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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땅끝 사랑 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천겸
고난 받으신 예수님 사 53 : 3--9
서 론
남편을 일찍 잃고 외아들을 애지중지 키운 어머니가 아들이 커서 결혼을 하여 -----며느리를 맞아 들어 왔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오니 왠지 모르게 아들을 빼앗긴 것 같고 작은 일에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밤 어머니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왔는데 우연히 아들 방에서 도란 도란 얘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경청하여들음
며느리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자기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얼마나 좋아?" "요만큼" "요만큼이 뭐야? 치. 삐짐." "그건 요 만큼만 빼고 다 사랑한다는 거야. 요건 당신 마음." 밖에서 듣다보니 열을 받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한 수 더 뜹니다. "그런데 자기야. 두 번째는 누가 좋아?" "두 번째?" '설마 어머니라고 하겠지'하여 ..............귀를 쫑긋 세웁니다
"우리 아기." "세 번째는?" "세 번째? 우리 장모님" "그럼 네 번째는?" "우리 강아지." "그럼 다섯 번째는?" "어.. 우리 엄마가 있네 " 어머니는 큰 충격을 먹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어머니는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가셨습니다........................'1번아 보아라. 5번은 간다.'
우리가 제일 고통스러운 때는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낄 때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배신을 당할 때,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할 때, 헌신적으로 은헤를 베푼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견디기 힘듭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그런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은 삼십을 받고 팔아 넘긴 제자 가롯 유다로 인하여 빌라도 법정에 끌려가 갖은 수모와 채찍질 등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프고실망하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여년 전의 사람으로 구약성경 중에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많은 예언을 남긴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분명하고 선명하게 바라보며, ===== 고난당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3가지로 예언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위한 구속의 사실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우리를 위한 고난.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난을 받으신 까닭은 바로 우리 때문이요,
곧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나와 상관 있습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3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1. 나를 대신해서 멸시=천대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 했습니다(1-3).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멸시를 당해 보셨습니까? 멸시라는 것은 무시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아주 짓이기는 것이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멸시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멸시는 거부와 배척의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온갖 멸시와천대로 예수님을 거부하고배척하였습니다.
(예)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걸핏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센징,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이 말은 "조선놈, 바보새끼" 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힘있는 국민이니까 조선사람은 저항하지 못할 줄 알고 완전히 무시하고 욕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 언젠가 TV에서 보도가 되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 키고 임금도 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협박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힘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사람이 멸시를 당하면 가슴에 한을 품게 되는 법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고 힘 없고 가난한 어느 학생을 왕따 시키고 얼마나 괴롭혔던지... 견딜 수 없어서.... 그 아이가 자살해 버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 미국에서는 왕따 당하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 분풀이로 집에서 총을 가지고 와서 무차별 격하여 죄 없는 학생들을 여러 명 죽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멸시는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싫어 버린바 되었다'는 말은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그분...만왕의 왕이시요...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신데.............................................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는커녕.... 사람 대접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 10절에도 보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 그랬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네 낭떨어지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옛날에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잣집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거지 취급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가나한 집 아이를 때려줘도 그냥 맞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구세주냐?"고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또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간고'란 말은 가난하여 심히 고생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헐벗고 굶주려서 고생했다는 말입니다.
& 또한 예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멸시를 당하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 가운데서 얼굴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처럼 ----------------------온갖 모욕을 다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선생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의 손길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잘 설명하였습니다.
(요1: 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 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버림당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던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당했습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며 말씀했습니다. (눅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며 미쳤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배척당하셨나? ---------------------------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묘목) 같이, 나약해 보였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바싹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뿌리처럼, 예수님은 고운 모양(아름다운)도 없고, 위풍당당한 화려한 풍채도 없었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요8:57)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초라한 모습 때문에 멸시 당했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받았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마27:17下)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질렀다. (마17:21) "…바라바로소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강도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멸시를 받았다. 버린바 되었다.
예수님은 간고(어려운 고통, 슬픔)를 많이 겪었습니다. 온갖 질고(병으로 고난)를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때렸습니다(마27:29). 침을 뱉으며, 갈대로 머리를 치면서 희롱했습니다(막15:19). 사람들이 멸시하는 가운데,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도 (마27:40下)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멸시를 당하셨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셨습니다.
(마27:46下)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사람들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누가 예수님만큼, 철저하게 버림받았나? 없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남에게 멸시 당하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가진 게 없다고, 못생겼다고, 멸시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버림 받으셨습니다.
# 우리가 버림받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버림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나 버렸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빌2장)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문자그대로,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보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인류사회에 큰 기여를 한 예가, 얼마나 많은가?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아이삭 뉴턴은, 학교 다닐 때, 늘 꼴찌만 도맡아 하던 열등아였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어땠는가?
선생님이 "너 같은 멍텅구리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남을 당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대신 에디슨을 가르쳤다. 음악가 베토벤은,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음악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아이야!"라는 핀잔을 받았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던, 월트 디즈니도 마찬가지다.
그는 신문기자였지만,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를 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 버림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배운것이 없고, 가진것이 없고, 못생겼다고 버림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랍니다. 그러면 나보다 먼저, 철저하게 버림받은 예수님처럼, 붙들어주셔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2.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습니다(4-6).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4절은 슬픔은 3절의 간고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고통, 슬픔)를 대신 지셨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예) 용수는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습니다다.
그런데 커갈수록,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하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는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뒷동산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타이르고 달래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사정없이 다그쳤습니다. 그때 용수가 소리내 울면서,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엄마 얼굴이 귀신같다고 놀려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그때 엄마는 왜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되었는지, 용수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엄마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고왔어, 그런데 네가 갓난아이 때, 너를 집에 재워두고 나왔는데, 집에 불이 났단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그리고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되었단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엄마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정말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제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께요." 그는 집밖으로 나왔다. 동네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으고 소리쳤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럽지 않아! 우리 엄마는 나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되셨습니다. 엄마 때문에 나는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쁜 미인이다!"
용수는 그때부터, 다시는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슬픔을 당하신 이유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왜 가시 면류관에 찔렸고,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렸나? 허리는 날카로운 창에 찔렸나? 왜 몸과 마음이 상하셨는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았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죄악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제물이 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나? 죄로 멍든 우리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에게 나음을 주기 위해, 채찍에 맞았다. 따라서 힘들고, 어렵고 삶에 지치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밑으로 나오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대신 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받게 됩다.
