찾으니 풀이 무성하기도 한 것이. 그림 처마는 새의 날개를 세운 듯, 이끼 낀 돌은 푸른 용이 누운 듯.
동산의 사슴은 누대에 뛰놀고, 바위 위의 중은 면류관을 아는지.
폐하고 흥한 나머지 고목만이 남았고, 고금사 물어 무엇하리. 찬 시냇물만 흐르누나. 지난 일 누구 찾아 물으리.
그윽한 회포 혼자서 근심할 뿐이네. 좋은 꽃은 곱게 피어 보조개지고, 우는 새는 노래 소리 울려오네.
예전 시대 신선 종적 아득한데, 중흥하는 왕기(王氣)가 여기 떠 있네. 연하(煙霞)와 꽃은 맑은 흥취로 맞는데,
산과 물 끝까지 찾아 들어가네. 지나간 일 조문하니 외로운 정자 고요하고, 참 근원 찾으니 한 칸 방이 그윽하구
나. 백련(白蓮)은 정절(靖節)을 맞이하고, 황벽(黃蘗)은 배휴(裵休)를 끌어당기네.
달 밝으니 삼경이 대낮이요, 소나무 바람부니 유월도 가을이네. 종소리 숲 밖에서 울리고, 사람들의 말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누나. 일만 경치 시로는 못 다 적을 것이, 다음 해에 꿈에서나 볼는지." 하였다.
○ 청산은 "정말 친구인 것이, 그윽한 사람 온다 기뻐하는 것 같구나. 올 때에 맑은 경치를 주니 바람과 해가 참
으로 조용하고 아리땁구나. 산에 간 지 얼마 안 된다는데, 부슬부슬 빗소리도 아름답네.
머리털 흩뜨린 채 바람 부는 난간에 누우니, 한바탕 코고는 소리 울리네. 일어나 보니 다시 맑게 갠 것이,
나무 끝에 둥근 해 걸렸네.
우는 매미는 잎에 가려 노래하고, 싸우는 참새는 가지를 다투다 떨어지네.
고깔 쓴 중 손수 차 달이며, 나 보고 향기도 빛도 갖추었다 자랑하네. 나는 말하기를, '늙고 목 타는 놈이 차의
좋고 나쁜 것 어느 겨를에 의논하겠는가.' 일곱 사발 마시고 또 일곱 사발 마시니, 바위 앞의 물이 마르겠네.
이때 가을이 시초라, 남은 더위 아직 풀리지 않았네. 한낮에는 찌는 듯 덥지만, 저물녘 서늘함은 그런 대로 기뻐
할 만하네. 푸른 외 수정(水精)을 씹는 듯, 찬 얼음물이 이를 쑤시네. 푸른 복숭아 두 볼이 붉은데, 씹고 나면
졸음이 다 없어지네. 누웠다 섰다 하며 스스로 돌아갈 줄 모르니, 이번 놀이는 참으로 마음 흐뭇하구려." 하였다.
불은사(佛恩寺) : 옛터가 대평관(大平館) 북쪽 골짜기에 있는데, 그 산은 비슬(琵瑟)이라고 한다.
○ 이곡의 기문의 대략에, "절은 광종 때부터 약사 도량(藥師道場)이 되었으며 옛 이름은 유암(留巖)이다.
왕이 날마다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일정한 수효가 있었는 데, 하루 아침에는 한 명이 적었다.
그런데 길에 모습이 매우 추한 자 한 명이 있으므로 비로소 자리 아래까지 데려왔다.
좌우의 사람들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막둥이 중[末比丘]은 아예 왕궁에서 공양 올리는 데 참여하였다고 말하
지 말라.' 하니, 중이 말하기를, '너도 친히 약사(藥師)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고는 공중으로
걸어 가다가 끝내 유암(留巖) 우물 속으로 숨었다.
왕이 이에 그 절을 크게 하고 높여 믿으며 비로소 그 현판을 고쳤다." 하였다.
관음굴(觀音窟):박연(朴淵) 상류에 있다. 절 뒤에 바위 구멍이 집처럼 된 것이 있고,
그 안에 관음불 두 석상(石像)이 있으므로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
위에는 정자(正慈)ㆍ실상(實相)ㆍ수정(首頂)ㆍ보리(菩提)ㆍ관불(觀佛) 등이 암자가 있다.
고려 광종(光宗)이 처음으로 그 곁에 집을 지었는데, 우리 태조가 잠저(潛邸) 때에 중건(重建)하였으며,
이색(李穡)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혼자서 나무꾼 따라 산문(山門)에 들어가니, 언덕을 낀 성긴 소나무에 길이 저절로
나뉘었네. 몇 조각의 채색 깃발은 석양에 밝고, 한 봉우리의 찬 종소리는 가을 구름을 격해 들리네.
밤 못의 흰 기운은 용이 일찍이 숨어 있고, 소나무 달 아래 맑은 소리 학이 홀로 있네.
돌아보니 서울이 10리가 안 되니, 남북으로 오가는 거마들 분분하기도 하구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승방[禪房]이 열 주(?)만 한데 흙 자리 따스한 것이, 그 옛날 청평산(淸平山)에 돌기둥이
있었다네. 바위 구멍 우레로 인하여 무너지지 않으니, 그 안에 백의존자(白衣尊者) 있어서 그런 것이리." 하였다.
신증 박은(朴誾)의 시에, "아침에 만 길 보현봉(普賢峯)에 올랐다가 다시 대흥동(大興洞) 천고의 지경 들어왔네.
높은 수풀이 하늘에 닿아 해가 보이지 않고, 늙은 나무 세월이 자나니 모두 혹을 이루었네. 긴 시내 맑고 밑까지
보이는데, 흰 모래 어지러운 돌이 기울다 다시 바로 놓이누나. 오늘 내가 9월 9일에 미치지 못하여 단풍이 붉게
비치는 그림자 보지 못하는 것을 한하네. 여울 물이 바로 박생(朴生)의 못으로 내려가는데, 떨어지는 기세 공중
에 매달려 빨리 달리기도 하는 것이. 못 빛이 검실검실 감히 엿보지 못하니,
목이 움츠러들기 전에 혼백이 피하였네. 산승(山僧)이 나를 주의시켜 가까이 가지 말라 하되 예부터 생명이 경
각에 달렸다네. 그대여, 고모담(姑姆潭)에서라도 좀 쉬어 보소.
쌀쌀하게 머리털이 차짐을 깨닫게 되네. 맑은 날에 뇌성 벽력 소리 하늘이 찢어지려는데, 큰 강에 작은 배 띄운
것 같은 것이. 한 번 웃고 중의 뜻을 알게 되니 어찌 기이하지 않으랴.
10년간 묵은 회포 이제야 비로소 풀리는 것이. 저물게 옛 절 찾아 자리 깔고 누우니, 벽에 비치는 등잔불 아직도
깜박이누나. 바람 비 휘몰아 사람을 엄습하니, 한밤중 잠 못 이루고 깊은 반성만 하는구나." 하였다.
지족암(知足庵) : 천마산(天磨山) 청량봉(淸?峯) 아래 있다. 암자 뒤의 천 자는 되는 석벽(石壁)이 낙산(落山)보
다 웅장하며, 뒷산에 사면으로 둘린 봉우리가 그림 병풍을 벌려 친 것 같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면 눈
앞에 막힌 데가 없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중국 사람이 일찍이 이곳의 산 형상을 그려 갔다." 한다.
절 곁에는 또 고선(高禪)ㆍ적멸(寂滅)ㆍ성해(性海)ㆍ원적(圓寂)ㆍ낙도(樂道)ㆍ운주(雲住)ㆍ선관(善觀)ㆍ견성
(見性)ㆍ청량(淸?)ㆍ성등(聖燈)ㆍ불교(佛敎)ㆍ영안(永安)ㆍ보성(寶聖) 등의 암자가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천마산 꼭대기가 구름 속에 들어가고 만학(萬壑)의 솔 바람은 다리 밑에 차구나.
이로부터 도인(道人)의 마음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 다시는 세속의 일이 감히 상하지 못하리.
세월이 적막하니 향불 재가 싸늘하고, 병과 지팡이[甁錫 모두 고승(高僧)이 휴대하는 물건]도 날아갔는데 산과
바다가 넓기만 하네. 우스운 일, 나는 세속 누가 많아서, 부질없이 날 듯이 걸어 높은 산으로 들어갈 것만 생각
하누나." 하였다.
○ 성사달(成士達)의 시에 "기암 괴석이 벌려서 봉우리 이루니, 천고에 꿈틀꿈틀 수려한 기운 농후하네.
소나무 아래의 절간이 서로 보이다 말다 하는데, 속객의 발길이 이 사이 향해 들어가기 어렵구나." 하였다.
복령사(福靈寺) :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위에는 효성굴(曉星窟)이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넓고 넓은 큰 현묘한 고향에, 높고 높은 불당[虛白堂] 있는 것이. 달빛 아래 청정한
모습 장엄하고, 무지개 채색 원광(圓光)이 빛나누나. 슬기로운 이슬 일천 세계에 젖는데, 자비로운 구름 시방
(十方)을 덮었네. 봉인(封人) 와서 성인을 축복하니, 한 조각의 선한 마음 향기롭구나." 하였다
신증 조위(曺偉)의 시에, "시 주머니에 짧고 긴 시를 주워 담는데, 저 한길의 연하(煙霞)가 깊고도 깊구나.
황폐한 원(院)의 새소리는 나무 끝에, 감추고, 반쯤 걷어올린 발 사이로 들어오는 산 그림자 거문고 복판에 떨어
지누나. 가슴을 상쾌하게 하려고 조계수(曹溪水)를 마시려는데, 코에 들어오는 향기는 먼저 꽃 수풀 찾는 것을.
천년 후에 부질없게 방차율(房次律)을 전하였으니, 중을 만나 가고 온 고금사는 말하지 마소." 하였다.
○ 박은(朴誾)의 시에, "절간은 바로 신라의 옛 것, 일천 불상이 모두 서축(西竺)에서 왔다네. 예부터 시인(神人)
은 대외(大?)에 혼미하였는데, 지금까지 복지(福地) 천태(天台) 같구나. 봄 그늘이 비오려 하매 새가 서로 말하
고, 늙은 나무는 정이 없는데 바람이 스스로 슬퍼하누나.
세상사 한 웃음 거리인 것이, 청산도 세월이 가니 먼지만 뜨는구나." 하였다.
감로사(甘露寺) : 오봉봉(五鳳峯) 아래 있다.
○ 고려조에 창화공(昌華公) 이자연(李子淵)이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윤주(潤州) 감로사(甘露寺)에 올라
갔다가 강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따라간 뱃사공에게 약속하기를, "네가 이곳 형세를 자세히 살펴서 가슴속
에 기억해 두라." 하였다.
돌아오자, 뱃사공과 더불어 약속하기를, "천지간에 무릇 형상이 있는 물건은 서로 비슷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산천이 맑고 수려하니, 그 형세가 어찌 경구(京口 윤주 부근을 말함)와 서로 근사한 것이 없
으랴. 너는 작은 배에 짧은 돛대로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가되, 10년을 기한으로 하고 찾아보라." 하니, 삼로
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떠났다. 모두 여섯 번 춥고 더운 철을 겪고서 비로소 개성부 성 서호(西湖)에서 근사한
곳을 얻었는데, 윤주 감로사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단지 구조와 장식의 기교가 특히 좋은 것뿐이요, 하늘이 짓고
땅이 낳은 자연의 형세로 말하면 거의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무릇 누각과 지대(池臺)의 제도를 한결같이 윤주를 모방하였다. 후에 시승(詩僧) 혜소(惠素)가 주창하고 시중
김부식(金富軾)이 이어서, 듣는 것은 모두 화답하여 거의 천여 편이 되어 마침내 한 권의 큰 시집을 이루었다.
○ 이규보의 시에, "듣건대, 그대 푸른 산중에 가 놀면서, 손으로 찬 시냇물 희롱하니 달이 손바닥 안에 가득하다
지. 좋은 글귀 지어 맑고 기이한 흥취 보답하려 하여 잠시 가을 원숭이 친구 삼아 푸른 산록에 머물려네. 짐짓
시운(詩韻)을 응하니 굴러서 소리 맑고 가락이 높고, 홀로 송풍(松風)을 화답하니 빈 골짜기 울리네.
모래 가에 해오라기 섰으니, 병풍 속에서 쌍으로 나는 듯, 대숲 밖에 한가한 학은 그림 위에 여섯인 것이.
먼 돛 한 조각이 저물녘에 어디로 가나.
저 하늘 가에 기러기 보내는 이 내 눈을 지나네. 흰 구름 끊긴 곳에 맑은 빛 떠오르는데, 산 머리에 고운 모습, 연
기가 푸르게 엉겼네. 문득 자유(子猷)가 섬계(剡溪)에서 놀던 일을 생각하다가, 위만(魏萬)이 왕옥(王屋) 찾던
일도 그리워지네. 흰 눈썹의 늙은 중 큰 눈이 푸른데, 한 개의 걸상에 부들 방석 깔고 손을 머물러 자게 하네.
그윽한 샘물 졸졸 흐르는 소리 이 내 귀 맑게 하니, 비파ㆍ피리 속된 소리 모두 다 씻겨지네.
돌아와서 그 소리로 구슬 거문고 소리 조화하니, 이것이 새로 지은 유수곡(流水曲)이라네. 지금껏 이내 꿈, 연기
낀 강물에 싸여 맑으니, 호방한 생각 표표히 날아 속박할 수 없는 것을.
의관(衣冠)들이 아직도 소보(巢父)ㆍ허유(許由) 마음 가진 것, 한가한 사람 어찌 송강(松江)의 육구몽(陸龜蒙)만
이리." 하였다.
○ "단청한 누대 날아갈 듯한데, 청산이 둘러 있고 물이 겹으로 감쌌네. 서릿발이 해에 비쳐 가을 이슬을 더하고,
바다 기운 구름에 엉겨 저녁 이슬비 흩어지는 것이. 기러기 지나가는 모습 우연히 글자를 이루고, 백로는 스스로
그림 그리며 나누나. 작은 바람도 일지 않고 강물이 거울 같은데, 길 위의 행인들 그림자 비쳐보며 돌아가네."
하였다.
○ 김부식의 시에, "속객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올라와 굽어보니 이 내 마음 맑은 것이. 산 모습 가을 들어 더욱
좋고, 강빛은 밤에도 밝구나. 흰 새는 높이 날아 어디로 갔나, 외로운 돛은 홀로 가볍게 지나가누나.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 달팽이 뿔[蝸角] 위에서, 반평생을 공명찾아 헤매었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일대 장강(一帶長江)이 섬돌 아래로 흐르는데, 언덕 곁의 난간과 창문 정말 맑고 그윽
하구나. 꽃 뿌리며 정오 경 읽는데[午梵] 중은 경쇠 두드리고, 차 마시며 봄을 읊는데 손은 다락 의지했네.
방초(芳草) 맑은 안개에 목적(牧笛) 소리 곁들이고, 사풍세우(斜風細雨)는 낚싯배에 가득하구나. 분명히 기억
하노니, 성 서쪽에 필마(匹馬) 타고 언제나 다시 혼자 찾아 놀겠는가."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절을 지으며 어느 사람이 잘도 깎아 평평히 한 것이 강변의 지계(地界)는 아부영(亞夫營)
에 잇따랐네. 하늘이 나지막하니 산색(山色)은 구름에 연접하여 솟았고, 물이 떨어지니 조수 흔적은 섬돌을
둘러 이루어졌네. 누대 위 맑은 바람불 땐 문을 막아 서고, 배안에 밝은 달 들면 뱃전 두드리며 가는 것이.
오늘 아침 문득 홍진 세상 향하여 가니, 세상 수심 날마다 생길까 염려되네."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창호[窓扇]가 줄지어 강물에 비치는데, 강 위의 절간이 경치 더욱 그윽한 것이.
섬돌 아래서 조수 밀리니 바람은 자리에 가득하고, 난간 앞에 구름 걷히니 물이 다락에 맑은 것이.
공중에 솟은 높은 탑은 물 속에 임하였고, 달을 흔드는 성긴 종소리는 낚싯배에 들리누나.
다행히도 공사 한가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니, 성밖에 나가 3일 간이나 맑은 놀이 가지는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다섯 봉우리 줄을 지어 평평한 호수에 누웠는데, 전각이 높고 낮아 그림 같은 것이.
물 긷는 주방 중은 한가롭게 혼자 가고, 배를 젓는 곁군은 급히 서로 부르네. 새는 높은 나무 위에서 오래도록
우는 것이, 세상 티끌 선창(禪窓)에 오니 한 점도 없구나. 이리 저리 둘러보며 길게 읊다가 시 아직 이루지 못했
는데, 하인이 와서 말 돌려 가자고 재촉하네." 하였다.
신증 권근의 중창기(重創記)에, "송도(松都) 서쪽, 벽란도(碧瀾渡) 북쪽에 강을 끼고 절이 있는데, 감로(甘露)라
고 한다. 부근 지형이 긴 강을 굽어보고 산이 둘리고 들이 넓은데, 풍운의 변화하는 상태가 아침저녁으로 일만
가지 형상이니 참으로 나라 안의 승지이다.
고려가 번성할 때에 창화(昌華) 이자연(李子淵) 공이 중국에 사신 가서 윤주(潤州)의 감로사를 구경하고 마음에
매우 즐거워 하여, 돌아와 국내에서 그 형세가 서로 비슷한 데를 찾았는데, 여섯 번 겨울ㆍ여름을 지나서야 이
땅을 얻어 기뻐서 집을 짓고 윤주 감로사의 그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도량(道場)을 세웠다.
이공의 딸은 곧 문종(文宗)의 왕비 인예태후(仁睿太后)인데,
인예태후가 순종(順宗)ㆍ선종(宣宗)ㆍ헌종(獻宗)의 3종(宗)을 낳으니 세 임금이 서로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인종(仁宗)의 왕비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이 절을 중창하여 원찰(願刹)로 삼았고, 또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
신종(神宗) 3종을 낳으니 이것으로 이 절은 비단 형승이 진귀할 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천지가 정기를 저장하고 산수가 수려함을 잉태하여 상서를 발생하고 경사를 길러 왕실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니,
그 신령함의 혁혁함이 창창하게 밝다고 하겠다.
더구나 지금 국구(國舅)인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공(閔公)의 선대 분묘들이 모두 이 절의 뒤 언덕에 있으니,
여기서 어진 부인을 낳아서 지존(至尊)을 짝하고 태자를 낳아 기르고, 형제들이 서로 빛나서 나라의 근본이 더욱
굳건하고 큰 복조가 더욱 오래가게 되었다. 그런즉 이 땅이 정기를 저장하고 경사를 내어 금지 옥엽(金枝玉葉
왕실의 자손)의 무성함을 번성하게 하여 종묘 사직의 만대의 대업을 융성하게 한 것은 사실 오늘부터 더욱 분명
한 것이다. 빈도(貧道 중이나 도사들이 자기를 낮추어 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필자 권근의 자칭(自稱)이다)가 다
행히도 이곳에 우거하게 되었다. 이에 절의 건물이 세월이 오래되어 기울어지고 흔들리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널리 상하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장을 청해다가 중창하여 새롭게 하였다. 위로는 인군을 장수하게 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며, 아래로는 이익을 넓혀 백성들을 인도하니, 왕실이 장구해지고 국운이 영원해지는 것도 또한 이
강의 흐르는 물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벽란도(碧瀾渡)에 돛대 흔들리고 아침 조수 들어오고, 감로사에 난간 의지하니 낮 졸음
도 맑은 것이. 내려다보니 연파(煙波)는 넓고 아득하고, 바라보니 구름 사이 서로 높이 솟았네.
백천(白川)의 농가는 기름진 들판에 잇달았고, 금곡(金谷)의 선박은 서울에 이른다네.
이로부터 땅의 영기가 모든 아름다움 겸하였으니, 두어라, 널리 알리며 억지로 이름을 얻으려 하리오." 하였다.
신효사(神孝寺) : 광덕산(廣德山)에 있는데, 묵사(墨寺)라고도 이름한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풀 옷 이미 백번을 기우니 내 얼굴 잊었는데, 도를 깨달은 해 이래로 불경도 외지 않
는다네. 선탑(禪榻)에 꽃 떨어지니 봄이 쓸쓸한데 소나무 바람 비에 섞여 소리가 차 병에 나오는구나." 하였다.
○ "푸른 잎 낮은 처마에 더운 기운 가시는데, 절 다락에서 종일 돌아갈 줄 모르네.
차 끓여 손님 대접하고 벽에 시 써 달라 하니, 우습고나 저 중, 세상 마음 아직도 버리지 못했네." 하였다.
제5권 > 개성부 하 開城府下
개성부 하
사묘 송악산사(松岳山祠) : 산 위에 사당이 다섯이 있으니, 첫째는 성황(城隍)이요, 둘째는 대왕(大王)이요,
셋째는 국사(國師)요, 넷째는 고녀(姑女)요, 다섯째는 부녀(府女)인데, 모두 어떤 신(神)인지 알 수 없다.
팔선궁(八仙宮) : 송악산 절정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돌길이 빙빙 돌아 산 위에 올라가니, 팔선궁이 신주(神州)를 굽어보네." 하였다.
용수산사(龍首山祠) : 의종(毅宗) 때 함유일(咸有一)이 귀신을 믿지 않아 여러 산의 산신(山神)에서 이적(異跡)
이 없는 것을 다 불태워 버리고, 용수산 신사(神祠)에 이르러 시험하니, 영험이 없자 불태웠다.
이날 밤 왕이 꿈을 꾸니, 신이 구해 달라고 하므로 다음 날 유사(攸司)에 명하여 그 신사를 다시 지어주도록
하였다.
능침 고려 세조 릉(世祖陵) : 능호는 창릉(昌陵)이니, 예성강(禮成江) 위 영안성(永安城)에 있다.
태조 릉(太祖陵) : 능호는 현릉(顯陵)이니, 송악산 서쪽에 있는 파지동(巴只洞) 남쪽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아침에 서쪽으로 성문을 나가 보통계(普通溪)를 건너갔네. 우연히 현릉리(顯陵里)에
들어가니, 산길이 높았다 낮았다 하네. 여조(麗祖)의 옛 능침, 돌 위에 큰 글자가 쓰여 있네. 상설(象設)은 반쯤
매몰되었고, 거친 풀은 어찌 이다지 우거졌는고. 밤이면 여우와 너구리가 모여들고 낮에는 까막까치 지저귀고
있네. 옛날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섰을 때, 땅 넓이도 같고 덕도 같았네.
창과 방패로 날로 서로 무찔러 풍진(風塵)이 천리에 아득하였네. 왕이 삼척 검을 잡고 나서니, 백성들은 가뭄에
비구름처럼 바랐네. 삼한(三韓)이 통합되니 오리를 치고 또 닭을 잡았네. 사람들이 태평의 즐거움을 알게 되니,
한집안에 누가 서로 해치겠는가.
큰 은덕이 백세에 미치니 그 공은 견줄 수 없네. 하루아침에 운수가 다하니, 옛일이 사람을 슬프게 하네.
능을 지키는 몇 호만 있고, 적막하여 거마(車馬) 오는 이 없네. 나는 와서 세 번 탄식하니, 여윈 말도 바람에 우
네. 능지기가 내 뒤를 밟아 오면서 초동(樵童) 두어 명을 데리고 왔네.
나는 능지기를 향해 말하기를, 태조(太祖)께서 남긴 은택 백성에게 있다. 삼가 수호하라.
조금이라도 만홀하여 화를 당하면 후회한들 소용없으리라. 해마다 나무꾼을 금하고 밭가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하였다.
혜종 릉(惠宗陵) : 능호는 순릉(順陵)이니, 탄현문(炭峴門) 밖 경덕사(景德寺) 북쪽에 있는데,
속칭 추왕릉(皺王陵)이라 한다. 정종 릉(定宗陵) : 능호는 안릉(安陵)이니, 남소문(南小門) 밖에 있다.
광종 릉(光宗陵) : 능호는 헌릉(憲陵)이니, 송악산 북쪽 기슭 적유현(狄踰峴)에 있다.
경종 릉(景宗陵) : 능호는 영릉(榮陵)이니, 진봉산(進鳳山) 밑에 있다.
성종 릉(成宗陵) : 능호는 강릉(康陵)이니, 남교(南郊)에 있다.
목종 릉(穆宗陵) : 능호는 의릉(義陵)이니, 도성(都城) 동쪽에 있다.
현종 릉(顯宗陵) : 능호는 선릉(宣陵)이니,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다.
덕종 릉(德宗陵) : 능호는 숙릉(肅陵)이니, 북교(北郊)에 있다.
정종 릉(靖宗陵) : 능호는 주릉(周陵)이니, 북교에 있다.
문종 릉(文宗陵) : 능호는 성릉(成陵)이니, 불목사(佛目寺) 남쪽 기슭에 있다.
순종 릉(順宗陵) : 능호는 성릉(成陵)이니, 진봉산(進鳳山) 남쪽 양양현(壤陽峴)에 있다.
대종 릉(戴宗陵) : 능호는 태릉(泰陵)이니, 해안사(海安寺) 밑에 있다.
선종 릉(宣宗陵) : 능호는 인릉(仁陵)이니, 도성 동쪽에 있다.
헌종 릉(獻宗陵) : 능호는 은릉(隱陵)이니, 도성 동쪽에 있다.
예종 릉(睿宗陵) : 능호는 유릉(裕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인종 릉(仁宗陵) : 능호는 장릉(長陵)이니, 도성 서쪽 벽곶동(碧串洞)에 있다.
의종 릉(毅宗陵) : 의종이 경주(慶州)에서 시해되어 그곳에 임시로 장사지냈는데,
명종(明宗) 4년(1174)에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이의방(李義方)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사하지
아니한 죄를 말하여 밝혔기 때문에 명종 5년에 발상(發喪)하고 도성 동쪽에 옮겨서 장사지냈으니,
능호는 희릉(禧陵)이다.
신종 릉(神宗陵) : 능호는 양릉(陽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강종 릉(康宗陵) : 능호는 후릉(厚陵)이다. 원종 릉(元宗陵) : 능호는 흠릉(歆陵)이니, 개성부 북쪽 15리에 있다.
충렬왕 릉(忠烈王陵) : 능호는 경릉(慶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선왕 릉(忠宣王陵) : 능호는 덕릉(德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숙왕 릉(忠肅王陵) : 능호는 의릉(毅陵)이다.
충혜왕 릉(忠惠王陵) : 4년에 원(元) 나라에서 대경(大卿) 타적(朶赤) 등을 보내 왕을 잡아 가서 게양(揭陽)에
귀양 보냈는데, 도착하기도 전인 다음 해에 악양현(岳陽縣)에서 돌아가니, 그해 6월에 상구가 원 나라로부터
이르러 마침내 이곳에 장사지냈다. 능호는 영릉(永陵)이다.
충목왕 릉(忠穆王陵) : 능호는 명릉(明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정왕 릉(忠定王陵) : 능호는 총릉(聰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공민왕 릉(恭愍王陵) : 능호는 현릉(玄陵)이다.
노국대장공주 릉(魯國大長公主陵) : 바로 공민왕의 비(妃)이니, 능호는 정릉(正陵)이다.
공민왕 능과 함께 도성 서쪽 봉명산(鳳鳴山) 속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정릉에는 세시(歲時)에 거마(車馬)가 많이 오나, 현릉에는 세시에 사람이 아니 오네.
푸르고 푸른 소나무는 두 능(陵)에 둘러 섰는데, 전각(殿角)에 달린 풍금(風琴)에 날리는 눈을 뿌리네.
임금 계실 때 여러 번 노셨던 곳, 사객(詞客)이 시 읊으며 창자가 찢어지려네. 세상을 우습게 보는 중이 빙그레
웃으면서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뜬구름을 가리킨다. 아침에 종을 치고 저녁에 북을 울려 범패(梵唄) 소리
섞였으나, 마침내는 어찌 나를 위해 결정하리. 조정의 벼슬아치 모두 전조(前朝) 사람,
누가 주지(酒池)의 옛 자취를 찾겠는가.
산비탈에 누운 비석 글자를 새겼는데, 깊이 부끄럽다 내 이름이 앞줄에 들어 있네.
