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too!”
- 어느 결혼 기념일에 -
변순옥
유교적인 사회적 배경의 영향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감정표현이 아주 서툴다. 기독교 가정에서 감정 표현을 비교적 자유롭게 하시는 부모님의 영향 아래서 많은 형제들 사이에 둥글둥글하게 자란 나로서도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비교적 연애 결혼이 지배적이었던 친구들에 비해 여전도사님의 중매로 만난 지 일주일만에 약혼 날짜를 잡고 결혼을 했던 우리는 사랑의 고백마저 생략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왜 구태여 말로 표현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의 갈등도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의 작은 자존심을 어설픈 고백으로 인해 송두리째 날려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좌우간 나는 사랑의 표현이 참 힘들었다.
그런 나를 겨냥한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어떤 분이 Jack Balswick이 지은 <I want to say I love you, 서로 사랑한다고 말합시다>란 책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을 입 밖에 내 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느낀 것이 무엇인가를 뚜렷한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해 주며, 또한 사랑의 표현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친밀함을 계속 유지시켜 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는 글에서 공감을 얻고 나의 약점에 관한 해결을 얻고자 야무지게 결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심할수록 그것은 내겐 어려운 과제였다.
나의 그런 면을 보완하기 위함인지 혹은 보상에서 오는 것인지, 나의 남편은, 전형적인 경상도 출신의 무뚝뚝한 분들과는 달리, 여자인 나보다도 훨씬 감정 표현이 섬세하고 풍부하다. 자주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다. 그토록 매사에 풍성한 남편을 많은 면에서 감탄하며 배우고 있지만 “여보! 사랑해요”라는 말은 그렇게도 배워 실천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무감각한 사람일지라도 상대편에서 건네는 사랑한다는 말에 아무 반응 없이 있기는 쉽지 않아서 용기를 내어 “여보!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하기를 몇 번이나 계획하다 결국은 하지 못하고 기껏 하는 말이, 그것도 한국말로는 쑥스러워 “me too”라고 답하곤 했다.
그런 나를 남편은 한번도 지적한 적 없었지만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나의 미숙한 감정표현을 두고 고민하다 드디어 좋은 방안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편지 쓰기였다. 어릴 때부터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땐 자주 편지를 썼다. 타인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내성적인 사람도 편지 쓰기는 가능한 것이었기에 편지 쓰기를 참 좋아했다.
아주 친하고 자주 만나는 분께도 말보다는 편지로 나의 마음을 자주 전달하는 편인 나는, 남편에게도 편지로 나의 감정을 나타내기로 했다. 말로는 서먹서먹하여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쉬웠고, 정성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분에게로 향한 나의 감정을 구체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보다는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나는 편지 전달 방법에 있어서도 아주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남편이 일찍 새벽기도를 위해 일어나 가장 먼저 찾아 가 볼 수 있는 곳인 화장실의 거울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랑의 편지를 나는 늘 그 거울에다 붙여 두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을 서재의 나의 책상 위에 곱게 접어 두며 비록 말로 표현하진 못해도 날로 풍성하고 깊은 사랑의 표현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의사로서 매일 함께 생활하는 남편과 나는 때로는 각자의 진료실에까지 우편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의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사랑의 표현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올해 3월 19일, 우리들의 결혼 기념일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찻집의 낭만적인 촛불 아래서 사랑을 확인하리라 결심하고, 편지로써가 아니라 이제는 직접 “여보! 사랑해요”를 외치리라 야무지게 마음먹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만날 그 시간을 고대했다.
드디어 그날, 아름다운 장미 꽃다발을 안고 나타난 황홀한 남편의 모습에 넋을 잃고 멍청히 쳐다보다 “여보! 사랑해”하는 갑작스런 남편의 음성에 나도 모르게 아뿔싸! 또 다시 “me too”를 외쳐버렸던 것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게는 <사랑해요> 그 한 문장을 말하기가 그리도 어려웠나 봅니다. 지금요? 물론 지금은 사랑한다는 말 너무 잘 하죠. ♣
- 글쓴이는 현재 부산침례병원 소아과장으로 이웃들을 섬기시며,
인터넷 갈릴리마을의 왕언니, 왕누나로 통하기도 합니다.
- 출처- 핸와달 2003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