우리의 구체적인 죄는 무엇인가?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찢겨서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교만하여 선한 목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긍휼히 여겨,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다. 다시는 죄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어느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큰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양 사방에 큰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습니다.
이제 1-2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된다. 너무 불길이 세기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한사람이,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 또 불을 지르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해서, 불을 질렀다. 드디어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다. 노인은 또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 그 불탄 자리에 올라서라!" 노인은 경험적으로, 한 번 불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가,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예수님이 다 지불해 주셨습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시고, 우리를 사서, 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3.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셨지만,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시는 모습을 예언했다(7-9).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했습니다. 유대 재판은 밤에 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변호자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누가 봐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입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할 때,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또한 헤롯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비열한 헤롯은,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온갖 희롱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군병의 채찍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왜 침묵하셨나?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나의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하기에, 인내하면서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불의한 재판이니, 얼마든지 하실 말씀이 많았습니다. 지식과 논리가 부족해서 입을 다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실만큼,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실수 있었지만, 침묵하셨습니다. 힘과 권세가 없어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하늘로부터, 열두 영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마26:53)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침묵하셨습니다. 왜?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기에, 끝까지 침묵했습니다.
(9) 절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은 강포(强暴)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입에 속임도 없었고.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었습니다. 죄와 상관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악인처럼 취급당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도가 아니기에,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아, 부자와 함께 묻히도록 하셨습미다. 하나님은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막15:43).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시신을 자기를 위하여,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고이 모셨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7-8백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이미 7-8백년 전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을 그렇게 바라보았다면, 이미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더욱더 선명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었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지만, 못난 우리를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조금 힘들다고 입을 열어서 불평하고, 조금 속이 상한다고, 입을 열어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 그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남의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대성원리로 잘 알려진,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입은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머리를 많이 움직이도록 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는가?
입을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몸과, 손발을 많이 움직이기 바란다. 그때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많이 움직여 떠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철저히 버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보혈을 흘려주시고, 살이 찢기며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철저히 침묵하셨다.
이번 한 주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묵묵히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건에 힘쓰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침묵하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기 바랍니다.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은혜롭고 덕을 세우는 말,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경건한 말,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3가지 이유
1. 우리의 질고 때문입니다
본문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는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병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질고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리 개념입니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셨습니다. 질고를 지실 뿐만 아니라 질고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동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질고를 해결하셨습니다. 영적, 심리적, 육체적 질고를 치료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고침을 받고 해방될 수 있습니다. 질고를 당하고 있는 성도들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여 치유되시기를 바랍니다.
장로님이 천국에 갔더니 예수님이 맨발로 뛰어나와 활짝 웃으며 대 환영을 하시면서 장로님을 어느 자장면 집으로 모시더랍니다. 들어가 보니 건너편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앉아 탕수육을 먹고 있었습니다. 장로님 생각에 ‘나는 명색이 장로인데 집사가 먹는 탕수육보다는 더 좋은 것을 주겠지? 무얼 주실까?’ 잠시 후에 나온 것은 자장면이었습니다. 장로는 빈정이 상해서 예수님에게 ‘집사는 탕수육을 주고 장로에게는 왜 자장면이냐’고 막 말하려던 찰나에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높은 자는 천국에서 낮아지고 땅에서 낮은 자는 천국에서 높아진다. 이것이 천국의 법이다. 지금 목사는 자장면 배달 나갔다.”
교회 안에서 나이와 직분이 귀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가장 귀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직분이 중할수록 걸맞게 교회를 잘 섬기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이 더욱 충만하며 기도생활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모범이 되고 감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모든 질고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되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본문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들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하여 범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높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도 허물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허물을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허물’은 잘못, 그릇된 실수, 과실, 전과를 의미합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허물이 생기겠습니까? 하물며 지금까지 우리의 허물은 우주가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부끄러울 정도로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다면 나의 허물 때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아프리카에 염소를 치는 목동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염소들이 들판에서 빨간 열매를 따먹고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목동도 그 빨간 열매를 따먹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 거 참! 묘하게도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그 신기한 빨간 열매와 먹는 법을 배워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귀족들은 빨간 열매를 끓여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고 아주 신나 가지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즉시로 빨간 열매와 물을 ‘이단의 물’이라고 선포하고 마시는 것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그 빨간 열매는 온 국민이 매일 평균적으로 3잔씩 마신다는 오늘의 coffee입니다. 커피가 한때는 사람들의 정신을 빼앗아 가는 ‘이단의 물’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옳다고 여기며 분노하고 정죄하여도 그것이 내일 나의 부끄러움과 허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의 허물을 지워버리셨고 해결되었음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본문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죄로 인해 저주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대속하셨습니다. 영원한 효력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지옥에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감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내 죄와 죄 사함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습니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습니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습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습니다.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습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해졌습니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떨어졌습니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복잡해졌습니다. 병원과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 교회는 늘어났지만 사람은 더 줄어들었습니다. 기도실은 많아졌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더 적어졌습니다. 성경책은 넘쳐나는데 읽는 사람은 더 드물어졌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감격을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충성과 증거해야 합니다. 죄 사함의 감격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 속에 감동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구원과 천국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질고와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충성과 헌신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셋째,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나를 위한 대속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누명을 써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
(예) 16년간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산 사람 (예) 모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원하지도 않는 어려움을 당하며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원하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 태권도 배우던 아이: 안 아파! 안 아파! 안 아파! 잉---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할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길을 걷게 된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의 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은 모두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어머니의 고생이 자식의 행복을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어머니의 낡은 옷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표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그 원인을 오늘 말씀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지셨습니다.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창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찔리고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원치 않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짓는지 모릅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었습니다. 죄값으로 그의 몸이 상하셨습니다.
* 죄를 지은 자는 불안해 집니다. 죄값을 치루게 되는 자는 불안해 집니다.