옛날 은총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하니, 천지에 내 한 몸이 어찌 이리 외로운가." 하였다.
고적 강충(康忠)의 구거(舊居) : 처음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에게 장가가서 칠보(七寶)를 가지고 오려 하
니, 용녀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가진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가 칠보보다 더 좋은 것이니, 그것을 얻어 가지고
가자." 하자, 작제건이 칠보를 돌려주고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달라고 청하였다.
장인이 말하기를, "이 두 가지 물건은 나의 신통(神通)이다. 그러나 자네가 청하니,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돼지를 주었다.
영안성(永安城)에서 산 지 1년이 되도록 돼지가 우리 안에 들어가지 아니하니, 작제건이 돼지에게 이르기를,
"만일 이 땅이 살 수 없다면 나는 장차 네가 가는 대로 따라 가겠다."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돼지가 나서서 가다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이르러 눕자, 마침내 그 자리에 새집을 지었으니, 바로 강충이 살던 옛터이다.
영안성(永安城) : 개성현(開城縣) 서강(西江) 위에 토성(土城)이 있으니, 이름이 영안성이다.
고려 왕조의 세계(世系)를 살펴보면, 강충(康忠)이 영안촌의 여자로 처를 삼았는데, 강충의 손자 작제권이 서쪽
으로 당 나라에 들어가다가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용녀(龍女)에게 장가들고, 도로 창릉굴(昌陵窟) 앞 강 언덕에
오니, 백주(白州)의 정조(正朝) 유상희(劉相晞) 등이 말하기를, "작제건이 서해의 용녀에게 장가들었으니 큰
경사다." 하고, 개(開)ㆍ정(貞)ㆍ염(鹽)ㆍ백(白) 사주(四州)와 강화(江華)ㆍ강음(江陰)ㆍ교동(喬桐) 세 고을 사
람을 거느리고서 연안성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으니, 뒤에 송악(松岳)으로 옮기고서도 연안성을 왕래하면서
산 것이 20여 년이었다.
용녀가 세조(世祖)를 낳았는데, 세조가 일찍이 꿈에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서 서로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
뒤에 영안성에 가서 한 여자를 만나니 꿈에 보던 자와 닮았으므로 마침내 결혼하고, 몽부인(夢夫人)이라고
부르니, 곧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종제의 밭[種?之田] : 세조가 또 전에 살던 집 남쪽에 집을 지으려 하니, 도선(道詵)이 보고서 말하기를, "검은
기장[?]을 심을 밭에 어찌 삼[麻]을 갈려 하는가." 하고는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몽부인이 그 말을 듣고 고하니, 세조가 신을 거꾸로 신고 뒤쫓아가, 한 번 보고는 옛 친구같이 하여 마침내 같이
곡령(鵠嶺)에 올라가서 산수의 맥을 살피고 말하기를, "이 지맥(地脈)이 백두산(白頭山)의 수(水)의 모체(母體)
로부터 목(木)의 줄기가 와서 마두 명당(馬頭明堂)으로 떨어졌으며, 군은 또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의 대수(大數)에 따라서 집을 짓되 6에 6을 곱한 36구(區)로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응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성자(聖子)를 낳을 것이니, 의당 왕건(王建)이라고 이름해야 한다." 하고, 이어 글을 써서 굳게 봉한 뒤에
겉에 쓰기를, '삼가 받들어 쓰고 백배한 뒤에 이 글을 장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 대원군자 족하(大院君子足下)
에게 바칩니다.' 하였다.
그때는 당 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는 그 말을 따라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달에
부인이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발어참성(勃禦?城) : 고려 세조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서 궁예(弓裔)에게 귀의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금
성 태수(金城太守)를 제수하였다. 세조가 궁예에게 유세하기를, "대왕께서 만일 조선 숙신(肅愼) 변한(卞韓) 땅
에 왕이 되고자 하면 먼저 송악 지방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니,
궁예가 곧 태조를 시켜서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 이어 세조를 성주(城主)로 삼으니, 바로 지금의 귀인문(歸仁門)
으로, 세속에서는 보리참문(菩提?門)이라고 일컫는다.
이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 후에 궁예가 철원(鐵圓)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서 3년을 살고 다시 철원으로
돌아갔다.
온혜릉(溫鞋陵) : 광명사(廣明寺) 북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용녀가 서해로 돌아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다만 빠뜨리고 간 신발로 장사지냈다." 하니, 인하여 온혜릉이라 칭한다.
정승원(政丞院) : 신라 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태조가 정승으로 봉하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
처를 삼아주고, 궁전 동쪽 한 구역을 하사하여 집을 짓게 하니, 후에 정승원이라고 칭하였다.
마암영전(馬巖影殿) : 성균관(成均館) 앞에 있으니,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여기에 영
전(影殿)을 크게 경영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몄다.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구재학당(九齋學堂) : 옛터가 자하동(紫霞洞)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 이후에 병란이 겨우 끝나 아직 문교(文敎)를 펼 겨를이 없었다. 이때에 문헌공(文憲公) 최충
(崔?)이 후진(後進)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학도들이 많이 모이자, 마침내 구재(九齋)로 나
누었으니,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
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이다.
이들을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라고 하였는데,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최공도에 들어가서 배웠다.
최충이 죽은 뒤에도 과거를 보려는 자는 또한 모두 구재의 학적(學籍)에 이름이 올라 있어야 했으니,
이들을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렀다. 또 유신(儒臣)으로 학도(學徒)를 세운 자가 11명이 있었으니,
홍문공도(弘文公徒)는 시중 정배걸(鄭倍傑)의 학도로 웅천도(熊川徒)라고도 칭하였다.
광헌공도(匡憲公徒)는 참정(參政) 노조(盧朝)의 학도이고, 남산도(南山徒)는 좨주(祭酒) 김상빈(金尙賓)의 학도
이고, 서원도(西園徒)는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의 학도이며, 문충공도(文忠公徒)는 시랑(侍郞) 은정(殷鼎)
의 학도이고, 양신공도(良愼公徒)\ 평장(平章) 김의진(金義珍)의 학도인데, 또는 낭중(郞中) 박명보(朴明保)의
학도라고도 하며,
정경공도(貞敬公徒)는 평장(平章) 황영(黃瑩)의 학도이고, 충평공도(忠平公徒)는 유감(柳監)의 학도이고,
정헌공도(貞憲公徒)는 시중 문정(文正)의 학도이고, 서시랑도(徐侍郞徒)는 서석(徐碩)의 학도이고,
귀산도(歸山徒)는 어떤 사람의 학도인지 알지 못한다.
세상에서 이상을 12도(十二徒)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서 최충도(崔?徒)가 가장 성했다.
우리나라에서 학교가 세워진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에 최충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
연경궁(延慶宮) : 송악산 밑에 있으니, 술가(術家)들이 이곳을 명당(明堂) 자리라고 하였다.
정전(正殿)은 건덕궁(乾德宮)이니, 혹 대관(大觀)이라고도 칭한다. 남문은 광화문(廣化門)이요,
동문은 동화문(東華門)이요. 서문은 서화문(西華門)이요, 북문은 현무문(玄武門)이다.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이 불태웠고, 공민왕 때에 또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겪어서 다시 새로 세우지 못하였
다. 지금은 본대궐(本大厥)이라고 하고, 그 대궐 뜰은 구정(毬庭)이라 한다.
정양궁(正陽宮) : 현종이 상양궁(上陽宮)을 정양궁으로 고쳤다.
명복궁(明福宮) : 경종(景宗)이 황주원(黃州院)을 명복궁으로 고쳤다.
여정궁(麗正宮) : 문종(文宗)이 태일(太一 도가(道家)에서 존숭하는 신의 하나)을 이 궁에서 제사지내 화재를
막도록 빌었다.
안수궁(安壽宮) : 예종이 연평궁(延平宮)을 안수궁으로 고쳤다.
숭덕궁(崇德宮) : 예종이 장경궁(長慶宮)을 숭덕궁으로 고쳤다.
복원궁(福源宮) : 예종과 의종이 이 궁에서 초제(醮祭)를 지낸 적이 있다.
흥성궁(興盛宮) : 선종(宣宗)의 옛집이다.
원희궁(元禧宮) : 선종이 흥경원(興慶院)을 원희궁으로 고쳤다.
보령궁(保寧宮) : 선종이 숭경궁(崇慶宮)을 보령궁으로 고쳤다. 수덕궁(壽德宮) : 의종이 세운 것이니,
천령전(天寧殿)이 있다. 관북궁(館北宮) : 의종이 백성의 집을 빼앗아 수리와 장식을 더하고 굴실(窟室)과 대
(臺)를 쌓고 금옥으로 화려함과 사치함이 더할 수 없게 꾸몄다.
환관 백선연(白善淵)과 왕광취(王光就)와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어 이공승(李公升)을 불러다가 실컷 마시면서
글을 지어 화답하였다.
공승의 시구에 "공명과 부귀는 꽃 밑에 세 잔 술로 다 몰아냈도다."란 구절이 있었는데 뒤에 왕에게 배척 당하
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시로 운명을 예언하였다." 하였다.
성북동 별궁(星北洞別宮) : 시중 김돈시(金敦時)의 사제(私第)인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안창궁(安昌宮) : 시중 왕충(王忠)의 집인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정화궁(靜和宮) : 본래 참정(參政) 김정순(金正純)의 집이었는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연창궁(連昌宮) :본래 평장(平章) 유검필(庾黔弼)의 집이었는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경명궁(慶明宮) : 의종이 정함(鄭?)의 집을 궁으로 삼은 것인데, 음양가(陰陽家)가 말하기를, "개가 머리를 들고
주인에게 짖어대는 형세이니, 임금이 거처하기에 마땅치 않다." 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제상궁(提上宮)ㆍ대명궁(大明宮) : 인종(仁宗)이 순천관(順天館)을 고쳐서 대명궁으로 하였는데,
일찍이 금(金) 나라 사신을 여기에서 전별하였다.
창락궁(昌樂宮) : 명종(明宗)이 최충헌(崔忠獻)에게 핍박당해 이 궁에 유폐되었다.
화평궁(和平宮) : 명종이 거처하였다. 경희궁(景禧宮)ㆍ
수창궁(壽昌宮) : 서소문(西小門) 안에 있으니, 연경궁이 불탄 이후로는 임금이 모두 이 궁에서 거처하였고,
우리 태조도 이 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지금은 허물어져 개성부 창고로 쓰고 있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부소산(扶蘇山)의 왕기(王氣)가 쇠하려고 하매 중보(仲父)가 가만히 진(秦) 나라를
빼앗으려고 꾀하네. 오히려 동심(童心)이 있어서 방종하게 놀아나는데, 어찌 하늘 뜻이 참사람[眞人]에게
돌아간 것을 알랴. 무정한 새들은 주란(珠欄)의 새벽 지저귀고, 눈에 가득한 이끼는 옥좌(玉座)의 봄에 아롱
졌네. 전조(前朝)의 옛 늙은이와 이야기 말라. 동적(銅狄)을 어루만지면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하였다.
의창궁(義昌宮)ㆍ덕자궁(德慈宮) : 충선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받들고 태상왕에게 존호를 올리
는데, 임금은 자포(紫袍)를 입었고 상왕은 황포(黃袍)를 입고서 하례를 받으니, 그때에 이것이 삼한에서 가장
성대한 일이라 하였다.
현덕궁(玄德宮)ㆍ연덕궁(延德宮) : 이자겸(李資謙)이 대궐을 침범하니 인종이 연덕궁으로 나와 있었다.
경영전(景靈殿) : 고려에서 조종(祖宗)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곳이다. 함경전(含慶殿) : 향복전(向福殿)으로
고쳤다.
관악전(觀樂殿) :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할 때에 임금이 거둥하던 곳이다.
장생전(長生殿) : 광종(光宗)이 여러 신하와 이 전에서 잔치하였다. 상정전(詳政殿) : 성종이 거처하던 곳인데,
목종(穆宗) 때에 불탔다. 원화전(元和殿)ㆍ사현전(思賢殿) : 성종이 동지(冬至)에 이 전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천성전(天成殿) : 목종 때에 이 전의 치문(?吻)에 벼락이 쳤다. 장춘전(長春殿)ㆍ
건화건(乾化殿) : 목종이 병환이 있을 때 기도하는 도장(道場)을 이 전에 차렸다.
상화전(祥和殿) : 처음 이름은 옹화전(雍和殿)이다.
천복전(天福殿) : 혹 도장을 차렸고, 혹 여러 신하들과 잔치도 하며, 금(金)ㆍ송(宋)의 사신도 맞이하였다.
선덕전(宣德殿)ㆍ순복전(純福殿)ㆍ만보전(萬寶殿) : 인종이 현덕전(玄德殿)을 만보전으로 고쳤다.
숙화전(肅和殿) : 인종이 정양전(正陽殿)을 숙화전으로 고쳤다.
천령전(天寧殿) : 의종이 근신(近臣)을 여기서 잔치하였다.
연강전(延康殿) : 처음 이름은 중화전(中和殿)이었다. 숭문전(崇文殿) : 대명당(大明堂)에 있다.
화평전(和平殿) : 수창궁(壽昌宮) 안에 있다. 명인전(明仁殿)ㆍ관인전(寬仁殿)ㆍ중화전(中華殿)ㆍ
팔각전(八角殿) : 화원(花園) 속에 있으니, 공민왕이 2층 팔각전을 세우고 주위에 화초를 심어서 잔치하고 놀이
하는 장소로 삼았다.
○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말년에 꽃과 돌을 좋아하더니, 예로부터 정호(鼎湖)의 설움이로다. 선로(仙露)는
화초(華草)에 울고, 하늘 향기는 옥 꽃송이[玉英]에 남아 있다. 난대(蘭臺)에 봄빛은 저물어가고 계전(桂殿)에
저녁 노을이 밝다. 송백(松柏)을 기르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높은 하늘이 기울어질 때 무엇을 기둥으로 쓸고."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화원시(花園詩)에, "피를 쏘아 이루지 못하고 문득 성만 났는데, 닥쳐온 것은 병기(兵氣)가
구진(鉤陳)에 감돌았다. 수레를 모아도 반드시 길은 막지 못하였고, 창으로 헛되이 사람만 죽였다.
운수가 떠나 군신이 같이 흐느껴 우니 천지에 죄악이 차서 몸 둘 곳 없다.
창황히 한번 파한 번화한 꿈은 허물어진 동산과 남은 꽃송이에 봄이 쓸쓸하다." 하였다.
만월대(滿月臺) : 연경궁(延慶宮)에 있으니, 곧 정전(正殿) 앞 계단이다. 신증 허침의 시에, "계림(鷄林)을 점령
하고 압록강(鴨綠江)을 취해 웅비하던 왕업도 한 개비 횃불로 진궁(秦宮)의 옛 업처럼 미미해졌네.
동공(董公)이 원래 스스로 건장한 줄 천하가 다 알고, 혜소(?紹)가 연(輦) 앞에서 죽었으나 마침내 어디로 갔나.
위세를 빌려서 신기(神器 임금의 자리)를 엿보고, 꼬리를 밟고서 막 해기(駭機)에 부딪침을 알았다.
백년도 못 기다려 보리밭이 되었으니, 그날 임금도 옷깃을 적셨네." 하였다.
○ 안침(安琛)의 시에, "5백 년 앞 자취가 티끌이 되고, 송악산의 푸른빛 몇 번이나 새로웠나. 이끼는 연로(輦路)
를 덮었는데 나무꾼이 길을 냈고, 구정(毬庭)에 비 뿌리니 풀만 절로 봄이로세. 후전(後殿)의 생황과 노래 소리
들을 길 없고, 동쪽 못에 놀이 배도 잠긴 지 오래로세. 아득한 지난 일을 누구한테 물어보나. 밝은 달 한 바퀴가
대(臺) 위에 떴구나." 하였다.
청연각(淸?閣) : 예종이 홍관(洪瓘)ㆍ정극공(鄭克恭) 등으로 청연각 학사(學士)를 삼아 경사(經史)를 강론하였
는데, 은총과 대우가 견줄 데가 없었다.
○ 고려 김연(金緣)의 기문에, "왕은 총명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독실하고 빛나는 덕으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중국 문화를 즐겨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대궐 옆, 연영서전(延英書殿)의 북쪽,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 두 각을 지어 한 곳에는 송(宋) 나라 황제가 친히 지어 내린 조칙(詔勅)과 글씨ㆍ그림
을 받들어 걸어 놓고서 교훈을 삼고 반드시 절하고 머리 조아리고 얼굴을 엄숙하게 한 연후에야 우러러보곤 했
다.
또 한 곳에는 주공(周公)ㆍ공자(孔子)ㆍ맹자(孟子)ㆍ양웅(揚雄) 이하 고금의 서적을 모아 놓고 날마다 나이가
많고 학식이 높은 선비들과 같이 토론하며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하였다.
공부하고 수양하고 쉬고 놀고 하면서 한 당(堂)에서 나가지 않되 삼강 오상(三綱五常)의 가르침과 성명 도덕(性
命道德)의 이치가 사방에 충만해졌다. 금년 정유년(1537) 여름 4월 갑술 2일에 특별히 수태부 상서령 대방공(守
太傅尙書令帶方公) 신(臣) 보(?)와 수태부 상서령 대원공(守太傅尙書令大原公) 신 효(?)와 수태보 제안후(守太
保齊安侯) 신 서(胥)와 수태보 통의후(守太保通義侯) 신 교(僑)와 수태보 악낭후(守太保樂浪侯) 신 경용(景庸)과
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자겸(資謙)과 신 연(緣)과 중서시랑(中書侍郞) 신 중장(仲璋)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신
준(晙)과 수사공(守司空) 신 지화(至和)와 추밀원사(樞密院使) 신 월(?)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신 자지(字
之)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신 안인(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이어 조용히 이르기
를, '나는 돌아보건대, 덕이 적은 사람이나 하늘이 편안함을 내려주시고 종묘와 사직이 복을 쌓은 덕택으로 삼면
의 변방에는 전쟁이 그쳤고 문궤(文軌)는 중국과 같게 되었다.
무릇 정책을 세우고 정사를 시행하는 등 크고 작은 행동을 모두 중국에 자품(資稟)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숭녕(崇寧)과 대관(大觀) 연간 이래로 시설하고 조치하는 방법에 있어서 문각(文閣)과 경연(經筵)에서 선비들
을 찾아가 물은 것은 선화(宣和 송(宋) 휘종(微宗)의 연호)의 제도를 따른 것이며, 궁중 깊숙한 전당에서 보필
하는 신하를 우러러보는 것은 태청궁(太淸宮)의 연회를 본받은 것이다.
비록 예절에 있어서 풍성하거나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유능한 이를 높이는 뜻에 있어서는
그 취지가 같은 것이다.
지금 송 나라에 들어갔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이 계향어주(桂香御酒)와 용봉차[龍鳳茶]와 진기한 과일과
보배로운 그릇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기쁘게 경들과 함께 이 성하고 아름다움을 즐기려 하는 것이다.' 하니,
신하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섬돌 아래로 물러가 엎드려 고루하여 감히 성대한 예를 범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
양하였으나, 임금께서 자리에 앉으라고 재촉하고 온화한 얼굴로 대하며 갖은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니,
그곳에 설치한 장막과 늘어놓은 그릇들과 잔과 접시에 담긴 내용물과 과일들의 품질이 육상(六尙)의 진품(珍品)
과 사방의 맛난 것이 어느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위에 중국에서 들여온 유리[?璃]ㆍ마노(瑪瑙 석영(石英)의 일종)ㆍ비취(翡翠)ㆍ서시(犀? 물소뿔) 같은 기이
한 완상품들이 상 위에 뒤섞여 있고, 훈(壎)ㆍ지(?)ㆍ강갈(?? 축오(祝?)라고도 하는 악기 이름)ㆍ금슬(琴瑟)ㆍ
종경(鐘磬) 등 편안하고 즐거우며 고상하고 우아한 소리가 마루 아래에서 합주(合奏)되었다.
임금께서 잔을 잡고서 측근의 신하에게 명하여 술을 권하게 하며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 사귀는 것은 오
직 지성으로 할 뿐이니, 각기 양껏 다하여 사양하지 말고 마셔라.'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두 번 절하고, '술맛이 좋다.'고 아뢰면서 잔을 비우고 혹은 술을 권하기도 하고 혹은 술잔을 돌
리기도 하며 두루 화락하였다.
술이 아홉 순배 돌고 나서 우선 물러가서 쉬도록 하고 계속해서 총애하는 근신(近臣)이 있어 옷 한 벌씩과 보대
(寶帶)를 하사하여 그 후한 뜻을 보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불러 자리를 맞대고 음식과 행동을 각자 편하게 하도
록 하였다. 혹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웃고 혹은 눈 가는 대로 구경도 하였다.
난간 밖에는 돌을 쌓아 산을 이루고 뜰 가에는 물을 끌어대어 못을 만들었다. 우뚝우뚝한 온갖 형상과 맑게 고인
물은 사방이 환하니, 동정(洞庭)과 오회(吳會)의 조용하고 좋은 풍취가 생겨서 잔치를 마치도록 더위를 꺼리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취하도록 실컷 마시다가 밤이 깊어져서야 마쳤다.
이에 진신(搢紳)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즐거워서 기쁜 빛을 띠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인자함과
검소함을 보배로 삼아서 방종하고 지나친 행동이 없어, 의복은 무늬 놓은 비단을 입지 않고 그릇은 아로새긴 것
을 쓰지 않되 오히려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제대로 살지 못할까, 한 가지 일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 염려하여
매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수라를 드시는 가운데 노심초사하고 불쌍히 여겨 슬퍼하고 여러 신하와 아름다운 손님
에게 잔치를 베푸시는 데 있어서는 곧 궁주의 보장품(寶藏品)을 내놓으시며, 중국의 특별한 은혜로 받은 것을
내어, 하루종일로도 부족하여 촛불을 켜고서 계속하되 오히려 사치스럽게 여기지 아니하니, 어진이를 높이고
예절을 중히 여기시며 선(善)을 좋아하고 세력을 잊은 그 마음은 실로 모든 제왕(帝王)의 위에 높이 뛰어나다
하겠다." 하였다.
신이 일찍이 들으니, 옛날에 노(魯) 나라 임금은 천자의 예악을 써서 나라의 풍속을 교화시켰다.
그러므로 반궁(泮宮)에서 선생ㆍ군자들이 더불어 즐겼는데, 그것을 읊은 시에, '노 나라 임금이 이르러 반궁에
서 술을 마시도다.
이미 좋은 술을 마신지라 영원히 늙지 말게 하시라.' 하였다. 또 노침(路寢)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적에는 대부
와 서사(庶士)들도 같이 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 나라의 임금이 잔치하여 즐기시니 대부와 서사도 즐
거워하네.
나라를 이미 차지하였으니 많은 복을 받으시라.' 하였다. 지금 우리 임금은 천자의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신하
들을 총애하여 접대하셨다.
그러므로 공경과 대부는 천보(天保)의 시처럼 임금에게 보답할 뜻을 품고 간언하는 시종(侍從)들은 아유가빈
(我有嘉賓)의 시를 읊으며 악사와 가공(歌工)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즐거워하는 음악을 지어 기쁨이 서로 통하
며 예의가 법도에 맞게 하였다.
이때에 사람과 신령(神靈)의 화락한 기운과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감응과 위아래의 베풂과 보답과 풍속 교화의
근원이 모두 음식을 즐겨하여 기쁜 얼굴로 웃는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니, 어찌 다만 오래도록 늙지 말게 하고
복을 많이 받는 것뿐이겠는가. 반드시 억만년토록 태평의 복을 누릴 것이며, 천자의 영원 무궁한 아름다움에 보
답하여 천양할 것이다.
신은 어리석고 졸렬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때를 만나서 정승의 자리에 있는데,
신의 재주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특별히 사실을 기록하라는 명이 있기에 사양하다 못하여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서 억지로 기문을 씁니다." 하였다.
위봉루(威鳳樓) : 고려 태조가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이 누에서 문무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의봉루(儀鳳樓) : 처음 이름은 신봉루(神鳳樓)였는데 뒤에 이 이름으로 고쳤으니,
즉 연경궁(延慶宮)의 대루(大樓)이다.
무릇 태묘(太廟)에 제사지내거나, 연등대회(燃燈大會)와 팔관회(八關會) 때에는 무두 임금이 이 누에 나와서 계
간(鷄竿)을 높이 세우고 대사면(大赦免)을 하며, 혹 중 수만 명에게 밥을 먹이고,
혹 중앙과 지방에 대포연(大?宴)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사루(紗樓) : 숙종(肅宗)이 이 누에 나와서 중광전(重光殿) 옥매괴화(玉??花 낙엽 관목의 일종. 흰 꽃이 핌)
시를 짓고 사신(詞臣)들을 불러서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 예종이 누에 나와서 문신 56인을 불러서 초에 눈금을 긋고 그곳까지 탈 동안에 모란시 6운(韻)을 짓게 하니,
주부 안보린(安寶麟)의 시가 제일로 뽑혔다.
그때 강일용(康日用)이 시를 잘한다고 이름을 날렸는데 임금이 그가 시 짓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촛불이 다 탈 무렵에 일용이 겨우 연구(聯句) 한 구를 지었으니, "머리 흰 취옹(醉翁)은 전(殿) 뒤에서 보고 눈
밝은 유로(儒老)는 난간에 기대 있네."라고 하였다. 그는 그 원고를 소매에 넣고서 개울에 엎드려 있었다.
임금이 소황문(小黃門)을 명하여 가져다 보고 감탄하여 칭찬을 그치지 않으며 이르기를, "이것은 옛사람의
이른바 '흰머리에 꽃과 구슬을 얼굴에 가득히 단장해도 서시(西施)의 반쪽 단장만 못하다.'는 것이다." 하며,
위로하여 보냈다.
의춘루(宜春樓) : 뒤에 소휘루(韶輝樓)로 고쳤다. 양루(?樓) : 충렬왕이 매양 이 누에 나와서 격구(擊毬)를 관람
하였다.
관상루(觀祥樓) : 처음 이름은 망운루(望雲樓)였다. 양화루(陽和樓) : 장원정(長源亭) 곁에 있다.
○ 예종의 시에, "서쪽으로 도문(都門)을 나가서 승지(勝地)의 모퉁이에 만 겹의 궁궐이 강호를 베개했네. 꽃다운
들 빛은 주렴 장막에 비꼈고, 넓고 아득한 연기 낀 물결은 배들을 보낸다. 어제는 문장으로 다투어 화답했고,
오늘 아침은 노래와 피리로 즐거워하네.
시 속에는 천 가지 경치를 모두 쓸 수 없어, 두어 폭 교초(鮫?)에 그림으로 그리게 한다." 하였다.
곽여(郭輿)가 화답하기를, "상궐(象厥) 서남쪽 백 리 되는 구석에 법궁(法宮)이 우뚝하여 강호를 깔고 있네.
구름 속의 금빛 푸른 빛 누각은 자라가 받들고, 물결 위 달 아래 배 안에는 사람이 있다. 천고의 만물을 보매 덕에
뛰어났고, 황하(黃河)가 맑으매 길이 만년의 즐거움에 응하였네. 누가 능히 연파(煙波)의 경치를 잘 거두어 단청
으로 이것을 그림 속에 넣을꼬." 하였다.
연복정(延福亭) : 옛터는 지금 동대문 밖 산대암(山臺巖) 밑에 있다.
○ 의종이, 도성 동쪽 사천(沙川) 용연사(龍淵寺) 남쪽에 두어 길 되는 석벽이 깎은 듯이 시냇가에 서 있는데 이
것을 호암(虎巖)이라 하고, 그 밑에 흐르는 물이 고여 있고 수목이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내시(內侍) 이당주
(李唐柱) 등을 명하여 그 곁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연복정이라 하고, 기이한 화초를 주위에 심었다. 그런데 물이
얕아서 배가 뜨지 못하니 둑을 쌓아 호수를 만들고서 날마다 배를 띄워 잔치를 벌이면서 밤을 새웠다.
여러 신하들도 모두 크게 취하여 꽃을 꽂고서 거꾸로 실려서 돌아오기도 하고 혹은 너무 취하여 돌아갈 것을
잊으니, 호위하는 군사들이 몹시 원망하여 마침내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났다.
