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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vka
소련군 최고사령부이다. 정식 명칭은 '최고중앙지휘사령부[1]'로 소련 국방인민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출범했다. 스타프카라는 단어의 어원은 중세 러시아어의 막사로, 그것이 사령부라는 의미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 조직한 야전 총사령부의 명칭이 스타프카였던 것. 19세기 제정 러시아 때에는 참모본부를 의미하는 명칭이었다.
독소전쟁 개전 후 1941년 6월 23일, 먼저 '중앙지휘사령부'가 조직되어 세묜 티모셴코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7월 10일에 '최고지휘사령부(Stavka Verkhnogo Komandovaniya)'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령관에 취임하고 8월 8일에 '최고중앙지휘사령부'로 명칭이 변경되어 종전까지 유지되었다.
Chapter 11
THE SUPREME COMMAND
GHQ
A Stavka of the High Command was formed on June 23, 1941. Differing
slightly from what we had envisaged in the Defence Commissariat’s project, its
composition was: Defence Commissar S. K. Timoshenko (Chairman), Chief of
General Staff G. K. Zhukov, J. V. Stalin, V. M. Molotov, K. Ye. Voroshilov, S.
M. Budenny, and N. G. Kuznetsov.
최고사령부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1941년 6월 23일, 중앙지휘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국방위원회의 기획에서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르지만, 그 구성은 국방위원회 위원장 티모셴코(위원장), 총참모장 주코프,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부데니, 그리고 쿠즈네초프였습니다.
It would have been far better if Stalin had been named Commander-in-Chief,
as we had envisaged in the original project. After all, with things as they were,
Timoshenko could take no basic decisions without Stalin approving them. As it
was, we had two commanders-in-chief — Timoshenko de jure, as put down in
the government decree, and Stalin de facto. This complicated troop control and
caused inevitable delays in drawing up and issuing orders.
우리가 원래 계획에서 예상한대로 스탈린이 총사령관에 임명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면 스탈린이 승인하지 않고는 티모셴코는 어떤 기본적인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두 명의 총사령관이 있었다. 법률 상 정부령에 명시된 티모셴코와 사실 상 스탈린. 이로 인해 병력 통제가 복잡해졌고 명령을 작성하고 내리는 데도 불가피한 지연이 발생했다.
We had also suggested having N. F. Vatutin, First Deputy Chief of General
Staff, in the High Command Stavka. But Stalin objected.
A group of advisers was formed to consult the High Command on various
topics. But it played no more than a nominal role, because all the advisers soon
received other appointments, and were not replaced.
우리는 또한 중앙지휘사령부 에 바투틴 제1부총참모장을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반대했다.
여러 문제에 대해 중앙지휘사령부 와 협의하기 위해 고문단을 구성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명목상의 역할에 불과했다. 모든 고문단이 곧 다른 임명을 받고 대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The High Command GHQ was sited in Moscow all through the war. This
had an important effect on morale. Owing to enemy air raids, its seat was moved
from the Kremlin to a small detached house with reliable working premises and
good communications in the vicinity of Kirovskiye Vorota in the beginning of
July. And a month later, operators of the General Staff, which was an executive
appendage of the High Command, moved their desks to the platform of the
nearby Kirovskaya Station of the Moscow underground.
전쟁 내내 중앙지휘사령부 GHQ는 모스크바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사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적의 공습으로 인해 그 자리는 크렘린궁에서 키롭스키예 보로타 근처의 신뢰할 수 있는 작업 공간과 통신이 잘되는 작은 단독 건물로 7월 초에 옮겼다. 그리고 한 달 후, 중앙지휘사령부 의 행정 부속 기관이었던 총참모부 직원들은 자신들의 책상을 근처에 있는 모스크바 지하의 키롭스카야 역 승강장으로 옮겼다.
On June 30, 1941, the Party’s Politbureau formed a special body, the State
Defence Committee, with Stalin at its head, on the model of Lenin’s Council of
Worker-Peasant Defence which functioned during the Civil War and the foreign
armed intervention.
1941년 6월 30일, 당 정치국은 특별 기구인 국방 위원회를 구성했다. 내전과 외국의 무력 개입 동안 기능했던 레닌의 노동자-농민 국방 위원회를 모델로 하여 스탈린을 수장으로 했다.
It held all power in its hands and was the top organ in charge of defence. All
civilian, Party, and government organizations were obliged to abide by all its
resolutions and orders. To control their fulfilment, the Committee had
representatives in all the territories and regions, the war-industry commissariats,
the biggest enterprises, and the building sites.
국방위원회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고 국방을 담당하는 최고 기관이었다. 모든 민간, 당, 정부 조직들은 그들의 모든 결정과 명령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 그들의 이행을 통제하기 위해, 위원회는 모든 영토와 지역, 전쟁 산업 위원회, 대기업, 그리고 건설 현장에 대표자들을 두었다.