재판장앞에서 그의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경찰관만 보아도 불안합니다. 언제 잡힐까? 어떤 판정을 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불안을 주님이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선한 길로 이끄실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의 불안한 때문입니다. 재판장 앞에서는 불안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림: 우리의 평화를 위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 우리의 질병의 아픔을 대신하기 위하여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병의 치료를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치유의 사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케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병을 대신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짐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생활 속에서 속상하고 힘든 일을 만났습니까?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 뱉는 아픔을 당하신 예수님.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위로와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히12:2에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이렇게 참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참을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나의 고난의 모든 환경을 이기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겸손하고, 사랑의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는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이 고난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한 주간도 예수님의 고난을 통한 깊은 사랑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자들을 찾아가 손을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속상한 사람들을 위하여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더 밝은 삶,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를 위한 주님의 고난
예수님은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놀라운 고난의 은총...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서 모든 질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대속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을 말씀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랬습니다.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 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랬습니다. 이는 인생이 하나님을 떠남이 전체적인 동시에 각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ㅡㅡㅡㅡㅡ"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그' 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하여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만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당하신 죄의 대가를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주님은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그가 찔리시고, 그가 상하셨으며,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워하였으며,
8절에서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9절에서는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고,
12절에서는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난은 사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고통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죄의 대가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부요와, 자유와, 평화와, 건강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나 같은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저와 여러분이 져야 될 그 죄의 짐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지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함께 따라하겠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예... 주님의 이 모든 고난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나의 허물, 나의 죄악, 교만, 혈기... 나의 더럽고 추한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하여... 고난과, 굴욕..., 멸시와 천대,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다 흘려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바로 나 때문임을 가슴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일류 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하여 학교에서도 늘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심한 흉터가 있어서 정말 못 봐줄 정도로 흉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어머니가 친구들 앞에... 특히 학교에 오는 것이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어머니가 딸이 하도 보고 싶어서....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서....딸이 다니는 대학에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딸은 어머니를 보고서도 말도 안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싫어서 어머니가 왔어도 모르는 척 합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딸이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사진을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진은 너무나도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딸이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젊었을 때에는 이렇게 예뻤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의 질문에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한번은 잠든 너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간 적이 있었단다. 잠깐 나갔다가 온다는 것이 그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집에 돌아 와 보니 그 사이에 집에 불이 났고 소방관들과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 큰 화재가 일어났단다. 그런데 나는 집안에서 잠자고 있는 너를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말리는 소방관들을 밀치고 방에 들어가서 너를 담요에 싸고 나오다가 이렇게 얼굴에 화상을 입었단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고, 이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수 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은혜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딸이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죄송하다고....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딸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 어머니같은 사람이 없다고, 자기 어머니는 자기를 구하려다가 저런 얼굴이 되었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자랑하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서 그 흉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아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새기고 이 놀라운 사랑... 복된 소식, 이 복음을 널리 전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놀라운 고난의 은총...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서 모든 질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대속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도대체 왜 주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왜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을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당하셨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4절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 보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파야 할 질병을 위해서 대신 아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할 채찍을 대신 맞아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아픔과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맞으시고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보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은 머리에 쓰신 가시관으로 찔려 열 곳, 스무 곳에서 피를 쏟으셨고, 또한 옆구리 에는 창으로 찔리셔서 온몸의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가시로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은 죽임을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은 끝내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 상하시므로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한분 뿐이신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만큼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고난을 나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아픔은 나를 위한 아픔이셨습니다. 주님의 찔리심은 나를 위한 찔리심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시며,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삶을 살수 있는줄을 믿으시기고 이 영생의 축복을 모두가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5절에 바로 우리를 위한 "영혼의 수고"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 이를 우리는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본문 11절에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속의 죽음은 자기 양들을 위한 죽음이요(요10:15),또한 친구를 위한 희생적 죽음입니다(요15:13).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유익(축복)하게 하였습니다(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신
1)첫 번째의 복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되게 하였습니다=====(골1:20).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원수가 없습니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두 번째 복은 나음(healing)입니다.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무서운 죄로부터 영혼을 치료하며, 육체적인 질병까지 치료하시는 길을 예수님께서 그의 수난을 통하여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요삼2).
진정 예수그리스도를 만난사람은 구원의 은총은 물론 온갖 질병에서까지도 치료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고난 받으신 예수님 사 53 : 3--9
서 론
남편을 일찍 잃고 외아들을 애지중지 키운 어머니가 아들이 커서 결혼을 하여 -----며느리를 맞아 들어 왔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오니 왠지 모르게 아들을 빼앗긴 것 같고 작은 일에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밤 어머니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왔는데 우연히 아들 방에서 도란 도란 얘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경청하여들음
며느리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자기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얼마나 좋아?" "요만큼" "요만큼이 뭐야? 치. 삐짐." "그건 요 만큼만 빼고 다 사랑한다는 거야. 요건 당신 마음." 밖에서 듣다보니 열을 받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한 수 더 뜹니다. "그런데 자기야. 두 번째는 누가 좋아?" "두 번째?" '설마 어머니라고 하겠지'하여 ..............귀를 쫑긋 세웁니다
"우리 아기." "세 번째는?" "세 번째? 우리 장모님" "그럼 네 번째는?" "우리 강아지." "그럼 다섯 번째는?" "어.. 우리 엄마가 있네 " 어머니는 큰 충격을 먹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어머니는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가셨습니다........................'1번아 보아라. 5번은 간다.'
우리가 제일 고통스러운 때는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낄 때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배신을 당할 때,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할 때, 헌신적으로 은헤를 베푼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견디기 힘듭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그런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은 삼십을 받고 팔아 넘긴 제자 가롯 유다로 인하여 빌라도 법정에 끌려가 갖은 수모와 채찍질 등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프고실망하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여년 전의 사람으로 구약성경 중에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많은 예언을 남긴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분명하고 선명하게 바라보며, ===== 고난당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3가지로 예언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위한 구속의 사실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우리를 위한 고난.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난을 받으신 까닭은 바로 우리 때문이요,
곧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나와 상관 있습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3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1. 나를 대신해서 멸시=천대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 했습니다(1-3).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멸시를 당해 보셨습니까? 멸시라는 것은 무시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아주 짓이기는 것이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멸시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멸시는 거부와 배척의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온갖 멸시와천대로 예수님을 거부하고배척하였습니다.