○ 고려 임규(任奎)의 시에, "누가 군신을 권하여 취향(醉鄕)에 들어가게 하였나. 숙장(肅墻) 안에 화(禍)가 있는
줄을 몰랐구나 경루(瓊樓) 위에 취한 노래가 그치기 전에 피비린내는 연로(輦路) 옆에 흘렀네.
수 양제(隋煬帝)의 변하(?河)에 가을이 쌀쌀한데, 당 명황(唐明皇)은 촉도(蜀道)에 빗소리 처량하네.
그때에 이 한을 아는 이 없으니, 눈에 가득한 강산에 눈물만 두어 줄 흐르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옛날에 당 명황이 놀러다니던 날에, 용주(龍舟)에 비단 줄이 강호(江湖) 옆으로 갔네.
선녀 같은 기생들은 눈웃음치고, 술 취한 사신(詞臣)들의 겨드랑이 끼고 붙들었네. 예로부터 극도의 사치는
제어하기 어려우니, 옛 일을 생각하고 한숨짓는 이 몇이런가. 허물어진 강둑에는 물결 치는 것 못 보겠고,
복도(複道)에는 푸른 풀만 우거졌다. 비단옷은 구름과 함께 흩어졌고, 피리와 노래는 새들의 울음소리로 바뀌었
네. 이 가운데 은감(殷鑑)이 분명히 있으니, 유지(遺址)를 쓴 듯이 없게 하지 말라." 하였다.
상춘정(賞春亭) : 연경궁(延慶宮) 뒤뜰에 있으니, 문종(文宗)ㆍ선종(宣宗)ㆍ예종(睿宗)이 모두 여기서 꽃 구경한
시가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저녁에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꽃나무들 고운 자태 머금었네. 높은 데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니, 멋있는 풍치가 여기 있구나. 같이 노는 두세 친구도 각자 노래와 시 읊기를 잘한다. 천지 밖으로 뜻을
달려 호연히 갈 곳을 잊었네. 방황하면서 옛일을 느끼니 이 정자 빈 터만 남아 있구나. 번성하고 아름답던 모습
이제는 볼 수 없으니, 이렇게 되게 한 이 누구인가. 흥망성쇠가 또한 우연일 뿐이로세.
봄을 상심하니 슬픔이 생기기 쉽네." 하였다.
옥촉정(玉燭亭)ㆍ산호정(山呼亭) : 모두 연경궁 후원(後苑)에 있다.
○ 이규보가 이르기를, "산호정에 모란이 성대하게 피었는데, 시 짓는 자가 많게는 백 명에 이르렀다." 하였다.
만수정(萬壽亭) : 수창궁(壽昌宮) 북원에 있으니, 환자(宦者) 윤언문(尹彦文)이 괴석(怪石)을 모아서 가산(假山)
을 쌓고 작은 정자를 짓고서 누런 비단으로 벽을 덮어 더할 수 없이 사치스러웠는데, 이름을 만수정이라 하였다.
태평정(太平亭) : 의종이 대궐 동쪽에 민가 50여 구(區)를 헐고서 이 정자를 짓고 나서 태자에게 명하여 편액
(扁額)을 쓰게 하였다. 곁에 좋은 꽃과 이상한 과일나무를 심고 진기한 물건들을 좌우에 포열하고, 정자 남쪽에
는 못을 파고 그 안에 관란정(觀瀾亭)을 짓고 북쪽에는 양이정(養怡亭)을 지어 모두 청기와로 덮었다.
또 옥석(玉石)을 갈아서 환희대(歡喜臺)와 미성대(美成臺) 두 대를 쌓고, 괴석을 모아서 선산(仙山)을 만들며 먼
곳에서 물을 끌어와 비천(飛泉)을 만드니, 사치함과 화려함이 극에 달하였다.
원구(圓丘) : 회빈문(會賓門) 밖에 있는데, 고려에서 교사(郊祀 나라에서 천지(天地)에 제사하는 것)하던 곳이다.
태묘(太廟) : 고려의 태묘의 옛터이니, 화원 동쪽에 있다.
구요당(九曜堂) : 고려에서 성신(星辰)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곳이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시냇물은 잔잔하고 돌길은 빗겼는데, 적적한 도인(道人)의 집 어디멘고.
뜰앞에 누운 나무 봄에도 잎이 없는데, 종일토록 산 벌[山蜂]이 풀꽃을 찾아 꿀을 삼키네." 하였다.
○ "꿈을 깨니 빈 창에 달이 반쯤 비꼈는데, 숲 밖에 종소리는 절이 있나봐. 무단히 새벽에 동풍이 사납더니,
아침 남쪽 시내에 몇 조각 낙화(落花)인고." 하였다.
소격전(昭格殿) : 궁성 북쪽 기슭에 옛터가 있다.
사직단(社稷壇) : 불은사(佛恩寺) 서편에 옛터가 있다. 개성 폐현(開城廢縣) : 도성 서쪽 25리에 있다.
강감찬(姜邯贊)의 집ㆍ이색(李穡)의 집ㆍ한수(韓修)의 집ㆍ안유(安裕)의 집 : 모두 양온동(良?洞)에 있다.
이제현(李齊賢)의 집 : 수철동(水鐵洞)에 있다. 최영(崔瑩)의 집 : 이현(梨峴)에 있다.
정몽주(鄭夢周)의 집 : 화원(花園) 북쪽에 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지금은 합좌사(合坐司)라고 하는데,
화원 동쪽에 있다.
○ 정도전(鄭道傳)의 기문에, "홍무(洪武) 22년(1389) 12월 병오일에 전하께서 신 도전(道傳)에게 명하기를,
'도평의사는 실로 정승들이 나를 보좌하는 것이다.
내가 정사를 맡은 처음에 사사(使司)의 청사가 마침 이루어졌으니, 너는 그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야 할 것이다.' 하니, 신 도전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아뢰기를, '국가에서 문하부(門下府)를 설치하여 법
을 맡기고, 삼사(三司)로 전곡(錢穀)을 맡기며, 밀직(密直)으로 군사를 맡겨 각기 그 직책을 맡되, 큰 일이 있으
면 삼사에 모여서 의논하니, 이를 도평의사사라 한다.' 하였는데, 일에 따라서 설치하기도 하고 파하기도 하니,
대개《주례(周禮)》의 관련(官聯) 제도의 유의(遺意)를 본뜬 것이다.
근래에는 사사(使司)에서 전적으로 여러 직책을 총괄하여 항상 설치하고 파하지 아니하니,
그 직임과 관질(官秩)이 원래 다른 어느 관청보다 중하다.
그런데 일정한 청사가 없다가 이때 와서 새로 청사를 지었으니,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신 우인열(禹仁烈),
평리(評理) 신 설장수(?長壽)ㆍ신 김남득(金南得), 정당문학(政堂文學) 신 김주(金湊),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
司事) 신 유화(柳和),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신 이염(李恬), 자혜부윤(慈惠府尹) 신 유광우(兪光祐)가 실
로 그 공사를 감독하였다.
무릇 재목을 깎고 기와를 굽는 일은 모두 삯꾼들을 시키고 감독을 부지런히 하니 일이 잘 되어 달포동안 경영
하되 백성들은 수고로운 줄 몰랐다. 우뚝 중앙을 차지한 것을 사사청(使司廳)이라 하고, 날아갈 듯이 좌우에
마주 있는 것을 수령관청(首領官廳)이라 하는데, 수령관은 곧 옛날 경사(卿士)의 직위다.
행랑으로 이어 받고 담장으로 둘렸으며, 부엌과 곳간에 이르기까지 주밀하고 완전하지 않음이 없었다.
전하께서 비로소 문하시중(門下侍中) 신 심덕부(沈德符),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신 이성계(李成桂) 우리 태조
(太祖)의 어휘(御諱)이다. 를 판사(判事)로 삼고, 삼사에는 판사 신 왕안덕(王安德) 이하, 문하에는 찬성사 신
정몽주(鄭夢周) 이하를 동판사(同判事)로 삼으며, 밀직에는 판사 신 김사안(金士安) 이하를 사(使)로 삼아서 그
명칭을 바로잡으니, 사사의 직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당(唐) 나라에서 다른 관원으로서 동평장사(同平章事)의
직함을 띤 이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곧 그 제도이다.
신 도전이 또한 외람되게 용렬하고 소루한 자로서 동판사사(同判使司)가 되었는데, 신에게 명하여 기문을 쓰게
하시니, 신이 불민하여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능히 가까운 데서 비유를 취하
라.' 하였으니, 신이 이 청사를 가지고 말하겠습니다.
당우(堂宇)는 비유하면 임금이요, 동량(棟梁)은 비유하면 정승이요, 터는 비유하면 백성이니, 터가 온전하고
두터워야 동량이 편안할 것이요, 그런 뒤에야 당우가 견고하고 치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량은 위로 그 집을 받들고 아래로 그 터에 의지하니, 이것은 정승이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는 위를 위해서는 덕을 위하고, 아래를 위해서는 백성을 위한다.' 하였으니 곧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청사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집을 보아 우리 임금을 받들 것을 생각하고,
그 터를 보아 우리 백성을 잘 살게 할 것을 생각하며, 그 동량을 보고 우리 직책에 걸맞을 것을 생각하면 될 것입
니다. 옛날에 천자를 잘 도운 이로는 고기(皐夔 순(舜) 임금의 어진 신하 고요(皐陶)와 기(夔))와 방두(房杜 당
태종(唐太宗)의 어진 정승 방 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같은 이가 있고, 열국(列國)에는 숙향(叔向 진(晉)
나라의 어진 신하)과 공손교(公孫僑 춘추(春秋) 시대 정(鄭) 나라의 대부(大夫) 자산(子産)) 같은 이가 있었는데,
모두 이름난 재상이었습니다.
비록 처자와 열국의 차이는 있으나, 천시(天時)를 순히 하고 민생을 잘 살게 하며 임금을 받들고 여러 관리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그 직책이 한 가지입니다. 고요와 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방현령은 꾀로써,
두여회는 결단으로, 숙향(叔向)은 곧음으로, 공손교는 은혜로움으로써 하였으니, 대개 일을 꾀하지 않으면 모이
지 않고, 일을 결단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하며, 곧음이 아니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고, 은혜가 아니면 백성을 품어
주지 못하니, 이상 몇 사람 같은 이들은 또한 그 직책을 잘 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진한 것이 있으니, 반드시 선유(先儒) 진 서산(眞西山)이 정승의 일에 대해 논한 것과 같이 임금의 마
음을 바로잡고, 자기를 바르게 하고, 사람을 알고, 일을 잘 처리한 연후에야 될 것입니다. 무릇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것도 스스로를 바르게 해야 될 뿐이니, 자신이 이미 바르게 되었으면 모름지기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과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있어야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국운이 중흥하여 밝은 임금과 어진
정승이 서로 만나 위에서는 성심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성심으로 윗사람을 섬기니, 이것은 우리
나라가 일대 융성한 때입니다.
정승된 사람들이 마땅히 각각 스스로 힘써서 위에서 등용한 뜻에 부응한다면 사사를 설치한 것이 거의 기대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에 기문을 씁니다." 하였다.
법왕사(法王寺) : 옛터는 연경궁 동쪽에 있다.
현성사(賢聖寺) : 옛터는 탄현문(炭峴門) 안에 있다.
숭교사(崇敎寺) : 남부 환희방(歡喜坊)에 있으니, 지금도 장간(長竿)과 부석(趺石)이 있다.
○ 이규보(李奎報)가 숭교사에 있을 때, 모인 사람이 10여 인이 되었다. 술에 취해 거문고를 타고 즐겁게 노는데,
규보가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에게 운(韻)을 부르게 하고서 붓을 빨리 놀려 시를 짓기를, "두성(斗城) 남쪽 뿔,
푸른 바위 뿌리에 금룡(金龍)과 철봉(鐵鳳)이 날아서 구름 위에 솟았네. 처음 오니 지는 해가 서쪽 난간에 반쯤
걸렸는데, 학이 울고 까마귀가 지저귀는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오네. 주인의 접대가 어찌 이다지 은근할꼬, 광산
(匡山)의 원로(遠老)가 도군(陶君)을 이끄는 것 같도다.
웃음과 이야기는 얼음 첨지[氷?]라도 따뜻하게 할 만하니, 10월 날씨가 봄이 되었네. 지로(地爐)에 시험삼아 골
졸(?? 송진이 엉킨 관솔개비) 불 가까이 하고, 낙타상(駱駝床)에 높이 앉아 한가로이 이야기하니, 취중에 풍정이
나만한 이 없어라. 자리에 앉아 있는 손들은 지껄이며 내 뜻을 아는 자 적네.
나는 말하되, 인생은 번개가 자나가는 것 같으니 부귀와 영화가 꽃이 쉬이 시드는 것 같도다. 젊음도 한 번 가면
또 어찌하겠나. 그저 취하도록 술잔에 날개 달아 날려라. 자네는 보았나, 칠귀(七貴)와 오후(五侯)들도 운수가
다하면 구원(九原)으로 돌아가고 만다네. 설사 가는 자를 혹 다시 만류할 수 있더라도 천년 만년이 한 해 같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일은 가을 구름이 떠 있듯, 해는 서쪽으로 넘고 물은 동으로 흐르네.
인간은 구속된 남관수(南冠囚)라, 새장에 든 새와 같고 낚시에 걸린 고기로다." 하였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이 일어나 춤추니, 바람 앞에 옥수(玉樹)가 꺾이듯, 주현(朱絃 붉은 거문고 줄)을 잡고
서 손 가는 대로 퉁기니 가는 소리 절절히 사사로 말하기를, "다생(多生)의 인연이 중하여 각각 서로 만났는데,
다시 내일 아침이면 빗방울같이 흩어질까 염려되네.
동방만청(東方曼? 동방삭(東方朔))도 지금 벌써 죽고, 순우 선생(淳于先生 순우곤(淳于?))은 또 어디로 갔나.
두 사람이 잇달아 나온다면 재주가 많으니, 마주 손잡고 춤추려 하네.
우리 대사(大師) 도량이 강하(江河)처럼 넓으니, 너희들 함께 놀도록 허락해 주리.
나는 지금 명수(命數)가 왜 이다지 기구한가. 희롱과 해학으로 취하며 노래하리.
평생에 즐거이 웃기를 이보다 더한 적 없는데, 동방이 밝아지려 하니 즐거움을 어찌 할거나." 하였다.
귀법사(歸法寺) : 옛터는 탄현문(炭峴門) 밖에 있다.
○ 최충(崔?)이 해마다 더울 때에 이 절의 승방을 빌려서 여름 공부를 하였는데, 문도 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학
식이 넉넉하면서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를 가려서 교도(敎導)로 삼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
간혹 선진(先進)들이 찾아오면 초에 눈금을 긋고 그곳까지 탈 동안 시를 짓고서[刻燭] 등차를 매겨 방(榜)을
걸고 나서 이름을 불러서 들어오게 하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동자(童子)와 관자(冠者)가 좌우로 열을 지어 술과 안주를 받들되 나오고 물러감에 법도가 있고 어른과 아이의
차서가 있어 서로 더불어 시를 주고 받았다. 날이 저물자 모두 낙생영(洛生詠)을 짓고서 파하니,
보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겨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이규보가 강도(江都)에 있으면서 옛 서울을 생각하며 지은 시에, "황량한 고국(故國)을 차마 어이 생각하리.
모든 것을 잊고서 짐짓 바보가 되련다. 다만 한가지 마음 끌리는 곳은 귀법천(歸法川) 가에 걸터앉아 잔 돌리던
것." 하였다. 용흥사(龍興寺) : 옛터는 귀법사 곁에 있다.
○ 백분화(白賁華)의 시에, "돌 병풍 바위 문이 꾸밈새 필요 없는데, 풀ㆍ연기ㆍ이끼ㆍ이슬이 자연히 향기롭네.
흰 구름에 시내라 침침한데 잔나비 소리 그쳤고, 조각달 소나무 높은데 학의 꿈이 길구나.
이미 도잠(陶潛)과 함께 혜원(惠遠)을 이끌었으니, 산간(山簡)처럼 양양(襄陽)으로 갈 것은 없네.
밤은 깊고 술병은 비었고 북두(北斗) 자루 떨어졌는데, 취해서 쓴 글 두어 줄이네." 하였다.
묘련사(妙蓮寺) : 옛터는 삼현리(三峴里)에 있다.
○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중흥비(重興碑)에,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은 숭악(崧岳)이고, 그 동쪽 언덕이 남으
로 뻗다가 갈라져 서편으로 꺾이고 미세하게 숨다가 성대하게 일어나고, 또 나뉘어 남쪽이 삼현(三峴)이 되었으
니, 멀리서 바라보면 용이 서린 것 같고 가까이서 보면 봉황이 우뚝 솟은 것 같다.
용의 배를 등지고 봉황의 가슴에 붙어서 절이 서 있으니, 묘련사(妙蓮寺)이다.
우리 충렬왕(忠烈王) 이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더불어 부처를 존경하여 믿어 이르기를, '불도에 들어가
는 길은 《법화경(法華經)》이 가장 심오하고, 경(經)의 뜻을 편 것은 천태(天台)의 소(疏)에 다 구비되어 있다.'
하고, 좋은 땅을 가려서 정사(精舍)를 세우고, 《법화경》을 읽어서 그 도를 구하고 천태의 소를 강론하여 그 뜻
을 연구하여 장차 천자의 복을 빌고 우리 국가의 복을 맞으려 하였다.
지원(至元) 20년 가을에 강당을 짓기 시작하여 다음 해 여름에 낙성하였다.
개산(開山)한 이는 사자암(師子庵)의 노숙(老宿) 홍서(洪恕)가 실로 그 사람이요,
원혜국사(圓慧國師)가 결사(結社)의 주맹(主盟)이고 홍서가 또 다음이고, 세 번 전하여 무외국사(無畏國師)에
이르러 학자가 더욱 많이 모였다.
충렬왕이 이미 원혜국사와 무외국사를 예우하였고 충선왕은 그 예우(禮遇)를 더욱 중히 하였으니,
무릇 원문(院門)과 선교(禪敎)를 빛내고 보호하는 것이 다른 여러 사찰에서는 감히 바랄 수 없었다.
무외보다 앞선 이로 희(禧)와 인(因)이 있었고, 무외보다 뒤로는 분(芬)ㆍ련(璉)ㆍ홍(泓)ㆍ염(焰)ㆍ여(如)가 있
었으며, 지금 당두(堂頭)로서 길(吉)이 있으니, 모두 승가에서 선발된 사람들로서 서로 이어서 절을 유지하여
종어(鐘魚)와 향화(香火)를 처음과 같이 하여 왔다.
그러나 절의 기둥이 흔들리고 기울어지며 기와와 계단의 벽돌이 썩고 또 빠졌으니, 대개 지은 지 6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필연적인 형세인 것이다.
순암선공(順庵旋公)은 원혜국사의 적사(嫡嗣)이며 무외국사의 조카이다. 천자가 삼장(三藏)이란 호를 주어 연
도(燕都)의 대연성사(大延聖寺)에 머물게 하였더니 지원(至元) 병자년에 천자가 내린 향을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와서 충숙왕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묘련사는 충렬왕과 충선왕 두 임금의 보시로 지은 절입니다.
그분들의 영정(影幀)이 여기에 있으니, 전하께서 이 절을 중수하신다면 선조를 받드는 효도가 이보다 더 큰 것
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듣고 감동하여 마침내 금은 보기(寶器) 수백 만을 희사하여 절에 내려주니,
그 무리들이 서로 권면하여 혹은 계획을 세우고 혹은 힘을 다하여, 방과 마루와 주방과 행랑들의 흔들리는 것은
고치고 기울어진 것은 세우고 썩은 것은 바꾸고 빠진 것은 보충하고, 불상(佛像)의 차림을 새롭게 하고 재주
(齋廚)의 비용을 넉넉히 하며, 푸른 솔을 더 심고 높은 담을 둘러 쌓았다.
선공(旋公)이 큰 글자를 잘 쓰므로 이에 금으로 불전(佛殿)의 편액을 써서 처마 사이에 걸어 놓으니,
광채가 해와 별처럼 빛났다. 모두 서로 치하하지 않는 이가 없어 말하기를, '이만하면 할 일은 마쳤으니, 돌에
새겨서 뒷세상에 보여야 한다.' 하고, 조정에 글을 청하니, 왕은 신에게 명하여 비문을 쓰라고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일은 처음 시작보다는 지키는 것이 더 어렵고, 지키는 어려움보다는 다시 부흥시키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 이 절은 충선왕이 충렬왕의 원을 넓혔고 충숙왕이 중수하였으며,
무외국사가 원혜국사의 자취를 이었고 선공이 일으켰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오직 선대에 가졌던 것이
므로 잇달아 보수한다.'는 말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저 나라에 집에서나 자식이나 손자들이 조상의 유업을 잊음
이 없이 떨어지면 보수하고 엎어지면 일으켜 세우기를 또한 이 절처럼 한다면 백세(百世)를 지나더라도 끊어
지지 않을 것이니,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어려서부터 선인(先人) 동암(東庵)을 따라서 무외국사의 문하에 드나들었으며, 선공이 또 같이 놀아주었다.
하물며 우리 임금의 명이 있으니 어찌 감히 비루하고 서툴다는 이유로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축(五竺)의 나라에서 성인이 일어났네. 생령(生靈)을 건져주려고, 병에 따라 약(藥)을 주었네. 끝에 묘한 법을
설하여, 권(權)에서 실(實)을 나타냈네. 영산(靈山)의 한 모임이 책을 펴니 엄연(儼然)하다.
저 울창한 언덕에 산뜻한 정사(精舍)로다. 두 분 덕 있는 사람을 맞이하여 자비의 교화를 드날렸네.
도는 통하고 막힘이 없으나 그릇은 이루어지고 허물어짐이 있다.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정하
겠는가. 진실한 순암(順庵)은 한마디 말로 임금을 감동시켰네.
선왕의 뜻을 이어 받들어 비부(?府)의 금을 내려주셨네. 이에 경영하고 얽으니 높직하고 화려하네.
계산(溪山)과 구름 달은 옛것이나 새로워졌구나. 제호(醍?)로 배부르게 하고 담복화(??花)로 향을 살라 우리
황원(皇元 원(元) 나라)에 복을 주고 우리나라에 미치리.' 하였다.
○ 이제현의 <석지조(石池?) 기문>에, "삼장(三藏) 순암법사(順庵法師)가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풍악(楓岳)의
절에서 복을 빌고서, 그 길로 한송정(寒松亭)을 유람하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으므로 주민에게 물으니,
'옛날 사람들이 차를 끓여 마시던 것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 하였다.
법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릴 때 일찍이 묘련사에서 돌 두개가 풀 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형상을 생각
해 보니 아마 이것이 그것인가 보다.'하고는 묘련사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과연 있었는데, 그 하나는 네모 반듯
하게 파서 말[斗]같이 하고, 그 가운데를 둥글게 만들어 절구같이 되었으니, 샘물을 담는 곳이요, 아래에는 구멍
이 있는데 입 같으니 열어서 흐린 물을 빼내고 맑은 물을 고이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두 군데 움푹 들어간 것이 있으니, 둥근 데는 불을 두는 곳이요, 길쭉한 데는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한 구멍을 조금 크게 만들어 움푹 들어간 둥근 데로 통하게 한 것은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이다.
합하여 이름하기를 이른바 '묘련사 석지조'라는 것이다. 이에 인부 10명을 시켜서 굴려서 처마 아래에 갖다 놓고
손님을 초청하여 차례로 벌려 앉아 백설 같은 샘물을 길어다 황금같이 움싹 차[芽茶]를 끓이면서 익재(益齋)
에게 이르기를, '옛날 최정안(崔靖安)이 일찍이 쌍명기로회(雙明耆老會)를 열었는데, 그 땅은 지금 이 절의 북쪽
산봉우리로서 절과의 거리가 수백 보 되는 가까운 거리이니, 이것은 그때 쓰던 물건인가보다. 목암(牧菴) 무외
국사가 이 절에 주석해 있었는데, 삼암(三菴) 같은 이가 날마다 왕래하였으니, 한 번 감정을 거쳤으면 그 값이
반드시 3배로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잡초 속에 묻혀 있다가 쌍명회가 열린 지금까지 거의 2백년이나 되어서 비로소 나를 위하여 한 번 나와서
앞에서 쓰이게 되었으니, 기문을 지어 이 그릇의 불우(不遇)함을 위로하고 내가 능히 얻은 것을 축하해 달라.'
하였다. 그윽히 생각건대, 쌍명회에 대해서는 학사(學士) 이미수(李眉?)가 있어 무릇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미세한 것까지도 진실로 말하며 웃음거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시문(詩文)으로 실었는데,
지금 그 문집 중에서 찾아보아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보이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그 후에 또한 일을 좋아하기로 최 태위(崔太尉) 형제 만한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이 돌이 지조(池?)가 된 것이 쌍명회 전에 있었다면 저 한송정의 것과 어느 것이 먼저가 되고 뒤가
되는지 모를 일이니, 대개 그것이 묻혀서 불우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유독 삼암한테만이랴. 미수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의 3백 년 전에 파묻혔다가 하루아침에
나타났으니, 비록 미수와 삼암은 만나지 못했으나 법사와의 만남이 있었으니 이른바 운수라는 것이 그 사이에
있는 것 같다.
물건은 사람과 더불어 항상 서로 그 이름을 위하니, 가정(柯亭)의 피리와 풍성(?城)의 검(劍)이 옹(邕)과 환(煥)을
기다려서 칭송이 자자하게 되었으니, 원래 두 사람의 감식안은 천년 동안 복종하는 바이지만, 그 이름이 난 것은
또한 두 물건 때문이기도 하다. 법사는 벌빙(伐氷)하는 명문의 자손으로 머리를 깎았지만 본래 부귀한 사람이다.
지금 천자의 사신이 되어 와서 한 나라의 임금이 공경하고 친애하기를 사우(師友)와 같이 하는데, 도리어 시인과
묵객(墨客)들과 더불어 바람을 읊고 달을 즐기는 장소에 노닐고 있으니, 그 도량을 알 만하다. 장차 후세에 미처
보지 못한 이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듣고 그 마음에 두 석물(石物)을 알게 하려는 것이니,
아마도 채옹과 뇌환의 피리와 검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
운암사(雲巖寺) : 옛 이름은 광암사(光巖寺)이다. 무선봉(舞仙峯) 밑에 있었으니,
공민왕 현릉(玄陵)의 재궁(齋宮)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색(李穡)의 비명(碑銘)이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한가하여 나가 놀까 생각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나막신에 밀칠하네.
서봉(西峯)에 그윽히 찾으니 소나무 밑에 10리의 길이로세. 절이 어디쯤 있는지, 먼저 종소리 한 번 들리네.
그윽한 곳 더듬어 멀고 가까움 잊어버려 다시 칡넝쿨을 밟아가네.
문득 보니, 시내 위에 누각이 사람을 맞이하여 숲 사이로 나타나네. 시냇가를 따라 푸른 골짜기 뚫고서 물이 다
한 곳에 이르렀네. 어느 해에 금을 펴서 부처의 집 지었는고. 거룩한 불상(佛像)은 보대(寶臺)에 앉았으니,
박가취(博迦聚)가 빛나기도 하네. 하늘까지 침범한 실리화(室利花)요, 땅에 가득 찬 패다라수(貝多羅樹)로세.
승방(僧房)이 몇 구역인가, 빙 둘려서 높고 낮네. 총총(叢叢)한 향화굴(香火窟)에 석등(石燈)이 바위 문을 안았
네. 명공(明公)의 거처인 줄 알겠으니, 계단 앞에 맹호(猛虎)를 바라보겠네.
명공은 지원(支遠)의 무리라, 깨달음의 길에 일찍 날듯이 걸었네. 오산(吳山)에서 석장(錫杖)을 떨치며 가고,
초수(楚水)에서 목배(木杯)로 건넜네. 지난해에 이 바위에 머물렀는데, 머물지 아니함이 참으로 머무는 것이다.
날마다 강석(講席)을 열고서 12부(部) 깊이 연구하네. 혀끝에서 번개가 날매 마군(魔軍)들이 곧 엎어지네.