At its sittings, which might be called at any time of the day or night, usually
at the Kremlin or in Stalin’s country-house, the Committee discussed and took
decisions on all crucial issues. Military plans were examined by the Party’s
Politbureau and the State Defence Committee. People’s Commissars who were
to take part in supporting the operation, were invited. Whenever there was a
chance, this practice enabled us to concentrate vast material resources at key
points, to carry through a coordinated policy of strategic guidance, and, with the
organised rear helping out, to dovetail troop actions with the countrywide war
effort.
보통 크렘린궁이나 스탈린의 별장에서 낮이나 밤이나 아무 때나 소집될 수 있는 회의석에 앉아 위원회는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군사 계획은 당 정치국과 국방위원회에서 검토했다. 작전을 지원하는 데 참여할 인민 위원들이 초빙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관행을 통해 우리는 방대한 물적 자원을 주요 지점에 집중하고, 전략적 지도라는 조정된 정책을 수행하고, 조직된 후방이 도움을 줌으로써 전국적인 전쟁 노력과 함께 군대의 행동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Heated debates at Committee meetings were frequent, the opinions firm and
couched in precise language. If no consensus was reached, a commission would
be formed at once, consisting of supporters of the opposite views who were
instructed to report an agreed proposal at the next meeting.
The State Defence Committee adopted some 10,000 resolutions and
decisions of a military and economic nature during the war. All of them were
carried out with precision and energy. They gave the start to assiduous work,
assuring a single Party line in the country’s administration during that rigorous
and arduous time.
위원회 회의에서는 열띤 토론이 잦았다, 의견은 확고했고, 명확한 언어로 표현했다. 합의에 도달하지 않으면, 다음 회의에서 합의된 제안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반대 의견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즉시 구성된다.
국방위원회는 전쟁 기간 동안 군사·경제적 성격의 약 1만 개의 결의와 결정을 채택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밀하고 정력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들은 그 혹독하고 힘든 시기에 국가 행정에서 단일한 당 노선을 보장하는 끈기있는 작업을 시작했다.
On July 10, 1941, by decision of the State Defence Committee, the Stavka of
the High Command was converted into the Stavka of the Supreme Command,
and on August 8 into the Stavka of the Supreme High Command.
1941년 7월 10일, 국방위원회의 결정으로 중앙지휘사령부 의 스타프카는 최고지휘사령부의 스타프카로, 8월 8일에는 최고중앙지휘사령부 의 스타프카로 전환되었다.
1
From that moment on and until the end of the war Stalin was Supreme
Commander-in-Chief.
Once the State Defence Committee had been formed and the Supreme
Command established, with one and the same person —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Party’s Central Committee and Chairman of 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 at their head, the structure of the country’s wartime political and
military administration was complete. The Party’s Central Committee
coordinated the activity of all Party, government, military, and economic
agencies.
그 순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탈린은 최고 통수권자였다.
국방위원회가 구성되고 최고지휘사령부가 설립되면서 동일한 인물인 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수장으로 하는 국가 전시 정치와 군사적 행정의 구조가 완성되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모든 당, 정부, 군사, 경제 기관의 활동을 조정했다.
Now I was working directly with J. V. Stalin. I had never associated with
him as closely before, and initially felt a little awkward in his presence. Besides,
I knew I lacked experience in strategic matters and was never sure of the
accuracy of my forecasts.
In the early period of our association, Stalin did not have much to say to me.
I felt that he was sizing me up most attentively and had no fixed opinion of me
yet as Chief of General Staff.
지금 나는 스탈린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전만큼 그와 가깝게 지낸 적은 없었고, 그가 면전에서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다. 게다가 내가 전략적인 문제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고, 내 예측이 정확한지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 초기에 스탈린은 나에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나를 가장 집중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아직 총참모장으로서 나에 대한 고정된 의견이 없다고 느꼈다.
But as experience accumulated, I became more confident, more bold, in
expressing my ideas. I noticed, too, that Stalin began to give them more heed.
On July 19, 1941, a decree of the USSR Supreme Soviet Presidium
appointed Stalin the People’s Commissar for Defence. And I must say that with
Stalin’s appointment as Chairman of the State Defence Committee, Supreme
Commander-in-Chief, and Commissar for Defence, all of us at the General Staff,
the central divisions of the Defence Commissariat, the USSR State Planning
Committee, and other governmental and economic bodies, instantly felt his firm
and sure hand.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 더 자신있고, 더 대담해졌다. 스탈린이 그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41년 7월 19일, 소련 최고 통치권자의 칙령에 의해 스탈린이 국방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이 국방위원회 위원장, 최고 총사령관, 국방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총참모부, 국방위원회의 중앙 부서,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그리고 다른 정부와 경제 기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확고하고 확실한 수완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Every member of the State Defence Committee had a concrete assignment
and was strictly responsible for the fulfilment of economic plans. One was
responsible for the output of tanks, another for guns and shells, a third for the
output of aircraft, and a fourth for logistics, food supplies, equipment, etc.
