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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인터넷에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미주현대불교> 잡지사에 감사드립니다.
뜻으로 본 영화 이야기
셋째 마당: 〈쉰들러 리스트 (Shindler List)〉, 〈패치 아담스(Patch Adams)〉
들어가는 말
전쟁 같은 경쟁 속에서 참 세상 살기 각박하다는 말이 많다.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상 소식을 접하는 인터넷, 신문, 책, 잡지 등이 연일 토해내는 뉴스란 게, 주로 치열한 정치적 다툼과 경제적 어려움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매체도 잘 선별해서 접하고, 주위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의외로 세상에는 선한 분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처음 1980년대 말에 인연을 맺어 중간에 한 10년은 서로 소문으로만 알고 지내다 최근 2년 전부터 가끔 서로 연락하고 서너 달에 한 번은 다른 지인들과 함께 만나 음식과 약간의 술을 나누며 이 얘기 저 얘기 터놓는 한 친구도, 보살 같은 사람이다. 다행히 이 친구 이야기가 최근 출간된 어느 시인이 지은 『당신을 사랑 합니다』란 책에 소개되어 있어, 이 친구의 착하디착한 면모를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책에서는 시인의 글을 통해 친구가 독백조로 고향인 충청도 사투리로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 한다. 그런 이야기 중에, 중학교 졸업하고 공장에서 오랫동안 가구 기술을 배워 상당한 장인의 경지에 오른 이 친구가, 마침내 자기 사업을 하다 망한 처지에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친구가 자기 아내와 대화하는 장면: ... 글쎄 아침 밥상머리에서 내가 분명히 말했거든요. “쌀 좀 퍼놔” 이렇게 말이유. 근디 들은 척도 안 해유. “내 말이 말 같지 않어? 쌀 좀 담아놓으라니께.” “전기세도 밀렸는데, 무신 독립운동이나 하는 사람처럼 큰소린, 무슨 얼어 죽을 놈의...... .”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궁시렁거림서도 쌀은 주섬주섬 비닐봉지에 담데유.
친구의 독백: “...우리 공장 옆에서 일하던 아지메 공장이 부도가 났거든요. 식구들 끼니도 못 챙기는 눈치여유. 몰랐으면 지나갈 텐디, 알고는 모른 척 못 하겠드만요. 그 아지메헌티 그랬지유. 돈을 조금 해줄 테니께 점심 좀 해달라고요. 식비 조로 좀 해주면 그 집 식구 입은 어찌어찌 때우지 않겄는가 생각한 거쥬......”
필자로서 참 친구의 삶이 새삼 가슴 찡하게 와 닿았다. 앞서 언급한 책에는 위에서 인용한 필자의 친구뿐만 아니라 우시장 아줌마, 목수, 잠녀, 택시운전사, 농사꾼, 노동운동가, 반찬가게 할머니, 서점주인, 이주 노동자 등등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같이 열심히 땀 흘려 사는 분들이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다가 심신이 지치고 힘들어도 어려운 남을 도와주는 인심은 결코 잊지 않는 분들이다. 이런 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에게 감동과 아울러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게 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개인적으로, 나아가 사회적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한다. 특히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의 학생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는, 인터넷을 필두로 한 전자적 정보화 시대를 살면서 결여되기 마련인, 내면의 성찰과 사람 간의 따뜻한 소통의 자양분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경우도, 책이라는 형태에 담길 때 못지않게 감상자에게 공감과 연민의 힘을 배양시켜주고, 나아가 생활 속 실천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어쩌면 영화가 책보다 더욱 많은 이에게 효과적이고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본 연재에서 이번 달에 다루는 영화로, 〈쉰들러 리스트〉, 〈패치 아담스〉, 이렇게 두 영화로 골라보았다. 그간에 너무 “부처님 가라사대,” “예수님 가라사대” 식의 영화를 다루었다면, 이번 연재에서는 결함도 많고 약점도 많이 드러내는 가운데, 선행을 실천하고자 하는 범부들의 이야기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둘 다 실화인데 〈쉰들러 리스트〉의 경우, 역사적 인물에서 소재를 택했고 서양에서는 아주 예민한 주제를 다루었음인지 각색을 거의 하지 않았다. 〈패치 아담스〉의 경우는 실존인물 이야기를 좀 각색해 만들었다.
