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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미래학의 상징, 그가 예측한 ‘정보사회’는 현실이 됐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정보기술 혁명과 디지털 시대를 예고했던 앨빈 토플러는 미래사회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탁월한 통찰력으로 시대의 흐름을 먼저 읽어낸 미래학자였다.
어떤 분야든 그 분야를 상징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철학이라면 칸트, 음악이라면 베토벤, 화가라면 고흐가 그들이다. 만일 분야가 미래학이라면 그 사람은 단연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1928~2016)다.
토플러는 <미래 충격>(1970), <제3의 물결(The Third Wave)>(1980), <권력 이동>(1990) 등 인류 미래를 예견하고 전망한 일련의 저작들을 발표함으로써 지구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다. 어느 집이든 서가에 토플러 책 한권 정도는 꽂혀 있을 정도로 그는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미래학자다.
정보사회를 다루는 사회과학 안에서 토플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인색하다. 그가 전문적 사회과학자라기보다 대중적인 저술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책들이 시민사회와 정부 정책 결정에 미쳐온 영향은 그 어떤 사회과학 저작들 못지않다. 그의 ‘제3의 물결론’은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론’, 마누엘 카스텔의 ‘네트워크사회론’과 함께 정보사회의 도래 및 진전을 선구적으로 분석한 문제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토플러의 미래학은 명암이 분명하다. 그 빛은 미래에 대한 통찰에 있다. 그가 선구적으로 주목하고 주조한 개념들인 정보시대, 프로슈머, 재택근무 등은 결국 현실이 됐다. 미래의 예지력에서 피터 드러커와 제러미 리프킨이 토플러에 필적했지만, 영향력에선 토플러가 앞섰다. 하지만 정보사회의 그늘에 그는 둔감했다. 감시체제, 정보 불평등, 포퓰리즘 등을 그가 주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와 대기업 컨설팅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이런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했다. 정보사회가 만개된 21세기 현실을 지켜볼 때,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이제 정보사회론의 고전적인 저작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제3의 물결과 정보사회의 도래
미래학자 토플러의 존재를 알린 것은 <미래 충격>이다. 이 책은 기술적 변화가 가져온 개인과 집단의 변동을 다룬다. 토플러는 기술발전을 현대사회 변동의 중핵적 엔진으로 파악하는 미래학의 분석틀을 예고한다. <제3의 물결>은 <미래 충격>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미래 충격>이 현대사회 변동의 과정을 주목한다면, <제3의 물결>은 그 변동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전망한다.
<제3의 물결>의 주요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제3의 물결에 대한 설명이다. 토플러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는 세 물결을 겪어 왔다. 첫 번째 물결이 1만년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이라면, 두 번째 물결은 300년 전에 일어난 산업혁명이다. 이제 인류는 지식정보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제3의 물결 속에 놓여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두 번째는 제3의 물결의 경제·사회·정치적 특징이다. 다양한 에너지원의 활용, 자원의 중심으로서의 과학기술 및 지식정보의 위상, 매스미디어의 탈대중화, 대규모 공장 생산 방식의 쇠퇴, 프로슈머의 출현, 사회의 중심적 단위로서의 가족의 재등장, 민족국가 역할의 축소, 초국적기업 및 지역자치단체의 부상 등은 제3의 물결의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이들 가운데 잘못 예견된 것들도 없지 않지만, 1980년대 이후 서구사회의 발전은 크게 보아 <제3의 물결>에서 제시된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 어떤 미래학자들의 예측보다도 토플러의 전망은 날카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 이동>은 미래의 변화를 누가 주도하는가를 분석한 책이다. 토플러는 권력의 원천이 물리적 힘과 경제적 화폐에서 컴퓨터로 상징되는 지식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이 지식을 담당하는 유식계급인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가 새로운 권력층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권력 이동>을 발표한 이후에도 그는 <부의 미래>(2006)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예측하는 저작들을 발표해 왔다.
