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전.. 중세 유럽을 1500년까지을 갈라놓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안에 들어간 인물의 프로필만을 적을 생각이죠! ^^ 루이11세는 백년전쟁 이후 샤를7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프랑스를 강력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또한 운이 따라 주어서 그의 강력한 적들이 쉽게 무너지더군요! 그럼..출처는 역시나 브리태니커입니다.
루이 11세 Louis ⅩⅠ 1423. 7. 3 프랑스 부르주~1483. 8. 30 플레시레투르. 발루아 왕가 출신의 프랑스의 왕(1461~83 재위).
아버지 샤를 7세의 업적을 이어받아 백년전쟁 이후의 프랑스를 강력하게 하고 통일시키는 작업을 했다. 불로네·피카르디·부르고뉴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했고 프랑슈콩테와 아르투아를 차지했으며(1482) 앙주를 병합하고(1471) 멘과 프로방스를 물려받았다(1481).
[초기생애와 망명]
루이는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앙주의 마리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대부분은 잉글랜드인들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소년기를 주로 투렌의 로슈에서 보냈다.
못생긴데다 뚱뚱했던 루이는 엄격하게 격리된 환경에서 자라나 비밀스럽고 냉혹하며 미신을 잘 믿는 성격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깊고 총명했으며 아는 것이 많았고, 교활한 외교가에다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대담한 전사였다. 그는 그칠 줄 모르고 샘솟아나는 기략과 술수로 인해 '세계적인 거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프랑스 민족의식의 대변자로 내세웠는데, 뒤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 앞에서 "짐이 프랑스다"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루이는 1436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했으나 이는 정략에 따른 불행한 결혼이었다.
1439년 부왕은 그를 잉글랜드인들에 대한 랑그도크의 방어태세를 감독하라고 보냈고, 그뒤 푸아투에서 국왕 대리로 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빨리 왕위에 오르고 싶어한 루이는 불만을 품은 제후들의 부추김을 받아 당시 보헤미아에서 일어났던 분란에서 이름을 딴 ' 프라게리'(Praguerie) 반란에 앞장섰다(1440).
그러나 샤를 7세는 그의 반란을 용서하고 그를 도피네의 통치자로 앉혔다. 루이는 1440~43년 잉글랜드와의 전투에 아버지를 따라 참여했으며, 1443년에는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붙여 디에프의 포위를 풀도록 만들었다.
144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수많은 용병부대가 실직상태에 놓이자 그는 이들 대병력을 이끌고 바젤을 공격했다.
이 공격의 외견상 이유는 스위스 연방군과 싸우는 독일 왕 프리드리히 5세(뒤에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루이는 바젤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으며, 프리드리히가 사전에 약속했던 겨울 숙영지(宿營地)를 내주지 않으려 하자 이번에는 알자스의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를 공격했다.
한편 샤를 7세는 로렌을 침공한 뒤 신하들을 대동하고 낭시에 머물고 있었다. 루이가 그곳에 합류했을 때 샤를은 전적으로 아녜스 소렐과 피에르 드 브레제의 영향에 좌우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끼던 왕세자비 마르그리트의 죽음(1445)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완전히 벌어졌으며, 더구나 루이는 브레제를 해치려는 음모에 연루된 사실이 발각되면서 도피네로 추방되었다.
그 이후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도피네에서의 생활은 루이에게 통치자로서 수련을 쌓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지방행정을 재편했으며, 발랑스대학을 설립하고 파를망(고등법원)을 설치하는 한편 귀족들을 복종시키고 도시의 특권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영지에 있는 광산과 삼림을 개발하고 교역을 장려하기 시작했으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면서 때로는 아버지의 방침과 어긋나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밀라노 공작령의 분할을 놓고 사보이 왕가와 비밀협정을 체결한 후 루이는 아버지 샤를 7세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갓 미망인이 된 사보이 공작 루이의 딸 샤를로트와 결혼했다(1451).
