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소교인들은 해내었고 우리는 안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에 속한 신자들이라면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임을 은연중 자긍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가 1919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3,1운동 당시 절반 가량의 신자들이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발돋움 하게 된 배경에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관심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흔히 우리는“어제가 없는 오늘은 존재 할 수 없고, 오늘은 내일의 거울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제가 속한 교회와 총회의 내년도 주제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겔37:14)입니다.
본 교단을 배경으로 하는 어느 월간지 편집인은 교단의 내년도 주제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흥미로운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24년도 주제였던 치유에 대하여 바른 정리가 선행될 때 진정한 부흥을 언급할 수 있다는 취지의 논평입니다.
세상살이의 년수가 늘어갈수록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가 녹록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 처음 만나는 이에게서 교회 직분을 들어도 그러려니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겪어봐야 그이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상호간의 신뢰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원인은 다양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어쩌면 정직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인 또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지만 이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던 100여년 전에 믿었던 선배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사람들은 야소교인이라 칭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인의 수가 미미했던 1899년 전후에 있었던 신문 보도를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899년 3월 1일자 <대한그리스도인회보>라는 신문에 북도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받은 사람이“나는 야소교 있는 고을에 갈수 없다. 야소교 없는 저 영남 마을로 옮겨 달라”고 말합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할까보냐. 그러나 만약 그 관장이 백성의 재물을 뺴앗을 지경이면 이것은 용이하게 빼앗기지 않을 터이니 그 양반이 갈 수 없다는 것이 까닭인 듯...”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이만열 역사 학자의 시대 읽기, 월드뷰 인터뷰 중에서)
1899년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가 약 1200만명이었다 합니다.
그중 기독교인의 수는 약 1만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200명 가운데 한 사람이 세례교인이 있을까 말까한 시대였음에도 세상속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났음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선배 신앙인들의 신자됨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1920년도에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 조서에 담긴 내용이다.
살인 사건에는 증거가 없고 용의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는 여인만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야소교인, 즉 그리스도인이었다. 법정에서 판사는 그 여인의 증언만 가지고 피의자를 사건의 범인으로 인정해 사형을 언도한다.
판사는 일본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물증은 없지만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야소교 신자이므로 그의 말은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이 실화는<한국교회 초기 도덕성>이라는 연구 논문에 실린 내용이다.
(윤스의 창고 블로그,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운다는 것. 부분 인용)
오래전 감신대 이덕주 교수의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를 읽으며 깊은 감동과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들었던 의문 중 하나는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한다고 하는데 그분들은 믿는대로 살아내었는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교우와 내밀한 상담을 하려고 무인텔 주차장을 이용했다고 고발했던 분이, 증거불충분으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자 이번에는 출석하는 교회를 상대로 자신을 치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시대에 살면서 교단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유구무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인위적이고 반복적인 거짓 증언은 사탄의 앞잡이임을 방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요8:44)
그러기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9)>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