(예)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걸핏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센징,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이 말은 "조선놈, 바보새끼" 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힘있는 국민이니까 조선사람은 저항하지 못할 줄 알고 완전히 무시하고 욕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 언젠가 TV에서 보도가 되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 키고 임금도 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협박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힘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사람이 멸시를 당하면 가슴에 한을 품게 되는 법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고 힘 없고 가난한 어느 학생을 왕따 시키고 얼마나 괴롭혔던지... 견딜 수 없어서.... 그 아이가 자살해 버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 미국에서는 왕따 당하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 분풀이로 집에서 총을 가지고 와서 무차별 격하여 죄 없는 학생들을 여러 명 죽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멸시는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싫어 버린바 되었다'는 말은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그분...만왕의 왕이시요...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신데.............................................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는커녕.... 사람 대접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 10절에도 보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 그랬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네 낭떨어지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옛날에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잣집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거지 취급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가나한 집 아이를 때려줘도 그냥 맞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구세주냐?"고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또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간고'란 말은 가난하여 심히 고생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헐벗고 굶주려서 고생했다는 말입니다.
& 또한 예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멸시를 당하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 가운데서 얼굴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처럼 ----------------------온갖 모욕을 다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선생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의 손길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잘 설명하였습니다.
(요1: 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 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버림당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던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당했습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며 말씀했습니다. (눅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며 미쳤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배척당하셨나? ---------------------------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묘목) 같이, 나약해 보였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바싹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뿌리처럼, 예수님은 고운 모양(아름다운)도 없고, 위풍당당한 화려한 풍채도 없었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요8:57)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초라한 모습 때문에 멸시 당했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받았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마27:17下)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질렀다. (마17:21) "…바라바로소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강도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멸시를 받았다. 버린바 되었다.
예수님은 간고(어려운 고통, 슬픔)를 많이 겪었습니다. 온갖 질고(병으로 고난)를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때렸습니다(마27:29). 침을 뱉으며, 갈대로 머리를 치면서 희롱했습니다(막15:19). 사람들이 멸시하는 가운데,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도 (마27:40下)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멸시를 당하셨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셨습니다.
(마27:46下)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사람들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누가 예수님만큼, 철저하게 버림받았나? 없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남에게 멸시 당하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가진 게 없다고, 못생겼다고, 멸시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버림 받으셨습니다.
# 우리가 버림받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버림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나 버렸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빌2장)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문자그대로,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보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인류사회에 큰 기여를 한 예가, 얼마나 많은가?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아이삭 뉴턴은, 학교 다닐 때, 늘 꼴찌만 도맡아 하던 열등아였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어땠는가?
선생님이 "너 같은 멍텅구리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남을 당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대신 에디슨을 가르쳤다. 음악가 베토벤은,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음악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아이야!"라는 핀잔을 받았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던, 월트 디즈니도 마찬가지다.
그는 신문기자였지만,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를 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 버림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배운것이 없고, 가진것이 없고, 못생겼다고 버림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랍니다. 그러면 나보다 먼저, 철저하게 버림받은 예수님처럼, 붙들어주셔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2.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습니다(4-6).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4절은 슬픔은 3절의 간고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고통, 슬픔)를 대신 지셨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예) 용수는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습니다다.
그런데 커갈수록,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하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는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뒷동산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타이르고 달래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사정없이 다그쳤습니다. 그때 용수가 소리내 울면서,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엄마 얼굴이 귀신같다고 놀려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그때 엄마는 왜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되었는지, 용수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엄마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고왔어, 그런데 네가 갓난아이 때, 너를 집에 재워두고 나왔는데, 집에 불이 났단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그리고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되었단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엄마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정말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제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께요." 그는 집밖으로 나왔다. 동네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으고 소리쳤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럽지 않아! 우리 엄마는 나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되셨습니다. 엄마 때문에 나는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쁜 미인이다!"
용수는 그때부터, 다시는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슬픔을 당하신 이유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왜 가시 면류관에 찔렸고,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렸나? 허리는 날카로운 창에 찔렸나? 왜 몸과 마음이 상하셨는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았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죄악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제물이 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나? 죄로 멍든 우리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에게 나음을 주기 위해, 채찍에 맞았다. 따라서 힘들고, 어렵고 삶에 지치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밑으로 나오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대신 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받게 됩다.
우리의 구체적인 죄는 무엇인가?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찢겨서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교만하여 선한 목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긍휼히 여겨,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다. 다시는 죄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어느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큰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양 사방에 큰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습니다.
이제 1-2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된다. 너무 불길이 세기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한사람이,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 또 불을 지르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해서, 불을 질렀다. 드디어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다. 노인은 또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 그 불탄 자리에 올라서라!" 노인은 경험적으로, 한 번 불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가,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예수님이 다 지불해 주셨습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시고, 우리를 사서, 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3.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셨지만,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시는 모습을 예언했다(7-9).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했습니다. 유대 재판은 밤에 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변호자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누가 봐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입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할 때,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또한 헤롯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비열한 헤롯은,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온갖 희롱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군병의 채찍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왜 침묵하셨나?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나의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하기에, 인내하면서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불의한 재판이니, 얼마든지 하실 말씀이 많았습니다. 지식과 논리가 부족해서 입을 다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실만큼,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실수 있었지만, 침묵하셨습니다. 힘과 권세가 없어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하늘로부터, 열두 영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마26:53)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침묵하셨습니다. 왜?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기에, 끝까지 침묵했습니다.
(9) 절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은 강포(强暴)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입에 속임도 없었고.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었습니다. 죄와 상관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악인처럼 취급당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도가 아니기에,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아, 부자와 함께 묻히도록 하셨습미다. 하나님은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막15:43).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시신을 자기를 위하여,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고이 모셨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7-8백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이미 7-8백년 전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을 그렇게 바라보았다면, 이미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더욱더 선명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었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지만, 못난 우리를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조금 힘들다고 입을 열어서 불평하고, 조금 속이 상한다고, 입을 열어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 그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남의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대성원리로 잘 알려진,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입은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머리를 많이 움직이도록 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는가?
입을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몸과, 손발을 많이 움직이기 바란다. 그때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많이 움직여 떠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철저히 버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보혈을 흘려주시고, 살이 찢기며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철저히 침묵하셨다.
이번 한 주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묵묵히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건에 힘쓰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침묵하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기 바랍니다.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은혜롭고 덕을 세우는 말,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경건한 말,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3가지 이유
1. 우리의 질고 때문입니다
본문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는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병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질고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리 개념입니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셨습니다. 질고를 지실 뿐만 아니라 질고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동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질고를 해결하셨습니다. 영적, 심리적, 육체적 질고를 치료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고침을 받고 해방될 수 있습니다. 질고를 당하고 있는 성도들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여 치유되시기를 바랍니다.