그러나 뒤이어 루이는 사보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1456년 샤를이 군대를 끌고 도피네 변경에 와서 출두를 명령했을 때 루이는 네덜란드에 있는 부르고뉴 선량공(善良公) 필리프의 궁정으로 몸을 피했다.
[프랑스 왕]
필리프의 식객으로 머무르는 동안 루이는 거대한 부르고뉴 공국의 운영에 관해 속속들이 익힐 수 있었고,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후에 도리어 부르고뉴를 몰락시킬 궁리를 하게 된다(샤를은 필리프가 그의 닭을 잡아먹을 여우를 키우고 있다고 말했음). 그와 동시에 루이는 밀정을 통해 부왕의 병세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훗날 증거는 없지만 결국 독약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461년 샤를이 죽자 루이는 5년간의 초조한 망명생활을 끝내고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국왕이 된 루이는 최초의 행동으로 샤를 7세의 각료들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피에르 드 브레제와 앙투안 드 샤반은 투옥당했으나 뒤이어 비교적 쓸모있다고 판단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복권되었다. 대체로 하층 귀족이나 중간계급 출신의 사람들을 기반으로 충성스러운 고문단을 구성한 루이는 그들의 조언에 따라 권위를 행사하고 왕실의 영지를 확장하며 왕국의 부를 개발했다.
루이 11세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언제든지 서로 연합하거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어 그에게 반대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왕국의 제후들과 대봉신(大封臣)들이었다. 이전 샤를 7세 휘하에 있었던 관리들은 국왕이 새로 임명한 인물들에게 적대감을 나타냈다.
부르봉 공작 장 2세와 브르타뉴의 프랑수아 2세가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우두머리로 떠올랐다. 선량공 필리프의 아들이며 장래 후계자인 부르고뉴의 용담공(勇膽公) 샤를은 루이의 적들을 지원했다. 또한 루이의 친동생이며 처음에 베리 공작이었던 샤를 드 프랑스는 반란세력들의 앞잡이가 되었다.
1465년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공익동맹을 결성하고 루이에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프랑스 전역이 거의 무정부 상태 직전에 놓인 듯이 보였으나, 하층 귀족들은 루이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거부했고 부르주아 계급도 그의 편을 들었다. 약간의 전투가 있은 뒤에 루이는 부르고뉴 및 브르타뉴와 협정을 맺음으로써 동맹을 와해시켰으나 루이 자신도 많은 양보를 해야 했다.
솜 지방의 도시들은 부르고뉴인들에게 반환되었고 노르망디는 배리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샤를 드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브르타뉴에서 부르고뉴령(領) 아르투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북부 전역이 루이의 반대세력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1466년 국왕은 노르망디를 다시 점령했다. 1467년 선량공 필리프가 죽은 뒤 부르고뉴 공작이 된 용담공 샤를은 브르타뉴의 프랑수아 및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와 동맹을 맺었다. 루이는 1468년 브르타뉴를 침공해 프랑수아를 동맹에서 이탈시킨 뒤 그해 10월 페론에서 샤를과 회담을 가졌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협상이 진행되던 중 샤를은 루이의 첩자들 사주로 리에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격노한 샤를은 루이를 가택연금한 뒤 더 많은 양보를 하도록 강요했으며, 마침내는 그를 리에주로 데려가 반란이 진압된 것을 목격하도록 했다. 페론에서 굴욕을 겪은 이후 루이는 잉글랜드에서 망명한 랭커스터 가문을 지원함으로써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을 무력하게 만들고자 했으나 1471년 5월 랭커스터 세력이 최종적으로 패함에 따라 그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부르고뉴를 공격했던 루이는 어느새 새로운 적들에 둘러싸이는 처지가 되었다. 원래부터 적이었던 용담공 샤를과 에드워드 4세, 브르타뉴의 프랑수아뿐만 아니라 1469년 루이에게서 기엔 공작령을 받았던 샤를 드 프랑스를 비롯해 장 5세 아르마냐크, 루시용을 되찾고자 한 아라곤 왕 후안 2세 등이 서남부에서 새로운 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샤를 드 프랑스가 1472년에 죽은 뒤 샤를과 프랑수아 두 사람은 루이와 휴전협정을 맺었고, 루이는 아르마냐크를 정벌했으며 아라곤과는 루시용에서의 적대관계를 미루기로 합의했다. 그뒤에 샤를이 잉글랜드 등과 함께 프랑스를 분할점령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으나 루이는 재빨리 샤를의 동맹자들과 휴전을 맺거나 그들을 매수했다.