Commanders of arms of the service were ordered by Stalin personally to back up
the respective Committee members and help them in seeing to the fulfilment of
production programmes according to schedule and of requisite quality.
국방위원회의 모든 위원은 구체적인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경제 계획의 이행에 엄격한 책임이 있었다. 첫째는 탱크의 생산에 책임이 있었고, 둘째는 총과 포탄, 세번째는 항공기의 생산, 네번째는 물류, 식량 공급, 장비 등에 책임이 있었다.
스탈린은 군 지휘관들에게 각 위원회 위원들을 지원하고 일정에 따라 필요한 품질의 생산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것을 확인하여 돕도록 직접 지시했습니다.
With the Party’s political work making the due impact and with us generals
improving our art of troop control through the accumulated combat experience,
our resistance to the enemy grew stronger. All soldiers of the armed forces
displayed heroism and dedication in battle. Military discipline tightened visibly.
Still, despite the energetic efforts of the Supreme Command and the various
Front commands, the situation continued to deteriorate. Under pressure of
superior enemy forces, our troops were rolling back to the country’s interior. I
have already said that in the early months of the war the most difficult situation
prevailed in the western and north-western sectors. The strategic defence put up
by the Soviet Armed Forces took shape in a most unfavourable military
situation, though it was most active and resolute.
당의 정치적 활동이 정당한 효과를 거두고, 우리 장성들이 축적된 전투 경험을 통해 병력 통제 기술을 향상시키면서 적에 대한 저항은 더욱 강해졌다. 모든 병사들은 전투에서 영웅주의와 헌신을 보여주다. 군의 기강은 눈에 띄게 단단해졌다.
여전히, 최고지휘사령부와 여러 전선 지휘부의 왕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우세한 적군의 압박에 아군은 내륙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몇달 서부와 북서부 지역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고 이미 말했다. 소련군이 내세운 전략적 방어는 가장 적극적이고 단호했지만, 가장 불리한 군사적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The Party’s Central Committee and the State Defence Committee were
deeply concerned with the country’s air defences because Nazi aviation was
highly active. Indeed, the enemy pinned great hopes on the Luftwaffe. The Nazis
expected by their massive air raids to wreck the mobilization in the country’s
western regions, to disorganize transport and administration in the immediate
rear, and to undermine the people’s will to resist. Hitler showered privileges and
rewards on his air pirates and their chief, Goering.
당 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는 국가의 방공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치의 항공 활동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적은 루프트바페에 큰 희망을 걸었다. 나치는 자신들의 대규모 공습으로 서부 지역의 동원이 파괴되고, 바로 뒤의 수송과 행정이 와해되고, 국민들의 저항 의지가 약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항공 해적들과 그들의 수장인 괴링에게 특권과 보상을 주었다
Supreme Commander Stalin analyzed the situation, and took special note of
the deficient air defence of the country’s main objectives. Thereupon, with his
usual energy, he tackled the question of an anti-aircraft shield. He invited a
group of ranking commanders to offer ideas on how to improve the structure and
controls of the air defence machinery, and to do so within two days. General N.
N. Voronov, chief of Red Army artillery, and the generals M. S. Gromadin, D.
A. Zhuravlev, P. F. Zhigarev, N. D. Yakovlev, and others, helped him greatly
with their advice.
최고 사령관 스탈린은 그 상황을 분석했고, 국가의 주요 목표물의 미흡한 방공망에 특별히 주목했다. 그래서, 평소의 에너지로, 그는 방공망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고위 지휘관 그룹을 초대해서 방공망의 구조와 통제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이틀 안에 그렇게 하도록 했다. 붉은 군대 포병대의 총 책임자인 보로노프 장군과 그로마딘, 주라블레프, 지가레프, 야코블레프, 그리고 다른 장군들은 조언으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The main thing at the time was to put up an umbrella over Moscow,
Leningrad, and other large industrial centres producing tanks, aircraft, guns and
shells, and oil, and over leading railway junctions, and power-producing and
communication centres.
The biggest anti-aircraft defence unit was formed to protect Moscow. Before
the end of July it already had 585 fighter planes, 964 anti-aircraft guns, 166
large-caliber anti-aircraft machine guns, something like 1,000 searchlights, and a
large number of barrage balloons.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고 탱크, 항공기, 총기 및 포탄, 석유를 생산하는 기타 대규모 산업 센터 위로, 주요 철도 분기점 및 전력 생산 및 통신 센터 위로 우산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대공 방어 부대는 모스크바를 보호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7월 말 이전에 이미 585대의 전투기, 964개의 대공포, 166개의 대구경 대공기관포, 1,000개의 탐조등과 같은 것과 많은 수의 방공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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