학도들이 다투어 도(道)를 물으러 구름같이 모여 헤아릴 수도 없네.
근기(根機)에 따라 다 성취시키니 삼초(三草)에 비 한 번 고루 주네.
내가 온 것이 또한 무슨 다행인고. 청안(靑眼)으로 한 번 돌아봐주네. 떨어진 포단(蒲團) 위에 벌려 앉아서 조용
히 함께 웃고 말하네. 이야기가 오래다 보니 학(鶴)은 둥지로 돌아가고 어슴푸레하게 숲이 저무네.
찬 등불이 불감(佛龕)에 오르고 향(香)은 저녁에 보태네. 모든 시끄러움이 각각 거둬지니 경계가 고요하매 만
가지 생각이 없어진다. 밤이 깊어 한가한 자리에 누웠더니 시 읊는 동안에 창에는 새벽빛이네.
연엽루(蓮葉漏) 다 되니 아침 죽 먹으라고 북을 친다. 급히 일어나 관(冠)과 건(巾)을 바로하니 아침해가 붉은 빛
을 반쯤 토하네." 하였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어제 밤에 산매화(山梅花) 한 가지 피었는데, 산 속의 늙은 중은 꺾을 줄을 모른다.
사군(使君)은 나이 젊어 다정도 하여 찬 떨기 곁에 달려 와서 봄소식 묻네. 신선의 쌍옥소(雙玉簫)로 인간의 먼
이별을 불어 깨칠 수 없음이 한스럽네. 산에 온 지 사흘에 산에 오르지 못했으니, 봄바람이 싸늘함을 어찌할 수
없네. 내일 아침에 말에 올라 속세 속으로 들어가리니, 마루 앞 주렴에 가득한 이 달을 누가 보려나."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빛나는 바위가 천길 높이 하늘에 비쳤는데, 높고 낮은 금벽(金碧)에 종어(鐘魚)가 울린
다. 여러 신하는 혈성(血誠)을 쏟아 삼보(三寶 불(佛)ㆍ법(法)ㆍ승(僧))를 받들어서 위로 빌기를 현능(玄陵)께
서 정토에 나길 비네. 중원(中原)의 한 조각 돌을 사와서 공덕(功德)을 새겨서 길이 전해 황여(黃輿 땅)와 함께
할 줄 누가 알았으리.
이름과 실상이 공교롭게 서로 맞아서, 문학은 글을 짓고 첨서(簽書)는 글씨 썼네. 다른 해에 눈물 떨어뜨릴 것
묻지 마소. 골짜기는 적적한데 사람도 드물다.
사천대(司天臺) 신하가 복지(卜地)하는 날에 동혈(同穴 합장(合葬))하라는 비문 처음부터 말씀하셨네.
당시에 신 이색이 제점(提點)으로 있었으니, 열다섯 해 만에 길이 한숨지었네.
돌이 부서지고 산이 무너질지라도 눈물은 미려(尾閭)처럼 마르지 않으리." 하였다.
진관사(眞觀寺) : 옛터는 용수산(龍首山) 기슭에 있다. 개국사(開國寺) : 개성부 동쪽 5리에 있다.
○ 이제현의 <중수기>에, "우리 태조께서 이미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석씨(釋氏)는 정치를 도와 포학과 패역(悖逆)을 인도하고 감화시키고 그 무리에게 부역을 지우지
아니하고 그 교를 천명하게 하였다. 모든 불탑과 불전을 짓는 데는 반드시 산천의 음양 역순(陰陽逆順)의 형세
를 살펴서 손익(損益)과 압승(壓勝)됨이 있은 연후에야 하였으니, 양(梁) 나라 무제(武帝)처럼 죄를 두려워하고
복을 사모하여 부처에게 구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
도성 동남쪽 모퉁이의 문을 보정문(保定門)이라고 이름하는데, 그 길은 양광(楊廣)ㆍ전라ㆍ경상ㆍ강릉(江陵)
네 도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도성에서 네 도로 나가는 사람들이 밤낮 없이 끊이지 않는 데이다. 냇물이
있으니 도성 안의 물은 시내이든 도랑이든, 가깝든 멀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모두 모여서 동쪽으로 흐른다.
매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장마물이 모여들면 와르르 달리는 것이 마치 삼군이 행진하는 것 같으니, 아 두렵도다.
또 산이 있으니 곡봉(鵠峯)에서 근원하여 구불구불 내려와서 그 형세가 굽은 듯하다가 일어나고 달리는 듯하다
가 멈춰 마치 용과 범이 변동할 제 기세가 웅장함과 같다. 세상에서 이 땅을 삼감(三鉗)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혹시 이 때문인가.
청태(淸泰) 18년에 태조께서 술가(術家)의 말을 들어 절을 그 사이에 짓고 방포(方袍)를 입고 율승(律乘)을 배우
는 자들을 거처하게 하며 이름을 개국사(開國寺)라 하였다. 이때 정벌(征伐)하는 일이 겨우 평정되고, 모든 것이
초창기라 군사들 중에서 모집하여 역군으로 하고, 창과 방패를 부수어 짓는 데에 충당하니, 싸움을 그만두고
백성을 쉬게 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임진년에 불타고서 새로 중수하지 못하니, 승방과 불전이 비바람을 가릴
수 없어 계단(戒壇)은 빈터가 되고 강사(講肆 불법을 강의하는 장소)에는 풀이 무성하여 날마다 달마다 퇴락하
여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물건은 언제나 시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요 때를 만나면 번영하고, 도는 끝내 막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남산종사(南山宗師) 목헌구공(木軒九公)은 변재(辨才)와 의해(義解)로써 오직 무너진 기강(紀綱)
을 진작시켜 일으키는 것으로 책임을 삼았다. 하루는 중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나라 땅에 살면
서 누에치기와 농사일을 하지 않고서도 옷은 추위와 더위를 막으며 먹는 것은 아침저녁을 지내기에 넉넉하니,
우리 임금의 은혜와 우리 정승의 베풂이 또한 이미 지극하다.
지금 국가가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니니, 반드시 전의 준례에 따라 우리 절을 중수하려면 어려울 것이다.
또 울타리가 터졌는데 이웃사람에게 보수해 달라고 요구하면 의(義)가 아니며, 밭이 묵었는데 남에게 김매주기
를 바란다면 지혜가 아니다.' 하니, 여러 중들이 듣고서 그 뜻을 깨달아 팔을 걷고 따라나서서, 종문(宗門)의
여러 사찰에 통첩을 보내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땅의 높고 낮은 것을 평평히 하고 풀뿌리 나뭇가지를 잘
라내며, 연괘(筵괘)의 넓고 좁으며 굽고 곧은 것을 맞추고 기둥을 세우며 서까래를 걸고 흙을 바르고 단청하였
다. 높은 전각을 위쪽에 짓고 긴 행랑을 양편에 지었으며, 두 행랑 끝에 다락을 짓고 마루를 놓으며,
두 다락 사이에 지붕을 이어 문을 지었다. 그 서쪽에는 학도들의 집과 스승의 방이다. 부엌과 곳간이 각각 제자
리에 있는데, 간략하고도 주밀하며 검소하고도 견고하니 기왕 계획을 참작하여 오래 가게 하려고 규모와 제도
를 증감하여 알맞게 한 것이다.
지치(至治) 계해년(1323)부터 시작하여 태정(泰定) 을축년(1325)까지 3년 만에 준공하고 경찬회(慶讚會)를 베
풀어 낙성하니, 듣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이에 그 무리들 중에 노성한 이가 장래에 길이
전할 것을 도모하여 나의 집에 찾아와서 기문을 청하기를 매우 간절히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근세에 불가의 흐름이 무슨 일을 경영하려면 반드시 권문호가(權門豪家)에 세력을 빌려서 백
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나라에 해가 되게 하면서 빨리 이루기만을 힘쓰고, 복을 심는다는 것이 도리어 원망을
사게 됨을 알지 못한다.
목헌대사(木軒大師)는 그렇지 않아 말이 지성에서 나오니 여러 사람이 즐거이 쓰여지고, 나라에서 털끝만한 재
물도 허비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잠깐 사이의 힘도 빌리지 않았으면서도 이루어 놓은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은 기록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의 처음 창설은 태조께서 국가에 이익을 가져오게 하려는 것이요,
양 무제(梁武帝)가 자기의 복만 얻으려 백성과 나라에 폐해를 끼친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니니, 또한 후세 사람들
로 하여금 살피도록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대강 내력을 서술하는 바이다.
대체로 율승(律乘)의 도는 그른 것을 억제하고 선(善)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니, 요순(堯舜)의 정치에 고요(咎繇)
의 형벌이 있었던 것은 형벌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 미묘한 말과 심오한 뜻은 나는 일찍이 배우지 않았으니 감히 억지로 말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중을 찾아 나무 그늘 중에 산보하다가 승지(勝地) 만나 곡소(曲沼) 동편에 오래 머무
노라. 물에 점을 찍는 잠자리는 깁 날개가 푸르고, 물결에 목욕하는 뜸부기는 비단 털이 붉구나.
연잎이 이슬 받음은 신선의 손바닥이 무겁고, 버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궁녀의 허리가 가벼운 듯,
나와서 노는 물고기 피해 가지 말라.
못가에 앉아 있는 이 어옹(漁翁)이 아니로다." 하였다. 보국사(補國寺) : 사찰이 두 개인데,
고려 정궁(正宮) 동서편에 있다.
○ 고려 이원굉(李元紘)의 시에, "몸이 한가하여 승지에 노니, 지팡이를 짚으매 서늘한 바람을 타고 노는 듯, 물
을 건너니 옷이야 젖건 말건, 산을 도니 신발이 뚫어지건 말건, 낭떠러지에 쥐가 덩굴을 타고 달아나고,
빽빽한 숲 속에는 매미가 잎에 숨어 있네. 흥이 다하여 중의 방에 돌아오니 애오라지 일미선(一味禪)을 함께 하
리." 하였다.
청운사(靑雲寺) : 보국사(補國寺) 곁에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늙은 나무는 뜰에 당했고, 맑은 시내는 절문 밖에 흐르네. 중이 한가하니 야인(野人)
의 정취(情趣)가 많고, 지경이 고요하매 세속의 시끄러움이 없구나. 차를 끓였으니 의당 많이 마셔야 하고,
시구(詩句)를 가지고 세세하게 논함을 좋아하네. 마음에 진리를 간직하매 스스로 흐뭇하니, 해가 저물도록 말을
잊었구나." 하였다.
봉엄사(奉嚴寺) : 고려 최유청(崔惟淸)의 시에, "봄이 가니 산 꽃도 다 없어지고 푸른 숲을 오르내리는 새만 서로
부르네. 짐짓 버드나무가 풍류 많은 줄 알겠으니, 버들개지 날아와서 자리 모퉁이를 두르노라." 하였다.
해안사(海安寺) : 봉명산(鳳鳴山)에 있다. 고려 때 조종(祖宗)의 영정(影幀)을 여기에 봉안하였다.
명종 때에 무신들이 의논하기를, "의종이 무인을 원수로 여겼으니 영정을 무방(武方) 서방(西方)에 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고, 마침내 성 동쪽에 있는 오미원(吳彌院)을 선효사(宣孝寺)로 이름을 고치고서 옮겨 모시고,
해안사를 중방(重房)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일월사(日月寺) : 송악산 기슭에 있다. 고려 태조 5년(922)에 궁성 서북편에 절을 세웠다. 문종이 성을 돌아보다
가 절 서편 언덕에서 잔치하였다. 숙종이 후비와 태자를 데리고 이 절에 와서 뒤 언덕에 올라가서 잔치하려 하
니, 어사가 그때 가뭄이 들었다고 간하여 왕이 중지하였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바위 앞에 돌이 있어 크기가 집만한데 돌 아래 흐르는 샘물 소리 거문고 같다. 둑을
쌓아 옥 같은 물결을 놓아주지 않으니 새벽 거울처럼 티끌 없고 나무 그림자가 푸르게 비치네. 이끼 낀 네 글자
선부(仙府)를 표하였으니, 구름으로 잠그고 연기로 봉하여 신이 보호하였네.
자진(子晉)이 생황을 불며 떠나 돌아오지 아니하니, 새 울고 꽃 떨어지는데 푸른 산이 저물어가네." 하였다.
대안사(大安寺) : 천마산(天磨山)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높은 바위 절벽 앞으로 길이 나니, 개인 구름이 뭉게뭉게 연기처럼 솟는다.
샘물은 돌을 만나 빙 돌아 흐르고 칡넝쿨은 솔을 만나 칭칭 감았네. 승원(僧院)은 고요하여 한가로운 세계이고,
동문(洞門)은 넓어 특별한 신선의 지경이네. 어느 누가 신선의 이슬을 빌려주어 마세, 묵은 뼈 사이에 스며
있는 홍진(紅塵)을 씻어 낼 것인가." 하였다.
관정사(觀靜寺) : 제석산(帝釋山)에 있다. ○ 이규보의 시에, "나는 새 그림자는 맑은 못 밑바닥에 떨어지고,
해가 지매 돌아오는 새소리는 푸른 나무 사이에 지저귄다. 앞산을 지나고는 절 있을까 의심했더니,
앞산을 지나고 보니 또 앞산 있네." 하였다.
자효사(慈孝寺) : 홍언박(洪彦博)의 시에, "흰 연꽃 피고 노랑머리 연꽃 자라는데, 버들 그늘 가을 물이 못에 가득
하구나. 오늘은 헛되이 돌아간다 말하지 마소. 우리 대사에 한 조각 향을 올린 것에 만족하여라." 하였다.
경복사(景福寺) : 이규보의 시에, "잠자리는 맑은 냇물에 점 찍으며 지나가고, 도마뱀은 푸른 산 속으로 도망쳐
숨는다. 산길에 중의 인도가 필요 있나. 경쇠 소리나는 곳이 앙궁(鴦宮)인 줄 알겠구나." 하였다.
건원사(乾元寺)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푸른 구름은 하늘에서 떨어진 돌이요, 붉은 금은 땅에 깔린 모래로다.
어느 해에 부처 나라를 옮겨다가 이 땅에 중의 집을 일으켰는가. 바람은 패다엽(貝多葉)에 부딪치고,
이슬은 담복화(?蔔花)에 무르녹았네. 북쪽 봉우리는 천 송이 연꽃이 곧게 섰고, 남쪽 도랑은 한 가닥이 빗겨서
흐르네. 법우(法雨)는 마음의 때를 씻어주고 자운(慈雲)은 도(道)의 싹을 키워준다.
헤어질 때를 당하여 시를 몇 축(軸)이나 지었는가. 종이 위의 먹이 까마귀 그려 놓은 듯." 하였다.
○ "절이 그윽하고 한가하여 속세 수레가 드문데, 산 빛과 물 색깔이 사람의 옷을 물들인다.
버드나무 다리에는 꾀꼬리가 벗을 얻어 쌍으로 울고, 소나무 언덕에는 학이 둥지를 찾아 홀로 돌아온다.
불가의 지경은 속세 사람과 아주 막혀 있고, 산야(山野)의 정취는 길이 세상 물정과 어그러져 있다.
자연으로 놀아 무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인연을 잊고 기틀을 쉴 것은 없네." 하였다.
○ 고려 채련(蔡璉)의 시에, "이 길이 산 꽃 천만 겹을 지나니, 붉은 이슬이 촉촉이 신발에 가득하네.
하늘이 어두우니 나뭇가지가 누대를 덮었고, 바람이 고요하니 상 머리에 서적이 흩어져 있네.
긴 대나무는 소슬하여 성긴 솔에 울리고, 쨍그렁 쨍그렁 환패(環佩)는 차가운 돌을 부순다. 중들은 아마 웃으리,
자주 오가는 것은 스무 살의 이름도 없는 한 선비인데." 하였다.
동산재(東山齋) : 개성 동편에 있다.
○ 예왕(睿王)이 일찍이 북문으로 황문(黃門 환관(宦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종실의 열후(列侯)라고 스스로 칭
하고 동산재를 찾아갔는데, 처사(處士) 곽여(郭輿)가 마침 성안에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으니, 임금이 3, 4차례
빙빙 돌다가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라는 시를 한 편 지어서 벽에 써 붙여놓고 돌아갔다.
그 시에, "어느 곳에서 술 잊기 어려웠던고, 진인(眞人)을 찾다가 못 찾고 돌아가네. 서창(書窓)에는 저녁놀이
밝았고, 옥전(玉篆 향(香))에 남은 재가 덮여 있다. 방장(方丈)에는 지키는 사람 없고 선비(仙扉)만 종일 열려
있다.
동산의 꾀꼬리가 늙은 나무에서 울고 뜰에 학은 창태(蒼苔)에서 조는데, 도미(道味)를 누구와 같이 말할까.
선생이 가고는 오지 아니한다. 깊이 생각하니 감개(感慨)가 나고 머리를 돌려 거듭 배회하네.
붓을 잡고 벽에 쓴 것을 남겨 두고 난간을 붙잡으며 대(臺)에서 내려가기 더디구나. 시 읊는 것을 도와 경치는
태도가 많아 닿는 곳마다 티끌이 없구나. 나무 그늘에 더위 가시고 훈훈한 바람 집에 들어온다.
이때에 한 잔 없으니 번거로운 생각을 어찌 씻으리." 하니, 곽여가 화답하기를, "어느 곳에서 술 잊기 어려웠던
고. 보련(寶輦 임금이 타는 수레)이 헛되이 걸음하고 돌아가셨네.
주문(朱門)의 작은 잔치에 참예했다가 단조(丹? 신선의 약 달이는 솥)에 찬 재를 떨어뜨렸네. 마시기를 밤새도
록 하였는데 성문이 새벽을 기다려야 열리노라.
지팡이로 봉래산(蓬萊山) 길로 돌아오는데 나막신에 낙성(洛城)의 이끼 묻었네. 나무 아래 청의동자(靑衣童子)
알리는 말이 옥황님이 인간에 오셨다고. 오궁(鰲宮)이 모두 적막한데 용어(龍馭)가 짐짓 배회하셨네.
붓을 뽑아 뜻 있는 시를 쓰시고 사람 없는 대(臺) 위에도 오르셨다네. 일월(日月)을 뵙지 못했으니, 세속에 갔던
것이 도리어 한스럽네. 머리를 긁으면서 뜰 아래에 서고 시름을 머금으며 돌 모퉁이에 기대었네.
이런 때 술 한 잔 없다면 어찌 촌심(寸心)을 위로하리요." 하였다.
난산고성(卵山古城) : 개성부 서편 23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4천 4백 10척이고, 높이가 30척인데,
지금은 반이나 퇴락하였다.
명환 고려 정지(鄭地) : 판개성부사(判開城附事)였다. 본조 이행(李行) : 유후(留後)로 있었다.
권담(權湛) : 부유후(副留後)로 있었다. 박원계(朴元桂) : 소윤(少尹)이었다.
민제(閔霽)ㆍ남지(南智)ㆍ강석덕(姜碩德)ㆍ이계린(李季?)ㆍ기건(奇虔) : 모두 유후로 있었다.
이서장(李恕長)ㆍ김양경(金良璥)ㆍ이예(李芮)ㆍ김지경(金之慶)ㆍ김영유(金永濡) : 모두 유수로 있으면서 은혜
로운 정치가 있었다.
인물
고려 황희순(王希順) : 태조를 도와서 삼한(三韓)을 정하여 공신이 되다.
왕규(王珪) : 태조의 종제인 영해공(寧海公) 만세(萬歲)의 7대손이다. 나이 7살 때에 동궁의 학우(學友)가 되었다.
처음에는 군기시 주부가 되었다가 벼슬이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왕세경(王世慶) : 희순의 8대손이다. 의종조(毅宗朝)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ㆍ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간의 이부 시랑(諫議吏部侍郞)에 올랐다.
고영신(高令臣) : 젊어서 부모를 잃고 학문에 힘써서 글짓기를 잘하였다. 급제하여 여러 차례 우간의대부(右諫議
大夫)에 올랐다. 의논이 강개하여 굴복하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다. 이부와 예부 상서를 거쳐 벼슬이 검교 사공
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김준(金?) : 젊어서 영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과거에 장원하였다. 벼슬이 병부와 예부 상서ㆍ참지정사에 이르
렀다. 시호는 정신(貞愼)이다.
본조 고거정(高居正) : 영신의 후손으로, 벼슬이 부유후에 이르렀다.
고약해(高若海) : 벼슬이 개성부 유수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직
언을 잘하고 시속을 따르지 않았다.
효자 본조 김귀손(金龜孫) : 사삿집 종이다. 어릴 때 어머니가 죽었는데, 자란 뒤에 슬피 사모하여 신주를 만들
어 아침저녁으로 제사하였다. 아버지가 후처를 얻어서 사는데, 방이 차고 더운지 잘 보살피고 맛난 음식으로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아 매우 고생하니, 귀손이 그 곪은 것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
뒤에 아버지가 죽으니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상식하고 나서 계모에게 가서 뵙고 음식상을 보살핀
뒤에 여막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3년 동안 중지하지 않았더니,
이 일이 나라에 들려서 정려(旌閭)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신증 민백화(閔伯和) : 효행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일찍이 성종(成宗)을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지냈다.
모친이 죽으니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손수 상식을 올리고 삼년상을 마치도록 피눈물을 흘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은 적이 없었으니, 그때 나이 74세였다. 금상(今上) 10년에 정문을 세웠다.
강천년(姜千年) : 어머니가 몹쓸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후에 병이 재발하자 역시 전과 같이 하니 병이 영원히 나았다. 돌아가시자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채소나 과일과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으며 매일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기를 마치고 나서 반드시 아버지를 뵙고 돌아왔다.
이 일이 나라에 들려 여문을 세웠다.
제영 천유정읍시황량(遷遺井邑市荒?) : 명 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지은 시에, "도읍은 옮겨지고 샘은 남아
있어 저자는 황량한데, 푸른 들판이 눈에 가득하니 지나가는 손의 마음이 아프다. 동산에 꽃이 있으매 벌은 꿀
을 만들고, 궁전과 누대는 주인 없으매 토끼 고장이 되었다. 행상들은 길을 돌아 새 성곽으로 가고,
앉은 장사는 점포를 옮겼으나 옛 방(坊)을 그리워한다.
이것이 지난날 왕씨(王氏)의 기업이니, 단군이 가신 뒤로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하였다.
신숭심처고궁천(神嵩深處故宮遷) : 명 나라 중 현극(玄極)의 응제시(應制詩)에, "숭악(崧岳)의 깊은 곳에서 고궁
(故宮)은 옮겨 갔으니, 처량한 경물(景物)에 생각이 서글프네. 눈에 가득한 강산엔 구름만 아득하고, 몇 집 남은
성곽(城郭)에는 풀이 우거졌는고. 허물어진 담 밑 나무엔 새가 가을 바람에 지저귀고, 황폐한 우물에는 밤비에
개구리가 운다.
하늘 한가운데로 머리를 들매 붉은 해가 가까우니 빛나는 맑은 빛이 가없이 비치네." 하였다.
비기유전구백전(?記猶傳九百年) : 명 나라 중 부흡(溥洽)의 응제시에, "비기(?記)가 9백 년을 전해 내려오니
앞사람은 이미 가고 뒤에 사람 옮겨갔다. 삼경(三京 중경ㆍ동경ㆍ서경)의 백일(白日)에는 토끼와 여우가 놀고,
오부(五部)의 청춘(靑春)에는 풍악 소리에 취하였다. 나무 떨어지는 숭악(崧岳)은 차갑게 비에 울고, 풀이 우거
진 후원에는 늦게 연기 나네. 명 나라 조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넓으니 동쪽 나라가 다행히 보전되매 기뻐서
감동하네." 하였다.
왕씨작동번(王氏作東藩) : 권근(權近)의 시에, "왕씨가 동쪽 울타리가 되어 5백 년 동안 유지하였네.
쇠미하여 마침내 도를 잃었으니 흥하고 망함은 실로 천운에 관계된다. 참담한 성은 아직 그대로이나,
번화한 나라는 이미 옮아갔다. 나는 와서 탄식만 더하니 교목(喬木)이 찬 연기 띠었네." 하였다.
도성흥폐기영웅(都城興廢幾英雄) : 이첨(李詹)의 시에, "지나간 일은 유유(悠悠)히 허공에 붙었는데 도성의
흥망에는 영웅이 몇이런가. 상서로운 구름은 강안전(康安殿)에 겹겹이 둘렀고, 봄 풀은 연경궁(延慶宮)에 벌여
났네. 옥련(玉輦)은 어느 때에 이 땅을 경영했던가. 금지(金枝 제왕가의 자손)로 만세토록 동국을 덮어 주었네.
복사꽃도 임금 얼굴을 보려고 하여 해마다 비 이슬에 한결같이 붉네." 하였다.
인물남천시정공(人物南遷市井空) : 이맹전(李孟畇)의 시에, "5백 년 내려오던 왕기(王氣)가 끝났으니 계림(鷄林)
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취한 것 마침내 무슨 공인고. 영웅은 한 번 가고 산하만 남았고,
인물은 남으로 옮겨가고 시정(市井)은 비었네. 상원(上苑)의 벚꽃은 봄비 뒤요, 여러 왕릉의 초목은 석양 가운데
네. 가을 바람에 손[客]의 한(恨)이 얼마런가. 지난 일은 유유하고 물은 절로 동으로 흐르네." 하였다.
현도도독초개부(玄?都督初開府) : 기순(祁順)의 시에, "송악산이 높이 푸른 하늘에 꽂혔는데 늦 구름이 날라서
만호의 저녁 연기에 섞였네. 현도 도독(玄?都督)이 처음 부(府)를 열었더니 벌써 인간의 5백 년을 지났네." 하였
다.
일타송만고입천(一朶松巒高入天) : 서거정(徐居正)이 기순의 시를 차운(次韻)하기를, "한 송이 송악산이 하늘 높
이 솟았는데, 황량한 저무는 날에 찬 연기가 자욱하다. 마음 아프다, 전조(前朝) 일은 묻지 마소.
경치가 전혀 전성기와 같지 않네." 하였다.
임진노출평여장(臨津路出平如掌) : 서거정의 시에, "옛 나라의 화려함을 생각하는 마음 어둡구나. 왕손들의 놀이
때 흥에 서로 끌렸으리. 임진(臨津)에 길이 나서 평평하기 손바닥 같고, 송악산에 사람 오르매 높기가 하늘 같구
나. 승지와 명구(名區)에 자주 말을 멈추고 무너진 담에 우거진 나무는 두견새 울음에 맡겨 둔다.
늙은이를 만나서 의당 먼저 물어보는 것은, 조선에서 어느 해에 한양으로 옮겨갔는고." 하였다.
구정일락매홍수(毬庭日落埋紅樹) : 서거정의 시에, "지난날 부소산(扶蘇山)에 쾌히 한 번 올랐더니, 백년의 감개
가 누구를 위해서 더했던고. 구정(毬庭)에 해 떨어지니 붉은 나무에 묻혔고, 연로(輦路)에 봄이 깊으매 푸른 등
나무 덩굴이 자라나네. 묵은 집에 사람 없으매 귀신이 나올 것 같고, 능묘(陵墓)에 불을 놓아 중의 머리같이 민둥
민둥하네. 장단강(長湍江) 물로는 전조의 한(恨)을 씻지 못하니 술통 앞에 강물만큼 많은 술이라야겠네." 하였다.
오관산색입운제(五冠山色入雲齊) : 서거정의 시에, "오관산 빛이 구름에 들어 가지런한데 날마다 중을 찾으니
신발이 몇 켤레인가. 옛 절은 삼장홀(三丈笏)이 황량하고 흙다리는 허물어져 한 덩이 진흙이네. 왕랑(王郞)의
높은 음조 퉁소로 봉의 소리 불렀고, 효자의 여풍(餘風)은 목계(木鷄)를 새겼네.
밝은 달 서쪽 누(樓)에서 나를 생각할 터이지.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 사람을 아득하게 하네." 하였다.
한궁타읍혼응암(漢宮駝泣魂應?) : 서거정의 시에, "맥수시(麥秀詩)가 이루어졌으나 곡조는 마치지 못하였는데.
