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밀고 가는 삶
새벽은 늘 아버지보다 늦게 왔다.
세상이 눈을 뜨기 전 아버지는 이미 하루의 문턱을 넘어가고 계셨다.
밤새 내린 눈이 마당을 덮으면 세상은 잠시 숨을 죽인다. 그 고요를 가장 먼저 깨는 것은 바람도, 새도 아니었다. 싸리 빗자루가 눈을 털어내는 소리, 사각사각 그 소리가 어둠 속에서 길을 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시간을 쓸어내며 하루를 끌어오는 소리 같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소리는 나를 깨우지 않았지만 내 안 어딘가를 오래 두드렸다.
아버지는 자전거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셨다. 낡은 자전거는 한겨울마다 더 늙어 보였다. 쇠는 차가웠고 손잡이는 금방 얼음을 품었다. 그 위에 생선이 담긴 통을 올리고 끈으로 단단히 묶으시면 자전거는 비로소 하루의 짐을 받아들였다.
싸리문이 열리는 순간, 아버지는 세상에 말을 건넸다.
“생선 사세요.”
“싱싱한 오징어, 꽁치, 고등어 왔어요.”
“시원한 동태 있어요.”
그 목소리는 눈 위에 떨어져 퍼졌다. 발자국처럼 남지 않고 숨처럼 번져갔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집들의 문틈으로 스며들어 잠든 사람들의 귀에 가만히 닿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침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 누군가의 밥상을 준비하게 하는 소리.
그러나 어린 나에게 그 소리는 단지 ‘멀리 가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언제나 내가 있는 곳보다 더 먼 곳에 가 있었다.
아버지는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자전거로 오가셨다.
눈 덮인 산길은 기억처럼 희미했고, 언덕은 하루의 무게를 떠안은 사람에게만 유난히 더 가팔라 보였다.
자전거는 자주 멈춰 섰고 바퀴는 몇 번이나 눈길 위에서 헛돌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말없이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손으로 밀고 올라가셨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혹은 서로가, 서로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그 뒤에 앉았다. 짐칸은 차가웠고 생선 냄새는 바람을 타고 코끝을 찔렀다. 짭조름하고 비릿한 냄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냄새는 싫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냄새였고 우리의 저녁 냄새였으며 살아 있다는 냄새였다.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면 바람이 그 등을 스쳐 지나갔다.
그 등은 넓었지만 어딘가 자꾸만 구부러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위에서 조금씩 누르고 있는 것처럼.
“생선 사세요—!”
아버지는 멈추지 않고 외쳤다.
그 소리는 바람에 부딪히고, 눈에 스며들고 언덕에 걸렸다가 다시 흘러내렸다.
어느 날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과 논의 경계가 사라졌다. 세상은 하얗게 이어져 있었고 어디까지가 길인지 알 수 없었다. 자전거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바퀴만 돌았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가 작아 보였다.
하얀 세상 속에서, 아버지는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아버지, 돌아가요.”
그 말을 꺼내려다가 삼켰다. 대신 입안에서 무언가가 굴렀다. 말인지, 숨인지, 아니면 눈 녹은 물 같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다시 허리를 폈다.
그리고 눈 위에 서서 더 크게 외쳤다.
“생선 사세요—!”
그 소리는 이전과 달랐다.
세상에 닿으려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에 지지 않으려는 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울음을 삼켰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아버지마저 그 소리를 따라 사라질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밥상 앞에 앉았다.
어머니는 짧게 한마디 하며 말없이 밥을 퍼주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소.”
김이 오르는 밥 국에 말아 넘기는 숟가락 그릇에 닿는 작은 소리. 그 시간에는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한때 그 침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왜 묻지 않을까?
오늘은 어땠냐고 힘들지 않았냐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침묵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이 다 닳아서 생긴 것이었다.
온종일 세상을 향해 외친 목소리는 저녁이 되면 밥 속으로 가라앉았다.
말은 밥이 되고 밥은 다시 내일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밥을 먹을 때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쉬는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자전거는 더 이상 마당에 서 있지 않다.
싸리문도 사라졌고 눈을 털던 빗자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눈이 조용히 내리는 날이면
나는 여전히 그 새벽을 듣는다.
사각사각—
툭, 툭—
그리고,
“생선 사세요.”
그 소리는 이제 어디에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는 점점 더 또렷해진다.
나는 밥을 먹다가 가끔 숟가락을 멈춘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밥 한 숟가락 그 온기가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갈 때 나는 알 것 같다.
아버지가 밀던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하루였다는 것을.
아버지가 팔던 것은 생선이 아니라 삶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그 삶을 받아먹으며 조금씩 오늘이 되었음을.
- 끝 -
첫댓글 아버지가 팔던것은 생선이 아니라 삶이었다는 것을! 가슴이 찡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내 나이가 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되어 보니 자주 그 삶을 생각하게 되네요.
항상 건강하게 뜻이 있는 멋진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