2. 〈쉰들러 리스트〉
이 영화의 주인공 쉰들러는 경영자로 등장하지만 사실 똑똑한 유대인에게 경영은 일임해놓은 채, 자신은 기업 이미지 관리를 하면서 여성들과 자유롭게 연애하는 플레이보이다(하긴 불교의 대보살로 손꼽히는 용수보살께서도 발심하기 전에는 궁녀들과 연애행각을 벌이다 발각되어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지 않는가?). 쉰들러는 로비와 뇌물의 명수이고 사람 다루는 수완이 뛰어나다. 빈손으로 폴란드에 와서, 돈이 있으나마나인 유대인 투자자들의 자본을 유치해, 망한 군수품 공장을 일으켜 세워 큰 부자가 되는 수완을 발휘한다.
이런 쉰들러는 아내가 아닌 현지처와 말을 탄 채, 게토가 폐쇄되고 유대인들이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면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인현장을 목도하고도 유대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크지는 않다. 쉰들러는, 게토에 몰래 남은 유대인들을 색출해 권총으로 처형한 뒤 휴식삼아 피아노로 모차르트의 작품을 쳐대는 독일 장교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회사 경영을 도맡아 하는 유대인 부하 직원이 불구자 동포를 살리려다 발각되자, 독일군으로부터 의심을 사게 된 쉰들러가 부하 직원에게 호통을 친다. “사람은 어차피 죽어. 그런데 ‘살려면 쉰들러에게 보내라’는 소문이 나게 하면 어떡해. 내가 위험해진다구.”
이런 쉰들러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 집단 수용소에서 유대인 1명이 탈출을 시도하자 수용소장 괴스가 동일 막사를 쓰는 유대인들을 집결시켜놓고 임의로 25명을 권총으로 즉결 처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다.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을 활용해 좀 더 적극적으로 유대인을 구하고자 나선다. 뇌물을 쓸 뿐만 아니라, 가끔 수용소장을 설득하고 감화를 주어 아주 일시적이나마 수용소 내 유대인들을 좀 더 인도적으로 대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수용소 소장이 실제로는 좋아하면서도 나찌적 관점에서 유대인이 인간일 수 없으므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유대인 하녀를 구출해 낸 것도 바로 쉰들러다. 처음에는 값싼 노동력을 얻는 데 관심이 더 많았던 쉰들러, 그가 마침내 최대한 다수의 유대인들을 구해내려는 사명을 띤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쉰들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군수공장을 세운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돼 독가스에 희생돼 태워 사라질 1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이 공장에 고용하는 조건으로, 쉰들러는 수용소장에게 엄청난 몸값을 지불한다.
