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삭녕최씨(朔寧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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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전라도(全羅道) 1813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 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 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 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 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최휘지(崔徽之) | 1598 | 1669 | 삭녕(朔寧) | 자금(子琴) | 오주(鰲洲) | 최연(崔珚) |
○ 노봉서원(露峯書院)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축년에 현액을 내렸다.
김인후(金麟厚) 문묘(文廟)를 보라.
홍순복(洪順福) 자는 자유(子裕) 호는 고암(顧庵)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중종 경진년에 사화를 입었다.
최상중(崔尙重)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이며, 삭녕(朔寧) 사람이다.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대사헌(大司憲)으로 증직되었다.
오정길(吳廷吉) 자는 형보(亨甫), 호는 해서(海西)이며, 해주 사람이다. 벼슬은 교서 정자(敎書正字)이다.
최온(崔薀)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며, 최상중의 아들이다. 벼슬은 동부승지(同副承旨)이다.
최휘지(崔徽之)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州)이며, 최온의 조카이다.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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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東岡) 최시옹(崔是翁)1646년(인조 24)~1730년(영조 6) 삭녕(朔寧)
東岡先生遺稿卷二 / 書 / 與吳秀士 泰綏
露院諸先生文集。久擬修正而遷延未果。老身未死前。窃欲裒聚。而鄙家三世文字。則略有收錄。顧庵先生。旣無子孫之見在。難以收輯。勢也無奈。海西先生。則想必有可考文蹟。望須收拾以送。用備繕寫而藏置院中。以爲日後入榟之地如何。丁酉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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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휘지(崔徽之)
1598년(선조 38)∼1669년(현종 10).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洲).
조부는 노봉서원(露鋒書院)에 제향된 최상중(崔尙重)이고, 부친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최연(崔 艸+衍)이며, 처부는 이유간(李惟侃)과 양준우(梁俊遇)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어 경전과 『근사록(近思錄)』을 연구하는데 전념하였다. 1624년(인조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금오랑(金吾郞:의금부에 속한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하였다. 1631년(인조 9) 찰방(察訪)에 제수되어 청렴하고 성실히 관직에 임하여,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계부(季父) 최온(崔蘊)과 의병을 일으켜, 청주(淸州)와 과천(果川)으로 진입하였으나, 이미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북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오로지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59년(효종 10) 북벌에 대한 뜻을 가지고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하였으나 그나마도 얼마 있지 않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속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노봉서원(露鋒書院)에 제향되었다. 시(詩)와 서(書)에 능통한 학자로 관직에 미련이 없었으며, 산수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풍치를 좋아하였다.
아들로 최치옹(崔致翁)과 최계옹(崔啓翁), 최시옹(崔是翁)이 있다.
문집으로 『오주집(鰲洲集)』이 있다.
*최휘지(崔徽之)1598년(선조 38)∼1669년(현종 10). 삭녕(朔寧). 자금(子琴), 오주(鰲洲).
*崔靜翁 1615 1674 朔寧 伯沈
*崔瑞翁 娶正郞鄭昌詩女。無子。與友爲之後
*崔致翁 1635 1683 朔寧 虞鳳 收春子
*崔是翁 1646 1730 朔寧 漢臣 東岡
*동강(東岡) 최시옹(崔是翁)1646년(인조 24)~1730년(영조 6) 삭녕(朔寧).
正.崔啓翁최계옹 1654~1720 本 朔寧 字 乃心 號 迂窩 우와유고(迂窩遺稿) 6권 3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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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東岡) 최시옹(崔是翁)1646년(인조 24)~1730년(영조 6) 삭녕(朔寧)
東岡先生遺稿卷七 / 行狀 / 養眞堂河公行狀
*河萬里 1597 1671 晉州 子長 養眞堂
公諱萬里字子長。養眞其號也。河氏貫晉陽大姓。先祖諱仲龍爲湖南按廉使。見龍城北屯溪之勝。因居焉。世有簪纓。康津縣監諱如德。以淸白稱。高祖諱貴淙司馬。祖諱自濂。與伯氏參奉諱自沫。俱有孝行而早歿。考諱克潤。妣南原梁氏。士人萬成之女。稱有婦德。以萬曆丁酉七月初二日。生公于築洞里。儀狀端正。資質聡明。自幼愛書。一聞輒誦。年甫舞象。博覽經傳。仍以質疑於吾先子星灣從祖砭齋及李天默諸公之門。不擇昏夜。孜孜講磨。學業益進。奬許甚重。
嗚呼。公與吾先君鰲洲公,季父艮湖公。生同一里。情同一家。自少至老。麗澤相資。每以月朔。會年少儒士於
露峯,寧川兩書院。而迭爲講長。講論經義。較藝製述。施以賞罰。使之刮磨。行之久遠。多所成就。
吾鄕後進之文獻彬彬。公之力多焉。又倣香山古事。作九老會于丹丘臺上。良辰美景。杖屨相從。山醪野䔩。暢叙幽情。冠童隨之。或咏歌或賦詩。如是者又十餘年。辛亥先君棄世。公祭之以文曰。幼而同隊。年相若也。長而同學。道相似也。靑春戱嬉。白首從遊。坐必連床。寢必橫衾。翺翔乎文藝之苑。琢磨乎詩禮之塲。心同琴瑟。義協膠㓒。不惟講習之是尙。常以行義而相勵。及公之歿。艮湖公又誄之曰。行則隨肩。坐則鼎足。連衾而寢。共榻而讀。惟我儕輩。博洽典雅。莫吾君及也。求之朝列。亦罕其比。而累擧不中。老於蓬蓽。惜乎才與命相違。今之人有一才一藝者。莫不營營求售。而吾君優遊隨分。未常有逐逐之意。吾以是多之。嗟吾伯氏。擇交必端。於人少許可。而與吾君。相與偲偲。久而敬之。伯氏之所敬。吾亦敬之。此可見公之平生而知其交道也。余自幼少。承公敎誨。心常講服。曾於葬時。亦操文侑觴以叙哀誠。忽焉已五十年矣。今胤君叔季。俾余爲狀。義不敢辭。而衰病昏忘。不能盡平生之見聞。遂略記顚末。而幷附前日之誄文。以備後人之參考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