장로님이 천국에 갔더니 예수님이 맨발로 뛰어나와 활짝 웃으며 대 환영을 하시면서 장로님을 어느 자장면 집으로 모시더랍니다. 들어가 보니 건너편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앉아 탕수육을 먹고 있었습니다. 장로님 생각에 ‘나는 명색이 장로인데 집사가 먹는 탕수육보다는 더 좋은 것을 주겠지? 무얼 주실까?’ 잠시 후에 나온 것은 자장면이었습니다. 장로는 빈정이 상해서 예수님에게 ‘집사는 탕수육을 주고 장로에게는 왜 자장면이냐’고 막 말하려던 찰나에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높은 자는 천국에서 낮아지고 땅에서 낮은 자는 천국에서 높아진다. 이것이 천국의 법이다. 지금 목사는 자장면 배달 나갔다.”
교회 안에서 나이와 직분이 귀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가장 귀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직분이 중할수록 걸맞게 교회를 잘 섬기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이 더욱 충만하며 기도생활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모범이 되고 감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모든 질고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되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본문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들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하여 범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높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도 허물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허물을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허물’은 잘못, 그릇된 실수, 과실, 전과를 의미합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허물이 생기겠습니까? 하물며 지금까지 우리의 허물은 우주가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부끄러울 정도로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다면 나의 허물 때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아프리카에 염소를 치는 목동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염소들이 들판에서 빨간 열매를 따먹고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목동도 그 빨간 열매를 따먹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 거 참! 묘하게도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그 신기한 빨간 열매와 먹는 법을 배워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귀족들은 빨간 열매를 끓여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고 아주 신나 가지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즉시로 빨간 열매와 물을 ‘이단의 물’이라고 선포하고 마시는 것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그 빨간 열매는 온 국민이 매일 평균적으로 3잔씩 마신다는 오늘의 coffee입니다. 커피가 한때는 사람들의 정신을 빼앗아 가는 ‘이단의 물’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옳다고 여기며 분노하고 정죄하여도 그것이 내일 나의 부끄러움과 허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의 허물을 지워버리셨고 해결되었음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본문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죄로 인해 저주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대속하셨습니다. 영원한 효력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지옥에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감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내 죄와 죄 사함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습니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습니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습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습니다.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습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해졌습니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떨어졌습니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복잡해졌습니다. 병원과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 교회는 늘어났지만 사람은 더 줄어들었습니다. 기도실은 많아졌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더 적어졌습니다. 성경책은 넘쳐나는데 읽는 사람은 더 드물어졌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감격을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충성과 증거해야 합니다. 죄 사함의 감격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 속에 감동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구원과 천국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질고와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충성과 헌신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셋째,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나를 위한 대속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누명을 써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
(예) 16년간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산 사람 (예) 모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원하지도 않는 어려움을 당하며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원하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 태권도 배우던 아이: 안 아파! 안 아파! 안 아파! 잉---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할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길을 걷게 된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의 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은 모두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어머니의 고생이 자식의 행복을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어머니의 낡은 옷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표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그 원인을 오늘 말씀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지셨습니다.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창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찔리고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원치 않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짓는지 모릅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었습니다. 죄값으로 그의 몸이 상하셨습니다.
* 죄를 지은 자는 불안해 집니다. 죄값을 치루게 되는 자는 불안해 집니다.
재판장앞에서 그의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경찰관만 보아도 불안합니다. 언제 잡힐까? 어떤 판정을 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불안을 주님이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선한 길로 이끄실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의 불안한 때문입니다. 재판장 앞에서는 불안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림: 우리의 평화를 위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 우리의 질병의 아픔을 대신하기 위하여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병의 치료를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치유의 사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케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병을 대신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짐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생활 속에서 속상하고 힘든 일을 만났습니까?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 뱉는 아픔을 당하신 예수님.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위로와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히12:2에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이렇게 참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참을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나의 고난의 모든 환경을 이기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겸손하고, 사랑의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는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이 고난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한 주간도 예수님의 고난을 통한 깊은 사랑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자들을 찾아가 손을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속상한 사람들을 위하여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더 밝은 삶,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를 위한 주님의 고난
예수님은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놀라운 고난의 은총...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서 모든 질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대속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을 말씀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랬습니다.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 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랬습니다. 이는 인생이 하나님을 떠남이 전체적인 동시에 각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ㅡㅡㅡㅡㅡ"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그' 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하여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만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당하신 죄의 대가를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주님은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그가 찔리시고, 그가 상하셨으며,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워하였으며,
8절에서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9절에서는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고,
12절에서는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난은 사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고통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죄의 대가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부요와, 자유와, 평화와, 건강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나 같은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저와 여러분이 져야 될 그 죄의 짐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지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함께 따라하겠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예... 주님의 이 모든 고난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나의 허물, 나의 죄악, 교만, 혈기... 나의 더럽고 추한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하여... 고난과, 굴욕..., 멸시와 천대,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다 흘려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바로 나 때문임을 가슴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일류 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하여 학교에서도 늘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심한 흉터가 있어서 정말 못 봐줄 정도로 흉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어머니가 친구들 앞에... 특히 학교에 오는 것이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어머니가 딸이 하도 보고 싶어서....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서....딸이 다니는 대학에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딸은 어머니를 보고서도 말도 안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싫어서 어머니가 왔어도 모르는 척 합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딸이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사진을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진은 너무나도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딸이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젊었을 때에는 이렇게 예뻤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의 질문에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한번은 잠든 너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간 적이 있었단다. 잠깐 나갔다가 온다는 것이 그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집에 돌아 와 보니 그 사이에 집에 불이 났고 소방관들과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 큰 화재가 일어났단다. 그런데 나는 집안에서 잠자고 있는 너를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말리는 소방관들을 밀치고 방에 들어가서 너를 담요에 싸고 나오다가 이렇게 얼굴에 화상을 입었단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고, 이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수 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은혜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딸이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죄송하다고....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딸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 어머니같은 사람이 없다고, 자기 어머니는 자기를 구하려다가 저런 얼굴이 되었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자랑하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서 그 흉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아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새기고 이 놀라운 사랑... 복된 소식, 이 복음을 널리 전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놀라운 고난의 은총...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서 모든 질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대속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도대체 왜 주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왜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을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당하셨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4절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 보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파야 할 질병을 위해서 대신 아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할 채찍을 대신 맞아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아픔과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맞으시고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보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은 머리에 쓰신 가시관으로 찔려 열 곳, 스무 곳에서 피를 쏟으셨고, 또한 옆구리 에는 창으로 찔리셔서 온몸의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가시로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은 죽임을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은 끝내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 상하시므로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한분 뿐이신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만큼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고난을 나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아픔은 나를 위한 아픔이셨습니다. 주님의 찔리심은 나를 위한 찔리심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시며,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삶을 살수 있는줄을 믿으시기고 이 영생의 축복을 모두가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5절에 바로 우리를 위한 "영혼의 수고"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 이를 우리는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본문 11절에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속의 죽음은 자기 양들을 위한 죽음이요(요10:15),또한 친구를 위한 희생적 죽음입니다(요15:13).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유익(축복)하게 하였습니다(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신
1)첫 번째의 복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되게 하였습니다=====(골1:20).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원수가 없습니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두 번째 복은 나음(healing)입니다.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무서운 죄로부터 영혼을 치료하며, 육체적인 질병까지 치료하시는 길을 예수님께서 그의 수난을 통하여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요삼2).