한 여름의 한증막이 된 체코행 기차에 탄 유대인들. 수용소장과 독일군 장교들이 쉰들러의 지혜로운 설득에 넘어가, 기차 속 유대인들은 소방호스를 통해 뿌려지는 물로 잠시나마 목을 축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독일군 장교들의 미움을 산 쉰들러는 급기야 감옥에 수감까지 된다. 감옥을 나온 이후에도, 쉰들러는 유대인들을 사실상 동포나 가족으로 대하며 그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행정 착오로 여성노동자들이 원래 행선지인 체코가 아닌 아우슈비츠로 잘못 이송돼 꼼짝없이 죽게 된 상황에서, 쉰들러는 악착같이 아우슈비츠로 찾아가 그들을 모두 구해낸다. 탄피를 만들어내는 체코의 공장에서는 가능하면 불량탄피를 만들고 좋은 탄피는 하청을 통해 조달하는 식으로, 쉰들러는 유대인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공장 직원 전체가 참다운 노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 애쓰기도 한다. 포도주를 주며 유대교 종교의식까지 거행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
전쟁이 끝난 후 쉰들러는 나찌당원으로 전범이므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과응보에 의해 영화의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이 연출된다. 유대인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려고 차에 올라 막 출발하려는 쉰들러를 둘러싼다. 노동자들은 쉰들러가 체포될 경우 연합군에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그가 자신들에게 베푼 선행을 적고 서명까지 한 편지를 건네준다. 유대인 노동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 “누구든지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자이다”라는 히브리 탈무드의 글귀를 새긴 반지도 쉰들러에게 준다. 쉰들러는 울부짖으며 너무 돈을 마구 썼고, 훨씬 더 많은 유대인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그리 못했다고 참회한다. 또한 쉰들러가 방금 받은 반지로 한 사람의 유대인을, 타고 갈 자신의 자동차로 열 명 이상의 유대인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통곡하자 유대인들이 그의 주위를 감싸며 외호한다. 처절한 쉰들러의 외침. “더 많이 구할 수도 있었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 장면은 빠르게 현재로 되돌아오고 그간의 흑백영화가 컬러 영화로 바뀐다. 쉰들러 공장의 실제 생존자들과 영화에서 이들의 역할을 했던 배우들이, 50년 후 쉰들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무덤에 모였다. 생존자들이 그의 묘비를 지날 때, 화면에는 두 줄의 자막이 뜬다. “현재 폴란드에 남아있는 유대인은 4000명이 안 된다. 그런데 쉰들러 유대인들의 후손은 6000명이 넘는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이 영화가 미친 파급효과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자못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1996년 스위스의 10월, 크리스토프 마일리(Christoph Meili)는 방금 영화관에서 〈쉰들러 리스트〉를 보았다. 마일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이 한 명도 없음을 깨닫는다. 현재 스위스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극소수이다. 석 달 후, 마일리는 자신이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취리히의 한 은행에서 의례적인 순찰을 돌고 있다. 마일리는 종이뭉치가 쌓여있는 방을 지나다가 낡은 책이 가득 찬 두 개의 큰 상자를 발견한다. 그 전에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다. 마일리는 상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책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기록물임을 발견한다. 마일리는 책 한 권을 옷 속에 숨긴 채 순찰을 마친다. 책을 집으로 가져와 좀 더 자세히 보다가, 이것이 베를린에서 몰수되어 나치로 넘어간 유대인의 재산 목록을 정리한 서류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일리는 어떻게 했을까? 마일리는 〈쉰들러 리스트〉에서 나치가 유대인의 귀중품을 강탈하는 장면과 쉰들러가 한 일을 기억했다. 마일리는 후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일리는 정말 뭔가를 했다. 다음 날 쓰레기더미 속에서 마일리는 너무 커서 문서 파쇄기에 들어갈 수 없었던 두 개의 원부를 발견했다. 마일리는 취리히의 한 신문사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마일리는 다시 한 유대인 문화 단체에 연락을 취했지만, 그들은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다이너마이트예요. 손대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마일리는 마침내 어렵사리 작은 유대인 신문사를 찾아갔고, 그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이야기는 온 세상으로 퍼졌다.
곧 스위스 사람들은 마일리를 이스라엘 스파이 혐의로 고발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일리의 생명을 위협했다. 스위스 은행은 국가기관이며 신성 불가침한 곳으로 여겨진다. 마일리가 은행의 비밀을 ‘훔쳤다’는 혐의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마일리의 아버지까지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미쳤니? 왜 유대인을 돕는 거냐?” 아이러니하게도 마일리는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여 받아들여진 최초의 스위스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으로 인해 스위스 은행들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 및 유대인 단체들과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환된 총액은 12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10년이나 걸려 이 영화를 만든 유대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영화 이야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 상상이라도 했을까? 영화의 힘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이 영화는 주제가 무겁고 음악도 장중하다(영화 도입부에 영화 〈글루미 선데이-우울한 일요일〉에 나온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화면은 의도적으로 흑백으로 찍었고, 맨 끝 장면에서 현실로 돌아와 배우와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무덤을 찾을 때 잠시 컬러로 바뀐다.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고 무거운 내용이라 청소년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어떻게 정의와 선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따라 배우기 위해 권할 만한 좋은 영화다. 현실적으로 보아, 중학생에게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고 가능하면 고등학생 이상에게 알맞다고 여겨진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출세작 중 하나인 이 영화는, 흥행성이나 작품성으로 보았을 때 일반 성인들이 결코 실망할 영화가 아님은 물론이다.
