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셈법
요한복음 11:45-53 2023/11/12 성령강림 후 제24주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가 약속한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 교회는 11월 첫째 주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을까요?
사실 의미 없는 논쟁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겠지요.
그리고 누구에게 감사를 드릴 것인가 이겠지요.
일단 추수감사절은 예수님의 생애를 따르는 교회력이 아닙니다.
조선에 들어 온 미국선교사들이 전해 준 교회의 전통이지요.
참고로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1월 셋째 주일이 아니라 11월 넷째 주 목요일입니다. 평일이지요. 한편 캐나다 사람들은 10월 둘째 주 월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냅니다. 따라서 추수감사주일예배를 언제 드리는 것이 옳은가,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긔 감사하는 미음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향하고 있는가? 이지요.
시인 김현승은 자신의 시 ‘감사하는 마음’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①내가 누구인지
②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
그 마음이 곧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시인 김현승은 정의합니다.
참 의미가 있는 정의라고 여겨집니다.
자 그러면 ‘나는 누구일까요?’
또 ‘나의 주인,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이것을 깨우쳐 주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찬송가 570장입니다.
이 찬양은 내가 누구인지,
또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먼저 내 삶의 주인, 누구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지요.
내 안에 사랑으로 머물러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반면 나는 누구일까요?
주님이 기르시는 어린양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가사가 이렇습니다.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찬송의 배경이 되는 요한복음 10장으로 넘어 오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주십니다.
(새)요10: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①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선한목자이십니다.
②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선한 목자가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요한복음 10장에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선한 목자로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지, 두 본문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새)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①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새)요10: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②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셔서 하신 일이라고 사도 요한은 증거 합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한 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이었습니다.
요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정보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와서 하신 일
또 하나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사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첫째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일입니다.
과연 그 일이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 드렸던 요한복음 10장 10절 후반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죽은 나사로가 몸의 생명을 다시 얻고
더 넘치는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요11: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①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②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받아야할 영광’
이 두 가지의 영광을 위해 아주 놀라운 일이 죽음의 현장 곧 무덤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나사로의 부활이었습니다.
요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아들이 행한 영광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이 역시 요한복음에서만 나오는 정보인데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시)요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드디어 예수님이 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고 선동하는 것처럼 귀신의 역사, 바알세불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어떤 유대인이 아주 급하게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그대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줍니다.
요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여기서 질문
어떤 유대인은 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바리새인들(그 공동체)에게 가서 알렸을까요?
바리새인들, 너희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
그 일은 귀신의 역사, 바알세불의 역사가 아니라
그 일은 분명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말고, 너희들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한 사람,
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적대자들과 손을 잡습니다.
바로 자신들을 혐오하는 대제사장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바리새인의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이 긴급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합니다.
공회를 소집한 이유, 이것이었습니다.
요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예수가 행한 일
곧 그가 행하는 많은 표적은 우리들의 공동체, 우리들의 가치, 우리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요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또 이런 우려도 있었습니다.
점차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유대 땅에 많아져서
그들이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제국 로마를 대항한다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염려에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다시)요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결국 표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한 사람 예수로 인해
나라와 민족이 폭삭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아주 신묘 방통한 묘수 하나를 짜냅니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한 사람 곧 논란 가운데 있는 예수
그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민족 전체를 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기발한 셈법이지요.
어떻습니까?
대제사장 가야바의 셈법, 여러분들도 동의 하시는지요?
물론 상황이 위급하면, 우리도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나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은 본능에 끌려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결코 이 셈법에 동의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야바의 셈법대로 예수님이 그대로 따르십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희생하는 길
즉 선한 목자처럼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길을 택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가야바 셈법에 감추어진 비밀
곧 예수님의 셈법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남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입니다.
‘너’ 한 사람이 아니라 ‘나’ 한 사람입니다.
요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 우리는 한 사람의 희생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해야 할 ‘한 사람’,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제사장 가야바의 셈법에 따르면, 그 한 사람은 바로 ‘너’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바로 ‘너’이지요.
너만 희생하면 된다는 것
그렇게 희생당할 마녀 사냥을 일삼는 것이
가야바의 셈법 사단의 셈법 세상의 셈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셈법은 세상의 것과 달랐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해야 할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나’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①대제사장 가야바의 셈법처럼 희생자 한 사람을 찾는 일을 멈추십시오. ②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예수님의 셈법, 먼저 밀알 하나가 되어 나를 희생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새)요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12: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12:26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