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1. 14. 영양장 가던 날.
안동장날과 같은 2일, 7일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4,9일 장이라고 한다.
당초 계획엔 영양은 설 지난 후 1월 하순이나 2월 초순에 갈 마지막 여정으로 잡혀 있었다.
안동에서 가까운데도 어쩐 일인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데가 영양이다.
버스는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있고 송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전날 설 제사에 쓸 양초를 사러 구시장에 있는 만물상점에 들어갔다가
물어보니 안동초등학교 건너편에서 영양행 버스를 탈 수 있단다.
정말 반가운 정보였다. 안 그래도 시외버스터미날이 시 외곽으로 이전되어
영양장 갈 때 영 불편하겠구나 하고 내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내일 버스에서 내려서 바로 길 건너에서 타면 된다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랫만에 내가 대견스럽기 까지 했다. 지 잘 났다고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별 수 없이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느라 새벽부터(내게는 7시는 새벽이다.)
헐떡거렸을 테니까 말이다.
마음이 겸손하면 복이 있나니 육체 노동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나니
아는 길도 물어가면 지름길도 절로 나타나게 되리니.
원삼농협 앞에서 6:50 안동행 첫차를 탔다.
현내에서 넘어와 외하로 향하는 차를 무조건 잡아 탔다.
새벽 칼 바람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어서 상무슴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차를
기다릴 재간이 없었다.
상무슴에 들렀다가 내려온 버스는 다시 톳갓으로 향했다.
톳갓으로 올라갈 때, 내려올 때 유심히 살펴보니 동진네 집에는 벌써 불이 환하다.
농사철에도 새벽 1,2시까지는 잠이 안와 새벽 늦잠을 자게 된다더니
이 한가한 겨울 새벽에 벌써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하니 어인 일인지 의아스럽다.
아마도 동진이는 아직 잠에 빠져 있을 거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동진이 부인이
일어나서 서방님 해장국을 끓이고 있기 쉽상이지 싶다.
동진부부와 아이들. 때로 그들이 부러워진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그들의 삶의 모습이,
언제나 좌중에 웃음을 선사하는 동진이의 위트가 아닌 풍부한 유머감각이.
통툭골을 벗어난 버스는 달랑 나와 처자 한 사람을 태우고 쏜살같이 시내로 내달렸다.
안동초등학교 앞에서 한 참을 기다려 마침내 8시 10분에 영양행 경북여객에 몸을 실었다.
승객은 나와 할아버지 한 분, 중년의 남녀 3명과, 꼬깔 모자와 머플러로 단장한 늘씬한
아가씨 한 사람 해서 모두 여섯 명이었다. 기사에게 물으니 진보를 거쳐 가는 데 1시간 2,30분
걸린다고 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를 잡고 베이글 빵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했다.
가방에 넣어뒀지만 날씨가 워낙 차 빵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무소가죽처럼
질겼다. 뜨끈뜨끈한 커피와 함께 먹으니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마뜰을 지나 임하댐 다리를 지나는 버스 차창에 한 겨울의 붉은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에서는 아직 사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마을어귀에
수령이 수백 년이나 되어 보이는 늙은 느티나무만 홀로 겨울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순간 밭고랑에 길게 드리워진 느티나무 그늘의 아름다운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 특이한 풍경을 렌즈에 담고 싶은 열망이 가슴속에서 일렁거린다.
하고 싶은 일, 하면 즐겁고 행복해지는 일들을 천년만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오늘을 살라고, 어제는 흘러갔고 내일은 불확실하니 그저 지금,
오늘을 살라고 책에서는 외쳐댔지만, “뭐 그럴려고.”, “앞으로 멋진 날들이 창창하게
많을 텐데 무단히 겁주기는”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적도 많았다.
이번에도 짐을 꾸리면서 사진장비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한 2,3년전까지는 몇 번이나 풍경사진을 찍어와 리터칭 작업을 하려고 사진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실망과 상실의 쓰라림만 밀려왔다.
50,60컷에 한 장 정도는 썩 괜찮지는 않지만 구도가, 색상의 밸런스,
빛의 순간 포착이 뭐 그런대로 괜찮게 생각되는 사진을 한 장 정도는
건져야 하는데 번번이 꽝이었다.