3. 〈패치 아담스〉
역사적 인물인 쉰들러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쉰들러 리스트〉라면, 〈패치 아담스〉는 현재 실존해 의사로서 활약하고 있는 인물에 관한 영화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온 헌터 아담스(Hunter Adams: 로빈 윌리엄스 분)는, 기존 정신병원의 환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서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다람쥐를 무서워하는 환자와 즐겁게 놀아줌으로써 그의 병을 약이 아닌 것으로 치료한다. 헌터 아담스는 ‘정신병’에 걸린 A환자가 아닌 정신병에 걸린 ‘A환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헌터 아담스는, 정신 병원의 동료 환자로부터 영감을 받고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의미의 ‘패치(PATCH)’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패치 아담스’로서 새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꿈은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까지 치료하는 진정한 의사의 길. 2년 후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한 괴짜 의대생 패치는, 3학년이 되어서야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빛나는 아이디어와 장난기로 환자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치유하려고 환자들을 몰래 만난다. 이 사실을 안 학교 측이 몇 번의 경고 조치를 내리지만, 패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 위의 허름한 집을 개조해 의대생 친구들과 함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운다. 영화에서는 패치가 열심히 공부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실제로는 환자들과 같이 놀고, 정을 주면서도 성적이 거의 톱을 유지할 만큼 공부도 잘한다. 기본 과정도 잘 이수하고 봉사활동도 잘 하는 모범적인 의대생이 패치인 셈이다. 그러나 패치는 의사면허증 없이 진료행위를 한 것이 학교 측에 발각되어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자신과 진실한 사랑을 나누던 동급생 카린(Carin: 모니카 포터 분)이 정신이상 환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겪게 되자, 패치는 비탄에 빠진다.
전경이 탁 트인 높은 언덕에 서서,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고 심지어 신에게까지 회의의 시선을 보내며 몸부림치는 패치에게 날아드는 나비 한 마리! 패치는 자포자기 심정에서 벗어나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다시 의사의 길에 매진하고자 의욕을 불태운다. 그러나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윌컷 학과장에 의해 퇴학처분을 통고받자, 패치는 주립의학협회에 제소한다. 다시 기운을 차린 패치는, 전통적인 의사협회와 학장과의 제소법정 대결에서 승리하고야 만다. 퇴학처분을 놓고 벌어지는 제소법정에서 페치가 토해내는 연설은 이 영화의 압권으로, 영화의 주제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패치는 역설한다. “의사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존재다. 성적이 흰 가운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위원회는 학칙을 어겼지만, 패치의 열정과 학업 성적을 인정하여 제소를 받아들인다. 졸업식에서까지 엉덩이를 까대는 익살을 부리며 자신의 신조와 의학적 방향을 확고히 견지하는 패치가 드디어 사회로 나간다. 마지막 영화의 멘트. “그 후 12년간 패치는 의료 행위를 계속했고, 1만 5,000명 이상의 환자에게 무료 치료는 물론, 어떤 의료 사고도 일으킨 적이 없다고 한다. 패치는 버지니아 서부에 105 평방미터의 땅을 구입, 현재 게준트하이트 병원을 건설 중에 있다. 지금까지 1천여 명에 이르는 의사들이 그와 합류하기 위해 대기 중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구글 인터넷 사이트에서 검색창에다 ‘Patch Adams Review’를 쳐서 전문가들보다는 일반 독자들의 댓글을 살펴보고 몇 가지를 뽑아 번역해 보았다. 먼저 아주 대조적인 성인 두 사람의 영화평이다.
