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합죽선合竹扇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04호(2020. 3.15)
홍종진 농공57-64 한국농촌연구원 고문
사회생활 하면서 필자가 두 번씩이나 가서 거주한 전주는 유서가 깊고 찬란한 문화가 있는 도시이다. 처음은 고등학교에 재직하며 교육자로서였고 또 한 번은 농업진흥공사에 재직하면서 기술인으로서 전혀 다른 입장에서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전주엔 한옥 마을, 태조 이성계 초상화가 있는 경기전(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을 비롯해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임진왜란 때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을 피난시킨 전주 사고가 있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30여 년 전에 농진공에서 일급 승진을 하고 전북지사에서 근무할 때이다. 냉온방 시설이 잘 안 돼 있어 선풍기로 더위를 견뎌야 할 때였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직원이 전주에서 유명하다는 합죽선合竹扇 하나를 주면서 더운데 쓰시라며 주고 갔다. 그 후로 수시로 사용하다가 퇴직하고는 까맣게 잊고 한 쪽에 두고 있었다. 집에서 버려야 할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그 합죽선이 눈에 띄었다.
내게 합죽선을 선물한 그 직원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얼굴만은 지금도 아련히 눈에 선하다. 휴대하기 편리한 부채라고만 알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당시에 직원이 내게 주며 ‘이 합죽선이 전주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늦었지만 그 직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합죽선은 질 좋은 대나무의 겉대를 얇게 깎은 살에 한지를 붙여 만들어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摺扇 접선)로 대나무의 겉대 두 쪽을 맞붙였다 하여 합죽선이라고 한다. 합죽선은 일찍이 고려 때에 외국과의 교역에는 물론 사신을 통해 중국 천자에게까지 바쳤던 공물貢物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영조 및 정조 시대에 이르러 합죽선은 그 화려함이 극치를 이뤘다고 전한다.
우리 현대사회에서 요즘 부의 상징으로 주택 규모나 자동차의 크기를 묵시적으로 평가해 주듯이 옛날에는 합죽선이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신분의 제약이 있어서 왕족은 부채 속살을 50개 했고 사대부 이상은 38개까지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합죽선의 속살이 40개인 것을 보니 상당히 좋은 합죽선을 받은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사대부 이상의 신분이 가질 수 있는 부채였을 것이다.
조선실록에 의하면 한지의 질이 가장 좋은 전주 감영에 선자청扇子廳을 두었고 매년 단오절에는 단오선端午扇이라 하여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합죽선의 명장을 2015년에 대한민국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로 김동식을 선자장으로 지정했고, 전주시 전북무형문화재 제10호로 조충익(단선) 방화선(태극선) 박인권(합죽선) 3명을 선자장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합죽선은 예의를 중시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상대방의 집을 방문할 때는 부채로써 얼굴을 가리고 주인을 청해 여름철에는 주인에게도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었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에서도 이 합죽선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려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합죽선은 손잡이 부분이 정교하여 평상시에도 부채를 잡고 있으면 손바닥의 지압점指壓占을 골고루 눌러 건강 유지에도 도움을 준다.
현대사회에서는 날로 발달하는 과학 기계 문명에 밀려 이 합죽선의 실용가치가 덜 해지긴 했지만 합죽선의 진가는 그 실용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채에 어려있는 전통적인 예술성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선비들이 합죽선 위에 그렸던 아름다운 시화詩畵의 그윽한 묵향墨香은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