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06
1월17일[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연중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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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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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fxmoXld7F4
[수원교구 강유빈 도미니코(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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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는 아픈 동료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이 간단한 표현 안에 한 가련한 인생의 길고 고통스럽고 슬픈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깊어질 대로 깊어졌습니다. 오랜 병고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힘으로 걷기는커녕 몸도 일으키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보니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심각한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증세가 겹쳐 죽을 고생을 한적이 있습니다. 삶의 질이 그야말로 심각히 떨어지더군요. 평소 식은 죽 먹기던 샤워하는 일, 옷 입는 일, 걸어다니는 일이 언제나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 양손을 들어 올리는 일조차 버거워서 정말이지 우울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부터 화장실까지 불과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다녀오는데 10분이 더 걸렸습니다. 그때 저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고 다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병세가 심각해지다보니 돌아눕는 것조차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식사하는 일, 용변보는 일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버겁고 참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암담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그에게 하루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분 옆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그 어떤 불치병 환자이든 상관없이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난다는 데...
그러나 그는 사지가 마비되어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적같은 일이 그에게 벌어집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평소 그를 가엾이 여긴 네 사람이 그를 찾아옵니다.
네 사람은 즉석에서 그를 위한 간이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긴 막대기 두 개 사이에 천을 대고 묶었습니다. 들것 위에 환자를 눕힌 네 사람은 보조를 맞추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환자와 함께 먼길을 걸어온 네 사람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산 너머 산이라고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안팎은 그분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완장을 어깨에 차고 질서 유지를 하고 있던 사도들이 번호표를 나눠주었는데, 순번에 따르면 이박삼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습니다. 정문, 후문이 모두 봉쇄되었으니, 지붕 쪽을 공략하기로. 네 사람은 환자와 함께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유다인들 가옥의 지붕은 개폐식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공간의 지붕을 연 네 사람은 환자의 들것 네 귀퉁이에 긴 끈을 매달아 조심스럽게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한 그들의 기상천외한 방법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과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네 사람은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 강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네 의인이 지니고 있었던 아픈 동료 인간 존재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는 이웃을 어떻게 하면 치유시키고 구원으로 인도하고픈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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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Rhsp4WZs5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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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려는 노력이 은총을 받는 지름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항상 그렇게 한 일을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이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일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기 위해 매일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용서의 힘을 주심을 넘어서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도 주십니다. 용서는 마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고 일만 탈렌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일만 탈렌트가 생기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수백만 원을 탕감해주고 수조 원을 버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오랜 자신과의 싸움을 전제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성령의 힘으로 용서를 넘어서는 큰일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치고 이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존 프랜시스(John Francis)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한 후, 환경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터가 달린 교통수단 사용을 중단하고, 걷기를 통해 환경 보호를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갈등과 오해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싸우다가 결국 침묵하기로 합니다. 침묵은 용서를 위한 기초작업입니다. 그 침묵을 그는 무려 17년간을 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인간관계도 환경의 일종인데,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또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침묵하면서 전 미국을 횡단하며 환경학 박사학위까지 땄습니다. 그리고 UN에서 일하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모두를 용서하고 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존 프랜시스의 이러한 경험은 용서가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이러한 내면의 여정과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환경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전 세계에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하고 짧은 기도에 용서라는 작은 주제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의 양식인 성령께서 활동하게 하심을 알고는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용서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먼저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행동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지 못 할 일이 없는데, 성령을 얻는 방법에서 용서만큼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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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신부님 두 분이 왔습니다. 두 분 모두 ‘교구청’에서 함께 근무했었습니다. 한 분은 선교와 전례 담당 사목을 하였고, 다른 한 분은 직장인 사목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교육 담당 사목’을 했습니다. 2002년의 일이니, 어느덧 23년이 지났습니다. 40대 초반의 우리는 열정과 힘이 넘쳤습니다. 교회의 현실과 미래에 관해서 밤을 새워 토론했습니다. 우리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 성격 유형 검사를 받기도 했고, 강화도로 연수를 가기도 했습니다. 한 분은 그 뒤 2013년에 교구청에서 저와 함께 일했습니다. 저는 성소 국장으로 일했고, 신부님은 해외 선교 사목 국장으로 일했습니다. 공자께서는 “멀리 벗이 찾아와서 함께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죽마고우가 이 먼 곳까지 찾아주었으니 얼마나 기쁜가, 같이 밤새도록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눠야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중시하는 가치를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난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같은 동행자, 같은 길을 걷는 도반, 또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를 뜻합니다. 예전처럼 열정과 힘이 넘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미처 갖추지 못했던 덕과 온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지구장으로 사목하면서 교구장님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전시와 내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이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국회가 말을 듣지 않아서 조금 겁을 주려고 계엄을 선포했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비상계엄, 국민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비상계엄을 쉽게 선포되어서도 안 되고, 그런 비상계엄은 또 다는 헌법기관인 ‘국회’만이 해제를 결의할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선포한 지 3시간이 안 되어서 해제되었습니다. 