“이 영화의 주연을 다른 배우가 맡았으면 아마 내가 이 영화를 더 좋아했을지 모른다. 로빈 윌리엄스는 그가 연기하는 인물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과거 다른 영화에서 그의 코미디를 꽤 많이 보아 왔다. 이 영화는 의료제도를 묘사하는 데서 너무 지나치게 흑백논리에 입각해 있다. 패치와 같은 부류는 전적으로 선하고, 그들 이외의 권위에 사로잡힌 나쁜 의료인들도 만일 좀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패치의 제소로 열린 위원회에서 연단에 도열해 앉아 있는 어둠침침하게 그려진 위원들의 얼굴을 보라. 흑백논리의 극치다. 그러나 정작 나쁜 놈들은 패치 같은 놈들이다. 의료물품 절도(영화에서 패치와 동료들은 무료 시술을 위해 의료물품을 바깥으로 빼 돌린다-필자)를 이 영화는 눈감아 주고 있다. 이 영화는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 의도적으로 불복종하는 것도 눈감아 준다. 또한 면허 없이 의료 시술하는 것조차 마치 이 시대의 질서인 듯하다.”
-켄트 49세
“저는 앞서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한 분들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아가 저로서는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시도록 적극 권하고 싶습니다. 제 남편과 저는 이 영화에 흠뻑 빠졌으며 깊은 감동에 사로 잡혔습니다. 저는 특히 패치가 명백히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회의를 표출하며 하느님의 뜻이 과연 무언지 깊이 고뇌하다 거의 하느님에 대한 기대를 단념할 뻔 했던 장면에 아주 끌렸습니다. 그러다 암시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듯한 표식으로서 등장하는 ‘나비!’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하느님은 만사를 통제하고 있으며 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 영화는 아주 따뜻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영화입니다. 몇몇 군데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벅찬 감동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다이앤, 36세
이어 청소년들의 영화평이다.
“저는 이 영화를 정말로 즐겁게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의 하느님에 대한 태도에 대해 비판 했습니다(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느님에 대한 패치의 지독한 회의를 비판했고, 단지 나비 한 마리의 출현에서 자기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음-필자). 하지만 만일 사랑하던 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렸고 그 죽음에 깊은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우리 대부분은 패치와 똑같이 행동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비의 등장은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통제력을 보여주는 완벽한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끝 장면에서 엉덩이를 까는 유머러스한 퍼포먼스는 불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로서는 이 영화가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로빈 윌리엄스는 뛰어난 배우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여태껏 본 최상의 영화 중 하나입니다.”
-익명의 미국 청소년, 14세
“이제 저로서는 패치 아담스를 두 번 본 셈인데, 두 번 다 감동을 받아 눈물이 났고, 두 번째 보고 난 뒤 첫 번째 보았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합니다. 첫째, 이 영화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둘째, 이 영화는 실화에 토대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패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런 점을 잊어버리는지요!!”