뜬구름 같은 지난 일은 머리를 돌이키는 사이 비어졌네. 한궁(漢宮)의 동타(銅駝)가 우니 혼(魂)이 응당 슬플
것이요, 촉 나라의 두견새가 우니 눈물도 오히려 붉다. 천지는 이미 삼척(三尺)으로 정한 데로 돌아갔고,
산하(山河)는 누가 한 덩이의 진흙을 빌려 봉했는고, 그대는 전조의 일을 묻지도 말라. 양자강과 황하가 지금에
는 모두 동으로 흐른다네." 하였다.
성곽유존인불고(城郭猶存人不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송도(松都)의 왕기(王氣)가 이미 녹아 없어졌는데,
땅에 찬 연기와 구름에 풀과 나무가 깊었네. 성곽은 아직 있으나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고,
산천은 어제 같은데 나그네가 산에 올라 굽어보네. 남은 대(臺)는 적막한데 꽃은 주인 없고 옛 궁전은 황폐하여
대숲만 우거졌네. 말 위에서 아득한 천고의 뜻은 성안에 가득 찬 저녁놀에 가을 다듬이 소리만 급하다." 하였다.
신도이복천은정(新都已卜遷殷鼎) : 이승소의 시에, "세상일은 그럭저럭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가운데 아득하니
흑금(黑金)과 청목(靑木) 모두 다 빈 것으로 돌아갔다. 새 도읍을 이미 정하였으니 은정(殷鼎)이 옮겨졌고 옛
나라에서 서로 전한 것은 패궁(沛宮)이 있다. 곡령(鵠嶺)에 뜬 놀은 막막히 싸늘하고 제릉(齊陵)에 아름다운
기운 어렸네. 백년 동안 흥하고 망하던 자취 산하에 있으니, 창랑수(滄浪水)의 낚시 늙은이에 부쳐 주리라."
하였다.
제전초합연운벽(?田草合連雲碧) : 이승소의 시에, "화각(?角) 소리 슬픈데 저녁놀이 붉으니, 서리시(黍離詩)나
읊어 볼까. 어디가 관왜궁(館娃宮)#8인고 제전(?田)에 풀이 무성하여 구름같이 푸르고, 용정(龍井)의 찬 물결은
바다와 통했다. 화원에 나뭇잎 떨어지니 지난 일이 슬프고, 후전(後殿)의 노래 소리 옛일을 상상한다.
한가롭게 자하동(紫霞洞) 신선이 놀던 곳을 찾아가니, 신선의 학을 달 아래서 만날 듯하구나." 하였다.
당일생가무한의(當日笙歌無限意) : 이승소의 시에, "연복정(延福亭) 앞에 물이 스스로 흐르니 의릉(毅陵)의
끼친 자취 생각이 유유(悠悠)하네. 의관은 모두 고기와 자라로 화했고, 종묘는 거의 췌류(贅旒)같이 위태로웠네.
그날의 피리와 노래 소리 무한한 뜻은 지금도 천석(泉石)에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
소슬한 구원(九原)이 누런 잎에 묻혔으니 모두 영웅들의 한 덩이 흙이로다." 하였다.
박연애하간비천(朴淵崖下看飛泉) : 이승소의 시에, "말 가는 대로 맡겨둔 채 시 읊으니 흥이 미치고자 하는데 바로
산 뒤로부터 산 앞에 이르렀네. 성거산(聖居山) 한 곳에 봉우리는 상투 같고 갑곶(甲串)에 조수가 돌아오매 물이
하늘 같다. 효자의 집 앞에서 옛 샘을 찾고 박연애(朴淵崖) 아래서 나는 샘을 본다.
마가압(摩訶岬) 위에 있는 아간(阿干)의 집터는 다만 가람(伽藍)이 있어 만고에 전한다." 하였다.
소쇄산천활화개(瀟灑山川活?開)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연기가 비끼고 산 아지랑이 부드러워 누대(樓臺)를
숨겼는데, 소쇄한 산천은 살아 있는 그림같이 펼쳐졌네. 아침해가 구름 위로 올라오니 빛이 더욱 찬란하고 개인
구름이 땅에 낮게 내리니 그림자가 흔들거린다. 동쪽으로 달리고 서쪽으로 달리는 의관(衣冠)들은 성하고 만호
천문(萬戶千門)은 붉고 푸른 무더기네. 이 나라의 허다한 호걸들이 가련하다. 누가 세상을 건질 재주를 펼까."
하였다.
전팔경(前八景) 곡령춘청(鵠嶺春晴)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여덟 신선의 궁전에 아름다운 취미봉(翠微峯
산기슭)이 있어, 아득한 구름과 안개가 몇 만 겹인가. 하룻밤에 긴 바람이 비를 불고 지나가서 바다 용이 옥부용
(玉芙蓉)을 받들어 내었네." 하였다.
용산추만(龍山秋晩) : "지난해 용수(龍岫)에 국화 필 때 손님과 같이 술병 들고 취미봉에 올랐더니,
오솔길 솔바람이 모자를 불어 떨어뜨리고, 옷에 붉은 잎 가득한 채 술 취해서 부축받으며 돌아왔네." 하였다.
자동심승(紫洞尋僧) : "돌샘이 콸콸 흐르니 바람이 겨드랑에서 나고, 소나무 안개 부슬부슬 푸름이 수건에 듣는다.
산승(山僧이 간절히 소매 잡고 만류할 것 없이, 들꽃과 우는 새가 사람 머무르게 할 줄 아는 걸." 하였다.
청교송객(靑郊送客) : "작은 시내 깊은 곳에 버드나무는 버들개지를 날리고, 부슬비 갠 때에 풀빛은 연기인 듯.
손님이야 가거나 머물거나 아무 상관없거니. 한 통의 술로써 이 좋은 산천 대했네." 하였다.
웅천계음(熊川?飮) : "사장(沙場) 머리에서 술은 다하였고, 해는 지려 하는데 맑은 물에 발을 씻고 나는 새 바라
본다. 이 뜻이 스스로 아름다운데 그 누가 알아줄까. 공자 문하에서는 무(舞雩)에 놀고 돌아옴을 허여하였네."
하였다.
용야심춘(龍野尋春) : "우연히 시냇가에 이르러 푸른 풀을 깔고 앉으니, 일 좋아하는 봄 새들은 술 가져오라고
[提壺 새 이름] 권하네. 일어나 꽃 핀 곳을 찾으려 하니, 물 건너 그윽한 향기 가까이 가니 도리어 없네."
하였다.
남포연사(南浦煙蓑) : "한 물굽이의 부들과 갈대에 우수수 비 내리니, 저 언덕의 인가는 더욱 적적하여라. 고기
잡이 끝내고 아이를 불러 푸른 그물 거두어서, 배를 저어 늦게 밀려오는 조수 타고 돌아온다." 하였다.
서강월정(西江月艇) : "강물은 차고 밤은 고요한데 고기는 더디 잡히니, 혼자 선창(船窓)에 기대 낚싯줄을 거두네.
눈에 가득 청산이요, 배에 가득 달빛이라, 풍류는 반드시 서시(西施)를 싣는 데에만 있지 않네." 하였다.
후팔경 자동심승(紫洞尋僧) : 이제현의 시에, "돌 곁으로 맑은 물을 건너서 숲을 뚫고서 산기슭으로 올라간다.
사람을 만나 다시 중의 사립문을 물을 것 있나. 낮에 치는 범종(梵鐘) 소리가 연기 퍼진 사이로 울려 나온다.
풀 이슬은 짚신을 적시고 소나무 꽃은 갈포 옷에 점을 찍네. 실 같은 흰 수염으로 선탑(禪榻)에 앉아 세상 일 잊
으니, 산새는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하네.[催歸 새 이름]" 하였다.
○ "늙어도 몸이 아직 건강함이 기쁘고, 한가하니 흥이 다시 더하누나. 짚신과 대 지팡이로 많은 바위 지나니
소나무가 맞아 주고 보내 준다. 오래 앉았으니 구름은 바위굴로 돌아가고 이야기하다 보니 달이 처마에 걸려
있다. 다만 술을 사서 도잠(陶潛 도연명(陶淵明))을 부른다면 오고가기를 어찌 싫어하겠나." 하였다.
청교송객(靑郊送客) : "꽃다운 풀 성동(城東) 길이요, 성긴 소나무 들 밖 언덕이네. 봄바람에 이곳에 이별이 많
으니, 전별하는 장막 안에 옥피리를 울린다. 촌락이 따뜻하니 닭은 짝을 부르고, 모래밭 비 온 뒤에 제비는 물결
을 차네. 나누어져 갈 무렵에 말을 세우고 다시 거니니, 한 족조 위성가(渭城歌)로세." 하였다.
○ "들 절에 솔 꽃이 떨어지고, 말끔히 갠 시내에 버들개지가 날리네. 바람 앞에 흰 말 붉은 금 굴레, 가려 해도
꽃다운 봄빛이 아까워. 모이고 흩어짐이 지금도 옛날과 같고, 공명(功名)은 꿈인가 아닌가.
말없는 푸른 산이 가만히 기롱하기를, 누가 돌아가는 이소(二疏)를 보았나." 하였다.
북산연우(北山煙雨) : "만 골짜기에 연기 빛이 움직이고, 천 숲에 비 기운이 통한다. 오관산(五冠山) 서편 언덕
구룡동(九龍洞) 동쪽은 수묵(水墨)으로 그린 옛 병풍인데, 바위 앞에 나무는 푸른빛이 짙게 어렸고, 시냇가의
꽃은 붉은 것이 어지럽게 떴다. 끊어진 무지개 넘어가는 해 있을까 말까 하는 중에, 새 한 마리가 긴 하늘에 사
라진다." 하였다.
○ "푸른 허공은 담담히 멀고 푸른 산봉우리는 우뚝우뚝 섰다. 창조에 오는 우레와 비는 나는 용(龍)을 보내
옥부용(玉芙蓉)을 씻어주려 하네. 바위 사이에 절이 있는가 알 것 같더니, 골짜기 밑의 솔잎이 가려 찾을 수 없다.
훌륭한 화공(?工)이 붓을 빨아 그려도 형용하지 못할 것이니, 구의봉(九疑峯)인가 의심한다."
서강풍설(西江風雪) : "바다를 지나온 바람이 몹시 차가운데, 구름에 연달은 눈[雪]은 아득하기만 하다. 꽃이
떨어지듯 버들개지 날아오듯 강 마을에 가득 차니, 철 아닌 봄 미쳐 날뛰누나. 어촌 저자는 일찍 문이 닫히고,
나갔던 배는 포구로 들어오기 바쁘다.
술집 어느 곳에서는 음악 소리 들려, 맹양양(孟襄陽 맹호연(孟浩然))을 시름겹게 하는고." 하였다.
○ "강가의 집은 눈에 눌리고, 바람은 포구의 돛대에 울린다. 초각(草閣)에 올라가서 남쪽 창을 열고 보니,
구름과 바다는 아득하구나. 은실 같은 생선회를 가늘게 쳐놓고, 술단지를 열어서 술의 향기를 마시며,
높이 예성강(禮成江) 한 곡을 노래하니, 하두강(賀頭綱)의 창자가 끊어지리." 하였다.
백악청운(白堊晴雲) : "창포와 살구꽃 피우는 봄바람 뒤에, 들 물가에 초가집 몇 집이 섰네. 갠 구름은 빛을
희롱하여 숲에 자욱한데, 비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서울 근처 시골이라 부세(賦稅)가 없고, 들 밭에는 해마다
풍년드네. 내일 아침에 종과후(種瓜侯)에게 가서 배워 신세를 도구(??)에 맡길까 보다." 하였다.
○ "새벽에 청교역(靑郊驛)을 지나서 백악산(白嶽山)에 봄놀이 갔네. 제호(提壺) 새는 술을 권하며 지저귀고 한
번 들으면 한 번 파안대소하네. 마을 집은 숲 밖에 드문드문 섰고, 논 이랑은 출렁출렁 물길 사이에 있다.
들판에 비를 흡족히 주고 바람만 믿고 올라오니 고개 위에 한가한 구름이 부럽기만 하다." 하였다.
황교만조(黃橋晩照) : "시냇물은 이리저리 숨었다 나타나고, 논밭 두둑은 가로 세로 나뉘어 있다.
숲 너머로 사람 말소리 겨우 들리고, 마을 길은 푸르러 치마를 펼쳐 놓은 것 같다. 솔개는 오산(蜈山) 나무에 모
이고, 까마귀는 곡령(鵠嶺)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오는 소 가는 말 분주한데 성곽에는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하였다.
○ "멀리 바라보이는 참외 밭 길이요, 높이 솟은 유원루(柳院樓)에 석양에 길을 가다가 문득 오릉(五陵)의 붉은
나무 가을에 머리를 돌리다. 옛 성곽은 옛터가 웅장하고 난리는 지난 일 아득하다. 마을 아이들은 시름을 몰라
소를 거꾸로 타고 피리 불면서 간다." 하였다.
장단석벽(長湍石壁) : "물에 꽂아 놓은 구름 뿌리[雲根 돌(石)]가 솟아올랐고, 공중에 비낀 검푸른 절벽이 열렸
네. 고기와 용이 물결 불어 물굽이로 백 리에 푸른빛이 감돈다. 달은 수정빛으로 잠기고 꽃은 비단더미로 쌓였
네. 그림 배에 술을 싣고 자진 풍악에 하루에 천 바퀴를 돌았다." 하였다.
○ "파리한 뼈는 천 년을 섰고, 푸른 뿌리는 백 리에 서리다. 푸른 물결 속에 가로 퍼지고 옆으로 번져서 일대가
옥 같은 잔안(孱顔 바위로 된 험한 산)이다. 사냥꾼도 돌아보지 않고 고기잡이도 그냥 보기만 하네.
시인(詩人)이 억지로 천간(天?)을 묘사하려 하니, 귀밑털 아롱진 것만 얻었네." 하였다.
박연폭포(朴淵瀑布) : "해가 비치니 뭇 봉우리가 빼어나고, 구름이 엉기니 한 골짜기 깊숙하다.
사람들 말에 임금의 수레가 옛날에 오셨다 한다. 못 가운데에 너럭바위가 있네. 흰 비단은 천 척을 날리고, 푸른
거울은 만 길이나 투명하다. 달이 밝을 제 생학(笙鶴)이 먼 봉우리에서 내려와서 물속 용의 읊조림을 불어 보낸
다." 하였다.
○ "절벽에 감두(嵌竇 굴)가 열리고 긴 내[川]가 반 하늘에 걸렸다. 구슬이 뛰고 옥을 뿜어 몇 천 년인고. 시원한
기운이 부옇게 연기와 같다. 어찌 연서객(燃犀客)을 배울까. 다만 주학선(駐鶴仙 왕자진(王子晉))을 기약한다.
더위에 땀이 샘물 흐르듯 옷을 적셨더니 여기 오니 추워서 솜옷을 입어야겠네." 하였다.
[비고]
진보 여현진(礪峴鎭) : 서북쪽으로 25리, 용현(龍峴)의 남쪽이다. 영종(英宗) 6년(1730)에 성을 쌓고 진(鎭)을
두었다. ○ 창(倉) 2.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명.
백치진(白峙鎭) : 동북쪽으로 70리, 금천(金川) 동쪽 50리, 수룡산(首龍山) 남쪽이다.
옛날 우봉현(牛峯縣)의 백계현(白界峴)으로, 고성(古城)이 있다.
금천에서부터 성거산(聖居山) 뒤를 돌아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임진강(臨津江)과 통하니, 이는 개성부의 요해
지(要害地)이다. 신라와 고구려가 용병(用兵)할 때에는 모두 이 길을 지나갔다.
숙종 2년(1676)에 진을 두었다. 17년에 금천(金川)에 속했다가, 정종(正宗) 병진년(1796)에 개성부에 속하게
되었다. 창(倉) 2. ○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1명.
청석진(靑石鎭) : 청석동(靑石洞)에 있다. 순조(純祖) 3년(1803)에 길이 7백 56보(步)의 토성(土城)을 쌓고 관문
(關門)을 설치하여 첨사진(僉使鎭)을 두었다가 21년에 폐했다.
○ 비록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라고 하나 청석동에서부터 북쪽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돌아 도산(?山)
지경으로 들어가는 크고 작은 길을 지킬 수 없다.
영아 관리영(管理營) : 본조 숙종 37년(1711년)에 설치하였다.
관원 사(使) : 유수가 겸한다. 중군(中軍) : 대흥산성(大興山城)의 수성장(守成將)을 겸한다.
종사관 : 경력(經歷)이 겸한다. 좌열(左列)ㆍ우열(右列)ㆍ별장(別將) : 각각 한 사람씩이다. 좌부(左部)ㆍ우부
(右部)ㆍ중부(中部)ㆍ천총(千摠) : 각각 한 사람씩.
궁실 수창궁(壽昌宮) : 서소문(西小門) 안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이 궁의 영화전(永和殿)에서 선위(禪位)
를 받았고, 정종(定宗)과 태종(太宗)도 이곳에 임어(臨御)하였는데, 지금은 폐하여 창고가 되었다.
인덕궁(仁德宮) : 후릉(厚陵)의 경내에 있는데, 정종이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사원 계성사(啓聖祠) : 영종 16년에 성균관에 거둥하였다가 건립하기로 발의하였다.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경도(京都) 편에 상세하다.
○ 송양서원(崧陽書院) : 재남산(在男山) 동쪽에 있는데, 포은(圃隱)의 옛터이다. 선조(宣祖) 계유년(1573)에
건립하였고 을해년에 사액(賜額)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의 초상화와 묘정비가 있다.
정몽주(鄭夢周) : 경도 문묘(文廟) 편에 보인다. 우현보(禹玄寶) : 자는 원보(原寶)이고,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벼슬은 시중(侍中) 단산백(丹山伯)이었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서경덕(徐敬德) : 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화담(花潭)이고, 본관은 당성(唐城)이다.
벼슬은 후릉 참봉(厚陵參奉)이었는데,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상헌(金尙憲) : 경도 문묘 편에 보인다.
김육(金堉) : 자는 백후(伯厚)이며, 호는 잠곡(潛谷)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벼슬은 영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익(趙翼) : 수원(水原) 편에 보인다.
○ 화곡서원(花谷書院) : 화담(花潭)의 옛터에 있는데, 광해주 기유년(1609)에 세웠고, 인조(仁祖) 을해년(1635)
에 사액하였다. 서경덕(徐敬德) : 위에 보인다.
박순(朴淳) : 자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사암(思庵)이고,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벼슬은 영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허엽(許曄) : 자는 태휘(太輝)이며, 호는 초당(草堂)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벼슬은 부제학이었다.
민순(閔純) : 자는 경초(景初)이며, 호는 행촌(杏村)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벼슬은 장령이었다.
○ 오관서원(五冠書院) : 송악산(松岳山) 밑인데, 전조(前朝) 때의 오관방(五冠防)에 있다.
숙종 임술년(1682)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박상충(朴尙衷) : 자는 성부(誠夫)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을묘년(1375)에 화를 당해 장류(杖流)되었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였는데, 본조에서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
이다.
박세채(朴世采) : 상충(尙衷)의 10대 후손이다. 경도 문묘 편에 보인다.
○ 귀암서원(龜巖書院)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숙종 신유년(1681)에 옮겨 세웠고 임술년에 증액(贈額)하였다.
이제현(李齊賢) :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벼슬은 시중(侍中)이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김해후(金海侯)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종학(李種學) : 호는 인재(麟齋)이고, 벼슬은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이었다. 공양왕 임신년(1392)에 화를
당했으며, 목은(牧隱)의 아들이다.
조석윤(趙錫胤) : 자는 윤지(胤之)이며, 호는 낙정재(樂靜齋)이고,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와
대제학이었는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 숭절사(崇節祠) : 남산(男山) 남쪽에 있다.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1714)에 사액하
였다.
송상현(宋象賢) : 자는 덕구(德求)이며, 호는 천곡(泉谷)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선조 임진년(1592)에 순절(殉節)하였다. 벼슬은 동래 부사(東萊府使)였는데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연광(金鍊光) : 자는 언정(彦精)이며, 호는 송암(松巖)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선조 임진년에 순절하였
다. 벼슬은 회양 부사(淮陽府使)였는데, 예조 참판을 추증하였다.
유극량(劉克良) :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선조 임진년에 임진강(臨津江)에서 조방장(助防將)으로서 순절하였
다. 벼슬은 부원수(副元帥)였는데, 예조 참판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 표절사(表節祠) : 성균관 서쪽에 있다. 정종 계묘년(1783)에 세우고 그해에 사액하였다.
임선미(林先味) : 고려의 태학사(太學士)인데 본조에 벼슬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조의생(曺義生) : 태학생인데 본조에 벼슬하지 않고 맹(孟)씨 성을 가진 사람과 더불어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맹씨 성을 가진 사람[孟姓人]. 성사제(成思齊) : 벼슬은 직제학이었다.
박문수(朴門壽) : 벼슬은 찬성사였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민안부(閔安富) :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이
다.
김충한(金?漢) : 벼슬은 예의판서이다. ○ 위의 4현(賢)은 추향(追享)한 것이다.
○ 한천사(寒泉祠) : 용수산 북쪽에 있다. 순조 정묘년(1807)에 세웠는데, 협실(夾室)에 주자(朱子)와 우암(尤庵)
의 초상화를 봉안(奉安)하였다.
안유(安裕)ㆍ주자(朱子) : 모두 경도 문묘편에 보인다. 이색(李穡) : 장단(長湍) 편에 보인다.
한수(韓脩) : 호는 유항(柳巷)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벼슬은 시중이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권부(權溥) : 호는 몽암(夢庵)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정승이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시열(宋時烈) : 경도 문묘 서무(西?) 편에 보인다.
6권 경기
옛날 마한(馬韓)의 지역이다 : 신이 살펴보건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진한(辰韓)이 신라가 되고,
변한(卞韓)이 백제가 됨은, 최치원(崔致遠)이 이미 정론(定論)하였습니다.
이것은 치원이 처음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삼국(三國) 초기부터 서로 전해 오던 말입니다.
고려 김부식(金富軾)의 지리지에도 또한 치원의 논을 옳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중엽(中葉)에 이르러 비로소 금마산(金馬山)은 백제의 지경에 있고,
평나산(平那山)은 고구려의 지경에 있었는데, 평(平)과 변(卞)은 음이 서로 가깝다 하여, 마침내 마한이 백제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로 되었다는 의심을 두게 되었으나, 드러나게 지적하여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김경숙(金敬叔)이 《주관육익(周官六翼)》을 편찬함에 미쳐, 삼한을 서술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낙랑(樂浪)
과 변한을 병합하고, 백제는 마한과 대방(帶方)을 병합하였다." 하고, 삼국을 서술함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마한으로 삼고 백제를 변한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한 사람의 말이 서로 모순되니 어찌 말할 것이 되겠습니까.
본조(本朝)에 이르러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과 이첨(李詹) 등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할 때에,
당연한 것처럼 마한을 백제라 하고 변한을 고구려라 하였습니다.
권근은 바로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동국 사람이 시채(蓍蔡)에 비기는데, 또한 이런 논을 주장함으로써 오래
전부터 이미 정해진 설(說)을 착란시켰으니, 웬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중국 및 동국의 사기를 반복
하여 고찰해 보니, 삼한 때에는 마한이 가장 커서 54국을 거느렸고, 진ㆍ변 두 나라는 각각 12국을 거느렸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익산(益山) 이남에 54국을 받아들일 만한 땅이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마한의 왕도(王都)는 남쪽이 변한
에 매우 가깝고, 동북쪽은 낙랑ㆍ말갈(靺鞨)ㆍ옥저(沃沮) 등과 국경이 서로 불었으니,
그 뒤 고구려 동명왕이 낙랑에서 일어나 마한 동북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뒷사람이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칭(稱)함은 아마 이 때문인가 하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또 왜(倭)와 접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살아 의복ㆍ거처ㆍ언어ㆍ풍속이 같다." 하였는데, 변한(弁韓)이라 하지
않고 변진(弁辰)이라 함은, 비록 먼 데서 들은 말이라 하더라도, 변한ㆍ진한 두 나라가 서로 이웃에 붙어 있음을
알 만합니다.
신라 혁거세(赫居世) 19년에 변한이 그 나라를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고, 그 뒤 백제가 마한을 쳐 없애고 병력
이 강성하게 되자, 신라에 속하였던 변한의 옛 땅을 차차 먹어 들어서, 지리산(智異山) 이서(以西)가 모두 병합
되었습니다.
뒷사람이 백제를 칭하여 변한이라 하는 것도, 아마 이 까닭인가 하는데, 어찌하여 권근은 금마ㆍ평나의 설에 미
혹되어 말하기를, "마한이 백제 지역 안에 있었다." 하여, 드디어 마한을 백제라 하였는지요.
또 《당서(唐書)》에 이른바, "변한의 묘예(苗裔)가 낙랑의 땅에 있다." 한 것도 대체로 변한의 계통이 낙랑으로
부터 나왔음을 말한 것으로, 김부식은 그 말은 사실 기록이 아니라 하였는데도, 권근의 논은 도리어 그것을 끌어
다 증거로 삼으면서 '묘예' 두 자를 빼고 바로, "변한이 낙랑의 지역에 있었다." 함은 무슨 까닭인지요.
또 그 말에, "《후한서》에 말하기를, '변한이 남쪽에 있다.' 한 것은, 대체로 한(漢)나라의 지경인 요동의 지역으
로부터 말하는 것이고, 변한이 진ㆍ마 두 한(韓)의 남쪽에 있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그가 말한, "마한이 서쪽에 있었다."는 것 또한 마한이 요동의 서쪽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관육익》에, 고려 세조가 궁예를 달래면서 한 말을 기록하기를, "대왕이 조선ㆍ숙신(肅愼)ㆍ
변한 땅의 왕이 되시고자 할 것 같으면, 먼저 송악(松岳)을 점령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오늘의 서경(西京)은 옛날의 변나경(卞那京)인 까닭으로 변한이라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더욱 거짓이요 망령
된 것입니다.
변한을 서경이라 하게 되면 조선이란 다시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뒷날 궁예가 용병(用兵)을 나주(羅州)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세조가 말한 바 변한은 백제를 가리킴이 분명합니
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기를, "고구려 지역엔 본래부터 마읍산(馬邑山)이 있는 까닭으로 마한이라
이름하고, 백제 지역엔 본래부터 변산(卞山)이 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이제 평양부에 마읍산
이 있고, 부안현(扶安縣)에 변산(邊山)이 있으니 《삼국유사》의 말은 혹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책을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하겠고, 또 고려 중엽 이후에 나온 것으로, 그 기재한 것이 허황됨이 많아서 족
히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나, 삼한의 설을 변증(辨證)한 것은 증거가 매우 밝아, 동방의 지리를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실로 참고로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신은 그런 까닭으로 삼가 최치원의 옛 설에 의하여, 경기ㆍ충청ㆍ황해 등의 도를 마한 구역(舊域)에 소속시키고,
전라도를 변한 구역에 소속시켰습니다."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그 지역을 나누어 점거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14년에, 황도(皇都)를 개성부(開城府)로 고치고, 적현(赤縣) 여섯과 기현(畿縣) 일곱을 관장하
였고, 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고, 양주(楊州)ㆍ광주(廣州) 등의 주현(州縣)을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개성부를 파하고, 정주(貞州)ㆍ덕수(德水)ㆍ강음(江陰) 등 3현을 개성현에 예속시키고,
송림(松林)ㆍ임진(臨津)ㆍ토산(?山)ㆍ임강(臨江)ㆍ적성(積城)ㆍ파평(坡平)ㆍ마전(麻田)을 장단현(長湍縣)에
속하게 하여, 직접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예속시켜 경기(京畿)라고 했다.
문종(文宗) 16년에 다시 개성현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또 서해도(西海道)의 평주(平州)를 나누어 우봉군(牛峯郡)에 소속시켜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별도로 개성현령(開城縣令)을 두어 부(府)에 속하게 하고, 성외(城外)를 관장하게
하였다.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양광도(楊廣道)라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처음으로 경기를 좌(左)ㆍ우(右) 도로
나누었다. 장단ㆍ임강ㆍ토산ㆍ임진ㆍ송림ㆍ마전ㆍ적성ㆍ파평을 좌도로 하고, 개성ㆍ상음ㆍ해풍(海?)ㆍ덕수ㆍ
우봉을 우도로 했다.