헬기가 국회의 마당에 내렸고, 무장한 군인이 국회에 난입했습니다. 그럼에도 비상계엄이 해제될 수 있었던 것은 잘못된 비상계엄을 해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국회로 돌아온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진압 명령을 거부한 양심적인 군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탱크와 총구를 맨몸으로 막아선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계엄의 부당함을 당당하게 알린 언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은 이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사회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런 조직은 책임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신앙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삶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원칙입니다.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기에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는 희망의 불이 켜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원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도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풍 병자를 들것에 옮겨서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4명의 이웃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 이웃에 대한 배려를 보시고 비상계엄처럼 사람의 존엄을 침해했던 중풍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중풍이라는 비상계엄을 해제해 주셨습니다. 그 이웃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알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 이웃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풍 병자는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웃들은 중요한 일들이 있었지만 소중한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025년 1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결심한 것을 끝까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구급차를 타고, 신앙에 목마른 사람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안내하는 따뜻한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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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의 치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까닭은 그를 죄의 멍에에서 풀어 주는 것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병이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요한 9,2 참조)
몸이 마비되어 이전에 누리던 자유를 빼앗긴 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신의 병고를 조금은 동정해 주는 듯하면서도 죄인으로 낙인찍고 수군덕거리는 주변의 시선은 무시하려고 해도 점점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혐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을 단죄한 이웃과 세상을 향한 미움과 분노도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들것에 싣고 와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 예수님 앞에 이르게 한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 말씀과 행위로 당신께서는 신성 모독자로 낙인찍히시면서도 그를 해방시키시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되돌려주십니다.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구세주께 데려다주었고, 그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다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가족과 동료들, 새로 만나게 된 감사한 세상에 대한 구원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추억과 은총을 빼앗기지 말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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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12: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이 중풍 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예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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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3-1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이고, 동시에 “나는 너를 구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으라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죄를 용서받다.’는 ‘구원을 받다.’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 사도도 바로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이 말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과 ‘같은 말’이고, 여기서도 ‘용서’는 ‘구원’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즉 ‘사람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2) 5절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그들’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병자 자신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병자 자신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병자 자신이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남들이 아무리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 외에도 ‘간절한 희망’과 ‘회개’와 ‘신앙생활’을 모두 포함합니다.
3) 9절의 “어느 쪽이 더 쉬우냐?”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사람의 힘으로는 둘 다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중풍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즉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능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권한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증명하려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율법학자들의 생각과는 상관이 없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4)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군중 때문에’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는 것은(4절),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병자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건강해진 병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께 갈 때에는 군중에 막혀서 지붕의 구멍으로 갔는데, 병을 고친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위해서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었는데도, 군중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도 자비도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2절)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마음과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 그것은 복음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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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의 치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까닭은 그를 죄의 멍에에서 풀어 주는 것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병이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요한 9,2 참조)
몸이 마비되어 이전에 누리던 자유를 빼앗긴 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신의 병고를 조금은 동정해 주는 듯하면서도 죄인으로 낙인찍고 수군덕거리는 주변의 시선은 무시하려고 해도 점점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혐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을 단죄한 이웃과 세상을 향한 미움과 분노도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들것에 싣고 와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 예수님 앞에 이르게 한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 말씀과 행위로 당신께서는 신성 모독자로 낙인찍히시면서도 그를 해방시키시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되돌려주십니다.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구세주께 데려다주었고, 그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다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가족과 동료들, 새로 만나게 된 감사한 세상에 대한 구원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추억과 은총을 빼앗기지 말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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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치유 이야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중풍 병자와 그를 들것에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병자의 절실함을 표현합니다. 지붕을 벗겨서라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 치유를 받는 것 말고는 병을 고칠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유일하게 희망을 두었던, 예수님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믿었던 그들은 구원을 체험합니다.
