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식적인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그들은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하였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자주하고 안식일도 틀림없이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기는커녕 책망을 많이 하셨습니다. 왜 금식기도를 많이 하고 주일을 잘 지켰음도 응답받지 못하고 책망만 받았을까요? 그들은 이기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그 원인이였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금식하고 형식적으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은 어떤 금식인가를 배우심으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회개하고 진실되게 총동원전도주일을 섬김으로 진정한 금식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영혼들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식의 목적과 의미를 모르고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크게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외치라고 하십니까? 1절을 보시면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과 죄를 크게 외쳐 알리라고 하십니다. 나팔같은 목소리로 크고 담대하게 그 백성들의 허물과 죄를 깨우쳐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과 죄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면.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나와 율법을 듣고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다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이처럼 열심히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왜 주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들은 그들의 금식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얼굴색을 바꾸며 하나님께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금식을 받아주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의 금식은 신앙의 회복을 위해 금식일이 지정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금식은 올바른 마음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영혼만을 위한 이기적인 금식이었습니다. 3절하반절을 보시면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그들은 금식일에 하나님 앞에 애통해하며 지은 죄를 회개하며 상한 마음을 쏟아 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금식하면서 힘들다고 방에 들어가 인터넷을 즐기거나 배고프다고 낮잠을 잤던 것입니다. 또 금식일에도 탐욕을 부려서 직원들이나 일꾼들에게 온갖 일을 시켰습니다. 심지어는 금식을 하면서도 감정이 상한 일이 있을 때는 서로 싸우는 일도 일어났습니다(4). 그들에게 있어 금식은 안식일과 더불어 중요한 신앙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앙의 진실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금식하는 모양만 있었던 것입니다. 음식을 굶으며 주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모습은 아주 형식적이였고 자기영광을 구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5절을 보시면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아무리 외적으로는 슬피 울며 금식하는 것처럼 모양을 낸다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 그것을 참된 금식이라 하겠으며 어찌 그것을 여호와께 받아드려질 날이라 하겠느냐?”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들이 지고 있는 모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입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서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영혼들을 돌보고 섬기는 목양사역을 말합니다. 사람이 금식일을 정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육체의 욕망을 절제하고 죄를 회개하므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는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영혼들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금식이 자신의 영혼만을 돌보는 것으로 그치고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 고통하며 신음하는 다른 영혼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그 금식을 기뻐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린 자, 유리하는 빈민, 헐벗은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굶주린 사람에게 양식을 주며, 나그네를 집으로 맞아들여 식사를 섬기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며, 또 우리 형제, 자매들의 아픔과 고통을 돌보고 섬기는 것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풍성하게 축복하셨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으로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가 헐벗고 먹을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약 2:15-17)?
이처럼 금식의 본질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행위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금식기도를 자주하고 40일 금식기도를 몇차례 했다 하며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금식뿐 아니라 헌금, 예배, 구제 모든 은혜의 수단을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은밀하게 금식하고 은밀하게 구제하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금식, 총동원주일에 영혼이 주린 자들, 유리하는 가난한 심령들, 헐벗은 심령들을 초대하는 금식을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참된 금식을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의 빛이 새벽 같이 비취게 됩니다(8,10). 8절을 보시면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새벽빛은 돋는 해가 어둠을 헤치고 찬란히 솟아오르는 빛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된 금식을 할 때 새벽빛 같이 비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밝은 빛으로 계시하여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새벽에 비치는 찬란한 빛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치유가 급속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풍족한 물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직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고독과 불안, 삶의 허무와 무의미, 불면증과 신경쇠약, 우울증 등으로 영육이 병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되고 진정한 금식의 삶을 살 때 급속한 치료가 이루어지고 건강해집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금식을 한다면 부를 때에 응답하겠고 부르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 대답하시며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셋째로,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이 됩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11) 우리는 무지하여 어떤 길이 진정 행복과 번영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줄 알지 못하고 죄의 길, 자기의 길을 고집하여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 항상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시며, 우리 뼈를 견고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뼈가 견고할 때 우리는 건강하며, 건강할 때 우리는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또한 우리의 삶이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물 댄 동산을 생각해 보면 많은 초목들이 자라나 동산을 푸르게 뒤덮으며 각양각종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과일 나무들은 철을 따라 맛있는 과일들을 풍성하게 맺습니다. 그 동산에서 나비들은 너울너울 춤추며 새들은 지저귀며 짐승들은 한가롭게 풀을 뜯고 과일을 따먹으며 즐겁게 뛰놀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물댄 동산 같은 사랑의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고통하는 영혼들을 돌보고 사랑으로 섬기는 참된 금식을 할 때 우리의 삶은 물 댄 동산 같이 될 것입니다. 아멘! 우리의 인생은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입니다. 물이 풍성한 샘은 목마른 영혼들에게 생수를 공급하여 마시게 합니다. 생명을 소생시키며 풍성하게 합니다. 사랑으로 베풀고 섬기는 사람은 모든 은혜의 샘물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될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하늘의 은혜와 축복의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 모든 축복과 은혜의 근원이 됩니다.
넷째로, 자녀들이 영적으로 바로 세워져서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회복하게 됩니다. 12절을 보면.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죄된 세상과 거짓된 사단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며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의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 이 시대의 교회, 이 사회, 이 나라를 파괴하며 무너뜨리며 황폐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된 금식을 하는 자들로 그 자녀들도 반듯한 신앙으로 세워주셔서 우리 자손들로 하여금 황폐해지고 무너진 다음세대를 다시 쌓고 세우며 보수하고 수축하는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계속해서 오래 황폐하였던 곳들을 다시 세우고 회복하는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이제 하나님은 참된 금식에 이어 안식일을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어떤 축복이 임하는가 말씀하십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백성으로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는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삶의 표식입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소망이 무엇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초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날로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자기의 오락이나 정욕을 좇는 길을 행하지 말며 자기 쾌락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서 참되고 진정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땅의 높은 곳에 올리시고 조상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번영과 축복과 승리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참된 금식을 하며 주일을 거룩히 지켜 하나님을 예배하므로 주님 주시는 축복들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을 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심으로 새벽빛으로 비침받아 치유받으시고 물 댄 동산 같이, 끊이지 않는 샘물이 흐르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