또 문종(文宗) 때의 구제(舊制)에 의하여, 양광도의 한양ㆍ남양(南陽)ㆍ인주(仁州)ㆍ안산(安山)ㆍ교하(交河)ㆍ
양천(陽川)ㆍ금주(衿州)ㆍ과주(果州)ㆍ포천(抱川)ㆍ서원(瑞原)ㆍ고봉(高峯)과, 교주도(交州道)의철원(鐵原)ㆍ
영평(永平)ㆍ이천(伊川)ㆍ안협(安峽)ㆍ연주(漣州)ㆍ삭녕(朔寧)을 좌도에 예속시키고, 양광도의 부평(富平)ㆍ
강화(江華)ㆍ교동(喬桐)ㆍ김포(金浦)ㆍ통진(通津)과, 서해도의 연안(延安)ㆍ평주(平州)ㆍ백주(白州)ㆍ곡주(谷州)ㆍ
수안(遂安)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은(新恩)ㆍ협계(俠溪)를 우도에 예속시켰다.
각각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두고, 수령관(首領官)으로 하여금 관찰출척사를 돕게 하였다 : 수령관 사품(四品)
은 경력(經歷)이 되고, 오품(五品) 이하는 도사(都事)가 된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甲戌)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다음 해 을해(乙亥)에 평주ㆍ수안ㆍ곡주ㆍ재령ㆍ
서흥ㆍ신은ㆍ협계는 새 도읍과 거리가 멀다 하여 서해도로 돌리고,
광주ㆍ수원ㆍ양근ㆍ쌍부(雙阜)ㆍ용구(龍駒)ㆍ처인(處仁)ㆍ이천(利川)ㆍ천령(川寧)ㆍ지평(砥平)을 광주에 예속
시켰다.
수원에 속한 군현(郡縣)은 좌도가 되고, 양주ㆍ부평ㆍ철원ㆍ연안에 속한 군현은 우도가 되다.
7년에 또 충청도 진위현(振威縣)을 떼어 좌도에 예속시켰다. 태조(太祖) 2년 임오(壬午)에 두 도를 합하여 경기
좌우도라 이름하고, 단지 관찰사와 수령관 각 1명만을 두었다.
13년 계사(癸巳)에 사방의 도리(道里)와 원근(遠近)을 참작하여, 연안ㆍ백주(白州)ㆍ우봉ㆍ상음ㆍ토산은 풍해도
(?海道)에 예속시키고, 이천을 강원도에 예속시키고,
충청도의 여흥부(驪興府), 안성군의 양지ㆍ양성ㆍ음죽현 및 강원도 가평현을 떼어서 예속시키고,
좌우도를 합하여 경기관찰사라고만 부르다가,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라 고치다.
세종(世宗) 16년에 안협(安峽)을 강원도로 옮겨 예속시켰다.
세조(世祖) 12년에 도관찰출척사를 관찰사로 개칭하고, 경력(經歷)을 덜고 도사만을 두었다 : 타도도 같다.
목(牧) 4, 도호부(都護府) 7, 군(郡) 7, 현 19를 영솔하게 하였다.
관원 관찰사(觀察使) : 1명, 종 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1명, 종 2품, 관찰사가 겸한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1명, 정 3품, 관찰사가 겸한다. 도사(都事) : 1명, 종 5품. 심약(審藥) : 1명, 종 9품.
검률(檢律) : 1명, 종 9품. ○ 이상 각 품(各品)은 여러 도가 같다.
광주목 廣州牧
동은 양근군(楊根郡) 경계(境界)까지 25리, 여주 경계까지 75리, 남은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74리,
양지현 경계까지 85리, 용인현 경계까지 43리, 서는 과천현(果川縣) 경계 양재역(良才驛)까지 27리,
안산군 경계까지 76리,
북은 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尉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
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 지금의 경도(京都).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없애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
성을 고쳐 한산주라 하고, 또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12목(牧)을 두었는데 광주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진관 목 1. 여주 도호부 1. 이천 군 1. 양근 현 5. 지평(砥平)ㆍ음죽(陰竹)ㆍ양지(陽智)ㆍ죽산(竹山)ㆍ과주(果州)
관원 목사 : 1명, 종 3품이다. 여러 목도 같다.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鎭)이 같다.
판관(判官) : 1명, 종 5품으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이 같다.
교수(敎授) : 1명, 종 6품이다. 여러 도의 도호부 이상은 같다.
신증 연산군(燕山君) 11년에 이 주의 사람으로 난언(亂言)한 자가 있어 본주(本州)를 혁파하였다가,
지금 임금 초년에 복구하였고, 6년에는 주가 잔악하고 피폐함으로써 판관을 폐지하였다.
군명 남한산ㆍ한산주ㆍ한주ㆍ회안(淮安)ㆍ봉국군(奉國軍) 성씨 본주(本州) : 이(李)ㆍ윤(尹)ㆍ석(石)ㆍ한(韓)ㆍ
안(安)ㆍ김(金)ㆍ지(池)ㆍ소(素)ㆍ노(盧)ㆍ장(張)ㆍ박(朴)이다 : 아울러 속한 것이다.
풍속 상기사 독서사(尙騎射讀書史) : 《수서(隋書)》에, "백제 풍속이 말타고 활 쏘기를 숭상하며, 서사(書史)를
읽어 행정의 일에 능하고, 또 의약과 점치고 상보는 법을 안다." 하였다.
혼인의 예절은 대략 중화(中華)와 같다 : 위와 같다. 두 손을 땅에 디딤을 공경으로 삼는다 : 위와 같다.
의복은 깨끗하다 : 《남사(南史)》 삼년거복(三年居服) : 《북사(北史)》에, "부모 및 남편 죽은 자는 3년 동안
복을 입고, 나머지 친척은 장사를 끝내면 복을 벗는다." 하였다.
형승 한수(漢水)의 남쪽으로 토양이 기름지다. : 백제 시조 온조의 말이다. 고적(古跡)편에 나타나 있다.
면이 모두 높은 산이다. 이곡(李穀)의 청풍정기(靑風亭記).
산천 검단산(黔丹山) : 주 동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청계산(淸溪山) :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모산(大母山) : 주 남쪽 30리에 있다.
일장산(日長山) : 주 남쪽 5리에 있는데 일명 남한산이라고도 한다.
조곡산(早谷山) :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일면 초동산(草洞山)이라고도 한다.
문현산(門懸山) : 주 남쪽 45리에 있다. 천천현(穿川峴) : 주 서쪽 30리에 있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관산(關山)은 아득히 멀고, 길은 굽이굽이 돌았는데, 걸음이 양주에 가까우니 안계
(眼界)가 점점 열리는구나.
삼산(三山)이 본래부터 친함이 있는 듯, 은근히 백리에 강을 건너옴을 깊이 사례하노라." 하였다.
영장산(靈長山) : 주 남쪽 20리에 있다. 운길산(雲吉山) :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리산(修理山) : 주 서쪽 60리에 있다.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해산(大海山) : 주 남쪽 50리에 있다. 군월라산(軍月羅山) : 주 동쪽 15리에 있다.
원적산(元寂山) : 일명 무적산(無寂山)으로, 주 동쪽 60리에 있다. 대쌍령(大雙嶺) : 주 동쪽 40리에 있다.
소쌍령(小雙嶺) : 주 동쪽 45리에 있다. 가마령(佳?嶺) : 주 동쪽 45리에 있는데 성종 어태(御胎)를 봉안했다.
이령(梨嶺) :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지금 임금의 어태를 봉안했다.
추령(楸嶺) : 주 남쪽 47리에 있다. 망월봉(望月峯) : 주 서쪽 10리 몽촌(夢村)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긴 바람에 배부른 돛으로 한수(漢水)에 급히 달려, 산중으로 돌아오니 술이 처음 익
었네. 마른 창자에 술이 들어가니 또한 쉽게 취하는구나. 두 귀가 취중에 찡 울리며 흥이 스스로 족하니,
술 두루미를 옮겨 몽산 머리에 날아 올라가, 슬쩍 눈을 동쪽 봉우리로 돌려 새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본다.
새 달이 넘실넘실 구름 끝에 나오니, 빙륜(氷輪)이 둥그런데 금 물결 무늬 일렁거리네. 잠깐 사이에 하늘 중앙에
달려 있으니, 구주(九州)와 사해(四海)가 모두 맑은 빛이네. 잔을 들어 달에게 물어도 달은 응하지 아니하는데,
돌아보니 토끼가 나의 청광(淸狂) 많음을 웃누나.
옛 사람이 달을 사랑하는 이는 모두 유선(儒仙)이라,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지 천년이나 되었네.
적벽(赤壁) 어느 때에 검은 학이 춤 추었더냐. 백중(伯仲)되는 호걸 기운이 천하에 제일이었네.
한 두루미 술이 넘실넘실 강과 같이 다함이 없으니, 지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지 않을까. 오경 밤이 깊어도 달은
지지 아니하니, 사가(四佳 서거정의 호(號)) 취한 늙은이 머리가 반백일세." 하였다.
구질포(仇叱浦) : 주 서쪽 90리에 있다. 이관포(梨串浦) : 주 서쪽 88리에 있다.
조포평(助布坪) : 주 서쪽 30리에 있는데 옛 목장이다.
탄천(炭川) :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삼전도(三田渡)로 들어간다.
소천(小川) :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도미진(渡迷津)으로 들어간다.
독포(禿浦) : 주 북쪽 11리 도미진(渡米津)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 이색(李穡)의 시에, "독포 모래 가에 어둠빛이 닥치니, 먼 산과 편평한 들의 형세가 굽이쳐 뻗었네.
뱃사람이 닻줄을 걷어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달이 양주에 밝은데 마침 시를 지었네."하였다.
세고탄(洗姑灘) : 주 서쪽 15리 광진(廣津) 하류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강가에서 빨래하는 색시 얼굴이 꽃과 같은데, 어릴적부터 빨래하여 생활하였네.
아침엔 흰 발을 씻으니 눈빛 같고, 저녁에 흰 팔을 씻으니 서릿발 같네. 아침마다 저녁마다 씻고 도 씻으니,
한 물이 스스로 깨끗해져 마음에 스스로 만족하리. 흰 실[綿]을 내리니 빙사(氷絲) 더 희매,
밤마다 흰 달 아래 찬 북[梭]을 울리네. 가는 비단을 짜 재단하여 옷을 만드니,
교초(蛟?)보다 가늘고 월사(越紗)보다 가볍네. 강물이 맑고 또 잔잔함이여, 날마다 눈을 내리어 쉴 때 없어라.
씻기 끝나매 소담[談]한 화장[粧]이 물 밑에 비치니, 소아(素娥 월궁의 선녀)도 깨끗함을 사양하겠고,
강비(江妃 강의 신녀)도 부끄러워하겠네.
문득 미친 바람이 있어 천지가 어두우니, 티끌이 아득하여 갈 곳을 잃었네. 허둥지둥 진흙물 가운데서 당황하니,
옥질(玉質)은 이미 잘못되어 옷도 검어졌네. 시누이 문에 나와 색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색시는 빨래하기 왜
더딘고. 색시가 돌아오매 시누이는 손뼉치며 웃되, 추악하여 우리 집 시(施 서시(西施)의 성)가 아니라 하네.
시누이 나이는 겨우 열 세 살, 이때에 철이 아직 안 들었네.
시누이야, 시누이야 색시를 웃지 말아라. 이 한(恨)을 뒷날 너도 혹 알게 되리라." 하였다.
도미진(渡迷津) : 주 동쪽 10리, 양근군 대탄 용진(龍津) 하류에 있는데, 그 북쪽 언덕을 도미천(渡迷遷)이라 이
름한다. 동쪽으로 봉안역을 향하여 돌 길이 7~8리나 빙빙 둘렀는데, 신라 방언(方言)에 흔히 물 언덕 돌 길을
천(遷 벼루)이라 불렀다. 뒤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 고려 한수(韓脩)의 시에, "햇볕이 잠깐 움직이자 오는 바람이 부드럽고, 하늘 그림자는 멀리 비췄는데 돛은
한가히 가네. 머리를 돌려 은근히 삼각산을 이별하되, 달이 아직 반쯤 둥글기 전에 내 돌아오리라." 하였다.
○ 권우(權遇)의 시에, "산 허리 구불구불 사닥다리 길 비꼈는데, 가다가 길 다한 곳에 사람 집이 있구나.
하늘은 차고 날은 저물고 바람은 급하게 부는데, 머리 돌려 긴 강을 바라보니 물결이 꽃을 피우네." 하였다.
광진(廣津) : 주 서쪽 18리 독포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삼전도(三田渡) : 주 서쪽 18리에 있는데,
한성부(漢城府) 편에 자세히 있다.
도산 실[絲]ㆍ삼[麻]ㆍ자기(磁器) : 해마다 사옹원(司饔院) 관리가 그림 그리는 사람을 인솔하고 가서,
궁중에서 쓸 그릇을 감독하여 만든다. 도기(陶器)ㆍ은구어(銀口魚)ㆍ눌어(訥魚)ㆍ금린어(錦鱗魚)ㆍ게[蟹].
봉수 천천현 봉수(穿川縣烽燧) : 남쪽으로는 용인현(龍仁縣) 보개산(寶蓋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서울 남산 제2봉수에 응한다.
누정 청풍루(淸風樓) : 객관 동북쪽에 있는데 옛 청풍정이다. 목사 홍석(洪錫)이 다시 지어 누로 만들었다.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원 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기축년 여름 4월에 어버이를 뵈러 고향으로
가는 길에 낙생역(樂生驛)에 이르니, 광주 목사 백화보(白和父)가 글을 보내 초청하고 또 말하기를, '관사의 북
쪽에 옛날의 청풍정 터를 찾아 네 기둥을 세워 집을 지었는데, 실로 한 고을의 제일가는 명승이라.
기문(記文)을 지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갈 길이 바빠 우선 답하기를, '뒷날 서울에 돌아갈 때에 한 번 가서, 눈으로 보고 기를 지어도 아직 늦지 않
을 것이오.' 하였다.
이듬해 광주에 이르니 백군은 이미 조정에 불려 들어갔고, 이군 모(某)가 대임(代任)된 지 반 년이나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혹심한 더위라 허덕이는 숨길이 실끝 같았다. 이에 이른바 청풍정에 올라 기둥에 기대어 옷깃을
헤치니,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며 모발(毛髮)이 선들선들하여져, 더러운 데서 매미가 허물을 벗고 티끌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이군은 술을 장만하고, 조용히 말하기를, '네 기둥의 제도는 간소하기는 간소합니다만 아침저녁에 해가 쬐고,
동쪽 서쪽으로 빗발이 치므로 앉아 노는 손님들이 이것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내가 양쪽 옆으로 달아내어 남
쪽 추녀를 지어 각각 다섯 자씩이요, 북쪽도 또한 이와 같이 하니 약간 넓어지고 또 깊어졌습니다.
벌써 흙 손질을 끝내고 장차 단청을 하려는 참이온데 선생께서 마침 이르러 오시니 어찌 술잔을 들어 낙성(落
成)하고, 연월을 써서 기록하여 주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내 이미 전에 백군에게 허락하였기에, 이에 정자가 폐허된 지가 몇 해인가 물었으나 부로(父老)들이 아는 자 없
으니 오늘날 폐한 정자를 일으킴이 사실에 있어서는 새로 세움과 같다.
《춘추(春秋)》에 공사(工事)한 것을 쓴 것은 안할 공사를 하였다고 한 것도 있고, 또 《논어(論語)》에, '노(魯)
나라 장부(長府)를 하필 다시 지으리요.' 한 말도 있으니, 성인이 가르침을 남기신 뜻이 깊다. 내, 광주 형세를
보니 3면은 높은 산이요, 북쪽은 비록 틔여서 넓으나 지세가 낮아서, 공청이나 백성의 집이 우물 밑에 있는 것
같아, 손들이 오면 낮고 누추하다고 불편하게 여길 것이나, 지척(咫尺) 사이에 이 같은 시원한 곳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매, 이 정자를 지음이 《춘추》의 폄(貶)한 예(例)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내 이에 기문을 쓴다.
청풍이란 뜻은 백군의 말에 다하였으므로 내 다시 보태지 아니한다. 백군은 동년(同年 한 방(榜)에 과거한 사람)
이군의 벗인데, 정사가에 모두 청렴하고 부지런하다는 칭찬 평이 있다." 하였다.
○ 권담(權湛)의 시에, "바람이 장미를 흔드니 벌써 꽃이 떨어졌고, 녹음이 땅에 가득하니 한이 왜 이다지도 많은
가. 젊었을 때 이 누의 달 아래서 노래하며 춤추었더니, 10년 만에 돌아오매 두 귀밑털이 희었네." 하였다.
무진정(無盡亭) : 주 서쪽 15리,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의 별장에 있다.
○ 최항(崔恒)의 시에, "하늘이 기이한 지경을 아꼈다가 호걸과 영웅에게 부쳐 주니, 한없는 기관(奇觀)이 한강
동쪽을 다 차지하였네. 봄 비에 바다 갈매기 난간 밖을 의지하고, 저녁놀과 따오기[霞鶩]가 술잔 속에 들어오네.
우연히 오는 죽백(竹帛)의 이름이 무슨 소용되겠소. 늙어감에 강산의 흥이 무궁하네.
저는 나귀를 거꾸로 타니 가는 곳마다 좋고, 어찌하면 돌아올 줄 아는 지친 새와 같을꼬.
푸른 도롱이[?]에 취한 몸을 붙들어 어부를 따르고, 흰 삿갓에 노래를 높이 부르며 소 치는 늙은이와 짝하네.
돌아가지 않는 것이지 돌아가면 갈 수 있을 것인데, 부끄럽다 내 공연히 오호(五湖) 바람을 생각하네." 하였다.
압구정(狎鷗亭)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사신으로 명(明) 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이름을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에게 청하였더니,
예겸이 이름짓기를 '압구'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에 또 사신으로 명 나라에 들어가 조정 선비들에게 시를 청하였더니,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등이 말하기를, "이 분이 압구정 주인이다." 하고, 한 가지로 시를 지어 보여 정자 이름이 마침내 중국에 들리게
되었다.
○ 예겸의 기문에, "조선 왕성의 남쪽 십수 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그 근원은 금강ㆍ오대 두 산으로부터 나와서, 모여서 긴 강이 되고 서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내 옛날에 조서(詔書)를 받들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 강 위에 이르러 정자에 올라 잔치하며 시를 읊었었고,
또 배를 강 가운데 띄우고 오르내리며 즐겼었다.
그 강은 넓고 파도가 아득하여 바람 돛이 오가고, 갈매기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시원하고 경치가 다함
이 없어, 황홀히 몸을 창해와 한수(漢水)ㆍ면수(沔水 중국의 강이름)의 사이에 둠과 같아서, 몸이 동방 조선에
머물러 있음을 잊어버렸다.
이별한 지 10년에 매양 강 언덕의 풍치를 멀리 그리며, 정신이 달려가지 아니한 적이 없었었다.
천순(天順) 원년 겨울에 조선의 이조 판서 한명회 공이, 그 국왕의 명을 받들고 들어와 봉사(封事)를 천자에게
바치었다. 공은 전에 별장을 한강 가에 두고 정자를 그 가운데 지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한다.
내 전날 사신 가서 한 차례 놀았으므로, 그 좋은 경치를 안다 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름을 청하고 인하여
기문 쓰기를 부탁하였다. 내 이름 짓기를 압구(狎鷗)라 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갈매기는 물새의 한가한 자이다.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에 날아다니는 것으로,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어찌 친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오르고, 공중을 휘 날은 뒤에라야 내려앉는 것이니, 새이면서 기미
를 보는 것이 이같은 까닭으로, 옛적에 해옹(海翁)이 아침에 해상으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이르러 오는 수를
백으로 헤아린 것은 기심(機心)이 없는 까닭이요, 붙들어 구경하고자 하기에 미쳐서는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
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심이 없으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큰 키가 옥처럼 섰고 거동과 풍도가 빼어났으며, 위대하여 번국(藩國)에서 벼슬할 때, 인재를 뽑아 쓰는 데
공명(公明)한 재주를 나타내었고, 천조(天朝 중국)에 사신 오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예절로 삼갔으니, 나라에
돌아가면 등용됨이 융숭할 것이어서, 어찌 갈매기와 친압할 수 있겠는가.
만물의 정은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느끼고,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이루
어지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사심이 붙어 있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기심이 진실로 없게 되면 조정에서는 사람들이 더불어 친하기를 즐기지 아니할 자 없고, 이 정자에 오를 적에는
갈매기도 더불어 한가히 친압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부귀와 이록(利祿)에 대하여서는 자신에게 관계가 없는 한다면, 이는 도(道)에 나아감이 높은 이가 아니겠는가.
정자를 이로써 이름함이 아마도 마땅할 것이다.
옛날 송 나라 한위충헌공(韓魏忠獻公 한기(韓琦))도 일찍이 정자 이름을 압구로 하니,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수(脩))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한 절개는 금석과 같아, 공훈과 덕이 함께 높아 예와
이제에 비치었다.
어찌 기심을 잊어[忘機] 갈매기가 믿는데 그치겠으랴. 만물을 다스리는 것도 본래 무심(無心)함이다.' 하였다.
충헌공이 시를 얻고 기뻐 말하기를, '영숙(永叔 구양수의 자)이 나를 아누나.' 하였다.
외국[朝鮮]과 중국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사람의 마음은 같고, 고금이 비록 다름이 있으나 우리 도(道)는 다르
지 아니하다. 내가 공에게 바라는 것도 자못 이와 같다. 공의 마음에도 역시 나더러 잘 안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혹시 잘 안다고 여기거든 이 말로써 정자 가운데에 걸어 기문으로 삼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 태복시 승(大僕寺丞) 김식(金湜)의 시에, "초정(草亭)이 길이 한강을 대하여 열렸으니, 엄자릉(嚴子陵)의 옛
조대(釣臺)와 방불하구나. 다만 백구가 있어 짝이 될 만하니, 한가로이 날아갔다 또 날아오는구나." 하였다.
○ 급사중(給事中)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한 정자 물과 구름 사이에 산뜻하고 깨끗하게 서 있는데, 정자 밖 강
갈매기는 임의로 오가네. 종일 서로 친하여 푸른 물가에 의지하였고, 가끔 가다 가까이 날아와 붉은 난간에 서기
도 하네. 피차에 맹세 깊었으니 기심을 잊은 지 오래고, 공무에서 아침저녁 퇴근하면 취미가 스스로 한가하네.
아직 높은 관직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연래에는 명리(名利)와 이미 관계가 없어졌다네." 하였다.
○ 급사중 장녕(張寧)의 시에, "물과 구름 깊은 곳에 초정(草亭)이 그윽한데, 손이 있어 기심을 잊어 흰 갈매기를
대하네. 공명(功名) 다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한가로운 심사(心事)를 가지고 더불어 부침(浮沈)하는 것을
배우지 말지어다.
윤건(綸巾)과 우선(羽扇 도인(道人)의 복색(服色))으로 한가하게 이야기할 만하고, 부슬비와 비낀 바람에 늦도
록 다시 머무네. 좋을씨고 곡강(曲江) 누은(樓隱)한 곳에 갈매기와 서로 부르고 서로 가까이함이 몇 가을이나 되
었는고." 하였다.
○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의 시에, "그윽한 정자 높이 큰 강 동쪽을 굽어보는데, 갈매기와 서로 기심을 잊어
즐거움이 다함이 없네. 떴다 잠겼다 함이 때가 있음에 둥둥 제대로 맡기고, 오고감에 스스로 걱정하는 생각이
없네. 한가한 가운데 넉넉히 연파(煙波)의 흥취를 얻었고, 고요한 가운데 바야흐로 조화(造化)의 공을 알겠네.
위국공(魏國公)의 청풍을 이제 잇는 이 있으나, 나의 시(詩)는 구양공(歐陽公)에 꿀리네." 하였다.
○ 정서후(定西侯) 장완(蔣琬)의 시에, "현달한 사람이 그윽하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정자를 꽃다운 물가에 지었
네. 수레바퀴 말발굽 소리는 멀어졌는데, 맑은 바람만이 때로 오고 가네. 깨끗한 옥과 같은 새가 있어 서로 대하
여 얼굴을 화하게 함에 족하다. 한 점 눈은 청산을 깨뜨리고, 모래에 새기니 푸른이끼 얼룩지네.
물결이 편평하니 마음대로 떴다 잠겼다 하고, 화하게 울음 우니 소리 또한 꽥꽥하네. 세한 세월과 한가지로 오래
니, 기심 잊어 흰 구름과 더불어 한가롭다. 보통 새와 서로 어울리기가 부끄러워, 소요(逍遙)하며 티끌 세상 밖에
서 거니네. 위국공이 가신 지 이제 천 년이 되나, 높은 바람은 진실로 사모할 만하네."하였다.
○ 태자소보 겸 좌도어사(太子少保兼左都御史) 왕월(王鉞)의 시에, "물 구름 고장 속에 초정이 그윽한데, 정자 위
에 앉은 사람이 마치 물 위의 갈매기와 같네. 티끌 세상 백 년에 이런 낙이 없을 것이며, 연파(煙波) 만경(萬頃)에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구양자(歐陽子)의 제품(題品 품평(品評))을 이미 거쳤고, 충헌공은 일찍이 은퇴하기 원하
였네. 물(物)과 내가 서로 잊고 마음과 경계[境]가 고요하매, 한가한 가운데 소식은 봉후(封侯)보다 낫네." 하였
다.
○ 병부 상서(兵部尙書) 항충(項忠)의 시에, "외로운 정자 푸른 물가에 몸이 흰 갈매기와 벗이 되네. 벼슬살이는
꿈과 같으매 한가한 마음은 마치 구름 같네. 물결 빛은 대 자리[?] 빛을 밝게 하고, 연꽃 기운은 향로의 향기와
섞였네. 해옹(海翁)에게 말을 전하고자 하노니, 기심 잊은 것은 이 분에게 돌려 보내소." 하였다.
○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등소(?昭)의 시에, "작은 정자를 새로 낚시터 곁에 짓고, 매양 떼지어 나는 갈매기
를 사랑하여 앉아서 돌아가지 아니하네. 잔 물결, 가벼운 바람에 둥둥 뜨고, 외로운 부평초와 나무 토막처럼 스
스로 떠 다니네. 갈고리 낚시에 미끼를 달아 놓으니, 앞을 다투어 서로 쪼아 먹고, 돛대를 두들겨 소리나도 날아
가지 아니하네. 시험 삼아 묻노니 해옹은 어찌 이것을 얻었는가. 원래 물(物)과 내가 한 가지로 기심을 잊었음이
네." 하였다.
○ 이부 좌랑(吏部左郞) 유비(劉斐)의 시에, "그윽한 정자에서 강가를 굽어보니, 강물은 맑고도 깊네.
단정히 있으니 분위기 잡된 티끌을 물리쳤고, 경치는 그윽함을 찾을 대로 찾았네. 저 물결 위의 갈매기로 정자
이름 지으니, 한가함이 내 마음과 같다네. 서로 친하여 둥둥 뜨니 외로운 읊조림을 발하고,
아득하게 송설옹(松雪翁 원(元)의 조맹부(趙孟?))을 생각하니, 천 년에 여운(餘韻)이 있네." 하였다.
○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형연(李炯然)의 시에, "새로 모정(茅亭)을 푸른 강 가까이 지으니, 들 갈매기 오가매
뜻이 더욱 깊네. 항상 작은 배에 의지하여 낚시 드리움을 보고, 때로는 그윽한 창에 가까이 와서 거문고 타는
소리듣네. 한 가지로 연파에 늙기로 응당 약속했으리라.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으니 모두 무심(無心)함일세.
아, 나는 밝은 시대에 애착되었으니, 맹세를 어기어 오래 찾지 아니함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게." 하였다.
○ 병부 낭중(兵部郞中) 우면(于冕)의 시에, "공무를 파하고 돌아오니 모든 생각이 멎었는데, 한가한 정자에 날
마다 모래 갈매기가 가까이 오네. 인간에는 부질없이 기사(機事)가 많음을 말하는데, 나 홀로 무심하여 마음대
로 가고 머물고 하네." 하였다.