반면에 다른 부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몇몇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신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최고 의회에서도 대사제는 예수님께서 신을 모독한다고 하여 사형으로 단죄합니다.(마르 14,64 참조)
복음은 이렇게 상반된 두 부류를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 자비를 구하고자 애쓰는 이들과, 자신들의 생각 안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이 모든 일에 감탄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는,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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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치유하려고 네 사람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의 지붕까지 뚫고 병자를 들것에 달아 주님께 내려보냅니다. 중풍 병자를 들것에 달아 내린 사람들이 그 중풍 병자의 친척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이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병자가 지붕의 구멍으로 주님께 도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성과 도움 덕분에 그 중풍 병자는 주님께 치유받고, 죄의 용서도 받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큰일을 해 나가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와 병으로 중풍 병자처럼 누워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 학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애덕으로 누군가를 구원으로 이끌어 자신 또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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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코 2,3-5참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제각기 무거운 들것 하나씩을 마음에 지니고 걸어갑니다. 그 마음의 들것에는 우리가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나 혹은 후회하는 과거가 누워있습니다. 때로는 지금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래의 걱정으로 중풍병자처럼 누워있기도 합니다.
스스로 풀기 힘든 마음의 중풍병자는 주님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군중이 장애물처럼 우리 앞을 가린다 할지라도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의 중풍병자를 '달아내려'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중풍병자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자의 처지에 있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중풍병자는 우리가 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치유해주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지금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위로하여 마음의 들것을 만들어 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무겁게 지니고 있는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나 상황 혹은 걱정되는 미래를 두 손 위에 상상하며 올려 봅니다.
두 손에 올려놓은 마음의 중풍병자에 대하여 주님께 구체적인 현실 상황을 말씀 드리십시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충분히 말씀드리십시오.
이제 두 손에 있는 중풍병자를 품으로 끌어 안으십시오. 그리고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오늘의 말씀을 정성껏 믿는 마음으로 주님께 아뢰어 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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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여행자가 마을 입구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묻습니다.
“이 마을 사정은 어떠합니까? 이곳 주민들은 어떤가요?”
노인은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다음날, 다른 여행자가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노인은 마찬가지로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인상을 쓰면서, “마을 전체가 끔찍했습니다. 하나같이 형편없는 사람이었고, 저한테 아주 못되게 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자기가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집니다. 즉, 긍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인 모습이 보이고, 부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부정적인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나’의 문제인데, 우리는 늘 ‘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향해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6)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율법 학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놀라운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죄의 용서와 질병의 치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시선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면서, 중풍 병자의 병을 치유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일이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감춰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일이 전혀 드러날 수 없는 법이지요. 오늘 복음의 놀라운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율법 학자가 아닌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덕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간직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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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마르코 2,1-12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오롯이 믿으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마음껏 희망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뜨겁게 사랑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가득히 빛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어엿이 거룩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한없이 자비로우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죽도록 살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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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는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믿음은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수고와 땀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 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기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인생 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중앙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글귀를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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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힘>
-“주님이 영원한 안식처이다”-
산대로 살고 산대로 죽습니다. 엄중하고 엄연한 진리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놀라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축적된 삶이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는, 251년에 태어나 356년까지, 즉105세까지 천수를 누렸던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안토니오의 생애”가 성 안토니오의 삶을 잘 소개합니다. 성인의 생애를 잠시 소개합니다.
‘3세기 중엽, 이집트 중부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안토니오는 부모가 돌아가자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자신과 누이에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만큼 남기고 가난한 이들과 나눕니다.
바로 다음 두 성서 말씀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그는 21살에 은둔자가 되어 가난과 겸손, 거룩함과 자기훈련의 모범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유혹을 물리치며 고향 인근에서 살다가 35세 산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성의 폐허로 이동해 무려 20년을 독수자로 살았고, 그동안 6개월마다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웠고 자신도 혼자 살면서 필요할 때만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엄격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활기차고 즐거운 삶을 살았고, 사람들은 그의 쾌활함으로 한눈에 그를 알아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배웠고 성인도 그들에게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60세 때, 종교적 박해 시기에는 순교를 바라며 악렉산드레아에 갔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과도 치열히 싸웠습니다. 이어 끝까지 사막에 은수자로 105세까지 사는 동안 병에 걸린적도 없었고 시력도 좋았으며 치아도 건강했습니다. 참으로 전설적인 믿음의 대가, 은수자들의 아버지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삶을 통해서도 하루하루 한결같은 하느님을 찾는 진리추구의 믿음의 삶이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무슬림 지도자와의 대화에서, 분열이 아닌 일치의 평화를 위해 더불어 노력하는 종교인들의 믿음의 자세를 환기시켰습니다. 교황님 말씀입니다.
“종교들은 평화의 가교들을 찾기 위해 더불어 일해야 한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하느님을 찾는 공부에 항구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공부하며 쌓은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지만, 공부해나갔던 자세만큼은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진다.”<다산>
“군자가 도리에 맞게 학문을 깊이 파고드는 까닭은 스스로 경험해 얻고자 함이다.”