■미래학의 빛과 그늘
미래학에 대해선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한편에선 토플러를 포함한 미래학자들이 당장 일어나고 또 일어날 것으로 확실시되는 변화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상이 미래학이 아니라 현재학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들의 분석과 전망이 과학의 외피를 걸친 사이비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한다. 특히 후자의 견해는 미래학이 자본주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포장해 현실의 모순과 위기를 은폐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고 비판한다.
물론 미래학에 낙관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제로성장, 환경위기, 자원고갈, 핵전쟁 등 미래를 비관적으로 조명한 연구들도 적지 않다. 21세기에 들어와 발표된 미래학 저작들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미래를 전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볼 때 <제3의 물결>을 비롯한 토플러의 저작들은 정보사회와 이와 연관된 세계화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상당한 설득력을 과시해 왔다. 세세한 나무들이 아니라 전체 숲의 관점에서 토플러의 전망은 대체로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토플러의 저작들은 ‘기술적 낙관주의’를 과도하게 부각시킨 약점을 갖고 있다. 기술적 낙관주의는 특히 근대 민주주의의 지반을 뒤흔들어 놓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감시체제와 포퓰리즘을 과소평가했다. 이 점에서 토플러의 전망은 정보사회의 그늘을 날카롭게 예견한 미셸 푸코의 사상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경제는 물론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지식과 정보다. 제4차 산업혁명에서 볼 수 있듯 정보사회의 속도는 더욱더 빨라지고 그 영향은 갈수록 넓고 깊어지고 있다. 토플러의 미덕은 지식정보 자체에 주목한 것을 넘어서 그것의 발전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고 전망한다는 데 있다. 정보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의 목록에 <제3의 물결>은 가장 앞자리에 놓인다.
■한국어판 저작은
<제3의 물결>은 최근까지 범우사·한국경제신문사 등 여러 출판사들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져 나왔다. <제3의 물결>을 읽는다면 토플러의 미래학 3부작으로 꼽히는 <미래 충격>과 <권력 이동>을 함께 살펴보는 것도 좋다. 두 책 역시 우리말로 번역됐다.
■리프킨·프리드먼·탭스콧, 정보사회와 연관된 세계화 분석 - 토플러의 ‘지적 후예’들
토플러가 저술가로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 시민사회라는 튼튼한 독자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이건 시민사회에는 ‘학문적 청중’과 ‘대중적 청중’이 공존한다. 미국은 학문적 청중과 대중적 청중이 모두 발전한 이례적인 나라다. 더욱이 영어로 발표되는 책들의 경우 국제어로서의 영어가 갖는 위상을 고려할 때 지구적 차원에서 행사하는 파급력이 매우 크다.
대중적 청중을 겨냥한 미래학자로서 토플러의 성공은 이후 적지 않은 지적 후예들을 등장시켰다. 제러미 리프킨, 돈 탭스콧, 토머스 프리드먼 등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토플러의 책처럼 이들의 책들 역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중적 청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제3의 물결>에서 다뤄진 정보사회와 이와 연관된 세계화를 분석함으로써 학문적 청중에게까지 작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리프킨의 대표 저작은 <노동의 종말>(1995)이다. 그는 이 저작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이 적지 않은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전락시키는 암울한 미래를 경고한다. 정보사회의 도래가 정신노동마저 기계로 대체시킴으로써 인류는 노동으로부터 추방되는 낯선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노동시간 단축과 제3부문 창출이다. <노동의 종말> 이외에 <엔트로피>, <소유의 종말>, <공감의 시대>, <한계비용 제로 사회> 등 리프킨의 책들은 발표될 때마다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탭스콧의 <디지털 네이티브>(2008)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 이 저작은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해 성인이 된 본격적인 디지털 세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서다. 나날이 진화를 거듭하는 디지털 시대와 디지털 세대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선사한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2005)는 세계화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제공하는 책이다. 국가와 기업을 넘어서 이제는 개인이 세계와 경쟁하는 시대가 시작됐다는 게 프리드먼의 메시지다.
오늘날 세계사회는 물론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이다. 우리 인류가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대전환의 문턱 위에 이미 올라서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제4차 산업혁명이 빠른 속도로 가시화되는 상황을 지켜볼 때 리프킨, 탭스콧, 프리드먼 등과 같은 이들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으로 보인다.