진정 예수그리스도를 만난사람은 구원의 은총은 물론 온갖 질병에서까지도 치료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고난의 계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의 고난, 그의 찔림과 상함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요, 나의 가족과 우리 모두를
고난 받으신 예수님 사 53 : 3--9
서 론
남편을 일찍 잃고 외아들을 애지중지 키운 어머니가 아들이 커서 결혼을 하여 -----며느리를 맞아 들어 왔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오니 왠지 모르게 아들을 빼앗긴 것 같고 작은 일에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밤 어머니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왔는데 우연히 아들 방에서 도란 도란 얘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경청하여들음
며느리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자기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얼마나 좋아?" "요만큼" "요만큼이 뭐야? 치. 삐짐." "그건 요 만큼만 빼고 다 사랑한다는 거야. 요건 당신 마음." 밖에서 듣다보니 열을 받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한 수 더 뜹니다. "그런데 자기야. 두 번째는 누가 좋아?" "두 번째?" '설마 어머니라고 하겠지'하여 ..............귀를 쫑긋 세웁니다
"우리 아기." "세 번째는?" "세 번째? 우리 장모님" "그럼 네 번째는?" "우리 강아지." "그럼 다섯 번째는?" "어.. 우리 엄마가 있네 " 어머니는 큰 충격을 먹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어머니는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가셨습니다........................'1번아 보아라. 5번은 간다.'
우리가 제일 고통스러운 때는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낄 때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배신을 당할 때,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할 때, 헌신적으로 은헤를 베푼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견디기 힘듭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그런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은 삼십을 받고 팔아 넘긴 제자 가롯 유다로 인하여 빌라도 법정에 끌려가 갖은 수모와 채찍질 등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프고실망하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여년 전의 사람으로 구약성경 중에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많은 예언을 남긴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분명하고 선명하게 바라보며, ===== 고난당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3가지로 예언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위한 구속의 사실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우리를 위한 고난.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난을 받으신 까닭은 바로 우리 때문이요,
곧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나와 상관 있습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3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1. 나를 대신해서 멸시=천대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 했습니다(1-3).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멸시를 당해 보셨습니까? 멸시라는 것은 무시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아주 짓이기는 것이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멸시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멸시는 거부와 배척의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온갖 멸시와천대로 예수님을 거부하고배척하였습니다.
(예)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걸핏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센징,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이 말은 "조선놈, 바보새끼" 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힘있는 국민이니까 조선사람은 저항하지 못할 줄 알고 완전히 무시하고 욕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 언젠가 TV에서 보도가 되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 키고 임금도 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협박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힘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사람이 멸시를 당하면 가슴에 한을 품게 되는 법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고 힘 없고 가난한 어느 학생을 왕따 시키고 얼마나 괴롭혔던지... 견딜 수 없어서.... 그 아이가 자살해 버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 미국에서는 왕따 당하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 분풀이로 집에서 총을 가지고 와서 무차별 격하여 죄 없는 학생들을 여러 명 죽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멸시는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싫어 버린바 되었다'는 말은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그분...만왕의 왕이시요...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신데.............................................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는커녕.... 사람 대접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 10절에도 보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 그랬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네 낭떨어지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옛날에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잣집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거지 취급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가나한 집 아이를 때려줘도 그냥 맞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구세주냐?"고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또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간고'란 말은 가난하여 심히 고생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헐벗고 굶주려서 고생했다는 말입니다.
& 또한 예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멸시를 당하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 가운데서 얼굴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처럼 ----------------------온갖 모욕을 다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선생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의 손길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잘 설명하였습니다.
(요1: 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 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버림당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던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당했습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며 말씀했습니다. (눅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며 미쳤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배척당하셨나? ---------------------------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묘목) 같이, 나약해 보였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바싹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뿌리처럼, 예수님은 고운 모양(아름다운)도 없고, 위풍당당한 화려한 풍채도 없었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요8:57)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초라한 모습 때문에 멸시 당했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받았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마27:17下)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질렀다. (마17:21) "…바라바로소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강도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멸시를 받았다. 버린바 되었다.
예수님은 간고(어려운 고통, 슬픔)를 많이 겪었습니다. 온갖 질고(병으로 고난)를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때렸습니다(마27:29). 침을 뱉으며, 갈대로 머리를 치면서 희롱했습니다(막15:19). 사람들이 멸시하는 가운데,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도 (마27:40下)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멸시를 당하셨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셨습니다.
(마27:46下)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사람들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누가 예수님만큼, 철저하게 버림받았나? 없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남에게 멸시 당하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가진 게 없다고, 못생겼다고, 멸시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버림 받으셨습니다.
# 우리가 버림받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버림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나 버렸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빌2장)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문자그대로,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보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인류사회에 큰 기여를 한 예가, 얼마나 많은가?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아이삭 뉴턴은, 학교 다닐 때, 늘 꼴찌만 도맡아 하던 열등아였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어땠는가?
선생님이 "너 같은 멍텅구리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남을 당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대신 에디슨을 가르쳤다. 음악가 베토벤은,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음악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아이야!"라는 핀잔을 받았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던, 월트 디즈니도 마찬가지다.