-케이티, 15세
꽤나 비판도 많은 영화이고(미국 평론가들은 무지막지하게 혹평했음-필자) 그런 비판의 내용 가운데는 일정 정도 수긍이 가는 면도 있지만, 일반인들은 대체로 감동적인 영화로 손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쉰들러 리스트〉, 〈패치 아담스〉의 바탕에 있는 세계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쉰들러는 처음엔 유대인을 값싼 노동력으로 여기고 플레이보이로서의 기질을 발휘하는 나찌 당원으로 살아가지만, 점차 생활 속에서 유대인이 자신과 똑같은 인간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쉰들러는, 수용소장 괴스가 자기 사택 베란다 아래 쪽을 지나가는 유대인 작업자들을 임의로 선별해 조준사격으로 쓰러뜨리는 버릇을 조금은 누그러뜨리려 애쓴다. 쉰들러는 괴스에게 뇌물이라는 당근을 주면서 그가 품위 있는 인간으로서 유대인을 좀 더 관대하게 대하도록 은근히 설득하기까지 한다. 이데올로기적 온갖 포장으로도 도저히 가릴 수 없는 인류 보편의 동질성을 쉰들러가 감득(感得)했음이다. 그리하여 결국 독일인이나 나찌 당원이 정신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조금이라도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보아 똑같이 인간적 특질을 지닌 유대인을, 급작스럽게 동등하게 대할 수는 없다 해도 지배자의 위치에서 더욱 아량을 베풀고 나아가 소통을 시도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편, 다름 아닌 수용소장 괴스는, 전체주의의 정신적·영적 패배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말해, 아름다운 유대인 하녀 헬렌에 대한 연모의 정이 괴스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나찌적 사고방식과 괴리되고 모순을 일으키면서 그 스트레스를 연거푸 헬렌을 구타하고 괴롭히고, 때로는 정답고 때로는 정신분열적인 모진 언어로 헬렌을 곤혹스럽게 하는 데서, 괴스의 인성적(人性的) 파멸은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민족과 민족, 나아가 전 인류가 사실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서로 형제애와 유대감에 기초해 협력하고 공존해나갈 때만, 인간의 내면과 인간 사회 전체에 참 평화가 조성될 수 있음을 홀로코스트(Holocaust: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라는 반면교사를 통해 웅변하고 있다 하겠다. 현실적 인연(因緣)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쉰들러가, 희생당한 유대인 전체에 비하면 비록 소수라 해도, 1,000명가량의 유대인과 나찌 당원 간의 공존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을 통해,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자비행(慈悲行)이 제시되어 있는 영화가 〈쉰들러 리스트〉다. 앞서 〈쉰들러 리스트〉 관련 항목에서 언급된 어느 스위스 분의 사례 또한 이 영화로 촉발된, 현재진행 중인 민족문제에 대한 연기적(緣起的) 사고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빛나는 결실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실, 영화 〈패치 아담스〉가 바탕 한 세계관 또한 〈쉰들러 리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쉰들러 리스트〉의 중심 범주인 민족이 〈패치 아담스〉에서 의료 환경으로 바뀌었고, 중심 문제가 한 민족의 타민족 말살과 그에 따른 대립의 문제에서, 환자에 대한 태도 및 올바른 의료적 관점을 둘러싼 대립의 문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두 영화 공히, 참다운 인간적 공존을 위한 관계 주체들 간의 운명공동체적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이다.
영화 속 패치와 관련해 제기되는 비판이 있다. 즉, 패치가 나름의 열정과 이상만으로 현실의 벽을 뛰어넘으려 애썼지만, 개인의 규범과 조직의 규범을 조율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조직의 규범이 조직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까지 위태롭게 할 때, 진정한 개인의 규범은 그 내용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참다운 윤리성을 구현하려는 개인은 조직과의 조율을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부차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고 기존 조직에 건설적 충격을 가하고 기존 체계 밖에서의 모범적 실험을 기획해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조직의 규범을 확립하려 할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중도(中道)에 입각한 실천이란 단순히 중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대상이나 현상을 그것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자리에 머물도록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알맞은 방향으로 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나찌당원 쉰들러가 나찌당의 규범과 관습을 사실상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새로운 규범과 관습을 구축했듯, 의료인 패치 아담스 또한 기존의 의료 규범과 관습을 과감히 혁파하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고자 애썼던 것이리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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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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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당신을 사랑 합니다』
김형곤 『영화로 읽는 성양의 역사』
로버트 존스톤 (전의우 옮김), 『영화와 영성 (Reel Spirituality)』
선안남 『스크린에서 마음을 읽다』
오영미 『영화보기 좋은 날』
이승민, 강안 『청소년을 위한 추천 영화 77』
이왕주 『철학, 영화를 casting하다』
이윤영 엮음/번역 『사유 속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