○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장여필(張汝弼)의 시에, "봄바람 두약주(杜若州 향초)에 앉아서 늙으니, 흰 갈매기
나를 잊고 나는 갈매기를 잊었네." 다시 한 점의 기심도 없으니, 구름은 스스로 떠 다니고 물은 스스로 흘러 가네."
하였다.
○ 한림수찬(翰林修撰) 나경(羅璟)의 시에, "세상에서 말하기를, '기심 잊은 사람은 일찍이 기심 잊은 새를 사랑
한다.' 하였네. 사람과 새가 서로 잊어 아침 저녁으로 좋은 맹약을 맺었네.
여기에다 이 정자를 지으니 높다랗게 강가에 임했네. 맑고 깨끗함이 침향(沈香) 아니라 경치는 하늘의 조화를
앗았네. 맑고 기이함이 산기슭에 비쳤는데, 모래 아득하고 구름과 안개가 둘렸네.
한 길이 대숲으로 들어가니, 오가는 차와 말도 적으며 연기 아득하니 호수가 맑고, 저자 머니 사람이 오지 아니
하네. 달빛은 찬 물결에 잠겼는데, 풍광은 푸름 마름[藻]에 엉기네. 눈을 멀리 들어 긴 하늘 향하여 사면을 돌아
보니, 푸른 산이 작아 보이네. 누가 망기(忘機)의 짝을 알랴. 스스로 이름하기를 망기로(忘機老)라네.
한가로이 망기 시를 읊조리다가 취하여 망기초(忘機草)에 누웠네. 망기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망기함을 일찍
하겠는가." 하였다.
○ 교유(敎諭) 오가립(?可立)의 시에, "한 정자가 바다 동쪽 가에 그윽하게 있으니, 뭇 갈매기 날마다 나와 친해
짐을 매우 기쁘게 여기네. 날아서 술자리에 떨쳐 도무지 피하지 아니하고, 물 난간에 다가드니 잘 길들인 것 같
으이. 창파에 떠다니니 흰 털이 무거워짐을 아끼고, 푸른 풀밭에서 조니 눈[雪] 점이 새로움을 보겠네.
물건과 더불어 맹약을 맺으니 특히 탈속했구나. 이국(異國)엔들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 진사(進士) 진승(秦昇)의 시에, "은은한 외로운 정자 푸른 물 흐름을 대하니, 바다 갈매기는 나를 잊고 나는
그를 잊었네. 모래 개니 비낀 난간에 가까워서 편안히 졸고, 구름이 따뜻하니 항상 굽은 난간을 돌면서 노누나.
달이 잠길 때를 당함에 금 거울이 고요하고, 물결 일어나는 곳을 밟으매 옥 꽃이 뜨네. 호기 있게 노저어 타고
봄 연기 밖에 나가니, 몇 번이나 쌍쌍이 나는 갈매기 낚시 배와 친했던가." 하였다.
○ 회계(會稽) 진지(陳贄)의 시에, "본뜻은 한가함을 좋아하는데, 빛나는 정자를 강가에 임하여 지었네.
한가한 날 여기서 배회하니, 한가히 가슴이 트이네. 고운 놀은 물결 넘실거리고 넓은데, 맑은 물 흐름은 창을
둘렀네. 갈매기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떼 지어 물가에 모이네. 훨훨 날개를 날리니, 눈같이 희고 희어 서리 같은
깃이 빛나네. 문득 산란하게 나니, 천 조각 배꽃이 춤추는 듯하네. 처마에 가까이 가끔 오가고, 물결에 목욕하며
임의로 노니네.
오리들과 유가 되지 아니하고 원추새와 해오라기[?鷺]와는 거의 짝이 될 만하겠네. 고상한 사람은 진실로 즐거
워 이것을 보고 깊이 깨달음을 얻으리라. 피차가 둘다 기심을 잊으니, 서로 보매 섬세한 티끌도 없네.
기심이 조금이라도 싹트게 될 것 같으면 문득 날아가리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물(物)과 더불어 항상 거스
르지 않는다네." 하였다.
○ 호부 낭중(戶部郎中) 기순(祁順)의 시에, "산뜻한 초가집을 한강 동쪽에 지으니, 주인의 뜻 백구와 같네.
맹약(盟約)을 맺었으니 즐겨 모랫가의 짝 백구를 저버리랴. 생각을 바꾸다가 해옹(海翁)이 매우 부끄럽네.
들 나루에서 천 이랑 물결에 떴다 잠겼다 하고, 낚싯배에는 한 줄기 실바람이 살랑이네. 재상의 덕업이 앞시대
뒷시대에 빛나니, 정자의 이름만이 위공(魏公)에게 비할 뿐이 아니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상당(上黨) 한후(韓侯)의 자는 자준(子濬)인데, 머리 땋은 소년 때부터 같이 놀며
서사(書史)를 읽었네. 장한 뜻 우뚝하여 구속받지 아니하며, 그윽함을 찾고 외롭게 놀다가 취미를 산수에 붙였
네. 동중서(董仲舒)의 장막 10년에 경서[經書]를 안았는데, 푸른 적삼 미관(微官)이 될 말인가.
대장부 뜻을 두었으니 끝내 하고 말 것이니, 하루아침 초려(草廬)에 풍운이 일어나네.
융중(隆中)에 높이 누워 있을래야 할 수 없으니, 곤어ㆍ붕새[鯤鵬]의 변화함이 참으로 잠깐 사이일세.
손으로 해바퀴[日?]를 떠받들어 하늘 운수 돌리니, 하늘을 돌리고 북두(北斗)를 굴림이 한 번 돌아보는 동안일
세. 공훈과 이름 빛나고 빛나 한 몸에 있으니, 소하(蕭何)ㆍ장량(張良)ㆍ구순(寇恂)ㆍ등우(鄧禹)를 족히 헤아릴
것 없네. 고귀한 벼슬이 우연히 굴러 왔지 기약한 바 아닌데,
세월은 쉬 흘러 머물지 아니함이 괴롭네. 평생에 맑은 마음을 임천(林泉)에 붙여, 높은 정자를 지어 강가에 임했
네. 마음 앎은 오직 흰 갈매기가 있을 뿐, 날고 울며 서로 따르니 한가지로 한가롭네. 옥 패물을 버리고,
난지(蘭芝)를 바늘로 꿰어 차니, 한 강의 연파(煙派)가 스스로 찰ㅁ랑거리네. 공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이루어지
매 번화함이 싫어서, 아침 저녁 그윽한 생각 강에 있네. 훈업(勳業)은 비단 동쪽 나라에 있을 뿐 아니라, 성하고
아름다움이 스스로 천하에 퍼졌네. 중국의 유로(儒老)들이 다투어 붓을 휘둘러, 그대를 위하여 서술하고 칭도
하였네.
세상 벼슬아치들은 공연히 떠들썩한데, 남아가 이 지경에 이르면 바야흐로 운운 하랴. 동방의 창생(蒼生)이 큰
비를 기다리는데, 어찌 능히 그대를 갈매기 떼에 두겠는가. 아, 갈매기야 서로 귀찮게 말아라.
성주(聖主)님의 융숭한 총애가 오직 그대에게 쏠렸네." 하였다.
○ 안지(安止)의 시에, "한공의 아담한 취미 청한(淸閑)한 것을 사랑하여, 매양 강 정자를 향하여 갔다왔다하기
좋아하네. 다만 고기 낚는 늙은이의 눈 같은 귀밑털을 드리운 것과 짝하는데, 즐겨 노래하는 기생들 구름 머리채
를 어여삐 여기랴. 갈매기는 섬돌 밑 맑은 물에 길들었고, 소라[螺]같이 물가에는 점점(點點)한 산이 벌여 섰네.
사직의 특별한 공을 어찌 말하랴. 뜻대로 푸른 물굽이 굽어봄이 무방하리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해를 하늘에 받들어 팔도(八道)에 비치니, 공명은 드높이 기린각에 올랐네.
묘당(廟堂)에선 이미 경륜의 손을 펴고는, 도리어 갈매기를 짝하여 물가에서 희롱하네." 하였다.
○ 벼슬하는 틈에 조용히 대궐에서 물러나와 신세를 물가에 붙였네. 옆사람들이 부질없이 고기잡이와 나무꾼으
로 보고, 당시 조정에 제일류(第一流)를 몰라 보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압구정은 산 그윽한 곳에 있는데, 아래 맑은 강이 있어 만고에 흐르더라.
상공(相公)이 여가 날에 와 거닐어,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니 마음이 한가롭구나. 공명을 세상에 덮었으나 유후
(留侯)를 봉함에 족하고, 부귀는 우연히 굴러 들어온 것이매 뜬구름과 같네.
몸이 한가하여 이에 빈 배를 띄웠는가 의심하고, 기심을 잊었으니 강변의 갈매기를 친압할 만하구나.
흰 갈매기 날아와 긴 물가에 희롱하니, 날개를 비비고 그림자를 희롱하며 울어 서로 화답하네. 가끔 놀라 일어
나 강가를 지나니, 맞은 언덕 바람이 창랑(滄浪) 노래 보내네.
상공이 난간에 의지하여 흥을 걷잡지 못하니, 건곤 만리가 두 눈에 드는구나. 물에서 헤엄치고 구름 속에 나는
것이 각각 자유로우니, 강 위에 모든 물건이 시름없구나. 바람과 비는 때 맞추어 순조로우니, 남촌과 북촌에는
뽕과 삼이 풍년일세. 공(公)이 능히 이같은 태평한 아름다움을 이룩하였으니, 만년에 조용히 노는 기회 얻으셨
네. 그대는 서린 용이 한 번 일어나면, 구주(九州)에 은택 줌을 보지 못하였는가. 삼농(三農)에 고무(鼓舞)되어
해가 풍년이 들었네. 돌아와서는 도리어 물고기와 짝하여, 여의주(如意珠)를 안고 깊은 한 못 속에 푹 잠드네."
하였다.
○ 이문형(李文炯)의 시에, "빛나는 정자 높이 한강 물가에 임하니, 성남(城南) 지척 사이에 홍진(紅塵)이 막혔
구나. 목란주(木蘭舟)를 달밤에 띄우니 연기는 개울에 비끼고, 버드나무 술집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비는 나루터
에 어둡네. 들 밖의 산 빛은 창[戟]을 벌여 놓은 듯, 난간 앞 물결 그림자는 사람을 흔드네.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대업을 역사에 전해 두고, 창주(滄洲)에 돌아와 흰 갈매기와 친하네." 하였다.
○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임금이 하루에 세 번이나 은근히 불러 보아 총애가 흐뭇하니, 정자는 있으나 와서
놀틈이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만 끊어졌다면, 벼슬 바다 앞에서도 갈매기를 친압할 수 있으련만."
학교 향교(鄕校) : 서쪽 2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사문(斯文)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천년에 드리우니,
착하고 좋은 풍속이 응당 한 고을에서 많이 나오리라." 하였다.
역원 경안역(慶安驛) : 남쪽 50리에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은 일곱인데, 덕풍(德?)ㆍ양화(楊花)ㆍ신진(新津)ㆍ
안평(安平)ㆍ아천(阿川)ㆍ오천(吾川)ㆍ유춘(留春)이다.
○ 역승(驛丞)은 1명이다.
○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으로 피난할 때 이 역에 이르렀다. 중랑장(中郞將) 임견미(林堅味)
가 재추(宰樞)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다.
임진(臨津) 이북은 우리 소유가 아니니 제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적을 치자." 하였다.
재추들이 응하지 아니하므로 곧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작스러운 사이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복주(福州)로 피하였다. 봉안역(奉安驛) : 주 동쪽 30리에 있다.
○ 권근(權近)의 시에, "옛 역정(驛亭)이 무성한 나무 사이에 열렸는데, 느지막이 서늘할 때에 와 쉬니 몸이 편안
함을 깨닫겠네. 산림(山林) 궁벽한 곳에 백성의 집이 적고, 주전(廚傳)이 드물 때에 아전의 일이 한가하네.
벼랑 길이 강을 굽어보니 누가 험한 길을 뚫었는가. 시내 흘러 돌에 부딪치니 스스로 찬 기운이 생기네.
내가 오매 대접한 것이 없었다 말하지 마오. 말이 푸른 꼴[靑?]에 배 불렀으니 오히려 염치 없소." 하였다.
낙생역(樂生驛) : 주 남쪽 45리에 있다.
덕풍역(德?驛) : 주 북쪽 5리에 있다. 하진참(下津站) : 주 서쪽 20리에 있다.
사평원(沙平院) : 한강의 남쪽 기슭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피로한 말이 걸음도 느린데 길은 험하고 길다. 안장을 부리고 애오라지 여기에 머무
르리라. 왕래하는 말[騶]들 길에 가득차, 처음엔 시끄러움을 싫어했더니, 한 마리 학이 숲에서 울매 비로소
그윽함을 사랑하겠네.
만 길이나 높은 다리[飛橋]는 무지개가 꼬리를 둘렀고, 천 척 늘어선 배는 얼새[?] 머리를 나란히 하였네.
고인(故人)이 보이지 아니하니 슬픔이 더하다. 떨어지는 해 아득한데 누(樓)에 기대지 마오." 하였고,
○ "강 어귀에 돛을 내리고 머뭇거리기 한참, 맑은 물에 비춰보며 가만히 수염을 세어 보네. 풀이 언덕 가에 어우
러져 겨우 학(鶴)이 숨을 만하고, 밀물이 강가에 오매 오리를 영접하듯 하네. 뱃사공은 앉아서 물이 깊고 얕음을
알고, 나루터 사람은 능히 바람이 있고 없음을 점치네.
급히 흰 비단을 찾아 그림을 그려야겠으니, 한 쌍 한가한 오리 쇠잔한 갈대 속에서 졸고 있네." 하였다.
판교원(板橋院) : 주 남쪽 45리에 있다. 동양원(東陽院) : 주 서쪽 50리에 있다.
말을천원(末乙川院) : 주 남쪽 50리에 있다. 황교원(黃橋院) : 주 동쪽 20리에 있다.
쌍령원(雙嶺院) : 주 동쪽 50리에 있다. 금척원(金尺院) : 주 동쪽 60리에 있다. 이부원(利夫院) : 주 남쪽 30리에
있다.
봉헌원(鳳獻院)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둔입원(芚入院)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 주 남쪽 30리에
있다.
도미원(渡迷院) : 도미천에 있다. 인덕원(仁德院) : 주 서쪽 45리에 있다. 사근내원(沙斤乃院) : 주 서쪽 55리에
있다.
정금원(鄭金院) :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광진원(廣津院) : 광나루 북쪽 언덕에 있다.
불우 신복선사(神福禪寺) : 이곡(李穀)이 지은 중영기(重營記)가 있다. 봉수사(奉水寺) : 모두 한산에 있다.
수리사(修理寺) : 수리산에 있다. 약정사(藥井寺) : 한산에 있다. 백종사(百種寺) : 주 북쪽 20리에 있다.
수종사(水鍾寺) : 조곡산(早谷山)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
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절의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 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거나.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參禪) 이야기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용진강(龍津江) 위 옛 절을 찾으니, 구불구불 돌길이 푸른 삼(杉)나무 숲으로 들어갔네.
옛날 자주 사영운(謝靈運)의 지난 일이 생각되고 지금 원공(遠公 혜원(惠遠)) 말을 못 들은 지 오래로세.
시냇가에서 바릿대[鉢]에 주문(呪文) 외우니 용이 응당 엎드릴 것이요, 돌 위에서 불경을 설(說)하니 호랑이
또한 참여하여 듣네. 흰 버선과 푸른 짚신 신고 내 또한 있으니 서로 만나 한 번 호계(虎溪) 남쪽에서 웃어보세."
하였다. 백중사(伯仲寺) : 일명 암사(巖寺)이며,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절간이 푸른 벼랑에 걸쳐 있으니, 어느 날 금을 펴고 지었는고. 낙엽은 쓰는 사람이 없는데,
빈 집에 오는 손이 있네. 산 형세는 물에 다달아 끊겼는데, 물 구비는 산에 부딪쳐 돌아 흐르네.
앉아서 고승(高僧)과 같이 말을 주고 받으니, 마음이 스스로 티끌이 없어지네." 하였다.
봉은사(奉恩寺) : 저도(楮島) 남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능묘 헌릉(獻陵) : 주 서쪽 30리 대모산(大母山) 남쪽에 있다.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능인데,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부장(附葬)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비명(碑銘)에, "하늘이 장차 큰 책임을 덕 있는 사람에게 내리려 함에 반드시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을 낳아서 큰 운수를 열고 넓은 복을 길게 누리게 한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
이 일어나시매 우리 태종으로서 아들을 삼고, 우리 전하(殿下 세종(世宗))로서 손자를 삼으시니,
아, 성하도다. 어찌 인위(人爲)로 능히 된 것이겠는가. 하늘이 하심이다.
그 상(商) 나라에 현성(顯聖)의 임금이 계속하여 일어남과 주(周) 나라에 태왕(大王) 왕계(王季), 문왕ㆍ무왕이
서로 이어 받음과 무엇이 다름이 있겠는가.
신(臣)이 삼가 상고하건대 선원(璿源) 이씨는 전주의 드러난 성이니 사공(司空) 휘 한(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종
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世)만에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습니다. 13세에 태
조의 고조부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 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어, 4대를 내리 습작(襲爵)하
여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계승하였다. 원 나라가 이미 쇠하자 할아버지 환왕(桓王)께서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
(恭愍王)을 섬기었으니, 공을 쌓고 인(仁)을 쌓았음이 그 유래가 오래였다.
우리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丁未) 5월 신묘(辛卯)에 태종을 함흥부 후주(厚州) 사제(私
第)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시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셨고, 점점 자라매 영특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셨다. 글 읽기를 좋아하
셔서 공부가 날로 진보되어 나이 아직 20이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합격하셨다. 이때에 정사는 문란하여 민심이
이반(離叛)됨에 나라 형세가 위태로웠으므로 개연히 세상 건질 뜻을 두니 태조께서 사랑하시기를 여러 아들과
달리 하셨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 나라 서울에 입조(入朝)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명 나라 태조 홍무 신미(辛未) 9월에 신의왕후께서 돌아가시매 제능(齊陵)
옆에 여막을 지어 3년상을 마치고자 하셨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께서 서쪽으로 가셨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시니,
와서 시병(侍病)하셨다. 공양왕의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이 틈을 타 태조를 모함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였는데,
태종께서 사기(事機)에 응하여 변고를 처리하여 그들의 괴수를 제거하니 그들의 모략이 깨어졌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수와 재상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태조를 추대해서 집을 나라로 만드시고, 정안군
(靖安君)에 봉해지셨다.
갑술년 여름에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께서 친 아들을 보내 입조(入朝)하라고 명하니, 태조께서 우리 태종이
경서(經書)에 통하고 예에 숙달하여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어질다 하시어 곧 파견하여 황제의 명에 응하였다.
이미 명 나라에 이르자 아뢰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맞아 특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시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병이 나으시매, 권신(權臣)이 붕당을 모아 어린이[芳碩]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뜻대로 함부로 하려는 자가 있어 화(禍)가 곧 절박하였다. 태종께서 기미를 밝게 보시어 섬멸 제거하셨다.
이때에 종친과 장상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태종께서 굳이 사양하고, 공정
대왕(恭靖大王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태조께 청하고 세자로 책봉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께서 병이 낫지 아니하시므로 공정대왕에게 전위(傳位)하시었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가만히 방간(芳幹)의 부자를 꾀어 등기를 해치려고 꾀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매 태종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하여, 박포는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하여 형제의 정의를 폐하지 아니하셨다.
공정대왕께서 후사(後嗣)가 없으시고 또 나라를 창업하고 사직을 안정함이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 하시어
책봉하여 세자로 삼으셨다.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말미암아 우리 태종에게 전위하고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명(策命)을 청하니, 다음 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승(通政侍丞) 장근(章謹) 등을 번갈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을 삼았다.
○ 겨울에 홍로시 행인(鴻?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 면복(冕服)을 주고 품질(品秩)을 친왕(親王)에
준하였다. 임오년에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시매 태종께서 좌정승 신(臣) 하륜(河崙)을 보내 등극을 하례하니,
황제는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서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誥命)과 인장을 주셨다.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 그대로 왕에 봉하였다.
가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어 곤룡포ㆍ면류관ㆍ구장(九章)과 금단(錦段)ㆍ사라(沙羅)ㆍ
서적(書籍)을 주고, 태조께는 금단ㆍ사라를, 원경 왕태후께는 관(冠)ㆍ포(袍)와 금단ㆍ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주었다.
이때부터 그 뒤로는 황제께서 물건을 내림이 거듭되어 비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께서 도읍하셨던 곳이라 하여 여러 신하의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께서 하정사(賀正使)로 입조(入朝)한 사신에게 이르기를, '조선국왕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긴다.'
하였다. 이뒤부터 사신이 갈 때마다 매양 지성이라고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께서 돌아가시니 슬퍼하시
고 사모함이 망극(罔極)하셨고, 거상(居喪)을 하고 상사와 장사를 예로써 하셨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부고를 고하니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朝會)를 철폐하시고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
(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大牢)의 제사를 내리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고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셨다.
임진년 겨울에 고려 왕씨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조정에 아뢰어 죽이기를 청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왕의 일어남은 스스로 천명이 있는 것이다.
당초에 왕씨의 후손을 죽인 것은 우리 태조의 본 뜻이 아니다.'하시고, 이에 하교(下敎)하여,
'왕씨의 후예로 생존한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 하셨다.
갑오년 6월 일(日)에 감로(甘露)가 함흥부 월광(月光) 구미리(仇未里) 및 정평(定平)의 백운산에 내렸다.
다음 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에 내리니, 우리 동방에 전에는 있지 않았던 일이라 정부에서 모
두 전(箋)을 올려 하례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셨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지(?)가 덕이 없으므로 폐하고 양녕대군으로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제(孝悌)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으며, 나라 사람들이 촉망하므로 책봉하여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허락하셨다.
이해 8월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시고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리어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 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 황제가 홍로시 승(鴻?寺丞) 유천(兪泉) 등을 보내어 고명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倭)가 국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죽이고 약탈하매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 및
장천군(長川君)과 신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해군으로서 가서 치게 하니, 섬 왜인들이 복종하여 전과
같았다. 8월에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잔치를 내리니,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왕의 지성이 두터워 공경히 조정
을 섬기고, 한 덕과 한 마음이 끝까지 게으르지 아니하매, 능히 어진 이를 가리어 덕 있는 이를 명하여 종사(宗社)
로 하여금 의탁 할 곳이 있게 함으로써 나라 사람의 바람에 맞게 하였도다.' 하고,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내리
셨다.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네 아버지가 도탑고 후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天道)를 공경하더니, 충성스럽고
순한 정성이 오래 갈수록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매 참최(斬衰)의 복을 입어 역월(易月)의 복제를 마치었다.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니,
다음 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께서
뭇 신하를 거느리고, 태상왕의 호를 올리려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께서 돌아가시매 우리 전하가 슬퍼하심이 예(禮)에 지나치므로 명하여 역월의 복제를 따
르도록 하였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시매, 이에 장사 뒤에 복을 벗고 백의(白衣)로 상기(喪期)를 마치도
록 하셨다. 9월 임오에 태후를 광주(廣州) 고을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지내고,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신축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의 호를 올리고, 10월에 태종에게 품하여 원자(元
子 문종)를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께서는 세상에 흔히 나지 않는 자질로서 학문을 쌓으시어 효제(孝弟)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 사직에 감동되었다.
대국을 섬기매 천자는 그 지성을 일컬었고, 이웃나라를 사귀매 왜국은 그 도덕에 복종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생각하여 검소를 숭상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였으며 덕과 예(禮)를 먼저하고, 형벌을 삼가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셨다.
간사한 사람을 내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시키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고, 문교
(文敎)를 밝히며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여 쌓였던 폐단이 모두 개혁되어 모든 업적이 빛나, 온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은 편안하고 물질이 풍부하니 제왕의 도(道)가 성하였다.
상제(上帝)의 돌보심이 융숭함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가 내리는 최상의 상서(祥瑞)를 얻음이 마땅하도다. 임인
년 4월에 처음으로 병이 드시어 다음 달 5월 병인(丙寅)에 이궁(離宮)에서 돌아가시었다. 우리 전하께서 애통함
을 이기지 못하여 사흘 동안 음식을 폐하시니, 군신이 울면서 음식 드시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
시고, 3년의 상복으로 정하여 역월(易月)의 복제를 쓰지 아니하셨다.
태종의 나이 56세였는데 왕위에 19년 동안 계시었고, 한가히 계신 지 5년 만에 문득 돌아가셨다. 대소의 신하들
과 아래로 노예(奴隸)에 이르기까지 소리 내어 울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고, 날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여 부모를
여윈 것같이 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해 9월 초2일 병진(丙辰)에 존호를 올려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
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종이라 하였다.
초6일 경신(庚申)에 원경 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이었다. 명 나라에 부고를 보내매 황제는 애통하여
조회를 철폐하고, 예부 낭중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니,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왕은 뜻이 돈후하고
지성스럽고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조정을 공경히 섬기어,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마음이 종시 바뀌지 아니하
더니, 부고가 멀리서 들림에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끼노라.' 하였고,
또 고명(誥命)을 주어 시호를 공정(恭定)이라 하였으며, 또 전하에게 부의를 후히 내리셨다.
대저 우리 태종의 성한 공덕과 우리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에 서로 이어 능히 황제의 마음을 맞춘 까닭으로
종시(終始)하는 즈음에 있어 특별한 은전(恩典)이 이와 같이 갖추어 지극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 왕태후의 성은 민씨니 여흥(驪興)의 대대로 이름난 집이시다.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 문경공 휘 영모(令謨)로부터 6세 만에 고조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을 도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시호를 충순(忠順)이라 하였다.
충순이 증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諱) 적(?)을 낳고,
문순이 조부 대광 여흥군(大匡驪興君) 휘 변(?)을 낳고, 대광이 아버지 순충 동덕 찬화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여흥부원군 수문전 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純忠同德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
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어머니 송씨는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했으니, 고려 중대광 여량군(重大匡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
이시다. 착함을 쌓아 경사가 나매 이에 숙덕(淑德)을 낳으니 총명이 보통과 다르셨다.
배우자를 가리어 우리 태종에게 시집오셨다.
태종께서 젊었을 때부터 세상을 건질 뜻을 두시어 경사(經史)에 유의하시고,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하셨다.
태후께서는 치가(治家)하심이 검소하고, 부엌 일을 삼가시고 여공에 힘쓰셨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 의방(義方)에 순종하게 하셨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접하여 부도(婦道)를 극진히 하셨다.
홍무(洪武) 임신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하고, 무인년에 태종께서 정사(定社)할 때에 사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로웠는데 태후께서 마음을 다하여 도와 큰 일을 치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에 봉하고, 그해 겨울에 태
종께서 즉위하시자 정비(靜妃)에 봉해지셨다. 영락(永樂) 계미년에 황제가 관포(冠袍)를 하사하였다.
이 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하사를 다섯 번이나 받았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존호를 올리어 후덕대왕비(厚德大王妃)라 하였고, 경자년 9월에 시호를 올려 원
경왕태후라 하였으니, 춘추가 56세이셨다.
태후께서 정숙한 덕을 타고 나서 능히 태종에 짝하시어 내치(內治)를 오로지하기 20년 동안에 부도(婦道)가 엄
숙하고 공경하여 또 성자(聖子)를 낳으시매 종묘와 사직에 주인이 되게 하심으로써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셨다.
돌아가시기에 미쳐 빈첩(嬪妾)과 시녀들이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고 아파하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부인으로서
의 법도와 어머니로서의 거동이 지극하심이로다.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으셨으니 우리 전하께서는 셋째이시다.