눈이 문제였다. 도무지 미세하고 오묘한 색상과 빛의 조화를 잡아내지 못했다. 괜찮아
보이는 풍경도 마음속의 프레임에 넣고 셔터를 누르고 나서 컴퓨터 모니터에서
확인해보면 영 아니었다.
한 2년전에 영화관에서 3D 영화를 볼 때는 못 느꼈는데 최근에 3D 영화를 보는데 안경을
끼고 보나 벗고 보나 별 차이가 없어 당황스러웠다. 눈이 피사체의 정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이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 다는 게 문제다. 슬프지만
좋아하는 영화를 앞으로 2D로만 볼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예전엔 몰랐다.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의 영롱한 풍경을 담아내는 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눈에 이상이 생기면서 상실하게 되는 것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항상 더 좋고 멋진 것들을 가지려고 갈망하고,
자주 허영심의 늪에서 허덕이며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늘 목말라했다.
이제 내 눈은 더 이상 빛의 미세한 영롱함을, 꽃의 환희로운 빛깔을, 새들의 맑은
눈동자를, 우아한 나비들의 신비로운 기하학적 무늬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완전한 상실은 아니지만, 간절하지만 다시 가질 수 없는 상실이다. 젊은 시절부터
즐겨왔던 취미 - 풍경사진 촬영의 기쁨이나 영화감상의 즐거움 – 들은 상당부분
그 온전한 행복을 누리기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상실은 신이 내게 준 또 다른
선물인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예의도 모르고 이 아름다움을 누리게 해준 신에
대한 감사할 줄도 모르고 살아온 데 대한 신의 안타까움이 상실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오랜 동안의 헤매임을 통해 요즘 아주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풍경사진 촬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도 안타깝고
때로 수용하기가 너무 힘든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시간을 보내고 돈을 쓰는 것
또한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위해서다.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돈이라 하더라도 그 쓰는
용도는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이 것에 누구는 전혀 다른 저것에 돈을 쓰고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 한다. 그것은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나 가치관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과 다르면 싫어하고 자신의 것을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때로는 비난하고 배척하기도 하면서 타인에 대한 존중이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삶의 예의마저 팽개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누구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가슴에 사랑과 동정심만 있으면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주 고개를 내민다. 그때마다 나는 불편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
사진촬영 재미의 상실은 때로 나를 많이 화나게 만든다.
아날로그 카메라를 쓸 때는 인화비용이 만만찮아서 늘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되고
현상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될 때가 많았는데, 이제 디지탈 카메라를 사용하니
대용량 메모리 구입 등 초기비용만 감수하면 원 없이 셔터를 누르고 리터칭하는 재미에
푹 빠지는 호강을 누릴 수 있는데 정작 눈이 발목을 잡다니 ? 억울한 생각이 들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인화된 사진과 현상된 필름에서 괜찮아 보이는 풍경을 골라내어 스캔해서
디지탈 이미지화와 리터칭 작업을 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접목하는 작업을 하면서
그 상실감을 어루만지며 나를 위로하고 사랑하려고 애를 쓴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할 일과 하늘이 해결할 일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인생은 보다 아름답고 충만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그런 지혜가 너무 부족하다.
이 나이가 되어 겨우 다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또 함부로 심판하려 하지 않는
생활태도는 많이 좋아진 듯 하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하늘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데 오십년이 훨씬 더 걸렸다. 지금도 가끔씩 가슴 뛰는 카메라
셔터음에 한없이 빠져보고 싶고 매혹적인 풍경이 가져다 주는 그 환희로운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열망이 불끈불끈 치솟곤 한다.
그리고 이내 밀려오는 까마득한 상실감, 그러면 나는 또 억지로라도 감사하는 연습을 한다.
생각들이 이리저리 얽혀 헤매다 보니 버스는 어느새 진보에 도착했다.
한 50분 쯤 달려온 거 같다. 세 사람이 내리고 운전기사가 차비를 걷는다. 4300원.
버스비가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면서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돈을 벌지 못하고 살아온 지가 반십년을 훌쩍 넘어서다 보니 뭔가 굉장히 싸게
산거 같을 때는 횡재한 것 같아 무척 기분이 좋아질 때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5분쯤 머물다가 버스는 대여섯 명의 새 손님을 태우고 다시 달린다.
