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 시는 어떻게 당선작이 됐을 까?>의 첫 문을 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하게나마 글의 방향을 소개하자면 앞으로 신춘문예 당선작과 각종 문학상 당선작, 그리고 문예지 당선작 순으로 한 편씩 소개하고 다시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다만, 여타의 작품 소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선작품은 어떤 점이 심사자들의 시선을 끌었을지 그 핵심을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시 창작 이론서와 강의를 읽고 들 었음에도 공모전에 내면 떨어지는 이유가 뭘까요?
이 글은 그런 분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글이지, 시 창작에 관한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주관적인 시 감상이나 해석을 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런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건 이론을 적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며 이론의 특성상 실속 없는 미사여구나 가르치려 드는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은 일단 재미도 없고 지겹습니다 .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하나 실제로 본인의 시 창작에 도움 될 확률은 극히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시 감상이나 해석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요. 저는 문학에서만큼은 꽤나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문학의 깊이나 숭고한 가치를 좋아도 하고, 그 길을 묵묵히 걷는 문인을 존경도 하지만, 그 정도의 깜냥은 되지 못합니다. 돈도 되지 않는 작품을 쓰기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제 몸버려가 는 짓(?)은 안 하는 사람입니다. 흔한 말로 저 사람 글 좀 쓴다는 소리 듣는 걸 좋아하고, 제가 쓴 글을 경제적으로 환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 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야만 제가 좋아하는 글쓰기에 전업으로 매진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는 이론을 몰라서 시를 못 쓰는 게 아닐 겁 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창작 이론집은 차고도 넘치 니까요. 그럼에도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어이없게도 그런 이론을 너무 잘 알아섭니다. 이론에 치여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고 보니 작품성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을 끄는 감정(혹은 감동)은 없습니다. 심사자들도 사람일진대 작품성만 보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무엇은 대개 표현의 형식(혹은 방식)에서 오고, 그것이 바탕이 됐을 때 작품성도 살아납니다.
한 가지 우려가 있다면 지금의 2~30대 젊은 시인 들이나 혹은 현대시만(?) 쓰는 이들에겐 감동이나 서정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 역시 현대시를 곧잘 쓰는 사람으로서, 앞서 언급 한 마음을 잡아끄는 표현의 형식이 없다면 제아무리 현대시를 써봐야 본인만 만족하는 재미없는 시에 불과할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독자와의 소통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현대 시의 매력은 내용의 이해(소통)가 아니죠. 표현의 형식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시를 씀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할 건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걸 알고 이 글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첫 작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입니다. 지난날 당선작을 공부할 때 가장 기억에 남기도 했고요. 대개의 당선작을 보면 최소 20행이거나 23~4행인데 반해 이 작품은 11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죠. 그런데 어떤가요? 짧은데도 할 말을 모두 다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시는 다 말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는데 말이죠.
이 작품에서 심사자들의 눈에 든 건 뭐니 뭐니 해도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없어도 반짝이겠다’ 이런 형식이었을 겁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시를 길게 쓸 필요가 ‘없겠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겁니다. 비단 제목이 반가사유상이어서가 아닙니다. 불교적 소재여서 그 아득함이 더 배가 되어 느껴졌을 뿐, ‘~이겠다’는 표현을 다른 소재에서도 핵심적인 의미로 녹여낼 수 있다면 분명 심사자의 눈에 띌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시를 쓸 때 ‘~이겠다’는 표현을 한번 써보세요. 솔직히 많은 걸 쓰려면 더 힘들잖아요. 이렇게 쓰면 심사자 입장에서 볼 땐, 쓸 말은 아주 많지만 그만 줄이겠으니 알아서 해석하시라는 도발로도 읽힐 겁니다. 그런 도발이 의외로 먹히는 거고요. 물론 이 작품은 다른 행에서도 최대한 말을 절제하려는 게 느껴집니다.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한 셈이죠.
실제로 아래 링크 걸어둔 2020 불교신문 당선작을 보면 이를 응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오늘은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있다’, ‘없다’, ‘~이겠다’라는 형식을 자신의 습작시에 적용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따라 하진 마시고요. 본인이 쓴 시에 적합하게 활용해 보세요. ‘~이겠다’에서 ‘이’를 빼고 ‘~겠다’로 바꿔 주도적으로 밀고 갈 수 있다면 전체적인 느낌이 확 달라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