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아버지에게서 "인생은 오렌지"라는 말을 듣습니다.
평생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했던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드디어 그 의미를 묻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랗게 대답하지요. "내가 그 뜻을 알게 뭐야."
마이크 피기스 감독이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 이어 만든 <원 나잇 스탠드>에서 에이즈로 죽어가던 찰리가 친구 맥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어쩌다 하룻밤 관계를 맺게 된 두 기혼 남녀가 우연히 다시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작품이지요.(...저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별로였지만 이 내용은 무척 공감이 갑니다... 이 글을 쓴이도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얼핏 터무니없는 코미디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그 말 속엔 인생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퉁명스런 대답으로 아들은 결국 아무런 가르침도 얻지 못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액센트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는 부사구에 놓여 있습니다.
이미 살아버린 기나긴 세월 속에서 아들 역시 '오렌지'의 뜻은 몰라도, 인생의 의미를 저절로 체득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인생은 오렌지'라는 경구 속에서 '오렌지'가 무슨 뜻인지를 묻는 건 우문입니다. 오렌지는 사실 다른 어떤 단어로도 대체될 수 있는 허사(虛辭)에 불과하니까요. 오렌지의 자리에 사과나 탁자, 강아지나 느티나무를 넣어도 뜻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 말은 "인생은 인생"이란 동어반복의 문장과 같은 셈이지요.
동어반복의 문장은 얼핏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말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
(그러나...)역설적이게도 제게 삶의 의미를 가장 통찰력 있게 전달해 주는 말은 동어반복적인 문장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무엇무엇이다"라고 갈파하는 것은 대부분 초점에서 비껴간 말이기 쉽습니다. 인생은 무엇무엇이라고 한 문장에 그 의미가 축약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개개인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인류의 지혜가 응집된 인생에 대한 미사여구의 총론이 아니라, 수없이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바보같은 각 사람들 인생의 각론인 것입니다.
"인생은 인생"'이란 동어반복의 심드렁한 말 속에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거대한 긍정이 깃들여 있습니다. 논리학에서 가능한 모든 상황하에 참인 것이 동어반복의 문장이듯, 이 말은 모든 인간들의 개별적인 경험을 인생이라는 대전제 아래 끌어안아 용인하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의 삶이든 못난 사람의 삶이든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는 거지요.
사람들은 결국 그 동어반복의 말 속에서 저마다 의미를 찾아내 자기 삶을 긍정할 수도 있을테지요. 인류가 신봉해온 경전들이 많은 부분에서 동어반복의 가르침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동어반복에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포용력과 통찰력이 담겨 있으니까요.
설득력 약한 우연과 아이러니가 겹치는 <원 나잇 스탠드>는 사실 잘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일종의 깜짝쇼처럼 관객을 놀라게 하는 데에만 유효한 라스트 신은 특히나 실망스럽지요. 그런데도 그 황당한 주인공들의 삶을 못이기는 척 보아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삶이 어떤 것으로든 긍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