장남은 지(?)요, 차남은 보(補)이니 효령대군에 봉하고, 그 다음은 종(種)으로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하였다
가 먼저 죽었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로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下嫁)하니
본관이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
가하였고,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에게 하가하였다가 먼저 죽고,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하였다. 의빈 권씨(懿嬪權氏)가 딸 하나
를 낳으니 정혜옹주인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고,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장남 인(?)은 공령군(恭寧君)에 봉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장녀 정신옹주(貞信翁主)는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秀童)에게 시집가고,
다음 정정옹주(貞靜翁主)는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가고,
다음 숙정옹주(淑貞翁主)는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궁인 안씨(宮人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니 모두 어리고, 김씨가 1남을 낳았으니 비(?)요, 경녕군(敬寧君)에 봉
하였다. 고씨(高氏)가 1남을 낳고,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고, 이씨(李氏)가 1남을 낳고,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께서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곧 세자(世子)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양평대군은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효녕대군은 전(前) 판중군 도총제 부사(判中軍都總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성녕대군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정순공주는 1녀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에게 시집갔는데 본관이 같은 이씨
가 아니다. 경정공주는 4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는 2남을 낳았으니 맏은 담(聃)으
로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성공주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
다.
경녕군은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관(金?)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공녕군은 병조
참판(兵曹參判)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신(臣)이 그윽히 보옵건대, 우리 태종의 성한 덕과 높은 공이 진실로 이미 백왕(百王)의 위에 높이 뛰어나시고,
배필의 어지심으로 내조(內助)의 공이 또 촉도(蜀塗 고양씨의 어머니)ㆍ신지(莘摯 무왕의 어머니 태사씨(太?
氏)를 말함)로 더불어 사실이 서로 맞고 아름다움이 같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기어 영세(永世)에 밝게 보일 것을 원하므로, 전하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명하시니, 신 계량이 명을 받자와 조심스럽고 떨리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옵고,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며 다음과 같이 명(銘)을 올립니다. '하늘이 해동(海東)을 돌보시와 우리 태종을 내리시
니, 덕을 부지런히 하신 태종은 성덕(聖德)이 몸에 있으시고 성부(聖父)를 추대하여 능히 큰 공을 이루시네.
이에 황제의 뜰에 조회(朝會) 가서 아뢰기를 조용히 하셨고, 황제의 은혜를 두터이 입으시어 우리 백성을 보호
하시네. 시기[炳幾]를 밝게 보아 난을 평정하시어 적장(嫡長 정종(定宗))을 높이시니, 비록 혁장(?墻)을 만났
으나 우애가 두터우셨네.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예로부터 드물게 들은 바이로다.
오직 덕이 두텁고 오직 공(功)에 힘쓰시어 하늘의 내려 보심이 매우 밝으시고 거듭 황제를 보우(保佑)하셨네.
빛나는 금보(金寶)가 전후에 비쳤으니 황제의 고명(誥命)이 거듭 이르매 내가 이에 은혜로 받았네.
할아버지(태조)의 유명(遺命)을 따라서 한수 북쪽 서울로 돌아오셨네.
예와 악(樂)을 제작함에 찬란히 빛나도다. 상사를 당하여 여막에 계심에 애모(哀慕)함이 망극하셨네.
장사지내고 제사지냄에 옛 예법대로 따르셨고, 공경히 명나라 조정을 섬김에 황제가 지성이라 일컬었네.
엄숙하게 제사를 받들매 신명(神明)에 감동하셨고, 이웃을 사귐에 도가 있으니 왜국이 조회하려 왔었네.
왕씨의 후예를 가엾게 생각하여 그들을 살도록 하셨도다. 중외가 다스려져 편안함에 억천년을 드리우리.
흐뭇한 감로(甘露)는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네. 어두운 양녕대군을 폐하고 덕 있는 세종(世宗)을 명하사 백성의
주인을 삼았네. 오랜 수(壽)를 누리시어 이 땅에 아버지로 임하시기를 바랐더니, 어찌 하늘로 올라가심을 재촉
하여 한 번 든 병환이 낫지 아니하셨는가.
슬프다, 성자(聖子)는 아프고 슬픔이 비할 데 없으시어 삼일 동안 음식을 철폐하시니,
지쳐서 상함을 이기지 못하시어 범백(凡百) 상사에 오직 예를 따르셨네. 황제께서 듣고 슬퍼하시어 사신을 보
내 제사하고, 시호를 주어 포장하여 높이고 부의를 융숭하게 내리셨네.
은전(恩典)이 갖추어졌으매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치었네. 어지신 태후께서는 진실로 엄숙하고 화하셨도다.
가만히 정사(定社)함을 도우시어 능히 큰 성군(聖君)에게 짝이 되셨네. 성철(聖哲)을 나으시므로 하여금 종묘
(宗廟)의 제사를 주장하게 하셨네. 건(乾)의 건장하고 이(離)의 밝음은 공정대왕의 덕이 좋고, 곤(坤)의 후하고
유(柔)하고 정(貞)함은 원경왕태후의 법도로다.
금슬로서 벗하시다가 장사도 한곳에 하셨네. 자손이 많으시니, 아, 기린(麒麟)이로라.
길이 이어 가는 종사(宗祀)는 억만 년을 드리우리다. 신이 절하고 글을 올려 좋은 돌에 새기오니 만대에 닳지
아니하여 우리 동방에 비치리다.' 하였다." 했다.
○ 윤회(尹淮)의 비음기(碑陰記)에,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스러운 덕과 신공(神功)이 뚜렷하
여 전고(前古)보다 높았도다. 춘추 아직 많지 아니하실 적에 자리를 성자에게 전해주시고, 바야흐로 한가함을
얻으시어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우리 전하께서 슬퍼하시고 상하심이 예법대로 다하
셨나이다. 다음 5월에 원경왕태후의 헌능에 합장하시니 유명(遺命)을 따름이다.
능은 광주(廣州) 치소(治所)의 서쪽 대모봉(大母峯) 밑 건해좌(乾亥坐)의 산에 있는데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다.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쯤 된다. 삼가 살펴 보건대, 이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수 천리를 넘어 상주(尙州)의 속리산(俗離山)에 이르고, 여기서 꺾여 서북으로 또 수백 리를 달려 과천(果川)의
청계산(淸溪山)에 이르고, 또 꺾여 동북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
땅의 영기(靈氣)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능(陵)의 길조(吉兆)로
기다림인가.
전하께서 능의 손방(巽方) 63보에 나아가 큰 비를 세워서 덕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빛을 이제와 오는 세대에 드
리우라 명하시고, 또 개국 좌명 정사공신(開國佐命定社功臣)들의 이름을 차례로 비 뒤에 새기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건대, 자고로 제왕(帝王)이 일어남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신하가 있어 때에 응하여 나서
대업(大業)을 도와서 이루었습니다.
이에 종명이정(鐘銘?鼎)에 공을 기록하는 법이 있는 것이니 썩지 않을 공을 보여 영구히 전하는 바입니다.
우리 조정이 임신년에 창업됨과 무인년과 경진년의 내란을 평정함을 얻은 것은 실로 하늘이 태종을 열어준 바
가 된 것이요, 그러므로서 조선 억만년 무궁한 복조의 기초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또한 장상(將相)들이
몸을 잊고 명을 바쳐 보좌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영세에 보여서 뒤에 보는 사람이 오
히려 능히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빛나는 공을 현양(顯揚)하고 원훈(元勳)을 포장(褒?)하신 지극한 뜻을 알게
할 것입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문하시중(門下侍中) 배극렴(裵克廉)ㆍ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ㆍ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
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ㆍ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ㆍ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ㆍ
의녕군(宜寧君) 남재(南在)ㆍ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ㆍ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ㆍ
파평군(坡平君) 윤호(尹虎)ㆍ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圭)ㆍ
부흥군(復興君) 조반(趙?)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ㆍ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ㆍ평해군(平海君) 황희석(黃希碩)ㆍ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ㆍ안경공(安景恭)ㆍ계림군(鷄林君) 김균(金?)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유원정(柳爰廷)ㆍ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오사충(吳思忠)ㆍ
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이백유(李伯由)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ㆍ연성군(延城君) 김노(金輅)ㆍ
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ㆍ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ㆍ
상호군(上護軍) 한충(韓忠)ㆍ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
정사공신(定社功臣) :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ㆍ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 복근(福根)ㆍ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원(趙溫)ㆍ
연성군(延城君) 김노(金輅)ㆍ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
충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ㆍ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신극례(辛克禮)
좌명공신(佐命功臣) :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
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신극례(辛克禮)ㆍ계성군(鷄城君) 이내(李來)ㆍ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ㆍ
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칠성군(漆城君) 윤저(尹抵)ㆍ
의성군(義城君) 김영렬(金英烈)ㆍ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ㆍ금천군(錦川君) 박은(朴?)ㆍ
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ㆍ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마천목(馬天牧)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ㆍ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양(柳亮)ㆍ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ㆍ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ㆍ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ㆍ남양군(南陽君) 홍서(洪恕)ㆍ
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ㆍ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ㆍ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ㆍ
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ㆍ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이종무(李從茂)ㆍ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ㆍ
풍산군(?山君) 심구령(沈龜齡)ㆍ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ㆍ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한규(韓珪)ㆍ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ㆍ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ㆍ
증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 김덕생(金德生).
선릉(宣陵) :
주 서쪽 30리 학당동(學堂洞)에 있다.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능이다.
평원대군 (平原大君) 묘(墓) : 주 남쪽 18리에 있다. 한확(韓確) 묘(墓) : 주 동쪽 30리에 있다.
임영대군(臨瀛大君) 묘(墓) : 주 남쪽 60리에 있다.
광평대군(廣平大君) 묘(墓)ㆍ영순군(永順君) 묘(墓) : 모두 주 서쪽 25리에 있다.
이원(李原)묘(墓) : 주 서쪽 30리에 있다.
구치관(具致寬) 묘(墓) : 주 동쪽 60리에 있는데, 서거정이 비명을 지었다.
최항(崔恒) 묘(墓) : 주 동쪽 20리에 있는데 서거정이 비명을 지었다. 박은(朴?) 묘(墓) : 주 북쪽 23리에 있다.
이극배(李克培) 묘(墓) : 주 북쪽15리에 있다. 밀성군(密城君) 묘(墓) : 주 서쪽 7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묘(墓) : 주 서쪽 13리에 있다. 정창손(鄭昌孫)묘(墓) : 주 서쪽 14리에 있다.
오사충(吳思忠)묘(墓) : 주 북쪽 11리에 있다. 권진(權軫) 묘(墓) : 주 동쪽 20리에 있다.
맹사성(孟思誠) 묘(墓) : 주 남쪽 30리에 있다. 유창(劉敞) 묘(墓) : 주 북쪽 10리에 있다.
이극증(李克增) 묘(墓) : 주 남쪽 40리에 있다. 정난종(鄭蘭宗) 묘(墓) : 주 남쪽 70리에 있다.
함부림(咸傅霖) 묘(墓) : 주 서쪽 12리에 있다. 김승주(金承?) 묘(墓) : 주 동쪽 30리에 있다.
한계희 묘(韓繼禧) 묘(墓) : 주 남쪽 40리에 있다. 어효첨(魚孝瞻) 묘(墓) : 주 북쪽 17리에 있다.
정척(鄭陟) 묘(墓) : 주 서쪽 7리에 있다. 이지강(李之剛) 묘(墓) : 주 북쪽 7리에 있다.
이계손(李繼孫) 묘(墓) : 주 서쪽 80리에 있다.
이문화(李文和) 묘(墓)ㆍ이승손(李承孫) 묘(墓) : 모두 주 서쪽 30리에 있다.
신증 희릉(禧陵) : 대모산(大母山)에 있는데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제안대군(齊安大君) 묘(墓) : 주 남쪽 16리에 있다.
고적 온조왕고성(溫祚王古城) : 온조왕 13년에 왕도(王都)에 늙은 할미가 변화하여 남자가 되고, 다섯 호랑이가
성안에 들어왔으며, 왕의 어머니가 돌아갔다. 왕이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은 데다가, 더욱 지금 요사스러운 조짐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세상을 버리시니 사세가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장차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 어제 나가서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여 보니, 토지가 비옥하다.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7월에 한산에 나아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기고,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일장산성(日長山城) : 바로 신라 때 주장성(晝長城)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쌓은 것인데,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
가 있다. 주위가 8만 6천 8백 척, 높이는 24척인데 석축이다.
요탄역(饒呑驛) : 고려 현종 9년에 거란이 와서 침범하므로 왕이 광주로 행차하였다가 두 왕후의 간 곳을 잃어
지채문(智蔡文)으로 하여금 가서 찾게 하였더니, 이 역에 이르러 바로 만나 모시고 돌아왔다.
왕이 기뻐하여 사흘 동안을 여기에 머물렀다.
명환 신라 김대문(金大問) : 성덕왕(聖德王) 3년에 김대문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고려 이혼(李混) : 참군이 되었다. 홍자번(洪子藩) : 통판이 되었는데 간 뒤에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생각함이
있었다.
안보(安輔) :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부의(金富儀) : 사록이 되었다. 장선(張瑄) : 목(牧)이 되었다.
이세화(李世華) : 고려 때에 오랑캐의 침략으로 인하여 장차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는데 광주가 중도의 큰 진(鎭)
인 까닭에 세화를 보내 나가 자사(刺史)가 되게 하였다. 몽고의 대병이 와서 포위하고, 백 가지 계교로 공격하였
으나, 세화가 주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여 사기(事機)에 따라 응변하니 오랑캐가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갔다.
이진(李?) : 사록이 되었다.
본조 권진(權軫) : 판관이 되었다. 최부(崔府) : 목사가 되었다. 안노생(安魯生) : 목사가 되었다.
남금(南琴) : 태종조에 양녕군을 이 주에 안치(安置)하였는데, 주관(州官)이 잘 제재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특히
경창부윤(慶昌府尹) 남금으로서 판목사(判牧事)를 삼았다.
인물 백제 고흥(高興) :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사람이다. 백제 개국 이래로 아직 문자로서 일을 기록함이 있지
못하더니, 고흥이 박사가 되매 비로소 서기(書記)가 있었다.
본조 안성(安省) :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이집(李集) : 본주의 아전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올랐다. 천성이 강직하여 신돈(辛旽)에게 붙지 아니하니
돈이 죽이고자 하매 그 아버지를 업고 영주(永州)로 도망하였다가 돈이 죽음을 받자 서울로 돌아와 본조에 벼슬
하여 전교판사(典校判事)에 이르렀다. 학문이 높아서 한 때에 사귀던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
(李崇仁)의 무리들이 모두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호는 둔촌(遁村)이요 시집이 있다. 이지직(李之直) : 이집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의에 이르렀다.
이지강(李之剛) : 이지직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贊)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지유(李之柔) : 이지강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이르렀다.
이장손(李長孫) : 이지직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이인손(李仁孫) : 이장손의 아우로 일찍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간절하고 정직하게 국사를 말하다가 대신에게 거슬려 한성부윤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호조 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위로하고 일깨워 말씀하시기를, "경의 나이 많음이 민망하나 탁지(度支)의 무거운 임무는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승진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지 5년 만에 죽었
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고 큰 포부가 있었다.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
하였다. 벼슬에 있으면서 삼가고 주밀하여 전의 법도를 준수하기에 힘썼다. 시호는 충희(忠僖)다. 다섯 아들이
모두 급제하였다.
이예손(李禮孫) : 이인손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극배(李克培) : 이인손의 아들로 급제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하고, 시호를 익평(翼平)이라 하였다. 성품이 엄중하고도 풍채가 있었으며 정치의
대체를 알았다. 아들 세필(世弼)ㆍ세광(世匡) 또한 과거 급제하였다.
이극감(李克堪) : 이극배의 아우로 두 번 과거에 합격하였다. 세조조에 좌익공신이 되어 광성군(廣城君)을 봉하
였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들 세우(世佑)도 급제하여 벼슬이 경기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극증(李克增) : 이극감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익대공신(佐理翊戴功臣)에 참여하여 광천군(廣川君)을
봉하였다.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관(官)을 다스림에 집과 같이 하였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이극기(李克基)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였다. 천성이 강직하
고, 관(官)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신증 이극균(李克均) : 극증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년에 피살되었다.
이세좌(李世佐) : 이극감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년에 피살되었다.
이점(李?)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윤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이손(李蓀)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아들 수언(粹彦)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가 일찍 죽었다.
우거 고려 조운흘(趙云?) : 늘그막에 주의 몽촌(夢村)에 우거하였다.
하루는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의 당(黨) 가족들이 멀리 귀양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사립문에
해가 낮이 되어서야 사람 불러 열고, 임정(林亭)에 걸어 나와 돌 이끼[苔]에 앉았도다.
어제 밤 산중에 비바람 사나워, 시내에 가득 흐르는 물이 꽃을 띄워 오누나." 하였다.
본조 박계성(朴繼姓)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근엄하게 직무를 보았다.
조추(趙秋) : 벼슬이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한구(韓逑) : 나이 다섯 살에 아버지가 죽고, 장년이
되어 어머니가 죽으매 아버지 묘에 부장하고 6년 상을 입었다. 이런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우고 부역
을 면제하였다.
정수명(鄭守明) : 그 아버지 호겸(好謙)이 악질(惡疾)을 얻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수명이 나이 겨우 14세에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 드렸다. 이런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내은이(內隱伊) : 사비(私婢)이다. 도둑이 그 집에 들어 와서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내은이가 몸으로써 그 아버지를 가리워 대신 죽음을 당하려 하여 마침내 아버지와 함께 화를 면했다.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신증 정주신(鄭舟臣) : 그 아버지 성근(誠謹)이 연산군 갑자년의 화를 만나 죽으니 가슴을 두들기며 통곡하며
먹지 않고 죽었다. 금상(今上) 초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이씨(李氏) : 정랑 성경온(成景溫)의 처이다. 연산군 때에 경온이 멀리 귀양갔다가 피살되었다.
이씨가 염습(殮襲)하고 장사 지내는데 예를 다하여 여막을 산소 곁에 짓고 손수 제사 음식을 갖추었다.
복을 벗은 뒤에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금상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사면운산옹관사(四面雲山擁官舍) : 이색의 시에, "사면의 구름산이 관사를 옹위하였는데, 한 줄기 강물은
어대(漁坮)를 둘렀더라." 하였다.
창산눅수장의구(蒼山綠水長依舊)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푸른 산과 푸른 물은 길어 예와 같은데,
푸른 기와와 붉은 기둥은 몇 번이나 새 것으로 바꾸었는고." 하였다.
수기저정생준예(秀氣儲精生俊乂) 유백유(柳伯濡)의 시에, "빼어난 기운이 정기를 저장하여 준걸을 낳았으니
조선의 인물이 빛이 있구나." 하였다.
변오 고려 이집(李集) : 이당(李唐)은 본주의 아전이다. 조심하여 어진 행실이 있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집은 그 셋째 아들로, 처음 이름은 원령(元齡)이다.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과 지조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이색ㆍ정몽주ㆍ이숭인 등과 서로 더불어 공경하는 벗으로 삼았다. 일찍이 바른 것으로서 항거하다가 적승(賊僧)
신돈에게 거슬리매, 신돈이 장차 잡아 죽이려 하므로 가만히 그 아버지 당(唐)을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영천(永川)의 최윤도(崔允道)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신돈이 죽음을 받으매 비로소 돌아와 이름을 고쳐 집(集)
이라 하고 자를 호연(浩然)이라 하고 호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출세할 뜻이 없었다.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물러가 여주의 천녕현(川寧縣)에 살며
몸소 밭 갈고 글을 읽었다. 때로는 시편(詩篇)과 새 곡식을 정몽주 등에게 선사하니 몽주가 글을 부쳐 감탄하였
다. 공양왕 정묘년에 죽으니 몽주ㆍ숭인 등이 글을 지어 애도(哀悼)하였다. 그뒤 여러 어진 이들이 서로 이어
죽자, 고려가 망하고 아조(我朝)에서 개국하였다.
그의 사적의 전말이 여러 문집에 갖추어 실려 있었으나, 역사를 편찬함에 미치어 임사홍(任士洪) 부자가 매우
이극감(李克堪) 형제를 질투하여, 이에 거짓으로 이집이 이조에 들어와 벼슬한 것으로 하여 마침내 본조 인물
밑에 그릇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시림(詩林)을 주석한 자 또한 그 그릇된 기록을 따랐다.
선종(宣宗 선조(宣祖))조에 경연관(經延官) 홍적(洪迪)이 고치기를 청하니 선종이 인출(印出)할 때를 기다리라
명하였다. 금상 3년에 비로소 이 책을 간행하여 세상에 공포하였다. 8대손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상서하여
유교(遺敎)를 따라 바로할 것을 청하니 금상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거짓을 고쳐 실
지로 삼으니 출처(出處)의 큰 대절(大節)이 명백하여져 유감 없이 되었다.
[비고]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가 32년 부(府)로 승격시켰다. 《文獻備考》
연혁 인조(仁祖) 원년에 유수(留守)로 승격 :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4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
고 관청을 성안으로 옮기었다 : 수어사를 설치하여 광주(廣州)등의 진(鎭)을 절제하게 하고 군무(軍務)는 목사
(牧使) 겸 방어사(防禦使)가 보게 하였다. 11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고 15년에 부윤(府尹)으로 고쳤
다. 효종(孝宗) 3년에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6년에 폐지하였다.
숙종(肅宗) 6년에 다시 겸하게 하였으나, 다시 폐지하였다. 9년에 유수로 승격(陞格)시키고 수어사를 겸하게 하
고 또 경력(經歷)을 두었다.
전영(前營)을 여주(驪州)로 옮기고 16년에 다시 부윤을 두어 방어사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전영장(前營將)을 두고 경력을 없앴다. 17년에 다시 수어부사(守禦府使)를 겸하게 하고 21년에 이를 폐지하였다.
영조(英祖) 26년에 수어사를 폐지하고 유수를 두어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경력을 두고 전영을 이천(梨川)으
로 옮기었다. 35년에 유수와 경력을 폐지하고 수어사를 두어 경청(京廳)을 설치했는데, 부윤 겸방어사ㆍ전영장ㆍ
수성장(守城將)은 옛과 같다. 정조(正祖) 19년에 유수로 승격하고 수어사를 겸하고 나가서 본성(本城)을 진무하
게 하였다. 따라서 경청은 폐지하고 진을 여주로 옮겼다.
관원 유수(留守) : 수어사를 겸한다. 판관(判官) : 전영장ㆍ수어종사관(守禦從事官)을 겸한다. 검률(檢律)ㆍ의학
(醫學) 각 한 사람씩이다.
토산 밤[栗]ㆍ앵도(櫻桃)ㆍ사과[林檎]ㆍ칠(漆)ㆍ자초(紫草 지초 뿌리는 염료(染料)로 쓰인다)ㆍ수철(水鐵)ㆍ
석회(石灰)ㆍ실[絲]ㆍ목화[綿]ㆍ삼베[麻]ㆍ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은구어(銀口魚)ㆍ이어(鯉魚)ㆍ
낭어(●魚 수게)ㆍ궐어(?魚 쏘가리)ㆍ눌어(訥魚 잉어과에 속하는 민물 고기)ㆍ금린어(金鱗魚 아름다운 물고기)ㆍ
밀어(密魚 망둥과에 속하는 물고기) 압구정(押鷗亭) 앞 강에서 산출된다.
궁실 행궁(行宮) : 상궐(上闕)ㆍ하궐(下闕)ㆍ좌전(左殿) 우실(右室)등이 있다. 재덕당(在德堂)ㆍ한남루(漢南樓)ㆍ
인화관(人和館)ㆍ사근평(肆覲坪)ㆍ행궁(行宮) 관해 좌승당(坐勝堂)ㆍ일장각(日長閣)ㆍ수어영(守禦營)ㆍ
제승헌(制勝軒) 등이다.
방면 성안에 두 개의 동(洞)이 있다 : 남동(南洞)과 북동(北洞)이다.
경안(慶安) :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10리이고 그 끝이 40리이다.
오포(五浦) :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세촌(細村) :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가 50리, 끝이 20리이다.
악생(樂生) :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마지막이 40리이다.
돌마(突馬) :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동부(東部) : 동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끝이 30리이다.
서부(西部) :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마지막이 20리이다.
퇴촌(退村) : 동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초부(草阜) : 동쪽으로 첫머리가 30리, 끝이 60리이다.
도척(都尺) :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실촌(實村) :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50리, 끝이 70리이다.
초월(草月) :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30리이고, 끝이 40리다.
중대(中垈) : 서쪽으로 첫머리가 10리, 끝이 20리이다.
언주(彦州) : 서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구천(龜川) :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육왕(六旺) :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15리요, 마지막이 30리이다.
의곡(義谷) :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요, 끝이 60리이다.
왕륜(旺倫) :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요, 끝이 70리이다.
북방(北方) :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끝이 90리이다.
월곡(月谷) :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마지막이 80리이다.
성곶(聲串) :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80리고, 마지막이 1백 리로 해변(海邊)이다.
진도 송파진(松坡津) : 서북쪽으로 20리며,
삼전도(三田渡)와 무동도(舞童島)를 주관하는데 별장(別將)은 한 사람이다.
삼전도(三田渡) : 서북쪽으로 25리이며, 옛날에는 도승(渡丞)이 있었는데, 송파(松坡)로 옮겼다.
광진(廣津) : 북쪽으로 20리다. 마점진(麻岾津) : 봉안(奉安) 동쪽으로 통하는데 25리이다.
신천진(新川津) : 삼전도 북쪽으로 5리이다. 두미진
(斗迷津) : 동쪽으로 20리인데 그 북쪽 언덕은 두미천(斗迷遷)으로 돌길이며, 빈강 강 가로 따라 둘리기를 7, 8리
이며, 동쪽으로 봉안을 향한다.
미음진(渼音津) : 북쪽으로 30리인데, 양주(楊州) 편에 보면 자세하다.
사원 귀암서원(龜岩書院) : 북쪽으로 30리인데,
현종(顯宗) 정미년에 건립하였고, 숙종(肅宗) 정축년에 액(額)을 내리었다.
이집(李集) :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 광주(廣州) 사람이며,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다
이양중(李養中) :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이고 광주(廣州) 사람인데 고려말에 벼슬은 형조 우참의
(刑曹右參議)였다. 우리 태종이 즉위하여 부르니,
평민으로 와서 보거늘 특별히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승직하니 받지 않았다.
정성근(鄭誠謹) : 자는 신(信)이고 진주(晉州) 사람으로 연산주 본관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승지요,
증직 이조 판서이다.
정엽(鄭曄) :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이고 본관 초계(草溪) 벼슬은 좌참찬이며,
증직 우의정이고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오윤겸(吳允謙) :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추탄(楸灘)이고, 본관 해주(海州)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숙영(任叔英) : 자는 무숙(茂叔) 호는 소암(疎庵), 본관은 풍천(?川)이다.
벼슬은 수찬(修?)이고 부제학(副提學)이다.
○ 수곡서원(秀谷書院) : 서쪽으로 20리이며 숙종(肅宗) 을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액(額)을 내렸다.
이의건(李義健) :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隱)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고 증직 집의(執義)이다.
조속(趙涑) : 자는 계온(季溫) 호는 창강(滄江)이며 본관은 풍양(?壤)이다.
벼슬은 진선(進善)이며 증직 이조참판이다.
이후원(李厚源) :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이고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현절사(顯節祠) : 부성 안에 있다.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액을 내렸다.
김상헌(金尙憲) : 경도(京都) 태묘(太廟) 편에 보라.
정온(鄭蘊) :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 증직 영의정
(領議政)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 : 두 현인(賢人)은 강화부(江華府)에 보라.
오달제(吳達濟) : 자는 계휘(季輝)이며 호는 추담(楸潭)이고 본관은 해주(海州)다.
벼슬은 교리요 증직 영의정이며,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능침 정릉(靖陵) : 선능(宣陵) 동쪽 산에 있는데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능이며 기일은 11월 15일이다.
□직장(直長) 참봉(參奉)이 각각 한 명이다.
인능(仁陵) : 헌능(獻陵)의 오른편 언덕에 있는데, 순조대왕(純祖大王)의 능이다. 기일은 11월 13일이고, 처음에
장례(葬禮) 모신 곳은 교하(交河) 장릉(長陵) 국내(局內)인데, 철종(哲宗) 6년에 이곳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도 이곳에 합장(合葬)하였는데, 기일은 8월 4일이다. □령(令)ㆍ참봉(參奉)이 각
각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