살아온 대로 정직하게 새겨지는 삶의 나이테요, 세월의 풍화작용도 견뎌내는 삶에 새겨진 신망애의 나이테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한결같이 평생 하느님을 찾아 노력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 참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 90,1)
예수님께서도 안식처를 찾듯이 아버지와의 만남이 필요한 새벽마다 외딴곳을 찾아 머물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처에 들어가는데 믿음이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의 믿음이 좋은 동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처임을 믿음의 눈으로 알아봤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주님을 찾으십시오. 멀리 밖에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주님 함께 하시는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의 안식처입니다. 그러니 안식처를 찾아 엉뚱한 밖에서 헤매지 마십시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는 참된 안식처임은 다음 주님의 초대 말씀이 입증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참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님은 중풍병자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눈물겨운 믿음의 노력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합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어 곧장 주님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육신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느님의 권능이 참된 안식처 예수님 말씀을 통해 그대로 발휘되는 틍쾌한 장면입니다. 혼자서의 치유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 치유의 구원입니다. 동료들 믿음 덕분에 치유의 구원을 받은 중풍병자요, 중풍병자와 더불어 동료들도 치유의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좌우간 이분들은 평생 주님의 치유의 구원 체험을 잊지 못했을 것이며, 끊임없이 믿음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죄의 용서로 영혼이 치유되자 저절로 육신의 치유가 뒤따릅니다. 정말 죄의 용서로 영혼치유가, 영혼건강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이 복음 장면을 대할 때 마다 생각나는 다음의 미사경문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혼자의 믿음은 약하나 교회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우리 약한 믿음도 더불어 주님의 교회공동체 믿음에 뿌리내릴 때 강한 믿음이 됩니다. 새삼 교회 공동체의 믿음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믿음 좋은 동료들 덕분에 치유받은 중풍병자처럼, 우리 역시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고 영육의 치유와 구원을 받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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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결합되어있는 공동체>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다른 사람 넷이 들것에 실어 지붕까지 뚫어가며 주님께 데려가 치유받게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주님께 용서의 권한이 있는지 권한 논쟁으로 번지는 얘기입니다.
구약 때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 죄의 결과, 그러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믿고, 그래서 죄의 치유는 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라고 믿는데 주님께서 용서받았다고 하며 치유하시니 그들에게는 독성죄로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히브리서나 복음 모두 믿음이건 용서건 용서에 의한 치유건 공동체적인 거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오늘 치유는 합동 작전으로 이루어지는데 합동 믿음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도 치유 받고는 싶었지만, 그 믿음이 반신반의 상태였는데 이웃들의 믿음이 그를 설득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설득에 중풍 병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자의 부족한 믿음이 이웃의 확고한 믿음에 결합됨으로써 치유가 이루어진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는 그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복음 말씀을 들었지만, 불신자들은 복음을 귀여겨들은 신자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않아 결국 복음 말씀이 구원과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공동체 또는 믿음의 공동체란 어떤 것입니까?
개인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 공동체의 믿음과 결합되어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 구원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라면 치유도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나의 치유를 너의 들것에 맡기고 너의 치유를 위해 내가 들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용서가 오로지 하느님의 권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만 꼭 예수 그리스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도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이 지상 교회에 용서의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용서가 하늘에 이르러야 하고, 우리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와 결합됨으로써
완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기도 가르침에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는 정반대이지요.
권한 문제를 떠나서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같아야 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늦잠 자기도 했고, 다른 준비할 것들도 많아 전의 강론을 올렸습니다.
어쩌면 내일도 그럴지 모릅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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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2ㄷ)
<그들의 믿음!>
오늘 복음(마르2,1-12)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그 기적을 목격한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마르 2,12ㄷ)
그렇습니다. 기적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일,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로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5ㄴ.11)
그들의 믿음!
나의 작은 믿음! 너를 향해 있는 나의 작은 사랑! 너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나의 작은 마음! '이러한 믿음과 사랑과 마음들이 모아져서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충만한 곳이 하느님의 나라(天國)다.'라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 4,3;5,11)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안토니오 성인은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시면서,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을 본받아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멀리하고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도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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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 5)
가장 믿음직한
실천은 서로의
용서입니다.
용서는 주고받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용서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용서는 우리 마음을
되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용서로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용서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믿음으로 용서에
이르게 합니다.
용서로
아픈 역사가
치유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여 줌으로써
공동체를 살리십니다.
서로 용서하는 삶이
어리석은 우리 삶을
치유하는 복음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가장 뚜렷한 징표입니다.
용서라는 체험의
들것을 들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이 여정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받은 용서를
주어야 할
우리의 관계입니다.
참된 용서가
참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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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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