그는 신문기자였지만,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를 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 버림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배운것이 없고, 가진것이 없고, 못생겼다고 버림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랍니다. 그러면 나보다 먼저, 철저하게 버림받은 예수님처럼, 붙들어주셔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2.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습니다(4-6).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4절은 슬픔은 3절의 간고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고통, 슬픔)를 대신 지셨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예) 용수는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습니다다.
그런데 커갈수록,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하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는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뒷동산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타이르고 달래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사정없이 다그쳤습니다. 그때 용수가 소리내 울면서,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엄마 얼굴이 귀신같다고 놀려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그때 엄마는 왜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되었는지, 용수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엄마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고왔어, 그런데 네가 갓난아이 때, 너를 집에 재워두고 나왔는데, 집에 불이 났단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그리고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되었단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엄마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정말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제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께요." 그는 집밖으로 나왔다. 동네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으고 소리쳤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럽지 않아! 우리 엄마는 나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되셨습니다. 엄마 때문에 나는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쁜 미인이다!"
용수는 그때부터, 다시는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슬픔을 당하신 이유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왜 가시 면류관에 찔렸고,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렸나? 허리는 날카로운 창에 찔렸나? 왜 몸과 마음이 상하셨는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았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죄악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제물이 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나? 죄로 멍든 우리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에게 나음을 주기 위해, 채찍에 맞았다. 따라서 힘들고, 어렵고 삶에 지치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밑으로 나오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대신 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받게 됩다.
우리의 구체적인 죄는 무엇인가?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찢겨서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교만하여 선한 목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긍휼히 여겨,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다. 다시는 죄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어느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큰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양 사방에 큰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습니다.
이제 1-2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된다. 너무 불길이 세기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한사람이,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 또 불을 지르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해서, 불을 질렀다. 드디어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다. 노인은 또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 그 불탄 자리에 올라서라!" 노인은 경험적으로, 한 번 불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가,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예수님이 다 지불해 주셨습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시고, 우리를 사서, 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3.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셨지만,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시는 모습을 예언했다(7-9).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했습니다. 유대 재판은 밤에 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변호자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누가 봐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입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할 때,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또한 헤롯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비열한 헤롯은,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온갖 희롱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군병의 채찍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왜 침묵하셨나?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나의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하기에, 인내하면서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불의한 재판이니, 얼마든지 하실 말씀이 많았습니다. 지식과 논리가 부족해서 입을 다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실만큼,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실수 있었지만, 침묵하셨습니다. 힘과 권세가 없어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하늘로부터, 열두 영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마26:53)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침묵하셨습니다. 왜?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기에, 끝까지 침묵했습니다.
(9) 절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은 강포(强暴)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입에 속임도 없었고.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었습니다. 죄와 상관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악인처럼 취급당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도가 아니기에,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아, 부자와 함께 묻히도록 하셨습미다. 하나님은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막15:43).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시신을 자기를 위하여,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고이 모셨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7-8백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이미 7-8백년 전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을 그렇게 바라보았다면, 이미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더욱더 선명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었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지만, 못난 우리를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조금 힘들다고 입을 열어서 불평하고, 조금 속이 상한다고, 입을 열어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 그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남의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대성원리로 잘 알려진,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입은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머리를 많이 움직이도록 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는가?
입을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몸과, 손발을 많이 움직이기 바란다. 그때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많이 움직여 떠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철저히 버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보혈을 흘려주시고, 살이 찢기며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철저히 침묵하셨다.
이번 한 주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묵묵히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건에 힘쓰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침묵하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기 바랍니다.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은혜롭고 덕을 세우는 말,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경건한 말,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3가지 이유
1. 우리의 질고 때문입니다
본문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는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병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질고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리 개념입니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셨습니다. 질고를 지실 뿐만 아니라 질고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동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질고를 해결하셨습니다. 영적, 심리적, 육체적 질고를 치료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고침을 받고 해방될 수 있습니다. 질고를 당하고 있는 성도들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여 치유되시기를 바랍니다.
장로님이 천국에 갔더니 예수님이 맨발로 뛰어나와 활짝 웃으며 대 환영을 하시면서 장로님을 어느 자장면 집으로 모시더랍니다. 들어가 보니 건너편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앉아 탕수육을 먹고 있었습니다. 장로님 생각에 ‘나는 명색이 장로인데 집사가 먹는 탕수육보다는 더 좋은 것을 주겠지? 무얼 주실까?’ 잠시 후에 나온 것은 자장면이었습니다. 장로는 빈정이 상해서 예수님에게 ‘집사는 탕수육을 주고 장로에게는 왜 자장면이냐’고 막 말하려던 찰나에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높은 자는 천국에서 낮아지고 땅에서 낮은 자는 천국에서 높아진다. 이것이 천국의 법이다. 지금 목사는 자장면 배달 나갔다.”
교회 안에서 나이와 직분이 귀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가장 귀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직분이 중할수록 걸맞게 교회를 잘 섬기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이 더욱 충만하며 기도생활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모범이 되고 감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모든 질고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되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본문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들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하여 범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높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도 허물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허물을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허물’은 잘못, 그릇된 실수, 과실, 전과를 의미합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허물이 생기겠습니까? 하물며 지금까지 우리의 허물은 우주가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부끄러울 정도로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다면 나의 허물 때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아프리카에 염소를 치는 목동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염소들이 들판에서 빨간 열매를 따먹고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목동도 그 빨간 열매를 따먹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 거 참! 묘하게도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그 신기한 빨간 열매와 먹는 법을 배워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귀족들은 빨간 열매를 끓여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고 아주 신나 가지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즉시로 빨간 열매와 물을 ‘이단의 물’이라고 선포하고 마시는 것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그 빨간 열매는 온 국민이 매일 평균적으로 3잔씩 마신다는 오늘의 coffee입니다. 커피가 한때는 사람들의 정신을 빼앗아 가는 ‘이단의 물’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옳다고 여기며 분노하고 정죄하여도 그것이 내일 나의 부끄러움과 허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의 허물을 지워버리셨고 해결되었음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본문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죄로 인해 저주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대속하셨습니다. 영원한 효력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지옥에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감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내 죄와 죄 사함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습니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습니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습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습니다.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습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해졌습니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떨어졌습니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복잡해졌습니다. 병원과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 교회는 늘어났지만 사람은 더 줄어들었습니다. 기도실은 많아졌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더 적어졌습니다. 성경책은 넘쳐나는데 읽는 사람은 더 드물어졌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감격을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충성과 증거해야 합니다. 죄 사함의 감격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 속에 감동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구원과 천국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질고와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충성과 헌신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셋째,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나를 위한 대속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누명을 써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
(예) 16년간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산 사람 (예) 모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원하지도 않는 어려움을 당하며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원하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 태권도 배우던 아이: 안 아파! 안 아파! 안 아파! 잉---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할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길을 걷게 된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의 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은 모두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어머니의 고생이 자식의 행복을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어머니의 낡은 옷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표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그 원인을 오늘 말씀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지셨습니다.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창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찔리고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원치 않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짓는지 모릅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었습니다. 죄값으로 그의 몸이 상하셨습니다.