높고 낮은 산과 오밀조밀한 들을 지나고 개천을 건너 쉬임 없이 달리더니 마침내
버스는 목적지인 영양읍에 들어선다. 대충 시간이 9:30
시골 냄새가 물씬 나는 허름한 정류장을 나와 시장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쌀쌀한 날씨, 내다 팔 장꺼리를 이고지고 장터로 향하는 장꾼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본격적인 장마당이 서자면 한두 시간 지나야 될 것 같다.
좀 높은 데 서서 보면 한 눈에 들어올 만큼 영양읍은 산으로 둘러 쌓인, 조그맣고 볼품이
없는 느낌이, 가엾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보이는 3.4층 건물, 대부분이 단층이거나 이층건물이었다.
번듯한 건물 하나 없고 모두가 옹색하고 꾀죄죄한데다가 생기마저 없어 보였다.
이 또한 서울내기로서 나의 못난 우쭐거림이나 오만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느낌일 것이다.
아직 별로 볼 것도 없고 해서 두리번거리는 데 마침 길 건너편에 다방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쳐다보니 “○○다방” 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70년대 초 서울로 올라와 학교 다닐 때 살던 동네 사거리에 있던 다방 이름과 똑 같다.
반가웠다. 그때 이름이 조 뭐라고 하는 긴 머리를 한 청순한 아가씨에 삼백예순날 마음을 뺏겨
하릴없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기억이 떠올라 멋 적어진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신문에 코를 박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더니
“자야 손님 왔다.”고 외치고는 다시 신문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내 가랑가랑한 아가씨가 애교가 자르르한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를 외치며 다가오더니
스스럼 없이 내 손을 잡아 끌어 구석자리에 털석 주저 앉히더니, 옆에 달라붙어 앉는다.
“날씨 무지 춥지예.(이 아가씨 대군가?)”
“예. 춥네요.”
“저는 모닝커피 한잔 사주시면 되고, 손님은 춥고 하니 쌍화차 드세요.”
“……………!?” 지꺼부터 시키고 내가 마실 차도 아예 지가 정해준다. 황당하다.
차가 하도 안나오길래 다른 다방에서 주문해서 가져오나 하고 있는데
완전 거구의 아가씨가 양 가슴에 우리동네 앞산만한 산봉우리를 매달고 오더니
쌍화차 한 잔과 커피 한잔, 그리고 엽차 한 잔을 내려놓고는 내 옆에 척 앉는데
의자가 꺼지는 줄 알았다.
세상에 커도 커도 경우가 있지, 이건 뭐 조선시대 왕릉 보다 더 컸다.
생활하는 데 얼마나 불편하고 힘이 들까 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지껀 부풀어 오른 원초적인 욕망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내내 두 눈이 아가씨 가슴에서 잠시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뭇 사람들로부터 자주 오해를 받지만 이럴 땐 선글라스의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생긴 것도 쬐끄마한 게 쌍화차 한 잔으로 자신의 풍성한 가슴을 원 없이 감상하는 게
영 못 마땅했던지 아가씨는 일어나 가림 막 쳐진 홀로 들어가버렸다.
오늘 다시 세상에는 늘 좋기만 한 것도 항상 나쁘기만 한 것은 별로 없다는 진리를
실증적으로 체험했다.
한 삼, 사십 분 오롯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완전히, 언제나 어디에서나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 보통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적인 정도와 한계의 차이의 문제다.
나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헤치는, 낙인효과(烙印效果, labeling effect)!
그 유혹에 나는 얼마나 빠졌었고, 또 얼마나 허우적거릴 것인지?
차 값으로 오 천원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
첫댓글 고른비님 영양 방문기 다방아가씨 기억에서 잊지못하겠어요 고향의 정겨움 느겼습니다 수비면도 있던디
물맑고 일월산 위로가면 봉화고 아래로 가면 청송이고
영양 저도 수십년전에 몇번다녀온 고장입니다 바로 위 형이 경찰서장으로 승진하면서 첫번째 영양서장으로 부임해서 몇번 다녀왔습니다
읍치고는 엄청 작은 도시였어요 정씨 집성촌도있고 달기약수도 있고 일월산 계곡이 기억에 남는곳이였어요
회장님은 좀 특별한 인연이 있었네요.
한 때 형님께서 영양 일원의 치안을
책임지셨군요.
일월산.
계룡산 만큼이나 기가 센 산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의 안식처였지요.
겉은 반지르르하지만 속살은 빠시락한
도시 삶에 지친 사람들이 찾게 되는
청정지역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