1475년 이후 루이의 최대 과제는 부르고뉴 세력의 타도였다. 그는 스위스 연방군과 로렌의 르네 2세가 용담공 샤를과 전쟁을 벌일 때 이들을 지원했다. 샤를이 결국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자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령 해체작업에 착수해 부르고뉴의 프랑스 봉토를 왕령에 재통합하고 그밖에도 가능한 한 많은 토지를 탈취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샤를의 딸 마리와 결혼한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은 마리의 상속재산을 루이에게서 지키려고 했다. 결국 1482년 아라스 조약에 의해 루이는 부르고뉴·피카르디·불로네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고 그의 어린 아들이며 후계자인 미래의 샤를 8세를 마리와 막시밀리안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약혼시켜 그녀의 지참금 명목으로 프랑슈콩테와 아르투아를 차지했다.
루이는 전쟁을 확실성없는 사업이라고 보고 마지못한 경우에만 전쟁을 벌였으나 샤를 7세가 창설했던 상비군은 그대로 존속시켰다. 그는 왕령을 늘리는 데 전쟁보다는 외교와 상속이라는 수단을 더 즐겨 썼으나 한편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적극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용담공 샤를이 죽고나자 루이에게는 그의 누이 욜랑드가 섭정을 맡은 사보이에 대해 실질적인 후견권을 행사하는 데 반대하는 인물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는 스스로 이탈리아 북부 문제에 관한 심판관 역할을 맡고 나섰다.
[국내 업적]
프랑스 내에서 제후들의 저항을 분쇄한 루이는 이제 마음대로 자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루이 11세는 추상적인 왕권 개념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근대적인 국가관을 표명했다. 그는 전통을 되살려 '성'(聖) 샤를마뉴의 축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성 미카엘 기사단을 창설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는 개인적 충성심에 바탕을 둔 봉건적 유대 대신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는 새로운 군신관계가 뚜렷하게 대두되었다. 중앙집권제가 발전했으며 이전에는 영주가 보유하던 재판권을 왕실회의의 한 분과가 관장했다. 행정부서의 역할이 확대되었고 국왕에게서 직책을 받은 관리들이 영향력있는 계급을 이루기 시작했다.
루이 11세는 사자(使者)들의 연락망을 통해 모든 사태의 전개를 눈으로 보듯 파악할 수 있었고, 또한 왕국 전역을 자주 순회했다. 1472년 교황과 새로운 종교협약을 체결해 주교임명권을 장악했으며 단독 권한으로 세금을 올려 왕실의 수입을 늘렸다. 귀족들의 회의와 신분의회는 단지 자문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지를 얻었으며 그들 중 몇몇은 루이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 역할을 했다. 부(富)가 권력의 필수적 요소라는 생각에서 그는 길드를 장려하고 산업발전을 위해 많은 법령을 공표했으며 광산개발을 권장하고 리옹과 투르에 견직산업을 도입하는 한편 1470년 소르본에 인쇄소를 세웠다. 또한 그는 루앙이 잉글랜드 및 한자 동맹 도시들과 통상하는 것을 촉진시켰으며 리옹의 시장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 향료무역을 담당할 회사를 세울 구상도 했다.
루이 11세는 몸은 약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일꾼이었으며, 과로로 인해 뇌동맥경화증이 악화되면서 결국 목숨을 잃은 것 같다. 마지막 2~3년 동안 그는 투렌의 플레시레투르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483년 숨을 거두었다.
M. J. Mollat 글 | 李容大 참조집필
참고문헌
루이십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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