* 죄를 지은 자는 불안해 집니다. 죄값을 치루게 되는 자는 불안해 집니다.
재판장앞에서 그의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경찰관만 보아도 불안합니다. 언제 잡힐까? 어떤 판정을 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불안을 주님이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선한 길로 이끄실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의 불안한 때문입니다. 재판장 앞에서는 불안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림: 우리의 평화를 위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 우리의 질병의 아픔을 대신하기 위하여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병의 치료를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치유의 사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케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병을 대신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짐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생활 속에서 속상하고 힘든 일을 만났습니까?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 뱉는 아픔을 당하신 예수님.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위로와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히12:2에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이렇게 참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참을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나의 고난의 모든 환경을 이기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겸손하고, 사랑의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는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이 고난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한 주간도 예수님의 고난을 통한 깊은 사랑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자들을 찾아가 손을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속상한 사람들을 위하여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더 밝은 삶,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를 위한 주님의 고난
예수님은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놀라운 고난의 은총...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서 모든 질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대속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을 말씀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랬습니다.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 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랬습니다. 이는 인생이 하나님을 떠남이 전체적인 동시에 각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ㅡㅡㅡㅡㅡ"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그' 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하여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만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당하신 죄의 대가를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주님은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그가 찔리시고, 그가 상하셨으며,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워하였으며,
8절에서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9절에서는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고,
12절에서는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난은 사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고통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죄의 대가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부요와, 자유와, 평화와, 건강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나 같은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저와 여러분이 져야 될 그 죄의 짐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지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함께 따라하겠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예... 주님의 이 모든 고난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나의 허물, 나의 죄악, 교만, 혈기... 나의 더럽고 추한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우리와 모든 인간을 위하여... 고난과, 굴욕..., 멸시와 천대,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다 흘려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바로 나 때문임을 가슴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일류 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하여 학교에서도 늘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심한 흉터가 있어서 정말 못 봐줄 정도로 흉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어머니가 친구들 앞에... 특히 학교에 오는 것이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어머니가 딸이 하도 보고 싶어서....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서....딸이 다니는 대학에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딸은 어머니를 보고서도 말도 안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싫어서 어머니가 왔어도 모르는 척 합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딸이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사진을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진은 너무나도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딸이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젊었을 때에는 이렇게 예뻤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의 질문에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한번은 잠든 너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간 적이 있었단다. 잠깐 나갔다가 온다는 것이 그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집에 돌아 와 보니 그 사이에 집에 불이 났고 소방관들과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 큰 화재가 일어났단다. 그런데 나는 집안에서 잠자고 있는 너를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말리는 소방관들을 밀치고 방에 들어가서 너를 담요에 싸고 나오다가 이렇게 얼굴에 화상을 입었단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고, 이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수 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은혜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딸이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죄송하다고....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딸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 어머니같은 사람이 없다고, 자기 어머니는 자기를 구하려다가 저런 얼굴이 되었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자랑하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서 그 흉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아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새기고 이 놀라운 사랑... 복된 소식, 이 복음을 널리 전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놀라운 고난의 은총...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서 모든 질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대속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도대체 왜 주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왜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을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당하셨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4절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 보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파야 할 질병을 위해서 대신 아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할 채찍을 대신 맞아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아픔과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맞으시고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보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은 머리에 쓰신 가시관으로 찔려 열 곳, 스무 곳에서 피를 쏟으셨고, 또한 옆구리 에는 창으로 찔리셔서 온몸의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가시로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은 죽임을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은 끝내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 상하시므로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한분 뿐이신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만큼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고난을 나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아픔은 나를 위한 아픔이셨습니다. 주님의 찔리심은 나를 위한 찔리심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시며,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삶을 살수 있는줄을 믿으시기고 이 영생의 축복을 모두가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5절에 바로 우리를 위한 "영혼의 수고"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 이를 우리는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본문 11절에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속의 죽음은 자기 양들을 위한 죽음이요(요10:15),또한 친구를 위한 희생적 죽음입니다(요15:13).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유익(축복)하게 하였습니다(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신
1)첫 번째의 복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되게 하였습니다=====(골1:20).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원수가 없습니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두 번째 복은 나음(healing)입니다.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무서운 죄로부터 영혼을 치료하며, 육체적인 질병까지 치료하시는 길을 예수님께서 그의 수난을 통하여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요삼2).
진정 예수그리스도를 만난사람은 구원의 은총은 물론 온갖 질병에서까지도 치료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고난의 계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의 고난, 그의 찔림과 상함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요, 나의 가족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하여 우리도 이사야처럼, 헨델처럼, "당신의 찔림은 바로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당신의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바로 나에게 평화를 실어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맞은 채찍 때문에 나에겐 회복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괴로움 때문에 나에겐 즐거움이 왔고 예수님이 겪은 질고 때문에 나는 하나남으로부터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런 기도가 이번 사순절 기간에 저와 여러분에게도 되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위한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하여 우리도 이사야처럼, 헨델처럼, "당신의 찔림은 바로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당신의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바로 나에게 평화를 실어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맞은 채찍 때문에 나에겐 회복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괴로움 때문에 나에겐 즐거움이 왔고 예수님이 겪은 질고 때문에 나는 하나남으로부터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런 기도가 이번 사순절 기간에 저와 여러분에게도 되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예수님의 고난의 계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의 고난, 그의 찔림과 상함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요, 나의 가족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하여 우리도 이사야처럼, 헨델처럼, "당신의 찔림은 바로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당신의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바로 나에게 평화를 실어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맞은 채찍 때문에 나에겐 회복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괴로움 때문에 나에겐 즐거움이 왔고 예수님이 겪은 질고 때문에 나는 하나남으로부터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런 기도가 이번 사순절 기간에 저와 여러분에게도 되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